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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백제멸망으로 흩어진 유민들"

[역사시사]화교.나침반.신라방은 백제관련, 교류는 왜 필요한가?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10/04/07 [01:25]

"'화교..' 백제멸망으로 흩어진 유민들"

[역사시사]화교.나침반.신라방은 백제관련, 교류는 왜 필요한가?

윤복현 저널리스트 | 입력 : 2010/04/07 [01:25]
▲ 아시아 해상제국-이시아 지역에 22담로 설치
백제의 기원과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 영역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 東夷列傳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韓은 세 종류가 있으니, 첫번째를 마한馬韓이라 하고, 두번째를 진한辰韓이라 하며, 세번째를 변진弁辰이라 한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이 낙랑과 접하며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고, 그 북쪽이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하고 있다. 무릇 78국이며 백제伯濟가 그 중의 한 나라이다."
 
기록의 내용은 한반도남부지역은 단군3조선붕괴이후 조선유민들에 의해 3한이 생겼는데, 한반도서부지역에 속하는 마한이 54개국(읍단위 국가)으로 가장 컸는데, 그 속에 백제가 있다는 의미다. 백제라고 할 때는 온조백제를 의미한다.광개토태왕비문에는 이잔(구태백제는 이잔)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온조백제를 고구려와 만주의 패권을 다투던 부여의 왕 구태가 후한세력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통합을 하고 서남해 지역을 장악하여 아시아 해상제국을 건설했다.그래서 우리가 보통 아시아 해상제국 백제라고 할 때는 온조가 세운 '십제'를 통합한 구태백제를 의미한다. 온조는 고추모의 아들로 시조로 추모왕(고추모)를 삼았으며, 온조나라를 통합한 구태백제는 부여왕 구태를 시조로 삼고 제사를 지냈다.
 
 지나문헌인「북사」와 「수서」에서 백제시조 구태에 대해 기록하기를, “동명(고두막한=북부여 5대 단군)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신당서(新唐書)]에서 백제의 위치를 기록하기를,"直京師東六千里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직경사동육천리이영빈해지양 서계월주 남왜 북고려 개유해내지 기동신라야)"
 
해석하면"백제는 경사(당나라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하는데,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 북쪽은 고려(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들 나라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리고 동쪽은 신라이다."
 
즉, 국경은 지나국의 월주지역,일본열도, 북쪽의 고구려와 경계하고 있는 백제는 당나라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정도가면 바닷가(한반도 서남해)도에 위치하고 있고, 백제 동쪽(경상도)으로 신라가 위치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한나라부터 역사 왜곡을 진행시켰기때문에 그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또한,『구당서』에서 백제영역을 이르기를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구태백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과 동남아지역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지나대륙.일본.인도.서남아시아로 연결되는 서남해로 통하는 한반도(서남부)를 본국으로  지나 동남부지역과 동남아시아,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22개에 이르는 담로(총독부 :무역.군사.행정관리)를 설치한 거대한 아시아 해상제국 백제는 단순히 한반도에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였던 것이다.
 
▲  백제 대향로-머리는 마고한국(마한=마조선)의 상징 봉황-백제가 마고한국을 계승했다는 의미
화교.나침반.신라방은 백제관련 용어

 
고대 동아시아의 배는 바닥모양과 추진체에 따라 크게 선(船)과 박(舶)으로 나눈다.
 
"船"은 바닥이 평평하고 배 옆의 도(櫂)를 저어 전진하는 카누와 같은 형태로 강과 운하를 항해할 수 있는데, "舶"은 흰 돛을 달아 바람을 이용하고 배 꼬리에 노(櫓)를 달아 전진하며 바닥이 뾰족해 파도를 해치고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배로 지나인들은 이것을 '이(夷)의 배'라고 불렀다. 이 두가지 배를 총칭하여 "선박"이라고 불렀다. 한반도인들은 고대부터 해양족이였다. 특히 서남해 지역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해양무역이 활발한 지역이다. 구태백제가 아시아 해상제국을 건설한 기반은 서남해지역민들의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에 있었다.
 
A.D. 1세기부터 A.D. 15세기까지 무려 1,500년간 백제인들은 이런 배를 타고 아시아 바다를 지배했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지도에서 보듯이 동아시아 곳곳에 남아 있다. 백제멸망이후에도 백제유민들은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이 이전 지나왕조들과 달리 명나라 지배 안에 강제 편입하려 하자,목숨을 걸고 300년간 싸우다가, 대부분 고려, 일본, 필리핀,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화교"로 알고 있는 이들이 사실은 지나대륙의 지나인들이 아니라,바로 명나라의 '해금정책(海禁政策)'에 대항하여 싸우다 피신해 간 사람들이고 이들은 대부분 백제유민들의 후손이었다.
 
백제멸망이후 주산군도의 백제유민들의 해상무역활동 
 
원나라 사서인 [원사(元史)]의 기록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있다. 때는 백제본국이 멸망한 먼 훗날이 되는 1267년, 고려 원종 8년 때의 기사다.
 
"백제가 사신 양호를 파견하여 황제를 조알하고 비단을 하사 받았다"
 
이에 대해 사학계 일각에서는 사서의 기록이 고려와 백제를 혼동해서 그리 기록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고려가 백제의 옛 강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기록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지만, 모두 납득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고려 측에서도 양호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를 조알하고 비단을 하사 받은 사실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뿐더러 양호라는 사람의 존재조차 나타나지 않기 떄문이다.
 
원나라 황제에게 비단을 선사한 이들 백제인들 양자강 하구 항주만 입구에 있는 '주산군도'라는 섬을 중심으로 동 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했던 백제유민들이였으며, 그 문화는 멀리 사라센까지 전파되었다. 9세기에 사라센 여행가인 이븐 후르다드베와 마우스디는 이 땅을 일러,
 
"이 나라는 "Syla(신라)"라는 나라로 금이 많고 경관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져 모든 것이 충족된 아름다운 나라다." 라고 묘사했고, 10세기에 '알 이드리시'와 14세기에 '앗 다마시키'라는 사라센인은   "신라는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그 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 목걸이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라는 기록을 남겨, 이들이 말한 신라가 후기신라가 아니라 주산군도의 백제유민들이 세운 해상왕국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외에도 백제의 존재는 백제가 멸망하고, 견훤의 후백제마저 멸망한 뒤에도 백제와 관련된 이해할 수 없는 흔적들은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983년 고려 성종 2년에 성종이 송나라 황제로 부터 받은 책봉문을 보면 "고려는 삼한(한반도 남부지역)의 옛 땅과 백제가 남긴 봉지(탐라 등 서남해 도서지역)를 가지고 있다"는 구절이 등장하고, 이어 985년에 내려진 송나라 황제의 조서를 보면 "항상 백제의 백성들과 장족들을 평안케 하여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은 현재 고려가 다스리는 삼한지역(한반도)의 백제인들과 벽란도에 무역하러 오는 장족 백제유민들을 잘 보살펴 주라는 당부다.
 
장족의 실체는 누구인가? 지나국 동남부 광서성 장족자치지구에 가면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놀랄 수 밖에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거리 곳곳에 남아 있는 백제라는 이름의 지명들, 길거리의 간판이나 버스 광고판에서 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백제라는 단어들, 그리고 엄마를 엄마라 부르고 아빠를 아빠라 부르는 장족 아이들과 우리 민족에게 밖에 없다는 맷돌.방아(호남지역의 맷돌과 방아), 지게, 그리고 강강수월래의 문화가 그 곳 장족자치구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백제권에 속하는 한반도 호남지역의 전주와 완산, 그리고 기린봉이 장족지도에 존재하고 있는 이 지역의 장족들은 지나인들이 백제허라고 부르는 그 지역을 '대백제'라고 발음하고 있다.
 
이미 KBS '역사 스페셜'에서 몇 차례 다룬 문제이지만, 후백제가 멸망한 뒤 3년 후 지나국 광서성 지역에 대거 한국계 지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호남지역의 전주를 비롯하여 완산, 기린봉, 그리고 금산사 등 후백제의 중심 지역에 있던 지명과 유적의 명칭이 후백제가 멸망한 뒤 대거 이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지나지명과 일치하는 대부분의 지명이 신라 시대에 지나국에서 들여 왔기 때문이라는 기존 학설과는 정반대로 대치되는 사건으로 백제멸망이후에도 바다를 통하여 한반도 백제유민들과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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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후삼국 시대를 통일한 고려 왕조와의 긴밀한 관계 역시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인 상산사(湘山寺)의 역사를 기록한 상산지(전10권) 8권에 보면 1311년, 이 절의 주지인 철산장로가 고려왕에게 선물을 요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낱 사찰의 주지가 멀리 떨어진 고려왕에게 선물을 요청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에 대한 고려의 답이 화려하다는데에 의문점이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철산장로의 요청에 대해 고려왕은 기록에 따르면 '세상을 밝히는 여명주, 금으로 새긴 불경, 봉의 깃털로 만든 모자, 금실로 사람 천명을 새긴 옷, 금 밥그릇, 여덟가지 진귀한 보물로 만든 부처상' 등을 선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이런 기록들은 백제 담로지역이였던 광서성 일대에 남아 있는 무수한 백제계 지명들과 풍습과 맞물려이 지역이 어떠한 형태로든 백제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리 역사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는 결국 그 이전부터 이 지역이 이미 백제와 관련된 지역이었음을 암시하는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침반은 아시아 해상무역을 독점한 백제인들의 발명품
 
최근에 사라센에 나침반을 전한 것은 지나인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 백제인들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유인즉, 사라센어(아랍어)로 나침반은 "Khann"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나어로 나침반을 뜻하는 침(針)과는 관계가 없고, 우리말 '가늘다'의 어근인 "가는(細)" 이란 말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백제멸망이후 백제의 발명품까지 신라의 전유물이 되었다.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주산군도의 주민들로부터 빼앗은 항해관련 서적들을 정리하면서 "항해 관련 서적들이 모두 오랑캐 말로 되어 있어 지나본토인들이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모두 새로 번역하였다."는 명사(明史)의 기록은 바다의 주인이 지나인들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역사교육을 통하여 산동지역의 신라방에 신라인들이 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신라방 사람들이 신라에서 유래한 '한가위'가 무엇을 하는 날인지 몰랐다는 당서(唐書)의 기록은, 그들이 바로 백제가 망하기 전부터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던 백제의 유민들이었기에 신라인으로 불리면서도 신라인의 최대명절인 '한가위'를 몰랐던 것이라고 한다. 백제멸망 후 백제유민들의 거주지를 신라방으로 당나라가 부른 것이다.지나지역의 좀이 되었다고 지나문헌에 기록할 정도로 지나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였던 백제를 철저히 지우기 위해서 말이다.
 
▲ 공주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지나국의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화교(백제유민들)와 아시아 경제공동체
 
등소평의 해외 화교자본 유치정책이 실시된 후, 화교들이 지나국 땅에 들어와 최초로 한 일은 주산군도에 있던 백제인들의 절을 복원하고 여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화교의 정체가 무엇인지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백제 멸망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하는 알 수 없는 백제의 흔적들은 그 이전부터 등장하고 있는 백제와 백제의 해외경영의 흔적들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힘든 문제라는 것이다.
 
백제는 바다를 매개로 아시아 전역에 연결된 대백제였다는 사실과 함께 서해를 통하여 지나국과 무역을 하는 21세기를 맞아 지나국의 돈줄을 쥐고 있는 백제유민들로서의 화교와 교류하고 백제라는 공통적 인식하에 지나국과 대한민국이 공존번영하는 차원에서 경제협력과 역사문화교류을 하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아시아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교류협력하여 공존번영하는 길은 바다를 통하여 길을 열었던 백제에 대한 인식과 백제찾기에서만 가능한 배경이 될 것이다. 우리가남이가만을 내세우는 우물안개구리들의 역사관으로는 대한민국의 국운이 크게 융성할 수 없으며 갈등과 대립과 전쟁을 부추기며 한반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11 10/06/09 [02:23] 수정 삭제  
  선의 궁성은 서안의 장안성곽만해야 한다. 서안의 장안성은 내성, 황성이다. 외성은 옛날 부서져서 흔적을 볼 수가 없다. 그 내성, 황성을 보라, 얼마나 크고 높은지를.. 높이만 해도 10m가까이 된다. 조선의 덕수궁이라면 이 정도의 성곽이 되어야 한다.)



2. 덕수궁에는 덕수궁성이 있어야 한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보면 그 규모가 실려있다.

그 규모를 보면 한반도 서울의 덕수궁보다 훨씬 크다.


3. 한반도 서울에는 조선의 황제가 기거할만한 거대한 황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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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이라 하면 궁주변으로 거대한 성곽이 있어야 한다.

황제대국의 근거>>

“조선은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제일많은 대국이었다” 고 독립신문 논설에 기재되어 있다.

==독립신문 』(1896.4.7 창간)(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 논설)

4. 조선의 대왕은 틀린말이다. 황제가 맞다. 세종대왕이 아니라 세종황제이다.

문헌의 근거: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 江南은 황제가 계신 나라이다” 라고 나오는데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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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황하강이남의 중원,중국,중주를 말하며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직할구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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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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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조선국은 중국지역에 500여년간 위치하면서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대황제국이었다.

그당시 명나라, 여진족의 청나라, 일본, 베트남등은 조선의 범주안에서 조선의 제후로 있던 나라들이었다. 모두 조선에 조공을 바치면서 조선을 대국으로 모셨던 나라들이었다.


6. 조선시대 문헌 동국여지비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조선 한성의 4대문은 모두가 정북,정동,정남,정북을 향하고 있는데 그 중 정남을 향하는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한다.” 고 나온다.

그러나 현재 한반도 서울의 숭례문은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동국여지비고의 내용과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섬서성 서안의 장안성(한성)의 4대문을 보면 정남,정북,정동,정서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바로 대조선의 황성이 있는 한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과 동시에 치성이 있는 고구려성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사실이 궁궁하면 직접 찾아서 보는 것이 현명하다. 북경의 자금성도 고구려성이었는데, 중국에서 그 흔적을 없애려고 치성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래서 자금성은 현재 성곽이 일자형으로 되어 있다. 옛날 자금성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한결같이 치성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7. 조선의 문헌 동국여지비고에는

“ 한성의 둘레는 18km, 한성 4대문밖에 창경궁성, 경희궁성이 있다” 고 했는데 현 한반도 서울에는 창경궁, 경희궁이 궁성도 없으면서 모두 4대문 안에 있다. 역시 문헌과 서울의 궁이 맞지 않는다. 모두 섬서성 서안에서 찾아봐야 한다.

(궁성도 별도의 황성이므로 별궁으로 있는 것이 합당하다)


조선반도의 궁궐들은 축소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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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잇는건 대조선은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랍니다.

다민족

우리민족이라고 쓰셔야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몽골인이다
111 10/06/11 [11:58] 수정 삭제  
  임금 손수 도끼 주시며 동정을 명하시니,
한 거름에 되놈의 비린내, 누린내를 말끔히 씻었네.
한나라 변새는 이미 비어 고월없고,
진나라 사람은 왜 괴롭게 새성을 쌓았던고.
뜰앞에 아뢴 충성된 간언이 좋은 계책 아니었던가,
땅을 개척한 공이 높아 큰 이름일세.
간을 좋음과 공을 표함이 가장 급무인데,
임금님 거룩한 정사는 둘 다 분명하시네.

원수, 대장군 윤시중을 축하하며.. 동쪽의 정벌, 동쪽의 오랑캐, 동이혹은 호인, 되놈을 정벌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 임금이 장군에게 도끼를 준다는 것은 대장을 출정시킬때 하는 행사로 동정의 전권을 장군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고려, 조선으로 보았을때 오랑캐는 북쪽에 주로 있었는데, 여기서는 동쪽에 있었다.

만약 한반도에 있었다면 동쪽[ 강원도?]의 되놈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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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변새, 변방의 요새를 지나갈리 만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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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새로 쌓은 성, 신성을 볼 수 있는 경우가 만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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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우리 임금님이 신하의 간언을 모두 들어 정사를 거룩하게 잘 보심을 읊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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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서거정 시문집) [東文選]
1478년(성종 9)에 서거정(徐居正 : 1422~92)이 처음 엮은 시문집.중국 양(梁)의 소통(瀟統 : 501~531)이 진(秦)·한(漢) 이후 제(齊)·양(梁)대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시집
111 10/06/11 [14:29] 수정 삭제  
  1. 대조선의 황성인 경복궁이 대륙에 있었으므로 한반도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2. 서울의 경복궁,등 산재해 있는 왕궁들이 남산의 일왕의 신사를 향해 축을 이루면서
새로 지어졌다..
3. 서울에 한양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울이전에 양주군이 있었는데, 양주군도 일제때 지어
진 한자지명이란다. 그 이전엔 구전된 한글어로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왕릉을 찾곤 하는데 그곳의 왕릉도 믿을 수가 없다. 조선의 황제들이 대륙에서 하야했는데, 그러면 그곳에 황릉이 있어야 당연하다. 그래서 한반도의 왕릉은 위작이다.

위작이 아니라면 고려의 황릉들도 조선반도에 널려있어야 하는데 고려의 황릉은 거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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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황릉은 완벽하게 존재하는 데 ,고려의 황릉이 완벽하게 없다는 것은 조선의
황릉만 조사해서 의도적으로 복원했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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