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고구려, 서西와 남南으로 최대 영토는?

현재 학생들의 52%는 교과서의 현행 국사를 믿지 않고 있다는..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3/04 [12:13]

고구려, 서西와 남南으로 최대 영토는?

현재 학생들의 52%는 교과서의 현행 국사를 믿지 않고 있다는..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3/04 [12:13]
고구려의 핵심강역(수도권)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내몽고 지방이었고, 동쪽으로는 한반도와 만주가 그 영토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도 현 압록강변 집안 지역이 아니라, 하북성 북경 인근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전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과학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현 압록강변 집안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아니라 대전 현충원과 같이 선조들의 영혼을 모시는 일종의 신성한 소도지역이라 할 수 있다. 집안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피라미드가 산재되어 있는 협소한 산상(山上)도시라 대제국 고구려의 수도가 입지적으로 될 수 없는 곳이다.

현 사학계의 이론은 15km2에 불과한 집안의 평편한 곳을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에 의해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 광개토태왕 비가 집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집안을 고구려의 수도로 비정했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나 우리 사학계는 일본 학자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사학계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한 현 집안 지도. 대제국의 수도(국내성)의 크기가 겨우 15Km2?
 
하북성에 수도를 둔 고구려는 남쪽으로는 어디까지 갔으며, 서쪽으로는 최대 어디까지 진출했을까? 이는 900년 대제국 고구려의 최대 강역을 밝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선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기록으로 고구려의 서쪽과 남쪽 진출을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는 6대 대조대왕 때에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위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한단고기>에 보면 안시성, 요동성, 석성, 건안성, 건흥성, 풍성, 한성, 옥전보, 택성, 요택 등이 나오는데 이 중 가장 남쪽에 있었던 성은 택성으로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있다 했고, 요택은 황하구(黃河口) 북안 왼쪽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나머지는 전부 하북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초기 고구려의 강역은 황하를 경계로 서쪽은 중국과, 남으로는 백제와 경계했다고 보면 된다. 

이후 11대 동천왕 때는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이 있어 고구려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며, 14대 봉상왕 때는 부왕 서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한다. 16대 고국원왕(소열제) 때는 연왕 모용황에 의해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와 왕비가 사로잡히는 치욕을 당했고, 나중에 고국원왕 자신도 백제 근초고왕과의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이 때가 고구려가 가장 위축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전성기 때 남쪽으로는 어디까지?

이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차츰 국력을 회복한 고구려는 19대 광개토태왕이 즉위하면서 그 전성기가 도래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이 위대한 정복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별로 없다. 물론 당시 중원은 5호16국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어 중원에서는 고구려를 견제할만한 그 어떤 세력도 없었고 그나마 백제가 유일한 적수였다. 여하튼 <삼국사기>에서 광개토태왕에 대한 전쟁 기록은 아래와 같다.

1년 7월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성을 빼앗고, 북으로 거란을 쳤고, 10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해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11년 후연의 숙군성을 치니 평주자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13년 후연을 침범했다. 그리고는 정벌 기록이 없다.

그리고 17년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어 종족(宗族)의 정의를 나누니 북연의 왕이 답례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북연은 고구려가 중국 대륙에 세운 전초국가였던 것 같다. 이런 기록들로 어떻게 우리는 광개토태왕을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장수왕은 63년 3만 군사로 백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이고 팔천의 포로를 잡았다가 유일하고, 나머지는 온통 중국에게 조공했다는 기록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의 개로왕은 하수(河水 :황하)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이르렀다고 되어있다. 여기서의 숭산은 중국의 하남성 숭산을 가르키는 말이고 실제로 숭산까지 황하를 따라 제방이 아직도 남아있다. 21대 문자명왕 때의 기록도 온통 중국으로부터 책봉 받고 승진한 기록 외에는 정복 전쟁의 기록이 별로 없다.
 
▲  고구려 전성기 때의 영토. 대륙 동부 평야지대까지 다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러나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광개토태제가 바다를 건너 왜를 정벌한 기사가 나오고,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를 굴복시켜 모두에게 조공을 끊임없이 받았고, 거란 평량(平凉: 감숙성 평량현)도 평정 굴복시켰고, 임나와 이왜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속해있던 3 가라(임나)가 영락 10년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로 통제되니 연정(聯政)이라 했는데, 고구려에 속하여 영락제의 명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태제에게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을 한 이후 고구려의 연방속국이 된 백제의 위치는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일식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현 산동성과 하남성 일부이고, 전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신라의 위치는 절강성과 강소성과 안휘성 일대였다.

왜의 위치는 신라의 아래로 복건성과 광동성의 대륙 남부와 대만 해남도 일대이므로 중국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는 전부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봐야 한다. 그런 이유로 19세기 후반에 광개토태왕 비를 입수한 일제는 비문을 훼손하고 조작하여 자신들 조상의 치부를 숨기고, 조선 침략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나일본부설을 허위로 날조하게 되는 것이다. 

신라는 개국 이래 왕이란 호칭 대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과 마립간으로 불리다, 22대 지증마립간 4년(503년)에 사로, 사라, 신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국호를 처음으로 신라로 통일하고, 23대 법흥왕 23년(536년) 비로소 처음으로 자체 연호인 건원(建元)를 사용한다.  신라는 최소한 고구려 전성기 때인 광개토태제(391년)부터 문자제(519년)까지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고구려의 통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쓴 문자호태열제 11년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고구려에 속해 나라의 강토가 더 커졌다라고 기록하였다. 제와 노는 산동성, 오는 양자강 하류 강소성 일대, 월은 그 아래인 절강성 일대이다. 또한 문자제 12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겼다. 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라고 적혀있다. 천주는 현 복건성 진강현이고, 주변에는 아직도 신라에 관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삼국사기>는 본기에서 고구려의 영토를 구체적으로는 언급 안했지만, 46권 최치원 열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100만으로 북쪽의 유, 연, 제, 노를 위협하고 남으로 오, 월을 침공하여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 수 황제의 멸망도 요동정벌에서 기인되었다.”라는 중국 기록을 인용하였다. 이 기록은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서쪽으로는 어디까지 갔을까?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나와 있는 최초의 서쪽 진출은 5대 모본왕 때로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태원은 현 산서성의 성도이다. 덕흥리 고분의 벽화에서 13 태수 중 한 명인 태원태수가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서성 태원은 초기 고구려의 서단(西端)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  모본왕의 진출로. 서남으로 산서성의 성도 태원까지 갔다. 덕흥리 고분에도 태원태수가 하례드리는 벽화가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24대 양원왕 8년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고,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장안성이 과연 현 중국의 섬서성 서안(西安)인지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강단사학계는 이 장안성을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건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대동강 평양으로 도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평양성(수도)은 요녕성 요양이었고,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사학 측에서는 이 장안성을 현 중국의 서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의 <고금지명대사전>을 찾아봐도 장안성은 한 곳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장안성 같이 수도를 나타내는 신성한 이름은 원래 다른 곳에다 함부로 쓸 수가 없으므로 장안성은 서안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양원왕 28년은 A.D 586년으로 수나라는 문제 4년으로 수도는 낙양이었다. 낙양은 장안보다 동쪽에 있다. 그리고 그 때 수문제와 고구려의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한단고기>에 보면,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 18년 온달장군을 보내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北周)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관(楡林關)은 지금 산서성의 경현의 동북에 있는 관문으로 중국의 장안(長安)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삼국사기 열전>에 있는데, 후주(後周)의 무제가 요동을 치니 온달이 선봉이 되어 싸워 이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알려져 있는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왔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고 허둥지둥 도망을 가고 고구려는 맹추격을 한다. <한단고기>에 나와 있기를, 세민(당태종)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연개소문은 양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다.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양자강 북쪽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    위는 온달장군의 유림관 진출로. 유림관은 장안성의 북방 관문. 아래는 연개소문의 당태종 추격로. 장안성에 입성해 당태종의 항복을 받는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에 모두 장안성에 대해 언급이 되어 있다. 장안성은 현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서안은 낙양(洛陽)과 더불어 중국 고대 역사의 심장이다. 그리고 서안 외곽에는 중국 정부가 쉬쉬하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피라미드 군(群)이 있다.
이 피라미드의 주인공은 한족(漢族)이 아니라 고조선이나 고구려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정부는 발굴 초기 이 피라미드들이 자기네 유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자 발굴을 중지했고 피라미드를 은폐하기 시작했다. 만일 이 피라미드가 정상적으로 공개 발굴된다면 서안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서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피라미드. 중국정부는 발굴 3일만에 이 피라미드는 동이족(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것으로 결론짓고 발굴을 중지하고 피라미드에 나무를 심어 은폐하기 시작했다.
 
▲   중국의 전통 경극의 한 장면. 4편의 경극에 당태종 항복 장면이 있다.
이렇듯 여러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가 서쪽으로는 장안성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의 전통 경극(京劇)에는 당태종이 어니하에 빠져 연개소문에게 항복하는 장면이 남아 있어 <한단고기>의 기록을 사실로 입증해 주고 있으며, 당태종이 도망하면서 남긴 수많은 전설은 그 이야기가 절대 허황되게 날조된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어니하는 여러 곳에 있으나 서안 근방에도 있다.  

장안에서 더 서쪽으로 갔을까?

신강성에 인접한 감숙성의 돈황(敦湟)은 석굴사원으로 유명한 곳인데, 그곳에 있는 벽화는 고구려 벽화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아 오랫동안 고구려와의 연관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 고구려 풍의 벽화들은 고구려인들이 와서 직접 그렸거나, 고구려와 같은 계열인 후삼한(後三韓)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연방대제국 고구려는 종족(宗族)으로서 이들과 분명 뭔가 밀접한 교류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돈황 석굴에서 발견된 벽화. 성벽이 고구려 양식인 치양식으로 되어 있어 고구려 성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후삼한의 일부는 중원의 서남쪽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며, 또 일부는 월지와 함께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마한이 초기에만 등장하고 뒤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월지족은 파미르고원을 넘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일대에서 대월지국으로 발전하며, 대월지국은 나중에 쿠샨왕조로 발전하여 남으로 인도의 북부에까지 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 지방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가림토 문자와 비슷한 것도 월지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피는 물보다 진하듯이 북연과 같은 종족(宗族)으로의 정의를 나누었다는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와 왜를 동족(同族)으로 감싸 안으며 각국을 연방제국의 일원으로 인정해 준 형님의 나라였다. 그런 고구려가 기록은 없지만 서역의 종족들과도 뭔가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돈황 석굴의 벽화는 뭔가 신비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적장자국(嫡長子國)으로 사직은 장장 900년이었고, 그 영토는 하북성 북부와 내몽고 지방을 핵심강역으로 하여 東으로 한반도와 만주 땅, 北으로는 몽고와 시베리아, 南으로는 중국 남부 광동성까지 대륙 동부 평야지대, 西로는 서안 내지는 최대 돈황 일대까지 진출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제국(The Greatest Empire)이었던 것이다. 

▲ 현행 국사교과서의 고구려 영토
이러한 대제국 고구려를 현 만주 땅과 한반도 북부라는 가두리 양식장에 가두어 놓고 고구려의 역사를 임의로 축소 왜곡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자기네 일개 지방정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동북공정을 펴게끔 빌미를 제공한 사학계는 반성해야 한다.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일식기록 분석과 덕흥리 고분의 발견으로 고구려의 강역이 백일하에 명백히 밝혀졌건만 아직도 억지주장을 하는 우리 사학계의 추잡한 행태를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가!!!

<한단고기>라는 민족의 성서가 이 땅에 나온 지 3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위서(僞書) 운운하며 인정 안하는 우리 사학계의 한심한 작태를 언제까지 두고 보아야 하는가!!! 
<한단고기> 없이 현 사학계의 엉터리 이론만으로 중국의 거대한 음모인 동북공정에 대항할 수 있다고 보는가!!!

▲  미국 역사교과서에 나와있는 삼국의 영토. 고구려와 중국의 경계가 압록강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미 미국의 교과서를 바꿨다.
이 나라는 많은 역사를 이미 상당부분 중국에게 빼앗겼고, 또 현재도 빼앗기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많이 빼앗길 것이다. 그러함에도 말도 안되는 엉터리 이론을 고수하며, 망국과 치욕의 국사교과서로 자라나는 학생들과 국민들의 민족정신과 얼을 스스로 말살하고 있는 우리 사학계 정말이지 반성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그간의 과오를 시인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위대한 역사의 진실을 찾는데 민족사학과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며 부탁드리는 바이다. 강단사학과 민족사학이 서로 협력하여 이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찾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으로부터 이 나라를 같이 지킬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제도권의 강단사학이 민족사학과 합심하지 못하고 현행 국사를 계속 그대로 고집하는 한, 이 나라는 역사의 진실을 영원히 되찾지 못하고 언젠가는 망국의 길로 갈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민족사학은 이 나라의 국사를 바꿀 제도적 힘이 없고, 기득권자인 강단사학은 국사를 바꿀만한 이론과 정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옛날과 같이 거짓이 통하지 않는 대명천지 인터넷 세상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강단사학계는 언젠가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학생들이나 국민들이 저절로 다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현재 학생들의 52%는 교과서의 현행 국사를 믿지 않고 있다는 조사보고가 있다. 이 퍼센테이지(%)는 해가 가면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 분석은 그 어떤 사서로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자랑한다. 박교수의 논문이 이 세상에 발표된 지 벌써 15년이 다되어 가건만 아직까지 단 한건의 반박자료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한단고기>의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준 박창범 교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가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을 대입해 삼국의 영역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이것에 대한 반대 의견은 아직까지 단 한건도 없었고 또 있을 수가 없다. 중국 25사에서 삼국의 자료를 발췌해도 같은 결과다.

다음은 ‘광개토태왕 비 일제가 옮겼을 가능성 크다’가 연재됩니다.  
윤복현 08/03/04 [12:59] 수정 삭제  
  [특히 중국의 전통 경극(京劇)에는 당태종이 어니하에 빠져 연개소문에게 항복하는 장면이 남아 있어 의 기록을 사실로 입증해 주고 있으며, 당태종이 도망하면서 남긴 수많은 전설은 그 이야기가 절대 허황되게 날조된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어니하는 여러 곳에 있으나 서안 근방에도 있다...고구려는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적장자국(嫡長子國)으로 사직은 장장 900년이었고, 그 영토는 하북성 북부와 내몽고 지방을 핵심강역으로 하여 東으로 한반도와 만주 땅, 北으로는 몽고와 시베리아, 南으로는 중국 남부 광동성까지 대륙 동부 평야지대, 西로는 서안 내지는 최대 돈황 일대까지 진출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제국(The Greatest Empire)이었던 것이다.]


아! 고구려!라는 감탄사가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대륙을 경영했던 위대한 고구려의 정신과 기상을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겠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세력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분란과 분열의 근원입니다. 진실을 바로 세워 위선과 거짓이 드러나고 주객이 바로 서는 역사를 만들어야 겠습니다. 역시 고대사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이 명쾌한 역사적 진실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동이족이 통치한 땅 08/03/05 [01:36] 수정 삭제  
  西로는 서안 내지는 최대 돈황 일대까지
독자 08/03/05 [03:02] 수정 삭제  
  성선생님의 역사논단은 언제나 논리정연하십니다..역사논쟁이란 감정만 앞서도 안되고 차분한 마음으로 문헌과 유적유물 등을 총 동원하여 진실을 밝힐 때만이 한중일 역사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필하십시요..그리고 역사인식이란 땅의 문제보다는 정신의 가치를 찾는데 우선해야 그 정신적 가치에 의해 수 많은 국가와 민족이 흠모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연방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인종을 초월하여 널리 사람들을 돕는 홍익인간이념을 현대적으로 실용화하는 방안과 대안들을 많이 개발해야 겠습니다.^^
ojun9210 16/11/15 [20:56] 수정 삭제  
  우리는 식민사관의 역사에만 능숙해 있다. 소위 고구려 백제 신라에만 주안을 둔듯 하다. 참다운 역사를 공부케하려면 학교에서 한,중역사를 동시에 가르켜 언제부터 어떻게 중국과 마찰이 있었는를 가르켜야 역사의 소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중국은 가까운 예로서 진나라 때 쌓은 만리장성을 축조한 이후 만리장성 북쪽은 관심밖이었고 소위 무주공산으로 남겨져 예날 발해가 들어안고 이를 샘낸 몽골족,글안족이 요나라를 만들어 결국 발해를 평정했다가 여진족의 금나라 창설후 옜 요나라의 몽골족 징기스칸족이 중국에 원나라를 창설하고 그후 주원장이 명나라를 이었으니 종국적으로 고려말까지도 우리의 왕조가 왜 동북삼성마저 버려 놨는지를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현재는 거의 어려우나 우리나라가 동북삼성만 귀속되었다면 아마도 일본이 다시는 넘보지 못할 동북아의 강성대국이 될것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역사교육 시스템을 과감히 바 꿔야 한다. 또 위에 적시된 한반도 고대사 거대지도를 국립박물관등에 설치하여 시각화 한다면 전 민족에게 그 이상의 역사교육 효과를 마나게 될 것 입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울주군, 제5회 작천정 벚꽃축제 개최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