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백제사의 묻혀진 진실 햇빛 비추어야"

<창간 1주년 스페셜> "최후 결전장, 백강은 부안 지방"(하)

송기옥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5/08 [15:01]

"백제사의 묻혀진 진실 햇빛 비추어야"

<창간 1주년 스페셜> "최후 결전장, 백강은 부안 지방"(하)

송기옥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5/08 [15:01]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무찌른 고구려는 연이어 침공한 당태종의 눈에 화살을 꽂아 물리쳐  요동 땅을 호령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던 나라다운 나라였다.

백제 또한 도작문화가 발달하여 한수 이남의 환 황해권이 좁아 왜는 물론 멀리는 인도까지 무역을 한 강력한 해상왕국이었다. 한반도의 3국 중 가장 나약한 신라는 백제 의자왕 한테 46성을 빼앗겨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니 김춘추는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 백제를 패망시키는 골육 전을 벌여 당이 오매불망,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일조를 한 안타까운 지난 역사를 더듬게 한다. 어쩌면 외세에 의해 동족상잔으로 남북이 갈라진 한반도의 비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당에게 요동 땅을 내어주고  한수이북까지 넘보는 당에게 수난을 당하게 된다. 고구려나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상존하였더라면 드넓은 요동의 서토를 당에게 빼앗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신라 역시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헌신짝처럼 내어주는 애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았으리라 미루어본다.
 
1300여 년 전 동양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와 맞선 고구려,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원정을 온 왜국까지 어울려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최후의 결전장(주류성)을 지금까지 규명을 못한 것은 우리나라 사학계의 빈곤인지 아니면 국가차원에서 무관심한 수치로 볼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백제부흥군이 3년간 항전한 주류성과 백강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백제 최후의 결전장, 백강은 부안 지방이다’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46성을 빼앗기고 나라가 존망에 처할 때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까지 패망케 하여 3한을 통일하였다지만 결국 당에게 드넓은 고구려의 요동 땅을 내어주고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을 두고 한수이북을 차지하려는 계략에 시달림을 당하는 등 오히려 나라를 좁혀먹는 오류를 범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가들의 평가다.

해상왕국 백제는 서해안의 기름진 땅과 풍부한 물산으로 왜의 상국으로 우뚝 서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교역을 하였는데 상생의 원리를 무시한 채 나약한 신라를 가볍게 본 자만에 빠진 나머지 당을 끌어들여 결국 패전국으로 그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신라의 깊은 원한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궁궐터까지 흔적을 없애 승자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백제 유민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3년간 줄기찬 부흥운동을 펼친다. 필자는 그 본거지인 주류성이라는 충남의 여러 지역을 직접 답사한 내용을 향토사적 의미로 기술해 볼까한다.

 
▲ 당의 1900척의 선단과 13만 대군이 분산 주둔 했을 것으로 보는 고군산 열도-부안의 계화도 동진강과 금강과 연결되는 서해안의 주요 군사요충지


 ♢ 한산의 건지산성 일명 주류성설

충남 서천군 한산면 뒷산은 표고 170m에 달하는 금강하류에 있는 성 둘레는 1,300m에 불과 한 작은 토성으로 면적은 4,011제곱미터 이며 성안에는 군창 터가 있고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성이다. 주류성은 척박하다 하였는데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논과 밭이 있다.

일제 때 이병도 박사가 주류성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충남지역의 역사지리학자들이 지표조사를 한 결과 왜군을 막기 위한 고려 때의 성으로 밝혀져, 주류성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어졌으며 지금은 주류성에 대한 연구조차 않고 있다. 그 이유로는 석성이 아니다. 산이 낮고 밋밋하다. 사비성과 너무 가깝다. 복신굴이 없다. 근방에 중방성인 고사비성이 없다.


▲ 건지산성-사비성과의 하룻밤 거리로 노출된 고려 토성으로 밝혀짐

 
♢ 충남 연기 당산성(唐山城) 주류성 설

1930년대 丹齋 신채호 선생의 주류성 설로 황이돈 선생이 동조하였으며 향토사학자 김재붕 선생이 운주산성과 고사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하였으나 역시 주류성이라는 구비 조건이 너무도 빈약하다. 성의 둘레는 1,430m로  축성연대는 백제시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충남 연기군 남면 동쪽 끝에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인접한 성으로 동쪽에는 황우산성, 서쪽에는 기룡리 산성, 남쪽에는 갈운리산성이 연접해 있어 충남,북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군사 요충지다. 그러나 주류성으로는 여러 가지 구비조건이 미흡하여 거리가 멀다. 산 정상에는 연기군수의 이름으로 백제군의 원혼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 충남 홍성군 학산(鶴山)산성 주류성 설


1861년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홍주목본 백제주류성(洪州牧本周留城)‘으로 비정했다. 학산 산성은 홍성군 동남쪽에 위치한 백제성으로 확인된 바는 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징표인 福信 굴이 없으며 채탄으로 인한 작은 인공 굴이 하나 있을 뿐 복신이 칭병우거 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중방성인 고사비성(고부)이 없다.

북쪽으로는 외곽 방어선을 이루는 행정리(杏亭里)의 소구니 석성과 접해 있으며, 15km 지점에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상여(相如)가 위세를 떨친 봉수산 484고지에 2,540m의 튼튼한 임존성(任存城)이 바라보일 뿐이다.
 
임존성은 부여가 함락당한 직후 복신, 도침, 흑치상지가 힘을 합하여 백제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부여를 재탈환을 시도하여 초기 부흥운동에 위세를 떨쳤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퇴당하여 부안주류성으로 남하하게 된다.

향토사학자 박성흥 선생이 학산산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하여 1989년 12월 세종문화회관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주류성고’를 발표 한바 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백강은 아산만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또한 별다른 개연성이 없어 충남 지방 사학자 측에서는 전북 부안 주류성에 위임 할 정도로 지금은 연구조차 않고 있다.

 
▲  임존성(흑치상지,상여,도침,복신이 규합 사비성 재탈환을 시도한 본거지)


♢ 부안 우금산성 주류성 설

(상)편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부안의 우금 산성은 거의가 바다로 둘러 싸여있고 지리적 여건이 너무도 맞아 떨어져 대대로 구전으로 내려온 천년고찰 개암사에 얽힌 얘기며 왕이 살았다는 묘암골의 이궁터를 4km에 달하는 큰 규모의 석성이 병풍처럼 펼쳐 있다.  

또한 승 도침이 승장(僧將)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문헌상 개암사 묘련왕사의 사자라는 배경으로 왕족 출신인 복신과 함께 쌍벽을 이룬 백제부흥군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변산 이라는 특수한 지형지세에 800여개의 수많은 사찰이 있어 불교가 민간신앙의 주를 이루니 도침은 이들의 우두머리로 지도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누구나 우금산성을 답사하게 되면 과연 백제최후의 결전장이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주류성의 구비조건으로는 복신굴이 있고 원효대사가 백제유민을 달래기 위해 수도했다는 원효방이 있으며 산은 높고 험하며 토양이 척박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등등의 조건이 갖춰진 성이다.

또한 피성으로 이웃에 인접한 김제 성산토성이 백제 것이며 벽골제로 인한 군량미를 원활하게 공급 받을 수 있는 평야와, 이웃 고부의 고사비성이 인접해 있어 구비조건에 더 이상 의심할 바가 없다고 보겠다. 

 
▲ 주류성 함락 후 원효대사가 백제유민을 포용하기 위한 우금암 원효방 기도처

 
♢동양 초유의 국제전(나, 당, 왜, 백제)

초기의 백제 의자왕은 해동증자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효심과 지덕을 갖춘 왕으로써 신라의 주요 7성을 포함한 46개 성을 점령하니 정치와 군사전략에 어둡고 나약한 신라의 선덕여왕은 위기에 몰려 나라는 풍전등화 격이었다.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나라를 구하고저 무능한 여왕을 탄핵하니 모반죄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손에 죽게 된다.

우연일치인지는 몰라도 같은 해에 선덕여왕도 죽게 된다. 실권을 잡은 김춘추, 김유신은 여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뒤를 이어 진성여왕을 내세웠으나 이마저 오래지 않아 죽게 되니 김춘추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654~661)으로 재빨리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르기 전 김춘추는 고구려와 왜국에 건너가 백제의 침범을 막아달라는 외교정책을 써봤지만 허사였다. 김춘추는 위험을 무릅쓰고 당나라에 건너가 백제를 먼저 치게 되면 당이 원하는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회유에 당 고종는 흔쾌히 약조를 하고 드디어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로써 백제는 예상치 못한 비운을 맞게 된다. 
 
 
♢ 소정방의 13만 대군 사비성 함락

소정방은 당나라 내주를 출발 1,900척의 대 선단에 13만 대군을 이끌고 서기 660년 6월 21일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 기착한다. 신라 金法敏(김춘추의 아들 문무왕)과 7월 10일 합류하기로 했으나 7월 9일 당군은 일방적으로 남하하여 금강하류를 거슬러 사비성을 포위하고, 뭍에서는 김유신이 거느리는 신라군 5만 병력은 탄현을 거처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이 이끄는 5,000의 결사대와 싸워 승리한 후 사비성 즉 부여를 나,당 연합군이 공격하여 7월 18일 불과 1개월 만에 함락을 하고 만다.


▲ 내소사(來蘇寺)줄포만과 인접한 부안의 대표적인 절로  소정방이 왔다는 설이 있음  

 
♢ 백제부흥군 사비성 역공격

의자왕을 사로잡아 소정방과 김춘추 앞에 무릎을 꿇려 술을 따르게 하는 수모를 당함은 물론, 두 왕자와 귀족 등 12,000명이 넘는 백성들은 포로로 당에 끌려간다. 나당 연합군이 승전에 도취된 틈새를 이용하여 임존성의 흑치상지, 상여, 복신, 승 도침은 백제의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당군이 포진하고 있는 사비성을 역공하여 군수물자공급을 차단하니 수세에 몰린 당군은 인육을 먹는 등 위기에 몰렸다는 기록이 있다.

위기에 처한 唐將(당장) 유인원을 구하고저 또 다시 당은 유인궤(劉仁軌)를 파견하여 신라군과 연합하여 평정을 하게 된다. 강력한 임존성도 위태하게 되니 흩어진 백제 유민들은 금강을 건너 남하, 부안 변산의 주류성으로 몰려들어 3년간의 끈질긴 부흥운동을 벌이게 된다.
 
♢ 풍장왕이 상륙한 백촌강

서기 660년 10월 복신과 도침은 함락당한 사비성을 뒤로하고 백제국의 구심점을 세우기 위해 의자왕의 아우 귀지(貴智)를 왜에 보내어 왜에 있는 왕자 풍장(豊璋)을 다음해 9월에 귀국시킨다.

의자왕의 누이라고 하는 왜의 제명천황은 친정 나라 백제국이 망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자 풍에게 5천의 응원군을 딸려 보낸다. 사비성과 금강은 나,당 연합군의 재탈환으로 삼엄한 경계가 있어 근접도 못하므로 그들의 눈을 피해 변산반도 지벌포(계화도)를 거처 백강(동진강)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백촌강(동진강 상류)에 도달하니 복신, 도침 등이 맞아들여 주류성(우금산성)에 입성, 3년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어간다.

 
▲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항거한 동학농민군이 포진한 백제의 백산토성과 만석보 동진강(백강) 일대  당시 바다였던 이곳을 통하여 풍왕을 주류성에 맞아 들임.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죽음

서기 661년 2월 유인원과 유진당군이 사비성에서 백제군에게 포위당하자 태종무열왕(김춘추)은 군사 5만을 김품일에게 주어 당장 유인궤와 함께 백제 잔당을 격퇴시키고 사비성의 숨통을 트게 된다.

그 여세를 몰아 백제의 잔당들이 몰려있는 주류성을 함락 시킬 요량으로 김춘추는 36일 동안 밤낮을 모르고 주류성 공격을 시도 했으나 고사비성(고부), 두량윤성(사산토성) 등 크고 작은 성과 늪지대를 건너 주류성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험난한 요새지로 함락은커녕 기습을 당하여 많은 피해를 입는 등 군량미 부족으로 퇴각하고 만다.

김춘추는 주류성 함락을 보지 못한 한을 품은 채 제위 7년 만인 서기661년 금성(경주)으로 퇴군하여 그 해에 병사한다.   

 
▲ 김춘추가 36주야로 주류성을 침공했으나  패퇴한 백촌강 (동진강) 중류 일대

 
♢ 도침을 죽인 복신

서기 662년 2월 왜로부터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급 받게 된 풍왕은 나,당 연합군의 재침에 대비한다. 그러나 백강구 전투에서 패하여 수세에 몰린 도침과 풍장왕은 백제유민과 부흥군을 살리고 후일을 도모하자며 위성분봉 왕으로 봉하여 통치권을 주겠다는 당군의 회유에 도침과 풍장왕과의 협상을 알아챈 복신은 도침을 단칼에 죽이고 복신은 더 이상 나약한 풍왕의 지시를 받지 않으려고 우금암 굴실에서 병을 핑계하여 별거 생활을 하게 된다.

복신은 풍왕이 문병을 오게 되면 풍왕을 죽이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다. 복신 장군이 살았다는 우금암 굴실은 지금도 현존하고 있으며 우금암 굴실을 일명 복신굴이라고도 부른다.

 
▲ 개암사(開岩寺)- 절 뒤 오른쪽 큰 바위가 복신이 우거한 복신굴과 원효방이 있음

 
♢ 복신을 죽인 풍장왕

복신은 풍왕과의 암투로 개암사 뒷산 울금바위 일명 복신굴을 무대로 휘하 장병과 함께 병을 핑계로 우거를 한다. 풍왕은 상징적인 왕으로 추대한 왕이었을 뿐 복신은 백제유민과 부흥군의 탁월한 장수로 총지휘권을 가진 왕족출신이었다.

복신은 더 이상 풍왕의 나약함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풍왕을 제거하려는 결심으로 병문안을 오는 풍왕을 죽일 계획이었으나 풍왕이 이를  먼저 알고 자객을 보내어 복신을 죽인다. 외적보다 자중지란의 내분이 얼마나 무섭다는 교훈을 준다. 두 장수를 잃은 풍장과 백제부흥군은 사기를 잃고 허둥대며 나당 연합군에 밀려 전의를 상실한 채 패망을 자초하게 된다.

 
▲ 우금암(遇金岩)-주류성 함락후 김유신,소정방이 만났다는 바위

 
♢ 주류성 함락

당나라 유인궤는 부여융(의지왕의 장자)을 선봉장으로 앞세워 170척의 선단과 김유신,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 5만의 육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공격, 지벌포(계화도)를 거처 백강(동진강 두포천)주변에 진을 친다.

풍왕과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왜는 400척의 대 선단을 대진(大陣)터(상서면 돼지터=왜지터) 고잔 목포 앞바다에 진을 치고서 접전을 하게 되는데 왜군은 당의 수군을 얏 잡아 선재공격을 하다가 조수 간만의 차를 몰라 물이 빠지니 왜선 400척은 오도 가도 못하고 못이 박힌 것처럼 갯벌에 정체되니 나, 당 연합군은 협공으로 불화살을 쏘아 몰살을 시킨다.

 
▲ 지벌포(계화도)- 왜선 400척과 유인궤의 170척이 지벌포를 거쳐야만 동진강, 주류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예전의 계화도 포구의 모습

 
부흥군의 패색이 짙으니 풍장왕은 위도 왕등도를 거쳐 고구려로 망명을 한다. 이로써 백제부흥군의 최후의 결전장인 주류성은 663년 9월 7일 최후를 맞게 된다. 

흑지상지 부자는 항복을 하여 훗날 당나라 측천황후의 휘하 장수가 되기도 하고 패망한 백제 잔존 부흥군은 빈골량(태인)을 거쳐 전남 보성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대거 망명 정착하여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이들이 일본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 일본 규슈 인과 백제 주류성

필자는 일본 규슈지방을 2회에 걸쳐 답사한바 있다. 북 규슈 태제부 성을 백제망명 유민들이 쌓았다고 한다. 테제부성은 부안의 우금산성의 축성법과 흡사하다.

故 강성채 애향운동본부장 주최로 1993년 5월 8일 일본 대곡 대학 鄭早苗 교수, 田中俊眀 (堺女子대학)교수 및 국내의 유수한 역사학자 원광대 전영래, 나종우 교수, 동국대 이기동, 공주대 윤용혁 교수 등을 초청하여 처음으로 국제세미나를 부안에서 벌인바 있다.

이들은 부안의 우금산성을 현지 답사한바 우금산성이 주류성이라는 것에 추호도 의심할 바 없다며 일본교수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백제응원군으로 와서 죽은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우금산성에 위령탑을 건립하기를 원한바있다.

일본 규슈와 현해탄을 건너 부여 금강,부소산과 변산반도 주류성을 잇는 사적지를 연계한 역사교류 패키지 관광 상품화를 한다면 한,일 간 우호는 물론 명물이 될 것으로 본다.

 
▲  왜선 400척과 당의 유인궤의 170척,신라 5만군이 싸웠던 상서 목포 앞바다 (보리논은 예전에 바다였음)배를 매었던 배매 돌, 멀리 보이는 산이 주류성

 
▲  구마모토성(熊本城)-임진왜란의 선봉장인‘가토 기요마사’가 7년에 걸친 대 역작 1607년 완공함. 부소산성은 강과 주류성은 바다로 둘러싸인 자연을 이용한 반면 구마모토성은 해자를 판 유럽식성

 
♢ 왜(倭)의 문화를 발전시킨 백제인.

왜와 국교를 맺은 4세기 초에 백제의 아직기(阿直岐)는 일본(왜)에 건너가 ‘오오진 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아직기의 천거로 왕인(王仁)박사는 한자를 보급하고 가르쳐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꽃피웠다.

왜와 백제 두 나라는 끈끈한 상국 내지는 형제국으로 응원군을 보냈으나 663년 백제가 패망하여 백제유민들은 당나라에 끌려가기도 하고 흑치상지 같은 장수는 항복하여 당의 장수가 되기도 했다.

또한 부류는 고구려로, 왜의 규슈지방에 대거 망명하여 관직에 등용되기도 하고 백제의 앞선 문화를 왜에게 전수하는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본국에 남은 백제인은 나,당 연합군의 횡포로 어린아이까지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는 등 포악한 이들에게 어차피 죽을 몸 나라를 위해 싸워서 죽자고 부흥군의 수장인 福信을 따라 최후의 주류성전투를 벌인 것이다. 패망한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일본에 망명을 한 기록이 있다.

그 후 왜는 백제유민과 함께 신라를 괴롭혔으며 조선조에 들어서 1592년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을 일으켰는데 천년 전 일본에 망명한 백제유민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이 참전하여 동족을 죽이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낳기도 한다. 

 
♢ 부안 주류성의 밀접한 자료와 지명

첫 번째로 주류성 내에는 풍왕이 안주한 모련사 터 안에는 백제 와편과 임시 궁궐터와 수 만평의 넓은 둔병터가 있으며, 군사가 먹을 수 있는 규모의 우물도 발견되었다.

둘째: 충청권에서는 볼 수 없는 복신굴과 원효굴이 있다는 점.

세 번째: 묘련왕사와 도침과의 관계되는 천년고찰인 백제 때의 사찰인 개암사가 있다.

네 번째: 산이 험하고 성안이 척박하여 곡식을 재배 할 수 없다.

다섯 번째: 주류성 입구에 승전의 표시로 오래된 김유신 사당(흥무왕)이 건립되어 1482년 성종대왕13년 사패지 기록이 있다.(성종대왕전교 왈 흥무왕 김유신 자손호재부...중략)

여섯 번째: 1667년 개암사 주지 밀영대사(密英大師)가 기록한 별기(別記)에는(원효방 상량문 묘련지사 도침 흥무왕 종자 복신...중략)왜병400척이 원정을 와 패했다는 상세한 기록물이 나와 증거 해주고 있다. 또한 신라의 28장군이 백제 주류성 부흥군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상서면 장패평에는 지금도 그 무덤 터가 전해지고 있다.

일곱 번째: 피성인 김제 성산 토성과 벽골제, 오방성의 하나인 중방성으로 고사비성(정읍고부) 등이 부안 주류성과 가장 가깝게 연계하고 있다. 기타 주류성을 증거 할만한 백강(동진강), 지벌포(계화도), 돼지터(왜진터=대진터) 등 주류성에 나오는 지명 등 지형적인 자료들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류성이 부안지방임을 입증 해주고 있다.

 
▲ 김춘추가 몰고 온 신라 28장군의 무덤이라는 상서 감교소재 장패평(將敗坪) 무덤

 
♢ 개암사 묘련사와 도침의 관계

개암사(開岩寺)는 백제 무왕35년(서기634년)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개암사로, 울금바위 건너 묘암골에는 묘련사 라는 양대 절을 증수하게 된다. 묘련왕사의 제자인 도침을 이곳에 불러들여 僧將으로 삼아 복신과 풍왕과 함께 부흥운동을 펼치게 한 이궁터로 전해지고 있다.

흑치상지 장군의 임존성이 위태하게 되니 백제 유민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3년간 최후의 결전을 벌인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결전장 ‘주류성’이 이곳임을 증명해주는 사찰이라고 보겠다.

변산에는 800여 사찰이 있어 불교로 호국하는 승병으로 무장하여 민과 함께 거세게 항거 한 것으로 보겠다. 주류성 함락 후 신라의 명승 원효대사가 백제 유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와 수도하며 살았다는 원효굴이 있고 야단법석을 세워 설법을 전했다고 한다.

이곳은 원래 변한(卞韓)의 文王 도읍지였다고 하는데 백제 분서왕 때 백제 땅으로 합류시켜 왕의 별궁으로 평화시에는 경치 좋은 변산을 유람한 휴양지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 부안 주류성 답사 기사

1980.3.22 방인철 기자 주류성설, 1980.4.15 明大신문 노도양 교수의 주류성은 부안 위금암으로 밝혀져, 1980.5.15 조선일보 주류성은 부안에 있었다-김덕형기자, 1980.5.25 일요신문 한산설 통념 뒤엎고 새주장-고광식기자, 1981.7.12 주간중앙 나당연합군과 격전벌인 울금바위-김인휴 여행가, 1979.6.23 전북신문 부안주류성-백남혁 기자, 1980.3.20 전북신문-신규호 방송평론가 부안주류성설을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KBS 역사스페셜 역시 수차례에 걸쳐 주류성이 부안 우금산성으로 비정한 방영을 한바 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변산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 할뿐만 아니라 소 천엽 속 같이 골이 깊어 변산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3년간 항전의 본거지로 삼을 수 있는 충분한 지역이다. 

 
▲  개암사(백제 무왕35년 도침의 스승 묘련대사가 변한의 궁전을 사찰로 개축)

 
▲ 변산 8경중 제1경 직소폭포-예나 지금이나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주류성 학술 발표회

주류성 바로 찾기 비정에 대한 충청권의 향토사학가와 빈번한 교류가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1993년5월 8일 한,일 국제 학술 세미나(주최: 부안애향운동 본부장 강성채)를 열게 되었다.
그 뒤 한동안 침체되었는데 한식 前. 애향운동본부장, 이영택 바르게살기회장, 필자 등이 모여 2007.10.30 ‘주류성과 백강은 전북 부안지방이다’ 추진운동본부를 설립하여 학술 발표회(허경오-추진운동 본부장)를 열게 되었다.

현재 충청권의 향토사학가나 사학자들은 한산, 홍성, 연기 지방의 주류성설은 개연성 부족으로 부안 주류성 설에 위임할 단계에 이르고 있다. 부안주류성추진운동 본부에서는 주류성자료 홍보책자 배포와 현지답사 안내와 매년 학술 발표회를 열어 민, 관이 힘을 합하여 부안 주류성설을 굳혀가겠다는 계획이다.    

 
▲ 부안 서림공원 성황산- 소정방이 올라왔다는 일명 上蘇山 성황사 일주문과 필자

 
♢ 맺는 말

1300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제최후의 결전장인 주류성을 비정조차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필자는 부안 주류성과 인접한 내변산 입구에서 6대에 걸쳐 선대로부터 물려준 수 백 년 된 집터에서 줄 곳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주위 어른들로부터 개암사 묘암골에 왕이 살았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부안 지방은 유천도요지와 패총과 남방식 구암리 고인돌 등이 산재해 있고 해상무역을 할 때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 격포 채석강변의 ‘수성당’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부안지방이 상고시대로부터 면면히 독특한 문화를 이어온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특이한 점은 수성당에는 백제 복신장군을 추모하는 그림 탱화 한점이 걸려 있어 복신장군이 부안변산반도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펴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미루어 볼 수도 있다.  

 
▲  격포 수성당 -해상의 안녕을 비는 개양할미와 8女그림과 복신장군의 탱화가 모셔 있음

 
때늦은 감은 있으나 다행한 것은 이도학 박사가 주류성 등에 관한 백제역사를 연구한 ‘백제사’를 펴냈고 충청도가 고향인 김영관 박사가 ‘백제부흥운동 연구’ 저서에 부안지방의 주류성이 백제의 부흥운동의 결전장으로 가장 유력하다는 책자를 펴내어 화제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북지방 최진성,주 명준 교수 등 한,일간 많은 학자들이 백제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최근에 동학의 발원지인 고부의 금사동 산성을 사적지로 상정하였는데 이와 연계된 주성인 부안의 우금산성(지방기념물20호)은 당연히 사적지로 지정돼야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백제최후의 결전장인 주류성의 진실이 하루속히 밝혀져 후손들에게 호국충정의 혼을 면면히 이어갈 수 있는 정신도장이 되었으면 한다. 

▽ 송기옥 프로필 

수필가 ,전북 문인협회회원(현)
새만금추진협의회 공동대표(현)
주류성,백강 바로찾기 부회장(현)
K.B.S 군산방송 리포터 역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의 지난  4월 30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성훈 칼럼니스트의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으며, 1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참여하여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오늘 (5월 8일)브레이크뉴스 송기옥 칼럼니스트 글(기사 작성은 5월 4일)과 본지 성훈 칼럼니스트의 글 2부. 그리고 양지환씨가 기고한 "백제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 을 동시에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많은 의견을 내주시어 바른 역사찾기에 국민 모두가 동참하도록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윤복현 08/05/08 [21:30] 수정 삭제  
  동족상잔의 비극은 원한과 되갚음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입니다. 동족의 통일은 교류와 협력과 합의를 통해서 실현해야지 전쟁이나 외세개입에 의한 실현은 절대 안되겠습니다. 남북한의 통일은 그래서 남북교류와 협력과 합의에 의해 실현되야 합니다. 이명박정부가 미국이나 일본을 개입시켜 북한을 압박하여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통일노선으로 간다면 신라의 통일노선과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한 근본요인이 내부의 권력싸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대한 기로에서 내부 권력싸움은 공멸일 수 밖에 없겠죠.
신세호 08/05/08 [23:32] 수정 삭제  
  역사에 취미를 가진 독자로써 부안의 지형지세에 대한 필자의 우금산성에 대한 주류성설은 매우 설득력이 많습니다. 당나라에 백제의 수도 부여가 있다는 성훈 칼럼니스트의 주장은 고구려의 요동반도를 잃어버린 대가로 백제를 실어보는 모화 사상이 담긴 화풀이 주장으로 볼수 박에 없네요. 부안에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안내좀 부탁드립니다.
김삿갓 08/05/10 [12:31] 수정 삭제  
  신라는 경주에서 출발 가야를 통합시켜 국토를 넓혔다, 백제 온조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에서 나와 (서소노의 아들) 한강변으로 남하하여 마한등을 합병하여 세를 키운 것은 천하가 다아는 바이다. 백제는 왜와 교류하여 상국으로 아직기,왕인이 오왜에 건너가 아스카 문화를 꽃을 피운 것에 이의를 달 이유가 없다. 탐라도- 대마도 -구주ㅡ 오끼나와 -대만 - 핀리핀 - 인도까지 해상무역을 하게 된 것이다. 무슨 중국에 백제 수도가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국 일부에 항만 기지를 만들어 해상 무역에 조차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대륙, 중국, 큰것만 나열하는 것은 사대사상일뿐 진실한 역사에 도움이 안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한반도 사관이면 어떤가? 소정방이를 만나본이가 있는가? 각종 역사서와 자료에 의해 씨나리오를 엮어가는 것이 지론일 뿐이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