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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백제 최후의 결전장, "주류성은 부안 우금산성이다.(상)"

송기옥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4/30 [15:42]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백제 최후의 결전장, "주류성은 부안 우금산성이다.(상)"

송기옥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4/30 [15:42]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무찌른 고구려는 연이어 침공한 당태종의 눈에 화살을 꽂아 물리쳐  요동 땅을 호령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던 나라다운 나라였다.

백제 또한 도작문화가 발달하여 한수 이남의 환 황해권이 좁아 왜는 물론 멀리는 인도까지 무역을 한 강력한 해상왕국이었다. 한반도의 3국 중 가장 나약한 신라는 백제 의자왕 한테 46성을 빼앗겨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니 김춘추는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 백제를 패망시키는 골육 전을 벌여 당이 오매불망,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일조를 한 안타까운 지난 역사를 더듬게 한다. 어쩌면 외세에 의해 동족상잔으로 남북이 갈라진 한반도의 비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당에게 요동 땅을 내어주고  한수이북까지 넘보는 당에게 수난을 당하게 된다. 고구려나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상존하였더라면 드넓은 요동의 서토를 당에게 빼앗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신라 역시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헌신짝처럼 내어주는 애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았으리라 미루어본다.
 
1300여 년 전 동양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와 맞선 고구려,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원정을 온 왜국까지 어울려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최후의 결전장(주류성)을 지금까지 규명을 못한 것은 우리나라 사학계의 빈곤인지 아니면 국가차원에서 무관심한 수치로 볼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백제부흥군이 3년간 항전한 주류성과 백강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백제 최후의 결전장, 주류성과 백강은 부안 지방이다’   

백제부흥군의 최후의 결전장인 주류성을 함락 시킨 나당 연합군의 수장인 김유신 장군과 당나라 소정방이 만났다는 우금암(遇金岩)을 만난 것은 반세기전의 일이다. 주류성은 전북 부안 변산의 우금암을 기점으로 병풍처럼 드리운 4Km에 달하는 튼튼한 석성이다. 

백제의 고도 사비성과 낙화암을 답사할 때 마다 백마강에 3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슬픈 역사의 낙화유수(洛花流水)를 생각할 때 마다 가슴이 뭉클 하였다.

계백장군은 자기 가족을 죽이고 5천의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에서 산화하고,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함락 당하게 되니,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왜의 응원군까지 몰려와 동양초유 국제전의 무대였던 백제최후의 결전장 주류성을 규명하려는 이유는 삼국역사가 승자 위주로 패자의 진실이 묻혀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긴 까닭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란 미명하에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듯 잘못된 백제사를 그대로 묻어 둔다면 후손된 도리가 아니겠기에 삼국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을 밝히고자 나선 것이다. 어떤 사건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이란 끝맺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 개암사-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승 도침을 내세운 그의 스승 묘련대사가 재건한 사찰

♢ 백제 부흥군과 주류성(周留城) 전투의  배경

백제가 망한 것은 31대 의자왕 20년 서기 660년 7월에 사비성(부여)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 당하여 패망하였다. 그러나 백제 유민들의 거센 항전이 주류성과 백강에서 3년간 줄기차게 벌어져,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백제부흥군의 최후의 결전장인 주류성은 산이 험하고 방어하기에 좋은 요새지며 땅이 척박하여 곡식을 생산할 수 없다 라고 기록 되었다.(三國史記,日本書紀, 新,舊唐書 ) 

백제가 패망하였는데도 백제인들은 왜 3년간을 그렇게도 줄기차게 저항이 극에 달했는가? 그 이유의 첫째는 의자왕과 태자를 사로잡아 무릎을 끓려 승자에게 술을 딸게 하는 굴욕적인 대우와 13,000여명에 달하는 왕족과 여자, 대신들을 당나라에 끌고 가 종으로 만든 점 

두 번째로는 백제인을 만나는 대로 죽이고 불을 지르고 우물을 메워 살지 못하게 하는 포악성에 어차피 죽을 바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자 라는 일사각오정신에서였다. 

복신장군은 백제부흥군을 이끈 탁월한 인물로써 왕족 출신이었다. 복신, 승 도침은 임존성의 흑치상지와 백제유민과 부흥군은 사비성이 함락당한 후 유진당군(留陣唐軍 당장 유인원)의 보급로를 끊어 한때는 당군을 위기로 몰아 인육을 먹게 한 승기를 잡기도 했다. 

 
부여 부소산성(사비성)은 인공해자 없이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지
 
곤경에 빠진 유인원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는 유인궤를 또 다시 급파하여 유진당군을 구하였고 태종무열왕(김춘추)은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백제 잔당이 몰린 주류성에 28장군을 직접 대동하여 36주야를 공격하였으나 주류성 함락을 보지 못하고 661년 병사하고 만다. 김춘추의 외교력은 탁월했는지는 모르나 복수심과 적개심에 치우쳐 백제 유민을 포용치 못했다는 사가들의 평가다.
 
삼한통일은 하였다지만 당에게 화를 입고 신라인 견훤이 후백제를 도모하고, 궁예가 잃었던 고구려를 고토를 차지하다가 드디어는 왕건에게 천년사직을 내 주는 신라의 마지막을 엿볼 수 있다.

김춘추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문무왕이 대를 이어 주류성을 함락은 시켰으나 백제유민의 반발은 여전하였는데 원효대사가 백제유민을 불도로 달랬다는 원효의 기도처인 원효굴이 우금암 복신굴과 함께 나란히 존재하고 있음은 힘으로만 다스리려는 승자의 태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류성의 확실한 지명이 1,30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규명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학자들의 관심 밖의 일인지 아니면 패망한 백제 땅이란 지역주의 잔재의식에 의한 폐단인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옛 역사를 바로알고 바로 찾는 것이야 말로 정의로운 역사를 탄생시키는 길이다. 1,300여 년 전 그 당시 애환의 역사를 주류성, 백강 山河는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주류성’이 부안우금산성이라는 사실을 본대로 들은 대로 사실에 의한 주장을 하고 싶다. 
 
동진강,지벌포(계화도)가 한눈에 보이는 소정방이 올라왔다는 부안읍
소재 상소산(上蘇山) 정상의 필자


 ♢주류성과 백강의 비정 

 주류성을 충남 서천군 한산의 건지산성(乾芝山城)이라고 비정한 이병도 박사 설이 지금까지 주를 이뤄왔다. 그러나 건지산성은 고려 때 축조된 것으로 조사되었고 전북 부안 변산의 입구 우금산성(遇金山城)을 주류성으로, 동진강 유역을 백강이라고 비정한 전. 전주박물관장 전영래 교수와 민세 안재홍(安在鴻), 일본학자 今西龍, 또한 魯道陽 박사가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1994년 동양사학회장 변인석 교수를 부안 우금산성에 안내한바 있는데 그의 저서에 ‘부안 우금산성이 주류성으로 가장 개연성이 높다. 만약 우금산성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천추의 한을 남길 뻔 했다’며 부안의 주류성설을 주장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두 주장에 대한 향토사적 고찰에 의한 주류성과 백강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금강-소정방이 1,900척 13만 대군을 몰고 인천 덕물도를 거쳐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과 1개월 만에 사비성을 함락시킴

♢부안의 주류성 설(우금산성) 

부안 변산반도는 3면이 바다라지만 예전에는 바다 가운데 떠있는 섬이라고 해야 옳다.

그 중에서 주류성이라고 비정하는 ‘우금산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병목처럼 가늘게 이어진  유진재(留陣峴) 라는 산줄기 하나가 내륙인 백제 5방성 중 하나인 중방성(정읍 고사비성)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되어 있어 침공에는 어렵고 방어하기에 매우 좋은 천연 요새지다. 

 첫째로: 주류성은 사비성과의 2~3일 거리를 둔 곳이어야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쉽게 당하지 않고 마음 놓고 양병도 하고 왕의 정치가 이뤄 질 수 있다고 보겠다. 

 우금산성의 둘레는 3,917m 로 동서남북에 군사가 망을 볼 수 있는 초소의 흔적이 있고 성내에는 백제 와편이 출토 된바있으며 군사를 조련할 수 있는 넓은 둔병 터와 우물과 묘련사 라는 풍왕의 임시 궁궐터가 남아있으며 성의 규모는 임존성보다 크고 튼튼한 석성이다. 

 이처럼 왕이 진두지휘하며 나,당 연합군과 3년간을 대치하려면 성의 규모가 4km 정도에 달하는 수 만평의 넓은 공간이 구비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 우금암을 좌우로 4km의 성곽(주류성), 좌편계곡이 개암사, 우편계곡이 묘련사
풍왕이 3년간 통치한 이궁터

둘째로: 주류성은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는 도작문화가 발달한 김제의 벽골제와 피성으로 성산 토성이 있고 중방성 정읍의 고사비성과 사산토성이 줄줄이 버티고 있어 주류성을 공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지로 크고 작은 성과 늪이 요소요소 마다 복병처럼 산재해 있어 침공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 좋은 지형지세를 철저히 이용하였다. 

셋째로: 300고지가 넘는 산은 험하고 급경사인 지형에 포곡식 석성으로 조성된 적의 침공이 어렵고 방어하기에 좋은 성의 조건이 두루 갖춰진 곳이다. 

넷째로: 복신은 풍왕과 밀착된 승 도침이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죄를 물어 죽이고 복신은 굴에서 칭병우거하며  풍왕이 문병을 오면 죽이려 했는데 풍왕이 먼저 알고 복신을 죽였다는 복신 굴이 있으며, 김유신과 소정방이 승전하여 만났다는 바위 즉 우금암(遇金岩)이 현존한다. 

다섯째: 주류성을 함락한 공적으로 김유신 장군을 그 후손들이 ‘흥무왕’으로 추모한, 김유신의 사당이 우금산성 입구에 있고, 누대를 걸쳐 제사를 지내는 일이며  신라 28장군이 싸우다 죽었다는 장패평 무덤에 대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상과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지리적인 여건과 그 흔적들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볼 때 부안주류성설은 그 어느 지역보다 개연성이 가장 뚜렷하다 할 것이다.  

 
♢ 백강과 지벌포(枝伐浦)는 동진강과 계화도 

백강은 흔히들 백마강을 뜻하는 것 같지만 희다는 말은 밝은 해뜨는 동쪽을 말하기도 한다.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1,900척의 배를 타고 와 사비성을 함락시킨 후 소정방은 대선단을 이끌고 귀국하고 당장 유인원의 군사 일부만 사비성에 주둔한다. 그 틈새를 노려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당하여 유인원이 위급하니 유인궤가 구원선을 몰고 와 숨통을 트이게 한다. 

백제부흥군과 왜선 400척의 응원군과 당의 유인궤의 170척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 지벌포를 지나 동진강, 주류성싸움이다.  

동진강-임자 없는 나룻배처럼 떠있는 일명 쒝쒝이배 지평선 왼쪽 끝이 계화도

▲ 지벌포(계화도) -왜의 응원군선 400척과 당장 유인궤의 170척이 통과한 바다 간척지로 육지가 됨
 
강력한 임존성마저 함락당하여 당나라와 신라군의 위협에 백제유민들은 남하하여 변산 반도 주류성에 은거하게 되었고, 나,당 연합군은 고군산 열도와 부안 앞바다 지벌포(계화도)부근과 지금의 주산면 홍해와 백성리, 상서면의 목포와 두포천의 반대편인 줄포만 등 변산반도를 온통 싸움판이 벌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변산반도는 줄포를 위시하여 30여개의 크고 작은 항 포구가 삥 둘러있고 소 천엽 속 같은 내변산에 백제유민과 부흥군이 활동하기에 매우 적합한 천연 요새지다. 

백강하구(동진강) 실뱀장어 잡이 어선너머 수평선에 떠있는 지벌포(계화도)가 가물거린다.
 
백제 부흥군은 왜(倭)에 체류 중이던 부여풍(扶餘豐=무왕 또는 의자왕의 아들)을 맞아 제32대 왕으로 옹립하고 왜군의 지원 선단 4백 척과 합류하여 당나라 유인궤(劉仁軌)가 이끄는 170척의 수군과의 일전이 벌어졌는데 조수간만의 차를 모르는 왜선 4백 척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이 빠진 개펄에 못이 박히듯 꼼짝도 못하매 육지의 신라군과 연합하여 왜선에 불화살을 쏘아 전멸을 시켰다는 동양 초유의 국제전이 벌어진 곳이 동진강일대 두포천, 백석포 라는 부안지역의 이름이 현존하고 있어 주류성과 백강은 부안지방임을 말해주고 있다.   

동진강은 남북으로 흐르는 주류성과의 밀접한 강임을 역사서는 증명해주고 있다.    

 
♢ 한산의 건지산성과 부안 우금산성의 비교 

충남 서천군 한산의 건지산성은 금강 하류에 있는 요충지로써 석성이 아닌 토성이다. 함락당한 사비성에 근접한 길목에 있는 단 하룻밤 사이에 침공을 받을 수도 있는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 인접해 있는 평지 같은 밋밋한 170고지의 흙과 돌을 섞어 싼 토성이다.
 
성의 규모도 우금산성의 1/3에 해당하는 둘레가 1,300m 로 누가 보아도 백제 부흥군과 풍왕이 3년간 항거하기엔 빈약한 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건지산성은 단지 백강 즉 금강이라는 지명을 앞세워 주류성이라고 쉽게 비정하였으나 충남지역의 사학자들이 지표조사와 발굴을 한 결과 고려 성으로 판명되었으며 복신 장군이 기거했다는 석굴이 없다는 게 결정적인 결격 사유다. 건지산성은 널따란 육지로 연결된 토성으로  쉽게 침공 받을 수 있는 작은 성에 불과하다. 

또한 왜군의 원정선단을 이끌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 갈 때 금강에 진을 치고 사비성을 지키는 당군과 신라군의 눈을 피하여 접근하기에는 위험성이 노출된 곳이다. 
                           
부안주류성에 군량미를 조달한 김제 벽골제와 피성 <사진제공 송기옥 칼럼니스트>

적어도 3년을 항거한 주류성이라면 군량미 조달을 위한 생산기반이 갖춰진 김제의 벽골제와 동진강의 상류인 고부천과 넓은 태인천 주변의 평야가 부안 우금산성(주류성)과 인접해 있어 피성과 주성을 오가며 상대를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는 게릴라전을 펴 공격과 수비를 자유자제로 할 수 있는 지리적인 여건을 생각해 볼 수 있다.(다음호 계속)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가 지난 4월 22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의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습니다. 현재 브레이크뉴스 관계자는 본지 성 훈 칼럼니스트와 송기옥 칼럼니스트와의 공개적인 토론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두 칼럼기사를 함께 실었음을 독자 제위께 알려 드립니다. 이를 위해 빠른 기간에 두 칼럼니스트를 통해 서로의 주장을 실을 예정에 있습니다. 편집자 주>


[제휴=전북브레이크뉴스] http://jb.breaknews.com/sub_read.html?uid=13255&section=sc6&section2=
진실 08/04/30 [18:40] 수정 삭제  
  제 기억으로는 백제가 망하고 5도독부를 두었다고 국사시간에 배웠는데(오래되었지만)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네이버검색)의 위치는 어디지요. 그리고 성훈칼럼리스트는 흑치상지가 저 중국남부 사람이라 하는데 송기옥칼럼리스트는 어디라고 보지요. 두기사를 비교해보니 궁금증이 생기네요. 답변주시길 바랍니다. 기사 잘보았습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4/30 [22:12] 수정 삭제  
  다른 질문 필요없이 하나만 질문합니다.
백제가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당나라가 40만 대군을 파견합니다. 이 군대가 어떻게 한반도로 왔는지만 설명하시면 됩니다. 옛날 배로 6,000척 이상이 있어야 하고 지원부대까지 합치면 1만척이 넘어야 합니다. 이 선단이 황해를 건너왔다고 보시는지요?
육로로는 고구려가 버티고 있어 못 옵니다. 이것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나라가 40만 대군을 파병한 것은 백제도 약 40만은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한반도 전라/충청도에서 80만 병력이 전투한다? 지원부대 합치면 200만은 됩니다.그게 가능할까요?
백제 패망 시 인구가 76만 호에 200성입니다. 조선시대 중종 때 인구가 76만호이고 조선은 200성이 안 됩니다. 세종실록에 경기/충청/전라의 총 인구가 6만호가 안됩니다. 이건 뭘로 설명하실 수 있는지요?
공개 토론을 하자고 하기에 글을 올렸습니다.
진실님.. 08/04/30 [22:13] 수정 삭제  
  백제의 수도문제가 중국이냐 한반도냐에 차이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치열한 논쟁을 기대합니다.
ㅎㅎㅎ 08/05/02 [21:31] 수정 삭제  
  괜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딴지를 걸고 계시네요...
그럼 당나라에서 40만 왔다는 거 세어보셨나요..
옛날 사료들 다 침소봉대한 거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그거 하나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토론을 제의하다니요...
시간이 남으면 딴지 걸지 말고 공부나 더 하시죠..
성훈 칼럼리스트 08/05/03 [10:04] 수정 삭제  
  엄연한 역사 기록은 침소봉대로 부정하면서 아무 근거도 없는 자기 생각이 맞다고 하는 사람과 무슨 토론이 되겠습니까? 과학을 부정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흑치상지는 광서자치족 출신인데 뭐하러 한반도에 부흥운동 하러 옵니까?
괜한 낚시밥 던지는 것인줄 알지만 한마디 했습니다.
객관 객 08/05/04 [08:02] 수정 삭제  
  성훈님은 브레이크 없는 과속질주하는 자동차랄까? 나만이 옳다는 편견주장이 너무쎄다.
상대의 주장도 근접하는 기본태도가 중요하다. 역사 확증의 왕도는 없다. 논쟁은 10년도 50년도 수백년도 갈수있다. 가장 가깝게 근접하려는 객관성 결여는 논쟁의 가치가 없다. 상대를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가 우선돼야 토론문화에 입문하는 길임을 아셨으면 한다.
굳이 두분을 평가하라면 성훈님은 타인에 의존이 많고 송기옥님은 역사문헌에 충실한 반면 향토사적인 것에 치우친 감이 있다. 객관적으로 사비성은 부여가 확실하다는 것으로이이미 게임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흥미진진한 두분의 다음 글이 기대된다.
김삿갓 08/05/05 [08:45] 수정 삭제  
  역사는 진실해야 한다. 전쟁에 지면 노예가 된다. 의자왕이 포로가 되어 무릎꿇고 소정장,김춘추에게 굴욕적인 술을 따른것은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식민사관을 벅어나련다거나 중국넓은 땅을 내것으로 만든다거나 하는 망상은 버려야 한다, 한단고기에보면 기자조선이나 단군의 설화에 대한 미화로 자부심을 가지려고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미국은 셰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임을 인정해야 하고 중국은 세계최고의 인구와 한반도의 44배라는 땅을 소유한것을 인정해야 한다. 구시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대리민족을 가지려는 정신위안 따위로는 역사를 바로 볼수 없다. 당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2000척의 배로 황해를 건느지 못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그당시 무역선과 군함으로 대단한 항해술도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무역을 한것을 보면 알수 있다.
성훈님과 송기옥님의 토론은 끝났다. 왜냐면 역사기록서를 무시하고 고증을 무시한 유아독존적격인 성훈님은 중국땅에 가서 현지취재나 해야 옳다. 토론이란 상대의 지론을 존중하면서 나가야 한다. 동키호테처럼 과대망상은 몽상가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중립사학 08/05/06 [22:23] 수정 삭제  
  송기옥님.
마한이 어딘지 낙랑이 어딘지는 아시는지요?
백제가 마한의 동북에 있고, 백제는 낙랑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백제를 저기 부안에다가 심어놓고는 낙랑을 강원도에 있었다고 하시려나요?
우리나라? 08/05/15 [19:14] 수정 삭제  
  이미 정신까지 왜곡이 돼어 보이질 않으니 딴은 그럴수 있지!
그렇다고 진실과 사실을 묻어둘순 없다.
사실적인 우리의 역사를 안다고, 현재의 차이나가 우리땅이 되나?
허나 알건 알고, 밝힐건 밝혀야지 그리고 자손 만대로 알리고 교육해야지...
궂이 억지 주장으로 아니라 하는 그네들의 속내를 모르겠네 화교인가?제펜인가? 아님 밝혀지면 밥줄 끊어지는 정신나간 학자들인가???
토토짱 08/07/09 [17:45] 수정 삭제  
  도무지 말귀가 안통하는 넘들! 성훈님의 그 많은 자료들을 따라다니며 보고 댓글하면서 기록과 유물운운하는 거나 일본과 중국을 두둔하는 것은 여전하구나. 설사 성훈님이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치자! 대한민국 중심의 잘못된 역사관!에 대해서 대륙과 족바리를 두둔하며 몰아부치는 늬놈들은 조상이 누구며 자식에게 뭘 물려줄건지?...그리 잘났으면 성훈님보다 2배는 더많은 자료와 상대를 배려하는 언행이 필요하지 않니 들? 니들 자식들에게 공정하게 이내용 다 복사해서 보여줘봐라.. 그리고 뭘 배웠는지 한번 물어봐라...ㅉㅉㅉ 한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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