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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은 지금 중국의 동부에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5/27 [13:39]

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은 지금 중국의 동부에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5/27 [13:39]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2부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1부) 백제의 기원과 사서로 본 위례성의 위치
(2부)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의 왕성인가?

 
위대한 제국 백제를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가두어 놓은 식민사학계와 가지마 노보루를 고발한다.

우리는 백제라는 국호는 건국 시조 온조대왕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초에는 십제(十濟)라는 국호였다가 형인 비류가 죽고 그의 땅과 백성들이 귀의하자 국호를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약자로 백제로 고쳤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백가(百家)가 바다(海)를 건너왔다(濟)."라고 해석을 하여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백가(百家)가 제(濟水, 강 이름)와 해<海, 산동성 동남쪽의 지명)>에 있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 이유는 본시 백제는 래이(萊夷)였고 마한(馬韓)의 종족이며, 래이와 마한은 지금의 산동성과 산서성 하북성 인근에 걸쳐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는 직위가 가능하며 산서성의 요서와 대방군에 관한 설명도 가능하다.”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설명한다. 

▲   백가제해의 설명이 식민사학계의 이론이 맞는지 민족사학계의 이론이 맞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한단고기>와 <사기>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기원

여하튼 백제라는 단어가 처음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에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遼) 중에 12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년.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이하생략)”

여기서 우(虞)라 함은 3황 5제의 하나인 순임금을 말함이고, 요(遼)라 함은 산서성 태행산맥 내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으로 예로부터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그 일대에 12개의 성을 쌓았는데 백제와 관련된 낯익은 지명들인 한성.대방.백제 등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제가 백가제해의 준말이 아니라 지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백제도 고구려처럼 지명을 가져와 국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첨언을 하나 하자면, 요동.요서의 기준이 되는 요에 있는 요수가 중국에 의해 점차 동으로 옮겨진다. 즉 동북공정은 수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최초 요수(遼水)는 황하나 요라는 지방 근처를 흐르는 그 지류였으나, 그것이 하북성 난하로 옮겨가고, 요나라가 들어서서는 현 요하가 요수가 된다. 현 요하와 옛 요동.요서의 중심이 되는 산서성 요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대한민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요동하면 현 요하 동쪽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안시.요동성이 현 요하 주변이 되고 평양이 대동강 평양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사대주의 매국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을 국가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아직도 우리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인가!!! 

▲   요동 요서의 구분의 기준은 산서성 요라는 지명이다. 이 근처를 흐르는 요수가 -->난하-->현 요하 로 바뀌면서 역사가 왜곡된다. 요나라가 들어서면서 현 요하를 요수라 했으니 삼국시대의 요하는 산서성 요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황하나 그 지류를 말함이다.

조선은 44세 구물 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이 중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린다. 그 중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번조선의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기준은 해대(海岱)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옛 한나라 땅 아니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   기자는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기자가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고 식민사학계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었다.

泗는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기자조선의 기준은 위만조선에게 망해 대동강 평양에서 바다를 통해 남하하여 한반도에 삼한을 세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는 현 북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론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가짜 역사를 아직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놓고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할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통탄할 일인가!!! 

▲  번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하여 삼한을 세운다. 유와 연은 고구려, 제와 노는 백제, 오와 월은 신라와 가야와 왜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삼한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식민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엄청난 역사왜곡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시조인 온조의 건국지는?

백제의 건국에 대해 여러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한단고기>에는 백제국본기가 따로 되어있지 않고 백제에 대한 내용이 <고구려국본기>에 일부 나온다.

(인용)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경인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도망하여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서 경지를 넓히다 보니 큰 부자가 되었다. 먼 데 사는 사람들까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南至帶水)까지 이르고,
동으로 빈.대해(東濱大海)까지 이르고
반천리(半千里,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을 시켜 고주몽 임금에게 글을 보내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칭찬하여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이름을 내렸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로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이어지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슷하고,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는 것이 다르다.) 

▲   북부여 6대 고무서 단군의 딸로 고주몽의 부인이 되는 소서노는 어하라의 여왕이 된다.  한재규선생이 그린 소서노의 존영이다.
 
그런데 위 문장이 <한단고기> 번역본마다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남지대수(南至帶水)가 다른 본에는 북(北)지대수로 되어있고, 동빈대해(東濱大海)가 다른 본에는 서(西)빈대해로 되어있다. 경인(庚寅)년 3월은 다른 본에는 기묘(己卯)년으로 되어있다. 즉 동.서.남.북을 고의로 바꾸어 위치비정을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조작되어 있다고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지적했다. 

▲   일본에서 출판된 <한단고기>에는 북지대수/서빈대해로 되어 있다. 독자들은 새겨서 읽어야 한다.

위의 남지대수/동빈대해 내용은 이유립선생께서 소장한 진본 영인본 <정본 한단고기> 내용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내용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유립선생이 쓰신 대배달민족사(大倍達民族史)라는 책과 대조해보니 남지대수/동빈대해가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서의 지리지에서 동.서와 남.북을 반대로 조작하면 그 나라의 강역이 전혀 달라진다. 그럼 남지대수/동빈대해를 북지대수/서빈대해로 조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건 <한단고기>를 일본에서 최초 출판한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로 보인다. 그럼 왜 일본은 백제 건국지의 방위를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고쳐야 했을까? 그 의문의 해답은 다음 연재인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에서 밝혀진다. 이번엔 지면상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   <정본 한단고기>에는 분명 남지대수와 동빈대해로 나와 있다. 가지마 노모루는 출판시 이를 반대로 했다. 이는 백제를 한반도로 집어 넣기 위한 조작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 기록은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의 기록인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양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는 기록과 같다. 해서 위의 가지마노보루의 북지대수/서빈대해는 분명한 조작임이 여기서 밝혀진다.

참고로 而瀛濱海之陽의 陽은 볕, 밝을, 거짓, 봄양으로 풀이하는데, 시경에 의하면 "在南山之陽"이나 "山南水北"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즉 산을 기준으로 할 때는 따뜻한 햇빛이 드는 남쪽을 의미하고, 물을 기준으로 할 때는 햇빛이 먼저 드는 북쪽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주몽의 곁을 떠난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온조와 함께 어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 태자가 된 비류가 즉위하자 온조가 떠나 새 나라를 세운다. 온조가 처음 이른 곳이 미추골이고, 그 다음에 이른 곳이 한산의 부아악이다. 그리고 뒤에 비류가 죽으니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귀순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몽의 부인이며 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의 딸인 소서노는 어하라를 세운 초대 여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영과 빈(濱)은 분명 지명이다. 그런데 서빈대해를 서쪽변은 대해(황해)라고 엉터리 해석을 하고 있다. 동서를 바꾸면 대륙에 있던 백제를 한반도로 보낼 수 있다고 본 것일까? 그럼 다른 사서의 기록도 그렇게 조작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초 건국지

고주몽에게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열 사람의 신하와 함께 남으로 떠났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을 듣고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은 “이 하남(河南)의 땅은 北으로 한수를 띠고 東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였으며 南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西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보기 어려운 천험 (天險)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겠습니다.”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이다. (참고로 대(帶)자는 ‘띠를 두르다’의 뜻인데, 왜 하필 이 글자를 썼는지? 한단고기의 대수(帶水)와 혼돈된다.) 

비류는 미추홀이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는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고 고 기록되어 있다.

또는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소서노)를 모시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한다며 <한단고기>와 비슷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미추홀을 식민사학계는 인천으로 비정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이론이며, 민족사학계는 천진 근처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패수(浿水)는 북경과 천진을 잇는 강이고, 미추홀은 고구려와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단고기>에서는 패수를 북경 근처를 흐르는 현 조하(潮河)로 말하고 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해모수편에 보면 “기해 38년 연나라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를 동쪽의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己亥38年 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 浿水今潮河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  조하는 북경과 천진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백하와 합쳐져 조백신하로 불리우는 강이다.
 
참고로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에서 발간한 <한단고기>에는 패수가 조하가 아니라 현 하북성 동부 난하로 적혀 있다. 가지마 노보루는 참으로 나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왜 우리의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일본인이라 그의 조상인 왜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북경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유적이 가득한 곳이며, 소서노 일행이 건넌 패수가 조하(潮河)이기 때문에 미추홀은 천진 부근인 것이다. 실제로 천진 부근에는 동양 최대의 염전이 있다. 그래서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어서 비류가 잘못을 뉘우친 것이다. 역사의 스토리 전개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가고 있다. 

▲  현 북경 지역에는 고구려 유리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 근처 어딘가가 분명 초기 고구려의 수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서노 여왕이 건넜다는 대수(帶水)는 어디인가? 대수는 그 한자로 보아 대방(帶方)의 땅을 흐르는 강으로 보인다. 대방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하북성 석문(石門 현 석가장)과 접하고 있는 대방이 확실하다. 그 대방의 땅을 흐르는 강이 있으면 필시 대수임이 틀림없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면 대방 지역을 흐르는 큰 강은 없다. 작은 강은 있다. 그렇다면 그 작은 강을 대수라 했을까? (대수가 어떤 강인지는 다음 연재에 언급한다.)

여하튼 이 위례성의 위치를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분명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이 현 서울 한강 남쪽이라고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당대의 석학 10명도 몰랐던 지명인 위례성이 어떻게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었으면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모른다는 350여개의 지명은 다 중국 대륙에 있는 지명인 것이다. 
 
▲   2부에서는 황하 변천도를 보면서 초기백제의 도읍지를 추적하기로 한다.
애독자 08/05/28 [09:42] 수정 삭제  
  북경 근처에 유리왕의 유적이 저렇게나 많습니까? 저 북경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고려영일 가능성이 많겠네요. 여하튼 1부 잘 보았고 2부가 기대됩니다.
라디오 08/05/28 [12:00] 수정 삭제  
  -신완순선생은 "백가(百家)가 제(濟水, 강 이름)와 해에 있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위의 말처럼 될려면 百家濟海가 百家在濟海 식으로 바꿔야 합니다.
在라는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 있었다"의 해석이 될 수 있으리오...

예전에 저런 글이 올라 왔을 때...
백제왕기를 인용하며
百濟者大神水之義也
백제란 大神水의 뜻이다.라고 리플을 달았더니.. 당황하더군요.

어느쪽이 더 신뢰성이 있겠습니까?
저는 후자가 더 믿음이 갑니다.

而國號曰百濟(濟者祭水也 以濟爲號者 居於水邊故也, 百者大也)
라디오 08/05/28 [12:15] 수정 삭제  
  2000녀내를 넘어서면서 현금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중심 강역은 "요하주변이다"라는 설이 더 각광받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요하설이 각광받기도 전에 대륙백제설이 나오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리함으로써 젊은이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환빠니 식민빠니 대결 구도가 형성이 되어 버려서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산서성의 지명 '요'를 요서와 요동의 경계점으로 삼는 저 지도는 너무나 억지로 맞추어서 만든 지도란 걸 알만한 사람은 아는 사항입니다.

라디오 08/05/28 [12:29] 수정 삭제  
  환단고기 반대론자들의 얘기도 맞습니다.
임승국 교수가 쓴 환단고기를 내가 봐도 해석이나 주석에 문제점이 많아요.
가지마 노모루의 환단고기를 배겻기 때문에 비판받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비판은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에요.

'자유지'에 실린 환단고기 일부 기사들은 현재 전해지는 환단고기와는 내용에 차이가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유지'의 원본을 공개해야 하는데
과연 '자유지'를 공개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못한다고 봅니다.
왜? 뽀록이 날까봐 두려울 테니까요.

반드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5/28 [14:02] 수정 삭제  
  살펴보기님은 중국어를 모르시네요. 전 중국에서 4년간 산 사람입니다. 在는 들어가도 되고 안 들어가도 됩니다. 중국어은 4자성어가 많습니다. 영화제목도 거의 4자입니다. 5자성어는 잘 안 씁니다. 만일 5자라면 필요없는 것 하나 빼고 4자로 만드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럼 백가제해를 바다를 건넜다로 해석하는 것은 맞습니까? 어느 바다를 건넌겁니까?

강역을 너무 서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의 진실이 더 서쪽이라면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먼저 강역을 정해놓고 역사적 사실을 꿰맞추니까 현재의 식민사학계의 이론이 나오는 겁니다. 요하 지역으로 고구려가 가면 여러 사서의 기록이 안 맞습니다.

한단고기가 처음 국내에 소개된 것은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에서 출판한 책입니다. 이유립선생-->박창암장군-->가지마 노보루-->한국 인데 그 과정에서 가지마가 조작한 것이 많이 눈에 보입니다. 이유립선생의 대배달민족사가 그 증거입니다.

임승국교수는 어쩔 수 없이 가지마의 책을 보고 번역한 것으로 저도 봅니다. 가지마의 잘못이지 임교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번역의 일부 오류는 어느 책이나 있을 수 있습니다. 한자는 한 글자가 여러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정판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극히 일부 오류가 있는 것을 가지고 마치 번역 전체가 잘못인양 비판의 도마에 올리는 처사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삼국사기에도 그런 번역의 오류가 많이 눈에 띕니다. 그걸 가지고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옿지 못합니다.

우리 역사를 되찾으려고 애쓰신 분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못한 일입니다. 그렇게 비판하시는 라디오께서 아예 번역 작업까지 하시지요.
在가 들어가도 되고 안 들어가도 되는 것조차 모르시는 분이 그런 번역이 가능하리라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댓글을 비방성으로 달면 결국 그 화살은 본인에게 돌아갑니다. 반대이론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말꼬리나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걸고 넘어지는 것은 남자가 취할 행동이 아닙니다.
라디오 08/05/28 [22:16] 수정 삭제  
  한문 해석을 누가 그렇게 한다는겁니까?

"백가(百家)가 제(濟水, 강 이름)와 해에 있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百家濟海가 어떻게 위의 해석이 될 수 있는건지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군요.

모든 해석은 남한테 비판을 받는게 당연하고 또한 비판을 받아야 해요.

지금 파사이사금기를 조금씩 정서해 올립니다만.. 내가 한 해석도 남한테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 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나는게 되려 걱정이지요.

그 화살을 저에게 돌아갓으면 좋겠군요. 누가 라디오를 비판할려는지 기대가 됩니다.
아주 많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너무 적더군요.
라디오 08/05/28 [22:41] 수정 삭제  
  그져 쿠투넷에 올려진 글들을 모아.. 짜집기를 해서 비판을 하지 않고 그게 진리인양 꾸며 놨으니...

구제불능의 수준이죠. ^^
성훈 칼럼리스트 08/05/29 [00:11] 수정 삭제  
  위 글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반박을 조목조목 해보세요.
자꾸 말꼬리나 잡고 시비걸지 말고 내 글의 내용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반박해 보세요. 위의 내용을 반박하려면 를 다 부정하기 전에는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성훈은 시시하게 라디오님에게 비판받을 정로로는 글 안 씁니다. 그저 비판한다는 내용이 백가제해 가지고 시비거는 것 뿐입니다. 난 그런 의견이 있다는 것을 소개했을 뿐입니다. 백제라는 국호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봐야지 백가제해의 준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단 말입니다. 문장을 잘 읽어 보세요.

역사의 진실은 둘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 뿐입니다. 라디오님은 역사의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지는 것을 꺼리는 사람으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친척 정도 되나 봅니다. 그래서 라디오님은 쿠리넷에서 추방당한 분 아닙니까?

라디오(살펴보기)님의 실력이 민족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쓰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님은 그 좋은 실력을 민족사를 파괴하는데 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전 제2의 이병도라고 부릅니다.

내가 시간이 많아 님이 올린 번역을 보았으면 엄청 비판을 퍼부었을 겁니다. 전 파사이사금 따위 볼 장도로 한가하지 않고 볼 필요도 없어 안 봅니다. 파사이사금이 우리 역사에 있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걸 쳐다 봅니까?
在를 꼭 써야 되는지 안 써도 되는지도 모르는 분이 무슨 번역을 한다고 그러십니까? 차라리 님께서 번역하다 모르는 것 있으면 제가 도와 드리지요.
라디오 08/05/29 [05:29] 수정 삭제  
  라디오란 사람은 고려대 근방에 살고 있으며.. 본명은 박규호입니다.
살펴보기님하고 혼동하시는군요. 역사 사이트에선 이중 아이디를 전혀 안 씁니다. 한번도 다른 아이디를 쓴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정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역사 사이트에서 속일 마음이 없습니다.
직설적이긴 하나.. 사기치거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 다른 사람한테 물어 보십시오.
성훈 칼럼리스트 08/05/29 [09:19] 수정 삭제  
  내공이 상당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 정직을 기반으로 하신다 하니 역사의 진실을 찾는데 동참합시다. 이병도 운운 한 것은 저의 너무 심한 표현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선수끼리는 몇마디 말만 주고받아도 서로 상대방을 알아보죠. 선수끼리 말장난은 하지 맙시다.
라디오 08/05/29 [18:49] 수정 삭제  
  운영자한테 환단고기가 실려 있는 과거의 '자유지'를 공개해 달라고 요구를 해 보십시오.
반응이 어떻게 나올까요?

아마 공개를 못할 겁니다. 약점 잡힐 일은 안 할테니까요...ㅎㅎ

내기를 걸어도 좋습니다.

님이 철석같이 믿는 환단고기와는 다를 것입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5/29 [20:29] 수정 삭제  
  본 글은 만인을 상대로 하는 언론이기 때문에 한 개인의 시비성 댓글에는 일일이 답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디오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댓글을 달아 글 쓴 사람을 음해하는 것이 주특기입니다. 많은 인터넷 싸이트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계연수선생의 를 전한 분은 이유립선생이므로 이유립선생의 저서 의 내용이 의 정본입니다. 중간에 어떤 경로로 조작되었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중에는 여러 본의 책이 난무하고 있어 한단고기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정본 한단고기를 읽으셔야 제대로 된 한단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삼국사기도 번역본마다 조금씩 내용이 다릅니다. 그리고 한자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뜻이 확 달라집니다. 그러니 번역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라디오 08/05/30 [20:43] 수정 삭제  
  위의 지도에 나와 있는 산서성의 '요'가 요서와 요동을 구별 짓는 기점이 되기 어렵다는 걸 님은 지식이 짧으니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적절히 남의 글이 타당성이 있다면 수용을 하고.. 이상하다면 연구를 더 깊이 있게 해서 비판을 가 해야 합니다. filtering을 하면서...취할 건 취하고 아닌건 버려야 합니다.

운영자한테 환단고기가 실려 있는 과거의 '자유지'를 공개해 달라고 요구를 해 보십시오.
필시 공개를 못 할 것입니다.
내가 만일 자료가 있다면야 벌써 인터넷에 올려겠지요.^^
성훈 칼럼리스트 08/05/31 [08:27] 수정 삭제  
  라디오님은 정직이 기반이고 밑천이라고 말씀하시더니 '요'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닌군요. 잘 아시는 분이 어떻게 그런식으로 이야기 합니까?
살펴보기는 라디오가 아니라고 하더니 동일인입디다.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는 분입니다.
정직이 기반 맞나요?
자유지에 힌단고기가 어떻게 실려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유립선생의 저서 에 어떤 내용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줏어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마치 사실인양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이 정본 한단고기로 이유립선생의 와 내용이 같습니다.
이형복 08/06/02 [10:28] 수정 삭제  
  성훈씨의 칼럼을 잘보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고구려, 백제, 신라에 관한 내용 ...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고려 건국및 국가 경영에 관한 내용은 아직 보지를 못했습니다. 내가 찾지를 못한건지 아니면 아직 쓰지를 않은건지요. 궁금 합니다. 회신 주시기 바랍니다.
성훈 08/06/02 [12:24] 수정 삭제  
  고려 건국 이야기는 솔직히 아직 사료가 불충분합니다.
고려의 건국은 후삼국부터 언급해야 하는데 열심히 연구했지만 의혹만 있을 뿐입니다. 해서 대륙 고려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기가 아직은 곤란합니다. 워낙 한족들이 역사의 흔적을 지워놓았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러나 몇가지 고려에 대해 앞으로 언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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