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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비문 훼손-조작의 범인은 일본, 일본왕은 사죄하라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8/30 [08:12]

광개토대왕 비문 훼손-조작의 범인은 일본, 일본왕은 사죄하라

박병역 위원 | 입력 : 2007/08/30 [08:12]

 
[단독보도 제 22편]
일본의 뿌리는 대한민족이며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다 

 [광개토대왕비문]에 광개토대왕 재위 10년 경자(400년)에 기마보병 5만 명을 신라에 파견하여 [한국 땅의] 신라성에 가득찬 왜적을 즉시 항복시켰다. 드디어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임나가라)까지 쫓아가 대마도(임나가라) 신라성의 각 城(성)에 가득 찬 왜적들도 拔本(발본) 索出(색출)하여 즉시 항복시키고, 안라인을 술병하시었다.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의 가장 큰 업적 부분의 왜(倭)와 관련된 기사(記事)의 [비문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와 같이 쪼아서 결락 자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1]. 광개토왕비문 훼손의 범인은 일본이다

[1], [조선상고사]를 저술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광개토대왕 비(碑)는 1876년 청나라 사람 영자평(英子平)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다. 라고 조선상고사에 밝혀져 있다. 즉 신채호 선생은 일본인들이 왜 관련 비문 글자를 도부(刀斧)로 쪼아 내고 역사적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글자가 첨가된 것 같다.」라고 일본인들이 비문(碑文)을 변조한 사실을 지적했다.

[2], [환단고기]를 편찬하신 계연수 선생은 1895년 5월 광개토왕 비문(碑文)을 답사(踏査)한 후 비문을 적어 둔 비문징실(碑文徵實)이 있다. 즉 계연수 선생이 1912년 다시 답사 했을 때 비문(碑文)이 훼손되어 전과 다른 것을 발견하고 1895년 답사했을 때 비문기록을 비문징실(碑文徵實)이라 한다. 비문징실의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2면9행)官兵섭跡而越來攻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城倭滿倭潰城六(제2면10행□결자)被我攻蕩滅無遺倭遂擧國降死者十之八九盡臣率來安羅人戌兵滿假□□倭欲敢戰與훼己呑卓淳(제3면1행)諸賊謀□□官兵制先直取卓淳而佐軍由淡路島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斯諸賊悉自潰(제3면2행□결자)遂分爲郡安羅人戌兵

(제2면9행)[고구려]의 관병이 [벡제국 땅이었던] 越(월)까지 추적하여 공격해 오자 황급히 달아나는 [왜적]을 등뒤까지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까지 쫓아가 城(성)을 발본 색출하여 즉시 성을 항복시키고 安羅人(안라인)이 戍兵(술병)하도록 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대마도] 신라성의 □(성城)에도 倭(왜)가 가득했으나 왜를 궤멸시켰는데 6城(성)□□□□□□을 공격하여 소탕 궤멸시켜 살아남은 왜적이 없었다. 일본 왜가 드디어 거국적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10중 8,9는 다 죽었다. 신하는 데려 오고 안라인을 술병하도록하였다. 

 假□□에 가득찬 倭(왜)의 훼己呑(훼기탄)국과 卓淳(탁순국(큐슈 현재多久타구)의 모든 적들이 공모하고 감히 전투하고자 하기에 관병 □□가 먼저 卓淳(탁순)국을 제압하고 佐軍(좌군)은 淡路島(담로도:일본 瀨戶內海 동부에 있는 섬, 兵庫縣에 속함)를 경유하여 단마(但馬(兵庫縣의 북부)에 도착하고 右軍(우군)은 難波(난파(大阪)를 경유하여 武藏(무장(那良의 春日野)에 도착했다. 광개토대왕은 직접 竺斯(축사:일본의 北九州)에 도착하니 모든 적들은 스스로 다 궤멸되었다. (제3면 2행 1행□□□□□□) 대왕은 드디어 [일본 北九州]의 郡(군)을 나누어 安羅人(안라인)이 戌兵(술병)하도록 하였다.

[환단고기를 저술하신 계연수] 선생님의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의하면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적혀 있는 문구는 광개토왕이 경자(400년)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일본의 응신조(應神朝) 왜(倭)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후 임나(任那:대마도)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하여 왜(倭)를 통치하였다. 임나연정 시대에 일본열도 왜는 대화왜(大和倭), 구주왜(九州倭)로 갈라져 임나(任那:대마도)에 세워진 임나연정(任那聯政)은 고구려왕의 통제를 받았다.

대마도의 신라, 고구려, 가야, 구주왜, 대화왜를 정복한 내용이다. 비문장실을 만든 계연수님은 만주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 찾기 위해 항일투쟁 중에 일본 밀정에 붙들려 온 몸이 절단된 채 시신(屍身)이 압록강에 던져진 애국지사이며, 민족사학자이시다.   



▶大韓國人아.! 일본은 왜 광개토비문을 훼손 했는가?

 

▲     © 박병역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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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추종하는 한국의 얼빠진 일부 사학자들은 계연수 선생이 항일투쟁을 하다가 죽은 애국지사이기 때문에 애국심이 지나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비문징실을 위작(僞作)했으며, 광개토왕은 일본열도를 정복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400년에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비문장실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살펴본다. 앞절에 나온 "관병이 추격하자 황급히 달아나는 왜적들을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쫓아가서 .후략" 문구 중 임나가라(任那加羅)는 대마도(對馬島)로 밝혀졌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붙어 있자 임나(任那)는 경남 김해지역 이고 가라(加羅)는 경상북도 고령가야(加耶)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환단고기에 임나(任那)는 대마도(對馬島)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임나가라는 대마도(對馬島)가 분명하고, 경남 김해 지역이 아니다.

[3], 광개토대왕의 비문 수 종류를 비교 연구한 이진희 선생은 일본인들이 광개토대왕비에 석회를 발라 비문(碑文)을 조작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비문은 4면으로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 시조의 탄생과 대비려(對碑麗) 관계 기사(記事)가 318자, 백제에 대한 기사(記事)가 366자, 倭(왜)에 대한 기사(記事)가 382자, 부여(夫餘)에 대한 기사가 95자, 왕능 수묘(守墓)에 관한 기사(記事)가 641자 라고 밝혔다.

[2]. 일본은 왜 비문을 훼손하고 글자를 조작했는가?

상기의 [1~3]의 내용을 살펴보면 광개토비문은 1883-1884년경 일본 참모본부의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 일본 중위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처음 일본으로 가져왔을 때는 비문이 훼손되지 않고 깨끗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일본 중위가 가져온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원본에 광개토대왕이 일본을 멸망시킨 치욕적 내용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에 비문 글자를 쪼아 훼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청일전쟁(1894-1895년)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광개토비(碑)를 일본으로 운반까지 계획했다고 한다. 양대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며 일본 관련 중요 글자만 훼손하여 위조된 글자에 석회로 발라 탁본한 흔적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 후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한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 금서룡(今西龍)이 1913년 중국에 출장가서 이 비(碑)를 답사한 결과를 "大日本時代史" 부록에 실으면서 "제2면 말행(10행)은 문자를 넣을 만한 여지가 없고, 제3면 제1행은 탁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비문(碑文)에는 제2면 10행의 문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고, 제3면 1행에도 결락되지 않은 글자가 있었다. 금서룡은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의 글자는 이미 글자를 알아 볼 수 없이 결락되어 "탁본(拓本)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했다. 금서룡은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며, 우리역사 왜곡의 주역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금서룡(今西龍)이 저술한 "大日本時代史" 부록은 금서룡이 비문을 훼손한 사실을 여실히 들어 낸 증거가 된다. 

   一自渡海所至擊破倭人倭人百濟之介也百濟先與倭密通使之聯侵新羅之境..中略.. 以環時則百濟新羅駕洛諸國皆入貢不絶契丹平凉皆平服任那伊倭之屬莫不稱臣」

[환단고기]「광개토대왕은 한번은 바다를 건너가서 倭人(왜인)를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가 개입하고 있었는데 백제는 먼저 왜와 밀통(密通)하고 연합하여 신라의 국경을 계속 침범하였다...중략.. 광개토왕이 친히 바다 건너 일본의 정벌이 끝난 후에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다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契丹), 평양(平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외(伊倭)는 물론 신하로서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상기 본문의 임나는 대마도 왜이고 이세(伊勢)는 구주왜(九州倭)를 지칭한다. 따라서 "임나(任那)와 이왜(伊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문구는 대마도왜(對馬島倭)는 물론 구주왜(九州倭)가 모두 다 광개토왕에게 복속된 속신국이라는 뜻이다. 

  일본인들은 송서(宋書) 왜전(倭傳)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의 마지막 왕 무(武)는 동쪽의 모인(毛人) 55개국, 서쪽 66개국, 북쪽 95개국을 복속시켰다고 주장하고, 자칭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의 기록을 한국 땅을 다스렸다. 라고 주장하였다. 

    [ 興死弟武立自稱 倭, 百濟,新羅,任那,加羅. 秦韓, 慕韓. 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이때는「왜왕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이 되어 자칭 왜라 칭한 것은 일본 열도 속의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의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즉 자칭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한 왜왕(일본) 무(武)의 영역은 한국 땅이 아니고, 지금의 일본 본토이고,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을 다스렸다는 임나가라 또한 한반도 속의 경남 김해가 아니고 대마도로 밝혀졌다. 즉 광개토대왕은 경자(400년) 일본의 응신조(應神朝) 왜(倭)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후 대마도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했던 것이다.

환단고기의 고구려국 본기, 송서(宋書) 왜전(倭傳), 광개토왕 비문(碑文)을 종합하면 광개토왕은 영락(永樂) 10년 대마도(對馬島) 속의 왜를 즉시 항복시키고 안라인을 술병하도록 하고 일본 열도(日本列島) 속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왜(倭)를 모두 다 평정하고 안라인을 술병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계연수 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적혀 있는 비문 내용과 비문은 서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광개토왕 비문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서 결락된 글자는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적혀 있는 글자와 같은 글자가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계연수님이 비문(碑文)의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을 보았을 때 새겨져 있던 글자를 그 후 갑자기 결락된 것은 일본열도가 광개토왕에게 정복당한 사실을 영원히 감추기 위한 일본왕의 술책이었다. 그때 한국 역사왜곡의 주역이던 일본인 금서룡(今西龍)등 10여명의 일인 학자들이 중국을 출장하여 우리나라 사료를 수집 중에 광개토대왕비문을 훼손했던 것이다.

광개토왕비문의 왜 관련 부분의 결손된 글자는 1884-1885년경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의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 대위가 집안(輯安)에서 일본으로 가지고 온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은 훼손하지 않고 원 비문대로 일본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그런데 1889년 6월 "會餘錄(회여록)" 제5집에 게재되어 처음으로 외부에 발표되었는데, 그 쌍구가묵본에는 왜(倭) 관련 부분이 집중적으로 결락되어 있었다.  즉 1895년에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쌍구가묵본대로 광개토왕비의 왜 관련 부분글자를 훼손, 조작하고 비문의 전면에 석회를 발라서 쌍구가묵본을 대량 복사해서 진짜처럼 선전하였던 것이다. 

 [3]. 일본인들이 광개토비명을 훼손한 결정적 증서

일본인들이 비문을 훼손하고 전면에 석회를 발라서 탁본하여 만든 결정적 증서가 있다.

  [1], 중국 북경의 금석학자 양수경(楊守敬) 선생이 1902년에 입수한 탁본에는 새카만 바탕에 자형이 뚜렷하고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고 한다. 이는 1902년 이전에 일본인들이 비 전면에 석회를 칠하여 글자를 조작했다는 확실한 증서인 것이다. 

  [2], 프랑스의 동양학자 사반누가 1907년 4월에 입수한 탁본에는 양수경(楊守敬) 탁본에도 없던 글자가 나타나고, 다른 글자로 바뀐 것도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비문을 훼손시키고 비명에 다시 석회를 발라 일부 글자를 만들어 넣은 후 탁본(拓本)했기 때문이다.

그때 "安羅人戍兵" 뒤에 "滿"자 등을 만들어 넣었는데, 이는 중국 집안으로 파견된 조선사편수회 위원들이 변조된 쌍구가 묵본 대로 왜(倭) 관련 부분을 훼손했다가 나중에 학자들의 연구로 "滿"자 등이 임나일본부 학설을 뒷받침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滿"자 등을 만들어 넣은 증거로 밝혀졌다. 즉 일본인들은 1889년 6월 "會餘錄" 제5집에 게재된 쌍구가묵본을 인용하고, 그들은 한결 같이 사코오 대위의 신분을 극구 감추고 "某人" "某 日本人" 등으로 적어서 대대적 홍보를 시작했던 행위가 일본의 만행을 엿볼 수 있다.

사코오 대위의 신분이 노출된 시기는 그로부터 30여년 후 참모본부에서 퇴역한 장교가 술기운에 경솔하게 입을 놀렸을 때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사코오 대위의 신분을 수십년 동안이나 극구 감춘 사유는 사코오 대위의 처음 탁본한 원본은 결자(缺字)가 없이 깨끗하였기 때문이다. 즉 일본으로 가지고 온 쌍구가묵 원본을 일본군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변조한 사실이 노출됨으로써 비명훼손과 일제의 우리역사 왜곡이 들통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 정부 당국자는 비문 원본을 입수하라

 정부당국자는 1902년 북경의 금석학자 양수경(楊守敬)이 탁본한 원본과 프랑스의 동양학자 사반누가 1907년 4월에 입수한 탁본을 즉시 입수하라, 그리고 정부당국자는 7천만 국민을 기만하는 민족 반역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조국에 목숨을 바친 민족사학자 계연수 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에서 광개토대왕이 일본을 정복한 역사적 진실을 지금이라도 국내에 공포해야 마땅 할 것이다. 한편 일본인들이 광개토비문을 훼손하고 전면에 석회를 발라서 탁본한 사코오 대위가 만든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본인들의 만행을 전 세계 각국에 규탄하라


[4]. 광개토비문을 훼손, 조작한 일본왕은 사죄하라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가 무려 7,200여년의 역사를 말살한 천인공노할 만행(蠻行)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인류의 부모”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원숭이류에서 진화되어 사람이 된 것처럼 진화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편 일제가 [종교 원천국의 한국역사]를 말살했기 때문에 오늘도 세계 각처에서 종교 전쟁이 끊어지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 근본적 요인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된 한국 고대사 복원은 대한민족 만을 위하는 중대사가 아니고 세계의 전 인류를 위하는 일대역사(一大役事)입니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의 본 연재는 [인류 부모국의 한국역사 말살]에 대해 일본왕의 실토를 촉구하기 위함이 목적입니다. 즉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듯이 인터넷 상 모든 정보가 노출된 대명천지에 비밀은 영원히 감출 수 없고 역사적 진실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은 천리이며 시대적 요청이기 때문이다.

大韓民國이 [인류의 부모국이며, 4대문명과 종교의 원천국]의 역사적 진실을 중국, 일본사학자들은 다 알고 있으나 오직 얼빠진 한국인들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본 고증에 의한 폭로는 한, 중, 일의 3국사학자는 물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본왕은 참회하고, 스스로 전 세계 인류 앞에 사죄해야 천벌(天罰)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왕은 천벌을 받기 전에 진심으로 사죄하기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 정부 당국자는 한국의 유적물을 검증하라

현재 중국 본토의 柵城(책성)에는 太祖武烈帝(태조무열제)의 紀念功德碑(기념공덕비)가 있으며, 東鴨綠(동압록)의 皇城(황성:집안)에 광개토대왕의 대훈적비가 있으며, 安州(안주)의 淸川江(청천강) 상류에 을지문덕 장군의 石像(석상)이 있다, 烏蘇里江(오소리강)밖에는 연개소문의 頌德碑(송덕비)가 있으며, 平壤(평양)의 牧丹峰(모란봉) 기슭에는 東川帝(동천제)가 만든 朝天石(조천석)이 있다, 朔州(삭주)의 巨門山(거문산) 서쪽 기슭에 乙巴素(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雲山(운산)의 九峰山(구봉산)에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 고구려 제11대왕 東川帝(동천제) 역시 단군이라 칭하였다 매년 寒盟祭(한맹제)를 맞이하면 반드시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지금 평양의 箕林窟(기림굴)이 곧 한맹제를 맞아 [황천상제 여호와 하느님]에게 禮典(예전)에 맞춰 제사하던 곳이다. 무덤의 동굴은 궁전같이 만들어져 있고 아홉 개의 사닥다리로 내려간다. 이 箕林窟(기림굴)이 있는 곳으로 가는 행로(行路)에 모든 사람이 다 알아 볼 수 있도록 그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표석을 세워 두었는데 이를 朝天石(조천석)이라 했다. 

 을파소는 서기 203년 고구려 산산왕 시대의 재상으로 압록곡 사람이며 고구려 제 2대 留儒王(儒璃王:유리왕) 시대의 大臣(대신) 乙素(을소)의 손자이다. 을파소는 전국의 나라 사람 중에서 皀衣仙人(조의선인)을 선발하여 특수교육을 시켰다. 이들은 법식을 잘지켰음으로 어느 누구 보다도 자긍심이 대단하였으며 무슨 일이던 일을 더하여도 게이치 않고 모두가 영광스럽게 생각하였고 이들은 국왕의 使臣(사신)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을파소의 묘가 있는 朔州(삭주)를 국사에서 춘천으로 기록 되어있다 춘천에 “을파소의 묘”가 있는가? 상기와 같이 중국 대륙에 선조님의 유적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 당국자는 철저히 탐색 검증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보존하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다. 


   ◈.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고구려 文咨好太烈帝(문자호태열제)는 改元(개원)을 明治(명치)로 하고 11년에 齊(제),魯(노),吳(오),越(월)의 지역을 소속시켜 고구려 강역은 점점 확대되어 대국이 되었다. 고구려 文咨帝(무자제)께서 明治(명치) 11년 11월 백제의 越州(월주)를 공격하여 쟁취하고 署(서), 郡(군), 縣(현)으로 개명)하면서 松江(송강), 會稽(회계) 吳(오), 越(월)을 左越(좌월), 山越(산월)을 泉州(천주)라 하였다.

平崗上好太烈帝(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크고 말을 타고 활을 잘 쏘아 고주몽의 기풍을 갖고 있었다. 改元(개원)을 大德(대덕)이라 하고 덕치로 교육에 힘을 쏟아 그의 미덕은 세상이 밝았다. 大德(대덕) 18년 丙申(병신 509)에 황제는 대장군 溫達(온달)을 시켜 碣石山(갈석산)과 拜察山(배찰산)을 추격하여 楡林關(유림관)을 대파시키고 북쪽에 楡林鎭(유림진)을 설치하고 동쪽은 다 평정시켰다 註 : 楡林(유림)은 중국 山西省(산서성)에 있다.

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국의 石多山(석다산) 사람으로 일찍이 입산 修道(수도)하며 기도를 하던 중에 꿈같이 天神(천신)을 만나 대오각성하여 득도하신 분이다. 매년 3월 16일 날은 당연히 摩利山(마리산:강화도,산해관, 관미성)으로 달려가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고 돌아 왔으며 10월 3일은 곧 백두산에 올라 황천상제 여호와 하느님에게 祭天祭(제천제)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는 것은 옛 神市(신시) 시대부터 풍속이었다. 

弘武(홍무) 23년(서기 612년)에 隋(수)나라는 국군 130여만 명으로 水軍(수군)과 육군을 아울러 침공하여 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기묘한 계략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薩水(살수)의 대전투에서 파멸시키니 隋(수)나라 水陸軍(수육군)은 모두 함께 궤멸되어 요동성(昌黎(창려,갈석산, 관미성,강화도)에서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 뿐이였다.

隋(수)나라 楊廣(양광)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구걸했으나 을지문덕은 듣지 않았다. 烈帝(열제)역시 엄명을 내리시니 을지문덕 장군과 모든 장병들은 승리한 여세로 한쪽은 玄兎道(현토도)에서 太原(태원)까지 이르고 한쪽은 樂浪道(낙랑도)에서 幽州(유주:하북성 북쪽)까지 들어갔다. 그 곳 州縣(주현)유민들을 초청하여 편안히 살수있도록 어루만져 주었다.

建安(건안),建昌(건창),白岩(백암),昌黎(창려)를 모두 安市(안시)에 소속시키고, 昌平(창평), 城(탁성), 新昌(신창),용道(용도)도 모두 진압하여 如析(여석)에 소속시키고, 孤奴(고노),平谷(평곡),造陽(조양),樓城(누성),沙溝乙(사구을)은 上谷(상곡)에 소속시키고, 和龍(화룡),汾州(분주),桓州(환주),豊城(풍성),鴨綠(압록)은 臨潢(임황)에 소속시켰다. 이로 인하여 옛 땅을 모두 다 회복하고 관리를 두었다.


▶일본의 뿌리는 대한민족이며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다

1.일본의 천왕이 된 협야노(陜野奴:배반명(裵幋命)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 3세 가륵] 8년 병오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가륵 임금이 지백특(支伯特)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다. 10년 무신(BC 2173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餘守己)에게 명을 내려 우두머리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했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우수국(牛首國)이라 한다. 소시모리의 후손 협야노(陜野奴)가 해상으로 도망하여 일본의 三島(3도)를 점령하고 천왕이라고 참칭하였던 것이다.

[단군세기 마한세가 하] 27세 마한 궁홀(弓忽) 원년 갑진(BC 737)년에 즉위하고, 갑인(BC 667)년에 협야후(陜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海島(해도:대마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단군세기 35세 단군 사벌] 50년 임금이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을 [일본에] 파견하여 웅습(熊襲:일본 규수 남쪽)을 평정하였다. [단군세기 36세 단군 매륵] 갑인 38년(BC 667년)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을 일본에 보내어 날마다 도적질을 일삼는 왜구(倭寇)를 토벌케 하였다. 12월 일본의 삼도(三島)가 모두 다 평정되었다. 이 陜野後裵幋命(협아후배반명)이 일본의 왕이된 인물이다. 가지마는 니기하야노모데루로서 페니키아왕이라 번역 했다. 일본서기는 [배반명(裵幋命)을 니기하야히노미꼬]라 했다. 한편 B.C 667년 일본서기는 신무왕(神武王)이라 했다. 즉 일본은 배반명을 신무왕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2. 신라의 연오랑이 일본의 천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 전문(全文)]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가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나타나서 연오랑을 업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를 본 일본 사람들이 연오랑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녀가 남편을 찾아 바닷가에 나갔더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바위 위에 있었다. 세오녀가 올라가자 바위는 세오녀를 업고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 그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일본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라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자 해와 달이 전과 같이 되었다. 이에 그 비단을 궁궐 창고에 간수하고 그 보물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불렀다." 끝.

신라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일본의 '천일창(天日槍)설화와 『일본서기, 고사기』 등에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본서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 천일창이 배를 타고 하리마 국에 정박하여 시사하 촌에 있었던 때에 천황은 사람을 보내어 천일창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은 '나는 신라국 기미의 아들이요 일본국에 성황(聖皇)이 있다 하므로 나의 나라는 동생인 지꼬에게 주고 귀화하러 왔노라 대답하면서 바친 물건은 하호소노-다마(葉細珠), 아시다까노-다마(足高珠), 우가까노-아까시노-다마(鷄鹿鹿赤石珠), 이즈시노-가다나(出石刀子), 이즈시노-호꼬(出石槍), 히노-가가미(日鏡), 구마노-히로로기(熊神籬), 이사사노-가다나(膽狹沙太刀) 등 아울러 여덟 가지 물건이다.

이어서 천일창에게 '하리마국 시사하촌, 아와지섬 이데사촌의 두 마을 중 네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고 하였다. 이에 천일창은 '신에게 만약 장차 살 곳에 대해 은혜를 베풀어 신의 뜻을 들어 주시면 신으로 하여금 몸소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신의 마음에 합당한 곳에서 살도록 허락해 주소서' 라고 청원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고사기』는 '천일창 설화'를 『일본서기』와 다르게 전하고 있다. "옛날 아메노-히보꼬(天之日矛)라는 신라 왕자가 배를 타고 일본에 왔다. 신라에 있을 때 아누구마라는 늪이 있었는데 이 늪가에서 어떤 천한 여인이 낮잠을 자고 있어 천한 사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더니, 햇빛이 여인의 음부를 비추어 여인이 빨간 구슬을 낳았다. 엿보던 사내는 그 구슬을 얻어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 사내가 밭갈이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소에 싣고 골짜기를 들어가다가 아메노-히보꼬를 만났다.
 
아메노-히보꼬는 그 사내가 골짜기로 들어가 그 소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사내를 옥에 가두려 하였다. 사내는 차고 있던 구슬을 풀어 바쳐 풀려날 수 있었다. 아메노-히보꼬가 구슬을 가져다가 침상가에 놓았더니 구슬이 아름다운 계집아이로 변하여 계집아이를 아내로 삼았다.

그 아내는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왕자에게 바쳤다. 때문에 왕자는 거만해져서 아내를 꾸짖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내는 '나는 너의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 가겠다'하고는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나니와(難波)에 머물렀다. 아메노-히보꼬는 아내가 도망갔음을 알고 바다를 건너와 나니와에 이르자 거기 나루의 신이 가로막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지마 국에 머물렀다." 고 한다.

상기의 본문을 살펴보면 '천일창 설화'와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공통점은 첫째는 신라 땅에 살았던 부부가 모두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둘째는 두 설화가 모두 일월과 관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월과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천일창 설화보다는 이즈모 신화와의 비교가 더욱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겠다.


3.고구려의 섬부가 일본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성제의 벗이며 유리명왕(BC19~서기 17년)의 大輔(대보) 陝父(섬부)는 유리명왕에게 바른 직언을 올리다 직책을 강등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馬韓(마한) 산중에서 수백여 가구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나자 연속된 큰 홍수로 흉년이 들었다. 섬부와 將革(장혁)은 군중들과 함께 양식을 배에 싣고 패수를 경유하여 海浦(해포)에서 곧바로 바다로 航海(항해)하여 일본의 狗耶韓國(구야한국)에 도착하여 加羅(가라)국의 북쪽 해안에서 수개월 동안 살다 거주지를 阿蘇山(아소산)으로 옮겨서 정착하고 살았다. 이 陝父(섬부)가 일본의 多婆羅韓國(다파라한국) 시조가 되었다. [제21편 참조 바랍니다]


4. 선비(鮮卑) 모용외는 일본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

[환단고기, 대진국본기] 정주(正州)는 依慮國(의려국)의 도읍지이다. 鮮卑(선비)족 慕容廆(모용외)는 패망이 임박하자 갑자기 생각하기를 나의 魂(혼)이 아직 없어지지 않고 살아 있으니 어데를 간들 성공할 수 없겠는가? 하고는 은밀이 아들 扶羅(부라)를 깨워 부촉 받으며 白狼山(백랑산)을 넘어 야간에 海口(해구)를 건너 따르는 자가 수천 명과 함께 드디어 바다를 건너 倭人(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모용외가 말하기를 나는 三神符(삼신부)를 가지고 하느님의 명을 받았으니 군신들은 축하 儀式(의식)을 거행하고 공물을 바쳐야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혹 이르기를 依慮王(의려왕)은 鮮卑(선비)가 패망하자 도망쳐 바다 건너 일본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고 子弟(자제)들은 北沃沮(북옥저)로 달아나 이듬해에 자식들이 依羅(의라)국을 세웠다 하였다. 후에 慕容廆(모용외)는 또다시 침략을 받자 依羅(의라)국 사람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드디어 倭人(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註:慕容廆(모용외 269~333) 5호16국 중 전연(前燕)의 1대왕 남연왕(南燕王) 모용덕(慕容德)의 조부]

舊日本(구일본)에 伊國(이국)이 있었는데 또한 伊勢(이세)라 하며 倭(왜)와 이웃하고 살았다. 伊國(이국)의 도읍은 筑紫(축자)에 있으며 역시 일향국(日向國)이다. 동쪽은 倭(왜)에 속하고 그 동남은 安羅(안라)국에 속했다. 安羅(안라)는 본래 고구려의 忽本(홀본) 사람들이며 북쪽 阿蘇山(아소산)에서 살았다. 일본에 들어간 安羅人(안라인)은 후에 任那(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일찍이 협정을 맺어 친밀하였다.

[일본 땅] 末盧國(말로국) 남쪽에 大隅國(대우국)이 있었다. 始羅郡(시라군)은 본래 南沃沮(남옥저)사람이 취락을 이루어 살았던 곳이며, 南蠻(남만), 屠抌彌(도침미), 완夏(완하)와 比自체(비자체)의 족속은 모두 조공을 하였다. 南蠻(남만), 九黎(구려)의 종족은 山越(산월)로 부터 일본에 들어 온자들이며 比自체(비자체)와 弁韓(변한), 辰韓(진한)과 比斯伐(비사벌)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완夏(완하)는 고구려에 속한 노예들이며 이때 일본의 倭人(왜인)들은 산이나 섬을 거점으로 각기 100여국이 있었다. 그 중에서 拘耶韓國(구야한국)이 최대로 큰 나라였다. 본래 拘耶(구야)는 고구려의 사람이었다.

海商(해상) 선박은 모두 種島(종도)에 모여서 교역이 이루어 졌으며 吳(오), 魏(위) 蠻(만), 越(월)은 모두 통상 교역을 하였다. 처음 바다로 1,000여리 건너가면 對馬國(대마국)에 이르는데 4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바다로 1,000여리건너 가면 一岐國(일기국)에 이르며 4방이 300리쯤 된다. 본래는 斯爾岐國(사이기국)이라 하였으나 아들이 많아 여러 섬에서 모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또 바다로 1,000여리 건너가면 末盧國(말로국)에 이르는데 본래는 把婁(파루)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동남쪽 육로로 500여리를 가면  伊都國(이도국)에 이르며 곧 옛 盤余彦(반여언) 읍이라 하였다.


5. 광개토대왕은 일본을 평정하고 다스렸다

[비문 11] : 10년 庚子(경자:400년)에 교서를 내려 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고자 신라의 男居城(남거성)까지 쫓아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 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황급히 후퇴하기에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城(성)을 拔本(발본) 索出(색출)하여 즉시 항복시키고, 拔本(발본)한 城(성)은 安羅人(안라인)이 戌兵(술병)하도록 하였다.[이 부분의 비문(碑文)에서 결락자가 집중돼 있다.] [제21편 참조바랍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實聖王) 4년(405년) 조의 기록에는 "왜병이 침입하여 명활성(明活城:강소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실성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 남쪽에서 왜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격파하고 300여성에서 살획(殺獲)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비명] 9년 己亥(기해 399년)에 백제의 殘黨(잔당)과 倭(왜)는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공격하고 다시는 신민국으로서 위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도 왜(倭)는 1년 후에 다시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일본은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결정적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속민국으로 조공을 바치겠다는 제2차 광개토대왕과 왜(倭)와의 약정을 지키고 일본 열도로 들어가 500년까지는 한반도 침략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 후 일본 천왕의 부모국이며 본국의 백제 의자왕을 구원하기 위해 662년 일본은 대규모 군사를 한반도에 파견하게 된다.

상기 [1~5]의 고증서로서 ▶ 일본의 뿌리는 대한민족이며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다. 는 역사적 진실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아키히토 일본왕은 2001년 12월 KBS와 기자회견에서 “나는 백제의 혈통이다.” 라고 솔직히 자인했습니다. 일본은 자국의 고대사는 전부다 왜곡, 변조, 조작하고 일본 부모국의 한국 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하고 천황(天皇)이라 참칭하고 있으니 어찌 패륜아가 아니며, 천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 광개토왕릉비문의 각미성(閣彌城)은 어디인가?

중국 하북성의 산해관(山海關)은 해발 500m의 각산(角山)과 발해(渤海)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산해관이라 이름 지었다. 현재 동문에 해당하 관성 입구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산해관(山海關)을 일명 관성(관미성)이라하며 이름과 같이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입니다. 산해관은 높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있는 가장 좁은 협곡이며 성 밖으로 나가면 수중현(綬中縣)이고 넓은 평야는 없습니다.  

  天下第一의 산해관(山海關) 왕험성(王險城) 패수(浿水)

▲     © 박병역 위원

▲     © 박병역 위원


깊은 바다와 가파른 산이 바로 만나는 곳으로 산의 이름이 글자 그대로 각산(角山)이며 지형적으로 누구나 자칫 잘못하면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절벽이라 쉽게 침공하기 어려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요새지입니다. 이 관미성(關彌城)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성곽이 있다.동서남북으로 동익성(東翼城)ㆍ서익성(西翼城)ㆍ남익성(南翼城)ㆍ북익성(北翼城)이 있고 위원성(威遠城)이 멀리 밖에서 위용을 뽑내며 노룡두(老龍頭)가 있는 영해성(寧海城)은 바다 쪽을 용이 지키고 있다는 전설이 있고 대부분 성벽은 높이 12m에 두께 6m 정도이다. 
 

(1).낙랑군(樂浪郡)은 하북성 수성현에 있었다

하북성 창려현(昌黎縣) 북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 있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따라서 낙랑군은 하북성 수성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은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다. 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千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다.

낙랑군=평양설(說)은 1913년 일제 식민지시대의 조선사편수회 핵심위원 이마니시(今西龍)가 처음 주장한 이후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李丙燾)는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1972)의 ‘낙랑군고(樂浪郡考)’에서 수성현(遂城縣)을 황해도 수안(遂安)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수성과 수안의 ‘수(遂)’자가 같다는 뜻에서 비정했던 것이다. [이병도는 민족사학자인가? 식민사학자인가? 민족반역자인가? 우리국사를 정립한 선구인가?]

중국은 자국의 역사를 변조 조작한 사실을 영원히 감추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속의 가장 중요한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을  수중현(綬中縣)으로 고쳐버렸다.


(2).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은 백제의 북쪽이다

고구려의 제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이름은 이련(伊連) 혹은 어지지(於只支)라고도 하였다. 소수림왕의 동생이다. 소수림왕 재위 14년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아우 이련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은 41년(371) 겨울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화살에 맞아 10월 23일 죽었는데 고국양왕은 백제땅 들에 장사지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어 놓았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말이다.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의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포로잡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하남위례성(慰禮城)’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케 했다. 백제는 어쩔 수 없이 웅진(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조에 아신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백제의 북쪽 변경의 요새지이다." 반드시 되찾기를 당부했다. <8월에 아신왕이 장군무(武)에게 이르기를, “관미성은 우리 백제 북변의 요새인데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 이는 과인이 뼈아프게 생각하는 바다. 경은 당연히 [관미성]을 항상 잊지 말고 나의 한을 꼭 설욕하라.”>라고 당부하였다. 백제의 아신왕은 관미성을 비릇한 석현성 등 10여 개의 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이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한번 도 승리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3). 하북성 창려(昌黎)는 고조선 변한의 준왕 도읍지이다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索隱韋昭云「古邑名[중국이 글자 조작 삭제」徐廣曰「昌黎有險瀆縣」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遼東郡 險瀆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 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浿音普大反[조작 삭제]

[사기권 115 조선열전 제55]: 집해서광(集解徐廣)이 말하기를, [하북성]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색은위소(索隱韋昭)가 이르기를 [고조선 변한 준왕의] 옛 도읍지 이름이다.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응소주(應劭注)의 지리지(地理志)에 요동(遼東)의 험독현(險瀆縣)은 조선왕(朝鮮王)의 옛 도읍지라 했다. 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에 있고 패수(浿水) 동쪽에 있었다.

요동군(遼東郡)편 험독(險瀆)에 대하여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조선왕(朝鮮王) 위만(衛滿)의 도읍지이다. 물이 험한 지역에 의지해 살았기 때문에 험독이라 했다."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에 있으며 패수(浿水) 동쪽에 있었다. 이때부터 험독(險瀆)이라 했고, 사고(師古)와 신찬(臣瓚)이 말한 곳이 바로 이 험독(險瀆)이다.

BC 195년 위만은 1000여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와 고조선 변한의 제 41대 준왕(準王:武康王(무강왕:애왕)에게 망명을 요청했다. BC 194년 위만은 고조선 변한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고조선 왕험성(王險城)에 쳐들어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4). 인천시 강화군의 강화도는 관미성이 아니다

강화도 조약은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국교재개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국서접수를 거부했다.

이윽고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는 부산항에서 함포시위를 벌여 조야에 충격을 준 후,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한다. 제7조, 조선은 일본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영·일조약(1858)을 모방한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제5조)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제10조),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통상장정).

또 제1조의 내용은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 땅을 차지하려는 저의가 담긴 것이고, 제7조는 군사작전시의 상륙지점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조선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1882),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932년 1월 남만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이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여 이 지역 전체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이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울 때 전략적 무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민족 반역자 이병도는 [강화도를 관미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관미성을 경기만(京畿灣)의 교동도(喬棟島)라고 비정했다. 

(5).강화도 마니산의 제천단은 가짜가 아니겠는가?

단군왕검 재위 51년(BC 2283년) 운사(雲師) 배달신이 단군왕검의 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전해오는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 정상에 참성단이 있고 북동쪽 기슭에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다. 참성단(塹城壇)은 삼신(三神)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이며, 매년 전국체전 때 성화가 채화되는 성지(聖地)이며 대한민족의 영산(靈山)이다.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강화도  참성단(塹城壇)
▲     © 박병역 위원

▲     © 박병역 위원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에 희정선사가 창건한 정수사는 조선 세종 8년(1426년) 함허대사가 수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지었으나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공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 해서 전등사(傳登寺)로 개명됐다.

전등사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돼 옮겨진 법화경 목판 104장이 보존돼 있다. 또 정화공주의 시주물로 전해오는 청동수조와 옥등도 남아 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 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도 볼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해 호국불교의 사찰로서 당시 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강화도는 일명 갑비고차(甲比古次)라 칭하며, BC 2280년 3월 단군임금은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다. 또한 高失(고시)씨의 후손 치우천제(蚩尤天帝)는 도읍을 樂浪忽(낙랑홀)에 정하고 국호를 靑丘國(청구국)이라 칭했다. [배달국 제 14세 慈烏支(자오지환웅(치우천왕)]의 그 용맹은 세상에서 다시없을 만큼 뛰어난 영웅으로서 머리에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철로 만든 도끼를 들고 안개를 일으켜 대적할 자가 없었다.

청구국 자오지환웅(치우)는 천하를 통일 할 결심을 굳히고 葛盧山(갈로산:갈석산)에서 광석을 채굴하여 칼과 창, 화살촉을 만들어 군사물자를 비축하고 드디어 81명의 형제들과 군사를 일으켜 涿鹿(탁록:북경 서북쪽)의 황제헌원을 물리쳤다. 또 九渾(구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일년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 

 치우천제의 후손 番韓王(번한왕) 치두남은 경자(BC 2301)년 遼中(요중:요령성과 하북성 일대)에 열두성을 쌓았는데 險凟(험독),令支(영지),湯地(탕지),桶道(통도), 渠용(거용), 汗城(한성),蓋平(개평),帶方(대방),百濟(백제),長嶺(장령),碣山(갈산),黎城(려성)이다. 
 

   [광개토비문의 각미성(閣彌城)의 역사적 진실]

 1,광개토비문의 각미성이, 관미성(關彌城)이며, 왕험성(王險城)=험독현(險瀆縣)=산해관(山海關)은 다 같은 성(城)의 지명이며,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 2, [배달국 제 14세 慈烏支(자오지환웅(치우천왕)]의 도읍지이며,  3, 치우천제의 후손 변한왕(弁韓王) 치두남의 도읍지이며, 4, 고조선의 변한왕 기자(箕子) 성인(聖人)의 도읍지이며, 그의 후손 기준(箕準) 왕의 도읍지로서 결국 배은망덕한 위만의 침략을 받아 고조선 3한 중의 변한이 멸망하고 말았다. 5, 낙랑국(樂浪國)이며, 6,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이며, 7,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이며, 8,패수(浿水)가 있고, 9,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江華島) 조약을 맺은 곳이다.

10, 고조선 단군왕검이 BC 2280년 3월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던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이 아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기마보병을 거느리고 순행 길에 摩利山(마리산)의 塹城壇(참성단)을 친히 등정하시여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린 곳도 아닙니다.

한반도 속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한 강화도[江華島]는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20여일 이상이나 걸려 필사의 공격을 해야 할 정도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 요새지가 아닙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이병도가 중국 대륙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거짓 가짜의 대표적 산물이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의 塹城壇(참성단)이다.  중국 하북성‘천하제일(天下第一)의 산해관(山海關),왕험성(王險城)’의 참성단이 진짜가 아니겠는가?


다음 주는 [제 23편] 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가 연재됩니다. 

   박병역(朴炳譯) 위원 프로필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선양회(韓國精神文化宣揚會) 대표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세계적 대국 고조선
3.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4.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5. 인류의 기원역사
6. 1만년 한국사 절요(切要)
7. 격암유록의 해설
심우량 07/08/31 [13:12] 수정 삭제  
  박병역(朴炳譯) 위원님 우리역사 바로 찾기에 앞장서 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박병역 07/08/31 [15:39] 수정 삭제  
  심우량님...!
님의 따뜻한 격려의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역사적 진질을 밝히는 뉴스의 본 연재로 인하여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민족사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추종하는 똥강아지와 일본 귀신들의 울부짖는 곡소리가 들립니다.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도 가짜이고
김수로왕의 왕도 경남 김해도 가짜입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왕도
한성(漢城:서울)도 가짜이고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도 가짜입니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전국토의 사찰도 모두 다 짜가 입니다.

심우량님...
한반도 속에 3국이 건국되지 않았으나
조국을 배신하고 민족혼을 말살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중국 대륙속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고
이병도는 민족혼을 말살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범죄보다
민족혼을 말살하고 국사를 유린하여 대한제국을 일찍 멸망시키고자
죽을 때까지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충견(똥개) 이병도의 범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일본왕의 충견(똥개) 이병도는 이미 죽고 없으나
7천만 국민의 이름으로 반드시 화형식을 거행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빠진 정부당국자는 경주, 김해, 공주 등에 신기술로
가짜 유적물을 고풍으로 도색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즉 가짜 문화유적물이 민족혼을 일깨워 주어서
가짜 사찰 등이 진짜 행세를 훌륭히 수행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아름답게 꾸며져 삼천리금수강산이라 칭송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선견지명이 뛰어난
이병도를 칭송해야 할 까요 허허허....

wow gold 258 07/12/29 [16:28]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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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df 08/06/07 [20:53]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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