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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

대륙의 동부를 호령한 해양대제국 백제를 밝히는 다른 기록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5/19 [14:00]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

대륙의 동부를 호령한 해양대제국 백제를 밝히는 다른 기록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5/19 [14:00]
본 글은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왕도 부여’의 마지막 4부입니다. 지금까지 1부 ~ 3부에서 백제의 패망전쟁과 부흥운동 기록을 통해 분석한 백제의 왕도는 어디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본 4부에서는 전쟁 기록 이외의 나머지 기록을 통하여 백제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를 밝히기로 하겠습니다.

백제가 대륙(산동성)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가 많으나, 가장 확실한 근거로는 <삼국사기 신라국본기>로 문무왕 하편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함형 원년(670년) 7월에 이르러 입조사 김흠순 등이 와서 경계선을 그으려 하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전부 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이 되지 아니하여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3.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다 실망하고 모두 말하기를 (이하생략)” (주 太山 = 泰山)

여기서 황하와 태산이라 함은 산동성에 있는 그 유명한 황하와 태산으로 이곳이 바로 백제의 옛 땅이라고 <삼국사기>는 밝히고 있다. 이 기록 하나만 봐도 백제는 확실히 산동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백제가 중국 대륙의 산동성에 있었다는 다른 근거로는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  백제의 옛 영토는 황하와 태산이라고 <삼국사기>에 엄연히 씌어있다.  황하와 태산이 한반도에 있는 강과 산인가?

백제의 8대 성씨로 본 백제의 위치?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 편과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편의 백제 조에 "나라 안에 8대 성씨가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했다.

중국의 성씨사전에는 부여(夫餘)씨와 복(福)씨 골(骨)씨 등도 백제의 8대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는 분명한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씨가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다음에야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 2000년도에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국(國)씨가 2,182명으로 성씨 순위 154위이며, 연(燕)씨는 3,549명으로 138위, 진(眞)씨는 1,579명으로 성씨 순위 164위, 묘(苗)씨는 61명으로 성씨 순위 258위 등이며, 나머지 사(沙)씨나 리(또는 협)씨, 그리고 해(解)씨나 목(木)씨는 단 한 명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멸망 당시 200여개의 성(城)이 있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로 되어 있다. 옛날은 지금과 같은 핵가족제가 아니고 대가족제도이므로 백제의 인구는 450만 ~ 550만 명 정도로 추산이 된다. 이중에 8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을 것이다. (참고로 구당서에는 호당 인구가 5.7명 ~ 7명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천삼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백제 8대 성씨의 후손이 7,300명 정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에 백제의 주 강역이었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하남성 일대에는 백제의 8대 성씨가 득실득실 엄청나게 살고 있다. 이는 백제의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황하이남~양자강 이북 사이의 동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인구로 본 백제는 대륙인가? 한반도인가?

<삼국사기> 및 모든 중국의 기록에 백제국은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戶)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6만호면 대충 4~5백만 정도 되는 인구였다. 이런 인구가 과연 한반도에서 가능했을까? 2가지 방법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는 단순비교이다. 통계청이 1992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 중종(1519년) 때와 현종(1660년) 때 조선 전체의 인구가 약 76만호이다. 백제 멸망 900~1000년이 지난 조선 전체의 인구와 백제 멸망 시의 인구가 같았다면 백제는 조선 땅보다 훨씬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구는 천재지변이 없는 한 줄어들 수가 없다. 특히 인구=노동력이었던 옛날과 같은 대가족제도 하에서는 말이다. 아래는 두 번째로 분석비교이다.

(1) 사서에 나오는 백제 인구의 변화

신  라 :  18만호 (수도만) (삼국유사)

백  제 :  76만호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  려 :  210만명 (송사 : 백제멸망 600여년 후 약 35만호)

조  선 : (통계청 발행 한국통계발전사)
- 태조 6년 (1406년 : 백제패망   740년 후) :   153,404호 (370,365명 : 한성제외)
- 중종14년 (1519년 : 백제패망   860년 후) :   754,146호 (3,745,481명)
- 영조 8년 (1732년 : 백제패망 1,100년 후) : 1,713,849호 (7,273,446명)

* 백제 패망 730 여년 후 지방별 인구 (태조 및 태종실록)
- 경기 + 충청 + 전라도 : 56,003호
- 경상도 : 48,993호

(2). 분석

- 백제(4~5백만) > 고려(210만) > 조선 초(37만-한양제외) : 백제가 조선의 약 10배

- 백제(76만호) > 경기 + 충청 + 전라도 (700여년 후 5.6만호) : 백제가 13.5배

- 신라 수도 > 경상도 (700여년 후) : 신라 수도가 경상도 전체의 약4배

(3). 결론

-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만 존재하지 않고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 백제의 강역이 경기, 충청,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신라의 강역이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백제의 영역 > 고려의 영역, 고려는 한반도보다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일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그리고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과학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삼국의 위치를 찾아보니 백제는 발해만 일대가 일식의 최적관측지로 측정되었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식민사학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과학은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상대 신라의 최적관측지는 양자강 중류이고, 백제는 발해만 일대로 북경이 최적관측지로 나와 있다.
 
일식분석도 2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최적관측지를 찾는 것과 둘째는 일식을 볼 수 없는 네가티브(Negative) 방식으로 위치를 추적할 수가 있는데 묘한 결과가 나타난다. 최적관측지는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위치인데, 삼국사기에는 개기일식인지 부분일식인지 구분이 없어 부분일식까지 볼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넓어진다. 여하튼 고구려의 최적관측지는 바이칼호 동쪽 내몽고지역, 백제는 북경지역, 신라는 양자강 중류, 왜는 남지나해상으로 나타난다.

박창범교수의 네가티브 방식이란 단 한번이라도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지워나감으로서 그 위치를 찾아내는 방법인데, 여기서도 삼국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이 나타난다. 여기에 반박자료를 낼 학자는 전 세계에 아무도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과학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희한한 것은 사학계에서 고구려의 수도로 비정한 압록강변 집안과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일식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식민사학계가 집안을 고구려의 수도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광개토태왕비가 중국에 의해 집안으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비가 옮겨진 후에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과 환도성이 중국/일제에 의해 집안으로 비정된다. 

▲  대동강 평양과 압록강변 집안은 고구려의 일식을 한번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나타난다.
한반도에서 백제의 부분 일식을 볼 수는 있으나, 신라의 2개의 일식은 한반도에서 전혀  볼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는 초기 신라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한반도는 백제의 영역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후대 신라의 일식은 한반도가 최적관측지로 나타난다. 

기상으로 본 백제와 신라의 위치는?

다음은 기상청에서 21년간 근무했던 정용석씨가 쓴 책 “고구려.백제.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에 보면 삼국시대 기이한 기상 기록이 나온다.

백제 동성왕 4년(A.D 482) “겨울 10월에 큰 눈이 한 길(丈)이 넘도록 내렸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같은 해 신라에는 큰 눈이 왔다는 기록이 없다. 이렇듯 한쪽은 홍수와 가뭄과 폭설이 있었는데, 다른 쪽은 그런 것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가능한 일인가?

백제 기루왕 32년(A.D 108) “봄.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같은 해 신라의 기록에는 “여름 5월 큰 물이 져서 백성이 굶주리므로 사자를 10도에 파송하여 구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는 극심한 가뭄인데, 신라는 홍수가 났다니 이게 한반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삼국사기>에 보면 황충(蝗蟲 메뚜기데) 기록이 유난히 많다. 이 황충은 우리나라 논에 있는 낭만적인 메뚜기가 아니라,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 나오듯 태양을 가리는 공포의 메뚜기떼를 말하는 것이다. 이 메뚜기떼가 지난 곳에는 풀잎 하나 남지 않고 오로지 적토(赤土)만이 남는다. 즉 엄청난 자연 재앙인 것이다.

그런데 이 메뚜기떼는 한반도에 나타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메뚜기의 날개 특성상 황해 바다를 건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의 기록에 황충이 있다는 것은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의 기록을 보면 이 황충이 나타난 기록이 같은 해에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그 말은 삼국이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는?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발해만 연안에 백제가 있었다. 즉 하북성, 산동성 유역에 백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신당서 동이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지명들. 영과 빈은 발해만에 위치한 지명들이다.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편과 <주서(周書)>권49 열전 제41 이맥상편 백제조에서 "백제는 진(晉), 송(宋), 제(齊), 량(粱)때부터 강좌(江左, 산동성 강소성 등의 양자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또한 사신을 보내 번(藩)이라 칭하며 봉직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송서(宋書)> 권97 열전57 이만(夷蠻)편 백제조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는데 그후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지역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고,

<남사(南史)> 권79 열전 제69 이맥 하편에서도 "진(晉)나라 시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을 경략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   진평은 고성과 진성의 2군을 말함이다. 요서의 기준인 요는 산서성 태행산맥 안에 있다. 그 서쪽이 백제의 영토이다.

<남제서(南齊書)> 에는 백제의 동성대왕이 북조의 최강자 북위의 수십만 대군을 5차례나 승리하고 동부 평야지대에 7명의 태수를 임명한 기록이 있다. 
 
▲   대륙 동부 평야지대는 전부 백제 동성대왕이 다스린 영토였다. 북위는 산 속에서 숨어 있다가 5번이나 백제를 공격하지만 전패했다. 강시단야 즉 북위병의 시체가 들에 널리고 핏물이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백제가 수나라 요동정벌의 향도가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백제왕 창(위덕왕)이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군도를 하겠다고 청하니, 수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므로 이미 용서해 주었으니 다시 칠 수는 없다.”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고 돌려보냈다. 왕(영양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와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鄕導)가 되려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군대의 선도란 군대가 행군 시에 길 안내 및 첨병 역할을 말하는 것으로, 그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 맡는 중요한 역할이다. 향도가 본대를 계획한 행군로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여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 25사인 <수서>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개황(開皇) 18년(A.D.598년)에 창(위덕왕)이 그의 장사 왕변나를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마침 요동정벌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수군(隋軍)의 선도(先導)가 될 것을 청하였다. 문제는 조서를 내려 “(내용 생략)”라고 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여 보냈다. 고구려가 대략 이 사실을 알고, 병사를 내어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였다. (開皇十八年,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屬興遼東之役,遣使奉表,請為軍導.帝下詔曰:往歲為高麗不供職貢,無人臣禮,故命將討之.高元君臣恐懼,畏服歸罪,朕已赦之,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高麗頗知其事,以兵侵掠其境.)

섬서성에 있는 수나라가 하북성과 요동에 있는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어떻게 수나라 군대의 향도를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겠는가? 수나라 군대보다 하북성과 요동지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바로 백제가 그 지역부근에 있으면서 고구려와 이곳에서 자주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최치원(857 ~ ?)은 신라 말기 대문장가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 즉 백제는 한반도의 충청도와 전라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중동부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던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 위치를 <사기>에서 찾아보면, 연은 산서성 북쪽이고, 제는 산동성 북쪽이고, 노는 산동성 남부이고, 한나라때 유주는 하북성 북쪽이다. 오는 강소성 남부이고, 월은 절강, 복건성 등지이다. (유.연.제.노.오.월의 위치는 지도 참조) 

▲   고구려와 백제가 강병 백만으로 차지한 유. 연. 노. 제. 오, 월의 위치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말갈(靺鞨)의 전쟁 기록이 많다. 그리고 말갈과 신라와의 전투 기록도 있다.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말갈과 전투를 치룰 수 있단 말인가? 말갈이 한반도 중부에 있었단 말인가? 교과서에는 백제와 신라 위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말갈은 허위 기록이란 말인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보면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말갈병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에 진영을 만들고, 신라왕(문무)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방어케 하였는데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백제 땅에서 몰아내는 광경이다. 여기서 석문(石門)이라 함은 현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石家庄)이고, 대방은 석문 아래로 접한 곳으로 황하 유역으로 초기 백제의 도읍지였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 때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양하도총관(兩河道摠管)에 임명되어 군량을 평양에 운송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양하도(兩河道)라는 지명이 황하 하류의 북과 남을 통칭하는 명칭인 것이다. 현 사학 이론대로라면 김유신이 한반도에서 황하하류에 와서 군량을 조달해 대동강 평양으로 군량을 싣고 갔다는 얘기인데 이게 가능한 일인지? 이는 백제의 땅이었던 양하도에서 김유신이 군량을 조달해서 운송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백제 패망시 김춘추가 당으로부터 받은 벼슬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이다. 우이는 산동성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  중국 지도에도 우이는 산동성을 나타내는 지명이고, 양하도는 황하 하류의 북부와 남부를 통칭하는 지명이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 21대 개로왕편에 보면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식민사학계는 이 제방을 현 한강변 풍납토성이라 하며 숭산을 검단산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이 제방은 백제 개로왕이 황하변에 쌓은 것으로 숭산이란 지명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무술로 유명한 소림사(少林寺)가 있는 산이 바로 하남성 숭산인 것이다. 

▲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황하변이다. 신라와 당나라가 싸운 석문(석가장)과 대방(백제의 초기 건국지)이 보인다.
 
이 숭산(崇山)과 초기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慰禮城)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이름만 있고 위치가 미상인 곳으로 적어 놓은 곳이다. 게다가 침현(沈峴)과 평원(平原) 등 백제패망 시 언급된 지명도 위치미상이라 했다. 이 지명들이 만일 한반도 안에 있었으면 당대의 석학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다. 이 지명들이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김부식이 몰랐던 것인데 어떻게 이런 지명이 한강 이남에 있단 말인가?  

▲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 새겨진 大夫는 고구려의 관직명이다.
현 풍납토성은 백제의 성터가 아니라 고구려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 대부(大夫)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관직인 것이다.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삼는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이를 백제의 유물이라고 발표하였다. 백제의 명문이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풍납토성이 백제의 토성이라는 발표는 학자의 양심을 저버린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거기서 발견된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했다. 피라밋은 분명 고구려식 무덤 양식이다. 백제도 같은 방식의 무덤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공주의 무녕왕릉과 완전히 양식이 다른 피라밋을 어떻게 같은 백제왕의 무덤으로 발표할 수가 있을까? 한 나라에 2개의 무덤양식이라? 이건 국민을 속인 기만행위가 아닐까? 

▲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피라밋을 식민사학계는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에 새겨진 大夫도 고구려 관직명이고 피라밋도 고구려 양식인데 백제의 유물이라니?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보니 한반도에서 그 유물이 안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식민사학계는 백제를 한반도로 밀어 넣기 위해 억지로 풍납토성을 백제 유물로 둔갑시킨 것으로 본다. 그리고는 의혹투성이인 백제사마왕릉을 무녕왕릉으로 비정한다. 그래야 한반도 남서부에 백제가 있었다는 이병도의 반도사관을 정착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일제가 만들어놓은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을 아직도 숭상하고 신봉하는 식민사학계의 작태가 한심스럽다.

비록 백제는 대륙에서 태어났다가 대륙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나라이지만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이라 한반도에도 백제 문화의 흔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이 조금 보였다고 해서 백제의 본거지가 한반도 남서부에 있었다는 것은 지나친 발상이다. 이미 필자는 부여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왕도이고, 진짜 백제의 근거지는 산동성이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 그럼 왜 일제는 부여를 백제의 왕도로 조작했을까?

일제는 조선을 영구지배하기 위해 일왕 특명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조작한다. 역사도 없던 일개 섬나라 민족이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역사를 가진 민족을 힘으로 지배하려다보니 우리 조상의 역사를 축소 왜곡시킨 것이다. 20만권이 넘는 고대 사서를 불태우고 중요한 사서는 다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조선사 35권>이라는 새로운 역사 이론을 만들어 조선인을 세뇌교육 시켰다.

그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 등이 해방 후에는 메이저급 주요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게 된다. 그 학맥이 이어져 지금 대한민국의 강단에는 이병도의 후학들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역사의 진실을 찾는 일은 게을리 하고 자기 자리지킴을 위하여 스승들의 식민사학을 더욱 고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의 큰 비극이며 문제인 것이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을 앞세워 삼국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하루빨리 역사의 진실을 밝혀 중국의 주장이 허구임을 만천하에 밝혀야 할 것으로 본다. 역사의 진실 차원에서 중국을 본다면 그들은 섬서성 부근 산속에 있던 산적일 뿐이다. 한족이 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뿐일 정도로 중국은 원래 역사가 없는 민족이다.

중국의 전체 역사에 300년 이상 된 통일국가가 없었다. 700~1,000년 사직의 우리 삼국이 존재할 때 중국은 계속 분열이 되어 있었고, 나라가 섰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지곤 했다. 이런 초미니 국가들이 어떻게 우리 삼국과 대등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비록 잃어버린 땅이지만 중국대륙 동부는 엄연히 우리 조상들이 활동했던 무대였음을 밝혀야 한다. 조상들의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찬란한 역사라도 제대로 되찾자는 것이다. 

신라사관=식민사관 08/05/20 [04:01] 수정 삭제  
  로 문무왕 하편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함형 원년(670년) 7월에 이르러 입조사 김흠순 등이 와서 경계선을 그으려 하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전부 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이 되지 아니하여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3.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다 실망하고 모두 말하기를 (이하생략)” (주 太山 = 泰山)
메어린 08/05/20 [13:34] 수정 삭제  
  그렇다면 신라 무열왕릉은 분명히 경주 선도산에 있습니다. 비석에 분명하게 나와있지요. 왜 신라가 반도와 대륙에 나눠 있다면 무열왕의 유택을 경주에 둔 것일까요? 백제나 신라가 대륙이었다는 의견을 믿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신라왕들 중 유일하게 출처가 분명한(비석의 글이 온전함) 무열왕의 유택이 경주 선도산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추가 설명 부탁드립니다. 신라 통일의 왕으로 모든 신라인들이 추종하던(적어도 그랬던) 무열왕릉이면 중국 대륙에 있어야 했지 않았을까요?
지오 08/05/20 [13:35] 수정 삭제  
  위에 리플처럼 비과학적 악풀말고, 과학적, 정황적 구체적 내용으로 위 내용을 부정해 보시지요. 그러지 못할거면 위 글을 인정해야 할것입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5/20 [15:38] 수정 삭제  
  영경사 북쪽이 어딘인지는 현재 알 수가 없습니다. (중국 땅으로 봅니다) 경주에 있는 태종무열왕능은 후대에 이장을 했거나 아니면 시신도 없는 무덤일지도 모릅니다. 비석이야 얼마든지 후대에 세울 수 있는 거지요.
신라의 왕들의 장지는 대개 XX절 근처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지명은 모르겠고, 선덕여왕은 낭산(狼山)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주에 선덕여왕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낭산은 경주에 있는 산이름이 아니고, 양자강 하류에 아직도 그 지명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있던 왕릉은 없어지고 지금은 공설운동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 왕릉이 중국의 것이라면 문화재로 보전을 하지 갈아엎어 운동장을 만들겠습니까?

일제가 조작한 신라의 천년왕도가 경주입니다. 국민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메어린 08/05/20 [16:08] 수정 삭제  
  저는 지식이 약하기 때문에 질문으로 이어가렵니다.
백제가 대륙에 있다는 말은 신라가 한반도 전체(대륙의 일부와)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반도 이곳저곳에서 적어도 경주와 같은 유물들이 좀더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유독 경주에만 왕릉이 밀집한 것이 좀 의아합니다. 가야나 한성의 유적들은 너무도 경주의 유물들과 차이가 많습니다. 성훈님에 대한 반박의 글이 무령왕릉의 예로 아주 첨예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저도 성훈님의 주장을 믿고 또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경주에 있는 무열왕릉비가 후대에 세워졌거나 시신이 없는 무덤이란건 오로지 님의 추정이 아닐런지요? 기록에는 영경사 북쪽이라고 되어 있으나 선도산 앞의 무덤들 중 어느 한 무덤 앞에는 분명히 비석이 존재해 그 주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무열왕릉의 귀부와 이수는 양식과 재질 분석결과 7세기 당대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무열왕릉의 비석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비석에 이수부분에 분명이 태종무열왕의 묘라는 표식 있으니까요. 유물이 주인을 말해주는데도 조작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 비약적인 것 같습니다. 기록의 분석은 유물의 분석과 함께 항상 여러 각도로 같이봐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것도 논거가 또 옆길로 샐수 있겠으나) 무영왕릉의 무덤이 이장되었거나 시신이 없었다는 님의 주장은 증거가 필요할것입니다. 고로 여쭙고싶은 것은 백제는 대륙에 근거하고 반도전체는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너무 약합니다. 저는 백제의 증거는 지식이 약해 모르겠지만 신라가 대륙의일부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님의 말씀에는 수긍이 가지 않다는 말입니다. 만약 신라가 대륙과 반도 모두를 장악했다면 분명히 무열왕릉은 대륙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증거제시가 있으시면 추가 논지를 부탁드립니다. 성훈님의 글이 좋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ps: 그리고 성훈님의 글을 읽어보면 박창범 교수가 시뮬레이션 한 주장을 너무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직까지는 한 개인의 주장일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전문가이시겠지만 좀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연구를 하여 분석한 결과를 도출한 후 그런 결론이 나야 할듯 합니다. 왜냐믄 한사람이 제출한 통계는 다수가 믿기에는 언제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류라는 것이 존재하지요. 다수가 인정할 수 있는 통계란 그렇습니다. 다수가 공통의 연구를 한 이후 같은 결과 혹은 수긍이 있어야 합니다. 제 말은 박교수의 주장이 참인거짓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말이지요. 전문가가 연구해 놓은 자료가 있는데 일반인들이 뭘 알고 못믿겠다고 그러냐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님께서 그렇게 믿은 박교수의 주장이 혹 내후년쯤 당사자가 잘못된 시뮬레이션이라고 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고로 님께서는 너무 위험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시는 겁니다. 저도 님의 주장이 정말 그렇게 들어맞길 원합니다.
윤복현 08/05/20 [17:25] 수정 삭제  
 

백제사는 한반도(수도) 온조백제가 중심이 된다! 1)마한(한반도 지역)50여개국 속의 백제(=온조백제) 한치윤은 1765(영조 41)~1814(순조 14). 조선 후기의 실학자.반성리학적 입장에서 역사학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한국사의 정통론을 체계화하여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한국사연구를 대표하고 있다 .※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世紀四, 三韓편을 보자.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在西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南與倭接, 辰韓在東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有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 合方四千餘里, 한(=한반도 남부지역의 삼한을 총칭)은 3종이 있다. 하나는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서쪽으로는 54개 국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낙랑(최씨 낙랑국)이 있고, 남족으로는 왜(=대마도.오키나와를 비롯한 일본열도)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경상도 지역)에 있었는데 12국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예맥(강원도 지역)이 접해 있었다. 변진(소위 가야)은 진한의 남쪽에 있었는데, 역시 12국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역시 왜와 접해 있었는데, 삼한은 모두 78국이 있었다. 그  중 한 나라가 백제(=온조백제=십제)다. 큰 나라는 1만 여호를 갖고 있었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이들은 모두 산이나 바다 지간의 땅에 살았다. 방경(=직사각형을 의미하니 한반도 남부지역은 빙 둘러 방경4천리가 맞다할 것이다)은 모두 4천여 리이다.  2) 삼한(三韓)의 위치와 강역 ※이십오사(二十五史)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趙一淸曰弁韓後漢書作弁辰, 然弁辰別是一國, 則此當作弁韓, 以當三韓之數…王會汾曰, 晉梁二書, 皆作弁韓…朝鮮史, 謂三韓誰曰分立實則辰弁二國, 僅爲馬韓所支配, 非勢均力敵也… 漢書朝鮮傳,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朝鮮雍閼, 師古曰, 辰謂辰韓之國也, 後漢書光武帝紀建武二十年秋, 東夷韓國人率詣樂浪內附, 東夷有辰韓, 卞韓馬韓謂之三韓國也, 梁書, 辰韓始有六國, 梢分爲十二, 新羅其一也, 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 舊唐書, 百濟國, 爲馬韓故地,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한(韓=한반도 남부지역)은 대방(帶方=한반도 북부지역)의 남쪽에 있다. 동서(=동해와 서해)로 바다가 있고, 남쪽으로는 왜(倭=일본열도)와 접하고 있다. 나라의 방경은 4천리다. 3종(=단군조선해체이후 한반도 3한)이 있었는데,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조일청의 말에 의하면, 변한은 후한서에 보면 변진(=경상도 서남부 지역)으로 되어있다. 변진은 별도의 한 나라로 보일 것이나, 한 나라다. 이 당시에는 마땅히 변한이며, 당연히 삼한에 속한다. 왕회분의 말에 의하면, 진서·양서 두 책에는 변한으로 되어있다… 한서 조선전에 의하면, 진번은 진국이다. 위의 책을 볼 것 같으면 천자 조선국이었다. 사고의 말에 의하면 진은 진한의 나라다(=흉노 김알지 세력이 들어오기 전까지). 후한서 광무제(AD 25년) 건무 20년 가을에, 동이 한국인들이 무리지어 낙랑 땅에 이르렀다. 동이는 진한, 변한, 마한이 있었는데, 이를 삼한국이라 한다. 양서에는, 진한은 처음 6국(=신라의 기원인 6부촌)이 있었으나, 점차 12국으로 갈라졌다. 신라가 그 중 한 나라다. 마한은 54개 국이 있는데, 백제(=온조백제=십제)는 그 중 한 나라다. 구당서에 의하면, 백제국은 마한의 옛 땅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에 있는데, 그 백성들은 서쪽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며, 씨도 뿌리고 곡식도 심었으며, 양잠을 했고, 목화도 심고 무명옷도 만들었다(서쪽은 곡식이 풍성한 평야지대가 산재한 충청.전라도 지역을 가리킨다). 각기 거느리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큰 자는 스스로 신지라고 이름했다(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마한의 적자임을 보여준다..마한은 단군3조선의 하나로써 단군조선의 해체이후 진왕이라는 부단군격이 왕으로 추대되어 통치했으며, 북쪽에서 유입되어 세운 진한과 번한은 마한에게 조공을 바쳤다.이 마한을 근초고왕시기때 백제가 복속하는 것이다.). --------------------------------------------------------------------------------백제는 한반도의 온조백제가 결국 중심이 되어 한반도의 마한을 복속하고 일본열도, 나가 중국 동북부.동남부지역과 동남아시아까지 경영하게 되는 동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3면이 바다인 한반도 지역의 마한인들은 원래 선박제조술과 항해술이 뛰어 나서 일찍이 군선500여척을 이끌고 왜인들의 중심지 [해도]로 쳐들어가서 반란을 진압하고 일본열도를 복속시켰다는 [한단고기-마한세기]기록이 있다. 온조백제는 이 마한인들의 선박제조기술과 항해술과 나중에 "땅을 가지고 온조백제에 귀순합류한(한단고기-고구려본기)" 비류백제의 강한 북방군사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해상제국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만주와 요서지역의 비류백제가 고구려와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온조백제에 합류한 근초고왕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근초고왕시기 때 백제는 갑자기 강성해졌으며, 마한전역을 복속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초고왕.근구수왕때 서해를 건너 비류백제의 기반인 요서지역을 기반으로 중원.산동지역 등 중국의 동북부 지역과 양자강 지역인 중국 동남부 지역, 나가 동남 아시아까지 해상을 통하여 진출하여 탄탄한 백제의 기반을 다졌다고 볼 수 있으며, 그 토대위에서 후대인 동성왕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역량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400여년간을 백제가 지배한 중국지역에 수많은 백제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했을 것이며, 한반도백제와 관련한 백제지명들과 유적들이 얼마든지 지어질 수 있고, 건설될 수 있는 것이다. 서해를 못 건넜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백제를 중국에다만 가두고 있는 것이다. 고대 백제인들은 돛을 달고 항해를 했다. 고대인들의 의지는 현대인들보다 오히려 강했다고 보면 얼마든지 이해가 될 것이다. 백제사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면 고구려의 고추모의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소서노와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났다. "남쪽으로 이주하여 진.번 사이, 북으로는 대하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해했는 외진 곳에 터를 잡고 10년간 장사를 하여 부를 쌓았다. 소서노는 살만한 땅이라고 고추모에게 편지를 쓰니 고추모도 기뻐하며 '어하라'라 칭했다. 비류가 즉위하자 따르는 자들이 없었다. 온조는 마한이 쇠퇴할 것이라는 신하들의 얘기를 듣고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떠나 서쪽으로 바다와 접해있는 지역에 성을 쌓고 신하10명이 따랐다 하여 '십제'라 했다..비류세력은 땅을 가지고 귀순했다 (한단고기-고구려 본기)" 이 한단고기 내용을 정리하면 소서노와 비류.온조는 지금의 발해만 지역에 정착하여 장사를 한 후 돈을 많이 벌었고, 소서노는 고추모에게 여왕의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비류가 소서노의 뒤를 이어 왕에 올랐으나, 따른 무리가 적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유리에게 왕위를 빼앗긴 분노를 대충 짐작할 수 있으며, 결국 온조는 비류와 합류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고, 이후 비류세력이 온조백제에 귀순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문헌들을 보면 비류세력이 만주지역에서 고구려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패하고 온조백제에게 땅을 가지고 귀순합류했다는 내용에서 백제의 중심은 결국 한반도 온조백제임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비류는 우태의 아들이지만, 아바지의 나라인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온조는 우태의 아들이 아니고 고주몽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온조세력이 배를 타고 남하하여 1차로 터를 잡은 지역이 백제관련 토성과 유물들이 발견되는 지금의 북한 예성강지역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남하에 밀려 2차로 지금의 한강지역에 터를 잡고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강동지역에서 발견된 한강이남의 풍납토성은 백제한성을 둘러싼 성으로 볼 수 있으며, 초기 백제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며,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듯이 백제초기에 교류했던 중국의 동진의 토기들이 다량 출토된 점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다. [대부]라는 글자가 쒸어진 유물은 백제 한성을 점령한 고구려 군대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이집트보다 규모가 큰 무덤이 열쇠모양의 전방후원분인 일본의 인덕왕릉인데, 이 일본의 인덕왕릉보다 규모가 큰 무덤 10여개 이상이 풍납토성 부근인 서울 강동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서울 석촌동 피라미드는 백제초기 무덤이라기 보다는 마한시대의 무덤으로 보아야 맞다. 백제초기무덤들이나 고구려 무덤들은 시체를 두는 지하석실을 만든 후에 흙을 덮는 봉토고분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서울 강동지역은 초기 백제왕들이나 왕족들의 무덤들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백제의 분국이나 마찬가지인 일본의 인덕왕릉이 바로 서울 강동지역의 대형 전방후원고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 초기수도지역인 집안지역의 1만 5천기 무덤들 또한 고구려 무덤들이라기 보다는 고구려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무덤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국정부는 집안지역의 피라미드 무덤들이 고구려유적이라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고구려유적지라고 해야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의 연대가 올라간다. 사실, 서안지역의 피라미드 연대보다 백두산지역인 집안지역의 피라미드 연대가 더 올라간다. 집안지역의 피라미드연대보다는 한반도 피라미드 연대가 더 올라간다. 피라미드 무덤의 원형이 남방식 고인돌 무덤이다. 세계 고인돌의 70%가 한반도, 그것도 호남지역과 북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 고인돌 무덤양식이 피라미드 무덤으로 발전한 것이다. 원래 한반도에 피라미드 무덤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때 훼손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것도 일본인들이 고대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서 오는 무지와 역사적 열등감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집안지역의 1만 5천기 피라미드 무덤들과 석촌동 피라미드 무덤들은 모두 백두산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단군왕검의 개국과 관련하여 한민족의 화합단결를 선언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백두산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자료]서울 강동지역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의 한국의 전방후원분일본의 전방후원분


구굴로 비교해 본 한일 전방후원분
 위성사진에 명시된 고도를 이용해 양국 고분의 크기를 재본 새드박스는 이번에 한국에서 발견된 고분이 일왕의 무덤인 인덕릉보다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동구 일대 고분 중 하나는 1983피트 상공에서 찍은 위성사진에 화면이 꽉 찼는데 일본의 인덕릉과 용산릉은 각각 1911피트와 1756피트에 불과했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에 위치한 인덕릉은 이집트 피라미드보다도 큰 세계 최대규모의 고분으로 알려져 있어 새드박스의 분석이 맞다면 이번에 발견된 우리 고분이 세계에서 가장 큰 고분이 되는 셈이다. KBS는 지난달 31일 서울강동문화원이 백제문화연구원에 의뢰해 탐사를 벌인 결과 전체 길이가 00∼150m에 달하는 고분 10개가 발견됐으며 일본식 고분 양식인 전방후원분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일 양국간 큰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한편 KBS는 ‘역사스페셜’을 통해 인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동경)이 백제 무령왕릉 속 동경과 형제처럼 닮았다는 점에 착안,일왕이 백제후손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상기기자
ssjjsjsjsj 08/05/20 [17:46] 수정 삭제  
  대륙은 분명 이민족의 영토이며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단군역사입니다....
아직도 정신못차리는 위 같은 역사나좀 안다는 사람들이 오ㅐ곡된 역사서만 탐독하고
식민 매국적 발상을 하는 것이지요....잘 기억 하세요 한국영토는 한반도를포함
일본일부와 대륙전체가 한국 영토임을 아세요 그렇게 협소한 긴가민가 한 사학가지고
선량한 학구들 사학 흩트리지말고요...다시말하지만 대륙은 우리 대륙임니다..편협한
사고 이제그만 버리세요들 우리 는 대륙의 원 주인임을 깨우처야 미래가 보입니다
미처 버린 지금의 사학책으로는 한국의 미래가 없어요...얼마나 더 흘러야 정신들
차릴건가요 지금 일본은 한국을 다시 처먹으려 독도망언과 망발에 고유영토라 뻘짓인데요
좀들 정신들 차리세요 사학에 관심이 있으면 올바른 사서를 찾을려노력해서 제대로된
글을 써야지 긴가민가 글은 아무리 학식이 분분하다해도 미래 어린 사학자들에게는
독일 뿐이예요.....반세기도넘은 이나라에 아직도 저 몬난 이병도 사고가 있음은
통탄하지안을수없음이지요 그자도 죽음에 임박해서는 단군조선은 신화가아닌
실존의 역사라 밝혔어요... 그러할진데 아직도 정신없는 이나라 역사인식은
이모양이니 ....................
성훈 칼럼리스트 08/05/20 [18:34] 수정 삭제  
  현 무열왕능비가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경주의 왕능들은 거의 후대에 이장되었거나 새로 만들어진 무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낭산에 묻힌 선덕여왕의 무덤입니다. 김춘추가 당으로부터 직책이 우이도행군총관입니다. 우이도는 산동성을 말합니다.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그런 사람의 무덤이 경주에 있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박창범교수의 논문은 혼자 연구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논문이 발표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아직 반박 논문이 없습니다. 그만큼 정교하고 사실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자의 논문이 대충 시뮬레이션 정도로 보고 나중에 잘못된 것이라고 수정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님의 생각일 뿐입니다. 박교수의 일식분석 말고도 여러 증거들이 삼국에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박교수의 논문은 과학적인 증거의 하나일 뿐입니다.

한반도는 고구려의 지배에 있다가, 신라가 마립간에서 왕이란 칭호를 쓰는 지증왕 때부터 독립한 것으로 봅니다. 진흥왕순수비는 의혹은 있으나 뭐라 얘기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한반도 동신라는 대륙 서신라의 분국 수준이기 때문에 유물이나 유적이 한반도 전역에 많지 않은 겁니다.

백제가 왜와 접(接)하고 있다는 것은 육지로 붙어있다는 말입니다. 그건 대륙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황하의 물줄기는 백제 건국 시에는 천진으로 가고 있습니다. 東西의 海 중 西의 海는 바로 황하를 말하거나, 대야택이나 독산호 같은 큰 호수를 말할 수도 있고, 대평원을 바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해라는 지명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海가 바다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방이라는 지명이 대륙 하북성 황하 위에 에 엄연히 있고, 위례성은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인데 그게 어떻게 한반도에 있단 말입니까? 한반도에 있었으면 김부식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식민사학에 쩔은 신문기사를 올리는 것은 저를 음해하려는 것으로 판단되어 댓글을 생략하겠습니다.
바로 알기 08/05/21 [01:57] 수정 삭제  
  온조백제가 속해있던 삼한 땅 方4천里의 크기는 얼마인가?
[三國志 魏書 東夷傳]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三韓 땅 方4千里를 두고 안원전류의 환빠들은 "한반도의 종단이 3000리인데 三韓 땅이 方4千里라면 필시 이 三韓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엄청난 크기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망상적 자아도취 속에서 헤매기 십상이오. 그러다보니 三韓과 인접한 백제가 대륙에 위치하게 되고 또 그와 인접한 낙랑이 위로 올라가게 되며 당연히 고구려는 하북성쪽으로 위치가 다 뒤바뀌어 한반도 역사가 모조리 중국땅에 기반한 것인즉, 환빠들의 정체가 도대체 동북공정을 시도하는 짱깨들의 논리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다는 말이오.方可四千里~ 에서 可는 부사요. 수치를 나타내는 수사(數司) 앞에서 쓰이면 "대략~" 이라는 뜻을 갖소. 그렇다면 그 대략 方四千里는 어떻게 해석해야 옳으오?  九章算術(구장산술), 周髀算經(주비산경)같은 고대 중국의 수학서들을 보건대 積方(적방)이라는 단어가 있소. 이때 積方(적방)은 당연 면적이 되오. 예컨대 가로 2里 , 세로 3里 의 땅이 있다고 했을 때 총 면적이 얼마이냐 묻는다면 積方이 얼마이냐 하고 묻소. 그러면 답은 積方 6里가 되오이다. 이때의 里는 엄밀하게 말해서 (里)² 즉, 평방里의 개념이오. 미터법으로 따지자면 ㎡의 개념이라 보면 되겠소.그러나 고대 중국의 수학서에서는 평방里, 또는 평방尺 이런 개념은 사용 하지 않소. 일본 학자들이 가끔 이런 소릴 하는데 낭설이오. 면적에 쓰인 里나 步, 尺은 평방의 의미를 갖지만 면적을 뜻할 때나 길이를 뜻할 때나 이 단위글자는 같게 사용되외다. 심지어는 부피를 나타낼 때도 里를 사용하기도 하오.  고대 중국에서는 단지, 개떡같이 말하고 찰떡같이 알아들었다고 생각될 뿐..고대 중국인들이 어찌 평방의 개념을 다 알겠소이까?구장산술(九章算術)에 "廣從步數相乘得積步。 以畝法二百四十步除之, 即畝數。 百畝為一頃。"라는 말이 있으니 세로와 가로의 길이인 步數끼리 서로(相) 곱하여(乘) 적보(積步)를 얻는다 되어 있소. 만약 步대신 里를 사용한다면 積里(적리)라 할 수 있으니 積里라 함은 곧 면적을 뜻한다 할 수 있겠소이다.실상이 그러하온대, 方의 개념 역시 면적을 뜻하기도 하고, 사각형 토지의 한 변을 뜻하기도 하고, 사방 둘레의 합을 뜻하기도 하였소. 따라서 方이라는 개념은 그때 그때 문맥에 맞게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보는 바이요. 이것이 소햏의 연구 결론이외다.그렇다면 중국 25사에서 종종 등장하는 方의 개념이 둘레로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 보겠소. 고대 국가나 지방군현의 경우 강역을 정확하게 상고할 길이 없어 증명이 곤란하나 대마도 땅의 크기는 고대나 현대나 큰 차이가 없으므로 좋은 비교사례가 될 것이오.삼국지 동이전 倭조에 의하면,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絕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라고 되어 있으니 대마도의 크기는 대략 方4백여里로 계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소이다. 이를 환빠들의 지적처럼 한 변의 크기로 계산하여 사각형으로 잡아보면 積方 160,000里에 달하오. 이는 우리나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합한 면적이요. 언제부터 코딱지만한 대마도가 이리 컸단 말이오? 그렇다면 대마도의 최대 종축을 얘기하는가?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실제 거리를 측정해 본 결과, 대마도의 최대 종축은 漢代의 개념으로 약 130리 정도에 불과하오. 400리의 거리는 오늘날 165km에 해당되는 거리로 서울 시청에서 강원도 끝 강릉시청 거리 쯤 되어이다. 아무리 널널하게 잡아도 대마도의 길이는 이 거리의 1/3을 벗어나기 어렵소. 이로서 삼국지 동이전의 倭조에서 이야기 하는 대마도의 方400里는 한변의 길이도 아니도, 최대 종축의 길이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소. 오히려 이 400여里의 뜻은 둘레를 뜻함이 밝혀졌소.백문이 불여일견이니 구글어스의 대마도를 가지고 실측해 보기로 하는게 좋을 것 같소이다.
보다시피 쪽바리들의 대마도를 가지고 변계(邊界)의 둘레를 재어보니 대략 180km 정도 값이 나왔소이다.이것을 고대 중국의 里의 개념으로 변환을 해보면, 진수의 삼국지가 편찬될 무렵에 1里는 414m, 즉 0.414km 정도 되오. (中國歷史地名大辭典, 鹽英哲, 凌雲書房,1980에 의함).그렇다면 이 180km는 삼국지 시절의 434里가 되오이다. 그러니 위 三國志 魏書 상에 나타난 바, 대마도의 크기가 대략 400여리다. 한 것은 딩동댕이고 빙고라고 말하고 싶소이다.이제 이를 바탕으로 문제의 기록 삼한시대 땅덩어리를 증명해 볼 차례요. 위에 맨 처음 문장에서 소개하였던 바대로 三國志 魏書상에 나타난 삼한의 크기는 대략 方4천里라 했소. 역시 이 것을 한변의 크기로 본다면 4,000里 × 4,000里 = 1천600만里가 면적이 되오이다. 도저히 말이 안되는 개념이라 할 수 밖에 없소. 위 대마도의 경우 섬이므로 비교적 고대와 현대의 땅덩어리가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에 실측하여 비교하기가 수월했으나 삼한의 경우 구체적 강역을 상고할 길이 없으므로 대략 통설의 입장을 따라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비정하여 지도를 가지고 실측해보기로 하겠소이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 즉, 낙랑군 동부에 해당되는 강원도 북부와 대방군 이하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사방 둘레를 측정하여 본 결과 약 1,476km로 값이 나왔소이다. 이를 역시 삼국지 시절의 里단위로 환산하여 보면 3,565里가 산출되오이다. 4,000리보다 약간 적은 숫자가 나왔으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삼한의 땅덩어리를 정확하게 상고할 수가 없어 나오는 오차라고 보이오. 실제로는 이 지도상의 표시강역보다 더 크다고 생각되오. (강원도 쪽으로 좀더 올라갈 수 있다고 보오.)
라디오 08/05/21 [03:50] 수정 삭제  
  남당 유고 '백제왕기'에 의해 비류백제 온조백제설은 부정이 됩니다.
라디오 08/05/21 [03:52] 수정 삭제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http://www.history21.org/
라디오 08/05/21 [19:08] 수정 삭제  
  중국 산동 지방이 백제 요서 진평군이 아니라... 광령.. 즉, 대릉하 부근이 '진평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윤복현 08/05/21 [22:35] 수정 삭제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의 초기 국경이 북쪽으로 말갈과 접해있다]

틀린 기록은 아닙니다. 또한 말갈관련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기록들도 있습니다.

◆ 온조왕 2년: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에 맞닿아 있다.그들은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역시, 북쪽 국경선과 접한 말갈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백제 의자왕 15년: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백제와 고구려.말갈이 우리의 북쪽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 [삼국사기-신라본기]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14년: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말갈이 북쪽 경계에 크게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위 삼국사기 내용들이 말한 백제는 마한50개속에 들어 있는 온조백제입니다. 마한은 한반도지역입니다. 당시 한반도 북쪽은 강원도와 접해있는 [동예] 등 중국문헌에 말갈로 표기되는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한서쪽엔 온조백제가 존재하고 있었으니 맞습니다. 온조백제초기에 자주 말갈과 충돌하는 기사가 나오지요. 참고로 마한은 "동서가 바다이고 남으로는 왜(일본)와 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진한, 동서남부지역으로는 변진(변한)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온조백제는 삼국사기나 한단고기 기록상"서쪽으로 바다와 접해있고 한수(한강)를 끼고 있는"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북한의 예성강 지역에도 초기백제 토성이나 유적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온조세력이 1차 터를 잡은 곳이 예성강 지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북쪽으로 말갈과 접해있다"는 기록내용은 더욱 타당한 기록으로 봅니다.

백제사는 한단고기 기록상"비류가 죽자, 신하들이 땅을 가지고 온조백제에 귀순"했기 때문에 그 중심이 온조백제가 됩니다. 비류백제을 통합시킨 온조백제는 근초고왕시절부터 갑자기 강성해져 마한전역을 복속하고 마한인들의 선박제조기술과 항해술을 기반으로 일본열도,중국 동북부.동남부 지역,동남아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 해상제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일부 사학자들은 단군3조선에 해당한 마한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에다가 설정하고 "서쪽에 바다(황해=서해)를 접하고 있는 온조백제"의 기록내용을 지중해쪽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서쪽에 바다가 없는 중국에다가 설정한 나머지 엄청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충설명:말갈에 대하여

★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蓋肅愼之地. 中略. 東至於海. 西接突厥. 南界高麗.』말갈은 숙신의 땅에 있다. 중략.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돌궐과 접해 있다. 남쪽 경계에는 고구려가 있다.

★ 수서(隋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在高麗之北』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사서내용들을 보면 말갈은 고대 중국인들이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만주지역에 살고 있는 동이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지역적으로 구분해서 그렇게 표기한 것 뿐이지, 부여.고구려인들도 모두 말갈에 속한다할 수 있고, 말갈족 또한 부여.고구려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갈족은 만주와 한반도북부지역까지 당연히 분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말갈이라는 표현에 고대 중국인들이 자기내들 주관적으로 동북방에 지역민들을 비하하는 발상에서 표현한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측 사서에 말갈에 대해서 무슨 말갈이니 7부가 있닌 이런 소리들이 있지만 그 역시도 사서에 따라 일정치 않고 심지어 고구려전체를 말갈로 비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라까지 말갈로 칭할정도이고 한반도 남부 강원도지역까지도 말갈거주관련 기록이 나온다라면 정밀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한 의미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정밀하고 과학적 분석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인류 인종학자가 민족에 대해서 분석해서 결론을 내리는 정도 수준을 의미하는데 분명히 중국측에서는 그런식으로 말갈을 연구해서 사서에 적어놓았슬리는 만무하죠. 그러니 결론은 중국측입장에서 동북방에 고구려던 신라던 간에 모두들 비칭해서 그렇고 그런 족속들이라는 의미로써 말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컨데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 어떤 사서는 말갈부족이라고 되어 있다고 해서 대조영이 고구려족이냐 말갈족이냐 그런혼선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중국측의 사관에서 벋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발상입니다.어짜피 중국측에서보면 예맥계이던 다른 퉁구스계이던 간에 다 그렇고 그런 호전적이고 골치아픈 족속들이라는 시각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사서에서도 후대 고려 조선시대 사서에 말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자체 고대기록이 전무하여 중국측 사서를 차용하다보니 중국측에서 사용하는 말갈족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차용할수밖에 없기에 무슨 말갈이 별도의 민족개념인줄로 착각할수밖에 없다라고 봅니다.

그러니 말갈에 대한 개념은 어떤 민족도 아니고 어떤 특정지역도 엄밀히 아닌 중국측에서 지역적으로 쉽게 구분하기위해 지네들 마음대로 사용한 동북방 지역만들에 대한 비속적인 표현일뿐이기에 솔직히 중국중심의 사관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말갈족이라는 단어를 폐기하여야 한다라고 봅니다.

그러한 한족들의 표기에 헤매여서 자칭 우리의 역사연구가 혼선을 빠져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문헌들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공통적인 내용들을 찾아내고 그 내용을 고고학과 비교하여 객관성을 찾아내는 일이 바른 역사연구의 관점이라 할 것입니다.
이병도 08/05/22 [10:56] 수정 삭제  
  삼국을 한반도로 밀어 넣으려는 일제와 이병도의 이론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네요. 일본 천황에게 상받겠군요. 서쪽의 대해를 바다로 보면 이병도가 파놓은 함정에 빠집니다.
반도사관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일제가 만든 이론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이 대대로 일본열도에 있던 민족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삼국이 한반도에 있어야 일본이 열도에 있다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왜는 대륙 남부에 있다가 해류를 타고 열도로 갑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최소한 백제 패망 시까지는 대륙에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온조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닙니다. 위례성과 한성은 대륙에서 찾아야 합니다. 식민사학의 부패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군요.
이룬 08/05/23 [00:33] 수정 삭제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ㅎㅎ 참 황당하다
윤복현 08/05/23 [14:51] 수정 삭제  
  성훈님의 경우가 전형적인 소위, 대륙사관입니다. 대륙사관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1)고대사를 중국에다만 가두어버림으로 스스로 지정학적 관점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예컨대, 서해를 건너지 못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바다를 큰 평야나 강으로 곡해하는 경우들이 그렇습니다.

2)한단고기 등의 사료를 진서로 인정하는 경우에도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는 나머지,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만 인용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3)기존 사서나 사료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만 취사 선택하여 삼국사기 등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즉, 대륙사관론자들은 중국에다만 역사를 가두어버림으로써 스스로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배타성과 폐쇄성이 전제될 수 있어 식민사관이나 동북공정론자들처럼 고대사 인식에 있어 객관적 시각보다는 자위적인 논리를 폄으로써 오히려 고대사에 대한 혼선과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한계와 문제점이라 할 것이다. 역사인식이란 종합적인 주장들과 논리들속에서 객관성을 공유하고 담보하는 공동적인 작업이지, 근본주의 기독교사관처럼 자기우월주의적이고 배타성에 빠진 일부 감성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인식에도 중용의 도가 작용되야 혼란이 사라지고 바른 역사가 정립될 것이라고 본다. 올바른 역사관점을 위해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연구이전에 상대의 논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자기우월주의와 배타성을 탈피하고 사물을 거시적 차원에서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자신들의 사고부터 교정해야 한다고. 그리고 제발 인류문명의 시원지인 한반도를 제발 좀 사랑하라고.ㅎ
바로 알자 08/05/23 [14:57] 수정 삭제  
  대륙사관론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사는 인용하면서 불리한 기사는 왜곡되었을 것이라고 우기는 웃지못할 논리를 펴고 있으니 한심하다 할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만 전제로 깔겠다.

온조백제는 서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이 바다는 큰 강이나 큰 평야가 아니고, 말 그대로 바다였다는 사실을 삼국사기 기록으로 증명하도록 하겠다(잘 정리된 인터넷 내용을 인용한다.작성자에게 감사드린다). 고대인들이 바다와 강과 평야를 하나 구분 못해서 강이나 평야를 바다(해)로 표기를 했겠는가!![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遂至, 登, 望可居之地, 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不聽, 分其民, 歸< 鄒忽>以居之. 都, 以十臣爲輔翼, 國號, 是三年也. 以< 鄒>土濕水鹹, 不得安居.백제의 땅을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북으로는 한수가 막아주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막아주고, 남으로는 기름진 땅이 있고, 서로는 큰바다가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대륙론자들은 대해大海가 바다라는 뜻이 아니라 큰 평야라는 뜻이라고 우겨댄다.) 여기서 大海를 큰 평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동남이 모두 터진 곳이라면 그곳이 어떻게 한 곳일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비류는 이 를 버리고 해빈海濱에 가서 살고자 했습니다. 해빈海濱은 바닷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평야의 변두리라고 번역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곳이 바닷가라는 것은 그 뒤에 나오는 토습수함土濕水鹹이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은 습하고 물은 짜다라는 뜻입니다. 함鹹이라는 글자는 입니다. 이로써 백제의 서쪽에는 큰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서쪽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2.다음은 온조왕 13년의 기록입니다.八月, 遣使告遷都. 遂 定疆 , 北至, 南限, 西窮大海, 東極위 기록은 마한과의 경계를 정한 것인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으로 한계지으며, 서로는 큰바다에 다하며, 동으로는 주양에 극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대해大海를 큰 평야라고 한다면 끝간데 없는 그것의 어디를 경계로 삼는단 말입니까? 3. 다음은 고이왕 3년의 기록입니다.三年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여기에는 서해西海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을 라는 지명으로 본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던데, 그렇게 본다면 뒤에 나오는 대도大島(=큰섬)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해의 큰 섬에 가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일 뿐입니다.4. 다음은 근구수왕 5년의 기록입니다.五年春三月, 遣使朝, 其使海上遇惡風, 不達而還.이것은 중국의 晉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바다에서 모진 바람(惡風)을 만나 되돌아왔다는 기록입니다. 5.다음은 진사왕 2년의 기록입니다.二年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 西至於海.나라사람중 15세 이상을 뽑아서 관방關防을 설치하는데, 청목령으로부터 북으로 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6. 다음은 전지왕의 즉위와 관련되는 기사중 일부입니다.留人自衛, 依海島以待之.전지가 머무르며 왜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지하여 때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해도海島를 바다의 섬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번역법이 있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때의 섬은 남해의 섬일수도 있고, 서해의 섬일수도 있지만 앞의 기사 내용을 읽어보면 서해의 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7. 다음은 개로왕 18년의 기록입니다.十八年, 遣使朝. 上表曰: {臣立國東極,사신을 중국의 魏나라에 보내서 올린 표에 臣은 나라를 동쪽 끝에 세웠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백제는 중국의 위魏나라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바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위치는 한반도 뿐입니다.8. 다음은 역시 개로왕이 보낸 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去庚辰年後, 臣西界北國海中, 見屍十餘, 得衣器鞍勒, 視之, 非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위 글의 내용은 위나라의 사신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이 백제로 오다가 고구려의 방해를 받아 바다에 빠져 죽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즉 위나라에서 백제로 오려면 바다를 지나야 하는 것이고, 위나라는 백제의 서쪽에 있으므로 그 바다는 지금의 서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9. 다음은 개로왕의 사신에게 위나라의 효문제가 답한 내용 중 위의 내용에 관하여 답한 부분입니다.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위 글은 전에 사신을 보내 바다를 건너 먼 나라들을 위무하라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아 존망을 알 수는 없지만 백제가 보낸 말안장 등은 중국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여기서도 백제를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부해浮海)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0.다음은 위 효문제가 백제에게 준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백제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물海物이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지극 정성을 인정해서 몇가지 물건을 내린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해물海物이 쓰여서 백제가 바다와 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1.다음은 역시 개로왕 18년의 일로 중국의 사신들이 백제에 오지 못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後使等從浮海, 賜璽書, 褒其誠節. 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중국의 사신인 소안이 동래東萊(산동성입니다. 중국은 이곳에서 요동반도로 갔다가 서해 연안을 따라 우리나라로 오는 항로를 이용합니다.)에서 바다를 건너(浮海) 개로왕에게 오려고 했는데,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 오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역시 중국도 바다를 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12.다음은 문주왕 시해 사건을 삼근왕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탓하며 김부식이 달아놓은 평입니다.之弑, 三世而後僅能殺其賊, 海隅之荒僻, 之童蒙又烏足道哉당 헌종의 시해범도 3세가 지난 뒤에야 잡아 죽였으니, 바다 모퉁이(海隅) 황량하고 궁벽한 곳(荒僻)의 삼근 어린애(童蒙)가 어쩔 도리가 있었겠느냐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비유되는 것은 명확한 것으로, 김부식이 백제를 중화에 비유하면 한 곳이라고 명확하게 기술해 놓은 것입니다. 13.다음은 동성왕 5년의 기록입니다.秋七月, 遣內法佐平, 如朝貢, 至西海中, 遇兵, 不進사약사가 남제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데 서해西海에서 고구려 병사를 만나 가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14.다음은 동성왕조 말미에 붙어있는 기록으로 중국측에서 바닷길이 험한데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고 칭찬하는 내용입니다.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해로숙징海路肅澄, 요로무체要貢無替라는 부분이 바로 바닷길이 험난하나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역시 백제와 중국은 바다를 항해하여 통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15.다음은 무왕 28년에 복신이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태종이 무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여기에서 해우하광海隅遐曠, 충도간조風濤艱阻라는 것은 바다 멀리 있어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게 가로 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16. 다음은 무왕이 죽자 당태종이 보낸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故柱國帶方郡王王, 棧山航海, 遠稟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민悼위 내용 중 잔산항해棧山航海라는 것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라는 뜻으로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는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17. 다음의 의자왕의 어린 시절의 기록 중 일부분입니다.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의자왕이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바다 동쪽의(海東) 증자曾子라고 불렸다는 것으로 이 말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18.다음은 의자왕 11년에 당고종이 의자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해동의 삼국이 건국한지 오래이고 영토가 벌려진 것이 개이빨처럼 인접했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묶어서 호칭할만큼 삼국은 아주 인접해 있으며, 또한 바다가 경계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륙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과 삼국이 붙어있었다면 애당초 저런 표현이 나올 리가 없지요.19.다음은 의자왕 20년의 기록입니다.西海濱小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서해西海 해변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서 죽어 백성들이 그것을 먹었는데, 다함이 없었다라는 기록입니다. 땅속에서 물고기가 나와 죽을 리는 없으니, 백제의 서쪽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20.다음은 당나라 정벌군 소정방의 행로를 그리고 있습니다.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소정방이 성산에서 떠나 바다를 건너(濟海) 백제의 서쪽(國西)인 덕물도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21.다음은 백제의 장군인 의직이 의자왕에게 당군을 맞아 싸울 전략을 품하는 내용입니다.佐平進曰: [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당나라 병사는 멀리(遠) 큰바다(溟海)를 건너 오므로(涉) 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베에서 반드시 괴로와할 것이므로 마땅히 육지에 내려서기를 기다려 공격하자는 내용입니다. 바다가 나오고 배가 나오는데도 바다 해를 평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22.그 외에 백제 정복전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濟海卒 統衆浮海 海水爲丹제해졸濟海卒 은 웅진 도독이 된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 죽었다는 것이고, 통중부해統衆浮海는 유인궤가 원군을 보내달라고 해서 손인사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며,해수위단 海水爲丹이라는 것은 백제 부흥군과 왜의 원군이 주류성 전투에서 패하며 전선이 모두 불태워져 바다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백제가 서해를 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굳이 증명하려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중국측 기록은 모두 거짓이라는 시각을 갖는 사람도 있고, 삼국사기의 기록만 믿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다른 일체의 사서를 배격하고 오로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논의를 폈습니다.
윤복현 08/05/23 [15:08] 수정 삭제  
   
마한을 중국지역으로 규정하고 백제사를 기술하면 뼈대자체가 바로서지 못함으로 나머지 기술은 오히려 혼선과 혼란만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마한은 한반도 지역입니다. 
 
삼한의 위치와 삼한의 마한지역에 존재했던 온조백제가 어떻게 동아시아 해상제국으로써 백제사의 중심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 단군조선의 3한(마한=한반도). 대단군 진한의 47대 고열가을 마지막으로 단군조선이 해체되자, 북방에서 마한으로 유입된 조선유민들에 의해 마한지역인 한반도 남부지역에도 마한.변한.진한 3한이 건국되는 것이다.한치윤은 1765(영조 41)~1814(순조 14). 조선 후기의 실학자.반성리학적 입장에서 역사학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한국사의 정통론을 체계화하여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한국사연구를 대표하고 있다.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世紀四, 삼한(三韓)편을 보자.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在西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南與倭接, 辰韓在東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有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 合方四千餘里,"  내용을 해석하면, 한(=한반도 남부지역의 삼한을 총칭)은 3종이 있다. 하나는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서쪽으로는 54개 국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낙랑(평양의 최씨 낙랑국)이 있고, 남족으로는 왜(=대마도.오키나와를 비롯한 일본열도)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경상도 지역)에 있었는데 12국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예맥(강원도 지역)이 접해 있었다. 변진(소위 가야)은 진한의 남쪽에 있었는데, 역시 12국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역시 왜(오키나와 등 일본열도)와 접해 있었는데, 삼한은 모두 78국이 있었다. 그  중 한 나라가 백제(=온조백제=십제)다. 큰 나라는 1만 여호를 갖고 있었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이들은 모두 산이나 바다 지간의 땅에 살았다. 방경(=직사각형을 의미하니 한반도 남부지역은 빙 둘러 방경4천리가 맞다할 것이다)은 모두 4천여 리이다. 다음은 중국의 25사(二十五史)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의 기록내용을 보자.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趙一淸曰弁韓後漢書作弁辰, 然弁辰別是一國, 則此當作弁韓, 以當三韓之數…王會汾曰, 晉梁二書, 皆作弁韓…朝鮮史, 謂三韓誰曰分立實則辰弁二國, 僅爲馬韓所支配, 非勢均力敵也… 漢書朝鮮傳,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朝鮮雍閼, 師古曰, 辰謂辰韓之國也, 後漢書光武帝紀建武二十年秋, 東夷韓國人率詣樂浪內附, 東夷有辰韓, 卞韓馬韓謂之三韓國也, 梁書, 辰韓始有六國, 梢分爲十二, 新羅其一也, 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 舊唐書, 百濟國, 爲馬韓故地,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











▲  한반도(마한) 남부지역의 삼한(한)과 주변국 상황내용을 해석하면, "한(韓=한반도 남부지역)은 대방(帶方=한반도 북부지역)의 남쪽에 있다. 동서(=동해와 서해)로 바다가 있고, 남쪽으로는 왜(倭=일본열도)와 접하고 있다. 나라의 방경은 4천리다. 종(=단군조선해체이후 한반도 3한)이 있었는데,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조일청의 말에 의하면, 변한은 후한서에 보면 변진(=경상도 서남부 지역)으로 되어있다. 변진은 별도의 한 나라로 보일 것이나, 한 나라다. 이 당시에는 마땅히 변한이며, 당연히 삼한에 속한다. 왕회분의 말에 의하면, 진서·양서 두 책에는 변한으로 되어있다… 한서 조선전에 의하면, 진번은 진국이다. 위의 책을 볼 것 같으면 천자 조선국이었다. 사고의 말에 의하면 진은 진한의 나라다(=흉노 김알지 세력이 들어오기 전까지). 후한서 광무제(AD 25년) 건무 20년 가을에, 동이 한국인들이 무리지어 낙랑 땅에 이르렀다. 동이는 진한, 변한, 마한이 있었는데, 이를 삼한국이라 한다. 양서에는, 진한은 처음 6국(=신라의 기원인 6부촌)이 있었으나, 점차 12국으로 갈라졌다. 신라가 그 중 한 나라다. 마한은 54개 국이 있는데, 백제(=온조백제=십제)는 그 중 한 나라다. 구당서에 의하면, 백제국은 마한의 옛 땅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에 있는데, 그 백성들은 서쪽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며, 씨도 뿌리고 곡식도 심었으며, 양잠을 했고, 목화도 심고 무명옷도 만들었다(서쪽은 곡식이 풍성한 평야지대가 산재한 충청.전라도 지역을 가리킨다). 각기 거느리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큰 자는 스스로 신지라고 이름했다(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마한의 적자임을 보여준다..마한은 단군3조선의 하나로써 단군조선의 해체이후 진왕이라는 부단군격이 왕으로 추대되어 통치했으며, 북쪽에서 유입되어 세운 진한과 번한은 마한에게 조공을 바쳤다.이 마한을 근초고왕시기때 백제가 복속하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문헌인『삼국지』「위지 동이전」기록 가운데 변.진한 24국의 국명에 나오는 변진에 대하여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였고, 한인(韓人), 예인(濊人), 왜인(倭人)도 모두 이것을 가져가며, 모든 매매에 철을 사용함을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하고, 또 오군에 공급하였다"고 한 부분이다.  당시 삼한 중 변진에 속했던 부산지역의 동래 낙민동 조개무지에서 철을 제련하였던 용광로 터가 발견된 사실이나, 복천동 고분에서 많은 철정이 출토되었다는 사실과 부합된다. 따라서 부산은 삼한시대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철을 중심으로 하는 수공업이 최고로 발전했고, 이를 배경으로 그 당시 해상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문헌들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삼한(한)은 상위 지도가 표기하고 있듯이 "동서가 바다이고 북으로 단군조선 마한 제후국들이던 대방.최씨 낙랑국.동예.예맥이 있고, 동으로 진한이 있고, 진한의 남쪽에는 철이 많이 생산되는 변한(변진)이 있고,서쪽으로는 백제(온조)가 속해 있는 마한이 있고,남쪽으로는 대마도.오키나와 등 일본열도을 가리키는 왜(마한사람들이 건너가서 살았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한은 대륙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단군조선의 3한이후 한반도지역의 3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아무 쓸모없는 객기라 할 것이다.  











▲소서노.비류.온조가 도착하여 어라를 건국한 "진.번 사이,서쪽으로 바다와 접한 외진 곳"은 지금의 발해만 지역이다.이 삼한의 마한속에 백제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럼 이 백제는 어느 백제인가? 바로 온조백제를 의미하는 것이다.백제의 기원은 여제(女帝) 소서노(召西努)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추모가 고구려 왕위를 부여에서 온 유리왕(琉璃王)에게 물려 주려하자 소서노는 비류.온조를 데리고 스스로 떠나가서 어하라(於瑕羅)를 세웠다고 전한다.    백제의 기원은 [한단고기]에서는 "소서노가 기묘년, 즉 기원전 42년 3월에 남하하여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하는 외진 곳으로 진번지간(辰番之間)에 이르러 10년만에 장원을 사고, 오백리의 땅을 차지하니 북으로 대수(帶水; 今 海城河)에 이르렀다...고추모는 소서노에게 '어하라'로 책봉하였다." 즉, 소서노와 비류.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정착한 곳은 단군조선의 진한과 번한 사이의 지역이고 서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외진 곳이였다. 그러한 위치와 가장 적합한 지역이 요서지역과 가까운 지금의 발해만 지역이다. 계속해서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의 내용을 보면, 어하라(於瑕羅)의 소서노(召西努)는 13년, 임인년에 붕어하였고 비류(沸流) 태자가 뒤를 이어 어라하(於羅瑕)로 즉위하였는데 이 해는 기원전 19년이 된다. 따라서 어하라가 제후 국가로 인정받은 어하라 1년은, 기원전 31년으로서, 이 해에 소서노는 고추모을 떠난 기원전 42년으로부터 10여년만에 또하나의 나라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만주지역에서 고구려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으로 싸운 비류백제인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중국사서들은 잘 기록하고 있다. 예컨대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영화 2년 정월 조), "백제국은 본디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백제 조)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백제(비류백제)와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건광 원년 조),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고 는 전한다. 이 기사는 우연찮게 만주지역에서 고구려에 대항했던 비류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꼽힌다.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의 비류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대륙의 비류백제는 지금의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부여를 서쪽의 전연(前燕) 근처로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 요동지역의 강자인 전연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기원후 343년 경으로 짐작되는 전연과의 전투에서 비류백제는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어 결국 온조백제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백잔(백제),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비류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된다. 당시 한반도 온조백제국과 고구려 사이에는 최씨 낙랑국이 버티고 있어서 서로 교류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4세기에 접어들어 북중국은 5호16국 시대의 대혼란이 개막되었고, 그 파장은 고구려에도 미치게 된다. 고구려가 서쪽지역에 국력을 집중하는 틈을 타 만주의 백제는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력을 확보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이후 중국측의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등의 사서에서 백제를 구태백제라고 한 것은 비류가 우태(=구태:발음의 차이)의 아들이기 때문에 비류백제에 익숙했던 당시 기록의 흔적이 [구태백제]로 표기된 것으로 보이고, 광개토왕비문이나 에는 한반도 백제 지역에 백잔(百殘 : 온조백제)과 이잔(伊殘 : 구태백제=비류백제)이 있었다고 적혀 있고, 왜(倭=일본열도)는 백제의 보좌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것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이잔은 비류세력이고 백잔은 온조세력임을 알 수 있다. 즉, 소서노세력인 온조.비류세력은 본래 고구려에서 분가했으니 옛부터 고구려 속민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박혁거세의 신라또한 초기부터 고구려가 지배한 나라였으나, 박혁거세가 고구려가 점령한 동부여 공주(성모)의 아들이다보니 라는 표현으로 그렇게 업신여기는 투로 표기했다 볼 수 있다.
[한단고기]<고구려 본기>중에 온조백제의 개국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신하 마려(馬黎)가 온조(溫祚)에게 말하기를 “신(臣)이 풍문을 들으니, 마한이 쇠퇴(衰敗)하였으므로 뜻을 세워 마한에 가서 도읍을 세울 시기입니다.(可往立都之時也 )" 따라서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서문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같이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서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살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살았다는  기록은  어하라 왕국에서 왕위를 계승한 비류가 온조를 따라올 이유가 없음으로  미추홀에 비류가 왔다면 그것은 비류가 아니라 비류의 후손이다. 위 문헌내용들을 통하여 명확히 백제초기에는 발해만.요서.만주지역의 비류백제와 한반도 남부지역의 온조백제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온조(백제)에 귀순해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요동지역의 비류백제가 결국 온조백제에 통합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내용으로 백제사의 중심은 한반도 온조백제가 되었다는 것을 사서는 증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 
도사 09/07/14 [05:21] 수정 삭제  
  정림사지 오층탑에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쓴글이있읍니다. 그것이가짜가 아니라면 백제가 부여에서 멸망한 확실한근거가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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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여행지 고흥, ‘녹동항 포차’에서 추억을 쌓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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