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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대제국 고구려..' 사실인가?

민족정기 말살?.. 박노자씨의 망발 "고구려는 정말 제국이었나"

편집부 | 기사입력 2008/01/28 [15:53]

'아시아의 대제국 고구려..' 사실인가?

민족정기 말살?.. 박노자씨의 망발 "고구려는 정말 제국이었나"

편집부 | 입력 : 2008/01/28 [15:53]

▲ 고대 문헌들과 고고학적 유물들에 근거하여 고구려의 직간접 지배권이 미친 최대 광역도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할 역사를 열등감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왜곡한다는 것은 그 어떠한 범죄보다도 파렴치하고 비열하며, 결과적으로 자신들 스스로가 무덤을 파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고대문헌들과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보면 본래 동서양 문명의 모태민족인 동방족은 그 터전인 고인돌 문명의 중심지 한반도에서 발원하여 만주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 동방족 문명을 개척하고 전파하였습니다. 그리스.이집트.히브리.인더스 문명 등 서양문명의 근원이 되는 슈메르문명 역시 고대 한국인들이 건설했으며, 아메리카의 인디언 문명 역시 고대 우리 한국인들이 건설했다는 것은 언어.체형.풍습의 동일성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증명되었고, 유전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동방족의 위대한 역사를 열등감에 사로 잡힌 비양심적인 백인들이나 지금의 유태인들과 같은 백인 혼혈족들이 왜곡축소하려는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단군조선의 직계 후손으로서 다물정신을 계승한 고구려 역시 이러한 동방족의 후손으로 한반도와 가까운 만주를 터전으로 삼고 동북 아시아는 물론이요, 유라시아 대륙의 직간접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터키(돌궐)가 고구려를 형제국가라고 하는 것이며, 단군조선에서 기원['한단고기'기록에 의하면 제4대 오사구 단군천자의 동생은 오사달입니다. 오사구 단군은 즉위하면서, 동생 휘하에 군사,주민들을 딸려서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의 칸으로 임명]하는 몽고(리)의 징기즈칸이 고구려의 후손['몽골비사'와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몽골의 칭기즈칸을 배출한 보르키킨 부족은 북만주의 흑룡강에서 기원했으나,  이후 기후변화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바이칼주변에서 성장했다] 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민족을 네크워크적으로 연결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지배권을 유지한 고구려의 힘이였습니다.
 
따라서 고대 동방족이 서진하여 개척한 슈메르에서 발원한 유대민족의 유태인 출신으로 한국국적자인 박노자가 '소제국'운운하는 식의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은 쥐나의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논리라고 보여지며, 교수라는 자가 고대문헌들에 대한 조사만 해도 드러날 일을 가지고 왜곡하려는 이러한 자들은 일제 식민사관세력들과 함께 국적을 박탈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국적을 부여한 대한민국 정부 또한 민족 정체성이 결여된 정부로써 민족사 정립에 대한 직무유기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사 편찬위원회'는 민족사관 학자들로 구성하여 올바른 국사 교과서를 제작해야 하고, '국사교육'에 최우선해야 국민과 민족의 기운이 되살아 나고 민족정기와 국가기강이 바로 서게 됩니다. 그리고 쥐나와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남북한 역사학자들이 정부차원에서 공동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또한 추측성내지는 감정을 지나치게 앞세운 나머지 객관성을 결여한 극단적인 국수주의적인 역사인식 또한 청산되야 합니다. 역사인식이란 명확히 객관성을 확보해야 누구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고대 문헌들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통하여 왜곡적인 내용들은 배제하고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에 있어 상호 동일성과 유사성을 보이는 문헌적 내용들을 객관적 자료로 취합하여 역사를 정리함이 객관성를 확보할 수 있고, 한중일 역사논쟁에서도 승리하고 바른 민족사를 정립하는 지름길이라고 봅니다. 

 

예컨대, 당시 고구려의 지배권이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토문제와 관련하여....
 
1.기록상의 고구려 영토

①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영락 8년 영락태제(광개토대제)가 토곡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토곡은 토곡혼을 말하는데 토곡혼은 티베트에 있던 국가였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저 멀리 티베트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서경보 박사에 의하면, 치우천황께서 티벳에 있는 장당경에 도읍하여 물경 800년 동안 왕국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또, 티벳 지방을 여행하여 이를 확인했다고 발표한 바가 있다.


②중국 역사책 위서
중국의 역사책인 위서를 보면
"398년 북위의 수도 였던 업에 고구려인 46만명과 기술자 10만명이 가득하므로 왕이 이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도읍을 평성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북위의 수도였던 업(오늘날 태원)에 고구려인 56만명이 있었다는 것과 북위 조정이 이들을 두려워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정벌하여 영토를 산서성 이남까지 확대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북위는 고구려 출신이 왕이 된 나라이며, 장수왕의 장례식때도 고구려를 향하여 북위왕이 삼배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위는 고구려를 부모국으로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21대 황제 문자호태열제 때 신라인을 복건성 천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문자호태열제 때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므로 신라인을 이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인을 중국 최남단인 복건성 천주(홍콩 근처)에 이주시켰다는 것은 적어도 고구려가 이 지역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푸젠 성 [Fujian, 진마 지구, 복건성-홍콩지점]


2.고고학 상에 의한 고구려의 영토

①덕흥리 고분 벽화
북한 평남 대안시에 가면 덕흥리 고분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의 주인공은 유주자사 진으로 광개토대왕 때 활약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벼슬인 유주자사에 유의해야 합니다.
유주는 오늘날 중국 북경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인데 고구려 고분의 주인공이 유주자사라는 것은 고구려가 이미 북경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지요

②아프가니스탄의 아프라시압 벽화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아프라시압 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를 보면 고구려 사신이 그러져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적어도 이 지역을 영토로 확보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가 이 지역까지 진출했다면 소설 광개토대제는 소설의 상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 1. 고구리(高句麗) 최대영역은 동북아시아 전역이었다 ! >

# 서화(西華) 동쪽을 다스렸다는 기록과 반도를 통치했다는 기록들 #

지금까지 고구리(高句麗)영토는 만주와 반도 북부에 국한하고 있으나 이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반도가 고구리영역이였음을 나타내는 유적과 유물

① 경남경주의 황남대총에서 영락(永樂 : 광개토대왕연호)이 새겨진 항아리
② 창녕진흥왕 비문에서 碑利城(비리성)
③ 중원고구리비(碑)에서 고리대왕상왕(高麗大王相王)
④ 한강이남의 석촌고분, 안동의 방형묘, 경주의 방형묘는 즙안의 고구리(高句麗)고분과 흡사하다.
⑤ 평남 대안시 대흥리에서 발굴된 진(鎭)묘비
⑥ 평안도청에 있는 평양성벽각자
⑦ 태천의 고구리성벽각자(高句麗城壁刻字) 등

반도 전역에서 고구리 흔적을 찾을 수 있고
기록으로는
- 삼국사기의 간(干 : 환도성간, 마립간 : 丸都城干, 麻立干),
- 삼국유사의 마립간("한"음"간"), 구간(麻立韓, 九干) 등이 있다.

㉯ 서화(西華)(중국 하남성)의 동쪽에서부터 고구리 영역임을 나타내는 기록



<==허난 성 [Henan, 하남성]
<==산시 성 (산서성) [Shanxi, 산서성]
<==안후이 성 [Anhui, 안휘성]

① 고구리,맥제 강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였다. (최치원전)
② 섭라(涉羅 : 안휘성)를 고구리가 맥제에게 빼앗겼다.(위서,북사,삼국사기)
③ 항성(項城 : 하남성)을 맥제가 고구리와 함께 앗으려 하였다
. (신구당서, 삼국사기)
④ 태원(太原 : 산서성)을 모본왕 2년(49년)에 평정하였다 (후한서,삼국사기)
⑤ 광녕(廣 ), 代(내)가 광개토대왕시대, 고구리지(高句麗地)이다. (진(鎭)묘비)
⑥ 신성(新城 : 銀山 : 은산)에서 당과 고구리가 전투를 하였다 (신구당서, 삼국사기)
⑦ 선비(鮮卑)는 BC9 년부터 고구리민(高句麗民)이다. (삼국사기의 유리왕, 신구당서의 가한신(可汗神))
⑧ 5세기 이전 사로신라는 고구리, 맥제(百濟)에 속하여 있었다 (북사)


위와같이 고구리의 최대영역은
- 서화(西華) 중심의 남쪽 월(越)에서 부터
- 섭(흡과 동음: ), 태원, 광녕(太原, 廣 )으로 이어지는 선과
- 선비의 영역을 포함하였고,
- 동으로는 반도의 경주까지 아시아 전역이 高句麗의 영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고구리의 후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 있으니
- 반도의 코리아(고리:高麗),
- 몽고(蒙古 : 몽고리 : 蒙高麗),
- 위구르(爲溝 ),
- 黎(리)등은
고구리의 후예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고구리의 최대영토는
- 고조선(古朝鮮)시대의 영토이며
- 구리(九黎)시대의 영역인 것이니
기록이 많은 시대 고구리를 명확히 밝혀서 동이(東夷)의 유구한 역사를 바르게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한 고구리(高句麗)의 영역>

- BC 30년 행인국(行人國)을 병합
-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병합
- BC 9년 선비(鮮卑)를 병합
- 14년 양맥(梁貊)을 병합, 한고구리현(漢高句麗縣)병합
- 22년 부여(夫餘)를 병합(동부여)
- 26년 개마국, 구다국(蓋馬國, 句茶國)을 병합
- 32년 낙랑왕국(樂浪王國)을 병합 (반도와 만주로 진출)
- 37년 낙랑군(樂浪郡)을 병합 중원으로 진출
-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평정
- 56년 동옥저(東沃沮) 병합(동으로 창해(滄海), 남으로 살수(薩水)=하북성의 중북부지역)
- 72년 조나(燥那) 병합
- 74년 주나(朱那) 병합
- 121년 遼隊(요대), 新昌(신창)에서 전투
- 146년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에서 전투
- 169년 현도태수와 부산(富山)을 평정
- 242년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을 평정
- 300년 (낙랑대방(樂浪帶方)이 강회(江淮) 사로신라에 귀속)
- 302년 현토군(玄 郡)을 평정

- 385년 용성(龍城)을 평정
- 391년 남으로 맥제(百濟)를 북으로 계단(契丹)을
- 468년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동신라 ?)
- 475년 맥제(百濟)의 한성(漢城)을 함락(요의 동쪽에)
- 494년 신라와 살수(薩水)에서전투(맥제가 지원)
- 503년 동신라(東新羅)독립(요하의 동쪽)
- 504년 이전 섭라(涉羅 : 안휘성)을 맥제에게 병합
- 550년 맥제가 도살, 금현등 두 성을 공격하니 그 틈에 新羅(서신라)가 고구리의 두성을 빼앗음 (서신라의 광복운동(?))
- 631년 동신라와의 국경에 장성을 구축(동북의 부여성에서 동남의 해(海)까지)
- 645년 당과과 고구리 전투지명 용도, 은산, 신성, 고대인성, 건안, 개모성, 백암성, 안시성(甬道, 銀山, 新城, 古大人城, 建安, 蓋牟城 白巖城 安市城)
- 647년 신성, 석성, 적리성(新城 石城, 積利城)에서 전투
- 668년 고구려역사 九百年( BC239-AD668년)


<주(周),진(秦),한(漢)의 전통을 이은 한족(漢族)기록에서 고구리 영역 >

㉠ 후한서 (後漢書)

- 49년 한(漢)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右北平(우북평), 漁陽(어양), 上谷(상곡), 太原(태원)
- 121년 한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廣陽(광양), 漁陽(어양), 右北平(우북평),  (탁), 遼隊(요대), 新昌(신창)
- 146년 한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

㉡ 삼국지(三國志)

- 121년 전투지역을 요동(遼東)
- 146년 전투지역을 신안(新安), 사안평(西安平)
- 242년 (정시 : 政始 3년) 궁구서안평(宮寇西安平)

㉢ 위서(魏書 : 북사)
- 黃金出自夫餘珂則涉羅所産今夫餘爲勿古所逐涉羅百濟所幷
- 황금출자부여가칙섭라소산금부여위물고소축섭라백제소병
㉣ 송서(宋書 : 南齊西 : 남제서)
- 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驪王
- 영평이주제군사정동대장군고구려왕

㉤ 양서(梁書)
- 寶立以句驪王安爲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
- 보립이구려왕안위평주목봉요동대방이국왕

㉥ 구당서(舊唐書)
- 당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후황성, 은성, 건안, 안시, 박작성, 신성(后黃城, 銀城, 建安, 安市,泊灼城, 新城)

㉦옛 군(郡)의 거리 측정 기록

- 동평군 수장현(東平郡壽張縣 : 치우천자능)과 산양군거야현(山陽郡鉅野縣 : 치우 천자의 부인 견비능 : 蚩尤肩 능)은 모두 산동성에 있으며 거리는 약 80KM이내로 본다.



바로가기=>박노자씨의 망발 -고구려는 정말 제국이었나(펌)
오상태 08/01/29 [23:11] 수정 삭제  
  틀도 없이 자유롭게 썻으니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자유게시판 만들어 주세요.
꼭 회원가입해야만 글써야 하는 제약이 있어요.

의견 및 생각 이 있는데 우리 역사는 분명 잊혀지고 말살되어 그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란 것임은 틀림없다 생각합니다. 다만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이 오랜 시간 나라가 새로 새워짐을 거쳐 확실하게 찾을 길이 없다는 점. 융성했던 이땅의 역사를 찾는 길이라면 그나마 일제때 자신들은 원본 몇개라도 간직하고자 반듯히 비스므리한 관련책은 꼭 일본어딘가엔 잊지 않을까. 그외 주변 국들 멀리는 형제국이니 하는 그 어딘가에 남아 잇겠지요. 찾기도 힘들겟고 꼭꼭 숨겨논걸 줄리도 만무하고 . 하지만 찾아야 하고.

둘째 역사를 찾고 바로 세우는 동시에 해야 할일이 있습니다.
역사외곡과 은폐에는 우리자신의 어쩔수 없는 한계에 부딕칠수 밖에 없을 거 같은 생각이 듭니다. 굳이 말하지 않하도 알겟지만 그 후손도 우리의 형제고 이웃이고 이땅의 구성원인데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제거라도 하겠다는 건지. 그러고서는 그 부류라든가 그들의 두려움으로 더 은폐하고 이땅의 역사를 굿이 찾는 일은 더욱 힘들고 영원히 묻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부분은 묻어가던지 아니면 용서나 머그런 믿음을 주고 함께 이땅에 함께 함을 모색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동시에 반듯이 해야 할것은 이땅이 쭈그러 들고 중국은 많은땅을 갇게되었는지 그 원인을 반듯이 영구하여 우리 자신의 반성하고 되풀이 되지 않게 오랜시간 뿌리밖힌 곤조라는 가 먼지 모를 오랜시간 쪼르라들게 만드는 원인을 민족성내지 그게 먼지모르지만 고쳐나감을 동시에 하지 않는 다면 앞으로 땅찾기는 더더욱 어려워 질거라 생각합니다.

대체 원인이 머엿을 까요?

또한 우리나라 너무 땅이 좁습니다. 너무 안타갑습니다.
관리자 08/01/29 [23:34]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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