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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가 대륙이면 한반도의 주인은?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빼버린 일제와 매국식민사학계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6/17 [15:14]

백제.신라가 대륙이면 한반도의 주인은?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빼버린 일제와 매국식민사학계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6/17 [15:14]
필자가 백제에 대한 연재를 계속해 나가면서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논리를 펴자, 썩어빠진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일부 네티즌들이 음해성 댓글로 공격을 해왔고, 주위에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럼 한반도에는 누가 있었느냐?”고 푸념어린 질문을 해왔다. 필자 귀에는 “살기 좋은 이 땅을 놔두고 역사를 왜 대륙으로 가져가려느냐?”는 항변으로 들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면 당연히 고구려와 신라도 대륙에 있었다는 말 아니냐? 그렇다면 한반도엔 아무도 없었단 얘기인데, 우린 도대체 누구의 자손이냐? 우린 애비 애미도 없는 호로 자식이냐?”라고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다들 이 나라를 너무나 사랑하다 보니 나온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애국심이 넘치는 한국인들은 현재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삼국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일부러 믿으려고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애국심에 충족이 되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국민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일제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인 반도사관은 이 나라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순진한 우리 국민들은 반도사관이 얼마나 무서운 이론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얼빠진 이 나라 정부가 아직도 일제 때 조작된 역사 이론을 그대로 교과서에 실어 학교에서 교육했기 때문이요,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이 나라 사학계가 일제 때 만들어진 식민사학을 그대로 추종하고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고, 그의 질손인 이병도는 조상의 역사를 팔아먹었다. 매국노 이완용이 팔아먹은 나라는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이병도가 팔아먹은 이 나라의 역사는 해방 62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병도는 매국노 이완용보다 더 나쁜 민족반역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나라가 역사 회복을 못하고 있는 이유는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로 이 나라 사학계가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 지킴을 위해 오히려 스승의 반도사관을 더욱 더 굳건히 사수한다. 심지어는 이병도가 죽기 전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한사군의 위치 비정은 잘못이라는 참회의 글을 발표하자 “우리 스승이 나이가 들어 노망을 한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역사의 진실 찾기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우봉이씨 이완용 가계도. 왼쪽부터 매국노 이완용, 질손자인 민족반역자 이병도, 이병도의 두 손자인 이장무 현 서울대총장, 이건무 현 문화재청장. 아직도 이 나라는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손을 정부 요직에 기용하고 있는 정신나간 정부이다.  이렇듯 정부가 역사에 대한 개념조차 없으니 역사의 진실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이란? 

반도사관의 핵심은 표면적으로 백제와 신라와 가야가 한반도 남부에 동서로 있었고,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이런 반도사관이 뭐 그리 잘못된 이론이라고 성훈이라는 사람은 글 쓸 때마다 매번 사학계를 매국이니 식민이니 하며 몰아세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아래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 해소가 되리라 믿는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백제와 신라를 한반도 남부로 비정 해버리면 문제는 그 이전 역사도 당연히 한반도로 비정이 되어야 한다. 그 이전 역사란 바로 낙랑으로 대표되는 한사군과 삼국의 전신인 삼한(마한,변한,진한)과 위만/기자 조선의 역사이다. (일제와 이병도는 위만 이전인 단군조선을 신화로 만들어 버려 반도사관에 단군조선의 역사는 없다)  

결국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의 위치가 현 대동강 평양이 되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것이라 위만조선의 수도도 대동강 평양이 되는 것이다. 현 역사 이론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며, 기자조선은 중국인 기자가 와서 세운 나라라고 한다.(참고로 북한은 평양에 기자묘까지 만들었다) 

▲  한국의 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 참으로 매국적인 이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이론 가지고 동북공정에 대응이 되겠는가?

그리고는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일언방구 말 한마디도 없으며, 단군은 모친이 곰이라는 신화로 처리되어 있다. 배달국과 환국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다. 그저 교과서에 있는 문장이라고는 “B.C 2333년 단군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한다”에서  --> “~ ~ 건국되었다”로 바뀌면서 ‘고 한다’이 세 글자 떼는데 6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그리고는 단군조선에 대해 설명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즉 한반도는 예로부터 기자라는 이민족에 의해 시작되어, 위만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지배되다가, 한사군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지배된 역사라는 것이다. 조선민족은 대대로 이민족에 의해 지배받은 민족이라는 것이 일제가 조작한 논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우매한 조선민족이 천황의 민족에게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반도사관을 편 일제의 논리였다.

“조선인이 조선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일왕 특명으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중국과 조선에 있던 고대 사서를 전부 거두어들인다. 중요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고, 20만권이 넘는 사서를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는 <조선사 35권>이란 새로운 역사서를 창작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조작되어 조선인을 세뇌교육 시키던 역사 이론이,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된 지 60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그 이론이 바뀌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이 나라의 통치권자들의 역사인식이 친일적이었거나 아예 역사개념조차 없었던 통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충견이 되어 민족정신을 말살하던 이병도는 6.25 후 친일파를 중용하던 이승만에 의해 다시 이 나라 사학계를 맡게 된다. 일제에 역사를 팔아먹은 조선사편수회의 매국노 멤버들인 홍희/신석호 등이 대한민국 사학계의 핵심이 되어 역사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그 후학들이 대학의 강단으로 펴져 나가면서 이 나라의 사학계는 더욱 매국식민사학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아직도 일제치하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이 엉터리 역사이론인 동북공정을 앞세워 북한 땅을 노리고 있음에도 이 나라 사학계는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항하려면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밝히면 된다. 그러나 그리 되면 지금까지의 자기들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누가 자기 목줄을 걸고 그렇게 하겠는가!

대한민국 사학계가 이 모양 이 꼴이니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야말로 무풍지대이다. 아무런 저항도 안받고 그 엉터리 이론을 마구 떠들고 있는데도 대한민국 사학계는 입도 뻥끗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 간혹 입바른 소리가 나오면 이번에는 정부에서 중국과 외교상 문제가 된다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간도 되찾기 운동이다.

간도는 조선의 외교권을 불법으로 강탈한 을사늑약에 의해 일제가 청나라와 맺은 제3자 조약이므로 국제법상 무효이고, 이미 일본이 을사늑약 자체를 무효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간도에 대한 이의신청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내년이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해이건만 이의신청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게 대한민국 정부인지? 아니면 중국의 제후국 정부인지, 일본의 식민정부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잃어버린 북방영토 간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와 청나라간에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으로 넘어간다.

삼한의 진실 (삼한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아래와 같이 알아보기로 하자.
단군조선은 44세 구물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천왕이 진조선을 직접 다스렸다. 번조선에서는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이것이 기자조선의 실체로 기자가 기자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기자의 후손 6명이 번조선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것이 단재 신채호선생의 이론이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기준은 해대(海岱)로 남하하여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해대는 해(海) 지방과 대(岱)지방을 합한 말로 대(岱) 지방은 산동성 태산 일대를 말함이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거기에는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참고로 <후한서>에서 기준이 세운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뛰어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가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가다’의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Let's go'의 뜻이다.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 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  일제는 평양에 있던 낙랑국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조작하기 위해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점재현신사비를 평남 온천군으로 옮겼으나 나중에 조작임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밝혀진다.

 따라서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 25사인 <사기>와 <한서>의 기록을 보아도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그 영역은 하북성 일대인 것이다. (아래 사진참조)

한무제와 위만국 우거왕의 전쟁을 직접 참전한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한나라는 이 전쟁 후 참전 장수들을 처벌하는데 극형인 기시(찢어 죽임)라는 형벌을 가하는 것으로 보아 무참히 패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한4군이 아닌 조선4군을 설치했다 하며, 낙랑.임둔.현토.대방이라는 기록이 없다. 한사군은 분명 후에 누군가에 의해 조작(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의 사서에 하북성으로 나와잇는 한사군이 매국식민사학계에 의해 한반도로 옮겨진다.
 
낙랑국은 어떤 나라이고 어디 있었나?

나머지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해모수의 북부여는 단군조선의 정통인 진조선을 계승하여 나중에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이어지며, 영역은 내몽고와 하북성 일대로 보인다. 북부여에서 떨어져 나간 가섭원(동)부여는 북만주 일대가 그 영역이 된다. 나머지는 최씨의 낙랑국으로 이어져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를 그 강역으로 한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우리 역사의 흐름이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 대대로 평양에 있었다는 이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바다로 들어가 자살했고, 한반도 남부에 삼한(마한.진한.변한)이 생겨났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  기준이 남하한 곳은 대륙 동부 海지방으로 선조인 기자가 살던 땅이고, 최씨의 낙랑국은 한반도에서 세워진다. 식민사학계는 낙랑국을 역사에서 지움으로서 낙랑군을 그 위치로 가지고 간다.

대동강평양은 대대로 기자/위만조선의 수도였으며, 한무제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쓰러뜨리고 현 북한 땅 일대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허무맹랑한 이론을 지껄이고 있다. 평양근처에서 발굴된 유물은 바로 최씨 낙랑국의 유물이었음에도 낙랑국을 역사에서 지움으로서 이걸 한사군인 낙랑군의 유물로 둔갑시켰다.

낙랑군과 낙랑국은 공교롭게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같이 쓰기 때문에 혼돈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도 명확한 구분이 없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 독자의 경우 ‘낙랑태수’라는 것은 낙랑군을 의미하고, ‘낙랑왕’이라는 것은 최씨의 낙랑국을 의미한다고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참고로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봐야 한다. 

한반도는 단군조선의 막조선에 이어 최씨 낙랑국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 3대 대무신왕 15년(AD 32년) 낙랑국이 고구려에 망함으로서 한반도 전체는 고구려의 강역이 된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호동왕자와 자명고와 낙랑국왕 최리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왕자 호동이 옥저 지방을 구경다닐 때 낙랑왕 최리가 마침 순행하다가 호동을 보고는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오. 혹시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 아니오?”하고 데리고 돌아와 사위를 삼았다. 그 뒤 호동이 환국한 다음 몰래 사람을 보내어 최씨녀에게 알리기를 “그대가 그대 나라 병기고에 들어가 고각을 부셔버린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맞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만두겠다.”하였다.

전부터 낙랑국에는 고각이 있어 만약 적병이 침입해올 경우 북이 저절로 울리기 때문에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녀는 날선 칼을 가지고 병기고 속으로 들어가 고면과 각구를 부수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을 왕(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케 하였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아니하므로 방비하고 있지 않다가 군사가 엄습하여 성안에 당도한 후에야 북과 호각이 다 부숴진 줄을 알았다. 그래서 드디어 그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


호동과의 사랑에 빠져 조국을 배반하는 낙랑공주의 낙랑은 한사군 낙랑군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후손인 낙랑국이다. 이렇듯 엄연히 정사서인 <삼국사기>에 적혀있는 낙랑국을 매국식민사학자들은 아예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는 낙랑군으로 대체해 버린다. 그래서 중국 하북성에 있어야 할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들어오게 되고,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국의 유물이 모조리 낙랑군의 유물로 둔갑 변조되는 것이다. 

▲   한반도 낙랑국과 하북성에 있던 낙랑군과 그 위에 잇었던 고구려. 

낙랑국 이후 한반도는 누구의 땅?

한반도는 낙랑국에 이어 AD 32년부터는 고구려의 영역이 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것임에도 한반도 중남부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물이 백제와 신라의 것으로 둔갑된다.

대표적인 것이 풍납동 몽촌토성의 피라밋이 백제 근초고왕의 것이라고 하는 희한한 이론이다. 분명 풍납토성의 피라밋은 집안지역의 피라밋과 그 양식이 같고, 공주의 무녕왕릉과는 그 양식이 완연히 다르다. 어떻게 한 왕조에서 두 가지 무덤 양식을 쓸 수가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대부(大夫)라는 고구려의 관직명이 엄연히 적혀 있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의 유물은 전부 AD 450년 이전의 유물이고, 그 이후에는 고구려 유물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즉 대략 450년 이전의 한반도 전체는 확실한 고구려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  풍납토성에 있는 대형 피라밋. 식민사학계는 이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이 피라밋은 분명 고구려 무덤양식이다. 사학계는 왜 공주의 무녕왕릉과 그 양식이 다른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같은 나라에서 이렇듯 다른 무덤 양식으로 왕릉을 조성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고구려 이후에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라의 유물로는 진흥왕순수비를 들 수 있다.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를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즉 지증왕 때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역에서 벗어나 한반도 동신라가 자립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24대 진흥왕 때 순수비를 세워 그 영역을 표시하며, 나중에는 만주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  561년 세워진 창녕진흥왕순수비는 4개의 비 중 가장 남쪽에 있다. 그 서쪽엔 백제의 뭔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백제의 도읍지는 분명 산동성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백제의 유물이 간혹 발견되는 것은 한반도 남서부에 백제의 담로 형태로 뭔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상으로 보아 분명 한반도에도 뭔가를 세웠을 것으로 본다. 아마 그 시기는 AD 500년 전후로 동성대왕 ~ 무녕왕 사이가 아닌가 싶다.

그 근거로는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나오는 무강왕이라는 칭호인데,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중략)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이하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하면서 정식 왕이 된 인물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단정했으나, 주해자는 무녕왕이 아니겠냐는 견해이고, 아니면 혹자는 무강왕은 백제의 본국왕이 아니라 한반도 백제 담로의 총독(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에서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지석이 발견되었고, 부여에서 위덕왕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 백제 사마왕능의 주인공이 무녕왕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분명한 것은 황제가 죽을 때 쓰는 용어인 붕(崩)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정식 왕인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정식 왕의 부부 합장묘로 보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하고, 왕릉 바로 옆에 다른 묘 2개가 붙어있고, 지석에 적혀있는 斯麻의‘麻’자가 정사의 기록인 ‘摩’자와 다르고, 사마라는 왕의 휘(이름)를 함부로 쓴 것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된 것은 사실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무녕왕은 대륙 동부를 호령하던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21년간 재위하면서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왕이었는데 그런 왕의 무덤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만큼이나 위상이 강했던 백제왕의 무덤이 덕흥리 고분(주인공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보다도 작고 초라하니 이상한 일 아닌가? 일국의 왕의 지석으로 보기에는 글씨체도 너무 조잡하고 초라하다. 여하튼 공주에서 발견된 무녕왕릉은 아직도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의 지석. 백제 사마왕(百濟斯麻王)이 붕(崩)했다고 적혀있다.
 
백제 무녕왕릉에 대해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일본의 왕실서고에서 일하던 남당 박창화선생이 필사본으로 남긴 고구려 사략 23대 안원대제 편에 보면 백제왕 사마에 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사마>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聖王}>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이에 <고노>와 <복정>에게 명을 내려 죄를 묻게 하여서, <한{漢}수>를 건너 <쌍현>을 무너뜨리고, <지충>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하였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이 <연희>를 보내서, 명마와 미녀를 바쳤으며,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던 것을 사죄하였다. <명농>에게 입조하라 명을 내렸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乃命<高老>・<卜正>問罪渡<漢水>壊<雙峴>大破<志忠>於<金川>, 虜獲男女万余口. <明穠>, 遣<燕喜>献名馬・美女, 以謝失臣之禮. 乃命<明穠>入朝.)

이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왕비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녕왕이 독살을 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유배 형식으로 한반도로 옮겨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 남당의 고구려사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의 의견이다.

그래서 감히 선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녕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남당이 남긴 고구려 사초의 내용이 맞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 

▲  부부합장된 백제의 본왕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백제사마왕릉

여하튼 의혹은 많으나 523년 붕(崩)한 백제 무녕왕의 능이 공주에 있고, 그 후 신라 진흥왕의 남쪽 순수비는 창녕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진흥왕 이전에 창녕 서쪽에는 백제가 분국이나 담로 형태로든 뭔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후에 동신라가 만주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 보아 확실치는 않으나 600년 경 한반도의 백제 담로는 소멸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 25사에도 백제의 수도가 동.서 두 군데가 있었다고 했다. 해서 혹자는 동쪽 수도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나, 필자는 동쪽 수도라는 개념보다는 백제의 담로나 분국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다. 백제의 동쪽 수도는 산동성, 서쪽 수도는 호남성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 역사상 한반도에는 어느 나라가 있었는지 아래와 같이 정리가 된다 하겠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는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행정력을 가진 국가로서의 형태는 구리시대부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 구리시대 (한웅, 신시시대) : B.C 3898 ~ B.C 2333

2. 조선 : B.C 2333 ~ B.C 238

3. 낙랑국 : B.C  238 ~ A.D  32

4. 고구려 : A.D   32 ~ A.D 500년 전후

5. 백제담로와 동신라 : A.D 500년 전후 ~ A.D 918년

6. 고려와 근세조선과 대한민국/북조선 : A.D 918 ~ 현재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수도는 다 대륙에 있었고 주 활동무대도 대륙이었지만, 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땅인 한반도에도 삼국이 영역으로 가지고 있었다. 옛부터 한반도는 그야말로 전쟁이 거의 없는 평화지대로 말 그대로 소도(蘇塗)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라와 한반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반도사관을 믿으려고 하는 선량한 우리 국민들이여! 이제는 역사에 대한 눈을 제대로 뜨고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며 마음의 창을 열어야 할 것이다. 반도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인정하면 결국 북한 땅은 낙랑군 때문에 중국 땅이라는 이론적 결과가 나와 동북공정이 옳다고 인정하는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현재 식민사학계가 지껄이고 있는 반도사관은 국가를 망칠 무서운 매국적인 이론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망국의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대륙을 지배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의 역사가 밝혀지는 날 이 땅에는 희망이라는 찬란한 빛이 도래할 것이다. 
 
▲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도. 최적관측지는 그 나라의 수도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는 787년 이후에 신라의 도읍이 들어선 것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은 "백제의 분국인 왜(일본)의 위치는 어디인가?"가 2~3부에 걸쳐 연재됩니다. 
 
중립사학 08/06/17 [17:32] 수정 삭제  
  저렇게 비정한 근거를 대세요. 너무 큽니다.
낙랑국이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훈씨 말대로라면 낙랑국이 한반도요
신라는 저기 중국땅이므로
낙랑국이 바다를 건너 투항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소설쓰지 맙시다.
진실사학 08/06/17 [19:22] 수정 삭제  
  플코 망한다...
한반도 08/06/17 [20:37] 수정 삭제  
  성훈: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뛰어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가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가다’의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Let's go'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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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을 중국으로 설정하고 해석하니 소설이 나오지..바다를 건너를 가지고 해지방으로 달렸다로 해석하고..웃고만다
중립사학 08/06/17 [20:54] 수정 삭제  
  땅덩어리를 기록에 근거하지 않고 지맘대루 넓게 잡는 것이야말로 소설이지.
성훈의 글은 지금 소설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소이다.

낙랑국의 위치와 크기를 저렇게 크게 비정한 근거를 대시오. 그걸 대지 못한다면 이건 완전 소설이지요. 식민사학보다 더 역사를 망치는게 저런 국수주의 사학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가 비정하고 싶은대로 비정하는 것이 역사를 살리는 것은 아니오.

성훈씨는 낙랑국을 저리 크게 비정한 근거를 대시오.
중립사학 08/06/17 [21:16] 수정 삭제  
  그리고 기준이 海로 들어갔다라는 것은 성훈씨의 해석이 맞아요. 산동지역이 대체 마한이고, 그 동북지역이 백제이고(하북성 동북쪽), 백제의동쪽이 낙랑군이고(난하에서 평안도까지), 낙랑국은 허구며, 낙랑군 동쪽이 대체로 신라가 되고, 백제와 낙랑군의 북쪽이 대체로 고구려가 되고, 신라의 북쪽이 대체로 동부여가 되는 것입니다.

아래 기록을 보시면 기준이 세운 나라가 南殷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마한 즉 南殷은 산동반도 지역 즉 海 지역이라는 겁니다. 殷나라의 위치가 산동반도라는 것은 아실겁니다. 그러면 그 남쪽의 남은이라는 지방은 海 지역이 됩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남은은 위만과 여러 번 싸웠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그 후에 남은 무종(南殷武宗)이 한 무제(漢武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위만을 토평(討平)하였는데,
조재범 08/06/17 [23:36] 수정 삭제  
  저 그림은 낙랑국의 위치가 저쯤에 있다는 것이지 낙랑국 자체가 크다는 것이 아니다. 똑바로 보고 공격해라. 낙랑국은 옥저에 속한 나라인데, 저 그림 강역은 본래 옥저의 강역이고 옥저 안에 낙랑국이 있는 것이다.
고구려땅 08/06/18 [00:36] 수정 삭제  
  다시말해서, 고구려가 낙랑국을 흡수하는 얘기가, 호동왕자 얘기이니, 한반도 전체가 고구려 땅이었다는 것이다.
중립사학 08/06/18 [01:44] 수정 삭제  
  옥저국의 속국이 낙랑국이라고요... 하하.

저기 성훈씨 지도를 자세히 보고 그런 반박을 하시죠.
저 지도를 보면 옥저는 요동반도에 남옥저가 있고 대릉하 근처에 옥저가 있고, 대릉하 근처에 있는 옥저 북쪽으로 북옥저가 있네요.

조재범씨 말은 대체 뭔소리를 하는건지 알수가 없습니다.

이 글 전체는 우리역사 전체를 망치는 글입니다.

낙랑국이 한반도 전체면, 신라는 어딨는겁니까? 신라는 저기 중국땅 내륙에 있다가 진흥왕때부터 한반도로 툭 날라오나요? 정말 시대적 개념이 없는 글입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적석총이 고구려 양식이라구요? 흐미. 3층짜리 피라미드와 집안에서 발견되는 피라미드를 같은 문화양식으로 보십니까? 틀렸습니다. 어떻게 장군총과 3층짜리 피라미드가 같은 양식이라고 합니까? 서로 다른겁니다. 고구려양식이 아니라구요. 우길걸 우기셔요.
중립사학 08/06/18 [01:51] 수정 삭제  
  왜의 위치는 저기 절강성에 있다고 할거 다 압니다.

차라리 동지나해 해저에서 발견된 피라미드가 倭라고 하세요. 그게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중립사학 08/06/18 [02:02] 수정 삭제  
  저 일식에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확률입니다.
확률상으로 저곳에 있을 가능성이 몇%이다 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지, 최적관측지역이 그 나라의 수도일 확률이 100%라고 말하지 못하는겁니다.
확률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하시고 저 지도를 인용하시죠.
동이천하 08/06/18 [05:23] 수정 삭제  
  사이토 총독의 신 교육칙어조선사편수회는 사무소를 총독부 중추원에 두고 1925년 10월 8일 제 1차 위원회를 개최했다. 사이또 총독은 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조선사 편찬사업의 중대성을 강조하는 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이또 총독은 부임하자마자 전국에 시달한 교육시책에서,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의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서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일본인물,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同化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사이토의 시책을 가장 잘 받들어 일제의 충견역활을 지금도 잘 하고 있는 자 들이 강단사학자 들 이요 반도사관론자 들 입니다. 그들의 역사지식 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근본없는 것들이며, 밥통수호사관이 얼마나 자신의 뿌리를 부인하는 것인지 조차도 모르는 한심한 무리들 입니다.

밥통지키기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과거 우리선조들이 그랬던 것 처럼 내 몸을 던져 백성을 구하는 것 입니다. 이제, 우리의 진실한 역사를 방해해온 사이토 총독의 조선사편수회에 근거를 둔 밥통들은 찌그러져야 하며, 파괴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진정한 역사광복을 위한 애국자로 과감히 거듭남을 택하는 것이, 죽어서, 훗날 자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었다는 소리를 들으며 길이길이 자기의 후손들을 욕되게 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한민족의 주 강역이 지나의 핵심부에 있었다는 사료들은 눈만크게 뜨고보면 얼마든지 널려있슴을 알것 입니다. 강단사학과 중립사학이라 칭하는 반도사관은 다 같은 것이며 더 이상 자신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지 말고 과감히 철밥통을 깨버리시기 바랍니다.
중립사학 08/06/18 [05:25] 수정 삭제  
  괜히 감정에 호소하는 글은 그만 쓰시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낙랑국이 저렇게 크게 비정된 근거에 대해서 쓰세요.
그래야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에 쏠려 기록에도 맞지 않는 저런 위치비정을 하게되면 그것은 더이상 사학이 아닙니다. 소설이죠.
저렇게 낙랑국을 비정하는 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제와 신라를 중국땅에다가 심으려니 나머지 한반도에 뭐가 있어야 하나 생각해보니, 평양에 낙랑관련 유물도 나오고 하니 한반도 전체가 낙랑국이라고 때려맞춘거죠. 전혀 학문적인 접근방법도 아니고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기록에 근거하여 낙랑국이 저렇게 비정된 이유를 써보세요. 재야사학도 이제좀 공부좀 하시기 바랍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그런 시절은 이미지났습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6/18 [15:12] 수정 삭제  
  또 중립사학님(이XX?)의 궤변과 광기가 시작되었군요.
지난번에는 석문성이 산해관 서북에 있다는 이상한 논리를 들고 나오시더니 이번에는 뭘로 시비를 걸려고 하시는지? 아~하 낙랑국의 크기로 시비를 걸기로 작정하셨군요. 님이 내게 낙랑국의 크기가 어떻게 저렇게 크냐는 질문을 하기 전에 본인도 사료의 근거를 들어 낙랑국이 이렇게 작았다는 근거를 먼저 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일일이 님과 댓글로 싸울 시간도 없고 가치도 없으니, 아래 글을 답글로 대신합니다.

낙랑국은 단군조선이 붕괴된 이후 생겨납니다. 3세 단군 고해사 편에 보면 “임신 원년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 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 195년)의 겨울이었다.”

고대 국가 때에는 지금처럼 선(線)개념에 의한 국경선이 아니라, 인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거점(성)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삼국의 영토가 마치 개이빨(犬牙)처럼 얽혀있다고 한겁니다.

단군조선의 마한 땅으로 들어온 낙랑국은 그 중요거점(수도)이 평양으로 보여 집니다. 원래 수도를 접수하면 인근 영토는 저절로 복속되는 법입니다. 한반도는 단군조선 마한의 영역이었다가 낙랑국의 강역으로 바뀝니다.

중립사학님은 강단을 누룰 실력도 없으면서, 역사의 진실을 되찾겠다는 민족사학을 함부로 폄하하는 짓은 민족반역자 이병도보다 더 나쁜 행위입니다. 궤변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아 님은 아직 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격의 수양도 아울러 필요합니다. 필자의 글에 도전하려면 모든 걸 더 배우고 와서 하라 이 말입니다.
동부여 08/06/18 [15:22] 수정 삭제  
  한반도는 대대로 동이족들의 수도장소이며 조상들의 시신이 묻힌 성지이며 전쟁시 피난처입니다. 그래서 삼국과 한반도는 역사와 유물이 연동되는 것이지요....대대로 동국,청구,
안동지역으로 불리운 지역이 바로 한반도와 현재의 동북삼성지역, 산동반도등입니다.
중립사학 08/06/18 [20:37] 수정 삭제  
  낙랑국이 저렇게 크게 자리잡게 된 근거에 대해서 말씀하시라는겁니다.
성훈씨처럼 저런 국수주의적 무대포적인 비정은 우리역사를 더 망칠뿐이죠.
개관적 기록에 근거하여 말씀하시죠.

더군다나 성훈씨의 답변은 자신의 글에 인용된 지도와도 모순되는군요. 저기 韓이 淮수가에 있는데 왜 갑자기 마한이 한반도에 있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글을 베껴오다보니 저사람 주장 다르고 이사람 주장다른 것은 미처 간파 못하셨군요. 지도의 저자가 쓴 책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회수가의 韓은 마한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모순된 주장을 가지고 이런 글 쓰시려면 기사쓰기 중단하시죠.

다시 질문하는데, 낙랑국이 저렇게 크게 비정된 이유를 개관적 기록에 따라 비정하세요. 추측하지맙시다. 그건 소설이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하고 딴소리만 하는 짓은 그만하시죠.
당신들이믿는건? 08/06/18 [23:53] 수정 삭제  
  가능성이 있는데 그동안 배워왔던 것과 달라서 말도 안된다는 얘기를 하시는건가요?
고구려가 우리나라였다는 사실도 일본에서 숨겼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말할겁니다

'고구려는 우리나라였을 가능성이 크다'라는 기사가 있다면~
소설쓰고 있네~ 증거를 대라 증거를~! 장난하냐?
성훈 칼럼리스트 08/06/19 [00:26] 수정 삭제  
  내가 님에게 일일이 근거를 댈 필요는 없소만, 마지막으로 추가 설명하리다.
B.C 195년 낙랑국이 평양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는 낙랑국 이외에 한반도에 자리 잡았다는 나라가 사료에 없습니다. 그러니 한반도에는 낙랑국 밖에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낙랑국의 행정력이 부산과 목포까지 미쳤는지 안 미쳤는지는 나도 모르오. 님은 나더러 그런 기록까지 찾아 내놓으라는 겁니까? 정신나간 사람 같으니라고.... 앞으로 내게 그런 질문 하려거든 우선 낙랑군이 지도보다 작다는 것의 사료적 근거를 먼저 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님 정도 실력 있는 양반이 단군조선의 삼한과 기준이 세운 한을 진짜 몰라서 물어봅니까? 내게 질문하기 전에 한권 사서 먼저 읽어보고 댓글 다세요. 중립사학님은 아예 한단고기도 안 읽어보고 내게 시비를 거는 것 같군요. 님 요구에 의한 답글이 아니라 제 독자들께서 헷갈릴까봐 아래와 같이 설명 드립니다.

단군왕검께서는 천하를 삼등분해서 통치하셨습니다. 조선의 영역이 너무 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44세 구물단군 때 국호를 대부여라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꿔 부릅니다.
진한-->진조선은 직접 천왕이 통치하다 결국 북부여로 바뀝니다.
번한-->번조선이 되는데 마지막 6대가 기자의 후손입니다. 위만국으로 이어집니다.
마한-->막조선으로 바뀌며 영역은 나중에 낙랑국이 계승합니다.

그런데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해(海)지방으로 남하하여 한(韓)을 세우는데 가장 강력했던 것이 마한입니다. 이를 역사적으로는 후삼한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제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한 후에도 마한이 에 또 나옵니다. 마한이 두 개 있었던 거지요.

이런 것을 진짜 모르고 댓글단 거라면 앞으로 내게 질문하지 마세요.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님은 다 알면서 일부러 낚시밥을 던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립사학이란 사람 참 불쌍해 보입니다.
역사에 대해서는 좀 알지만 강단사학자와 토의할 수준은 안되고, 민족사학 측으로 오기에는 정신적으로 뒷받침이 안되고 해서 중립사학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만, 그런 썩어빠진 정신으로 민족사를 짓밟으려고 하고 있으니 님은 민족반역자 이병도보다 더 나쁘다 봅니다.

게다가 필자가 왜의 위치에 대해 글 쓴다 하니 못쓰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쪽바리 계통으로 보이거나 아니면 그놈들 돈 받고 민족사의 복원을 방해하려는 일본간첩으로 보입니다. 난 님이 누군지 압니다. 당신은 포항공대까지 나온 에리트로서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소이다.
부탁합니다. 마음을 고쳐 먹으세요. 그리고 에리트면 에리트답게 앞으로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세요. 임이 하는 일이 매국이란 것이 안 느껴집니까?

중립사학 08/06/19 [03:50] 수정 삭제  
  낙랑국이 평양에 자리를 잡는다는 사실이 어떻게 한반도 전역이 됩니까?
말도안되는 소설그만쓰세요.
한반도전역이라고 말하려면,
동으로는 어디까지이고, 북으로는 어디까지, 서쪽으론 어디까지, 남으로는 어디까지라고 기록된 사료를 근거로 주장을 해야지, 한단고기에 나오는 최숭이 평양에 자리잡았다는 기록하나만을 가지고 낙랑국이 한반도 전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설입니다.

한단고기에 최숭이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이것 한가지입니다.
"최숭이 도읍한 곳은 평양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 하나를 가지고 낙랑국의 영토는 한반도 전체라고 확대하십니까? 한단고기 삼한관경본기에도 마한의 영토가 어디라고 어떻게된다고 기록된 부분은 없습니다. 마한이 태행산맥 부근과 箕子 관련된 기록이 더 많이 보이죠. 마한은 한반도와는 관계 없습니다. 한단고기 다시 읽어보시요. 내가보기에 성훈씨는 한단고기 제대로 읽어본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래서 성훈씨의 주장은 다 소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차리리 칼럼쓰지말고 작가로 바꾸시면 인기좀 있겠습니다. 학문적인 방법은 취하지 않고 자기 상상에 근거하여 주장하기 때문이죠.

공부좀하시고 사학하는 방법에 대해서 우선 책좀 읽어보시요.

이렇게 재야사학이 학문적 소질과 소양이 부족하기때문에 강단의 학자들이 깔보는겁니다. 그들을 식민사학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들의 얼마나 사학에 대하여 무식한지를 깨달으세요. 역사를 망치는 자들은 재야들입니다. 그들은 거의 소설가수준이에요.

다시한번 묻습니다.

어떻게 낙랑국이 한반도 전역입니까? 한단고기 구절로는 낙랑국 도읍이 평양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중립사학 08/06/19 [04:26] 수정 삭제  
  마한세가에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에 도읍하였으니"

달지국이 뭡니까? 月지국이죠. 이는 삼국지 동이전 마한조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한의 속국 중에 백제가 있습니다. 즉, 백제가 일어난 곳은 고조선 전삼한 중의 마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삼한의 도읍이 달지국입니다.

성훈씨는 백제는 산동반도라고 주장하면서, 고조선 전삼한 마한은 한반도라고 하시는데, 한단고기에 분명 고조선 전삼한 마한의 도읍은 달지국입니다. 마한이 둘로 나뉘어 하나는 산동에 있고 하나는 한반도에 있습니까? 주먹구구로 마한을 저쪽이 붙였다가 편의에 따라서 또 이쪽에 붙이지 마십쇼. 그래서 성훈씨의 글은 더이상 사학적 주장이 안되는 것입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6/19 [09:51] 수정 삭제  
  낙랑국이 평양에 도읍하고 한반도에 다른 국가가 없었으면 한반도는 낙랑국의 강역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부산과 목포까지 지방 수령을 파견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모릅니다.

님이 말하는 것은 22대 색불루단군 때의 마한으로 에 나옵니다. 내가 말한 것은 44세 구물단군 때의 일로 에 나옵니다.
바로 뒤에 마한의 위치가 나옵니다. 지금의 대동강입니다.
역시 다음에 단군 구물과 색불루의 삼한과 삼조선이 뭐가 다른지 설명이 나옵니다.

두 단군은 22대 차이가 나므로 약 7~800년의 차이가 납니다. 맨 처음 마한은 색불루단군 때 님의 말대로 생겨났을 것이며, 이것이 대동강으로 이전을 한 것으로 보이며 44대 구물 단군 때 이름이 바뀝니다. 최초 자리에 마한이라는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기준이 남하해서 한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한이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이유입니다. 이 마한을 하나로 놓고 보면 님의 말처럼 왔다리 갔다리 한다고 하는 겁니다.

미안합니다만, 내가 지금 지방에 가면 당분간 컴을 만나지 못합니다. 님과의 토의는 제 다음 글에서 하도록 하지요. 당신의 조국 일본(왜 ?) 다룰 때 말입니다....
아예 대일본제국 천황폐하 만세!라고 외치십시오. 이병도보다도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중립사학 08/06/19 [17:34] 수정 삭제  
  이게 사학입니까? 지금 하는 짓은 역사소설에나 타당한 것이지 역사강역비정과 같이 과학적인 작업을 해야하는 경우에는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한단도에 다른 국가가 없으므로 그곳이 낙랑국 강역이다"

하하 누가 그럽디까? 그곳이 사람이 살지 않던 곳일지, 아니면 역사상 기록되지 않았던 다른 국가가 있었을지 누가 압니까? 소설로 짜 맞추듯이 역사를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는 짓은 이병도가 했던 짓보다 더한거죠. 그걸 깨닫지 못하고 계속 이런식으로 소설쓰면 성훈씨는 역사를 망치는 자가 되는 것임을 아시죠.

구물단군때 대동강이 나온다고 그곳이 평양이라는 것은 선입관입니다.
색불루단군으로부터 구물단군때까지 마한의 위치가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만약 마한의 위치가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으면 구물단군 대동강은 지금의 평야이 될 가능성은 많지만,
마한이 옮겨졌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태행산 근처에 마한이 갑자기 대동강으로 갈 수 있습니까?
이렇게 논리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성훈씨는 소설가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倭를 공부하기 전에 역사접근방법론을 더 공부하셔야겠군요.
나를 왜놈이라고 하는것을 보니 당신은 짱깨첩자군요. 동북공정논리는 속지주의 원칙에 따르고 있죠. 그래서 현재중국땅 모든 국가는 중국역사다라는것입니다. 모든 우리 고대국가를 중국땅에 놓으려는 당신의 의도는 동북공정을 도와주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부터 당신을 짱깨첩자로 임명합니다.
대한국인 08/06/20 [15:11] 수정 삭제  
  칼럼리스트와 중립사학님의 글들을 주욱 읽어본결과. 필자의 객관성과 자료들이 더 신빙성 있게 와닿고. 중립사학님의 글은. 머랄까요 질질 매달려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지연,내지는 방해, 태클 정도 수준으로 느껴지네요. 역사적 진실은 파혜치고 연구핟보면 나옵니다. 역사가 역사를 증명하지요. 그나저나 이완용과 후손들...참을수 없는 분노가 갑자기 올라오네요. 혹시 중립사학님도 우봉이씨? 아니면 화교인가요?
조재범 08/06/20 [20:18] 수정 삭제  
  일단 닉네임 자체가 우습군요. 중립사학이라. 이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대한국인 말씀대로 중립사학 당신은 무엇인가 사소한 것 하나를 꼬투리 잡아서 태클거는 것으로 밖에 안 보입니다. 소설은 당신이 쓰고 있습니다. 중립사학씨. 당신이 작가로 전향하시죠. 사실 난 무명 소설가인데. 잘 됐습니다. 저랑 동업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같이 동인지나 하나 꾸밉시다. 역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말고 같이 문학에나 전념합시다.
중립사학 08/06/20 [20:47] 수정 삭제  
  역사복원을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옛날의 기록을 보고 그시대 상황이 어떠한지 찾아내는 것이죠.
반대하는 자에게 화교니 왜놈이나 하면 뭐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런 인터넷에서나 먹히지 학술회의에서 씨나 먹힐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재야의 사학하는 태도가 역사를 망치는 것이죠. 까놓고 얘기해서 성훈씨가 쓴 글을 가지고 영역비정을 하여 국제학회에 나간다고 해봅시다. 분명 외국학자들은 객관적인 자료를 보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껏 보인다는게,

"낙랑국 도읍이 평양이고 기록에 한반도에는 아무런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한반도 전역이 낙랑국이다."

라고 한다면 외국학자들은 콧방귀뀌죠. 학문이 뭔지도 모르는자가 상상과 감정에 의존하여 역사복원한답시고 강역비정하면 역사를 더 망치게 되는 이유가 이런데에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재야인사들가운데 국제적으로 이름난 자들이 없는것이죠. 국제적으로 이름난 자가 없다는 것은 복원한 역사를 세계에 널리 알릴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렇게 복원한답시고 소설써봤자 국내인터넷용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딴소리는 하지말고
낙랑국이 왜 한반도 전역인지 기록을 토대로 말씀하시죠.
민족사학 지지자 08/06/21 [16:00] 수정 삭제  
  학술대회이니 국제대회니 하는 것은 댁이 신경쓸 일이 아닙니다.
이 나라 역사만 제대로 바로 잡히면 그건 저절로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글에 괜한 태클이나 걸면서 궤변이나 늘어놓는 댁같은 양반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외국학자들이 콧방귀를 끼는지 댁이 봤소이까!!!
외국 놈들이야 자기네 안경끼고 보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안경끼고 보면 됩니다. 역사란 원래 그런 겁니다. 문제는 한국의 강단이 중국과 일본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중립사학이 아니라 강단에게 사주받아 민족사학 깨부시려 나온 우봉 이씨 가문의 의 끄나풀 같군요. 불쌍한 작자 같으니라고... 예이 여보슈.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그렇지 식민사학 편들고 나오냐!!! 그러면서 중립사학이라고...
중립사학 08/06/21 [18:23] 수정 삭제  
  저런 감정에 치우친 글은 더이상 학문이 아닙니다.
다른 말 말고
낙랑국이 어떻게 한반도 전역인지 논술하세요.
한 한국인 08/06/21 [20:26] 수정 삭제  
  정말 궁금합니다.
낙랑국이 한반도 전역이 아니라는 근거를 당신은 가지고 있나요?
위 글에 보다시피 성훈씨의 논리가 정연한데, 중립사학이라는 사람은 참 이상하네요?
혹 당신 광우병 소고기 아닙니까? 촛불집회를 해야 정신차리렵니까?
갓쉰 08/06/21 [21:10] 수정 삭제  
  1.낭락국이 그렇게 큰 이유를 대시오.
2.감정에 치우친 이야기만 하는군.
중립사학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름대로 중립이라면 반대만 일관하지 말고 중립적으로 생각해서 뭐가 어떻게 해서 잘못이고, 또 뭐가 옳은지 말해 보시오. 중립적으로다가~
그리고 며칠 동안 덧글을 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내오. 댁은 시간도 많은가 보구려, 일일이 대꾸를 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면 혹 이 글 모니터링하면서 반대글 올리는 걸 즐기고 있는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 중립,객관이란 존재는 없소. 개념으로는 존재하겠지. 말로만~!!^^%
중립사학 08/06/22 [05:22] 수정 삭제  
  사학은 학문의 형태를 뗘야합니다.
감정에 치우쳐 저런 시덥지 않은 비정을 하는 것은 나라역사를 망치는 것이죠.
저렇게 소설을 쓰니 강단에서 재야를 바보취급하는 것임을 깨달으시오.
밥그릇싸움때문에 재야이론을 채택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훈씨처럼 소설쓰는 자가 많기 때문이지요

딴소리 집어치우고
낙랑국을 저리 크게 비정한 근거를 대시오.
한 한국인 08/06/23 [08:30] 수정 삭제  
  중립사학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낙랑국이 왜 저렇게 크면 안되는지 그 이유는 안 대면서 낙랑국이 왜 저리 크냐고만 물어보네요. 그리고 재야를 바보 취급하던 안하던 그게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저 양반은 여기와서 반대 시위하는 게 취미인가 봐요. 아니 직업...... 할 일이 그렇게 없나봐요. 당신같은 X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요. 아시겠소?
과객 08/06/24 [01:06] 수정 삭제  
  중립사학 말이 맞아요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어떻게 할수 있는건지 얼굴 한 번 보고싶군요 한반도를 낙랑국으로 비정한 것을 보면 어떻하든 신라를 대륙으로 끌고 가고 싶어서인거 같은데 그럴려면 연오랑 세오녀 움벌직국 이서국 황룡사탑 구형왕릉 오가야 말갈 몽땅 그 조은 중국으로 옮겨야 하는데 가능합니까 참 어떻게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할수 있는지 이게 학문이요 술 주정이요 참 이 양반 사학에 똥칠 하려고 작정했나
민족사학 08/06/24 [09:52] 수정 삭제  
  언급하신 신라의 대부분이 대륙으로 가야 맞습니다. 그게 역사의 진실이니까요.
역사의 진실이란 우리의 편의나 이익을 위해 왔다리 갔다리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엉터리 주장도 아니며, 술주정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엉터리 사학 가지고 밥먹은 사람들 반성해야 합니다.
과객 08/06/24 [14:02] 수정 삭제  
  대륙으로 가야 맞다고요 연오랑과 세오녀가 절강성을 건너 어디로 갔나요 아메리카로 갔나여? 허황후의 파사석탑은 언제 절강성에서 옮겨온 것인가요 금관국 구형왕릉도 중국에서 파 온겁니까 당나라가 침범할 때 신라 백제가 중국에 있는데 육지로 만리 바다 건너 3천리를 어떻게 건너 옵니까 말이 안되는게 백가지도 넘지만 여기 다 적지 못하겠네여 참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얘기를 합시다 어느 싸이트 처럼 지들끼리 대륙설로 북치고 장구 치고 아무리 해봐야 말짱 꽝입니다 오히려 사학의 품위만 낯출뿐
과객 08/06/24 [14:24] 수정 삭제  
  1.남해차차웅 원년 가을 7월, 낙랑 군사가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兵至國{圍} 數重
2.남해11년,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낙랑이 우리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보고, 금성을 공격하여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3.탈해 이사금 왕위에 올랐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닿았다.그 상자는 다시 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4.유리 3년, 봄 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여름 5월, 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5년, 가을 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여기 적은게 여기 저기서 추린게 아니고 탈해부터 유리까지 단 몇장에 차례대로 적은건데 신라를 중국에 놓고 누가 합당하게 설명해 보세요


대륙신라인 08/06/24 [17:27] 수정 삭제  
  신라 초기의 기록에 낙랑과 말갈과의 전투가 많이 나옵니다. 이 낙랑과 말갈은 중국 대륙 하북성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라가 한반도라고요?

신라 무열왕 기록에, 동쪽 토함산에서 땅이 타다가 3년 만에 불이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토함산은 화산입니다. 경주 토함산이 화산입니까?

박혁거세 8년 "왜인이 군사를 이끌고와서 변방을 침범했다."는 기록과 "예전에 중국 사람들 중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자리잡아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걸 한반도로 보시는지요?

유리이사금 8년 낙랑이 북쪽 변방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신라가 낙랑 남쪽이라는 얘기입니다. 지마이사금 10년 왜인이 동쪽 변방을 침략하였다. 내해이사금 13년 왜인이 국경을 참범했다는 기록은 신라와 왜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단 얘기입니다.
조분이사금 4년 왜병이 동쪽 변두리를 침략하였다. 실성이사금 6년 왜인이 동쪽 변방과 남쪽변방을 침범했다. 눌지이사금 10년 왜병이 와서 동쪽 변방을 침범했다. 24년 남쪽 변두리를 침범하고 동쪽 변두리를 침범했다.
이건 왜가 대륙 남부인 광동성이나 복건성에서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잇었단 이야기입니다. 신라와 왜는 한반도 동쪽과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는 선덕왕 11년 "백제가 고구려와 합세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에서 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끊으려 했다." 신라가 한반도이면 이게 성립이 되는지요? 대륙에 있으니까 당항성을 잃어 통로가 끊긴 것 아닙니까?

현 사학계가 비정한 한반도 신라는 엉터리입니다. 이걸 믿고 떠드는 과객님이 불쌍합니다. 고객님 논리에는 신라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과객 08/06/24 [20:02] 수정 삭제  
  아무런 근거도 없이 거의 망상 수준이네 더 이상 말하면 입만 아프겠군 그냥 황룡사도 중국에서 퍼오고 신라 왕릉도 다 퍼온 거군 ㅎㅎㅎ 토함산 얘기가 어떻게 하북성이란 건지 참내 완전 코메디 하네
과객 08/06/24 [20:07] 수정 삭제  
  하북성에서 신라 유물이 산더미 처럼 나왔나 보지 그런거야? ㅎㅎ 김수로왕릉 하북성에 있어 정말야?
과객 08/06/24 [20:13] 수정 삭제  
  코메디의 정수를 보는군 중국 하북성은 화산지대야 맞아 ㅋㅋㅋ 거긴 산도 별로 없는 평지나 다름 없는데 그곳이 뭔 화산지대 하북성 가보기나 하구서 그런 엉터리 만화 그리는거야?
ㅎㅎ 08/06/24 [20:19] 수정 삭제  
  이런 우스운 주장에 반론이 없는건 그냥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허무한 개그라 반론을 안하는 거야 그걸 마치 지들말이 옳아서 그러는줄 알고 야무지게 착각들 하니 참 한심해
과객 08/06/24 [20:24] 수정 삭제  
  말로는 뭘 못하겠소 그러니 중국에서 나온 신라 유물 귀경좀 합시다 ㅎㅎ
신라인 08/06/25 [12:17] 수정 삭제  
  중국 땅에서 신라 유물이 발견되면 그렇다고 중국에서 발표합니까?
산동성의 장보고 유적지와 절강성의 김교각스님의 유적지가 있소이다.
양자강 하구에 있는 낭산의 선덕여왕능은 공설운동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신라의 토함산은 하북성이 아니라 안휘성에 있는 함산으로 화산입니다.

매국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반도사관의 함정에 빠져 역사의 진실을 모르는 과객님이 불쌍하군요.
과객 08/06/25 [18:45] 수정 삭제  
  불쌍한 신라 인간아 내가 더는 수준 낮은 애들과 말 안 할란다
김교각 ㅋㅋㅋ
병신들
과객 08/06/25 [18:49] 수정 삭제  
  안휘성이던 하북성이던 관계없이 그곳에서 화산활동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보여라 밥통아 중국 내륙이 화산지역 이라고 ㅄㄷ꼴값하는구나
토토짱 08/07/08 [18:39] 수정 삭제  
  중립사학! 이름의 뜻은 좋은데 생각은 좀 바꾸었으면 해! 그렇게 유식허면 자료를 대고 이야기 해! 말만 뻥끗하지 말고... 차라리 나도 이병도의 제자다!라고 하던지...정신나간넘! 성훈님이 소설을 쓴다 해도 니가 같은 민족이면 "성훈님!저도 같은 민족으로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제가 제시하는 이 자료에 의하면..."이라는 정도의 겸손은 나와야 하는게 아닌가? 세상에 독불장군이 없듯이...아니 한놈있네? 멍청한 독불장군! 누군지 알지? 뒷산에 매일 도망가는 놈! 그대하고 다를바가 없다면 정신차리게...
토토짱 08/07/08 [18:41] 수정 삭제  
  그냥 가던길 계속가라! 남일 참견하지 말고! 가다가 맑은 냇물있으면 세수좀 하고 정신차려라!
학생 08/07/09 [14:30] 수정 삭제  
  해깔리~~~~~~~
wntjsdo 08/09/20 [15:00] 수정 삭제  
  일본이 연전연승할때 목숨 건 조선인의 영혼들이 악담하는 놀이꾼들 자손대대로 흉칙한 맞 보게할 것이다.조선의 모든 자원으로 부흥기를 구가하여 아직도 세계에서 굴림하는 일본의 추태를 알고도 과객행세를 하고있냐?중국의 "동북공정"!!!. 그자체가 역사날조와 짜맞추기역사의 모래성임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 것에 동조하는 악성 약물에 중독된 버러지만도 못한것이 과객이란 말로 지 자신을 감추려 들다니...드러내놓고 한 번 더 추태를 펼쳐라.니 집과 모든 재산 그리고 가족들 다 내것이니 바로 내어놓거라 이 파렴치한 과객남아.니가 배운 인간이라니 역겹다!강아지도 최소의 기본에 옳고 그름을 알 지언데 쯧쯧@@@
주점 08/09/20 [15:26] 수정 삭제  
  과객은 잘 차려놓은 "동북공정의 한가지 양념"이구나 무력으로 역사.나라 먹는 배짱이 얼핏보기엔 당당해 보일지 몰라도 언제 까지나 너희들이 조제한 나름데로의 약발은 끝남이야!!. ..... 니 가슴에 빨간 오성기를 달아줄까 일장기를 메달아줄까 예~ 후진타오야 니 강아지가 밥 달란다... 얘들아 뭐하니 개가 밥달란다니까~안 깽~~~
대학생으로써.. 09/10/23 [01:36] 수정 삭제  
  대학생으로써 전 이 역사를 믿습니다. 주위에 친구들도 반신반의 하지만 제가 이 기사들을 보여주니 다들 놀라워하더군요. 1만년 천손의 역사가 바로 잡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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