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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과 대륙을 지배경영한 백제와 로마

국제해상 무역국가 백제의 수도문제와 세계주역 한반도의 중요성

윤복현 기자 | 기사입력 2008/04/25 [11:34]

해상과 대륙을 지배경영한 백제와 로마

국제해상 무역국가 백제의 수도문제와 세계주역 한반도의 중요성

윤복현 기자 | 입력 : 2008/04/25 [11:34]

고대 동아시아 해상제국 백제

1.비류백제와 온조백제문제, 그리고 백제의 수도문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탄탄한 제국을 건설하기위해서는 기반을 다져야 하기 때문에 비젼과 전문성을 가진 뛰어난 인재들을 기반으로 시스템과 제도의 구축, 그리고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는, 구축된 시스템과 제도의 실현과정에서 오는 시행착오, 그리고 비로소 정착되며 발전하는 차원을 의미한다 하겠다.




그리스제국과 패권을 다투다 결국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전술로 멸망했던 트로이 제국의 왕손들이 세운 로마는 무궁화를 신성시했는데, 로마인들의 조상들이 되는 트로이 제국은 고대 우리 동이족과도 크게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로마인들도 단군조선처럼 [아사달 백성들]에 비유되는 차원에서 로마시민들에 국한되었지만, 민주 공화정을 기반으로 시스템과 제도구축을 통하여  로마의 번영은 물론이고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공익사업들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역사와 버금가는1천 여년에 가까운 생명을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법과 제도는 현대 서양인들의 법과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왕정-공화정이 조화된 시스템과 제도를 통하여 유럽과 아프리카대륙을 경영한 로마제국도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는데, 왜 해상제국 백제가 한반도에서 출발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역사와 사건에 있어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객관성를 지향하고자 하는 필자의 관점에서 만주대륙의 비류백제와 한반도의 온조백제와의 관계성과 관련하여 백제 또한 한반도의 서울에서 출발한 동아시아 해상제국임을 문헌들의 비교분석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하여 증명해 보기로 한다.  

▲  트로이의 9번째 도시의 성이 있던 곳에 극장터와 주거지역 - 이러한 극장문화는 로마로 전승되었다.
 
호모의 대서사시"일리어드"에서 묘사된 BC13-BC12C의 '트로이 제국'은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유적을 발굴하면서 하나의 신화가 아니라, 역사의 실재임이 증명되었다.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렇게 문헌적 내용과 고고학적인 유적유물의 일치성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증명해 내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학의 원칙이어야하며, 역사학도의 연구자세여야 한다.


▲ 백제의 웅진(곰나루). 지형도
 
고국천황을 백제와의 전쟁에서 죽게 만든 원한관계와 더불어 서해와 중국대륙 진출의 교두보인 한강을 차단하려는 차원에서 마침내 백제의 한성까지 침략하여 백제의 개로황제를 죽인 고구려 장수황제 군대의 침략으로 한성(서울)을 상실하고 웅진(공주)로 수도를 이전한 이후 해양제국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다.
 

▲  ▲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 계묘년(523) 5월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 이로써 무령왕의 계보와 웅진시대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관계에 대한 단서가 잡히게 되었다. 또한 무령왕이 523년에 죽자 3년상을 치르기 위해 2년3개월간 가매장했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墓誌와 買地券을 만들었고,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안치할 때(529년) 무령왕의 買地券 반대쪽에 왕비의 墓誌를 새겼음도 밝혀졌다. 무령왕이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것은 그의 출생연도가 462년이며 즉위연도인 501년에 그의 나이가 40세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천자나 황제의 죽음을 의미하는 崩御가 표기되어 백제황제의 무덤임을 증명해 주었다.
<수서>에서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백제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백제의 중이 중인도로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했다』(조선불교통사) 『 백제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일본서기)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구축한 교역망의 범위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범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는 「탑등(tapen,tapeten)」이 보이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었는데,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관(불-부여-을 상징한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남해안 지역과 동남아시아와 일본열도를 바다를 통해 종횡무진하며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제국 백제는 고대 아시아의 로마제국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다 바람의 방향과 해로에 전문가들인 백제인들은 선박을 통하여 한반도와 중국대륙, 그리고 동남 아시아와 일본열도를 충분히 아우르는 지역의 초월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는 고고학적 유물들도 증명하고 있듯이, 한반도에만 백제를 가두어 버리려는 식민사관세력도 문제지만, 백제가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고 중국대륙에만 존재했을 것이라는 일부 민족사학자들의 편협한 인식 또한 고대인들의 폭넓은 활동범주를 이해하지 못한 편협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개마무사'가 상징하듯이 기마민족국가로서, 단군의 후예들로서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제하고 아우르는  국가였던 고구려는 만주와 아시아 대륙을 기마부대를 통해 종횡무진하면서 지배했다. 만주에서 몽골까지 말로 달리면 1주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기마민족 고구려인들에게 거리적 제한은 허용되지 않았다. 만주에서 하북성까지, 만주에서 몽골까지, 하북성에서 한반도까지, 하북성에서 티벳까지 얼마든지 단 시간내에 이동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의 후예들로서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했던 징기스칸의 몽골제국만 보아도 얼마든지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제본국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한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해상을 장악하고 국제무역에 능했던 백제라는 나라는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로로 부여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왕위에 오른 고두막한에게 쫒겨난 해모수계 동부여 해부루의 서손이자 소서노의 남편이던 구태(우태=부여와 고구려 관직명)의 아들인 비류백제세력이 소서노와 고추모가 함께 건국한 고구려의 왕권이 고추모의 아들인 유리에게 계승되자, 부여의 적통임을 내세우면서 대륙에서 고구려에 저항한 기록들이 나오기도 하는 이유다. 예컨대,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 기사는 우연찮게 만주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꼽힌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의 비류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한『백제국은 본디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송서> 백제 조)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백제(비류백제)와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후한서> 건광 원년 조). 두 기록 역시 식민사관적 인식으로 보면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다. 




▲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 위덕왕의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새겨진 명문 기록 .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 "百濟王  昌"이란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다.
 
즉,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어떻게 중국 대륙 요동의 동쪽 땅에 있게 되는지, 또 백제군사가 어떻게 만주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예맥의 군사와 함께 움직일 수 있냐고 말이다. 이러한 중국문헌들의 기록들은 모두 한반도 온조백제와 합류하기 전 중국 만주 땅에서 고구려 왕권을 유리에게 빼앗긴 나머지 고구려에 저항했던 백제(비류백제)를 반증하는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사학자들이 이러한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의 구분없이 마구잡이로 해석하면 오류와 혼란을 줄 수 밖에 없다고 본다.중국 대륙의 백제가 중국 역사가들의 눈에 띄게 된 것은 4세기 중반의 일이다. <자치통감>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대륙의 비류백제는 지금의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부여를 서쪽의 전연(前燕) 근처로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 요동지역의 강자인 전연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기원후 343년 경으로 짐작되는 전연과의 전투에서 대륙 백제는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거니와, 바로 이 때문에 비류백제가 동아시아의 역사 무대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또한『광개토왕릉비문에 「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비류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된다. 당시 한반도 온조백제국과 고구려 사이에는 낙랑국이 버티고 있어서 서로 교류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4세기에 접어들어 북중국은 5호16국 시대의 대혼란이 개막되었고, 그 파장은 고구려에도 미치게 된다. 고구려가 서쪽지역에 국력을 집중하는 틈을 타 만주의 백제는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력을 확보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이후 중국측의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비류백제가 구태백제로 중국문헌에 기록되기도 하는 사유는 바로 구태가 비류 아버지의 실명이기 때문이다. 비류의 또 다른 이름인 '우태'는 부여와 고구려의 관직명이기 때문에 비류의 아버지 실명은 '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와의 관계성은 무엇인가?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못박듯이 말한다. 이것은 당시 만주대륙에 존재하고 있던 비류백제의 실존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주서> 백제조)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수서> 백제 조)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한원> 백제조)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형제는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으며, 비류의 아버지로 볼 수 있는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또한 온조백제보다 군사력이 강성한 비류백제가 온조백제와 합류하면서 비중면에서 온조백제의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결국 비류백제계와 온조백제계와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고 추정할 수 있고,  부여계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백제 왕족들의 성씨도 ‘부여’씨로 변경했다고 볼 수 있으며, 부예계의 적통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고구려와 치열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벌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한 근거로는 사실 백제 왕들은 한결같이 부여씨(扶餘氏)를 씨성으로 삼고 있다는 점과 <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간 백제 왕실은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뉘며, 모두 부여계 출신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와 백제 왕들이 참혹하게 죽이면서까지 동명성왕을 시조로 삼는 고구려와 백제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이유는 바로 부여계의 적통임을 내세운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글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백제가 나중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으며, 백제의 역대 왕들이 해모수의 부여왕조를 계승하여 민중의 지도자로 왕위에 올랐던 소서노의 할아버지이고 비류와 온조의 고조 할아버지 되는 고두막한 동명성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점 등 때문이다.


1천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고두막한(동명성왕) 사당인 「동명묘」는 하남 위례성인 몽촌토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숭산(현재 이름은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소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황제들은 황성인 몽촌토성에서 검단산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의식을 집전하였으리라. 그리고 또한 중국대륙에 진출한 백제가 중국 황하강 남쪽 하남성 지역에 숭산을 세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다같이 부여의 후예인 비류계와 온조계가 후에 어떻게 결합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가 같고 부여계라는 동일한 혈통과 동명성왕이라는 동일한 시조의식때문이였을 것으로 본다. 또한 전연에 대패한 비류백제는 정착지가 필요했고, 마한지역에서 세력이 미약했던 온조백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비류백제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이도학씨의 견해또한『만주지역의 비류계 백제는 강성한 전연의 계속되는 압박과 고구려의 강한 구속 정책에 의해 거점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한반도로 남하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결과 동일한 계통인 양 지배층은 대결을 피한 채 더욱 강화된 국가체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백제 건국설화상 형(兄)으로 전해진 데서 짐작되는 종가격인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황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와 함께 마한 진왕의 승인을 받아 풍납.몽촌토성 등 백제초기의 궁궐터임을 증명하는 유적지와 당시 동진과 교류했던 증거들로써의 많은 동진시대 유물들이 출토된 사실이 증명하고 있듯이, 마한(한반도)지역의 한강변에 터를 잡고 있던 온조백제와 비류백제는 합류하게 되면서 갑자기 강성해진 백제는 근초고 황제부터 마한지역을 병합하며 명실상부한 한반도지역의 지배권을 갖게 된다. 이후 백제는 비류백제의 통한과도 관련된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단군조선의 번조선에 속했던 산동반도 등은 본래 동이족의 터전으로 백제가 진출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고 본다. 

 
▲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써 신시 배달국의 '창힐 문자'와 관련되는 중국(中國) 섬서성 서안시의 동쪽에 있는 앙소(仰訴) 문화기의 큰 집단적(集團的)인 거주(居住)의 장소(場所)에서 발굴된 문자.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된 채색토기가 특징인 앙소문화는 감숙, 섬서, 하남성 서북지역을 포함하는 위수-황하 유역을 따라, 대략 기원전 5000년경에 출현하여 2,0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이 앙소문화는, 서부 아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산맥을 가로질러, 하서주랑을 통과 해 중국대륙에 도달 하는 지역이다. 앙소문화 지역에서 사용되던 원시 한장어(漢藏語) 계통 언어가 마침내는 전 중국대륙의 모든 언어를 대체하게 끔 되었다. 만다린(普通話)은 비록 구조적으로 상당히 알타이어화가 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장어 계통 언어인 것이다. 
 
이 앙소문화는 동남 아시아에서 북상하여 중원에 정착한 지금의 중국 한족(하)들의 조상들의 문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기원전 4000년, 하서주랑과 황토고원북부에 하족이 살고 있었고 진남관 중 일대에는 화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 회하이남과 한강(漢水-호북성에 있는 장강의 지류)류역에 치우라는 선인(先人)이 살고 있었다. 하족의 황제(중국의 조상.동이족 황제헌원이 하족의 우두머리가 되다)가 동쪽으로 진군하며, 화족의 염제신농(동이족으로 중국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다)를 전승한후 연맹을 달성하게 된다. '화'와 '하' 이 두족이 점차 융합하여 '화하족'을 이룬다.  그리고 이후 화하족과 기타민족이 동화, 융합되여 한나라때에 이르면서 "한족"이라 불렀다. 따라서 화.하족 중 동이족에 속하는 염제신농의 화족이 북방 알타이어 민족이라고 볼 때 현재 중국어가 된 남방계 언어를 사용한 하족이 고대 동이족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한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인종학상 [몽골로이드]라는 동일 민족이나, 언어.문화적으로는 고대 동이족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민족이 바로 [하족]이다. 이 '화'족은 중국의 조상으로 삼는 동이족인 '황제'를 우두머리로 삼아 중국의 시조로 삼는 동이족인 '염제신농씨족'와 결합하여 '화하족'을 이룬다. 숫적으로는 '하족'이 많았기에 언어가 동이족과는 전혀 '하족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는 동이족의 절대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중국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하는 '동북공정'은 바로 동이족에 대한 열등감을 무마시키고 동이족의 조상인 '3황5제'까지 중국화함으로써 단군.부여.고구려.대진(발해)국을 모두 중국화하려는 결과적으로 단군을 시조로 삼는 대한민국 자체를 역사적으로 복속시키겠다는 커다란 계획인 것이다. 현재 전통적으로 동이족의 터전인 요서지역에 위치한 '홍산문명'은 중국의 황하문명과 단군조선의 젖줄로서 중국정부가 가장 중시하는 지역으로 동북공정의 핵심 유적지로 삼으려 하는 이유다. 즉, 동북공정은 단순히 고구려.대진국(발해)의 역사를 왜곡하는 차원을 넘어 단군조선까지 집어 삼키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참고로 거대한 궁궐터와 신전이 발굴된 '홍산문명'은
모계사회였으며, 커다란 용의 모양을 한 돌더미들이 발굴되어 중국이 토테미즘적 차원에서 숭상하는 '용'문화도 사실은 우리 동이족의 문화임을 입증했다. 즉, 중국의 문화는 엄마되는 동이문명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반증인 것이다.
 
바다지역인 산동반도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 상나라는 무역에 뛰어났기 '상'나라고 한 것이며, 백제 또한 무역에 뛰어난 국가였다. 요서지역의 홍산문명을 계승한 우리 동이족은 남하하여 산동반도에 상(은)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그 유명한 공자가 바로 상나라 후손이다. 이 상나라 사람들이 또한 중국인들이 문자로 사용하는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를 개발했는데, 사실 산동지역의 갑골문자보다 오래된 갑골문자가 만주지역에서도 발굴되는데, 갑골문자는 바로 신시배달국 시대 동이족인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 배달국의 신지문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는 고대 산동반도의 동이나라 상나라의 왕족들은 거북의 뼈로 점을 쳤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등의 기록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소를 비롯한 육축을 사육하고 이를 관명으로 사용하였고, 군사가 있을...잡아 하늘에 제를 지내고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점을 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물(丘勿)단제때 단군조선의 국호가 되는 부여와 상나라의 친연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 상나라는 단군조선의 나라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북상하여 중국의 시조가 되는 남방계 ‘하족’이 중원에 정착하기 전에는 본래 중국대륙 전역이 동이족의 활동지역이였고, 몽골.시베리아.만주.연해주.산동반도.한반도 등 북방지역은 동이족의 터전이였다. 단군조선(부여)의 적통을 계승한 고구려의 다물정신과 부여를 자처하는 백제의 집중적인 중국대륙 진출의 목적은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고토회복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백제의 정복군주 근초고 황제가 태자 근구수를 통하여 마한정벌에 군대를 파견한 왜왕에게 감사의 표시로 하사한 칠지도(왜왕의 위치=백제 태자의 위치에 불과한 백제 위성 국가에 불과했음을 칠지도에 기록된 내용이 증명하고 있다) .백제 근초고왕시대와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신공황후가 왜군을 한반도를 침략하여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과 신라를 정벌하고 점령한 한반도 남부지역을 백제에 선물로 주었다.”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인데, 이러한 내용은 연대도 360년이나 앞선 내용으로 온조백제초기인 온조왕 시대의 내용으로 연대적으로 벌써 모순이며, 당시 문화적으로나 정치.군사적으로도 미약했던 <왜>가 백제의 상국인양 기록된 것도 모순인 것이다.
 
일본 신공왕후와 관련된 임나일본부설의 역사적 사실은 근초고왕이 마한(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정벌할 때, 마치 미국이 이라크 파병을 한국에 요청한 것처럼, 백제가 왜에 요청한 왜군이 백제의 마한정벌에 참여한 내용이며,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적 유물은 근초고왕이 참여한 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왜왕에 하사한 ‘칠지도’다. 즉, ‘칠지도’에 표기된 핵심내용은 “제후왕에게 하사한다”는 ‘공공후왕’(功公) 이다. 칠지도를 하사한 존재도 근초고왕이 아니고, 근초고왕의 아들인 태자다. 즉, 당시 왜왕은 레벨상 백제 태자와 맞먹을 만큼 백제보다 국력이 낮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당시 왜는 백제의 왕족들이 파견되어 왜문명을 발전시킨 백제의 분국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또한 일본천황이 꽃을 바치는 것을 '공화'(功花)라고 하는데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 서기668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 땅의 백제 사람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써 끊어 졌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다 말인가?"하고 탄식했다. 일본의 백제사람들에게 백제는 본국이였다. 서기 670년 일본열도에서 백제인들은 '일본'이란 국호로 새로 태어난다. [일본서기] 등의 역사서 또한 대륙과 한반도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일본열도 중심의 역사관으로 수정편집한 나머지, 후대 일본 역사가들에게 혼란을 주고 [임나 일본부]설을 주장하는 등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한전(韓傳)]에는 마한 50여국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백제(온조백제)도 그 중의 1나라로 적혀 있다. [삼국지전-위지]에서 [韓]이란 마한을 총칭한 말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온조왕이 북쪽의 말갈과 동쪽의 낙랑 때문에 나랏일을 살필수 없어 한수 남쪽 하남 위례성으로 내려갔다... 온조의 신하가 한산 부아악으로 올라 갔을때 북으로는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큰 산이 막혀있고 서로는 대해가 닿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이 버이니, 이보다 좋은 천험의 요새는 없는듯 합니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위치상 명확히 “서로는 대해가 닿아있는”(중국대륙으로 해석하면 서쪽으로는 바다가 없음)서울의 한강를 나타내는 문헌내용 중 동쪽의 낙랑은 한반도 동북쪽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제후국 최씨 낙랑국을 의미한다. 자 그럼 온조백제가 터를 잡은 마한지역의 ‘하남 위례성’이 왜 한강변인지를 또한 고대 문헌내용을 통해서 검증해 보자.


[후한서 동이전조]에 “처음에 조선왕(하북성 창려에 수도를 두었던 번조선)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그 무리 수천인을 이끌고 해로로 달아나 마한을 쳐 이를 이기고 자립하여 한왕이라 하였다. 그 후 준왕의 후사는 끊기고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이며, 우리 나라 고서인 삼국유사 마한조에도 기록하기를 “위지에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이 궁인과 좌우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마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라 하였는데 이 여러 고문헌은 다 준왕이 쥐나인 위만에게 쫓기어 남쪽의 한(마한)의 땅에 와서 한왕이 되었다는 기사를 말하고 있다.  


단군3조선

번조선 준왕이 바다 건너 마한으로 도피


다만 [삼국지- 위지]에는 준왕이 남래하여 처음으로 마한국을 세웠다고 하였고 후한서에는 준왕이 남래하기 이전에 그 곳에는 이미 마한이 있었다고 한 점이 약 간 다른 점이다. 내용 중[해로를 따라, 바다를 건너]는 중국대륙에서 바다를 건넜다는 의미로 본래 단군의 3조선 중 ‘마한’에 해당하는 한반도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군3조선 중 한반도 지역에 속하는 ‘마한’에 대한 고대 중국문헌의 기록들을 가지고 중국대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오류를 민족사학자들이 간혹 보이고 있다.
 
중국대륙에도 한성과 위례성이 있다.
그것은 한반도 백제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여 지배한 지역에 지명을 정했다고 보아야 맞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나 조상들이 떠나온 지역명을 이동하거나 진출한 지역에 정했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여'라는 지명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전통성을 지키기 위해 백제인들이 떠나온 터전과 조상들을 의미하는 '부여'을 오래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주기위함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고대문헌들을 비교분석하면 온조백제가 터를 잡은 지역은 한반도 지역(수도는 한강이남 위례성)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도 서울 한강지역인 풍납동의 백제 풍납토성은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부]라는 한자가 기록된 유물을 비롯하여 다량으로 출토되는 3세기 중반 이후 백제초기 교류했던 서진(西晉)∼동진(東晋)대의 도자기류 등은 3세기 중국화폐인 오수전을 바탕으로 도안하여 새긴 오수전문(五銖錢文)도기들과 함께 궁성터와 연못 등 한신대 국사학과팀의 발굴작업을 통하여 초기 백제왕궁임이 명백한 유물들이 발굴된 바 있고, 흙으로 지은 토성이다.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했다.…(한)강 따라 둑을 쌓아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 당시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은 본래 백제인들이 쌓은 성이라기 보다는 한반도 마한인들의 성을 비류백제가 온조백제와 합류하면서 강성해진 백제가 서해와 중국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인 한강을 수도로 정하면서 마한인들의 성을 초기
백제성으로 삼았거나, 당시 다수계층에 속한 마한인들의 축성법으로 쌓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들은 내용에 있어 초기 백제인들과 마한인들의 문화가 혼합된 상태였다고 추정된다.
 
또한, 황제가 승하할 때 표현하는 ‘붕어’라는 표지판이 기록된 공주 무녕왕릉 출토유물과 백제왕 ‘창’이라는 이름이 명확히 기록된 위덕왕의 유물이 부여에서 출토된 점이 또한 고고학적으로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출토되리라 확신한다.
 
 
땅속에서 출토되는 고대 유물들은 거짓없이 있는 그대로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유물도 신뢰하지 못하겠다면 역사연구할 자격도 없다 할 것이며, 자신들의 주관적 관념이며 고집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풍납동 토성발굴현장. 2008년 3월부터 그 동안 발굴비용과 지역민들과의 충돌문제로 중지된 발굴작업이 국립 문화재 연구소와 한신대 발굴팀에 의해 재개된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발견당시 국가의  수도성이 아니라, 개인의 성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수도성에 버금가는 엄청난 유물들과 유적지들이 발굴됨으로써 초기 온조백제의 수도성임이 드러났다.

풍납동 토성에서 발굴된 초기 백제유물 청동초두. 백제문화의 상징인 백제향로에서 보여주는 여성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청동초두 또한 백제향로처럼 제사용 용기가 아닌가  추정된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수막새-초기 백제시대 유물에는 다수인들이었던 마한문화의 흔적도 혼합되어 출토된 유물들고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역사적 인식를 전제로 해야 백제가 중국의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중원 깊숙이 진출했으며, 동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과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적통임을 내세우며 중국대륙의 패권을 두고 벌이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치열한 전쟁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백제의 중원진출과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동성황제' 편이 게재됩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4/25 [15:57] 수정 삭제  
  민족정론지라고 주장하던 플코가 드디어 일제가 만들어 놓은 반도사관에 물들은 이상한 이론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는군요. 이 글은 현강단사학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한 글입니다. (백제의 해양 진출은 빼고)

풍납동 유적은 고구려 유적으로 봐야 합니다. 우선 피라밋이 그렇고 토기의 大夫라는 명칭도 고구려 관직입니다. 백제라는 명문도 없는데 백제 유물이란 한 것은 강단사학이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필자는 백제가 두가지 무덤 양식을 했다고 보시는지 즉 풍납동 피라밋과 무녕왕릉의 양식이 전혀 다른데? 그건 어떻게 설명하렵니까? 그것도 비류백제와 온조 백제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까?

백제 개로왕 때 쌓은 제방은 대륙의 하남성 숭산(소림사가 있는 지역)까지 중국 황하주변의 제방인데 그걸 한강에 쌓았다고 하는 것이 식민사관의 이론입니다.

백제라는 나라는 비류계와 온조계가 돌아가며 왕위에 오르는데 비류백제가 대륙에 게다가 만주에? 따로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 아닙니까? 그럼 비류계 백제왕들은 뭡니까?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 분석은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과학적인 증거입니다. 강단사학계는 무서워 이것을 쉬쉬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란 책을 사서 보세요)

고대사는 정답이 없어 어떤 주장을 하셔도 무방하나 너무 개인의 생각만 가지고 역사 칼럼을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란 유물과 기록이 뒷받침되어야 하거늘 유물 하나만 가지고 그것도 사학계가 엉터리로 발표한 이론을 그대로 믿으면 안됩니다.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유물이 나오면 전부 백제의 것으로 발표하는 강단사학계의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황해를 돗단배로 건넌다는 것은 옛날에는 무척 힘든 일입니다. 백제의 해양 건설은 산동성이 중심이지 한반도가 아닙니다. 황해조차 건너지 못하는데 어떻게 22개 담로를 동남아시아에 설치합니까? 담로란 백제가 대륙에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왜(일본의 전신)는 분명 대륙 남쪽에 있었습니다. 박창범교수의 일본서기 일식분석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백제가 왜에 설치한 담로는 현 일본열도가 아니고 대륙 남쪽입니다.

대륙과 한반도 사이의 해류를 놓고 보더라도 백제는 22개 담로를 설치한 해양제국 백제는 분명 대륙에 있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출발해 해외에 담로를 설치했다는 이론은 단지 추정일 뿐입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돗단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는 실험을 했으나 그건 불가능하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식민사학계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반도국가인 로마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봅니다.

여하튼 이런 식민사학적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풀코에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식민사학의 엉터리 이론을 그대로 올리는 풀코는 '민족정론지'라는 이름을 쓰면 안됩니다. 앞으로 '진실을 밝히는 뉴스'라는 타이틀을 달면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찾기라는 코너는 다른 이름으로 '식민사학 고수'라고 바뀌어야 합니다.

교과서에 있는 역사 이론 보려고 독자들이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다른 언론에서는 다루지 못하고 있는 민족사학의 참신한 이론을 알기 위해 독자들이 들어옵니다.

어서 빨리 풀코가 제자리를 찾기 바랍니다. 이런 일제의 식민사관을 옹호하는 글을 계속 올리면서 독립군 신문이라고 자칭해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중립사학 08/04/25 [17:00] 수정 삭제  
  잘모르시면 가만히 계세요.
저런 내용은 중립사학에 속합니다.
중립사학 08/04/25 [17:08] 수정 삭제  
  중국을 대륙이라고 표현하는 자는 대부분 대륙병환자더군요.
중국이 어찌 대륙입니까?
국어사전에 대륙을 뭐라 하는지 찾아보세요.
아시아대륙 아프리카대륙. 이럴때 쓰는 말이 대륙입니다.
중국은 대륙이 아니에요.

중국대륙이라고 쓰는 자들은 중국땅이 대륙만큼 크고 그 땅이 부러워 우리역사를 자꾸 중국에 있었다고 몰고가는 사대사상에 물든자요 대륙병환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나는이 08/04/25 [18:11] 수정 삭제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사학이네요. 대륙사학도 아니고 반도사학도 아니고 중립사학?
여러분들은 어디서 들어보셨나요?

중립사학님 이야기를 좀 함부로 하시는 것 같네요.
중국에 中자도 모르시는 분이, 중국이 어떻다 대륙병이 어떻다 하시는게,,,, 참,,,
적당히 하시고, 들어가서 발씻고 주무시길 바랍니다. 이런데 오지 마시구요.
독자큐 08/04/25 [21:18] 수정 삭제  
  성훈 칼람의 글 지금까지 관심깊게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오늘 보니 실망 그 자체입니다.
자신만 옳고 남의 글은 터부시하는 경향이 한쪽으로 흘러갈 징조이고 왜곡된 시각을 드러낸 산물이라고 부정이라고 하겠지요?
역사를 쓰다보면 이 사람 주장도 무게를 둘줄알고 잘못된 글은 비판을 해야 옳은 게 아닐까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줄 곧 자신만이 쓰는게 옿다는 방식은 버리세요
각자 소신에 의해 글을 써야지 성훈씨 주장에 배치되는 글은 이빨을 드러낸다면 진실을 밝힌다 할 수 있나요.
중립사학 08/04/26 [02:02] 수정 삭제  
  중립사학을 처음 듣는다고 말하는 자는 공부를 한참 더 ㅎ해야 합니다.
듣도보도 못했다는 말하는 것은 난 무식하네 라고 선전 하는겁니다.
조용히하면 무식하다는 말은 안들어요. 지나가려면 조용히 지나가셔 무식한 자야.
중립사학 08/04/26 [02:44] 수정 삭제  
  저기 성훈칼럼니스트님.
민족사학을 표방한다는 자가 "돛"을 "돗"으로 쓰는 것을 보니...ㅋㅋ 맞춤법좀 잘 하시죠.
하려던 말은 이것이 아니고.

성훈씨는 정작 반도사관에 물들어 있습니다.
백제가 한반도에서 중국땅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는데 무슨 돛단배를 타고 건너갑니까?
백제의 선박건조기술이 겨우 돛단배수준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반도사관론자는 바로 성훈이군요.
누가그럽디까? 백제가 돛단배밖에 못만든다고.
모두 성훈같은 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백제의 배 만드는 기술은 세계최고였습니다.
민족사학이다라고 표방하면서 실은 강단사학자인사람 많습니다. 대표적인사람이 저기 저 성훈이라는 자입니다.

이 사람이하려는 말은 결국 백제는 서해바다를 건널 배를 못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윤복현기자는 한국땅에서 저 멀리 동남아시아에까지 백제가 배를 타고 영토를 건국하였다고 말하는 것이고 성훈은 백제는 배를 타고 거기까지 갈 능력이 못된다고 말하는 것이니 강단사학자는 바로 성훈이군요.
윤복현 08/04/26 [22:17] 수정 삭제  
  평소 존경하는 성선생님 너무 편향적인 관점이 아니신가 싶습니다..성 선생님께 주장하시는 대륙사관과도 위반되지 않습니다. 즉, 저는 백제를 한반도에만 가두고 있지도 않고 있으며, 고대 문헌들과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와의 관계성을 전제로 한반도와 중국, 일본열도,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여 경영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성훈님:실제로 한반도에서 돗단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는 실험을 했으나 그건 불가능하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라는 논리를 펴시는데, 고대인들이 그렇게 단순한 사람들도 아니고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대담하고 대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리고 고대부터 이미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초원길로 대변되는 '실크로드'가 있었다면 바다길 또한 아라비아에서 한반도까지 연결된 해양 실크로드가 있었습니다.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했던 해양을 장악했던 백제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가 역사연구를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그럴듯한 논리로 백제를 중국에 밀어넣고 한반도는 신라땅이라는 차원의 신라우위의 신라사관을 내세우시려는 겁니까?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라고 했습니다. 땅속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유적유물들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빼도박도 못하는 근거자료입니다. 그런 고고학적 근거자료까지 자신들의 논리에 안 맞는다면 부정하실 겁니까? 그렇다면 그건 반도사관적 역사왜곡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역사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할 진실의 문제이지, 집단과 국가와 민족적 차원에서 결코 인류적 범죄차원에서 왜곡조작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토요일 역사모임에 평소 성 선생님께서 초대를 해서 약속을 지키기위해서 개인적으로 장소에 도착하여 전화를 했더니 저같은 사람은 올 곳이 아니라고 했지요? 정말 실망했습니다. 대화를 통하여 오해를 풀수도 있고 논쟁도 할수 있는 문제인데,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습니까? 기본적으로 역사연구 등 학문하는 사람이란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고 상대가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맞는 논리라면 수용도 해야 서로 융합해서 진실로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사학이라면서 반도사학자들과 같은 사고와 자세를 지향한다면 어떻게 반도사관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의사소통이 안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 해서 씁쓸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습니다. 대화와 이해를 통하여 상대에게 배울 것은 배우고 수용할 것은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의 진실도 짝이 맞추어져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 민족의 '한'사상입니다. 반도사관취급하며 기사를 내리라는 식의 주장은 억지이며 언어폭력이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논리와 주장이 다르다면 반박하고 근거자료를 전제로 비판하면 됩니다. 역사기사하나때문에 인간관계까지 단절되서야 어디 역사기사 쓰겠습니까? 반도사관이라 매도하면서 상대의 주장이나 논리를 거부하겠다면 배타주의적이고 폐쇄주의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역사논리만 강요하려한다면 언론사를 개인의 역사사이트 정도로 생각하는 편협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플러스코리아] 배너에 무엇이라고 쒸어져 있습니까? '진실을 밝히는 뉴스'입니다.......역사연구목적 또한 매도되고 음해당한 역사적 내용의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충분히 여러가지의 주장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두가 공감하는 근거자료들과 내용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역사의 진실은 쉽게 드러나겠지요. 그리고 여러 사람의 작업들을 필요로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구요..정말 이번에 어이없는 경험을 하게 되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역사의 진실 08/04/27 [01:58] 수정 삭제  
  이른바 민족사학자라 자처하는 무리들 중에는
자폐증과 열등감으로 똘똘뭉친 멍청한 고집탱이들과
비정상적인 신라 지상주의에 물든 경상도 지역주의자들이 엄청 많다.

그러다보니, 학문을 논하기 이전에 정신치료부터 먼저 받아야 할
병리적 인간들이 북적댄다.

오래전부터 이 플코를 사랑했지만, 오직 '성훈'이라는 미친 작자 때문에
이 플코에 엄청난 실망을 해왔던 바, 드디어 스스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성푼 같은 놈들부터 없어져야 민족사학이 산다.

윤복현 기자님 건필하시길,,,
성훈팬 08/04/27 [05:00] 수정 삭제  
  당나라 = 서유럽연합군
백제 = 중동, 이집트, 인도, 남중앙아시아 유역
가야 = 인도 유역 (백제에 합병)
신라 = 현 중원대륙
왜 = 대륙 동남부, 대만, 필리핀, 베트남, 동남아시아 유역
유뒈인 = 허구의 나라인 로마가 아니라 백제에 멸망당해 이퉤리, 스폐인으로 건너가 기생하며 살던 혼혈 떨거지 개잡족들.
몽골 = 스칸디나비아, 헝가리, 불가리아, 터어키, 러시아, 서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북 중앙아시아. (고려로 부터 독립)
고려 = 만주, 한반도, 동 시베리아, 현 몽골, 중원, 티벳, 인도 유역, 남 중앙아시아, 중동 유역, 이집트 유역
고구려 = 몽골, 시베리아, 티벳, 북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스칸디나비아, 불가리아, 터어키, 헝가리를 총괄하는 5경 연방제의 징기스칸을 능가하는 거대제국
만주와 한반도 =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설한 한민족의 어버이인 지역이며 독자적인 강대 군사력과 주권을 소유하였음. (고구려말 천리장성의 서쪽에 고구려가 있었는데 그전엔 상당기간 고구려, 백제와의 연방국임)
성훈 칼럼리스트 08/04/27 [09:56] 수정 삭제  
  백제에 대한 역사의 진실을 다음 주에 올리겠습니다. 일일이 댓글에 반박하지는 않겠습니다. 사학계가 만들어놓은 가짜 이론에 현혹되어 있는 여러분들이 참으로 측은해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제가 해외 담로를 건설한 것은 산동성 즉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한반도에 있는 백제가 황해를 건너 그런 담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겁니다.
돛단 배는 연안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연안해류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항해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당시에 황해를 횡단해서 건넌다는 것은 해류 때문에 엄청 위험한 일로 대규모 선단이 황해를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백제 패망 시 해양강국이라는 백제와 당나라 수군이 전투를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기록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그런 사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군력이 강한 백제는 육상공격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해전으로 붙는다면 백제가 질 리가 없지요.
소정방의 13만 대군은 한반도에 오지 않았습니다. 13만 대군이면 보급부대까지 30만으로 봐야 하는데 그 병력이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왔다고 보는지요? 배가 몇척이 있어야 하는데....
개로왕의 쌓은 제방의 서쪽 끝인 숭산은 한강변 검단산이 아니고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 숭산입니다. 풍납토성은 고구려 유물인데 백제 것이라고 사학계가 거짓말을 한 겁니다.
경상도 신라가 아니고 신라는 한반도 동신라 대륙 서신라가 있었습니다.
백제는 전라도 충청도가 아니고 산동성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경상도 신라를 옹호하는 성훈이 전라도 백제를 무시하고 있다고 호도합니다. 난 정치학 전공이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도 모르고, 그저 역사적 진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정치 때문에 역사를 바꾸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반도는 고구려 영역이었다가 지증왕 때부터 동신라가 들어서 만주까지 지배합니다. 고구려는 만주가 주강역이 아니고 하북성과 내몽고가 주 강역입니다.
대륙에 있던 백제의 일부가 한반도 서부에 들어왔던 흔적은 있습니다만, 사서의 기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중앙정부가 아니고 지방정부 형태로 보입니다.
백제는 대륙 동부(산동성)에서 활동하다 산동성에서 패망합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 주 연재를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까지 이상한 댓글을 다신 분들은 다음 연재를 일어보고 내 의견이 맞다면 댓글로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너무도 많은 역사의 진실이 반도사관을 추종하는 사학계에 의해 국민들에게 호도되어 왔습니다. 다 이병도의 짓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내게 반도사관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됩니다. 혹시 이병도의 후학들이 저를 음해하라고 시키던가요?
이젠 이 글에 안 들어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중립사학 08/04/27 [11:33] 수정 삭제  
  아주 강단이라고 말을 하시죠.
백제가 왜 돛단배밖에 못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백제의 선박제조기술은 세계최고이었습니다. 노를 저어 어디든지 갈수 있기에 해상을 통해 동남아까지 갈수있었던 것이죠.

성훈씨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백제는 돛단배밖에 못만들었다는 강단사학의 주장을 하고 있군요.
중립사학 08/04/27 [11:49] 수정 삭제  
  성훈씨는 백제의 영토를 저쪽 지나인들의 영토에 가져다 놓기 위하여
우리백제의 선박제조기술이 세계최고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땅덩어리만 넓으면 다입니까?

한반도에 도읍을 하고 그곳에서부터 영토를 확장하여 세계최고수준의 배를 타고 동남아까지 확장하였다는 것과 산동성에서 출발하여 육로를 통하여 지나 동쪽지방에 있었다가 사라졌다는 것을 비교한다면 무엇이 더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인지 성훈씨는 잘좀생각해보시오.

영토를 넓히기 위하여 문화과 산업기술이 하급수준에 머물렀다고 하는 역사해석은 고구려에 해군이 없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같소이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4/27 [12:52] 수정 삭제  
  동력선이 없었던 옛날에는 목선에 돛과 노 둘 다 있었습니다. 긴 항해는 돛을 이용해야 하고 전투 상황이나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노를 사용합니다. 그 의미의 돛단 배이지 고기잡이 돛단 배가 아닙니다.
선생은 한반도부터 동남아까지 노를 저어 갔다고 보시는지? 참 백제 사람들은 팔 힘도 강했습니다. 원 억지를 부려도 유분수지!
난 영토를 넓히자는 것도 아니고 신라사관으로 내 마음대로 개인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난 단지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제를 좋아하는 분들은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믿으세요. 믿는 건 자유입니다.
중립사학 08/04/27 [19:20] 수정 삭제  
  배는 노와 돛 두개 다 달아놓는겁니다.
순풍이면 돛을 달고 완전한 역풍이면 노를 젖고...
이게 맞는 말이지 어떻게 노만 저어서 갑니까?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말도안되는 논리는 피지 마세요.
성훈님 바보 08/04/30 [03:47] 수정 삭제  
  이 보쇼~노 젖어서 언제 가나요? 고대인들은 돛을 달고 큰 바람타고 칫대잡고 가는 겁니다.물론 상황에 따라서 노도 저겠지요.....미쳤나요..노만 젖어서 어느 세월에 일본과 동남아를 가나요~순풍에 돛 달고 슝~~~~~~가는 겁니다이~
양사마 08/04/30 [13:06] 수정 삭제  
  백제가 그리스시대로부터 수백년 이후의국가고 , 로마시대와 동시대였던 그 백제가 돛단배를 쓰고 해류로 향해를 했다고요? 장난하십니까? 그리스때 돛단배 띄우셨다고 하실분이네...
강단 쳐죽여라 08/05/14 [14:24] 수정 삭제  
  들은...받드시...눈을 뽑고 혀를 뽑아....저자 거리에 내놓아서....이땅의 백성을...역사를 부정한 조상을 부정한 댓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것이다....식민 사학자 개인과 단체...기관지는 반드시 그 목을 쳐야만 한다!!!!! 크하하하.....~~~~~개 자슥들...똥을 만들어서...일본 쪽바리들한테....아가리에 쳐 넣어 버릴 개 쓰레기 새끼들....강단 식민사학자 개새끼들.....크하하하...
신지철 08/05/15 [22:22] 수정 삭제  
  다 좋습니다. 다 좋다 이겁니다. 저도 현 삼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한 실업계 고등학생으로써 모든것을 인정합니다. 근데 이거는 뭐하자는 짓이죠? 돛단배? ㅋㅋㅋ 지나가던 개들이 웃을 일입니다. 돛단배 수만척은 만들었나 보지? ㅋㅋㅋㅋ 아주 그냥 하이개를 하십시오.
밝달 09/12/11 [02:38] 수정 삭제  
  성훈님은 분명 백제가 한반도가 있었다고 한것에 대해 분개해서 얘기하시는데 뭔 돛단배니 동력배니 하며 화제를 다른곳으로 끌고 가는지...성훈님이 강단사학이라고???ㅋㅋㅋㅋ.어이 없어.성훈님의 글을 일고 좀 판단합시다.무조건 자기글을 욕하였다하여 시비도리 따지지않고 아무 근거도 없는 욕을 하시지 마시고.성훈님의 글이 진짜 한민족과 력사를 비방하고 축소왜곡하는 글이라 생각하시요?중국과 일본은 없는 력사를 만들어내고 남의 력사를 빼앗기까지 하여 부풀리는데 거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고 성훈님의 대륙백제설은 강단사학이라고 싸잡다니..진정 강단사학이 대륙백제설을 주장하고 학교들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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