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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 왕성인가?

백제 30대 무왕이 승하하자 당 태종도 상복입고 곡을 한 백제의 위상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6/02 [21:25]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 왕성인가?

백제 30대 무왕이 승하하자 당 태종도 상복입고 곡을 한 백제의 위상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6/02 [21:25]
본 글은 ‘백제의 기원과 온조의 건국지는 어디?’의 (2부)입니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693&section=section78

주변의 낙랑/말갈/대방으로 본 위례성의 위치

온조 13년(AD 6년) 2월 왕모(소서노)가 61세의 나이로 죽고, 5월 온조대왕은 신하들에게  동으로 낙랑이 있고 북으로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었는데, (중략)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한 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하략)”라고 말한다. (소서노의 죽은 나이 61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고구려의 건국년도와 함께 언급할 예정입니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할 것을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浿河), 남으로 웅천(熊川), 서로 대해(大海), 동으로 주양(走壤)을 한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하 편의상 온조대왕을 존칭을 생략하고 온조라 하니 이해바랍니다.)

▲  산서성에 있는 대해(大海)라는 지명은 호수를 말함이다. 이곳도 백제의 영역으로 간과할 수 없는 지역이다.
 
참고로 위 낙랑은 최씨의 낙랑국(한반도+만주)이 아니라 한사군 낙랑으로 보아야 한다.
▲  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 안에 모든 것을 잡아 넣어 서부산악지대에만 있었던 중국은 어부지리로 역사 강역을 넓혔다.  
이걸 아직도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는 이나라 식민사학계는 매국집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고, 북쪽엔 말갈이 있었다고 온조는 말하고 있다. 이 낙랑군의 위치를 밝히면 백제의 위치가 저절로 밝혀진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한다.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에 있으니 백제는 그 잘난 후손들 때문에 황해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

낙랑의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려면 장문이라 사진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백제와 낙랑의 기록을 보면 고이왕 13년(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니 백제 고이왕이 낙랑을 습격한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군의 위치사진을 보면 이 기록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 서부에 있었다면 어떻게 백제가 낙랑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즉 낙랑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   중국의 사서가 오히려 역사강역을 제대로 밝혀주고 있다.  필자는 사기의 상부 1/2이 한사군의 위치가 맞다고 본다. 중국 떼놈보다도 못한 한국의 식민사학계 임을 알 수 있다.  돈만 없애는 고구려 연구재단도 다 엉터리이다.

그리고 <중국 25사>에 백제는 대방의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럼 대방은 어디인가? 대방은 백제 패망 후 당과 신라의 전투에서 보듯이 하북성 남부 석문(石門: 현 石家庄)과 접한 곳이다. 9대 책계왕의 기록에 보면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에서 우리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대방은 우리와 장인 사위의 관계이니 그 청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즉 대방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초기 백제와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초기 백제가 서울 근처에 있었으면 말갈은 황해도 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과서에 따르면 그 곳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닌가? 도대체 말갈은 어디 있었단 말인가? 온조왕 2년 왕이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있고 (생략) 막고 지킬 계획을 마련하라”라고 말한다. 그 후로도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그래서 온조왕이 말갈을 피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그런 말갈의 위치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기록이 있다. “5대 초고왕 49년(214년) 북부(北部)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천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석문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방과 접해 있는 현 하북성 남쪽에 있는 성도(省都) 석가장(石家庄)인 것이다. 이곳은 또 대방과 접해있는 곳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신라와 당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위의 기록들에서 온조의 최초 도읍지를 추정해 보면, 석문(석가장) 아래에 대방이 붙어 있고, 이 대방 근처 아래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례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대방의 위치는 석문 바로 아래쪽이다. 석문은 현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마한으로 본 백제의 둘째 도읍지

온조왕 24년(AD 6) 왕이 남쪽 경계인 웅천에 울짱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왕이 당초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00리 땅을 갈라주어 안정케 하였소.(이하생략)”라고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3년 후인 온조 27년 마한이 결국 백제에 복속된다. 이로서 마한은 백제 남쪽 경계인 웅천의 서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본 글의 (1부)에 언급했다시피, 번조선의 왕인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해 한(삼한)의 왕이 된다는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삼한의 하나가 마한이다. 마한은 한수 남쪽에 백제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나라이다.

참고로 <후한서>에서 기준이 세운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달려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 ‘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 ‘가다’라는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 “Let's go'의 뜻이다.

또 海라는 지명은 현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 일대에 있다. 한문 실력이 없는(?) 식민사학계는 海자만 보이면 전부 바다로만 해석해 전혀 엉뚱한 역사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역사를 도살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 번조선왕 기준은 조상인 기자가 살던 서화 땅으로 와 한(삼한)을 세운다. 가운데 상부에 대왕산 밑에 海 자가 보인다. 바로 저 일대가 바다가 아닌 육지인 海 지방이다.
 
둘째 도읍지의 지리적 조건    

여하튼 온조는 두 번째 도읍지에서 나라를 다스린다. 식민사학계는 이곳을 서울로 비정하고는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보고, 북쪽 패하를 예성강으로, 남쪽 웅천을 안성으로, 동쪽 주양을 춘천으로 비정하였다. 백제를 한반도 서부로 비정하는 결정적 근거로 백제의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본 것이다. 대해가 황해인지는 잠시 후에 한꺼번에 알아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온조의 최초 도읍지 위례성과 둘째 도읍지는 당시 말을 타고 당일치기가 가능한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두 군데 다 한수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례성은 북대한수(北帶漢水)이니 분명 한수의 남쪽이다. 그리고 온조는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고는 그리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온조는 한수의 남쪽에서 왜 굳이 한수의 남쪽을 순시했다고 말했을까?

두 기록 중 어느 하나는 거짓이던가 아니면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어야 삼국사기의 이 기록이 맞는 것이다. 두 기록 중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면 아무래도 북대한수(北帶漢水)가 수상하다. <한단고기>에는 분명 남지대수(南至帶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다면, 온조는 (북)한수의 남쪽인 위례성에서 (남)한수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도읍지가 더 남쪽이라는 근거는 북으로 말갈이 침략하니 남쪽으로 도읍을 옮겨야겠다고 온조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았다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다. 즉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진 그 중간의 큰 섬과 같은 곳에 백제가 위치해야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 것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한강의 여의도처럼 남과 북 위.아래로 한수가 흐르는 곳이어야 한다. 굳이 여의도로 표현을 하자면 한강 남쪽의 여의도에서 한강 남쪽인 영등포로 도읍을 옮겼고, 그런 여의도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고 그 너머에 낙랑군이 있어야 한다. 즉 섬처럼 보이면서 여의도 같은 작은 섬이 아니라 엄청나게 넓은 육지여야 이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먼저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서울의 한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사학계가 비정한 한수는 서울의 한강이다. 그런데 한강은 강줄기가 둘로 갈라지지 않아 이 조건에 안 맞고, 동쪽 끝은 주양(東極走壤)으로 비정한 춘천 동북쪽에 낙랑군이 있어야 하는데 낙랑군은 대동강 평양으로 정북쪽에 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러므로 식민사학계의 백제 도읍지 비정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차라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북한강의 남쪽을 위례성으로, 남한강의 남쪽을 한성이라 했으면 이 조건에 일단은 맞는다. 그러나 양수리도 낙랑군이 춘천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북쪽인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했으므로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리고 한강은 대부분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한줄기인 한강의 하류가 상황에 따라 절대로 둘로 갈라질 수가 없다. 그러니 “2,000년 전 백제 때 한강 하류는 두 줄기 이었다”라고 우길 수도 없다. 결국 여러 조건으로 보아 서울은 백제의 도읍지가 아닌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미 필자는 4부에 걸쳐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의 위치에 대해 기고한 적이 있다. 백제는 위례성-->한성(?)-->한산-->웅진-->사비로 천도를 했다. 웅진과 사비에 대해서는 백제 패망 전쟁 기록을 통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밝혔다. 이번에는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과 한성(?)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백제 도읍지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중국 대륙 산동성의 지형을 놓고 보면 이 조건과 거의 맞아 들어간다. 위례성의 조건인 북대한수(北帶漢水)는 황하(黃河), 동거고악(東據高岳)은 태산(泰山), 남망옥택(南望沃澤)은 평야지대,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는 대야택(大野澤: 독산호)로 보면 조건이 딱 맞아 들어간다. 그리고 한수가 둘로 갈라지기만 하면 된다. 

산동성 서쪽에 있는 독산호는 폭 20Km 길이 120Km 정도로 엄청나게 큰 호수로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120Km이면 충남의 해안선 길이보다 길지도 모른다. 비가 많이 오면 호수의 길이와 폭은 더욱 더 커진다. 독산호 바로 밑에 미산호라는 큰 호수가 또 있다. 이 두 호수를 합치면 이곳이 바다가 아니고 무엇이랴! 

▲  독산호(대야택)은 옛날부터 큰 바다로 불리던 큰 호수이다.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는 바로 이곳이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산동성 사람들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의 바다를 北海를 발해(渤海), 東海를 황해(黃海), 南海를 산동성 남쪽 청도/연운항 앞바다, 西海를 독산호(獨山湖)라고 했다. 백제의 기록은 백제의 위치인 산동성을 중심으로 쓴 것이지 중국 대륙 전체를 놓고 쓴 것이 아니다. 

▲  산동성의 동.서.남.북의 사해. 독산호(대야택)은 산동성의 서쪽 바다로 회수에서 황하로 가는 수로로 연결되어 있다.
 
필자가 백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자 식민사학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을 추종하는 네티즌들이 서조대해(西阻大海)를 핑계로 중국의 서쪽엔 바다가 없고 멀리가면 지중해라고 하면서 한반도의 서쪽에 대해 즉 황해가 있어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다는 코미디 같은 항의성 댓글을 단 적이 있어 필자를 크게 웃긴 적이 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라 고맙기는 했다.

한국과 같이 작은 땅에서야 한반도 전체를 놓고 지형을 따지지만 광활한 중국 대륙은 그렇지 않다. 각자 나라의 중심에서 동서남북의 중요한 지형을 자기네 영토라고 기록에 적는 것이다. 백제를 산동성에 놓고 보면 <삼국사기>의 동서남북 기록이 정확히 일치한다.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大海)를 바다로만 해석하면 위와 같은 코미디가 생기는 것이다.

해(海)는 바다 뿐만 아니라, 황하나 양자강과 같이 큰 강, 대야택이나 동정호와 같은 큰 호수, 동부 평원과 같은 대평원 등을 모두 바다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한족들은 대대로 우리 조상인 동이족에게 밀려 서부 산악지대에만 살았던 산적들이기 때문에 바다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해(海)라는 지명도 있다. 실제로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일대를 고대에 해(海)라 불렀다. 육지에도 X해, X도 라는 지명이 간혹 있지 않은가!!! 

황하의 물줄기로 본 백제의 위치?

황하는 서부 산악지대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이 물줄기는 안 바뀐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면서 동부 평야지대로 빠져나온다. 하남성 정주(鄭州)를 지나면서는 대평원을 흐르다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황하는 100년에 한번씩 맑아진다고 했다. 즉 100년에 한번씩 큰 홍수가 나고 그 때마다 물줄기가 바뀐다는 말이다.

현 황하는 지금 산동성 성도인 제남(濟南)을 거쳐 산동반도 바로 위에서 황해로 흘러간다. 그러나 기원전에는 천진 쪽으로 흘렀던 적도 있고, 산동반도 아래로 빠진 적도 있고, 아예 남쪽에 있는 회수와 만나버린 적이 있을 정도로 물줄기의 변화가 심한 강이다. 그런 황하를  현재의 물줄기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를 분석하면 큰 오류에 빠진다.

중국의 지질학계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온조가 백제가 건국할 때의 황하의 주 강줄기는 천진 쪽으로 흘렀다 한다. 당시 황하가 양쪽으로 갈라져 흘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아주 많다. 2,000년 전의 황하 물줄기가 몇 개였는지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주 물줄기가 어느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사서의 기록과 지질조사로 가능하다. 

▲   온조가 위례성에서 도읍지를 옮갈 때의 황하 물줄기의 변천도. 아마 황하는 당시 두 줄기로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온조의 기록으로 보면 황하(한수)는 북한수와 남한수로 나뉘어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천진 쪽으로 흘렀던 황하(北漢水)는 대방(帶方) 지역을 지나가므로 대수(帶水) 또는 대한수(帶漢水)로 불렀던 것으로 보이며, 남한수(南漢水)는 그냥 한수로 불리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단고기>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서노와 온조의 이야기의 조건이 산동성에서 모두 일치하는 것이다.

필자는 산동성의 성도(省都)인 제남(濟南) 근처를 백제 초기도읍지의 유력한 후보지로 보고 있다. 그곳이 위례성인지 한성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온조대왕은 천하의 길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인 제남을 놔두고 다른데 가서 도읍을 정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 유리왕의 유적이 북경 근처에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실제로 제남이라는 도시 명에 백제의 제(濟)가 들어가 있지 않은가!


지금의 대도시들은 예전에도 한 나라의 도읍이거나 소경(小京)의 하나가 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천하의 길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에 도읍을 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현 수도인 북경, 하북성 석가장, 산동성 제남, 산서성 태원이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백제의 도성은 동.서 두 군데

백제는 동.서 두 군데에 도성이 있다고 했다. 혹자는 동도(東都)는 한반도에 있고, 서도(西都)는 대륙이라고 한다. 물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가 한반도에 아무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담로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의 수도는 분명 대륙에 있었고 주무대는 산동성인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렇게 본다. 동도는 산동성에 있었고, 서도는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湖南省)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중국장수전전 흑치상지편에 나오는 백강은 현 상강(湘江)으로 호남성 기양이라는 곳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백제와 관련된 중국장수들의 기록을 보면 전투지가 호남성 동정호 부근으로 추정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 

▲  중국 장수전전의 기록에는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나라와의 전투가 벌어진 백강(현 상강)을 호남성 기양으로 말하고 있다. 흑치상지의 고향은 광서 장족자치구 백제향이니 백제는 호남성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래 당항성을 빼앗은 지도와 연계해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백제 의자왕이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끊은 것도 산동성 백제와 호남성 백제와의 육로 개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이론은 아직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  백제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당과 신라의 교통로를 끊은 것은 백제가 호남성 백제와 왜와 육로로 통하는 길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대왕에 의해 건국된 백제의 위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하늘에 천제를 지내던 나라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 보면 채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봄 사중월(2월.5월.8월.11월)에 왕이 하늘 및 오제(五帝)의 신께 제사지낸다.”고기에는 “온조왕 20년 봄 2월 (원구)단을 쌓아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태종 이세민이 백제 무왕이 승하하자 상복입고 곡하고 있는 장면
중국 25사를 종합 검토해 보아도 백제는 고구려 못지않은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백제를 고구려보다 더 강한 나라로 표기한 기록이 여럿 눈에 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641년 백제 30대 무왕(의자왕의 부왕)이 승하하자 당태종 이세민이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 <구당서>와 <만주원류고>에 전한다. <구당서 권199상>에 보면 (十五年璋卒其子義慈遺使奉表告哀太宗素服哭之贈光祿大夫賻物二百叚遺使冊命義慈爲柱國封帶方郡王百濟王)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내렸다고 되어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당나라는 백제의 제후국이며 백제는 당나라의 부모국이었던 것이다. 근세조선시대 세종대왕은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자신은 군신(君臣)관계라 하며 21일간이나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당시엔 입장이 반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는 당나라를 신하국으로 두고 있었음이 분명한 기록인 것이다.

지금까지 백제의 초기 수도인 위례성과 둘째 도읍지를 서울 하남으로 국민들에게 교육하고, 공주를 웅진으로, 부여를 사비로 교과서에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한 매국식민사학계(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는 정말이지 오강들고 벌서야 한다. 이건 민족정신을 썩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거짓으로 조작한 식민사학을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의 진실인양 국민들에게 말하고 있는 사학계는 이젠 매국노란 소릴 들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은 점차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썩어빠진 이 나라 식민사학계와 정부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중국/일본과 역사 전쟁을 하려면 역사의 진실을 가지고 싸워야 하거늘 매국 식민사학계는 자기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그런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사학계가 역사의 진실에 대해 침묵하니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을 수 밖에 없고, 또 정부는 외교 문제가 된다는 한심한 논리로 동북공정에 손을 놓고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잘 되리라 보는가!!!!

지금의 식민사학계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역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역사를 바꾸려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단군은 신화로 되어 있으며, 삼국은 한반도에 갇혀 있다. 고려의 만주 영토는 다 어디로 갔는가? 구한말 잃은 간도 땅은 아예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사학은 다른 인문학과 달라 국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들 국익을 포기하지 말기 바란다.

*** 부록 ***

필자가 백제 패망지에 대한 연재를 계속하자 두 네티즌이 아주 흥미있는 자료를 보내주었다. 다음은 필명 심제(心濟) 선생이 제공한 글이다.

(인용) 산동성에 있는 백마하를 따라가 보니,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수도라고 전해지는 임치(臨淄 사실 제나라는 전국시대에 산동에 이르지도 않았다 )와 8세기 고구려 유장 이정기의 제(齊)나라 수도 운주와는 관련이 없는 곳에서 백마하 주위에 산재하는 몇 개의 고성( 古城)이라는 지명과 백마창(白馬廠)이 있으며 그 중심부에 제왕성(齊王城)이 위치한 지도를 발견했다. 

▲  상단에 산동성 곡부시 동남쪽에 바로 옆에 제왕성(齊王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분명히 위의 두 제(齊)와 상관이 없는 지역에서 백제의 의미인 제(濟)에서 삼수변을 떼어버린 제왕성<齊王城> 이라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또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미군군사지도에도 백마하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이 지도에는 馬河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의도적이지 않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지역이 춘추전국시대의 제, 이정기의 제나라 지역이 아니라면 제왕성이라 표기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百濟 수도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인용 끝)

 
▲ 우측 상단 곡부 우측에 제왕성이 보인다.  청색 사각형이 백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지명들이다.

게다가 친절하게 대청광여도에 당나라 소정방의 침투로를 그려 주었다. 소정방은 협주(莢州-->陜州로 지명 바뀜)를 출발해 황하를 타고 오다, 진공로2와 같이 회수(淮水)로 들어가 덕물도(위치 미상)에서 신라태자를 만나고, 회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독산호)에서 백마하를 타고 도성(사비성)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기습 침투로 2와 같이 낙양에서 황하를 타고오다 회수로 빠졌다가 하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으로 들어가 사수 또는 백마하를 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남, 곡부, 비성 등에 백제 도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과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녕(濟寧)이란 도시도 백제와 관련된 도시로 보인다. 왜 유독 산동성에는 백제의 제(濟)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을까?

또 한 네티즌(필명 님의 침묵)은 곡부에서 찍은 성(城)의 사진을 몇 장 올리면서, 이것이 백제의 건축양식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만,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참고로 독자들을 위해 맨 끝에 사진을 올려 드립니다.

그런데 사진 중 옥으로 만든 말과 장식물은 분명 중국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동이의 문명인 홍산문화의 출토물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은 3황5제의 한 사람으로 동이족이었으며, 신라 김유신의 조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문화혁명 때 소호금천이 우리 동이족이라는 이유로 능을 파헤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인근에 있던 공자의 무덤은 멀쩡했다.

또 중국에 사는 교포 한의사 한 분은 필자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백제의 일백 백(百)자는 옛날에 ‘온’이라 했으며 시조 ‘온조’는 바로 백제를 의미한다고 했다. 다들 민족사를 바로 찾자는 취지로 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아직 있기 때문에 현재 매국식민사학자들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의 이론은 얼마 못 가 반드시 뒤집어질 것으로 본다. 

 
▲   산동성 곡부에 왜 성이 있을까?  성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  동이족의 성루 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사진. 서울의 숭례문 양식과 비슷한 곡선으로 치켜 올라가게 되어있다. 자고로 중국의 성루는 직선으로 천안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양식을 중국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성의 지붕이 우리 것과 비슷하다. 연변에서 조선족과 한족 집의 구분은 곡선이냐 아니냐로 구분한다.
▲  이 누각의 지붕 양식도 중국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곡선 양식은 중국의 것이 아니다.
▲  이 사진으로는 동이족의 건물인지 한족의 건물인지 구별이 어렵다
▲  동이족인 백제의 양식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성누각의 지붕. 숭례문과 비슷하지 않은가? 
▲   동이족으로 김유신의 조상인 소호금천의 능. 문화혁명 때 한족에 의해 파헤쳐 졌다.
▲  동이족의 문명인 홍산문명의 출토물과 아주 닮은 옥마와 옥장식. 이게 한족의 유물이라고? 

중립사학 08/06/02 [22:33] 수정 삭제  
  평양이 바로 낙랑국이라구요?
평양금석문을 종류대로 다 읽어보고 이런 같지도 않는 소리를 해대는지 모르겠구만.
겨우 점제현신사비 정도 읽어보고 위작이니 뭐니 나대지 말고
평양에서 발굴된 모든 금석문좀 읽어보고 그곳이 낙랑국이라고 헛소리나 해대시지요.

평양에서 연호가 있는 금석문을 보면
BC80연대부터 시작하여 AD330까지 나오죠.
어쩌면 그렇게 낙랑군 연도랑 딱 떨어질가요?
그것도 위작이라고 우기시려나
성훈 칼럼리스트 08/06/02 [22:59] 수정 삭제  
  중립사학님은 매국 식민사학계에 계신 분으로 보입니다.
낙랑군을 중국 사서에서도 하북성/산동성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대동강 평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여론에 밀려 요동반도로 밀어 냈습니다.

님의 말대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백제는 평양 앞바다에 빠져 있어야 합니다. 뭔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지요. 아직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우겨대는 썩어빠진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구만요.

점제현 신사비는 하북성에서 일제에 의해 평남 온산으로 옮겨진 것이라는 것이 북한에서 핵분열흔적법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음해성 댓글로 인정되어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습니다.
중립사학 08/06/03 [07:27] 수정 삭제  
  始元 86 – 80 BC
地節 69 – 66 BC
永光 43 – 39 BC
河平 28 – 25 BC
陽朔 24 – 21 BC
永始 16 – 13 BC
綏和 8 – 7 BC
建平 6 – 3 BC
元始 1 BC – 5 AD
居攝 6 – October 8 AD
初始 November 8 – December 8 AD
始建國 9 – 13 AD
建武 25 – 56 AD
永平 58 – 75 AD
光和 178 – 184 AD
興平 194 – 195 AD
正始 240 – 249 AD
嘉平 249 – 254 AD
景元 260 – 264 AD
泰始 265 - 274 AD
咸寧 275 - 280 AD
太康 280 - 289 AD
元康 291 - 299 AD
太安 302 - 303 AD
永嘉 307 - 313 AD
建興 313 - 317 AD
建武 317-318 AD
咸和 326 - 334 AD

평양에서 발견된 명문 중에 연호만 골라 온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낙랑군 존속연대와 비슷한가요?
이걸 다 일본군이 옮겨왔다구요? 하하 무슨 공상과학소설쓰십니까? 어디 신춘문예나 가보시죠.
이런 명문의 연도가 낙랑군 존속연도와 비슷하다는 것은 이 명문들이 낙랑군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자료 08/06/03 [08:33] 수정 삭제  
  아래와 같은 의견도....
정보는 많으니 비교해보고 답을 내리는 것이 네티즌의 현명한 판단이 될듯...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m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북한자료&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3

(북한)

(1) 해방전 일제 어용사가들은 강점기간 동안
평양인근 100여기의 무덤을 파헤쳐 한의 낙랑유물이라 날조하였지만

(2) 북한은 이후 그들보다 30배가 많은 3천여기의 무덤을 발굴정리한 결과
고조선을 이어받은 최씨의 낙랑국의 유적으로 밝혀졌으며
중국의 유물과는 현저히 다른, 오히려 앞선 유물로 판명되었다

→ “한나라 낙랑국 재평양설은 일본놈들과 반동사가들, 일부 대국주의사가들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라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북한사회과학원에서 다른 증거자료도 논문으로 많이 발표하였군요
성훈 칼럼리스트 08/06/03 [09:21] 수정 삭제  
  매국노 이완용의 질손으로 일제에 역사를 팔아먹은 민족반역자 이병도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설을 굳히기 위해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의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빼 버렸습니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우거왕과의 전쟁은 한나라의 패배로 끝납니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 종군을 합니다. 그런 한나라가 어떻게 식민지인 낙랑군을 설치할 수 있습니까?
이건 후대의 가필이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식민지 한사군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낙랑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종주국 전한는 왕망의 신나라에게 망하고 다시 후한이 서고 위오촉으로 넘어갑니다. 식민지 낙랑군이 종주국이 망해 바뀌는데도 어떻게 그대로 있습니까? 중국의 식민지는 다 그런겁니까? 대를 이어서 충성합니까?

국제학술대회에서 한심한 자는 중립사학 같은 이 나라 식민사학자들입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중국의 하수인이 되어 입 한번 벙끗 못하는 학술대회 그런 거 뭐하러 합니까? 자기 자리만 지켜주면 중국/일본이 어떤 역사왜곡을 해도 눈감는 강단의 그 잘난 식민사학자들. 이제는 그 자리에서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이상 우리 국민들의 정신을 멍들게 하지 마세요.
중립사학님은 자기의 자리 지킴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바로 찾는 일에 나서십시오. 그런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학자지, 거짓 역사나 학생들에게 가르치는게 학자입니까? 언젠간 제자들에게 거짓말쟁이 위선자란 말을 듣게 될 것 입니다. 그 때 얼굴을 어떻게 들라고 그러십니까?

이 나라 역사는 반드시 바뀝니다. 학생들의 52%가 현행 국사책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인터넷 세상입니다. 그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러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양심선언 하시란 말입니다. 그게 살길 아닙니까?
중립사학 08/06/03 [11:40] 수정 삭제  
  저 연호가 나온 명문에 대한 해석을 써야지,
다른 이상한 소리로 논점을 흐리지 마세요.
저도 저 북한자료 다 읽어봤습니다.
그 자료가 하는 말은 무덤 양식이 지나 양식이 아니라는 말만 하고 있지, 저 연호가 나온 명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고 있습니다.

논점을 모두 회피하지 마시고, 명문으로 나온 연호에 대한 해석을 쓰시죠.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못하기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으로 논점을 다른대로 돌리는 유치한 궤변은 하지마시죠. 재야사학자들이 이렇게 기본적인 학문의 자세가 뭔지도 모르기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허왕되다는 것입니다..
역사이야기 08/06/03 [12:38] 수정 삭제  
  중립사학 님

평양 유물에 위의 연호가 나온다 해서
그 지역이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유물에
명나라 연호인 숭정이 나온다고 명나라 유물입니까?

그럼 경주의 호우총에 광개토왕 명문이 나왔으니
왜 고구려 유적이라고 하지 않는거죠?
중립사학 08/06/03 [12:46] 수정 삭제  
  1) 제가 명문만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위만조선을 낙랑군으로 하였다는 기록도 존재하고, 명문도 존재합니다.
평양지역 명문을 명나라와 중세조선과의 관계와 비교하면 안됩니다.

2) 신라지역에서 광개토왕 명문이 나와 있기에 광개토왕 비문 해석이 가능해 진것이죠.

昔, 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家僕勾請□□□朝貢.
자고 이래로 신라(新羅)의 매금(寐錦)이 몸소 내조(來朝)하여 섬긴 적이 없더니, 국강상광개토경 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寐錦)이 가복(家僕)을 (이끌고) 와서 허리 굽혀 조공(朝貢)을 청하였다.

아시겠습니까?
왜 신라지역에서 광개토왕 명문이 나왔는지를...
위 인용한 광개토왕비문과 같은 역사가 있기에 광개토왕 명문이 신라지역에서 나온거죠.

저기 평양지역에서 중국 연호가 나온 이유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연호 연도를 따져보면 낙랑군 존속년도와 비슷합니다.
또한 연호가 써있는 명문이 한 두개 정도 나왔다면 그냥 흘러들어왔다고 볼 수 있지만, 연호가 있는 명문은 몇십개는 됩니다. 이걸 과연 흘러들어온 중국 명문이라고 볼수있는지 생각해보세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골고루 연호명문이 퍼져있죠. 거의 중국땅이라는 말입니다.

사서의 기록과 명문이 둘 다 존재하는데로 불구하고 둘 다 위작이라고 하는 것은 사학을 하자는게 아니라 소설을 쓰자는거죠.
역사이야기 08/06/03 [12:57] 수정 삭제  
  아 그렇습니까?

그럼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유물은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틀림없는 명나라 것이군요.

현재 우리가 2008년이라고 서기를 쓰면
미국(서양)이 되는 거군요.

중립사학님은 그런 의미로 보면
한나라와 위나라 또는 진나라 사람의 후예가 틀림이 없군요.
한강 이북이 중국 땅이었다고 우기는 걸 보니...

고맙습니다.
스스로 중국사람임을 알려 주어서.
중립사학 08/06/03 [13:05] 수정 삭제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기록과 명문 두 개 모두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명문만 존재한다고 하여 그나라땅이 되지는 않습니다.
낙랑군은 명문과 기록이 모두 존재하죠.
상황이 다릅니다.
자료 08/06/03 [13:07] 수정 삭제  
  내용중에 위만조선의 강역이 한반도라고 나와 있는 자료가 있나요? 조선열전 주석까지 다 읽어보아도 한반도로 왔다는 기록은 없는데? 서울대 이병도 박사도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하북성 난하유역 창려라고 한국상고사 입문 저서에서 주장하였는데....
다른 사서의 기록이 있다면야 모르겠지만...일본인들이 그 수많은 봉니도 위조 하였다고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검증한 논문을 발표하였다는데....사서의 기록과 맞지않는 유물이라 ?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건지 잘모르겠군요
이병도 박사 주장은 다음 링크로...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m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위만조선&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17
역사이야기 08/06/03 [13:10] 수정 삭제  
  낙랑군이 4세기까지 평양에 존속되었다구요?
넵 잘 알겠습니다.

그럼 BC 108년 한무제 때부터 AD313년 낙랑군이 멸망될 때까지의
낙랑태수의 계보를 알려 주시지요.
위에 열거한 연호와 함께 곁들여서 설명을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중립사학 08/06/03 [13:11] 수정 삭제  
  낙랑의 인구수까지 조사한 낙랑목간이 평양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창려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만약 창려에서 낙랑군 유물이 나오면 저도 평양낙랑군 주장을 철회하겠습니다. 낙랑군 유물이 발견된 곳이 오직 평양이라는 것은 그곳이 낙랑군이라는 말입니다.
낙랑군 유물이 다른 곳에서 발견된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중립사학 08/06/03 [13:14] 수정 삭제  
  모두 다 coo2를 링크하는 것을 보니 그곳에서 군사지원나왔습니까? 하하.

딴소리좀 했습니다.
역사이야기님 반문은 이겁니다.
만약 평양이 낙랑국이라면
저 연호가 나타난 연대에 대하여 낙랑국 왕의 계보를 말씀하여주시죠
역사이야기 08/06/03 [13:22] 수정 삭제  
  나는 낙랑국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또 낙랑국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도 않았구요.

내가 궁금한 것은 낙랑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가
전한 ▶ 신(新) ▶ 후한 ▶ 삼국 ▶ 진 으로
평양 땅에서 어떻게 이어졌냐 하는 것이 궁금한 거예요.

나한테 낙랑국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
내가 알고 싶은 것이나 알려주세요. 중국인의 후예님!

역사이야기 08/06/03 [13:29] 수정 삭제  
  중립사학님
중국인의 후예라 해서 화나셨나요? 미안합니다.

나는 중립사학님이 워낙 박식하신 것 같아
낙랑군에 대하여 깊이있게 알아보려 했는데 삐치셨나?

그러지 마시고요.
낙랑태수의 계보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중국인의 후예라 안할테니끼요. 힘내시구요. 꼭요.

자료 08/06/03 [13:38] 수정 삭제  
  어디에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평양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지 알려주시지요.
아무리 읽어봐도 그런 문구는 없는데...하북성 유역이라 기록되어 있다니까요.
평양에 있다는 사기 조선열전 원문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자꾸 이상한 말만 하시는군요.
설마 이병도 박사가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하북성에 있다고 거짓말 했다는 건 아니겠지요
하여간 평양에 있다는 기록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점제현신사비가 바로 하북성 갈석산에 있는 것을 일본학자 금서룡이 한반도로 가져왔다는 것이 증빙되어 사진까지 있는데 링크도 안보시나요.
중립사학 08/06/03 [13:43] 수정 삭제  
  기록에도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낙랑군이 하북성이 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저 명문의 연호에 대해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점제현 신사비가 난하 하류에서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저 명문의 연호를 해결하지 않으면 낙랑군 평양설을 타파하기 힘듭니다.

중립사학 08/06/03 [13:48] 수정 삭제  
  요동군 험독현의 주석입니다. 평양이 험독이라고 주장하는 재야사학자가 주로 인용하는 것인데 한문 해독을 잘못했습니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臣찬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師古曰瓚說是也
(험독현은) 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험한 물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라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저 험독은 왕험성과 관계없는 그냥 있는 험독이다. 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설이 옳다.
패수가 평양이라는 것은 신채호선생이 그랬죠. 낙랑군 패수현이 바로 평양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왕험성이죠. 험독은 왕험성과 관계없는 곳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요동성 험독은 왕험성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 중에 일부만 빼가지고 와서 험독이 왕험성이라고 하면 안되죠.
역사의진실 08/06/03 [14:00] 수정 삭제  
  후한서 권25에 이런 기록이 있군요.

古今注曰光武建武十年十月戊辰樂浪上谷雨雹傷稼
고금주에 이르기를,
광무 건무10년(AD34년) 10월 무진에 낙랑과 상곡에
우박이 내려 곡식을 상하게 하였다.

상곡이 어디에 있는 줄 안다면
이 낙랑이 한반도 평양이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자료 08/06/03 [14:07] 수정 삭제  
  이병도 박사가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하북성 창려라 하고 지도를 책에 그린것입니다.
사기조선열전 다 읽어 보셨나요.
글을 쓸때는 정확히 전체를 보고 올리셔야지요.
앞으로 올리는 글에 정확히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해석능력 운운하시는데 얼마나 님께서 해석을 잘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그정도 실력이 되나 지켜보지요
중립사학 08/06/03 [14:09] 수정 삭제  
  晉나라때 낙랑군을 평양 즉 패수와 연관이 없는 곳으로 옮깁니다.

진서 지리지를 보시죠.
진서 지리지 낙랑군에 패수현이 있는지를. 없습니다.
중립사학 08/06/03 [14:12] 수정 삭제  
  이병도가 창려를 하북성에 있다고 하면 왕검성이 그곳이 됩니까?
대체 이병도는 무슨 기록을 토대로 하북성에 왕검성이 있다고 하였는지 그 사료의 근거를 대시죠.
역사이야기 08/06/03 [14:15] 수정 삭제  
  바로 그거예요. 중립사학 님!!

진나라 때 낙랑군이 평양하고 상관이 없는 곳으로 옮겼다면서요.
그래서 신채호 선생도 이야기했다 하구요.

그런데 왜 4세기까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하세요?
논리적 모순이 있군요.
자승자박이네요. 중립사학님

아 참 그리고 낙랑군 태수 계보는
언제 알려줄 거예요?
모르면 모른다고 하세요. 그럼 안 물어 볼테니까. 알겠죠?
중립사학 08/06/03 [14:17] 수정 삭제  
  그렇다고 하여 晉 건립 이전의 연호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논리의 비약이죠.

낙랑군이 다른 곳에 있었다면 낙랑군 유물이 발견된 곳좀 말해보시죠.
다들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지말고
자료 08/06/03 [14:18] 수정 삭제  
  影宋百衲本을 기준으로 옮긴내용입니다
자 해설한번 해보시지요. 위만조선의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해설을 기다리지요

朝鮮
[正義 : 潮仙二音. 括地志云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集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 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應昭注 地理志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역사이야기 08/06/03 [14:20] 수정 삭제  
  위의 역사의진실님이 말한 후한서에
정말로 그렇게 되어 있나요?

그러면 낙랑이 상곡 근처란 말인가요?
놀라운 기록이네요.
또한 그 것이 후한을 세운 광무제 때의 기록이라면
굉장한 기록이네요.
중립사학 08/06/03 [14:24] 수정 삭제  
  자료님 한자 해석좀 잘해보세요. 그것은 제가 이미 썼습니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臣찬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師古曰瓚說是也
(험독현은) 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험한 물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라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저 험독은 왕험성과 관계없는 그냥 있는 험독이다. 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설이 옳다.
패수가 평양이라는 것은 신채호선생이 그랬죠. 낙랑군 패수현이 바로 평양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왕험성이죠. 험독은 왕험성과 관계없는 곳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서에서 왕험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신찬의 말을 인용한 것을 가지고 일부만 빼와서 주장하는 것은 사기치는것입니다.
자료 08/06/03 [14:29] 수정 삭제  
  읽어보시고 글 올리세요. 기본이 안되었군요. 님이 인용한 구절이 어디나오는지는 알고 언급하시는지요. 사기조선열전 기록을 먼저보고 다음진도를 나가야지요...
중립사학 08/06/03 [14:34] 수정 삭제  
  한서지리지는 자료님이 인용한 집해 색은보다 더 권위있는 사서입니다.
중립사학 08/06/03 [14:36] 수정 삭제  
  저의 논점은 저기 명문에 대한 연호의 해석입니다.
왜 다들 다른 것 가지고 그러시는지요.

낙랑군이 다른 곳에 있었다면 그곳에서 발견된 명문을 보여주시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명문은 이미 세상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자료 08/06/03 [14:39] 수정 삭제  
  사기와 한서지리지 비교를 하시다니...어쨌던 님의 해설 솜씨를 한번보지요
사기의 기록을 검토하고 한서지리지 해설 누구것이 맞나 비교해 보지요
자 해설 부탁드립니다. 위만조선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지요
이병도 박사가 본 기록입니다. 하북성 창려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지도를 그린 근거기록입니다.
제가 해설해 드릴까요.
한반도에 있다는 기록이 있으면 추가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시간은 많으니 차근차근 토론해 보지요
성훈 칼럼리스트 08/06/03 [14:39] 수정 삭제  
  김부식은 에서 분명 낙랑과 백제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백제 위례성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역으로 풀어 낙랑국이던 낙랑군이던 그것이 평양에 있었다면 백제는 평양 앞바다에 빠져야 합니다. 물론 말갈도 요녕반도 앞바다에 빠져야 합니다. 바다 속에 나라를 어떻게 건국합니까? 그러니 낙랑이 평양이라는 어거지는 여기서 안 통합니다.

말갈의 석문성이 석가장입니다. 그럼 낙랑군이 어딥니까? 하북성 동쪽 아닙니까? 원 세상에 우길 것을 우겨야지. 식민사학 티 내는 겁니까?

어차피 식민사학계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낙랑군=평양 설은 사료적 근거가 없습니다. 낙랑에 대해서는 이병도가 차라리 낫습니다. 현재는 식민사학계가 낙랑군을 압록강 너머 요녕성에 가져다 놓았더군요. 그런데도 중립사학님은 낙랑군=평양 설을 아직도 주장합니까? 그런 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강단은 아니 것 같고.... 강단을 무조건 추종하는 맹신도인 것 같습니다.

여기다 댓글 달려면 동서남북 방위부터 배우고 사서 더 읽고 공부해서 들어 오세요. 님의 글은 주제와 상관없는 시비성 댓글로 밖에 안 보입니다.
중립사학 08/06/03 [14:41] 수정 삭제  
  뭔 해설을 해달라는건가요?
자신의 논리는 피지 않고 남이 논리를 피면 그곳의 헛점을 파고들어 남의 논리가 틀렸다는 것을 말하려는 이상한 수법을 쓰고 계시군요.
저는 이미 한서지리지 해석을 해드렸고 재야에서 부분만 인용한 것은 전체문장을 다봐야 맞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왕험성은 험독이 아니라 패수라고 저기 한서지리지 제가 번역한것을 보시면 압니다.

님의 논리는 뭔가요?
중립사학 08/06/03 [14:43] 수정 삭제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고 그중 하나가 패수현 즉 평양입니다.
백제는 낙랑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지 패수의 서쪽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좀더 공부좀 하시죠. 군과 현도 구분못하면서 이런 글을 어디서 짜집기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성훈님의 주장은 군이 뭔지도 현이 뭔지도 모르는 아주 초보자의 주장입니다.
백제의 동쪽에 있던 현은 낙랑군 패수현이 아니라 낙랑군 제일 서쪽에 있던 현이겠죠. 저는 이곳이, 추측이지만,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성훈님은 사서를 토대로 주장을 하시죠. 낙랑군이 하북이라고 어디 나옵니까?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것이 사서에 나오는 것처럼 말하지마세요.
역사이야기 08/06/03 [14:50] 수정 삭제  
  중립사학님이 주장하는 평양=낙랑군 설은
정통적인 학설로 되어 있지만 잘못된 판단입니다.

광개토왕 비문과 사기 원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실력이 대단한 줄 알았는데 기존의 한계만 드러냈습니다.

인식은 깨져도 아프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셔서 후손들에게 최소한 역사왜곡을 한 것에
동조를 했다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님의 한계는 여기까지인 듯 하니
더 이상의 토론은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건필하시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열공!!
성훈칼럼 08/06/03 [14:55] 수정 삭제  
  낙랑군과 현에 대해서는 본 주제와 다르기 때문에 언급을 안했습니다. 그거 다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 간단히 사진으로 대체했습니다.

하나 물어 봅시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낙랑은 낙랑군입니까? 낙랑국입니까?

백제가 낙랑의 서쪽이라는 것은 인정하면서 낙랑이 평양이라고 하면 백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낙랑이 함흥에 있고 백제가 평양에 있다고 하면 방위는 일단 맞습니다. 내 얘기가 뭔 말인지 아십니까?

님은 기본적인 동서남북조차 틀리고 있습니다. 뭔 말같은 얘기를 해야 대꾸를 하던지 말던지 하지. 동서남북도 모르면서 뭔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님은 비실명이고 나는 실명으로 댓글 달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소속과 관등성명과 주민번호를 대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그러지 않고 음해성 댓글을 달면 앞으로 대꾸도 안합니다. 뭔 말같은 말을 해야 대꾸를 할 것 아닙니까?
자료 08/06/03 [14:56] 수정 삭제  
  님은 원문 해설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기조선열전을 보고 한서지리지 기록을 인용하는 순으로 보는게 옳을 것입니다

[정의]
조선(潮仙) 2개 음이다. 괄지지에서 말하길, 고려는 도읍이 평양성이며,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검(험)성이며 또 옛부터 말하기를 조선땅이라 한다.

[집해]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하였다.

[색은]
위소가 이르길 ‘험독은 (위만조선의) 옛 도읍 이름이다’. 서광이 말하길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는 지리지의 주(注)에서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 하였고, 신찬은 ‘왕험성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창려(昌黎) = 험독(險瀆縣) = 왕험성(王險城)”이라는 말입니다.
그 창려는 하북성 창려입니다.
위만조선은 여기를 벗어날수 없습니다.

그다음 창려에 대해 토론해 볼까요.
한서지리지 기록 해설은 천천히 사기 조선열전 기록 검토후 다시해 드리지요.
수경주에 나오는 강 이름도 미리미리 읽어놓으시는게 좋을겝니다.
님에게 질문할테니...감당이 될지 모르지만...
하여간 끝까지 한번 가보시지요...원문 해설 부탁드리면 꼭 해주시길 바랍니다.
중립사학 08/06/03 [14:56] 수정 삭제  
  저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자세가 아닙니다.
평양=낙랑군이 잘못되었다고 하려면, 왜 그런지 반론을 피세요.
그렇게 자기 주장없이 무조건 틀렸다는 자세는 어느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평양=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군 패수현"=평양 입니다.
낙랑군 조선현은 저기 난하로도 갈수있겠죠. 이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중입니다.

한서에 나온 낙랑군 모든 속현이 다 한나라 땅이 될 수 없는 것은 낙랑군 동이현이 비류국왕의 땅이라고 한 것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요사지리지에 나옵니다). 즉, 낙랑군 패수현 근처는 한나라가 주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머지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뺏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구려가 낙랑군 동이현에서 시작하였다고 봅니다. 졸본부여는 바로 진번군이고 임둔군을 합병하였다는 것은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즉 이렇게 되면 지나의 낙랑군은 평양에 동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둔군 진번군 등이 다 고구려 땅이 되기때문이죠. 그렇다면 지나의 주권이 낙랑군 패수현까지 미칠까요? 미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반독립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삼국사기에서는 낙랑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속은 漢이기에 명문에 漢의 연호 등이 나오고 지나 문물이 발견되는 것이죠.

무조건 아니라 하지말고 논리적으로 타파하세요.
중립사학 08/06/03 [14:58] 수정 삭제  
  험독현 왕험성이 아니라고요. 색은보다는 한서가 더 권위있는 사서입니다.
집해 색은 등은 후대의 주석이지 사마천이 쓴 것이 아닙니다. 집해와 색은의 저자가 사마천이라고 알고계신다면 큰 실수하시는 것이죠.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臣찬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師古曰瓚說是也
(험독현은) 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험한 물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라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저 험독은 왕험성과 관계없는 그냥 있는 험독이다. 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설이 옳다.

이거 뭔지 이해안되십니까? 험독이 왕험성이라고 말한 것은 틀렸고, 낙랑군 패수현이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님은 지금 이 구절 중에 사고가 틀렸다고 말한 응소의 말만 쏙 빼온 것이에요. 아시겠나요?

"'A는 B이다'라는 것은 틀렸다"라는 기록 중에 "A는 B이다"만 인용해와가지고서는 A=B라고 하는 것은 사기치는 것입니다. 응소의 말을 틀렸고 신찬의 말이 옳다고 한 사고의 말은 왜 쏙 빼버리십니까? 하하.
성훈 칼럼리스트 08/06/03 [15:08] 수정 삭제  
  님은 백제가 낙랑의 서쪽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낙랑=평양이라고 합니다. 그럼 백제는 어디입니까?
이것이 님의 판단이 잘못이라는 증명입니다.

님이 인용하는 사서 나도 다 읽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독자들은 그런 것 잘 모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방위가 맞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선 동서남북이 안 맞는데 사서의 기록을 인용해서 무엇합니까? 휏갈리만 할 뿐입니다.

이건 님의 사서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만천하에 알리는 꼴 밖에는 안됩니다. 그러니 더 망신 당하기 전에 음해성 댓글은 그만 두세요. 그리고 관등성명 대고 실명으로 이론적으로 붙어 봅시다.
중립사학 08/06/03 [15:11] 수정 삭제  
  군과 현도 구분못하는 성훈님.
낙랑은 군이고 평양 즉 패수는 현입니다.

백제가 낙랑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평양의 서쪽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낙랑군이 25개의 현을 가지고 있는데 겨우 평양만하겠습니까? 적어도 압록강너머까지는 가야죠. 그래서 백제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는 것이죠. 그러나 백제의동쪽에 패수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제의 동남쪽에 패수현이 있는 것이죠.

현과 군을 구분 못하니 동서남북이 안맞는다는 소리나 하고 있죠. 낙랑군 조선현 여기는 아마도 난하 동부즘 되겠죠. 명일통지의 조선성이 낙랑군 조선현일 것입니다. 백제는 이곳의 서쪽이 되겠죠.

군과 현을 구분좀 하시죠. 낙랑군과 패수현을 같다고 보는 자가 무슨 기사를 쓰시나요. 공부더하고 기사좀 쓰시죠.
자료 08/06/03 [15:17] 수정 삭제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이 기본입니다.
그다음에 후한서지리지 인용하셔야지요. 선후는 아시겠지요. 기본이 있으신 분인지...
원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기의 기록과 한서지리지 기록을 잘보세요.
그래도 이해 못하면 수경주 패수조나 창려 등 지명을 설명해 봐야 소용이 없겠군요
님은 함정에 빠져있어요
이병도 박사 눈이 잘못되었거나 님 눈이 잘못되었거나 둘중 하나겠지요
님은 저명한 학자인지 모르겠으나 서울대 이병도 박사가 헛소리 한건 아니겠지요
이것으로 마감합니다. 님 공부더하시고 오시길 바랍니다.

漢書 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 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浿音普大反

응소가 이르기를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이다. 물이 험한 지역에 의지해 살기 때문에 험독이라 한다.”
신찬이 이르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곳은 이로 인하여(또는 이 때부터) 험독이다.”
사고가 이르기를, “(신)찬이 말한 곳이 이 곳이다. 패(浿)의 음은 보대의 반절음인 ‘배’이다.”
중립사학 08/06/03 [15:22] 수정 삭제  
  하하.

瓚說是也 신찬이 말한 곳이 이곳이다. 이곳을 험독이라고 보시는군요. 맞죠?

국어실력도 떨어지시는군요.

1) 신찬이 이르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것과

2) 瓚說是也 신찬이 말한곳이 이곳이다 즉 험독이다.

이것을 말하려는 거죠? 하하.

님의 해석대로라면 (요동군 험독현)=(낙랑군 패수현) 이네요.
하하.
문장독해능력이 안되는 것은 자료님이십니다.

조선사연구초에도 신채호선생은 瓚說是也를 신찬의 설이 옳다라고 해석하였고, 자료님처럼 해석하는 자를 꾸중하셨습니다. 한번 한서를 보면서 찬설시야가 몇번이나 나오는지보세요. 그곳에서도 "신찬이 말한곳이 이곳이다"라고 해석이 되는지를.
중립사학 08/06/03 [15:38] 수정 삭제  
  前漢書卷二十四上
服䖍曰與之三升也
臣瓚曰當言三斗謂治田勤則畮加三斗也
師古曰計數而言字當為斗瓚說是也

服䖍이 말하기를 與는 三升이다.
臣瓚이 말하기를 당연히 三斗라고 해야하고 밭을 잘 관리하는데 있어 고랑을 三斗씩 더하는 것이다.
師古가 말하기를 숫자를 따지는 것이므로 당연히 글자는 斗가 되어야한다. 신찬을 설이 옳다(瓚說是也)

이런 문의를 알지 못하고 찬설시야를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시죠.

지금까지 재야사학자들이 한문해독실력도 모자라서 얼마나 국민을 우롱하였는지 보시죠.

"개똥이는 A=B라한다", "소똥이는 A=C라한다", 소똥이가 옳다

즉 A=C인데 재야사학자들은 개똥이의 말만 인용하여 A=B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6/03 [15:40] 수정 삭제  
  님은 마치 낙랑이 대제국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낙랑이라서 종주국이 전한-->신-->후한-->위오촉 으로 바뀌어도 존재했는가 봅니다. 몇 대를 이어서 종주국이 바뀌어도 식민지를 했단 말입니까? 오~호 이 세상에 그런 식민지도 있습니까?

님은 아마 중국인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낙랑에 대해 기를 쓰고 홍보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관등성명을 대고 이론으로 붙자는 겁니다.

낙랑이 님의 임의대로 압록강 너머까지 가는 것도 좋은데 그럼 도대체 그런 낙랑의 서쪽인 백제는 어디입니까? 낙랑의 예를 안 들어도 백제는 산동성 일대라는 것이 본 글에서 드러납니다.

모든 방위의 기본은 그 나라의 수도나 중심지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마세요. 전 우리 신문사 독자들의 알 권리를 지켜 드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실명으로 일개 엉터리 댓글 달아 음해하려는 사람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백제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성이었던 석문과 대방은 어디입니까? 낙랑의 위치가 맞으려면 그것도 맞아야 합니다. 석문이 어디죠? 대방이 어디죠?

한가지만 가지고 아니다라고 우기려니 다른 것에서 도대체 앞뒤가 안 맞고 있습니다. 제 글은 낙랑은 백제의 위치를 밝히는 한 개의 요소일 뿐입니다. 그런데 님은 마치 낙랑이 백제의 위치 비정의 전부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엉터리로....

석문과 대방의 위치부터 말해 보세요. 백제의 북쪽인 말갈의 석문성과 대방의 지명은 어디로 놓아야 백제와 낙랑의 위치가 톱리바퀴처럼 이빨이 딱 맞을까요?
위치 비정은 인접국과의 기록과도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는 학설입니다. 석문과 대방의 위치를 설명 못하면서 낙랑이 어디에 있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중립사학 08/06/03 [15:54] 수정 삭제  
  아주 소설을 쓰고 계십니다.

畿輔通志卷四十
石門城在撫寜縣東北九十里山海關西北四十里
석문성은 무령현 동북 90리에 있다. 산해관 서북 40리이다.

낙랑군 조선현이 난하 근처이고 이곳 서쪽이 백제이므로 제가 말한 것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산해관 서북 40리면 제가 주장하고 있는 백제의 북쪽임이 분명합니다.

산해관이 어딘데 저기 석가좌? 하하하 지나가던 개가 웃습니다.
웃기고 있습니다.
성훈씨 잘 알지도 못하면 가만히 계시죠.
어디서짜집기 했는지 맞지도 않는 지리비정을 가지고 참 긴글을 잘도 썼습니다.
이런것을 기사라고 쓰면서 국민들앞에서 거짓말 하지 마세요. 이름이 비슷하다고 하여 아무런 기록의 근거도 없이 석가좌가 석문성이다라고 주장합니까? 하하.

석문성은 석가좌가 아니라 산해관 서북 40리에 있습니다. 역시 난하 근처죠.
성훈 칼럼리스트 08/06/03 [16:03] 수정 삭제  
  석문과 대방이 어디인지 그것부터 말씀하세요.
우리 독자들은 그것이 아주 궁금하답니다.
내 질문에 답은 못하면서 그런 음해성 발언 함부로 하지 마세요.

주장이 다른 것이 아니고 님이 엉뚱한 소리를 자꾸 하니까 그런겁니다.

석문과 대방부터 우리 독자들을 이해시키세요. 그래야 님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못하면서 그런 식으로 함부로 막나가는 답을 하면 곤란합니다.

사서 백날 들이대봐야 우리 독자들은 모릅니다. 간단히 설명하시라니깐요. 험독이 낙랑하고 관련이 있는지 우리 독자들은 잘 모릅니다. 차라리 말갈과 대방 이야기를 하는게 이해가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민족사학을 지키고 국민들에게 지금까지 식민사학계가 잘못 알려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린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근거없는 허튼 소리는 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식민사학계는 국민들의 귀와 눈과 입을 막고 영웒히 그 자리에 있고 싶지만 세상이 그걸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 지금은 인터넷 세상입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국민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님 뿐만 아니라 식민사학계는 내 글을 보면 펄쩍 뛸겁니다. 그러나 님들의 세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전부 제자들에게 사기꾼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들을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런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역사의 진실을 밝힐 겁니다.

우리가 실력이 없는지 아십니까? 식민사학계를 이기려면 그 이상의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엉터리 이론 가지고 함부로 덤비지 마세요.
중립사학 08/06/03 [16:07] 수정 삭제  
  석문성이 이제 난하 근처라고 기록에 나왔는데,
성훈님은 어떤 근거로 석문성이 석가좌라는 비정을 했는지 말해보시죠.
그냥 이름이 비슷하여 찍은 겁니까?

석문이 왜 석가좌인지부터 말씀하시죠
저는 기록에 석문성이 산해관 서북 40리에 있다고 보여드렸습니다.
지나가다 08/06/03 [16:16] 수정 삭제  
  위의 중립사학님이 꼭 구리넷에서 활동을 하던 이희석님 같네요. 맞나요?
성훈 칼럼리스트 08/06/03 [16:22] 수정 삭제  
  석문이 산해관 서북 사십리란 고지도를 첨부하세요. 내 지도는 이미 올라가 있습니다.
석문이 거기라면 대방은 어디입니까? 그럼 백제는 발해만 창려 앞바다에 빠져야 합니다.

산해관 가보셨습니까? 나 거기서 살다 온 사람입니다. 하북성 진황도시 산해관구를 말합니다. 진황도시는 산해관구, 해항구, 북대하구 3개의 구로 되어 잇습니다. 난 그곳 구석구석을 잘 압니다. 석문이 그곳에 있다는 고지도 첨부하세요. 그리고 현재의 지명을 대 보세요.

사서에 많이 나오는 석문은 그곳이 아니라 하북성 성도 석가장(좌가 아닙니다)입니다. 석가장 가 보셨어요? 난 가 봤습니다. 산해관에서 석가장까지 버스로 6시간 걸립니다. 북경이 중간 기착지입니다. 그 곳은 하북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물론 동명의 지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석문은 하북성 성도 석가장입니다. 왜 성도인지 아세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산해관 서북 40리가 어떻게 중요한 성입니까? 산해관 서북이면 연산산맥 안에 있는 갈석산이거나 다른 산일겁니다.

사서에서 말하는 석문은 그곳이 아닙니다. 쑨원의 중화민국이 들어 오면서 1910년 석문은 석가장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제대로 알고 대답 하세요. 그런 식으로 답하니까 내게 욕먹는 겁니다.
더이상 님의 수준으로는 저와 대화가 안되고 본 신문만 더렵혀지니 그만 하렵니다. 공부 좀 더하고 나중에 또 봅시다.
중립사학 08/06/03 [17:00] 수정 삭제  
  기록에 석문성이 산해관 근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훈씨는 석문이 어딘지 기록도 없고 지도도 없습니다.

저는 둘 중에 하나만 보여줬지만, 성훈님은 둘 중에 하나도 보여주지 못하고, 석가장 가봤다는 주관적인 입장만 표명하고 있습니다. 석가장에 가본거랑 석가장이 석문성이라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학문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석가장이 석문이라고 주장하려면 기록이나 지도나 둘 중에 하나는 보여줘야되는것입니다. 그곳에 가본거랑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중립사학 08/06/03 [17:03] 수정 삭제  
  지도에 보니 산해관 서북에, 동북 장성 바로 밑에 존재합니다.
石門寨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제가 인용한 石門城在撫寜縣東北九十里山海關西北四十里亦曰石門寨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20세기 초만하더라도 존재하고 있군요.
중립사학 08/06/03 [17:09] 수정 삭제  
  어디에 그렇게 나옵니까?
중립사학 08/06/03 [17:32] 수정 삭제  
  畿輔通志卷四十四
正定府, 正定縣, 城南為五里舖十里舖石家莊舖壇馬舖
정정부 정정현 성 남쪽을 五里舖, 十里舖, 石家莊舖, 壇馬舖로 하였다.

석가장포(石家莊舖)가 지금 석가장입니다.
청나라때부터 있었던 곳이 석가장입니다.
석문성이 석가장이 아닙니다.
석문은 저 위에 난하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서에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동군 험독현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서에서 인용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왕험성이 험독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전 갑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6/04 [00:45] 수정 삭제  
  참으로 중립사학님은 끈질기고 시간도 많으십니다. 하루 종일 컴 앞에서 사시나 봐요. 전 바빠서 즉각 답을 못 드립니다. 내일은 출장입니다.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전 진황도에서 살아 산해관을 잘 압니다. 산해관은 말 그대로 산과 바다가 만나는 천연의 요새입니다. 명나라 장성이 산해관의 노룡두 해변에서 시작하여 산해관을 거쳐 바로 각산의 장성으로 이어집니다. 이 장성이 북경으로 이어져 감숙성까지 가는 말 그대로 만리장성입니다.

그런데 이 장성은 명나라 때 쌓은 것이라 님이 인용한 기록의 사서와는 무관합니다. 그리고 산해관 서북 사십리면 산 속입니다. 님이 인용한 기록도 동북장성 바로 밑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각산부터 이어지는 장성이 지나는 곳은 다 산 꼭대기로 거기는 평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돌산입니다. 서북 사십리면 대충 그 유명한 갈석산 바로 북쪽이 됩니다.

그런데 에 보면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말갈병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에 진영을 만들고, 신라왕(문무)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방어케 하였는데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백제 땅에서 몰아내는 광경입니다. 여기서 석문(石門)이라 함은 현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石家庄)이고, 대방은 석문 아래로 접한 곳입니다. 분명 당나라는 석문의 들(石門之野)에 진영을 만들었다고 되었습니다. 신라는 석문과 접하고 있는 대방의 들(帶方之野)에 군영을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님이 말하는 석문에는 당나라와 신라가 전쟁을 할만한 평지(野)가 없습니다. 산 속에서 싸우는데 두 나라가 들(野)에 진영을 핀다고 김부식이 적었겠습니까? 님이 인용한 석문은 연산산맥이 대부분 돌산이기 때문에 돌로 만든 문이란 뜻일 겁니다. 당연히 장성 중간 중간에 있는 성루의 문은 돌로 만든 문입니다. 그래서 석문성이라고 했으리라 봅니다.

석문이란 지명으로 불리우다 1910년 경 중화민국 정부에서 석가장으로 이름으로 바꿉니다. 님이 석가장을 어디서 발췌해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한자가 다릅니다, 님의 석가장은 石家莊이고, 내가 말한 하북성 성도 석가장은 石 家 庄 이렇게 씁니다. 두 글자는 발음도 틀립니다. 莊은 Jiang(지앙)이고, 庄은 Zuang(주앙)입니다. (문제는 한국의 모든 다움 등 검색창에서 石家庄의 庄을 전부 莊으로 잘못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님이 이상한 기록을 거기서 빼냈나봅니다.)

더 이상 님이 억측만 부리고 이상한 기록을 들이대며 궤변을 늘어놓으니 토론이 안 됩니다. 난 맨 처음에 님이 강단사학자인줄 알았는데 토론을 하다보니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기사 강단이 이런데 들어와 저하고 이론적으로 싸울 리가 없지요.) 그 유명한 석문이 석가장인 지도 모르는 분하고 괜한 입씨름만 했습니다 그려. 석문이 석가장인 것은 웬만큼 사학하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희한한 인용을 해 가지고 와서는 이곳의 독자들을 현혹시키는지 그 재주는 참으로 가상합니다만, 재주는 있으나 실력이 있는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괜히 선수에게 달려들었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계세요. 그게 님을 위한 길입니다.

난 내일부터 출장이라 컴을 볼 시간이 없으니 이제 다른 분하고 상대하세요. 그리고 님은 저의 상대가 못되니 이미 님과의 토론의 승부는 끝났습니다. 더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을 하지 맙시다. 나 바쁜 사람입니다. 한가로이 관등성명도 안 밝히는 님과 토론할 시간 없는 사람입니다. 언제 내가 시간내 일일이 댓글에 응답하는 것 봤습니까? 그리고 난 님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궤변(쏘피스트)을 가지고 내게 덤빌 사람은 이XX씨 밖에 없습니다.

아참! 그리고 석문이 나와있는 고지도는 우적도를 참고하시고, 본문 속의 지도에 대방과 붙어있는 석문을 참조하세요.
윤복현 08/06/04 [01:12] 수정 삭제  
  [한단고기][삼국사기]중국문헌 [삼국지-동이지전]를 종합해 보면 온조는 10여명의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그래서 온조백제를 10제라고 하는 겁니다) 단군조선시대 진한과 번한의 중간지점이자,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하고 북쪽으로 대하가 흐르는 외진 곳에 위치(발해만 지역)에 정착하고 나라를 세워 고추모에게 어하라(여왕)라고 칭호를 받았던 소서노와 비류를 떠나 마한지역으로 남하했고,백제는 50여개국이 존재한 마한에 속해 있습니다.

단군3조선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에 세워진 [삼한]은 마한.변한(변진).진한입니다. [삼국지-동이지전][만주원류고]에서는 [한]으로 표기합니다. 이 [삼한]의 둘레(사방)이 4천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과학적으로도 거의 정확히 맞습니다.

마한은 바로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서쪽지역에 위치하고 진한은 동쪽에,철이 많이 생산되는 변진(변한)은 진한 밑 그러니까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조백제는 서쪽으로 대해(바다)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은 당나라 소정방이가 서해를 건너서 백제정벌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울 풍납토성 백제 유물들과 부여.공주에서 백제왕들의 무덤들과 지석들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해 주고 있는데, 소설을 쓰고 있는 성훈님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중국에 백제를 고정시키는 건 자신의 자유이지만, 여러 문헌들을 객관적으로 종합해 볼 때 허구적인 논리에 불과합니다. [한단고기][삼국지-동이지전]이나 제대로 이해하고 논리를 폈으면 합니다. 욕 먹습니다. 역사가지고 장난치는 건 범죄행위입니다.

바다를 의미하는 [대해]를 평야나 강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자기합리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고대인들이 강이나 바다를 하나 구분 못해서 강이나 평야를 [대해]라고 기록합니까? 큰 강이란 의미는 [대하]라는 용어도 있는데, 굳이 [대해]라고 표기합니까? 문헌들을 종합해서 객관적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독립군만세 08/06/04 [19:47] 수정 삭제  
  윤복현씨는 철저한 반도사관론자입니다. 이병도에게 이미 세뇌당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잘 모르는 분이며 결국 그로 인해 큰일낼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매국식민사관의 이론이란 삼국을 한반도에 몰아 넣는 것입니다. 삼국을 한반도에 밀어 넣으면 그 전신인 삼한이 한반도에 있어야 하며, 삼한이 한반도에 있으려면 위만조선이 바로 위 북쪽에 있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위만이 점령한 번조선의 왕검성은 대동강 평양이란 말입니다. 그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나라가 4군을 설치한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즉 북한 땅은 본시 중국 땅이었다는 동북공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해서 반도사관은 역사적 사실도 아니며, 북한 땅이 한4군이라는 이론과 같으므로 아주 위험한 사관입니다. 즉 매국사관인 것입니다.

다행히 사기나 한서를 분석해 보면 낙랑군은 산동성과 하북성 동부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삼한은 황하와 회수 중간이고, 삼국은 대륙 동부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역사는 유물과 사서로 같이 풀어야 합니다. 유물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풍납토성의 근초고왕의 피라밋입니다. 그게 어떻게 백제의 양식입니까? 고구려 것이지.... 유물은 발표하는 자의 마음대로입니다.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것이 유물입니다. 엉터리로 발표된 유물만을 100% 믿으면 귀하같은 사람이 됩니다.

윤복현씨의 글을 여기서 읽으면 아주 애국자이며 민족주의자인 것 같은데, 역사에 대한 인식은 반도사관으로 반민족 행위자 같습니다. 그건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래서 선입감을 버리고 역사를 더 공부하고 아셔야 합니다.

역사를 가지고 장난치는건 이 나라 식민사학자들과 그 동조자들로 일급 범죄자입니다. 욕먹어야 합니다.
海를 바다로만 해석하면 (강소성) 해지방으로 들어간 기준이 바다에 뛰어 들어가 죽었다로 해석됩니다. 한자는 원래 뜻이 많은 굴자입니다. 해석에 조심해야 합니다.
한 대학생 08/06/05 [00:05] 수정 삭제  
  항상 좋은 글 고맙고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알고보니 중국 대륙의 노른자 땅을 가지고 있던 강력한 백제였는데, 왜 우리는 항상 외적의 침략을 받은 약한 민족이었다고 선생님들이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어요.

백제 무왕 승하 시 당 태종이 상복입고 곡을 할 정도면 백제는 당나라의 황제국 아닙니까? 이세민은 일개 제후이고요... 근데 왜 학교에서는 이런 것을 안 가르쳐 주는지...

성선생님 글대로 교과서가 써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위대한 나라 만세!!! 자랑스런 나라 만세!!!
김성겸 08/06/05 [01:04] 수정 삭제  
  서부 인근 정도가 이고,
옛 주변인 정도가 의 초도일 것...
이라는 생각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성훈님...
의 주도인 "서도"가 현금 주변으로 압축되어 가는 상황에서
살피건대, 는 와 더불어 다투긴 하지만 당연히 의 남방이며
그 밑으로 들과 가 배열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 옛날 BCE 1세기 말경에 가 품에 를 안고 있을 때,
그 가 남방의 한 왕국을 합병하려고 의 지류 까지
다다랐었다는 史實을 공개하면, 기절초풍할 사람들 많을 것이고,
그들의 저항으로 우리들이 좀 고생을 할 것이란 느낌이 듭니다.

옛의 땅 이남에서 시작되어 잠시 있다가 사라진
이란 나라의 뜰 을 제자리에 놓지 못하는 사학들의,
즉 이리저리 손때 묻은 지리지나 사서들의 각주 또는 주해에 농락을 당하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하여 주기가 수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훈님, 분투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조재범 08/06/05 [23:14] 수정 삭제  
  [사기]에 인용된 주석엔 '낙랑 수성현은 만리장성의 기점이고 동으로 갈석에 이른다'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지금 평양 지역에 만리장성의 잔해가 있고, 갈석산이 있는가? 그대가 하는 말은 이병도의 말과 같다. 또 낙랑태수 유헌이 왕조한테 살해당하고 왕조가 낙랑태수를 자처하자 낙랑인이 왕조를 죽인 일이 [한서]에 있는데 그 때 주석으로 '낙랑은 군이며, 옛 조선국이고, 요동에 있다.'라고 되어있다. 그럼 최소한 요동반도 일대에 낙랑군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상고 시대의 요동, 요서 구분법과 지금의 구분법이 다르니 더 서쪽으로 가야한다. 에 든 장성은 진나라 때 쌓은 장성인데, 북경대학교 역사부도엔 진 장성은 태행산맥 동쪽을 넘지 못 하고 있다. 태행산맥 일대엔 옛날에 갈석산으로 불렸던 백석산이 있고, 장성의 잔해가 있으며 그 동쪽에 수성현이랑 한자가 같은 수성이 있다. 바로 그 자리에 낙랑군이 있었단 말이다. 알겠는가? 이 배움 적은 자여. 그리고 자꾸 유물에 집착하는데 이미 그것은 북한 학자들이 상당수가 날조되었거나 혹은 독자 세력의 유물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 잘난 '초원 4년 현별 호구다소'란 목간. 그것도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인터넷상이건 서적 상에서건 사진 한 장 내놓지 않고 있다. 왜 사진 한 장도 내놓지 않고 뻐기는가? 그것부터 말해보아라.
그리고 석문이 석가장이란 것은 이렇다. 석문과 석성은 [남제서]에 청하(淸河)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청하는 지금도 하북성 지역에 있다. 그리고 중화민국 지도에까지 석문은 청하 서쪽에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때 발간된 지도를 보면 그 자리에 석문 대신 석가장이 표기되어 있다. 이것이 석문=석가장이 아니겠는가? 석가장 지역은 들판이고 하니 석문이 석가장이란 것엔 의심할 바가 없다.
그대같은 헛소리나 주절거리는 사대사관, 식민사관에 물든 자는 다시는 나타나지 말았으면 한다. 여기와서 식민사학 홍보하기 전에 사서 한 줄 더 읽고 오도록 하라!
일반인 08/06/08 [15:54] 수정 삭제  
  흥미진진한 내용들과 반박에 반박...
나름대로 노력하시는 모습들에 박수를 보냅니다.
문득 생각난게 있어서요...
백제가 산동성에 있다면 백마강(백강)도 중국 땅에 있다는 얘기인데요...
삼국지에 보면 원소가 남하하는 것을 조조가 백마강이란 곳에서 요격하면서
그 유명한 '관도대전'이 펼쳐진다고 하는데...
물론 여기서 조조가 대승하면서 하북의 패자가 되죠...
그렇다면 이 시기에 언급된 백마강이 바로 그 백제와 관련된 백마강인지...
원소와 조조가 접하여 싸움을 벌였던 지점들이
마치 이 칼럼에서 보여주는 지도상의 당과 대륙백제의 경계와
비슷해보이기도 하고 그러내요...
왕초보의 질문이었습니다...^^
삼국연의 08/06/09 [00:22] 수정 삭제  
  www.coo2.net 의 운영자칼럼에 들어가셔서 (공지)에 여러 글 중

제목 : (역사망상소설) 동이역사 말살소설 '삼국지연의' 숭상현상을 버리자 !

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일반인 08/06/09 [10:51] 수정 삭제  
  소개해주신 사이트 내용 잘 훝어보았습니다.
삼국지연의는 허구와 날조로 미화된 소설책임은 익히 알고 있죠.
위에서 언급하신 글 말미에 삼국지 정사를 간략히 정리한 책 내용을
스캔한 그림들이 여럿 있었는데,
거기에 조조와 원소의 관도대전에서 백마(白馬)와 연진(延津) 전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백마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보통 전투 이름은 전투가 벌어진 지명을 따서 붙이기 나름이니,
'백마'라는 곳이 있긴 한데, 그곳이 백마강하고 관련이 있는지는
지명만 같은 정도의 우연의 일치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이트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성남 08/06/09 [22:47] 수정 삭제  
  김성경님의 글을 보며 글 중에 둔유는 산서성의 평양 옆의 지명이고 낙랑군은 한의 유방이 체포 되었던 분하 지역, 분한 지역, 패한 지역, 패수 지역의 태원. 평양. 석문. 둔유 지역을 고조선에서 빼았아 사군을 그 지역에 설치하였고 부여의 아얼산(나의 얼, 한민족의 얼의산,나의 얼 신궁이 있는 산)에서 시작된 고구려가 집령에서 발전하여 송양산맥이 송양국을 찿아 다물도로 하고 당구트(배달나라 고토)와 연합하였고 낙랑(산서성의 평양포함)과 둔유, 대방지역, 고평,서평,동평 지역을 수복하여 한나라가 망하고 왕망의 신나라가 서게 하였으며, 한의 무제가 장사성에서 한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였으나 석문에서 패퇴시켜 돌아가게 하였으나 춘필과 망각에 의하여 역사의 잡초만 된다.
조정훈 08/06/11 [16:04] 수정 삭제  
  위 내용을 찬찬히 보고난 후 얼마나 우리역사 학계에 찌든 식민사학의 병폐가 이토록 심한가 느껴습니다. 다시는 우리 후손에게 이런 병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정훈 08/06/11 [16:04] 수정 삭제  
  위 내용을 찬찬히 보고난 후 얼마나 우리역사 학계에 찌든 식민사학의 병폐가 이토록 심한가 느껴습니다. 다시는 우리 후손에게 이런 병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08/06/26 [17:35] 수정 삭제  
  중국 전체를 우리땅이라 우기지
토토짱 08/07/08 [18:58] 수정 삭제  
  에라이 족바리 쉐이들아! 정신들차리...그렇게 살지마라...성훈님처럼 진정한 사학을 생각해봐라! 자식들에게 올바른 아비가 되려면...
이상한데 08/10/02 [18:42] 수정 삭제  
  중국 내륙에 대해 북해 중남해 등 호수가 언제부터 해로 불렸는지 설명좀해주시요.
그 대해가 백제때 대해라고 불렀다는 근거가 있습니까.참 답답합니다.
고서에 기록된 지명을 지금 중국 지명에다 가다 붙이고 그게 말이 된다고 하세요.
2000년 동안 중국지명이 바뀌지 않았다는 증거는 뭐 하나라도 있습니까?
북경지명도 역사적으로 얼마나 만이 변했는지 아세요.
蓟城、蓟县、幽州、燕都、日下、幽都、燕京、春明、京城、南京、燕山、中都、大都、汗八里、北平 이게다 고서에 나오는 북경지명입니다.
정신나간소리 하지마시고 할일없으면 집에서 애나 잠이나 자든지 공부좀더 하든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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