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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주년 추모] 끝나지 않은 제주4.3

굴렁쇠 | 기사입력 2007/04/04 [03:00]

[59주년 추모] 끝나지 않은 제주4.3

굴렁쇠 | 입력 : 2007/04/04 [03:00]



4월, 그 슬픈 아우성

4월 3일, 오늘은 제주역사를 피로 물들인 4.3제주민중항쟁이 일어난지 59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직도 지천에 떠돌며 잠들지 못하는 4.3영령들의 넋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쓴다. 비운의 역사를 또다시 마주하는 심정은 한마디로 침통하다. 숨죽여 왔던 통곡의 역사, 우리 민족사의 참극은 59년이 지난 오늘에도 슬픔만이 가득하다. 샛노오랗게 꽃망울을 터트린 유채꽃에도, 새하얀 속살을 드러낸 눈부신 벚꽃에도 그날의 아우성은 살아있다.

어디 그 뿐이랴. 마을마다 지키고 서있는 팽나무에도, 구멍 숭숭 뚫린 돌담에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 집터에도, 한라산 자락 중산간 곶자왈 지대에도, 온섬에 흩어져 있는 제주오름 기슭에도 통한의 역사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비명에 간 영령들도 잠들지 못했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붉은 화산섬 제주땅도 평화를 잃어왔다.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에는 아직도 제주4.3은 슬픈 현재진행형이다. 산천을 떠돌며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 통곡하지만, 애달픈 우리들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해 달라고, 왜 우리가 죽어갔는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밝혀 달라고 몸부림치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지만, 아직도 역사는 말이 없다.


여전히 귓전을 때리는 아우성 소리. 우리는 안다. 제주도민이 겪었던 절망과 공포, 고통과 분노, 좌절과 체념, 그리고 가슴 속 깊이 응어리진 피해의식과 엉켜있는 피울음이라는 것을. 그 칠흑같은 어둠의 역사를 지나 오늘, 다시 제주4.3을 시린 가슴에 새긴다.

제주4.3민중항쟁은 미국의 대한반도 점령정책에 대해 반기를 든 반미구국투쟁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자국에게 유리하고 소련에 반대하는 친미반공국가를 남한에 세우려는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항거한 민중항쟁이었다.

1947년 초부터 미군정의 탄압은 집요했다. 6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3.1시위와 이어진 총파업을 강경 진압함으로써 미군정과 제주도 진보세력은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게 됐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사상적으로 불순한 섬으로 지목하면서 탄압과 공세 수위를 높여갔다. 해가 바뀌어도 공세는 계속됐고, 그럴 때마다 반미투쟁의 열기가 높고 투쟁경험과 역량이 풍부한 제주민중들의 저항은 격렬하기만 했다.




제주4.3민중항쟁, 그것은 피빛 삶의 기록

1948년 4월 3일 자정, 드디어 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섬사람들의 남로당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00여 명과 이를 따르는 1,000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면서 피어린 제주4.3항쟁은 시작됐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조선사람이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학살하는 매국매족노를 거꾸러뜨려야 한다...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시민 동포들이여!..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제주4.3항쟁은 외세를 몰아내 완전한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고난의 전투였다. 이것이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제주 4월의 역사를 이끌어온 4월 정신이다. 분단조국의 사슬을 끓고 진정한 해방의 길로 나아가자는 반미구국투쟁이기 때문이다. 제주민중들은 3·1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자 했고, 5.10 단독선거에 의한 단독정부 구성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조국의 자주와 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고립무원의 섬에서 대량학살을 감행한 미국과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에 대항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소불위의 군경토벌대가 제주 섬사람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미국과 이승만 친미정권이 휘두른 총칼에 제주민중들은 피의 항쟁에도 불구하고 광기로 점철된 제단에 모두 몸을 바쳐야 했다.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의 죽음이었다.

제주섬은 온통 피빛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섬사람들의 아비규환, 국가권력의 총칼에 죽어가면서 흘렸던 붉은 피, 불타는 마을의 저 붉은 원한들로 화산섬 제주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가 되고 말았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3만에서 5만명의 제주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미군과 국가공권력은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섬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육지부에서 증파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이 합세하여 제주도민을 모두 좌익폭도로 내몰아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월리엄 제임스의 말대로 제주섬은 피의 목욕통이 넘쳐 피의 바다가 돼버렸다.

제주도를 빨갱이섬이란 딱지를 붙인 미군과 이승만 정권은 기어이 화산섬 제주, 그 민중의 뿌리를 대량학살의 광풍으로 뿌리채 뽑아버렸고 짓이겨 버렸다. 특히 1948년 11월 중순부터 약 4개월간 전개된 초토화 작전은 중산간 마을을 싹쓸이했다. 제주 4.3에서 가장 참혹한 민중학살과 마을파괴는 이때 벌어졌다.

강경진압작전으로 예로부터 지켜오던 중산간 마을 37,000여 초가가 불에 타 사라졌다. 조사자료에 의하면 4.3사건으로 39,285채가 불에 타 없어졌고, 이중 95%가 초토화 작전 4개월 동안에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 4.3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목숨을 잃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삼진작전으로 한라산 기슭은 그야말로 공포와 죽음의 상징이 돼 버렸다.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자 생활의 터전을 잃은 주민 2만여명은 토벌을 피해 입산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 4.3에서 입산자는 곧 발각되는 대로 처형되는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이들 입산자와 해안부락으로 소개되어 내려온 입산자 가족은 이른바 빨갱이 가족=도피자 가족이 되어 다시 죽음으로 내몰리는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자기 가족 대신 죽는 대살(代殺)로 많은 섬주민들이 해안부락에서도 아무런 죄없이 죽어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섬주민들의 분노와 공포가 어찌 사그라질 수 있었으랴.




제주4.3과 제노사이드

제주 4.3이 발발하여 대량학살이 이루어 지던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는 모두 19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the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을 92개국의 찬성으로 체결했다. 협약 제2조에서 제노사이드는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른바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제주4.3민중학살은 한마디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 범죄였다. 59년 전 제주섬에는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원칙이 철저히 무시됐다.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살상했다. 군경토벌대가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죽음의 덫을 씌웠고, 어린이와 여성,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살의 범위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또한 제주의 학살이 명실상부한 내전이나 국가간의 전면전 중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4.3희생자가 치열한 교전의 결과 발생한 불가피한 희생이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었다는 사실, 희생자 가운데 대부분이 비무장한 민간인이었다는 사실도 제노사이드 범죄를 말해준다. 4.3을 통해 제주도민들이 경험한 물리적·정신적·경제적 파괴와 죽임의 사례도 이미 제노사이드로 공인된 다른 사례들과 큰 차이가 없다.

4.3 당시 가해자를 결속시키고 희생자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데올로기는 빨갱이 논리였다. 학살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던 절대적 논리다. 이 논리는 학살자로 하여금 법적·도덕적 부담을 벗겨내는 데도 일조했다. 빨갱이 논리는 본질적으로 르완다의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해 갖고 있던 종족주의 감정이나, 터키인이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갖고 있던 인종주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제주 4.3은 제노사이드 범죄이다.




미국에 제주4.3민중학살 책임을 묻는 이유

제주 4.3민중을 대량학살한 책임은 미국(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과 이승만 친미정권에 있다. 미군정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38선 이남의 유일한 법적 정부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에 귀속돼 있었다. 그 권한은 1949년 6월 30일까지였다. 제주양민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또는 최종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한국군에 대한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단지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이들에 의해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됐다. 그리고 6일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포고문을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강경진압작전을 벌인다는 신호탄이었다. 한마디로 이 포고문은 살육작전명령이었다.

미군은 사전에 초토화작전 (대량살육작전 : A Program of Mass Slaughter)을 계획하였으며, 1948년 5월 9연대장 김익렬에게 그 시행을 지시한 바 있다. 미군 보고서는 1948년 11월부터 초토화작전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9연대의 강경진압작전을 성공적인 작전(successful actions)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9연대장 송요찬을 선정해 제주에 파견시켰던 장본인은 다름아닌 로버츠 고문단장이었다.

미군은 초토화작전 직전까지 괴잠수함 출현설 등을 흘리며 살육작전의 당위성을 사전에 조작했으며,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정찰기를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무기와 장비도 적극 지원했다. 또한 미군은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의 국가폭력기구를 동원하여 좌익을 청소(cleansing)하는 작업을 지휘하기도 했다. 초토화작전 당시 제주도에는 최소한 임시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5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제주민중학살의 일차적인 책임은 미국에 있다.미국은 제주 4.3을 좌우익의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몰아갔다. 미국이 한반도에 반공의 방벽을 튼튼히 쌓기 위한 냉전정책의 일환이다. 미국을 떼어내고 제주 4.3의 진실을 가려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국가공권력과 서북청년단을 앞세워 제주민중을 학살한 제노사이드 범죄는 이미 드러났다. 이제는 미국의 학살 책임을 명징하게 규명하는 일만이 우리 역사의 큰 숙제로 남게 됐다. 59년의 세월동안 잠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4.3영령들의 해원과 영면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아직도 제주4.3은 끝나지 않았다.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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