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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은 백제 무왕의 제후였나?

백제 무왕의 죽음에 당태종이 소복입고 곡을 한 의미는?

역사복원신문 | 기사입력 2011/08/24 [14:08]

당태종은 백제 무왕의 제후였나?

백제 무왕의 죽음에 당태종이 소복입고 곡을 한 의미는?

역사복원신문 | 입력 : 2011/08/24 [14:08]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퓨전사극 ‘계백’을 보고 있노라면 스토리 전개에 많은 의문점이 든다. 현재는 무왕(武王)의 아들 의자(義慈)가 태자로 나오는 때로, 백제멸망(660년) 약 30년 전이라 그런지 무왕시대 백제의 정치가 무척 혼란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당나라 때 측천무후처럼 무왕의 제2왕후가 모든 정치적 실권을 쥐고, 무왕은 왕후에게 끌려가는 아무 권한 없는 나약한 왕으로 그려지고 있다. 만일 실제 그랬다면 백제는 엄청난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을 것이다. 측천무후는 당 고종의 건강이 좋지 못해 대리청정을 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으나, 현재 드라마에서는 무왕과 왕후 간에 정치적인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그런 상태에서 백제에 안정된 국정이 가능했을까? 

▲ MBC 역사드라마 계백에서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백제 무왕과 제2왕후    


그렇다면 실제 무왕시대의 백제는 과연 어떠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무왕 때 백제는 대외적으로 무척 강력했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 607년 백제는 물론 국지전이지만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지지 않았으며, 원수인 신라와의 숱한 전투에서도 이긴 경우가 많았음을 <삼국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국정이 어지러웠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죽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주국대방군공백제왕부여장(故柱國帶方郡公百濟王扶餘璋)인 무왕이 죽자 당태종이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후대에 곡필(曲筆)된 것으로 보인다. 무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사신으로부터 듣은 당태종의 행동을 기록한 <신당서>에 따르면, 당시 당나라는 백제의 제후국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기록이 있기에 그랬을까? 


당태종은 백제 무왕의 제후였다. 

(명나라 영락제의 죽음과 세종대왕의 행동)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칭송되는 세종대왕은 1424년 명나라 영락제(태종 문황제)가 죽자 자신과 영락제는 군신(君臣)관계라 하며 27일간이나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영락제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정사를 돌보지 않고 위패를 떠나지 않았으며 식음을 전폐하여 건강을 많이 해쳤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1424년/영락 22년) 9월 4일 기록에 “임금이 대행황제를 위하여 참최(斬衰)를 입고, 문무 군신 4품 이상은 재최(齋衰)를 입고 북경의 대궐을 바라보고 절하고 곡하는 의식을 하였다.(上爲大行皇帝服斬衰, 文武群臣四品以上服齊衰, 望闕拜哭如儀)”,

또한 10월 13일에는, 문례관 정여가 돌아와 계하기를, “전하께서 선황제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태조황제의 유제에 의하여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거애하고 소복을 입었으며, 제4일에 이르러 참최(斬衰)를 입었다가 3일 만에 복을 벗고, 전하는 여러 신하와 함께 소복을 입고 27일 만에 벗었으며, 정사도 보지 아니하고 풍악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참최(斬衰)란 상복의 종류로 정상적인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이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3년 동안 입는 상복을 말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참최를 입고 곡을 하였다는 것은 명나라 영락제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고, 조선의 세종대왕은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는 말이다. 이는 당시 명나라와 조선과의 상하관계를 분명히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종주국 황제가 붕어했으니, 제후국 왕은 당연히 소복지곡(素服之哭)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제 무왕이 죽자 당태종의 행동은? )

▲ 백제 무대왕께서 붕어하시자 상복을 입고 곡하는 당태종(?)  
그런데 641년 백제 무왕이 죽자 백제와 당나라 사이에는 세종대왕의 경우와는 전혀 상반되는 의식이 있었다고 <신당서>는 기록하고 있다. “정관 15년(641년) 장(璋=백제무왕)이 죽자 그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며 상을 고하자, 태종이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十五年 璋 其子義慈遣使 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42년(641년)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 소복을 입고 표를 받들어 ‘임금의 외신인 부여장이 죽었다(君外臣扶餘璋卒).’라고 하자 당제(帝)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라고 되어있어 거의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 무왕이 죽자 “당태종이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했고, 소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는 기록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일국의 제왕이 다른 나라의 임금이 죽었다고 소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은 <중국 25사>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는 당시 백제와 당나라 사이의 상하역학관계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즉 백제무왕은 상국(上國)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고, 당태종은 제후국인 아들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신당서>에서 “태종이 소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고 하면서 무왕의 죽음을 벼슬아치나 사대부의 죽음인 졸(卒)로 썼다는 사실이다. 이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으로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해 곡필(曲筆)된 것임이 분명하다. 옛날에 황제의 죽음은 붕(崩), 제후나 왕의 죽음은 훙(薨), 벼슬아치는 졸(卒)이라 하며, 일반 사람들은 사(死)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백제를 대등한 관계 또는 상국(上國)이 아닌 동쪽의 작은 제후국으로 만들려는 왜곡으로 보인다.  

▲ 당태종의 화상을 보면,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 곤룡포와 면류관이 아닌 평범한 벼슬아치 복장이다.  © 역사복원신문
<삼국사기>에서는 당태종을 제(帝)로 기록하고, 무왕의 죽음을 훙(薨)으로 기록하여 스스로를 낮춘 면이 있다. 그러나 무왕이 당태종에게 보낸 표문에는 분명하게 당태종을 제(帝)가 아닌 군(君)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하가 황제를 지칭할 때 군(君)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군(君)이란 용어는 제왕을 지칭하다가 후대에 오면서 봉지를 받는 제후의 개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당태종을 군(君)이라 불렀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당시 당나라는 백제보다 훨씬 국력이 약한 나라였거나, 아니면 당태종 이세민은 백제 무왕의 제후였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과연 이러한 내용이 드라마 ‘계백’에 그려질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런 내용이 그려지면 MBC는 기록에 충실한 정통사극을 만들었다는 호평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대주의 유학자들처럼 드라마로 역사왜곡이나 한다는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백제의 대표지명은 어디인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 고조가 백제 무왕을 대방군공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으로 책봉했고, 당태종이 의자왕을 주국대방군공백제왕(柱國帶方郡公百濟王)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수나라 고조가 27대 위덕왕을 대방군공(帶方郡公)으로 봉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이 기록들은 후대의 사대주의 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대방군공이라는 일개 제후의 죽음에 황제가 소복을 입고 곡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에서 우리 삼국의 왕들을 봉한 기록이 많은데 그 관직명에는 통상 그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명을 사용했다. 백제왕들은 대방군공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으로 봉했으며, 신라왕은 낙랑군공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고, 고구려에게는 요동군공고구려왕(遼東郡公高句麗王)이 대부분이다. 즉 대방은 백제의 대표지명, 낙랑은 신라의 대표지명, 요동은 고구려의 대표지명인 것이다. 대표지명이란 그 나라의 시국처 내지는 오랜 도읍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의 대표지명인 대방군, 낙랑군, 요동군은 과연 어디일까?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유주(幽州)에는 요동(遼東), 요서(遼西), 북평(北平), 상곡(上谷), 어양(漁陽), 낙랑(樂浪), 현토(玄免)의 7개 군이 속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방(帶方)은 군(郡)이 아니라.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縣)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이다.                                                ©역사복원신문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讑邯,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험독),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 산서성 최남단 황하 굴곡지점에서 발견된 고주국의 두왕자 백이.숙제의 묘     ©역사복원신문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를 아우르는 행정구역이라는 결정적인 근거는 요서군을 상징하는 고죽국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최남단 황하가 꺾이는 곳에서 3년 전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일대는 우리 단군조선과 삼국의 웅대한 역사가 꿈틀대던 무대였던 것이다.  

고대 중국은 섬서성 또는 황하 주변 하남성 일대에 있던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나라였다. 서울시를 예로 들자면, 고대 중국의 영토는 중구(中區) 일대 뿐이었고 나머지 서울시는 모두 단군조선과 우리 삼국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을 명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고는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단행하여 대륙의 실제 지배자였던 동이족의 역사를 지금의 만리장성 밖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한족(漢族)의 역사왜곡에 반도사관으로 장단을 맞춘 장본인은 바로 조선왕조와 일제였던 것이다. 
 
▲ 단군조선과 삼국의 영토는 중국 대륙의 극히 일부(섬서성 또는 황하주변 하남성)를 제외한 전 대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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