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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응신왕도 백제 왕족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7/02 [00:52]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응신왕도 백제 왕족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7/02 [00:52]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2부)입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


2007년 하반기에 MBC에서 <태왕사신기>라는 24부작 판타지 역사드라마를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그린다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드라마 제작비는 대략 약 450억원이 들었다고 발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역사드라마에 일본 자금이 들어와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작사측은 MBC에 24부작을 50여억원에 팔고, 나머지는 해외 수출 특히 일본 수출로 제작비를 충당하겠다는 의도였다. 일본 흥행이 성공해서 제작사가 돈을 벌었는지 손해를 받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한국의 역사드라마 제작을 일본 자금으로 했다는 불상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결국 드라마의 내용 즉 광개토태왕의 진실된 역사가 일본에 의해 훼손되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제2의 광개토태왕 비문훼손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에 일본 자금이 개입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국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이 드라마가 연말에 시청자가 뽑은 드라마대상을 받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것은 이 나라 매국식민사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나라 국민들의 역사인식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시청자 투표에 의해 2007년 올해의 드라마로 선정된 <태왕사신기>
 
일본의 자금이 <태왕사신기>에 들어온 이유는 단순한 상업적인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일본의 배급사가 한국의 역사드라마가 일본에서 흥행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그 큰 돈을 투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전혀 되지 않는다. 일본은 다른 목적이 있어 자금을 집어넣고는, 흥행을 위해서 일본 아줌마들에게 큰 인기가 있는 배용준을 캐스팅하라고 주문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배용준을 캐스팅해서 겨울연가와 같이 돈이 적게 들어가는 현대극으로   만들어도 일본에서는 흥행이 된다. 단지 흥행이 목적이었다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역사드라마를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일본은 한국의 역사드라마에 엄청난 자금을 집어넣었을까?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라이벌이었던 야마토왜국 응신왕에 대한 비밀이 한국드라마에서 언급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자금을 집어넣고는 금기시되어있는 응신왕에 대한 이야기를 아예 드라마에서 빼버렸다. 최초 백제 아신왕 역으로 캐스팅되었던 송일국씨가 도중하차된 것이 그 이유라 하겠다.

광개토태왕 당시 중국은 5호16국으로 잘게 쪼개져 있어 고구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광개토태왕의 유일한 적수는 바로 중국대륙의 동부를 지배하고 있던 백제뿐이었다. 당시 백제는 왜의 응신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아신왕과 응신왕에 대한 이야기가 태왕사신기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밝혀지기를 꺼린 응신왕이란 과연 어떤 인물인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밝혀보기로 하겠다.

왜왕가의 혈통을 이룬 응신이란 인물은?

지난 주 (1부)에서는 응신왕의 5대손인 26대 왜왕인 계체왕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내려오는 현 일본왕실의 혈통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본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과 일본의 국보인 인물화상경을 통해본 왜왕가의 핏줄은 백제에서 건너간 왕족임이 확실히 밝혀졌다. 그렇다면 계체왕 이전의 25명의 왜왕의 혈통은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 백제왕족으로 야마토왜국을 세운 응신왕
<일본서기>를 보면 신대(神代)를 거쳐, 1대왕인 신무(神武)왕으로부터 14대 중애(仲哀)왕까지 나오고 다음 신공왕후의 대를 거쳐, 15대 응신왕이 집권하여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야마토왜국은 응신으로부터 시작하여 25대 무열왕까지 11명의 왕이 있었고, 무열왕이 후사 없이 죽자 백제 무녕대왕의 남동생 격인 계체왕이 추대된다.

그러한 응신왕의 혈통이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일본서기>를 보면 화려한 수사구어를 가진 일왕의 명칭이 15대 응신조에 와서 간단히 된 것은 왕조의 교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응신왕의 즉위는 2주갑(120년)을 올린 390년으로 보아야 옳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있다.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사람이 응신왕이면 그 이전에는 국가라는 형태가 없었다는 말인데 어떻게 응신왕이 15대 왕이 될 수 있는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그 이전의 14명의 왕과 신공왕후는 허구의 인물이란 말인가? 아니면 야마토왜 이전에 다른 형태의 국가가 있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일본서기>의 초기 왕통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허구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일본 역사에 있어 신(神)자가 사용된 왕은 1대 신무(神武)왕, 10대 숭신(崇神)왕, 신공(神功)왕후, 15대 응신(應神)왕 이렇게 네명 뿐이다. 이들은 모두 건국자 또는 정복자를 의미한다.

중국의 <남사>와 <양서> 왜전에 보면 “진 안제 때 왜왕 찬이 있었고, 찬이 죽자 동생 미가 섰고, 미가 죽자 아들 제가 섰고, 제가 죽자 아들 여가 섰고, 여가 죽자 동생 무가 섰다.(晋安帝時 有倭王讚, 讚死 立弟彌, 彌死 立子濟, 濟死 立子與, 與死 立弟武)”는 기록이 있다. 진안제의 재위기간은 AD 396~418년이다. 따라서 왜왕 찬은 응신왕이다. 참고로 맨 마지막 立弟武의 무는 무녕왕을 밀함이다.

<일본서기 신대 하의 제11단 신황승운>에 보면 신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협야(狹野)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협야는 ‘사노’로 발음되며 바로 찬(讚)의 음인  ‘산’에서 온 것이고,  이 찬(讚)을 훈독하면 응신의 이름인 호무다(譽田)의 ‘호무(譽)’와 일치한다. 즉 왜왕 찬(산)이란 이름을 음으로 읽으면 1대 신무왕의 협야(사노)가 되고, 훈으로 읽으면 호무다의 호무 즉 응신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응신(應神)의 일본식 이름은 호무다(譽田)로 <신찬성씨록>에 보면 진(眞 또는 眞人)씨의 시조가 된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1대 신무왕은 바로 15대 응신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게서에 따르면 숭신왕은 담담허존이고, 신공왕후 이후 120년은 공백기(실제로는 백제왕의 직할통치기)이며 응신왕이 곧 시조인 천무왕이라는 이론이 있을 정도로 왜(일본)의 역사는 아주 짧다 하겠다. 결국 일본서기의 응신 이전의 14명의 왕은 허구의 왕이던가, 아니면 조그만 부족의 부족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일본(왜)의 역사를 길게 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14대 중애왕의 왕후였던 신공왕후가 섭정하여 69년 100세의 나이로 죽고 태자 응신이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5대 응신왕은 신공왕후의 섭정 3년에 태자가 되고, 신공왕후의 사후 AD 270년 70세에 등극하여 110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응신왕은 66년간을 태자라는 신분으로만 있었고, 신공왕후는 아들 나이가 70살이 되도록 섭정한 모후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어야 하는지? 

▲   1991년 출판되어 일본서기 속의 노래인 와가(和歌)가 한국어임을 밝힌 책
 
김성호선생은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에서 응신대왕을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묘사하는 이론을 펼친 적이 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운 이론이었으나, 필자는 김성호선생의 이론은 두 가지 관점에서 오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백제를 한반도로, 왜를 현 일본열도로 설정하여 역사의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고
둘째는 온조백제(십제)와 비류백제(백제)를 별개의 국가로 본 것이다.

이 두 가지 점만 보완되었더라면 김성호선생의 이론은 천하제일의 이론이 아닌가 한다. 분명 현 일본열도는 백제와 관련 있던 당시 왜국의 땅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백제의 주무대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백제와 왜의 유기적인 교류도 결국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부에서 설명)

그리고 온조백제와 비류백제를 별개의 국가로 볼 것이 아니라 비류의 죽음 이후 하나의 백제 안에 온조계와 비류계가 공존하고 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실제로 백제에서 비류계로 분류되는 왕은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 12대 계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대왕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성호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을 연구한 ‘잃어버린 한국고대사연구회’의 홍순주회장이 최인호씨의 <제4의 제국>이란 책과 TV 다큐멘타리를 비판한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온조계는 북부여 해모수 계열이라 해(解)씨이고, 비류계는 졸본부여 계통으로 진(眞)씨를 쓴다. (이 이론대로라면 비류와 온조의 부계가 다르다) 온조계인 13대 근초고왕은 전왕인 계왕(비류계)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중국 사서에는 당태종이 대륙백제의 역사를 말살하였기 때문에 선비족 모용수가 세운 전연이 부여족을 침략한 기사로 위장되어 있다고 한다).

계왕의 아들인 진정과 손자인 응신은 근초고왕을 피해 가야로 옮겨갔다가, 왜로 건너가 왜에 정착하며 세력을 규합한다. 근초고왕에게 계속 저항하던 비류계 진정/응신 세력은 1차로 AD 368년 근구수태자에게 밀려 가야인와 함께 왜로 도피하고, 2차로는 AD 396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패하여 응신 세력이 자신의 본거지 왜로 달아나, AD 405년 야마토 왜(大和倭) 정부를 세우게 된다.

가야인들은 광개토태왕의 공격 이전 수십년 전에 이미 북방 기마민족으로 표현되는 비류계 백제인인 진정/응신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의 아버지인 진정이 아라사등(阿羅斯等)과 동일 인물로서 아라가야왕으로 나온다. 그래서 AD 400년 호태왕 비문의 종발성 전투에서는 가야 +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 + 신라의 연합군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계 세력이 백제를 떠나 가야의 외래 지배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인 가야 세력과 겹치게(Overlapping)되어 결과적으로 이 최인호씨의 “제4의 제국”이란 다큐멘타리에서는 응신을 토박이 가야인으로 착각하였고 이들 제4의 제국인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  비류계 진정과 응신은 온조계 근초고왕에게 쫓겨 가야로 도망온다. 근구수태자가 계속 추격하자 왜로 간다.

금관 가야국에서 초대 김수로 왕처럼 갑자기 외부에서 나타나 귀지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의문시 되었던 그리고 현지 가야 지방을 정벌한 북방 기마민족의 정체는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에게 왕권을 빼앗긴 비류계 진정과 응신으로 대변되는 백제인이었다.

AD 350년 경 이들에게 패하여 왜로 이동한 첫번째 가야 세력이 숭신왕 계열의 가야민족이라고 추정되며, AD 396년 경 광개토태왕이 왜의 응신과 연합한 아신왕의 백제를 침공하였을 때 응신이 자신의 지배아래 있었던 가야인들과 함께 두번째로 왜로 이동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에게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해 버리고, 응신은 패해 왜로 돌아왔으나 앞으로 광개토태왕 때문에 백제로 돌아갈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A.D 405년 아예 왜 땅에 눌러앉아 국가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인 것이다.

이러한 응신왕의 역사적 사실인 응신왕 = 백제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일본은 태왕사신기에 엄청난 자금을 집어넣고는 응신왕의 이야기를 드라마에서 아예 빼버리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태왕사신기는 광개토태왕의 전쟁이야기인 아신왕과 응신왕의 이야기를 언급하지도 못하고, 두 자매 사이에서 방황하는 연애쟁이로 묘사된 것이다.

▲  가야를 집중 조명한 최인호씨의 소설 '제4의 제국'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신임장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대왕을 꼽으라면 단연 13대 근초고대왕과 24대 동성대왕이다.  근초고왕은 당시 동북아의 강자인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국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대륙 깊숙이 요서.진평지역 뿐만 아니라 대륙 남부인 왜 땅까지 정벌하는 등 많은 담로(식민지)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식민지 중의 하나가 바로 왜(倭)였다.

근초고왕은 계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고는 계왕의 아들인 진정과 응신을 계속 추격한다. 최초 가야지방으로 들어간 진정/응신 세력은 근구수태자의 공격을 받자 다시 왜 땅으로 쫓겨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백제는 천하무적이었다. 왜로 도망간 응신은 같이 왜로 들어간 가야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반격의 기반을 마련한다.

백제 역시 왜로 들어간 응신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왜에 식민지(담로)를 건설한다. 이렇게 왜에 식민지를 건설한 백제는 왕자를 보내 왜왕으로 삼아 통치하게 한다. 부왕 근초고왕으로부터 왜왕으로 임명된 인물은 근구수태자였다. 그러면서 그 신임장으로 하사한 것이 그 유명한 칠지도이다. 칠지도란 과연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일본 나라현 이소노가미(石上) 신궁(神宮)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한자루의 희귀한 칼이 있는데 그 이름은 칠지도(七支刀)라 한다. 이 칼은 75cm 되는 주 몸체 양 옆에 각각 3개의 가지칼(支刀)이 있는데  그 형태는 사슴뿔이나 나뭇가지 모양의 창(槍)과도 같은 이상한 형태의 칼이다.

이병도도 이런 형태의 칼을 중국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칼이 주목을 받은 것은 형태도 형태이지만, 바로 그 칼에 새겨져 있는 명문 때문이다. 명문은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도합 61자이다. 이 중 7자는 글자의 훼손이 심해 전혀 알아볼 수 없으며, 다른 8자는 글자의 획이 확실치 않을 뿐 글자체는 그런대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앞면) 泰X四年 X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七支刀 生辟白兵 
         宜供供 侯王XXXX作

(뒷면) 先世以來 末有此刀 百慈王世X 
         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일본학자들의 통설(通說)은  '泰X'를  중국 황제의 연호로 단정하고 동진의‘太和’라는 연호를 끌어들였다. 이는 369년으로 <일본서기> 신공기 52년조의 ‘칠지도헌상’의 기사와 맞는다는 억지 이론이다. 여하튼 일본 금석 명문해석의 대가인 후꾸야마(福山)교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태화 4년 정월 십일일의 순양일중의 때에 백련의 철로 칠지도를 만든다. 이것으로서 백병을 벽제(辟除)하고 후왕의 공용(供用)에 마땅하고.....만든다.
선세(先世) 이래 아직 본 일이 없는 이 칼을 백제왕과 왕세자는 같이 삶을 임금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왜왕의 상지(上旨)에 의해서 만드니 길이 후세에 전할 것이다.


후꾸야먀교수의 해석은 있지도 않은 중국의 연호를 끌어들여 <일본서기의 신공기>를 합리화하는 해석이다. 학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의 사학을  따르는 이병도조차 “칠지도 명문의 泰자 아래 글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중국 연호가 아닌 백제의 연호이다.”라는 단호한 주장을 했다.   

▲   나라현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 백제대왕이 왜왕에게 하사하는 신임장의 증표이다.


칠지도의 명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하행문(下行文)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즉 대왕(황제)인 백제왕이 후왕(제후)인 왜왕 지(旨)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泰X 四年’은 중국의 연호가 아니다. 여러 해석이 있으나 원광대 정치학과 소진철교수의 해석이 가장 눈길을 끌고 정확한 것으로 본다.  

泰X사년 X월십육일 병오일의 정오에 무쇠를 백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어 마땅히 후왕에게 줄만하다.

선세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적이 없는데 백자왕은 세세로
기생성음(吉祥語)하므로 왜왕 지를 위해서 이 칼을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


소교수는 백제왕이 만일 중국의 연호를 쓰는 제후급의 왕이었다면 왜왕 지를 후왕으로 부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왜왕 지(旨)는 외자를 이름으로 쓰는 백제왕가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여러 근거를 이유로 칠지도는 백제의 대왕인 근초고왕이 왜로 떠나가는 제후왕인 왜왕 지를 위하여 제작 하사한 것으로 본다. 참고로 백제대왕들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백제의 고문서가 1996년 9월 일본 큐슈 미야자끼현의 미카도(神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독자들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사학과 교수도 아닌 정치학과 교수가 어떻게 백제와 왜의 역사에 대해 논할 수 있느냐? 그거 믿을 수 있는 학설이냐?”라는 것인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소진철교수의 이론은 백제와 왜의 역사적 관계를 정치학 교수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사학과 교수들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하며 그 이론인 반도사관을 그대로 추종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절대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다. 즉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일본이 정신적 이론적 고향이기 때문에 일본에게 불리한 이런 주장을 절대로 할 수가 없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폄하하면서도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불리한 이론을  말하지 않는 특수성이 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본 학계는 백제가 왜의 신속을 받았거나, 서로 문화를 주고받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우리 학계는 백제가 왜에 선진 문명을 전수해준 정도로 보거나, 삼국이 모두 왜와 막연하게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금기사항이라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왜)의 고대유물인 ‘칠지도’와 ‘인물화상경’의 연구로 백제와 왜는 대왕국과 후국 즉 황제와 제후의 정치적 관계였다고 소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이 연구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양국 관계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어, 특히 일본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백제와 왜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정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왜는 백제의 담로로부터 출발

일본(왜)의 출발은 담로로부터의 출발로 보인다. <일본서기>의 신대 제4단 육팔주생성(六八州生成)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아이를 낳을 때에 이르러서 먼저 담로주(淡路州)를 포(胞)로 하였다. 뜻이 불쾌하여 고명(故名)으로는 담로주라 하니 다음으로 대일본(야마토)라 한다." 이 문구는 일본의 역사는 (백제의) 담로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달라왕 4년(157년) 동해의 빈(濱)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있어 부부가 되어 살았는데, 세오녀가 후에 신공왕후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세오녀 = 신공왕후 = 비미호(卑彌呼)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김성호선생과 문정창선생은 주장한다. 두 사람의 이름에 다 까마귀 오(烏)자가 있음을 눈여겨 볼 일이다.

13대 근초고왕 때는 왜왕으로 근구수태자가, 14대 근구수왕 때는 침류태자가, 15대 침류왕 때는 아신태자가 왜왕으로 갔다. 즉 대대로 태자들은 백제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왜에서 정치 실습을 미리 한 것으로 보인다. 아신태자가 왜에 간 것을 두고 <일본서기>에서는 “응신 15년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고 은유적으로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에 백조삼능이라는 능이 있는데, 이 능의 주인은 바로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이라 한다. 당시 왜는 일본열도가 아니라 대륙의 남부나 큰 섬에 있었으므로, 이 능은 나중에 이장했거나 가묘로 보여진다. 여하튼 백제의 두 영웅인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응신을 정벌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해 왜 땅에서 붕어한다.

침류왕이 붕어하자 백제에서는 아신태자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오른다. 이에 격분한 아신태자는 응신과 결탁하여 왜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온다. 아신은 응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아신은 백제의 왕에 그리고 응신은 왜왕에 나누어 오르기로 서로 밀약을 맺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결국 숙부인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빼앗긴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광개토태왕에게 매번 패하고 만다.

396년 병신년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가 뒤바뀌는 해였다. 광개토태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제의 수도를 공격했다. 백제의 주력군을 북방경계선에 배치한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의 후방기습공격에 허를 찔려 패하고 만다. 결국 아차산에서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고 만다. 

▲    태왕사신기에서 방영된 백제 아신왕의 항복장면.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한다.
 
응신은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변복을 하고 가야로 들어갔다가 왜로 도망간다. 이것을 <일본서기>에서 기록하기를, “16년 왕인이 왔다. 태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書首) 등의 시조다.”라는 기록인데 응신(應神)과 왕인(王仁)은 일본 발음으로 다 ‘오오진’으로 발음되어 동일인물이라고 김성호선생은 지적했다.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 태왕에게 항복하는 절대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일본서기>처럼 백제가 한가로이 왕인을 보내 문물을 전했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그래서 정황적으로 볼 때 김성호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의 내용은 상당 부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의 가공할 위력 때문에 응신은 백제로 돌아갈 꿈을 접고, 아신왕이 붕어하는 해 인 A.D 405년 왜 땅에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인 것이다. 즉 일본의 역사는 바로 백제왕족인 응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백제왕족과 그 후손이 왕위에 오르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  법륭사의 비밀문서인 '성예초'에는 백제 성왕이 왜왕을 겸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백제 근초고왕은 귀족인 진모진을 왜에 파견하여 일본 최초의 백제조복(朝服)을 만들게 한다. <부상략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15대 오오진(응신)왕이 일본왕 최초로 백제조복을 입었으며, 그 후에 대대로 일본왕들이 입었고, 33대 스이코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백제와 왜와의 명령체계는 백제대왕 → 백제왕자 → 실권자 소가씨(또는 왜왕)이었다. <일본서기>기록에 따르면  당대 최고실권자인 소가우마코(蘇我馬子)는 일본에 온 백제왕자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백제왕자와 친히 대화(보고)했다는 기록을 볼 때 백제왕이 대리인인 백제왕자를  통해 왜국을 간접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소가(蘇我)씨 가문은 당대 실권자로서 사실상 최고권력을 약 100년간 누리는데, 미즈노 유우의 저서 <천황가의 비밀>에 “이 소가씨 가문은 본래 한국에서 건너온 가문이다”라고 되어있다. 왜왕도 백제왕족이고 최고실권자도 백제귀족이면 당시 백제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와 왜국의 정치적 관계는 단순한 중앙정부와 지방정권이라기 보다는 매우 가까운 형제국 이상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즉 “왜국(일본)은 작은 백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일본인은 百濟라는 글자를 발음대로 ‘햐꾸사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구다라’라는 고어로 발음하고 있다. ’구다라‘는 대국(大國)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도 왜 그렇게 발음하는지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     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백제왕신사. 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직도 일본에는 백제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긴키(近畿)지방의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와 백제사(百濟寺)가 가장 유명하다. 백제왕신사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오사카(大阪)에는 백제역(百濟驛), 백제천(百濟川), 백제교(百濟橋), 백제대교(百濟大橋) 등이 있으며 나라(奈良)에도 백제촌(百濟村) 등이 있다. 

▲   일본 오사카에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인 백제역. 현재 화물만 취급하고 있는 역이다.
 
고구려계와 신라계도 왜왕이 된 적이 있다.

백제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계도 왜왕에 오른 적이 있다. 5세기 초반 고구려, 신라, 왜국 간에 다년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구려계의 왜왕으로는 18대 반정(反正)왕이 있다. <일본서기>에 반정왕은 담로궁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 군이 왜군을 추적하여 담로도에 쳐들어가 승리한 고구려의 세력이 백제계 이중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다. 

고구려계 반정왕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계 윤공(允恭)에게 제거당한 것으로 보인다. 19대 윤공왕은 씨성(氏姓)을 바로잡아 고구려세력을 제거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윤공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걱정하여 사절단과 조물을 보내고 그들이 행한 상례 등을 보면 윤공왕이 신라계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민족사학자 문정창선생은 설명한다.

신라계 윤공왕 이후 20대 안강왕이 죽은 후 윤공왕의 5자를 칭하는 백제계 대박뢰(大泊瀨)황자가 재빨리 행동을 개시하여 왕위에 오른다. 21대 웅략왕부터는 다시 백제계로 왕권이 넘어간다. 이가 곧 송나라 순제에게 상표문(上表文)을 바친 왜왕무(倭王武)로 나중에 백제로 돌아와 무녕왕이 된다.   

이와 같이 역사가 짧은 섬나라 일본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상의 나라인 조선을 식민지배 하려면 조선의 역사말살이 필요했다. 이런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어 조선인들이 이러한 백제와 왜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일왕 특명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을 펴게 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설치되는 기관이 바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였다.

그런데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조상의 역사를 엉터리로 왜곡하고 있다. 단군은 아직까지도 신화이며, 삼국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이 아직도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역사 이론 자체가 엉터리인데 어떻게 중국과 일본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설명한 백제와 왜의 모든 상황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아닌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다음 주에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가 연재됩니다.   
한얼원 08/07/04 [19:55] 수정 삭제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다.
고대 일본 땅은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의 4국이 다스린 땅이기 때문에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고, 대다수의 유적물은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즉 일본 부모국의 대한민국 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하지 않고는 패륜국가를 면치 어렵고,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중국과 공모하여 인류 부모국의 대한민국 역사를 말살, 왜곡, 조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편수회의 핵심위원이며, 일본왕의 충견(똥개)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중국 지명을 한반도 속의 지명으로 얽어 맞춰 신라, 고구려, 백제, 및 가락국의 4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 변조했던 대한민족의 반역자이다.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만든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고수하고 똥개를 옹호하고,
국사개편을 방해하고 있는 똥강아지들 또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가 거짓 가짜로 만들어 준 국사교육에 무려 62년 동안 세뇌되어 뇌리 깊숙이 각인된 거짓 가짜 지식(왜독)에 중독돼 분별력을 상실하여 현행 국사가 “근본적 뒤틀린 실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고증에 의한 역사적 진실”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습성이 한국인의 고치기 어려운 가장 슬픈 고질적 병폐입니다.

7천만 대한민족은 지각신경이 마비되어 참과 거짓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일본왕에게 죽을 때까지 충성한 똥개 이병도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똥강아지들이 멍멍 짖고 있으니 한국인의 고질적 병폐를 그 누가 치유할 수 있겠는가? 이미 눈과 귀가 먹은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불구의 고질병을 앓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장손국의 천손들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 통한의 한국역사여...!
하늘을 우러러 땅을 치며 통탄할 뿐이다. 

보신탕용 똥강아지들의 질시와 냉대, 비난 속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시며
묵묵히 왜곡된 국사의 진실을 연재하시는 성훈 칼럼니스트님의 열정에 경의와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조재범 08/07/05 [21:34] 수정 삭제  
  정말 훌륭한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중립사학이니 과객이니 하는 깡통들 안 보이니 더 좋군요. 성훈 님, 언제나 건필하십시오. 뒤에서 응원하고 있습니다.
장두완 08/07/08 [17:42] 수정 삭제  
  성훈님의 글을 읽으면서 진실이 점점 다가옴을 느낌니다. 동북공정과 일제가 아무리 역사를 왜곡한다 한들 일만년의 역사를 없애기엔 무리인듯 싶군요. 또한 정의는 손바닥으로 가려질수 없는 진리인것을...이에 힘입어 더 많은 역사를 공부해야겠다 다짐합니다. 이것이 작은 믿거름이 될수만 있다면...감사합니다.
치우천 08/09/01 [11:02] 수정 삭제  
  식민사학자들을 몰아낼 방법이 있을까요?
민족사학자님들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왜곡 08/09/22 [17:33] 수정 삭제  
  어느 성예초에 백제왕이 왜왕을 겸했다고 하더냐?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거짓말로 역사를 지어내면 천벌을 받는다.
아무리 왜놈이 밉다고 해도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
뻥튀기사관 09/07/07 [08:38] 수정 삭제  
  가야를 중국에 갖다 놓는 동북공정론자들 같으니라구....일본이 백제부흥을 도우려면 거리상으로도 한반도여야 맞는 것이다. 지금의 금강입구에서 백강구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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