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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직은 700년인가 900년인가?..

"고구려의 건국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환단고기>는 너무도 정확.."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1/30 [15:46]

고구려 사직은 700년인가 900년인가?..

"고구려의 건국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환단고기>는 너무도 정확.."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1/30 [15:46]
현행 국사교과서를 보면, 고구려는 B.C37년 고주몽에 의해 건국되었고,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해 사직이 705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는 B.C57년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볼 때 고구려의 건국이 어떻게 신라보다 늦을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해 다들 한번쯤 의문을 가져보았으리라 생각된다. 현 국사교과서의 서술대로, 반도의 동남쪽 경상도에 위치한 신라가 어떻게 중국과 접해 있는 고구려보다 국가 형성이 빠를 수 있단 말인가? (주-사실은 신라도 고구려/백제와 마찬가지로 대륙에서 생긴 나라이다. 나중에 언급예정임)  

이는 국사교과서가 <삼국사기>의 기록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선생이 저술한 역사서로 현 사학계의 바이블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여러 곳에서 왜곡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여러 가지가 있으나 특히 고구려 건국 기록은 분명 김부식에 의해 조작되었음이 확실하다. 김부식은 신라계 고려인으로 조상인 신라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고구려의 건국을 왜곡했다고 본다.   

그리고 김부식은 국적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유교사상에 젖은 철저한 사대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삼국사기>는 대륙을 지배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무참히 없애 버렸다. 이는 호된 질책을 받아야 마땅하다. 혹자들은 “삼국시대의 역사서이니 그 전 역사인 단군조선을 언급 안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나 우선 필자는 “그건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다.

▲   드라마 주몽에서는 해모수를 주몽의 아버지로 고조선 유민의 의병장으로 그렸다. 해모수는 단군이었는데 의병장이라니? 게다가 주몽의 아버지라니? 엄청난 역사왜곡이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단군조선(진국)은 진한(진조선)/마한(막조선)/번한(번조선)으로 나뉘어 통치되다가, B.C425년 국호를‘대부여’로 바꾼다. 해모수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B.C 238년 47대 2,096년간의 사직을 5가에게 넘겨준다. 5가에 의한 6년간의 공화제가 끝나고 B.C232년 해모수를 단군이라 칭한다. 즉 단군조선(대부여)이 해모수에게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역사적으로는 북부여의 시작이라 한다.)

B.C108년에 고두막이란 영웅이 나타나 북부여와는 별개로 국호를 동명(東明)이라 하며 즉위한다. B.C87년 고두막이 북부여의 도읍을 빼앗으려 하자,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이 병으로 죽고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한다.

B.C 86년 결국 북부여가 고두막에게 항복하자 해부루는 격이 낮춰져 제후(왕)가 되어 가섭원으로 옮겨가고, 그 해부루로부터 시작되는 나라가 바로 가섭원부여(동부여)이다. 고두막은 국호를 북부여라 칭한다. 그래서 고두막은 북부여의 5세 단군이 되는 것이다. (주-고두막 이전에는 북부여란 국호를 쓴 기록이 없어 대부여란 국호를 그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북부여를 <삼국사기>에서 고의로 빼버린 것이 단군조선을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듣는 것이다. 그럼 혹자는 “북부여가 고구려와 무슨 상관이기에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 북부여는 삼국이 아니지 않느냐?”라고 반문한다. 필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단군조선이 북부여의 전신이듯이, 북부여는 고구려의 전신이다. 즉 단군조선은 진국-->대부여-->북부여-->고구려로 국호가 바뀌면서 이어진다. 그리고 북부여의 통치자도 단군조선과 마찬가지로 단군이라 불리었다. 즉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북부여의 7대 단군인 것이다. (단군조선 전체로는 54대 단군이셨다.)

그렇게 정통성이 이어졌기에 고구려가 이른 시기에 쉽게 넓은 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지, 만일 <삼국사기>나 <드라마 주몽>에서와 같이 주몽이 혼자서 조그만 단칸방에서 시작한 부족국가였다면 무슨 수로 단시간 내에 국가체재를 갖추고 그 넓은 땅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리 주몽이 슈퍼맨이라 했더라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 드라마 주몽에서의 B.C37년 등극장면. 
그리고 고구려는 신라보다 20년 늦게 B.C 37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다. 이는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싶다. 지금부터 고의 왜곡인지 아닌지 짚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시작하면서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성왕으로 성은 고요, 휘는 주몽이다”라고 써있다. 그리고는 부여왕 해부루의 이야기와 금와왕의 탄생설화가 나온다. 금와가 유화부인을 만나 주몽의 임신 사실을 듣는다. 유화는 금와에게 “자칭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를 만났는데, 그가 사욕을 채우고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몽이 태어나고 부여를 탈출해 엄사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B.C37년 22세에 고구려를 세우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서 “또는 졸본부여에 당도하니 왕이 아들이 없어 딸을 아내로 주고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라고 슬쩍 적어 놓았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 주몽에서 방영되어 시청자들이 잘 알고 있는 사항이다.

이게 뭐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그건 앞뒤가 안 맞으니 분명 잘못된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삼국사기보다 상세히 그리고 앞뒤가 맞게 고구려의 건국이 잘 적혀있다.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 부터 나온다. 단군 해모수는 부여의 시조이고, 임술(B.C239년, 진시황 8년) 4월 초 내려왔다. (중략)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불리지(고모수라고도 함)는 고진의 손자이다. 그리고 불리지가 유화를 만나 임인(B.C79년) 고주몽을 낳게 한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 가섭원(주-동부여)에 살다가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는데 마침 부여왕(북부여 6대 고무서)이 후사가 없어 주몽이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라고 적혀 있다.

▲  소서노의 아버지는 드라마에서의 연타발이 아니고 북부여 6대 단군 고무서였다.
 
또 <대변경>을 인용해 “우리나라(고구려)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라 했으며,  <환단고기 북부여기>에는 “계해(B.C58년) 주몽이 단제(檀帝)의 사위가 되었다가 23세에 즉위하였다.”라 되어있다. (주-고무서의 따님은 바로 그 유명한 소서노이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편>에는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맨 끝에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해모수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 가섭원부여기>에 따르면,  을미(B.C86년) 해부루에 의해 나라가 건국되고, 갑진(B.C77년) 아들이 없던 왕에게 금와가 나타나고, 계유(B.C48년)에 해부루가 죽고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오른다. 주몽은 가섭원부여(동부여)에서 태어나 살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임술(B.C59년)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나라를 건국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   해모수와 고주몽으로 이어지는 부여의 가계도. <환단고기>의 내용이다.
 
위와 같이 <삼국사기>와 <환단고기>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면 고구려 건국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서 부여라 함은 곧 ‘북부여’를 말한 것이고, <삼국사기>에서 부여라 함은 ‘동부여’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최초 부여는 하나였으나 나중에 2개가 된다. 그런데 김부식은 대부여(단군조선)의 적장자인 북부여를 언급 안하고, 대신 방계인 동부여를 부여로 언급해 고구려 시조를 엮으려 했다. 즉 부여가 하나 뿐인 것으로 조작하여 고구려의 진실을 숨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부여는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했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맥을 짜를 의도가 있었던 김부식은 방계인 동부여를 부여라고 내세운 것이다. 즉 고구려가 단군조선과 아무 관련없이 독자적으로 생겨난 국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내용 중에 북부여라는 단어가 수차례 나옴으로서 북부여의 존재 사실을 김부식이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 입증된다. 결국 고구려의 건국을 조작하려다 보니 북부여를 부정해야 했고, 북부여를 부정하려다 보니 결국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단하게라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이 더해져 민족사의 맥을 송두리째 짤라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학자로서의 양심의 가책이 있었던지 북부여와 관계되는 건국 이야기를 “또는 졸본부여에 당도하니 왕이 아들이 없어 딸을 아내로 주고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라고  슬쩍 언급만 하고 지나간다. 이는 북부여와 고주몽의 진실에 대해 김부식이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의 고려석학들이 어찌 북부여에 대해 몰랐을 리가 있는가?  

독자들은 “아니 어떻게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의 내용을 감히 조작이라 단언하며, 사학계에서 위서(?)라고 인정한 <환단고기>의 내용이 진실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지적을 할 수 있다. 그 질문의 해답은 유물로는 광개토태왕 비문이 있고,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당서>가 있다.  

무릇 나라의 사서기록이 서로 다를 때에는, 다른 나라의 사서를 참고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이 통례이나 결정적인 유물이 있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 유물이 바로 광개토태왕 비문으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기가 잘못되었고, <환단고기>의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리고 우뚝 서있는 것이다.  

(광개토태왕 비문)
"옛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에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여랑으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 (중략) 남으로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의 홀본서쪽 (중략) 이어 17세(世)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왕이라 했다.”(이하 생략) 


비문에 분명히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라 했고, <환단고기>의 내용대로 엄리대수가 나오고 홀본이 나오고(홀본은 졸본과 같음), 이어 17세를 전하여로 되어 있다. 광개토태왕은 추모왕(주몽)으로부터 12세손으로 19대왕이다. 그런데 비문에는 어떻게 17세라 한 것일까? 17세손이라 한 것은 고구려 12세와 북부여 5세를 합친 것이다. 즉 북부여와 고구려는 원래 같은 나라로, 북부여라는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분이 고주몽성제(聖帝)로 봐야 역사적으로 맞는 것이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서 1세 해모수단군-->2세 모수리단군-->3세 고해사단군-->4세 고우루단군과 (5대)고두막단군-->5세(6대) 고무서(일명 소해모수)단군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개인적으로 주몽은 불리지의 아들이므로 해모수의 고손자로 고무서와 항렬이 같다. 그러나 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어 뒤를 이어 왕이 되므로 17세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증거로는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인 <당서>가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에 보면 당나라 신하 가언충이 당 고종에게 보고하는 대목에서 ”고리비기(高麗泌記)에 의하면 ‘고구려는 900년이 채 못 되어 80세의 대장에게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하였으니 고씨(高氏)가 한(漢)의 시대로부터 나라를 지녀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 80세이다.“라고 적고 있다. 같은 내용이 <당서>에도 있다.

즉 고구려의 사직을 북부여를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부여가 B.C 239년 건국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것이 A.D 668년이니 합계 239년+668년 = 907년이 고구려의 사직이 되는 것이다. (또는 해모수가 단군이 된 B.C 232년으로 계산하면 딱 900년임)
김부식선생 스스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건국 내용(주몽)과 마지막 내용(보장왕)을 상반되게 적음으로서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   동부여 2대 금와왕과 3대 대소. 고주몽과 누가 라이벌이었을까?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동명성왕과 주몽은 동일인으로 적고 있으나, <환단고기>에는 동명성왕은 북부여 5대 고두막단군이라고 다른 인물로 적고 있다. 게다가 김부식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 주몽이 B.C 19년 나이 40에 죽었다고 적고 있으나, 실제로는 60세에 승하한 걸로 봐야 한다. 신라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늦춰 주몽의 출생과 나이를 조작하려다보니 동명성왕까지 고주몽으로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주몽’에서도 <삼국사기>처럼 금와왕이 주몽의 아버지뻘로 나오나, 실제로는 주몽과 금와왕의 시대가 거의 같다고 봐야 한다. 즉 주몽은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와의 태자자리 다툼이 아니라, 금와왕자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동부여를 탈출한 것으로 봐야 맞다고 본다.

그리고 주몽의 고구려 이전에 이미 중국 사서에 고구려, 고리, 구리, 고구리, 고려, 하구리, 색리, 색려 등이 등장하고 고구려라는 지명이 사서에 나타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맨 마지막에 “(전략)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라고 정답을 알려주고 있다. 지명인  ‘고구려’를  국호로 쓴 것은 해모수가 먼저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된다.

한 나라의 사서기록이 서로 다를 때에는, 다른 나라의 사서를 참고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이 통례이나 결정적인 유물이 있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 유물이란 다름아닌 바로 광개토태왕 비문이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기가 잘못되었고, <환단고기>의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리고 우뚝 서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환단고기>는 너무도 정확하게 우리의 상고사를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기존 강단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환단고기>의 내용에는 지금까지 강단사학계의 이론을 다 뒤집어야 하는 ‘역사의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이고, 자신들의 자리지킴을 위해서는 그 진실이 밝혀지기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다음은  “고구려는 왕국인가 제국인가?”로 따져보는 <환단고기의 진실>입니다.
윤복현 08/01/30 [18:29] 수정 삭제  
  [고구려의 건국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는 너무도 정확하게 우리의 상고사를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기존 강단사학계는 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의 내용에는 지금까지 강단사학계의 이론을 다 뒤집어야 하는 ‘역사의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이고, 자신들의 자리지킴을 위해서는 그 진실이 밝혀지기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짝을 맞추어 보면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동이족에 열등감을 느낀 쥐나족의 역사왜곡과 쥐나 사대주의에 물든 김부식 같은 사학자들과 일제 식민사관의 망국적인 역사왜곡은 결국 역사적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 선생님 고구려사에 대한 명확한 정리 잘 보았습니다.
주성치 08/01/30 [23:49] 수정 삭제  
  일반인이던 학자던 누구던 간에 우린 어디서부터 어떻게 얼마나 바뀌고 사라진지 모르기때문에 한국이라는 이땅의 나라의 숙명적으로 반듯이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땅의 역사의 흔적과 함께 한명한명이 전세계를 다니며 느꼇던 언어나 지명 등 어? 이런거 우리나라랑 비슷하네? 라고 느낀 단어나 머 그런거 작은 거부터 시작하면 종교의 금서처럼 어딘가 우리의 고대의 흔적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느데.. ps 간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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