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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슈]놀라운 '남제서(南齊書)'의 대륙백제 기록

"백제는 중국내뿐만 아니라 대규모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플러스코리아 | 기사입력 2009/10/06 [17:34]

[역사이슈]놀라운 '남제서(南齊書)'의 대륙백제 기록

"백제는 중국내뿐만 아니라 대규모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플러스코리아 | 입력 : 2009/10/06 [17:34]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장에서 고 임승국 교수가 백제 동성대왕 시절 중국대륙에 진출한 ‘남제서(南齊書)’의 기록을 소개하여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그런데 최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한적실에 보관중인 1637년 발행 남제서 판본이 공개되어 화제인데 그 주요내용을 소개해 본다. 

남제서(南齊書)는 남조 양나라 때인 537년에 소자현이 편찬한 것으로, 남조 제나라(479년~502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중국 25사 중의 하나이다.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 지도를 먼저 하나 소개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나오는 북위가 존재할 당시 형세도를 일본인이 그린지도인데 지금 나오는 지도도 대동소이하다.
 
▲ 북위시 일본인이 그린 당시 형세도     ©플러스코리아
 
백제 동성대왕은 24년 동안 재위(ad479 ~ ad501)에 있었던 백제 24대왕이다. 당시 주변정세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백제 : 678년 존속 (b.c18 ~ ad660)
* 북위 : 149년 존속 (ad386 ~ ad534)
* 남제 :  24년 존속 (ad479 ~ ad502) 
 → 남제는 24년 동안 왕이 7번 바뀐다. (동성대왕 재위년과 동일)

상기와 같은 내용을 참고하여 아래 남제서 원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원문 내용 중 ‘⑧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원문]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해설]
이해(AD490년) 위노(북위)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동성대왕)는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노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중국 북방을 통일했다고 하는 강력한 북위의 효문제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 동성대왕을 공격을 하였는데 백제 동성대왕이 4명의 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는 내용이다.

그 뒷부분 내용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원문]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해설]
(백제 군사가) 야간에 습격하여 번개같이 공격하였더니 흉리(북위)가 크게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바닷물로 쓸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백제의 군사가 북위의 기병 수십만을 몰살시켰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대왕조를 보면 490년 기록은 없고 488년에 짧은 문장 하나가 기록되어있다.

[원문]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해설]
10년(488)에 위(魏)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한반도 서남부에 있는 백제를 기준으로 보면 남제서의 기록은 몇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첫째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려면 고구려가 길을 빌려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기록이 없고, 둘째 그렇다면 북위의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고 와서 공격하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남제서 기록이 스스로 해결 해준다. 즉 동성대왕이 북위군의 공격을 격퇴한 공로를 치하하여 태수를 7명 임명하는데, 그 태수 임명지역이 곧 백제 강역이기 때문이다. 그 임명지역과 현재 위치를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은데, 아래 원문에 나오는 번호순서대로 살펴보자.

① 광양태수 : 하북성 창평, 랑향 인근 (북경 인근)
② 조선태수 : 미상
③ 대방태수 : 미상
④ 광릉태수 : 강소성 양주시
⑤ 청하태수 : 하북성 영년시
⑥ 낙랑태수 : 미상
⑦ 성양태수 : 산동성 성양시

7태수 중 지명이 확인되는 4명의 태수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강역을 연결해보면 중국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유역까지 포함이 되는데, 현재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는 백제가 그 강역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영토를 중국본토에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된다. 
 
▲ 남제서에 나오는 동성대왕이 임명한 태수위치     ©플러스코리아

이것은 중국의 25사중 하나인 남제서에 나오는 기록이니 부정할 수도 없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러한 역사를 기록한 남제서 백제전 앞부분 15줄 320자를 누군가가 고의로 삭제하였다는 것인데, 아래 원문 자료를 보면 검게 나타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에서 증언한 고 임승국 교수의 증언이 맞다는 말인다. 도대체 154줄 320자에는 어떠한 내용이 들어 있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중국정부는 15줄을 삭제하였을까?

남제서의 기록을 보면 동성대왕 시절 백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강력한 국력을 가진 나라로 보여진다. 우리는 왜 이러한 역사를 교육하지 않는 것일까? 일시적으로 진출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강역이 넓다. 이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 고려대 중앙도서관 한적실 보관 1637년 발행 ‘남제서 백제전 원문’


▲ 남제서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역사의 진실 09/10/06 [22:26] 수정 삭제  
  우리가 백제라고 할 때는 요동지역의 어하라(소서노가 개국한 비류나라)에서 분가하여 배를 타고 한반도 인천(미추홀)으로 들어와 마한의 진왕에게 거주지를 분양받아 경기도 땅에 정착한 고추모 아들 온조의 로 착각하는데, 실제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던 구태의 100가족이 발해만을 건너와 한반도 평안도지역에 세운 백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만주지역에서부터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다가 후한과의 연합작전에 따라 고구려 후미를 치기위해 구태가 100가족을 데리고 발해만을 건너 한반도 평안도지역(대방)에 백제(100가족의 나라)를 개국한 구태세력이 서울 한강변의 온조의 십제(발해만에 위치한 비류나라 어하라지역에서 10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와서 개국한 온조나라)를 통합하고 고이왕때부터 법령을 반포하여 국가기강을 확립한 후에 근초고왕부터 본격적으로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동성왕때에 이르러 중국지역을 지배한 강성대국을 실현한다.

수도이전은 개로왕때 400년 도읍지로 삼았던 서울지역의 한성백제 고구려 장수왕때 고구려의 공격으로 초토화되고 개로왕이 죽자, 수도를 서해와 연결된 곰나루(웅진=공주)에 이전한 백제가 한반도 본국을 중심으로 중국 동해안지역을 점유하고 일본열도와 동남아열도를 점유하니 22담로를 가진 해상제국 백제였던 것이다. 백제는 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면서 인도까지 해상무역을 했다.

해상제국 백제가 있기까지 일찌기 단군조선이전시대부터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이 뛰어난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마한세력의 도움이 컸다.광개토태왕비문에 구태백제를 지원했던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해상세력을 왜로 기록하고 있다. 왜의 중심세력은 북방세력의 한반도유입으로 일본열도로 이주했기 때문에 일본열도세력을 왜라 불리웠던 것이다. 일본열도을 점유한 세력은 순차적으로 마한세력,가야세력,백제세력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일본왕실은 가야계에서 백제계로 혈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백제는 한반도에 본국수도(서울=>공주=>부여)을 두고 중국요서지역에 중국지역을 통치하기위한 부수도를 두었다. 요서지역의 백제수도에는 본국에서 황제의 가족이나 친척으로 중국지역의 태수들을 총괄하는 총독을 파견했을 것이다. 백제본국이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으로 멸망하자, 대륙백제도 붕괴되어 중국지역의 백제인들은 고구려와 돌궐로 흡수되어 버렸다. 신라는 중국지역의 백제땅을 당나라에 넘기고 한반도이남만 챙긴 것이다. 그래서 백제멸망후에 산동지역의 백제인들의 거주지를 신라방이라고 했는데, 그건 신라방이라기보다는 백제방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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