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해상제국 백제!화려하게 부활한다!9∼10월에 열리는 '2010 세계대백제전'은 명실상부한 세계인의 축제로 치뤄진다오는 9∼10월 충남 공주와 부여, 논산 일원에서 열리는 '2010 세계대백제전'은 명실상부한 세계인의 축제로 치러질 전망이다.세계대백제전 개막식에 충남도 개도 이래 최대규모의 축하사절단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개막식에 참석하는 주요 해외 자치단체장은 가바시마 이쿠오(蒲島郁夫) 일본 구마모토(熊本)현 지사와 아라이 쇼고(荒井 正五) 일본 나라((奈良)현 지사, 가와카츠 헤이타(河勝 平太)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지사, 여응궉수언 베트남 롱안성장, 코쥐먀코 러시아 아무르주지사, 세르듀코프 러시아 레닌그라드주지사, 소피린 캄보디아 씨엠립주지사 등이다. 이와는 별도로 세계대백제전의 주 전시관인 '세계역사도시전'에 지나국 장쑤(江蘇)성 등 세계 6개 자치단체가 참가하며, 행사기간 지나국 쓰촨(四川)성을 비롯한 7개 해외 자치단체의 전통민속 예술공연단들이 참가해 다양한 민속공연을 선보이게 된다. 백제멸망 후에도 지나대륙의 백제유민들은 남양군도를 중심으로 서남아까지 해양무역을 활발하게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오늘날의 <화교>들이 그들이다.[자료: "'화교..' 백제멸망으로 흩어진 유민들" ] 백제의 남방경영은 지금의 제주도(탐라=담로) 경영부터 시작되는데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필리핀 군도로 뻗어 나갔다.
아시아 해상제국 백제는 결코 한반도지역에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였다 '백제'는 100가족이 바다를 건넜다는 '백가제해'에서 온 말이다. [한단고기]와 [삼국사기],그리고 지나국의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백제'는 고추모의 아들 온조가 이복형 비류(동부여를 개국한 해부루 서자의 손자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 낳은 아들)를 떠나 마한지역의 한강변에 세운 '십제'와 발해만 지역의 비류백제가 통합한 나라다. 그리고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고추모의 부여단군승계에 반대하여 고추모를 부여에서 몰아 낸 반고구려 세력인 부여의 왕 위구태(동명성왕 고두막의 후손)가 온조.비류세력을 대통합한 나라가 22담로를 가지고 서남 아시아까지 해상무역을 했던 아시아 해상제국 대백제인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북사]와 [수서]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為東夷強國.」 北史 列傳第八十二 百濟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차츰 강성해져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東明之後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為東夷強國.」隋書 列傳第四十六 百濟 온조백제는 고추모를 시조로 삼고 제사를 지냈다(삼국사기). 그러나 구태백제는 구태를 시조로 삼고 제사를 지냈다. 서울에서 공주로 수도를 이전한 이후 백제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구태세력이 백제를 통합하기 전에는 시조를 고추모로 삼았고, 구태세력이 백제를 통합한 이후에는 구태를 시조로 삼았다는 의미로 백제의 권력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해상제국 백제의 주역이 부여의 구태세력임을 알 수 있다. 청나라 황실역사서[흠정만류원류고(欽定滿流原流考)]에는 책부원구(冊府元龜)를 인용하여 <구태의 성이 위(尉)로 적혀 있으며, 통고(通考)를 인용하여 백제는 후한말 부여왕 구태가 세운 나라>라고 적혀 있다. [흠정만류원류고]에서 인용한 지나사료 문헌에는 구태가 바로 위구태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백제의 담로국이면서 백제황족이 천황으로 통치하던 당시 일본열도의 일본인들은 백제를 <최고의 나라>라는 의미로 '구다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해상제국 백제가 건설될 수 있었던 기반은 서남해 마한인들의 뛰어난 선박제조술과 해양술에 있었다. 장보고나 왕건 또한 이들 서남해 해상세력의 지원이 있었기에 백제인의 아들 장보고가 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고,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수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강병 100만으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연(燕),제(齊) 노(魯)등지를 흔들어 지나대륙의 큰 좀이 되었으며,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의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최치원'조 백제는 242년 이후 고구려가 위, 연 등을 공격하며 요동경략에 나서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해(발해만)를 건너 지나대륙의 남부 및 요서지방으로 진출한다. 246년 고이왕 13년 후한의 낙랑(당시 낙랑군은 북경 부근의 후한의 낙랑, 평양의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다.)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분서왕(汾西王) 7년(298) 낙랑군의 서현을 취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고이왕 13년조 및 분서왕 7년조) 이어 346년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는 지금의 요녕성 여현과 북경 사이를 정복, 요서(遼西), 진평(晋平) 두 직할군을 설치하여 660년 백제 멸망때까지 250여년 간 통치하였음이 당시 지나국의 여러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데, 주요 전거(典據)는 다음과 같다.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에 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두었다. 백제의 자치군이었다." 『양서』 「백제전」 "백제는 처음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통전』 이외에도 백제의 요서경략 기록은 『남제서』, 『남사』 등 동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사서들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백제의 요서경략사에 대하여 일본 및 지나국의 일부 학계에서는 관련 전거가 남조계 사서들에만 있고, 북조계 사서인 『수서』, 『북사』 등에는 없는 점과 우리 정사인 『삼국사기』 등에 자세한 내용이 없는 점을 들어 이를 회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이들은 이 당시 송, 제, 양, 진 등 남조계 왕조들이 지나국내에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백제의 관할지로 오인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굳이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의문은 다음의 다른 자료들을 함께 고찰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당시 백제 강역이 양자강 유역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또 『구당서』 「백제국전」에는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는 가운데 東北室新羅, 西渡海室越州, 南渡海室倭라 하여 서쪽 경계가 옛날 오(吳), 월(越)이 있던 양자강 유역(월주)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남제서』 「백제국전」에는 "이 때(490) 흉노와 돌궐이 또 다시 수 십만명의 기병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파견한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에게 대패하였다." 는 대목이 있어 이 당시 백제가 중원 땅에서 저 북쪽의 흉노 돌궐족과 대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같은 책 권 58 <열전>39에 보면 백제 동성왕이 제나라에 대해 이 때 큰 공을 세운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등을 각기 왕 또는 제후로 임명해 주도록 요청하는 한편 490~495년)간 지나대륙내 백제 7군인 광양(光陽), 조선(朝鮮), 낙랑(樂浪), 성양(城陽)을 다스리는 장군을 태수(太守)로 봉해 줄 것을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백제가 제나라의 상국이였음을 의미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미송위사(未松偉私) 등 일본 학자와 이병도 등 국내 일부 학자들은 이 때의 백제 7군이 광주, 나주, 신안, 고흥, 옥구 등 전라도 일대에 있었으며, 이 때 책봉된 왕 또는 제후, 태수들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4~6세기 당시 동북아시아 일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어불성설의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당시 거대한 제국이나 패권국이 아니고서야 어찌 왕 또는 제후를 임명할 수 있으며, 직할지를 통치하는 태수를 둘 수 있단 말인가? 특히 국내외 많은 학자들이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에 백제의 대륙진출과 일본지배 기록이 분명치 않은 점 때문에 한반도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소극적 해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분명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백제 전성시대에는 강병이 100만이었다. 남으로 월을 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경계로 하였다. 커다란 중원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렇듯 백제는 통전과 북사, 수서에 기록된 이름 그대로 100개 부족이 연합하여 널리 바다를 다스리는 나라(百家濟海)였으며, 이를 꽃 피운 동성왕 이후에는 요서 지역과 양자강 유역, 일본의 대마도 구주 일대에 22명의 담로(憺魯: 백제의 행정구역 또는 봉건영지로 해석되고 있으며 왕족들이 파견되어 통치했다함.'담을 두르다'→'다무르다'→'담로'→'다물'로 어휘가 변화하였다는 설도 있다)를 파견하여 250년 이상 동북아시아 남서부를 지배하는 거대한 해상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이 처럼 백제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였다. 부여라는 나라이름은 단군조선의 구물단제 이후부터 백제 성왕의 남부여라 지칭할 때까지 부여라는 이름이 곧 천손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여졌다.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의 지칭은 지리 및 방향적으로 북동남으로 불리어 졌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지나대륙과 한반도지역에서 패권을 다투던 나라이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사이에서 센드위치가 된 나라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부여적통문제라는 것은 고구려는 22대 색불루단군천황때부터 해모수의 부여의 황통을 이어받은 나라라는 것이고, 온조.비류세력을 통합한 부여왕 구태의 백제 또한 부여의 황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그것일 것이다. 그래서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고추모의 단군승계를 반대하고 부여의 남쪽으로 내 몰아 압록강지류 혼강위 골본성에서 고구려를 개국하게 한 것이다.고추모가 정한 나라이름 고구려란 이름은 단군조선의 제후국 이름으로 고추모의 선조나라 고리국을 의미한다. 부여에서 남하하여 압록강변에 고구려를 개국한 고추모는 유언으로 다물정신을 남겼고, 고구려 태왕들은 고추모의 다물정신을 따라 서진하여 조상들의 나라(고구려)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고구려 2대 유리태왕이 양맥을 점령하고 진군하여 점령한 고구려현(현도)의 근거지는 난하일대 입니다. 난하와 서접하여 영지가 있고 춘추시대 산융,고죽,영지는 같은세력으로 주나라와 주나라 제후국의 위협적인 세력이였는데 고죽의 근거지는 영지와 비슷하니 이또한 난하 일대일것입니다. [배구전]에 의하면 고죽국은 고구려의 원씨 국가라고 했습니다. 난하일대에 고죽국이 있었고 고죽국은 고구려의 원씨국가라고 하였고 난하일대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고구려의 도읍이 있고 난하일대에 고구려현이 있다.
고구려라는 말은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삼국지]나 [후한서]에는 고구려(북부여)가 구려로, (고주몽)고구려가 고구려(高句麗)로 적혀 있고, 고추모의 고구려는 구려(句麗)의 별종이라고 적혀 있다. 「구려를 일명 맥이라고 부르며 별종이 있다. 작은 강을 끼고 살고 있어 소수맥이라 한다. 句麗 一名貊夷 有別種 依小水爲居 因名曰小水貊」後漢書 「고구려는 구려에서 나라를 세웠다. 큰 강을 끼고 살고 있다. 서안평현 북쪽에 작은 강(혼강)이 있는데,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이다. 高句麗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三國志 위 [삼국지]나 ]후한서]문구에 의하면 고추모가 고구려를 세우기 전에 위만조선이 내부붕괴로 무너지고 한나라 진출이 강해지자,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있던 난하지역의 고구려 무리가 만주로 이동하여 소수(小水:혼하) 방면에서 고추모와 함께 고구려를 개국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벌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다툼은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전연(모용선비족=고구려와의 전쟁과정에서 일부가 동해안 타고 내려와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개국:경주.김해지역의 4-5세기 적석목곽분의 주인)의 침략 때 전략을 잘못 짜는 바람에 부황의 시신을 탈취당하고 태후와 황후가 인질로 잡혀감으로 고구려 최대의 비운의 태왕이 된 고국원왕이 남평양성(북한평양)에서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배경이 그것이고 광개토태왕 때 육.해군으로 백제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은 일과 장수태왕 때 백제의 수도성(서울)을 초토화시켜 백제 개로왕을 참살한 배경이 그것이다. 고구려.백제가 지나대륙의 요동.요서.산동지역을 공략하고자 했던 배경에는 고조선의 본래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다물(담로)'정신에서 기인한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지역 머문 나라다. 대륙를 지배한 고구려와 해양을 지배한 백제의 패권속에서 신라는 약소국이였다. 선비족의 나라 신라.당나라와 군사적 동맹으로 부여족의 나라 백제.고구려를 각개격파한 배경이라 할 것이다. 백제가 망한 후에 지나대륙 동남부지역의 백제담로지역은 '신라방'으로 둔갑했다. 홍콩(천주)지역을 비롯한 절강성 지역에 신라인들의 유적.유물.지명을 놓고 신라가 지나대륙을 정벌한 것 처럼 착각을 하면서 일본열도에 해당하는 '왜'를 '동남아'로 설정하는 어리석은 해석은 잘못된 이해라 할 것이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분명히 그러한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태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문자태왕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오늘날 '홍콩지역'에 해당하는 '천주'지역에 신라관련 지명이 많은 연유라 할 것이다. 이런 역사적 연유를 무시하고 신라가 지나대륙을 정벌했다거나 지나대륙에서 개국했다는 논리을 편다면 착각이거나 문헌기록에 대한 해석의 오류라 할 것이다. 고구려 문자태왕이 홍콩지역으로 신라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살게 한 이후로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는 지역이 되었다로 이해해야 올바른 이해라 할 것이다.따라서 신라인들의 무덤이나 유적.유물.지명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김춘추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서해를 건너 백제를 멸망시켰다.660년(백제 의자왕 20년) 3월 소정방은 나·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부여융을 사로 잡아 당나라로 송환하였다. 현재 백제본국의 수도 부여의 정림사지5층 석탑에는 당시 불탄 흔적과 함께 소정방의 대당백제정벌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인구가 600만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백제가 결코 한반도지역에 머문 나라가 아닌 대제국이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의자왕과 그 후손들의 무덤은 현재 지나대륙 북망산에 있다. 부여융은 요동지역에 백제국의 제후가 되었으며, 비록 제후국이나 백제라는 이름으로 300년을 유지했다.
백제멸망 후 의자왕의 여동생 사이메이 (齊明 제명여제) 일본천황과 나카노에 황태자가 규슈 후쿠오카에 나고야성을 쌓고 선박 수백척을 제조하여 백제부흥전쟁에서 참여시켰다. 지금의 금강(백강)지역으로 총출동한 당나라.신라.백제.왜의 해전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국제전으로 4회에 걸친 전쟁에서 결국 백제.왜연합군은 패하고 말았다.
백제황족과 유민들은 한반도를 떠나 황족이 다스리는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여 국호를 일본으로 고치고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새로운 나라를 열었던 것이다. [일본서기]를 통하여 백제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작금의 한.일감정과 악연은 백제와 신라의 악연에서 비롯된 것이며, 역사인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해소될 수가 있는 것이다. 100년간의 백제.신라동맹을 파기하고 백제 성왕을 참살한 신라의 배신행위에서 신라에 대한 백제의 증오심은 깊어 갔으며, 대대적인 공격으로 이어지게 되고 위기에 몰린 신라가 결국 택한 길이 당나라에 사대하고 군사적 동맹으로 대응하는 길이였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백제는 당시 신라의 국제외교전에 대한 정보부족과 치밀한 대응없이 얕보다가 결국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백제(일본)와 신라의 원한이 맺힌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신라를 대표하여 경주 김씨종친회가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왕실(백제황실)에 나제동맹의 파기.성왕참살에 대해 사죄하고, 일본왕실도 과거 한반도침략에 대해 사죄하고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정신대.강제징용자들에 대한 피해배상과 함께 간도반환과 한반도통일에 적극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일본왕실의 조상들이 묻힌 <한 머리 땅>을 성지로 생각하고 참배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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