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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백제의 영토 알려주는 '흑치상지'

그의 고향 '광서장족자치구'는 백제의 서부.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5/14 [00:28]

대륙 백제의 영토 알려주는 '흑치상지'

그의 고향 '광서장족자치구'는 백제의 서부.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5/14 [00:28]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왕도 부여> 3부는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나뉘어 연재됩니다.
(3부) 대륙 백제의 영토 알려주는 '흑치상지'
(4부)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

백제의 부흥운동 

대륙과 해양을 주름잡던 백제가 소정방의 기습공격에 졸지에 갑자기 도성이 함락되고 왕이 항복해 나라가 순식간에 망하게 되자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무왕의 조카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동이 되어 왜국에 볼모로 갔던 왕자 부여풍을 임금으로 세우고,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任存城)을 근거지로 하여 당에 대항한다. 이 때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당장(唐將) 손인사는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덕물도는 소정방이 협주에서 물길을 따라 동류(東流)하자 신라태자가 100척의 배를 거느리고 마중을 나간 곳이다. 이 40만 대군이 배타고 황해바다를 건너 웅진 앞바다 덕적도로 왔다고 아직도 말하는 자들은 정신병자로 봐야 한다. 중국의 배는 돛도 없는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 황해의 해류를 헤치고 횡단할 수 없다고 이미 2부에서 설명했다.

따라서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과 임존성도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동반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류성은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 남아 있고, 임존성은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으나 웅진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복신이 웅진성에 있던 당장 유인원을 포위했다가 물러가 임존성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은 백제의 중심지였던 산동성에 있다.  백마하와 가깝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까지 죽이려다 오히려 복신이 죽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그리고는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군사를 청하여 당병을 막고자 한다. 왜병은 백강 어귀에서 당나라에게 4번 싸워 다 패하고 만다. 배 400척이 불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어 해수(海水)가 붉어졌다고 적혀있다. 왕인 부여풍은 어디론가 도망을 간다.

중국장수전전에 보면 백강이 양자강이남 호남성 기양으로 나온다. 지금은 상강(湘江)으로 부르고 있으며, 기양과 백수 사이로 동정호로 흘러드는 큰 강으로 호남성의 대표적인 강이며 가장 큰 강이다. 이곳은 당시 왜가 위치하고 있던 광동성과 가까운 곳이라 이 기록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 당시 백강은 산동성 백마하와 지금의 상강 두 군데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 지역이 중국장수전전에는 대륙 남쪽이다.
 
흑치상지가 분산된 군중을 불러 모으니 열흘 사이에 3만여 명이 되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였으나 흑치상지가 막아 싸워 무너뜨리고 다시 200여 성을 탈취하니 소정방이 이기지 못하였다 한다. 200여 성이면 백제를 거의 다 수복한 것과 같다. 백제부흥군은 3년간을 끈질기게 싸우다 결국 항복을 하고 만다.

왕자 부여륭이 웅진도독이 되어 신라 문무왕과 당장 유인궤와 백마의 피로써 맹세함으로서 백제의 사직은 끝나게 된다. 그 맹문의 내용은 “(전략) 부여륭을 세워 웅진도독을 삼아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고토를 회복케 하니, 신라와 서로 의논하여 길이 우방이 됨과 동시에 묵은 감정을 풀고 새로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각 조명을 받들어 길이 속국이 되어야 한다.(후략)”로 백제왕자 부여륭은 당나라의 일개 제후로 변하게 된다.

부여융은 군중이 흩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당경(唐京)으로 돌아갔으며, 백제 땅에서 백성을 안돈시키다 안동도호부를 통솔했고 고구려 땅에 머물다가 죽는다. 그의 묘는 흑치상지와 함께 하남성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되었다. 당 무후는 손자 경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땅이 이미 신라.발해.말갈의 소유가 되어 국계(國系)가 드디어 끊겨졌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발해(대진국)의 영토.  글쎄요?
여기서 이상한 기록은 백제의 옛 땅을 발해(대진국)이 나눠 가졌다는 기록이다. 사학계는 발해의 영역을 길림성 돈화현 일대로 비정했다. 그런 발해가 어떻게 산동성 일대 백제의 옛 땅을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했다고 한다. 발해는 분명 하북성 남부와 산동성 북부 지방의 바다로 현 중국의 내해를 말함이다. 현 식민사학계에서 비정한 발해의 강역이 잘못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하겠다.  

여기서 백제부흥운동의 주역인 흑치상지라는 장군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 흑치상지열전>에 보면 “백제 서부인(西部人)으로, 백제의 달솔로 풍달군 장수를 겸했는데 그 직은 당의 자사와 같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니 소속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였는데, 늙은 왕(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자 부하를 데리고 빠져나가 도망한 사람들을 규합하여 임존산에 의거하고 굳게 지켰다.

당 고종이 사자를 보내 초유(招諭)하므로 결국에는 나아가 항복하였다. 흑치상지는 당에 들어가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佯州刺史)가 되어 여러 차레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쌓아 관직을 제수받고 특별히 상도 받았다. (하원도경략대사를 거쳐 연국공(燕國公)의 작위를 받고,) 연연도대총관이 되어 돌궐을 정벌했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주홍(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의 역모사건 때 목을 매어 죽게 하였다. 

▲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된 흑치상지 묘비
상 받은 것은 모두 부하에게 나눠주고 남겨둔 재산이라고는 없었고, 사람들이 모두 그 억울함을 슬퍼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80여 년 전 낙양에서 발견된 그의 묘비명에는 “이미 옥에 갇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러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고  적혀 있다.

그의 묘비명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천하가 그를 위해 애통해 하였고, 4해(海)가 그의 현량(賢良)함을 애처롭게 여겼도다.
천자가 이를 깊이 헤아리니,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포상이 미쳤도다.
내가 실로 감모하여 그를 기리는 글을 짓노라.
그에게 바쳐진 말들이 영원할 것이며, 그의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로다.”

흑치상지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런데 흑치상지에 대한 이상한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이란 책에 있는 기록인데, 이 책은 중국학자들이 중국정사인 <25사>에 남아있는 장군들의 업적을 여러 문헌을 토대로 간략하게 기술해 놓은 위인집으로 상.중.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중국 사서에 나오는 장수들의 업적을 간략히 기술해 놓은 위인집 

장수전전에서는 흑치상지(?∼689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흑치상지는 당 고종, 측천무후 때 명장으로 백제(지금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동성 흠현 서북이란 현재 광서장족자치구 흠주 서북 옹령현 백제향을 말하며, 백제향이란 지명은 아직도 남아있다.

▲  
▲  광서장족자치구가 백제의 서부라면 백제의 중심부는? 대륙 동부지대 전부가 백제의 영토?

흑치상지가 백제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하다가 나중에 당나라로 간 것으로 사학계가 말했는데 중국인들의 기록에는 광동성 사람으로 되어 있으니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삼국사기>에도 분명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으로 되어 있다. 현 국사 이론이라면 한반도의 충남이나 전라도 서부인이어야 하는데 광서장족자치구 사람이라니 말이 되는가?

민족사학자 오재성 선생은 이미 오래전에 “흑치상지는 대륙백제 사람이며 중국 남부에는 ‘빈랑’이라는 나무열매를 먹으면 이빨이 검어지는 지역이 있는데 흑치상지는 대륙백제의 남부지역 출신일 것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대륙 남부에 흑치국이 있었다는 말인가 ?

아래는 대륙고려 홈페이지에 김용무 선생이 소개한 글이다.
지금까지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등 여러 사서에서는 흑치상지를 그저 ‘백제서부인(百濟西部人)’ 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를 그저 사비지역의 서쪽사람으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당나라)이 말하는 ‘백제 서부인’ 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것은 중국에 있는 ‘요서군’이나 ‘진평군’과 같은 ‘백제군’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백제인을 통칭하는 말로 보인다. 

▲   백제 진평군의 위치. 즉 대륙의 동부평야지대는 전부 백제의 영토였다. 

이 <장수전전>은 놀랍게도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며 그는 지금의 광서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黑齒常之 (? ~ 689年) 唐高宗李治武則天后時名將 百濟 西部人(今廣東欽縣 西北)) 그러니까 흑치상지는 약 70년 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그의 묘지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의 조상들은 백제인으로 대대로 「흑치국」의 왕에 봉해진 백제왕의 후왕(侯王)으로서 자신은 그들의 후손으로서 지금의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의 출생은 629년으로 추정)

그렇다면 그의 출생은 백제사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의 하나인 「흑치국」의 위치를 비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과연「흑치국」은 어디에 위치했는지에 대한 답은 기록을 통해서 찾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나, 정황을 종합해서 볼 때 「흑치국」의 도읍지는 오늘날의 ‘백제향’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번 내가 이 지역을 방문한 주된 이유도「흑치국」의 소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지방의 한 유지에게 “옛날 이 고장에도 ‘흑치인’들이 살지 않았느냐?” 고 물었더니 그는 (60살은 된 듯함) 내 질문에 성큼 답하기를 “자신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없었지만 조부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조부의 소년 시에는 거리에서 종종 이빨이 검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부의 말은 “그들은 게을러서 이를 닦지 않아 그리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러니까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의 거리에서는 ‘흑치인’들을 볼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흑치국」의 도읍지도 이 지역의 어디엔 가에는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정은 그리 빗나간 이야기는 아닌 상 싶다.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는 동안에 해는 저물러 가고 나도 이만 ‘백제허’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흑치상지의 조상들의 유물도 이 근방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간직하고 후일 다시 이곳을 방문할 것을 기약하고 ‘백제향’을 떠났다. (주: 옛날 중국의 양자강 이남의 여러 지역(대만도 포함)에서는 이빨이 검은 ‘흑치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서부지역 및 서남방과 월남경내에는 많은 ‘흑치인’이 살았다고 한다)  

필자가 이 마을에 와서 더 큰 감명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장족’들은 마을의 이름을 ‘백제허’ 라고 쓰고 그것을 발음할 때는 우리말로 「대박제;DaejBakcae」라고 해, 글자 그대로 발음을 하지 않는다. ‘백제향’의 ‘장족’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백제」의 위엄을 잊지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지워져 없어지게 마련인데, 이곳 ‘백제허’ 사람들은 「대백제」의 찬란한 영화를 ‘백제墟’라는 고(古)지명으로 이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허’ 주변에는 많은 고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단성”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 가면 옛 성터와 같은 유적이 있다고 한다. 그 옛날 백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실체였던 것이다. <인용 끝> 

▲  아직도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광서장족자치구의 백제. 백제로 가는 버스와 백제허란 마을
 
위에서 설명했듯이 많은 중국의 기록과 <삼국사기>에도 백제는 대륙에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특히 흑치상지의 출생지 백제향은 중국 대륙 남단에 있다. 거기까지 백제가 진출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식민사학계만이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국사책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광서장족자치구의 백제향이 백제의 서부라면 백제의 중심부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 이야기는 백제가 광동성 일대에도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광동성은 통상 왜가 있었던 지역으로 알고 있다. 결국 광동성의 왜는 백제이거나 백제의 분국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백제향이 고향인 흑치상지가 한반도까지 와서 백제부흥운동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송나라 때 그려진 우적도에도 북경 이동(以東)은 그려져 있지 않다. 즉 자기네 땅이 아니란 말로 따라서 지명조차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삼국의 지명이 중국의 사서에 많이 적혀있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흑치상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한마디로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 동부 평야 지대를 통치하며 주무대는 산동성이고, 그 영역은 대륙 남부 광동성과 광서장족자치구까지 미쳤다고 본다. 백제는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백제에 대한 다른 기록을 통해서 입증된다.

다음 4부에는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이 연재됩니다.
 
<정정합니다.> 2008.05.22
필자가 대륙고려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김용무씨 글의 원작자는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소 진철교수와 최원용선생입니다.
광서장족자치구에 직접 다녀온 분은 소진철교수이며, 중국장수전전이란 책을 국내에 전한 분은 최원용선생입니다.


백제장군 흑지상지 08/05/14 [13:33] 수정 삭제  
  ==>요 내용을
로 바꾸시라니까..파도사나운 바다에서 노저어야 하니까 당군이 서해도 건너지 못했을 거라는 그런 개인적 사고에 매몰되어 백제를 중국에다만 가두는 편협성...그렇게 알려 주면 수용를 해야지..생고집이 강하시네..바다를 주름잡으며 한반도.중국.일본.동남아까지 미치는 대백제가 22담로인데, 흑지상지가 한반도까지 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건 님의 생각일 뿐..돛달고 바람과 해로타면 금방 왔다갔다 한다니까요...바다출신이 아니라서 잘 모른 듯 하군요.
조재범 08/05/14 [21:41] 수정 삭제  
  중국 배와 백제 배는 확연히 다릅니다. 성훈 씨가 말씀하신 것은 중국의 배이지 백제의 배가 아닙니다. 백제 배는 돛 있고 노 있으니까 항해술이 좋아서 멀리까지 진출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배는 정크선이란 배로 돛이 없고 노도 없어서 도라는 것으로 젓는 것입니다. 정 못 믿겠으면 중국의 누선이란 배를 타고 서해안을 건너보시죠? 잘 되나? 백제를 중국에다 가두는 것도 문제지만 한반도에다 가두는 것도 문제입니다. 백제의 건국지는 대방군이올시다. 이는 거의 모든 사서에 나와 있습니다. 대방군은 어디냐? 요동군에서 분화된 곳이고 석성과 인접한 곳이며 석문과 마주보는 곳입니다. 그 중 석성은 삼국유명미상지방 중 하나인데 [남제서]에 청하 서쪽에 있다고 합니다. 청하는 지금도 하북성에 있습니다. 동성왕이 설치한 7군 중 하나죠. 그리고 석문은 중화민국까지 사용되다 최근에 석가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 당군이 석문에 진을 치니 신라군이 대방에 진을 쳤다 했으므로, 이 둘은 마주보는 곳입니다. 즉, 대방은 석가장과 마주보는 곳입니다. 하북성 지역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단 말입니다. 그럼 한반도에 있는 백제 유적지는 무엇이냐? 이것도 무시할 순 없죠. [구당서]에 '백제의 왕 거소는 동서에 2곳이 있다'고 하니 한반도는 백제의 왕 동쪽 거소가 되겠습니다. 중국은 배 모양이 바다를 건너기에 시원찮아서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하지만 백제는 배 모양이 아까도 말했듯이 바다를 건너기에 좋아서 한반도에도 진출하고 멀리 동남아까지도 뻗어나간 것입니다. 좀 역발상을 합시다. 중국 쪽이 식민지고 한반도 쪽이 본국이라면 안 맞는 것이 제법 많습니다. 강진이 잦은 백제의 지진 기록이 그러하고, 음력 5월에 큰물이 지는 기상 기록이 그러하고, 개로왕의 토목 공사 현장이 그러하고, 패망시의 지명, 1개월 이내의 조공 기록, 한반도엔 3,000명도 채 안 남았으나 중국엔 아주 흔한 성씨 중 하나인 백제 8대 성씨들이 그러합니다.
잠깐, 왜 중국이 서해안을 그 당시에 못 건넜을 것이라고 추론한 지 아십니까? 단순히 배 모양 때문은 아닙니다. 송나라 때 발간된 지도로 [우적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지도는 굉장히 중요한 지도로 삼국유명미상지방 358개 중 50여 개 정도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는 대만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대만이란 나라는 복건성에서 보면 한 200km 남짓한 거리밖에 안 되는데 왜 대만도 몰랐을까요? 일찍이 중국이 대만을 드나들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송나라 때에도 중국 바로 옆의 대만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바다에 어두웠고 해외 지식이 결핍되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남의 생고집 운운하기 전에 자신이 생고집부터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유독 백제사만 나오면 본국이 한반도 진출지가 중국이란 식의 고정관념이 틀어박혀 있어서 큰일입니다. 사실은 반대로 되었습니다. 본국이 중국이고 한반도가 진출지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한반도에서만 복닥거렸다는 국가사관, 반도사관에 함몰되어 있으면 진실을 보지 못 합니다.
왜 중국의 역대 왕조 중 송나라 이전의 왕조들이 저 흉악한 섬서성 지역에 도읍을 할 수 밖에 없었는 지 모르십니까? 그네들이 태행산맥 동쪽의 옥토를 일찍이 차지하고 있었다면 미쳤다고 산골짜기에 도읍하겠습니까? 그 지역은 송 이전까진 남의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180도 바꾸면 그것이 진실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80도 입니다.
조재범 08/05/14 [21:47] 수정 삭제  
  만일 백제의 진출지가 중국이라면 어느 때에 잃었습니까? 그 진출지를 언제 잃었냐 말입니다. 혹자는 성왕 때 잃었다는데 그것을 입증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못 한다면 신채호 선생의 전철을 밟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대륙에 백제, 신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근세 조선의 강역이 우리 민족의 주 무대란 고정관념을 깨지 못 해서 그 곳을 진출지로 인식하고 언제 잃었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정관념을 밀고 나가시려거든 이 질문에 대답을 해 보시죠.
라디오 08/05/15 [09:51] 수정 삭제  
  그래서, 역사는 조작의 역사라 합니다요^^ 크크...
뜨네기 08/05/16 [02:47] 수정 삭제  
  동백제 서백제 정도로 알고 있던것이 여러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되니 탄력을 받는것 같군요.
자신의 시각을 바꾼다는것, 특히 자신이 어느정도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혹은 타인이 인정해 줄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 나간다는건 정말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공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항상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부족을 생각할때만 새로운 눈을 뜰수 있는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논쟁,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막말이나 남을 낮추는 말들은 더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거의 20년 전 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공부할때, 공부하면 할수록 자신의 나라가 너무 싫고 비참해지고, 오히려 중국의 지방정권이 되는것이 더 좋지않을까 하고 어린마음에 생각을 하였고, 중국 영화와 노래를 즐기며 살았는데, 그것이 저 자신이 정신나간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제 쓰여진 역사가 공부하면 할수록 국민들로하여금 비슷한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20여년 후에 타국땅에서 자식들도 키우고 살면서 역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되고 바른 역사를 알고자 조금씩 공부도 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토론을 하시는 글들을 보면서 서로의 주장들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때 더욱 쉽게, 더 설득력있는 내용을 취할수 있는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역사서는 글쓴이의 관점과 목적이 그 내용에 그대로 드러나기에 그 관점이나 목적을 이해하고서 우리민족의 관점에서 새롭게 써나가는것이 우리의 역사라고 생각됩니다. 두서없이 중언부언했군요. 아무튼 님들의 열씸이 찬사를 보냅니다.
dfsfds 08/05/16 [18:09]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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