김해는 가야의 가짜 왕도로 밝혀졌다

가락국은 절강성 臨海郡(임해군)에,진주(晉州)는 대한민국 영토 보다 더 큰 땅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6/09 [08:34]

김해는 가야의 가짜 왕도로 밝혀졌다

가락국은 절강성 臨海郡(임해군)에,진주(晉州)는 대한민국 영토 보다 더 큰 땅
박병역 위원 | 입력 : 2007/06/09 [08:34]
 
[단독 보도 제10편]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가야의 김해경(金海京)은 양주(良州)에 속하고 진주(晋州)는 강주(康州)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良州(양주)와 강주(康州), 금주(金州)는 같은 지역에 위치한 진주(晋州)로 입증했습니다. 진주(晋州)는 대한민국 영토보다 더 큰 땅이며, 가야국 수로왕의 왕도 경남 김해는 가짜도읍지로 밝혀졌습니다.

1, 가야국은 경남 金海(김해)가 아니다.

 현행 국사의 가락국 역사는 [삼국사기의 지리]와 [삼국유사 -기이제2-가락국기]에 준하여 만들어졌다. 駕洛國記(가락국기)는 [고려 文宗(문종:1047-1082년) 재위 大康(대강)년 간에 金官知州事文人(금관지주사문인)이 편찬한 것이다. 지금 그 내용을 대략 싣는다.]

천지가 개벽된 이후 지구상에 나라는 있었으나 국호는 아직 없었다. 또한 임금과 臣下(신하)라는 君臣(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我刀干(아도간), 汝刀干(여도간), 彼刀干(피도간), 五刀干(오도간) 留水干(유수간) 留天干(유천간), 神天干(신천간), 五天干(오천간) 神鬼干(신귀간)등 9干(간)이 있었다. 이들의 酋長(추장)이 영토를 갖고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무릇 총 1백호에 7만5천명이 도읍을 이루어 山野(산야)에 살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만들어 곡식을 심어 먹었다.

당시 後漢(후한) 世祖(세조) 光武帝(광무제) 建武(건무) 18년 임인(서기 42) 3월 3일(계욕일:3월 삼짇날)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산봉우리가 마치 열 마리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에 龜旨(귀지)라 불렀다. 이곳은 항상 아주 특이한 기운이 감돌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민 대중 2, 3백 명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의 음성 같기도 하였으나 그 모습은 숨기고 음성 소리만 들려왔다.

九干(9간)등이 여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하니 나도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대답하기를 龜旨(귀지)입니다. 또 말하기를 황천상제(皇天上帝:하느님)께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으로 명하시어 이곳에 내려 왔으니 너희들은 산봉우리 흙을 퍼내면서 노래 부르기를 거북아 ~ 거북아 ~ 뭐하니, 거북아 ~ 거북아 ~ 뭐하니, 그 머리를 내밀어 보아라 만약에 나오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야 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은 기뻐하며 너희들을 맞이하여 함께 뛰며 놀게 될 것이니라.

九干(9간)등은 그의 말과 같이 감흥에 젖어 노래하며 춤을 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처다 보니 오로지 자주 빛 줄이 하늘에 드리워져 땅에 닿아있었다. 그 노끈의 줄을 살펴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를 열어 보니 둥근 해와 같은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놀라워 기뻐하며 백성들은 모두 엎드려 절하고 얼마 있다가 포대기에 싸안고 我刀干(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긴 걸상 위에 올려놓고 여러 사람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경과하고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이 다시 모여 그 금 상자를 열어보니 6개의 알이 화하여 어린 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그 용모가 매우 거룩하였다. 이에 평상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며 賀禮(하례)하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나 10여 일이 지나자 다 성장하여 깨우치고 신장이 九尺(9척)이나 되었다. 즉 신장은 殷(은)나라의 天乙(천을)과 같고 용안(龍顔:임금 얼굴)은 漢高祖(한고조)와 같이 눈섭이 팔자이고, 빛나는 눈의 체색은 唐(당고조)와 같고 겹으로 된 눈동자는 虞舜(우순)과 같았다.
그는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인간 세상에서 제일 처음 首長(수장)이 되었기에 이름을 首路(수로)라 하였다, 국호를 大駕洛(대가락)이라 칭하고 또는 伽耶國(가야국)이라 칭하였다, 즉 6가야 중에 한 나라가 [대가락국]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5가야의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5가야가 아니라 6가야 인 것이다.

대가락국의 위치는 동쪽에 黃山江(황산강:중국 안휘성)이 있고, 서남쪽에 滄海(창해)가 있고, 서북쪽에 地理山(지리산)이 있고, 동북쪽에 伽耶山(가야산)이 있고, 남쪽에 [  ]尾(미:마미(馬尾)가 있다. 수로왕은 임시로 궁전을 세우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이 되셔도 성품이 검소하여 지붕을 이은 이엉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도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43년) 봄 정월에 수로왕이 말하기를 짐은 京都(경도)를 설치하고자 한다. 하고는 이내 임금은 御駕(어가)를 타고 임시 궁전을 나와 남쪽의 新畓坪(신답평)으로 나아가 사방 山嶽(산악)을 바라보시더니 좌우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시었다.

김해 지역은 협소하지만 戮(륙)나무 잎과 같고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수려하고 奇異(기이)하여 가위 16羅漢(나한)들이 살만한 지리이구나.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어 7聖(성)이 살 만한 가장 합당한 지형이다. 이 땅에 의탁하여 국토를 개척하면 강역은 始終(시종) 더욱 융성할 것이니라. 이곳에 왕도를 설치하여 둘레에 1,500步(보)로 城(성)을 쌓아 羅城(나성)이라 하고 궁궐을 지어 宮禁殿(궁금전)이라 하고 모든 有司(유사)들이 살수 있는 家屋(가옥)을 지어 屋宇(옥우)라 하고 곡식 창고를 지어 虎庫倉(호고창)이라 하고, 공사의 품명을 글로 적어 명령을 내리시고 궁전으로 돌아 오셨다.

국내의 젊은 丁壯(장정)들과 전문직 工匠(공장) 인부들을 두루 징발하여 그 달 20일부터 공사를 시작하고 자금은 金陽(금양)에서 조달하여 3월 10일 勞役(노역)을 마쳤다, 그 궁궐과 屋舍(옥사)를 짓는 일도 농사일이 바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만들다 보니 얼마 경과 후 10월부터 시작하여 갑진(서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자를 잡아 辰(진)일 수로왕은 새로 지은 新畓坪(신답평)으로 궁궐을 옮겼다. 임금은 도리에 밝으시어 만 백성을 염려하시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은근히 근검절약에 대해 모범을 보이시며 업무를 보셨다. 이때 갑자기 琓夏國(완하국:아유타국) 含達王(함달왕)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脫解(탈해:신라 제 4대왕)라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건너 駕洛國(가락국)에 왔던 것이다. 그는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며 늘 기쁨에 차있었다.

탈해가 대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수로왕의 왕위를 빼앗고자 이 땅에 왔소" 수로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天命(천명)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將令安中國而綏下民:장령안중국이수하민> 장차 “中國(중국:중천천국 신라)”을 안정시켜 신하와 백성들이 편안히 살수 있도록 하려고 하는데 감히 天命(천명)을 위배하며 너에게 왕위를 넘겨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나라 국민들도 너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니라. 너는 나에게 부속되지 않겠는가?. 탈해가 말하기를 말로서 언쟁하는 것 보다 그대와 道術(도술)로서 겨루어 봅시다. 라고 하였다. 왕이 좋소이다. 잠깐 사이에 탈해는 화술로 매가 되니 왕도 화술로 독수리로 변하고 또 탈해가 참새로 변화하니 왕은 새매로 변화되었다. 이들의 변화술은 시간이 조금도 걸리지 않았다. 탈해는 본래의 몸으로 돌아오자 왕 역시 다시 본래의 모습이 되었다.

탈해는 엎드려 항복하며 말하기를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는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聖人(성인)은 殺生(살생)을 금하고 惡(악)을 멀리하며 어지신 마음을 가지신 仁德(인덕)이며 내가 왕과 도술로 경쟁하여 왕위를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하직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와 이웃 나라 郊外(교외)의 渡頭(도두)에 도착하여 장차 “중조선(중 천축국)”에서 타고 온 船泊(선박:배)를 타고 水道(수도)로 돌아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는 동안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급히 水軍(수군)  500척을 출발시켜 추적하니 탈해는 鷄林(계림:신라)의 국경으로 급히 달아나기에 수군 통수자는 돌아 왔다. [여기에 기제한 기사는 신라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建武(건무) 24년 무신(48년) 7월 27일 九干(9간)등은 조정회의 때 왕을 배알하고 말하기를 대왕님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아직 구하지 못하셨으니 청컨데 신들 집의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선택하여 궁궐로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朕(짐)은 천명을 받아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라. 짐이 배우자를 만들어 왕후로 삼는 것도 역시 天命(천명)이 있을 것이니라, 卿(경)들은 아무 염려 말라, 드디어 수로왕은 留天干(유천간)에게 명하여 輕舟(경주: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타고 望山島(망산도)에 도착하여 서서 기다리게 하고 神鬼干(신귀간)에게 명하여 就乘岾(취승첩:배에서 내리는 곳)으로 가게 하였더니 갑자기 서남쪽 바다에서 붉은 빛의 돛단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오고 있었다. 留天(유천)등은 먼저 望山島(망산도:경남 사천시 선구동)에서 횃불을 올리니 즉시 바다를 건너 육지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뛰어내려 달려오므로 神鬼干(신귀간)은 바라보다가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셨다.

곧 九干(9간)등을 파견하여 목련꽃으로 만든 노와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으며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로 모시려 하자 왕후가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을 평생에 보지도 못하여 모르는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 갈 수 있겠소 留天(유천)등이 돌아와 왕후의 말씀을 왕에게 전달하니 왕은 옳은 말이라 여겨 有司(유사)를 데리고 대궐 아래에 서남쪽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설치한 幔殿(만전)에서 기다렸다.

왕후는 望山島(망산도) 밖 浦津(포진:아진포구) 나루터에 뱃머리가 닿자 육지에 올라 쉬고는 高嶠山(고교산)에서 별도로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우산(于山) 신령에게 바쳤다.

그때 다른 지역에서 따라온 侍從(시종)은 媵(잉)이고 신하 두 사람의 이름은 申輔(신보)․趙匡(조광)이고 그들의 부인 두 사람 이름은 慕貞(모정), 慕良(모량)이라 하였다, 혹 모두 20여 가구가 함께 따라 왔다 하였다. 그때 가지고 온 금수능라(비단)의 衣裳疋段(의상필단)과 金銀珠玉(금은주옥)과 瓊玖(경구), 의복, 장난감, 그릇은 이루 기록 할 수 없이 많았다.

왕후는 걸어서 왕이 계신 곳과 점점 가까이 오자 왕은 왕후를 영접하고 같이 임시 궁에 들어와 媵臣(잉신)이하 衆人(중인)들은 계단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有司(유사)에게 명하여 인솔한 잉신 내외는 사람마다 각각 방 하나씩 주어 편안히 모시고 그 이하는 방 하나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모시도록 말씀하셨다.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蕙草(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로 채색된 자리에서 잠자게하고 비단 옷과 寶貨(보화) 까지 여러 종류로 많이 주고 군인들을 소집하여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잠자리에 드니 왕후는 조용한 목소리로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阿踰陁國(아유타국) 공주입니다. 姓(성)은 許(허)이고 이름은 黃玉(황옥)이라 하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 중에 父王(부왕)과 皇后(황후)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에 하나 같이 꼭 같은 꿈을 꾸었는데 황천상제(皇天上帝=하느님)을 뵈었느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元君(원군) 수로왕은 하느님이 내려 보내시어 大駕洛國(대가락국)의 보위에 올라 임금이 되게 하셨느니라, 그는 신령스러운 신선이며 성스러운 聖人(성인)이니라, 또한 나라를 새로 건국하였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卿(경)들의 공주를 보내어 그와 배필을 삼도록 하라. 하시고 말씀을 마치자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상제(여호와 하느님)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히 남아 있느니라.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찾아가거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오면서 하늘의 신선들이 즐겨 먹는 과일의 蟠桃(반도: 3년에 한번씩 열리는 복숭아:선도산)을 찾아서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龍顔(용안)을 가까이 뵙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출생하면서부터 성스러워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신하들이 나에게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소. 지금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한 일이요. 왕은 드디어 혼인을 하고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대낮을 지냈다. 이 일을 수행하고 배를 타고 돌아가는 뱃사공 15명 모두에게 양식으로 쌀 10섬과 베 30필씩 주어 본국(아유타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 왕은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잉신 부부도 수레를 타고 임금과 나란이 漢(한) 나라의 여러 물품을 수레에 싣고 서서히 대궐에 들어오니 시간이 正午(정오)가 되었다. 왕후는 中宮(중궁)에 거처하고 잉신 부부와 그에 따른 사람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살도록하고 나머지 따라온 사람들도 20여 칸이나 되는 賓館(빈관) 한 채를 주어 사람 인원수에 맞추어 區別(구별)하여 편안히 살게 마련해주고 날마다 물품을 풍족히 주어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품은 內庫(내고)에 보관해 두고 왕후가 四時(4시) 비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九干(9간)등은 庶務(서무)를 담당하는 관료장(長)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다 宵人(소인)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직분을 담당하는 직위와 맞지 않으니 직위가 아니다, 만약에 외부의 부족들이 듣는 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드디어 이름을 개편하여 我刀(아도)를 我躬(아궁)이라 하고 汝刀(여도)는 汝諧(여해)로 彼刀(피도)는 彼藏(피장)으로 五刀(오도)는 五常(오상)으로  留水(유수)는 留天(유천)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留功(유공), 留德(유덕), 神天(신천)은 神道(신도)로 개명하고, 五天(오천)은 五能(오능)으로, 神鬼(신귀)는 음은 바꾸지 않고 訓(훈)만 고쳐 臣貴(신귀)로 고쳤다.

鷄林(계림:신라)의 직책의식을 취하여 角干(각간), 阿叱干(아질간)의 직급에 干(간)을 두고 그 이하의 官僚(관료)는 周(주)나라 제도로 하고 儀禮(의례)는 漢(한)나라의 것으로 나누어 정하였다. 이렇게 옛것을 혁신하여 관직을 나누고 道理(도리)로 다스렸다. 이에 국가는 理致(이치)로 다스리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셨다. 그는 엄숙하거나 위엄하게 교화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정치는 위엄이 아니라 道理(도리)로 다스렸던 것이다.

더구나 왕은 왕후와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은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陽(양)에게 陰(음)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의 功德(공덕)은 塗山(도산)이 夏(하)를 날개처럼 돕고 唐(당)의 媛(원)이 嬌氏(교씨)를 부흥시킨 것과 같았다. 註: 塗山(도산) 씨의 딸이 夏(하) 나라의 禹王(우왕)에게 시집가 우왕을 도왔다. 唐媛(당원)은 堯(요)의 딸 娥皇(아황)과 女英(여영)을 말함 이는 舜(순)에게 시집가서 舜(순)의 후예인 嬌氏(교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居登公(거등공)을 낳았다. 靈帝(영제) 중평 6년 기사년 3월 1일 날 왕후가 돌아가시니 나이는 157세 이였다. 왕후가 돌아가시자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왕후는 龜旨峰(귀지봉) 동북 언덕에 장례하였다. 왕후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온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그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처음 공주가 바다를 건너 뱃머리가 닿은 渡頭村(도두촌)을 主浦村(주포촌)이라 하고, 능라 비단 바지를 벗은 高嶠山(고교산 : 高岡山(고강산)을 綾峴(능현)이라 하였다. 또 붉은 깃발을 달고 바다로 들어오셨다가 깃발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 하여 旗出邊(기출변)이라 하였다.

잉신과 泉府卿(천부경), 申輔(신보)와, 宗正監(종정감) 趙匡(조광)등은 금관국에 도착한 후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외 함께 들어온 사람들도 7,8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며 슬픔을 품고 살다 모두 다 죽고 舍賓館(사빈관)은 텅비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돌아가시자 元君(원군:수로왕)은 매일 베개를 의지하며 悲嘆(비탄)에 젖어 슬픈 노래를 많이 부르다 25년을 더 살고 서기 199년 己卯(기묘) 3월 23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158세 이시었다.

온 나라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듯 자기의 부모가 돌아가신 것보다 더 슬피 통곡하여 왕후가 돌아가실 때 보다 더욱 더 슬피 울었다. 대궐에서 艮方(간방) 平地(평지)에 殯宮(빈궁)을 세웠는데 높이가 한길이고 주위의 둘레가 300보이었다. 이곳에 장례를 지내고 이름을 首陵王廟(수능왕묘)라 하였다.

그의 아들 居登王(거등왕)으로부터 九代孫(9대손) 仇衡(구충)왕 까지 이 宗廟(종묘)에서 配享(배향)하고 매년 정월 3일과 7일 여름은 5월 5일 가을은 5일과 15일에 깨끗한 제물로 풍족히 마련하여 제사를 올려 대대로 제사는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제 30대 법민왕(문무왕)은 서기 661년 3월에 제정한 조서에서 말하기를 짐은 가야국 수로왕의 九代孫(9대손) 仇衝(衡)王(구충왕)이 신라에 항복해 올 때 데리고 오신 아들 世宗(세종)의 아들이 率友公(솔우공)의 아들 庶云匣干(서운갑간)의 딸 文明皇后(문명황후)께서 나를 낳으셨던 것이다. 고로 수로왕은 나에게는 15대 할아버지가 된다.

임금님께서 가락국을 개국하신 나라는 패망했으나 葬地(장지)와 사당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신라의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는 일만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멀리 떨어진 곳에 使者(사자)를 파견하여 유적지를 살피게 한 후 사당에서 가까운 上田(상전) 30경(頃)을 供營(공영)의 자원으로 하여 王位田(왕위전)이라 칭하고 신라 宗廟上(종묘상)에 기록하였다. 수로왕의 17대손 世級干(갱세급간)은 조정의 교지를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매년 때를 맞춰 술과 떡, 밥, 차 과실 등 여러 가지를 마련하여 해마다 끊어지지 않고 제사를 받들어 모셨다. 居登王(거등왕)이 정한 년내 5일 동안은 향과 촛불을 켜고 제사를 올렸다. 이 조서에 따라서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居登王(거등왕)이 즉위한 기묘(199년)에 便房(편방)을 설치하고 仇衝(구형왕)이 항복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은 사당에 제사하는 禮典(예전)은 변함없이 계속되었으나 구형왕이 가락국의 왕위를 잃고 돌아가시고 龍朔(용삭) 원년 신유(661년)의 60년 간은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간혹 빠뜨리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文武王(문무왕: 법민왕)이시여...!

선조님을 존경하고 받드는 것은 효중에 孝(효)요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계승시킨 것은 오직 정성이며 지극한 효행인 것이다. 신라 말년에 忠至匝干(충지잡간)이란 자가 있었다, 신라를 공격하여 金官高城(금관고성)을 쟁취하고 城主將軍(성주장군)이 되었다. 이리하여 英規(영규:후백제 견훤의 사위) 阿干(아간)이 장군을 위압하여 廟享(묘향)을 빼앗아 음탕한 마음으로 祭祀(제사)를 맡게 되었다.

단오(端午)날을 맞아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려하자 느닷없이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다. 이에 장군은 스스로 자신을 달래며 다행으로 생각하고 욕심에 聖王(성왕) 임금님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는 내가 眞影(진영)을 그림으로 그려서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공양하면 자기에게 보은의 혜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드디어 비단 三尺(삼척:세자)를 구입하여 眞影(진영)을 그려서 벽 위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고 정성을 다하여 기원하자 3일째 되는 날 眞影(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위에 괴어 거의 한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몹시 두려워하며 그린 眞影(진영)을 봉지에 싸 가지고 사당에서 나와 불태우고 즉시 수로왕의 眞孫(진손) 圭林(규림)을 불러 말하기를 어제 상서롭지 못한 불길한 일이 있었는데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겹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는 필시 사당의 威靈(위령)이 震怒(진노)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음탕한 마음을 품고 주야로 공양을 올렸고 대왕님의 자손도 아닌 英規(영규)도 이미 죽었으니 나는 몹시 괴이하고 두려워서 眞影(진영)을 불살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卿(경)은 왕의 眞孫(진손)이시니 옛날의 제례식에 의거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圭林(규림)이 대를 계승하여 제사를 받들다 88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 間元(간원) 卿(경)이 계속 제사를 받들었는데 端午日(단오일) 날 종묘에서 제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는 중에 英規(영규)의 아들 俊必(준필)이 또 發狂(발광)하여 종묘에 찾아와 間元(간원)이 제상을 차려놓고 제사가 이미 다 끝나는 마지막 三獻(삼헌)에 질병이 발병하여 포악한 행동을 하고 집에 돌아가 죽었다. 古人(고인)의 말씀에 음탕한 마음을 품고 받드는 제사는 복이 없고, 반대로 재앙을 받는다. 라고 하였다. 앞글은 英規(영규)이고 뒷 글은 俊必(준필)이다.

고인의 말씀이 이들 父子(부자)를 두고 한말인가? 또 도적 무리들이 종묘 안에 금옥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적들이 찾아와 도둑질하려고 하였다, 도둑이 처음 찾아 왔을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화살을 장착한 한 猛士(맹사)가 물품을 훔쳐 종묘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도적을 향하여 벽 4면에서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져 그 도적들 중에 7,8명이 화살에 맞아 죽고 살아남은 도적들은 황급히 달아났다.

며칠 후 재차 도적들이 찾아오자 이번에는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종묘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이니 살아남은 자들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고 자빠지면서 도망쳐 달아났다. 이러한 사유로 사람들은 陵園(능원) 안에는 반드시 神物(신물)이 보호하고 있다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기 199년 처음 종묘를 만들 때부터 지금 가락국 임금께서 즉위하신지 31년 째인 大康(대강) 2년 병진(1076년) 까지 무릇 878년 동안 아름답게 쌓아 올린 층계는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아름답게 심어 놓은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다. 더구나  벌여 놓은 수만은 옥 조각들도 부서진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 현지를 살펴본 辛替否(신체부)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하여 나라는 망하였으나 이대로 있을까? 封墳(봉분)도 파괴되지 않았으니 오직 이 가락국의 昔曾(석회)만 망하였구나 

 즉 辛替否(신체부)의 말은 미심적인 것이 있다. 수로왕의 종묘가 훼손되지 않은 것 보다 곧 신체부의 말은 아직도 남아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이 중에 수로왕을 思慕(사모)하며 즐기는 놀이가 있었다. 매년 7월 29일 날 이 향토의 사람들은 관원과 군졸들은 乘岾(승첩)에 올라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세월을 보내는 것을 東西送目(동서송목)이라 하였다.

건장한 人夫(인부)들을 좌우로 나누어 望山島(망산도)에서 말을 타고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육지에서 競走(경주)도하고 배를 띄워 뱃머리를 물위에 띄워 물에서 서로 북쪽의 指古浦(지고포) 까지 달리는 경쟁 놀이다. 이 놀이는 대개 옛 留天干(유천간)과, 神鬼干(신귀간)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알리는 것으로 옛 발자취인 것이다.

가락국이 멸망한 이후 대대로 그 칭호가 하나같지 않다, 신라 제 31대 政明王(정명왕:신문왕)이 즉위한 원년 신사(681년)에 金官京(금관경)이라 이름하고 太守(태수)를 두고 259년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통합한 이후는 대대로 臨海縣(임해현:절강성)이라 하고 排岸使(배안사)를 두고 48년 간 그대로 이름하다, 다음에 臨海郡(임해군 : 절강성) 혹은 金海府(김해부)라 하고 都護府(도호부)를 두고 27년 동안 그대로 불렀다. 또 고려에서 防禦使(방어사)를 두어 64년 동안 그대로 이름 하였다,

서기 991년 金海府(김해부) 量田使(양전사) 中大夫(중대부) 趙文善(조문선)이 省(성)의 명칭에 대한 신청서를 올릴적에 "首露王(수로왕) 陵廟(능묘)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15結(결)만 갖게하여 옛 관례대로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는 金海府(김해부)에 노역한 장정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신청서에서 말하였다.

趙文善(조문선)이 올린 省(성)의 명칭에 대한 申省狀(신성장)을 전달 받고 朝廷(조정)에서 수로왕 陵廟(능묘)에 대한 敎旨(교지)에서 말하기를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하여 聖君(성군)이 되시었고 가야국 왕위에 올라 나이 15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4년 기유(1069)에 양전척과 결의 산정법을 제정했다. 즉 6寸(촌)을 1分(분), 10分(분)을 1尺(척), 6尺(척)을 1步(보)로 하여, 結負(결부)의 적은 方(방) 33步(보)를 1結(결)로 정하였다. 우리나라는 자고로 三皇(삼황: 1,복희, 여호와, 신농, 2 복희 신농, 황제)님이 [朝鮮(조선)에 내려와 천하의 만백성을 다스린] 이후로 이분과 견줄만한 임금이 없었습니다. 수로왕이 돌아가신 후 선대부터 능묘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하고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量田使中大夫(양전사중대부) 趙文善(조문선)이 申省狀(신성장)을 또 올리자 朝廷(조정)에서 받아들이고 陵廟(능묘)의 不動産(부동산) 중에서 반은 鄕里(향리)에서 노역한 장정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양전사중대부 조문선은 조정의 교지를 받고 이내 그 반은 陵園(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金海府(김해부)에서 노역한 장정들에게 지급하여 주었다. 이 일을 끝마치자 몸이 몹시 피로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홀연히 7,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과 칼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너는 큰 죄를 지었으니 너의 목을 베어 죽여야겠다. 라고 하였다.

양전사 조문선은 귀신에게 형벌을 받는 꿈을 꾸고 몹시 놀라 깨어났으나 이내 병이 들었다.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는 병이라 물어 보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쳐 달아나다 關門(관문)에서 죽었다. 이러한 사유로 量田都帳(양전도장)에 그의 印(인: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후에 사신이 와서 量田都帳(양전도장)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 뿐이고 3결(結) 78부(負) 1속(束)이 부족하였다. 이에 각처에 사람을 鞠問(국문)하여 찾아내 內外官(내외관)에 보고하고 임금의 명령으로 그 부족한 것을 지급해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고금을 통하여 자주 일어나고 있으니 탄식할 뿐이다.

수로왕의 8대손 金銍王(김질왕)은 지극히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았다. 또한 일체법의 진리를 숭상하고 世祖(세조)와 始祖母(시조모) 허황후를 받들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자원을 마련하여 임진년 서기 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合婚(합혼)한 지역에 寺(절)을 창건하여 이름을 王后寺(왕후사)라 하고 使審量(사심량)을 파견하여 절 근처에 있는 平田(평전) 10결(結)을 三寶(삼보)의 공양 비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 왕후사를 창건하고부터 500년 후에 長遊寺(장유사)를 세웠는데 이 절에 헌납한 밭이 모두 합하여 300결이나 되었다. 이 長遊寺(장유사) 우측에 三剛(삼강)이 있고 王后寺(왕후사) 좌측 지역 동남쪽 내에 있다 하여 寺刹(사찰)을 없애고 莊舍(장사)를 지어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로 만들고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본문 중략> 

 ◆ [中朝累世, 東國分京. 鷄林先定, 駕洛後營.] 東國(동국:신라국)의 王京(왕경)은 여러 세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신라]는 鷄林(계림)에 먼저 도읍을 정하고 후에 수로왕의 가락국을  신라의 왕도가 된 후 여러 세대로 5京(5경) 제도를 실시했다.

가락국의 역대왕은 제1대 수로왕이고, 제 2대 居登王(거등왕)의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許王后(허왕후)이다. [중략] 제 10대 仇衡王(구형왕)은 김씨이며 서기 521년에 즉위하고 치세는 42년이다. 임오년 서기 562년 9월에 신라 제 24대 眞興王(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구형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대적했으나 저쪽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대적하여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同氣脫知爾叱今(동기 탈지이질금)을 파견하여 본국에 머물게 하고 왕자와 上孫(상손:장손) 卒支公(졸지공)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分叱水爾叱(분질수이질금)의 딸 桂花(계화)이고 아들 셋을 낳았다.

첫째 世宗角干(세종각간)이고 둘째 茂刀角干(무도각간)이고, 셋째 茂得角干(무득각간)이다. 開皇錄(개황록)에서 이르기를 서기 532년 신라에 항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논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구형왕은 임자년 서기 532년에 국토를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

즉 시조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임인년 서기 42년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532년) 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또 다른 사기록을 상고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元魏(원위) 保定(보정:북조 주 무제 연호) 2년은 임오(562년)에 해당된다, 곧 30년을 더하게 되면 총 520년이 된다. 삼국사기에서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기에 모두 기록해 둔다. 본문 끝.

2, 가락국은 절강성 臨海郡(임해군)에 있었다.

(삼국유사2권 -2기이-가락국기의 고찰)
[1], 大駕洛國(대가락국)의 위치는 동쪽에 黃山江(황산강:중국 안휘성)이 있고, 서남쪽에 滄海(창해)가 있고, 서북쪽에 地理山(지리산)이 있고, 동북쪽에 伽耶山(가야산)이 있고, 남쪽에 國尾(국미:가야국 남쪽에 馬尾(마미)가 있다.

[2], 왕후는 望山島(망산도) 밖 浦津(포진) 나루터에 뱃머리가 닿자 육지에 올라 잠시 쉬게하고 高嶠山(고교산)에서 별도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우산(于山) 신령에게 바쳤다. 

福建省(복건성) 복주시에서 15㎞ 떨어진 馬尾山(마미산)에 나성탑(羅星塔)이 있고, 우산(于山)의 별칭은 신선들이 거닐어 9선산(仙山)이라고 한다. 이 산은 옛날에 하씨(何氏) 형제 9명이 불로장생약을 만들어 선인이 되기 위해 수도 한 곳이라고 한다. 일제와 중국은 마미(馬尾)의 마(馬)자를 삭제했다. 조선과 프랑스의 마강 해전이 바로 이곳이다.

♦. 가야의 황산(黃山)은 안휘성 동쪽에 있었다. 

▲     © 박병역 위원
▲     ©박병역 위원


 중국 남부 안휘성(安徽省)의 동쪽, 양자강 이남에 위치한 황산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며 수로왕이 말한 것과 같이 가이 신선(神仙)이 거닐던 곳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72개 군봉의 절경은 경이로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황산은 중국 10대 명승지중의 하나이며 1990년 UN에 세계 자연과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임해전(臨海殿)은 절강성 임해현에 있습니다.

 [1]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臨海縣(임해현) 기록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라 제 21대 炤智麻立干(소지마립간) 15년(493년) 7월에 臨海(임해)와 長嶺(장령)에 두 鎭(진)을 설치하여 倭賊(왜적)을 방비하였다.  2, 신라 제 39대 昭聖王(소성왕) 2년 4월에 강풍이 몰아쳐 臨海殿(임해전)과 仁化殿(인화전)의 두 궁전의 門(문)이 무너졌다.

신라 제 39대 文聖王(문성왕) 9년(847년) 2월에 平議殿(평의전)과 臨海殿(임해전)의 두 궁전이 낡아서 수리를 하였다. 4, 신라 제 47대 憲安王(헌안왕) 4년(878년) 9월 臨海殿(임해전)에서 군신들과 주연회를 베풀었다. 5. [신라 제 56대 경순왕편] : 5년 봄 2월 태조는 50여 騎馬(기마)를 통솔하고 京畿(경기)에 도착하여 신라왕을 배알하고 百官(백관)들과 郊外(교외)에서 환영식을 거행하고 궁전으로 들어와 서로 상대국의 대신들과 극진한 예로서 정담을 나누었다. 미리 마련한 臨海殿(임해전)에서 酒宴會(주연회)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오르자 신라왕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반란과 온갖 재앙이 일어 날 뿐 아니라 견훤은 오만 방자한 不義(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는 초상집과 같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훌쩍 훌쩍 울며 눈물을 흘리자 좌우의 모든 재상들도 모두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려 태조는 수십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임금 수레를 타고 돌아가려고 하자 신라왕은 穴城(혈성:?) 까지 따라 나와서 전송하였다. 당시 고려 태조의 아우 裕廉(유렴)을 인질로 삼기 위해 御駕(어가)에 태워 따르게 하였다. (후략)

[6].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통합한 이후는 대대로 臨海縣(임해현)이라 하고 排岸使(배안사)를 두고 48년 간 그대로 이름하다, 다음에 臨海郡(임해군)을 혹은 金海府(김해부)라 하고 都護府(도호부)를 두고 27년 동안 그대로 불렀다. 또 고려에서 防禦使(방어사)를 두어 64년 동안 그대로 이름하였다, 

▲     © 박병역 위원




[2]. 가야의 김해경에 羅城(나성)이 있었다.

 가야의 김해경에 둘레가 1,500步(보)의 羅城(나성)이 있었다. 고려 태조는 처음 즉위하여 京都(경도) 羅城(라성)을 장정들과 인부 30만 4천 4백 명이 勞役(노역)하여 20년(937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羅城(라성)은 둘레가 2만9천7백보이고 누각이 1만3천개, 大門(대문)이 4개, 中門(중문)은 8개이고 小門(소문)이 13개이었다.

♦ 진주(晉州)는 대한민국 영토 보다 더 큰 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0권 경상도/진주목(晉州牧)]
진주(晋州)는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67리이고,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는 79리이다. 진주의 남쪽 [사천성(四川省)]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이고,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 66리이다. 진주는 서쪽으로 단성현(丹城縣) 경계까지 38리이고,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7리이고, 하동현(河東縣) 경계까지 67리이고,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94리이다. 진주는 북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45리이고, 의령현 경계까지는 40리이고, 단성현 경계까지 4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66리이다. 

♦.진주(晉州=금주(金州)의 교통

『고려사』에 따르면 전국 22도(道)로 나누고 교통은 525역(驛)이 있었는데, 금주도(金州道)에만 31역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진주(晉州) 남쪽 52리에 영창역(永昌驛)이 있고, 진주 남쪽 60리에 문화역(文和驛)이 있다. 진주에서 서쪽으로 10리에 평거역(平居驛)이 있고, 진주에서 서쪽 54리에 정수역(正守驛)이 있고, 진주 서쪽 1백 19리에 평사역(平沙驛)이 있다. 소남역(召南驛)과 소남진은 진주 서쪽에 있다. 진주(晉州) 북쪽 42리에 안간역(安間驛)이 있다. 진주 동쪽 59리에 부다역(富多驛)이 있다. 진주 남쪽 28리에 십수교(十水橋) 교량(다리)이 사천(泗川)성 경계에 있었다.

   ♦.【진주(晉州)지명의 변천사, 진주 연혁】

진주(晉州)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거타주)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다. 신라의 경덕왕은 강주(康州)로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정주(菁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는 또 강주(康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진주목(晉州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 진주(晉州)로 고쳐서 절도사를 두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은 8목(牧)의 하나로 정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 본조 태조 현비(顯妃)의 고향이기 때문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라 칭하였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진주목으로 고쳤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주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광종 22년(971)에 김해부(金海府)를 설치되었다가 성종14년(995) 영동도(경상도)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습니다. 목종 3년(100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현종 3년(1012)에 금주(金州)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습니다. 충선왕1년(1309)에 금주목(金州牧)이라 칭하다가, 충선왕 3년(1311)에 김해부로 고칩니다. [진주시청 진주연혁 참조 정리]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김해경(金海京)은 양주(良州:양산)에 속하고 진주(晋州)는 강주(康州)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良州(양주:양산)와 강주(康州:진주)는 같은 지역에 위치한 진주(晋州)로 밝혀졌습니다. 진주(晋州)의 교통은 31역(驛)이 속해 있었으며 현재 대한민국 영토보다도 더 넓고 큰 진주(晋州) 영역(領域)이었습니다.

서기 42년 가야시대부터 김해경(金海京)은 신라시대는 김해소경(金海小京), 정주(菁州)이고, 고려시대는 臨海郡(임해군) 혹은 金海府(김해부), 진주(晉州=금주(金州),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라 칭하고 금주목(金州牧)이라 칭하였다. 고려는 진주(晉州)를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조선시대는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라 칭하고, 일제식민지시대의 1918년 7월 13개면으로 통합되면서 김해면(金海面)이 되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 http://pluskorea.net/

 [제10편 김해는 가야의 가짜 왕도로 밝혀졌다]의 연재는 왜독(倭毒:거짓 가짜 국사지식)에서 벗어나는 해독제로서 반신반의(半信半疑)하던 독자님들도 고증(考證)에 의한 입증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죽을때까지 일본왕에게 충성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민족사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추종하며, 거짓 가짜 국사를 적극 고수(固守)하던 충견(忠犬:제자 강단사학자)들도 본 고증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며, 얼빠진 정부당국자(대통령,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도 망국적 치욕의 국사를 철폐하지 않고는 국민적 저항을 피할 수 없는 증서로서 더 이상 국민을 기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직 개인의 명예와 자손 만대로 부귀영달을 위해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한 이병도의 반민족적 범행을 확인하고, 이병도 한 개인에게 7천만 국민이 무려 62년간 깜쪽같이  속았다.는 사실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찌 울분을 참을 수 있겠는가?

다음은 [제11편 수로왕능과 허왕후능은 가짜 묘이다.] 가 연재됩니다. 

박 병 역  위원 프로필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선양회 대표


✦-->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인류의 기원역사
3.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4.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5.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6. 격암유록의 해설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세계적 대국 고조선
3.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4.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5. 인류의 기원역사
6. 1만년 한국사 절요(切要)
7. 격암유록의 해설
  • 진주 07/06/09 [22:28] 수정 | 삭제
  • 관심이 엄청나게 많은 내용인데...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겟어요.
    에를 들어 진주가 어떻다고 하는데...
    설명만 쫙 있고,,,주장하는 게 뭔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아요.
    좀 쉽게 설명해주소.
    진짜로,,,알고 있다고 무조건 써버리면, 역사를 알고 싶어도 짜증나서 안 알고싶어져요.
    위원님이 고생은 하셨는데...차라리 기자에게 말을 해서, 기자가 알기 쉽게 써보세요.
    목적이 알림이라면..그런 노력
    쯤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쉽게...알아듣게,,,내가 읽고,,,남에게 이해해 줄만하게 써 주소..
    도대체 무슨말인지 모르겠음...좀 알기 쉽게
  • 박병역 07/06/10 [00:03] 수정 | 삭제
  • 진주님에 대한 답변입니다

    [제9편]. 수로왕의 가야는 경남 김해가 아니다
    [고등 국사 51쪽] 가락국(금관가야)은 3세기경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다(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일대에 걸쳐 있었다. (중략) 현행 국사에서 경남 김해는 가야국의 도읍지로 명기돼 있고, 중, 고, 대학의 국사에서 가르치고 있으므로 오늘날 모든 한국인의 일반적 국사 상식입니다.

    [제10편 김해는 가야의 가짜 왕도로 밝혀졌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본문(원문)]의 진주(晋州)는
    대한민국 영토보다 더 큰 땅이었으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가야국 수로왕의 왕도를 경남 김해로 얽어 맞추었기 때문에 김해는 가짜 도읍지이다.

    1, 가야국은 경남 金海(김해)가 아니다.
    현행 국사의 가락국 역사는 [삼국사기의 지리]와 [삼국유사 -기이제2-가락국기]에 준하여 만들어졌다. 駕洛國記(가락국기)는 [고려 文宗(문종:1047-1082년) 재위 大康(대강)년 간에 金官知州事文人(금관지주사문인)이 편찬한 것이다. 지금 그 내용을 대략 싣는다.]

    상기와 같이 필자가 자작한 글이 아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가야국은 김해에서 건국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고증서(입증서)도 없이 알기 쉽게 풀이하면 소설과 같아서
    독자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원문을 싣고 있습니다.

    필명 진주님은 그렇게 질문하지 말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이 어려운 부분을 지적해서
    질문에 주시면 성의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강주환 07/06/10 [08:33] 수정 | 삭제
  • 우리 역사에 왜 여호와가 등장하는가 여호와는 이스라엘쪽 귀신으로 알고고있다 황천상제 란에 여호와를 기입 했는지똑바로 해주기바란다 의도적으로 써놓은겄이 아닌가
  • 박병역 07/06/10 [09:57] 수정 | 삭제

  • 강주환...! 종교와 역사를 혼돈하고 종교인이 민감하기 때문에
    차후 연재를 대비해 살짝 넣었더니 님이 질문을 하시니 간략히 답변합니다.

    => 이스라엘 민족은 조선의 제후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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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국의 여호와 상제(하느님)와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며, 천주교(기독교)의 창시자 모세(BC1,360~1,240)와 朝鮮(조선) 백성으로 계약을 맺으므로서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상제와 모세와의 계약을 후세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여호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選擇) 받은 선민(選民)으로 믿고 있으나 여호와 상제는 “이스라엘 민족을 조선의 후국(侯國)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은 조선의 제후국입니다.

    => 동서양이 다 같이 “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했습니다.
    동서양(東西洋)의 모든 종교계에서 다 같이 [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했으나
    수 천년 동안 그 누구도 하느님의 정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카토릭교의 천주는 도교의 옥황상제와 같은 하느님이다
    1582년 이탈리아의 귀족 출신 마테요 리치(Matteo Ricci:利瑪竇(이마두) 신부는 카토릭을 전도하기 위해 중국의 마카오에 왔다. 그는 중국에서 예수회를 설립하고, 포교 활동을 하면서 그가 하느님으로 숭배한 [여호와 천주(天主)]님이 중국의 역대제왕들이 즉위 할 때 祭天壇(제천단)에서 제사를 올리며 숭배하고 있었던 “여호와 삼신 상제”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즉 도교(道敎)에서 신앙하던 [옥황상제(玉皇上帝)=상제(上帝)=하느님]이 천주교에서 숭배한 여호와 천주(天主)와 똑 같은 하느님이란 사실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만 마테오리치는 오직 일체 모든 만물은 하느님이 창조한 것으로 굳게 믿고 신앙하고 있었으나 도교는 오직 하나의 一氣(1기)에서 시작하여 천상과 지상을 왕래하며 일체 만물이 생성소멸 된다. 는 도교(道敎)의 음양(陰陽) 오행(五行)설을 마태오리치는 강력히 부정하고 天主實義(천주실의)와 交友論(교우론) 등 많은 저서를 통해 종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테오 신부는 누대(樓臺)나 가옥들은 저절로 세워질 수 없으며 언제나 목수들의 손에 의해 완성된다. 이점을 이해한다면 천지는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창조하신 천주가 반드시 계심을 인식할 수 있다. 천주가 없으면 만물은 존재할 수 없다. 고 주장했습니다.


    즉 동서양이 다 같이 우주의 주제자를 하느님이라 부르며 숭배하고 있으나 각 나라의 문자가 다르고 또 종교마다 최고 주제자의 하느님 이름을 각각 다른 칭호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한자 문명권의 동양은 우주의 주재자를 하느님, 옥황상제, 삼신, 칠성, 칠성여래, 북극대제로 숭배해왔고, 서양 문명권의 기독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이슬람교의 무슬림인들은 [하느님을 알라]로 부르며 숭배하며,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주제자 하느님은 곧 [여호와 옥황상제]입니다.

    때가 왔다. 때가 왔다.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세상에 밝혀질 때가 당도했습니다.
    진실로 우리나라는 태고적부터 오직 여호와 옥황상제(삼신, 하느님)를 숭배한 제사장(祭祀長)의 나라입니다. 매년 국왕이 친히 제천단(祭天壇:원구단)에서 여호와 옥황상제(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종교의 교황청(敎皇廳)입니다. 중국과 한국에 지금도 태호복희와 여호와 삼신 옥황상제의 사당(祠堂:칠성각, 삼신각)이 많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천주교(기독교)의 종교인들은 여호와 하느님이 남자로 인식하고 하느님 아버지로 부르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우주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남녀성(男女性)이 있겠느냐 하며, 강력히 항변하며 하느님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中性)으로 인식하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보통 종교인들은 인류 부모국과 종교 원천국의 우리 역사는 외면하고 이스라엘 역사서의 성경만 깊이 탐독하므로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편협한 식견을 갖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느님은 신앙적 절대자이기 전에 지상에서의 행적이 분명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동방의 청제 태호복희 황제와 여호와 옥황상제는 부부로서 인류의 시조(始祖)이며, 신인(神人)이며, 곧 사람입니다. 필자는 어느 한 종교를 신앙하는 종교인이 아니며, 역사를 탐구하는 보통사람으로서 오직 역사적 진실을 세상에 밝힐 뿐입니다.


    본 연재는 반드시 “열린 마음”으로 탐독해야 인류의 기원 역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은 물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에 편협한 사람은 납득하지 못하고 부정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탐독한다면 오히려 새로운 종교적 역사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그릇된 종교관을 불식시키고 올바른 종교관을 갖고 신앙심이 더욱 돈독하리라 감히 말 할 수 있습니다

    5월 25일 연재된
    신라왕은 제사장이며, 교황(敎皇)이다. 참조바랍니다.
    여호와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패, 소상, 영정을 만나보세요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 [http://pluskorea.net/]본 고증(考證)은 세상에 처음으로 밝혀지는 전대미문의 세계적 톱 뉴-스 이며, 세계사적, 종교적, 일대 변혁이 일어날 것이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 종교로 인한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탄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황천상제(皇天上帝)]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차후 [3황5제의 역사적 진실]의 제목으로 상세히 연재될 것입니다.



  • 백중근 07/06/10 [12:27] 수정 | 삭제
  • 간도에 살고있는 중국동포입니다. 중국의 역사왜곡에 분노합니다. 배달민족 부흥을
    위하여 뭐든지 하고싶습니다. 한국에 계시는 분들께 가르침 부탁합니다. 메일로 연락
    주세요. 주소는 aren2002@hanmail.net
  • 한얼원 07/06/10 [14:57] 수정 | 삭제
  • 먼저 한국인 보다 도 멀리 중국에서 고국의 장래를 염려하시며,
    민족의식이 더욱 투철하신 중국동포 백중근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대한민국의 현행 국사]는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시대에 한국인을 일본 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제와 중국이 공모(共謀)하여 [사대주의사상의 식민지 근성]을 심기위해 만든 “망국적 치욕의 역사”입니다.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 넷] 본 연재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이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침략자의 손으로 만들어 준 “망국적 치욕의 현행국사”에 대한 7천만 한국인과 재외 동포의 국민적 심판입니다. 또한 汚辱(오욕)의 역사를 깨끗이 씻기 위한“일제청산의 제 1호 심판”이며, 대한민국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한 국가적 중대사안의 일대사건(一大事件)입니다.

    멀리 이국 땅에 계시는 백중근님은 본 연재를 탐독하시고
    즉시 일제의 왜독(사대주의사상의 식민지 근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셨으나

    무려 62년 동안 왜독(거짓 가짜 국사지식)이 뇌리 깊숙히 각인되어
    참과 거짓의 역사도 판별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고질병 치유가 가장 어렵습니다.

    국내외의 저명하신 여러 선생님들과 차차 궁리해서
    전 세계인이 깜짝 놀라는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한얼원/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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