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KBS의 '백제 위덕왕' 편에 숨겨진 비밀

중국과 일본의 외교적 관계에 대한 거시적인 측면을 분석못한 아쉬움

홍순주 위원 | 기사입력 2008/04/21 [14:13]

KBS의 '백제 위덕왕' 편에 숨겨진 비밀

중국과 일본의 외교적 관계에 대한 거시적인 측면을 분석못한 아쉬움

홍순주 위원 | 입력 : 2008/04/21 [14:13]
이번 4. 19(토) KBS 한국사 傳에서 방영된  백제 위덕왕 시리즈 2편을 통해 지난 금동 대향로의 제작 목적과 사리함의 정체 발견보다도 더욱 다양한 소재 들, 즉 위덕왕의 선친에 이은 아들의 사망 사건, 왕흥사 및 불탑 건설, 일본의 불교 관련 기술자 파견과 이와 관련된 사천왕사 및 금강조 건축회사 소개, 그리고 본 연구회가 4년전에 주장한 법륭사 동원 몽존의 관음 비불상의 정체가 성덕태자가 아닌  성왕의  등신불이다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 밝혀낸 것은 매우 값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번 다큐에서 세부적인 독립된 사건에 대한 미시적 추적은 뛰어났지만  당시 백제가 직면하고 있었던 대 중국 및 대 일본의 외교적 관계에 대한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파악은 기존의 국내 사학계의 제한적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 백제와 신라와의 동맹을 파기한 신라와 전쟁에서 아버지와 아들를  잃은 백제 위덕왕때 제작하여 백제분국 일본으로 보낸 당시 백제의 조각기술과 조형미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1M 80cm의 [백제 관음상]은 나무로 조각하여 금칠을 한 모양으로 불교를 숭상했던 위덕왕의 아버지 백제 성왕('불교의 법륜성왕'을 지칭)의 얼굴모양을 형상화 했다 한다. 백제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의 불교화를 계승하여 일본의 불교화에 노력하였다.

먼저 대 일본 관계에서 살펴 본다면  불교를 전파하기위한 노력으로 여러 기술자를 단순히 파견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당시 백제와 왜국과의 외교적 관계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백제 위덕왕 시절에서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백제의 수도인 공주에서 제 22대 문주왕과 그 아들 제 23대 삼근왕이 모두 피살되어 왕의 혈통이 없게되자 일본서기에는 왜국에 君(장관, 도독)으로 나간 곤지(백제 제 21대 개로왕의 이복동생)의 둘째 아들(이름이  말다(末多)이 부친 곤지의 결정으로  AD 479년 14살의 어린나이로  왜열도 축자에서 병사 500인을 거닐고 한반도 공주로 건너와 백제국 왕위에 오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백제 24대 동성왕이다.

▲ KBS역사 스폐셜 캡쳐자료.  해상제국 백제의 담로지역
 
동성왕 9년 (AD 487년)에 임나지역(현 대마도)의 담로왕이었던  기생반숙미가 대마도에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계 유민을 전부 장악하여 삼한왕이라고  자칭하면서 백제의 군량 수송을 방해하고 보급품을 횡령하자  동성왕은 고이해 장군을 급파하여 그 세력을 토벌하고 임나 지역을 백제의 도왜 자유 이민항으로 회복한다. 그러자 그 당시 일본 왜왕인 고구려계 현종이 군사를 이끌고 임나지역으로 대항하러 오자 동성왕이 나가 싸워 이들을 물리치고 현종으로 부터 전쟁배상금으로 나라 지역의 반여전(현 나라현 사쿠라이시에서 가시하라궁 사이)과 경도 지역의 가황소전(현  대진시 헤이안 신궁 근처)을 식민지로 할양받는다.


동성왕은 이들 왜국 식민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아들 동성자 언과 동성자 막고를 차례로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고 그후 무령왕 시절에는 일궁부라는 백제 총독부를 설치하여 자신의 아들 사아군을 파견하면서 야마토 왜국을 속국으로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백제와 왜국과의 정치 외교적 관계에서 무령왕은 일본에서 곤지 밑에서 함께 자랐던 동생 벌되는 당시  계체 왜왕(응신의 5세 손)에게 자신의 딸 수백향을 보내어 왜국을 부마국으로 만들고 이러한 결혼 정책을 통해 양국의 관계를 공고히 하게 한다.

이러한 양국의 정치적 관계에서 성왕때에는 계체왕의 아들인 흠명왕을 통해 군사지원을 받거나 불경을 전달하는 것이며 위덕왕때는 왜국에게 선진화된 백제의 불상 및 사찰 건축자들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다큐에서는 중국에 북주세력이 강해지자 외교 사신을 보냈다고 간단히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위덕왕 시절 중국 대륙에는 백제의 식민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  중국 관계에서 다시 살펴보자면 앞서 동성왕 시절 왜열도를 속국으로 만든 후 그 다음해  근초고왕 시절에 완성한 하북성 일대와 산동반도에 있었던 대륙백제가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 의해 공격을 받자 동성왕이 군사를 직접 이끌고 산동반도 지역으로 들어가  AD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간 다섯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북위를 망하게 한다.


그래서 동성왕이 AD 4C 말 근초고왕때 이룩한 북으로 요서지역부터 남으로 양자강 좌안까지 대륙백제를 재현한 사실과 그 영토를 지역별로 다스리는 제후와 태수를 책봉한 기록이  중국 사서 남제서에 나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덕왕 시절에도 중국 대륙에서 백제의 식민지가 여전히 존재하였는데 백제 성왕 시절 고구려의 계속된 침략과 신라 진흥왕과의 전투에서 국력이 쇄락해지자  위덕왕 시절 AD 572년에는 고구려 평원왕이 사위 온달 장군을 보내 요서 갈석산 및 하북지방 유림관의 백제 세력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이어서 AD 576년에는 신흥 북주세력이 산동반도 및 회수지역에  있던 북제(백제 식민지)세력마저 물리치고 통합하자 중국에 설치되었던 대륙백제의 기반이 상실되었다.

이어서 AD 578년 양자강 북쪽에 위치하였던 백제의 식민지 광릉군 역시  요서, 산동의 백제 식민지와 분리되어 고립되자 중국 남쪽에 위치한 진(陳)이 쳐들어와 병합시키자 중국 대륙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던 대륙백제는 모두 멸망하게된다.  위의 역사적 사실은 중국 통전에 나오는데 <성 밖에 백제 잔류민들은 차츰 모든 기력을 잃고 돌궐족이나 말갈족으로 투항해나가 흩어졌으며 대륙백제의 왕 부여 숭과 부여씨 군장들은 멸망해 버린 옛 영토로 돌아갈 수 없어서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백제 위덕왕(AD 554~598)이 불교 사찰과 탑을 지워 강대한 불교대국을 건설하려는 염원과는 전혀 다르게 신라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거듭 패하고 선왕들이 이룩한 거대한 대륙백제마저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역사상 가장 위약한 백제의 왕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런 국력의 상실이 원인되어 그후 백제국이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
현 역사 자문위원
김성남 08/07/09 [21:41] 수정 삭제  
  산서성이 요서성이고 광령 또는 광양이 산서성북쪽에 있는것을 만주에 있었다고 그리시는지? 지도를 보시죠.요나라의 연운십육주는 산동성과 그주변 지역이고 요나라의 중심지역은 산서성 즉 요중 또는 요서이고 그 옛날 양맥족의 중심무대인데 연운십육주 오랜 인간의 역사에 비하면 얼마되지도 않는데 교묘하게 숨기고 흐려놓았는데 선생님께서 명명백백하게 훌륭한 역사지식으로 밝혀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중립사 08/12/30 [15:48] 수정 삭제  
  이분도 완전 아마추어구나.
이 언론사는 아무추어중에 실력없는 사람만 데려와서 기사쓰게 하냐?
왜이래? 다들 아마추어같이....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 보성녹차마라톤대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열정의 레이스 시작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