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흥선 대원군을 그리워함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김정일 부자의 쇄국주의

김기백 | 기사입력 2007/04/14 [00:28]

흥선 대원군을 그리워함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김정일 부자의 쇄국주의

김기백 | 입력 : 2007/04/14 [00:28]
왜 이시점에서 완고한 쇄국의 상징이자 조선왕조 멸망의 최고책임자중 한사람쯤으로 각인되어온 흥선대원군을 새삼 이토록 그리워 하게 되었는가? 몇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누가 뭐라해도 대원군은 조선왕조 5백년의 마지막 불꽃이었으며 걸출한 英傑이었다.
민비 혹은 명성황후로 일컬어지는 아낙네와는 결코 비할수 없다.

명성황후가 간악무도한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치욕과 통한의 역사이기는 하나, 그 사실 때문에 우리들 스스로 명성황후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찬양하면서 흥선대원군을 폄훼하는것은 분명히 하나의 잘못이며, 더욱이 대원군을 위해서는 억울한 역사왜곡일수 있는 것이다.

 
▲ 홍선 대원군 이하응, 이홍장     © 운영자

그가 섭정아닌 왕이었다면

역사에 가정은 없고 아까운 인물이 비단 대원군뿐이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원군이 섭정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왕위에 있었더라면, 구한말의 우리역사는 크게 달랐을것이며, 그토록 맥없이 허망하게 일본에 먹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못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유약한 국왕 고종이나 민비가 아니라 대원군이었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도 일본과 제대로 크게 한판 붙었을것이고, 전쟁에서 졌더라도, 결코 쉽사리 망국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릇이 크고 통찰력이 있었다

흔히 대원군을 시대변화에 어두운 완고한 쇄국주의자로 알고 있으나 그는 결코 아둔하거나 완고하기만 한 쇄국주의자가 아니었다. 일찍이 대원군은 당대의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었으며 누구보다 英明한 자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집권직후  "백성에게 진실로 害가 된다면 설사 공자가 환생해서 눈앞에 나타나도 반드시 단행한다"는 단호한 의지를 피력하며, 수백년동안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나라의 조세정책을 과감히 혁파했다.

 
수백년동안이나 지속되어온 양반 기득권층의 부당한 각종 특혜를 단호히 철폐하고,  양반 사대부의 허례허식을 대폭 간소화하는 등, 혁명적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왕실을 핍박해온 안동김씨 까지도 포용하는 탕평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적어도 병인, 신미양요 무렵을 전후해서는 언젠가는 개항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의 준비태세가 너무도 미비한채로 외세의 강압에 의해서 나라의 문이 열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서양오랑캐 남연군의 묘소를 파헤치다

대원군이 결과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부인이자 국왕 고종의 生母인 민씨 부인과, 어린 시절의 고종을 업어키운 乳母를 비롯한, 평소 대원군이 아껴온 측근의 상당수가 이미 오래전부터 독실한 천주교신자 였으며 대원군 또한 천주교에 대해 전적으로 몰이해하지는 않았다.

한때 그들을 매개체로 하여 프랑스, 독일 등의 힘을 빌어 러시아와 청국과 일본을 견제하려는 전략을 실행하려 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대원군으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등돌리게 한 것은, 1868년 유태계 독일인 오페르트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등이 작당하여 실로 무엄하게도, 섭정대원군의 생부이자 국왕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소를 파헤쳐 시신을 훔치려는 희대의 야만적 패륜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동양의 대원군이 아니라, 서양의 클린턴이더라도, 19세기가 아니라 190세기라도, 국왕의 조부아니라 양치기 소년의 할아버지 무덤이더라도, 그러한 패륜을 저지른 자들과 어찌 선뜻 교류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오늘날 아랍의 어느나라에다가 구미의 어떤나라가 그런일을 저질렀다면, 최소한 백년동안의 전쟁과 천년동안은 국교가 단절되고도 남을 것이다.

대원군은 이홍장보다 큰 인물이었다.

대원군 못지않게 아까운 임금이었던 조선왕조 마지막 명군 정조대왕 사후부터 본격적으로 쇠락, 기울대로 기울어진 조선을 온몸으로 떠받쳐온이가 흥선대원군 이었다고 한다면, 아편전쟁이래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대청제국의 자존심을 온몸으로 되살리려 한 인물은,  청나라 마지막 영걸 이홍장이라 할 것이다.

이하응과 이홍장은 여러모로 비견될만하다. 그러나 결코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비록 임오군란 직후, 터무니없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앙칼진 며느리의 간계에 빠져, 청국에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지만 작은나라 조선의 이하응이 큰나라 이홍장에 비해 결코 그릇이 작지 않았으며, 신념, 지략, 자질, 용기, 강인함등 그 어느모로보나. 인물됨이 결코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의 대원군은 작은나라에 태어났고, 청국의 이홍장은 큰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차이일뿐,우리의 대원군은 중국의 이홍장보다 오히려 걸출한 인물이었던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김정일 父子의 쇄국주의

이제 이시점에서 실은, 비교하는것 자체가 흥선대원군에 대한 크나큰 모독이자 어불성설이지만, 백여년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이미 60년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는 북의 김정일 부자의 철통같은 쇄국주의는 무엇이 얼마나 다른것인가를 한번쯤 짚어보자.

분명한것은, 대원군의 대외적 쇄국정책은 안으로는 철저히 백성=민중=인민의 편에서서, 수백년동안 누적되어온 양반사대부 기득권층의 각종 특권과 특혜를 단호히 혁파하는, 유교정치의 가장 핵심 요체를 뒤늦게나마 실현코자 하는, 철저한 民本主義와 愛民思想에 입각한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반해, 김정일 부자의 쇄국주의는 정반대로 애오라지, 그들 일족의 시대착오적 족벌세습체제의 영구적 부귀영화만을  위해, 무려 반세기 이상이나 백성=민중=인민을 철저히 탄압, 수탈, 기만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것이다.

더구나, 대원군은 결코 김정일 부자처럼 자신의 우상화를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실로 엉뚱하게도 수륙만리를 격해있는 강대한 외세에게 자신의 통치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인정해달라는 따위의 얼빠진 구걸행각을 한적도 없다.

지금 만약 대원군이라면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말이다... 지금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살아나서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내치와 외교를 그리고 통일정책을 어떻게 펼칠까? 아아! 필자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적어도 대원군이라면 비록 5년짜리 대통령이더라도 그래도 구한말에 비해서는 월등히 개선된 지금의 여건에서 이따위 엉터리 개혁은 아닐 것이다.

노벨상따위에 연연하는, 김정일따위에 끌려 다니는 더욱이, 남북한 분열 책동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데도, 다른나라도 아닌 일본과 짝꿍이되어 남북모두의 보다 큰 권익을 팽개치는 치졸 하고도 심약하기 짝이없는 사대외교를 펼치지는 않을 것이다.

대원군이라면 당연히 그리고 능히 해낼것이다.

적어도 대원군이라면 망설일것도 없이 당연히 1965년의 실로 치욕적인 한.일협정 한.일 기본조약
의 전면개정을 요구하고 그와 더불어 북.일 수교문제를 하나로 묶어 일본에 대해 남북이 공동대응할 것을 선언할 것이다.

아니 대원군쯤 되면 그보다 한발 더나아가 「대일(對日)문제에 대한 남북공동 특별 기구」를 구성함과 동시에 남북합의하에 「남북한 동시 군비축소」를 국제사회에 선언하는 그야말로 전세계가 경탄해마지않을 정치, 외교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아아! 하늘이여 정녕 이땅에 이하응은 두 번다시 없는가?

*이미 늙고 병든 대원군이 을미사변 당시 강압에 의한것이지만 일인(日人)들이호위하는 가마에 실려 경복궁에 입궐한 것은 실로 대원군 생애의 일대오점이었다.


덧글: 이글의 원문은 필자가 참으로 어렵사리 막 인터넷에 입문한 직후인 지난 2000년 11월초순에 쓴것을 다소 수정 보완한것이다.
  

단기:4340(서기 2007)년 4월11일

인터넷 민족신문 발행인:김기백
민족신문 임시홈피
:
http://www.minjokcorea.co.kr/

데일리포스트(원본 기사 보기)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 보성녹차마라톤대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열정의 레이스 시작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