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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곡현(河曲縣)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조작한 한반도 속의..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4/26 [13:22]

[단독]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곡현(河曲縣)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조작한 한반도 속의..

박병역 위원 | 입력 : 2007/04/26 [13:22]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실은 큰 배가 산서성(山西城)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에 들어왔다. 황금이 도착한 이 하곡현(河曲縣)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조작한 한반도 속의 경남 울산 지방일까요? 중국 산서성의 하곡현 일까요?
 
[1].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삼국유사]
 
신라 제 24대 진흥왕이 즉위한 553년 2월에 장차 紫宮殿(자궁전)을 용궁 남쪽에 지으려고 하자 황룡이 그곳에 나타나므로 궁궐을 바꾸어 佛寺(불사)를 설치하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고 569년에 이르러 둘레에 담장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海南(해남)에 큰 배 한 척이 河曲縣(하곡현) 絲浦(사포)에 들어왔다.

 
이 배를 검사해 보았더니 公文(공문)이 있었는데 그 공문에서 이르기를 西竺(서축:서천축국)의 阿育王(아육왕:아소카 왕)이 黃鐵(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釋迦世尊像(석가세존상)과 두 보살상을 鑄造(주조)하려고 하였으나 주물로 불상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하여 불상을 만들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부디 인연이 있는 국토에 도착하여 丈六尊像(장육존상)을 완성하여 주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석가세존 불상(佛像)과 두 菩薩像(보살상)의 모형도가 함께 실려 있었다.
 
[산서성 삭제됨] 河曲縣(하곡현)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 상부에 보고하자 진흥왕이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河曲縣(하곡현)의 城(성) 동쪽 爽塏(상개) 지역에 東竺寺(동축사)를 창건하여 三尊像(삼존상)을 안치해 두고 금과 鐵(철)은 京師(경사:경도)에 수송하여 大建(대건) 6년 갑오(574년)에 장육존상의 鑄造(주조)는 쇠 물을 부어 한번에 만들었는데 그 중량이 3만 5천근과 황금이 1만 136푼이 들어갔다. 두 菩薩象(보살상)은 철이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어갔다.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안치하여 두었더니 그 이듬해에 佛像(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자나 젖어있었다. 이것은 대왕이 升遐(승하)하실 조짐이었다. 혹 佛像(불상)이 완성된 것은 진평왕 재임 시대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別本(별본)에서 이르기를 아육왕은 西天竺(서천축) 大香華國(대향화국)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100년 만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아육왕은 부처님에게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다 금과 쇠를 몇 근씩을 모아 세 번이나 佛像(불상)을 鑄造(주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때 아육왕의 태자가 홀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으니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서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황철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 16개의 大國(대국)과 500개의 中國(중국)과 十千(10천)의 小國(소국)과 8만 부락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모두다 쇠를 부어 불상을 만드는 鑄造術(주조술)이 부족하여 불상을 만들 수 없었으나 최후로 신라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황룡사 전경     ©플러스코리아

 
◆. 황룡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강연하였다.
 
신라는 鑄造(주조) 기술력이 뛰어나 진흥왕이 文仍林(문잉림)에서 鑄造(주조)하여 佛像(불상)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완성시키니 아주 좋은 모양이 모두 다 갖추어졌다. 이로서 아육왕은 근심이 없어졌다. 하여 無憂王(무우왕)이라 불렀다. 그 후 대덕 慈藏(자장)이 西學(서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중천축국)의 오대산(五臺山)에 도착하였는데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너희 나라에 있는 황룡사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가섭불”이 강연하신 곳이니라, 그 지역에 아직 까지 가섭불의 宴坐石(연좌석)이 있느니라.
 
고대 西天竺國(서천축국) 無憂王(무우왕:아육왕;아소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년이 지난 뒤에 너희 나라에 도착하여 불상을 주조로 완성하여 황룡사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개 부처님의 위신력과 석가모니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別記(별기)에 기록된 것은 符道(부도)와 같다)
 
황룡사에 佛像(불상)을 성공한 후에 東竺寺(동천사)의 三尊佛(삼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 안치하였다. 寺記(사기)에서 이르기를 진평왕 5(6)년 갑진(584년)에 대웅전을 만들었고 선덕왕때 이 절의 초대 주지는 眞骨(진골) 歡喜師(환희사)이고 제 2대 주지는 慈藏國統(자장국통)이고 그 다음은 國統惠訓(국통혜훈)이고 그 다음은 廂律師(상률사)가 주지가 되었다. 지금은 고려 고종때 몽고병이 침략하여 불에 탄 이래로 大佛像(대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다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여래상만 아직까지 남아있을 뿐이다.
 
[2]. [황룡사 9층탑 :삼국유사]
 
신라 제 27대 선덕왕 제위 5년(636년)에 慈藏法師(자장법사)가 西學(서학:서역국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중천축국)으로 유학하여 五臺山(오대산)에서 文殊菩薩(문수보살)이 감응하여 佛法(불법)을 전수 받았다. 또한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너희 신라국왕이 바로 천축국(天竺國)의 刹利種王(찰리종왕)이며, 부처님의 수기(受記)를 받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유인록(有因錄:유인씨의 기록문)에 東夷(동이)는 共工族(공공족)과는 같지 않느니라.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들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邪惡(사악)한 종교를 많이 믿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혹 天神(천신)이 재앙을 내리고 있으나 多聞比丘(다문비구)가 신라국 안에 있기 때문에 君臣(군신)이 편안하고 만 백성들이 화평한 것이다. 라고 말을 마치자 이내 몸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중략)
 
신라에서 황룡사 9층탑을 완성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1,日本(일본), 2, 中華(중화), 3, 吳越(오월), 4, 托羅(탁라), 5, 鷹遊(응유), 6 靺鞨(말갈), 7, 丹國(단국:거란), 8, 女狄(여적:여진), 9, 穢貊(예맥)의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신라 왕조는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죄인을 사면하고, 팔관회를 베풀면 외적이 침범하지 못하고 곧 진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기 643년 16일 자장법사는 본국으로 돌아와 탑의 건립에 대한 사항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듣고 群臣(군신) 회의를 열었다.
 
군신들이 말하기를 백제의 工匠(공장)이를 초청하여 건립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초청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의 工匠(공장) 이름이 阿非知(아비지)라는 사람이 왕명을 받고 신라에 와서 木石(목석)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맡고 신라는 伊干(이간) 龍春(용춘 일명 龍樹(용수)가 맡아 이 역사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거느리고 같이 일한 小匠(소장)은 200명이나 되었다.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백제의 工匠(공장)  阿非知(아비지)의 꿈에 백제 본국이 멸망하는 모양을 보고 아비지는 마음속에서 의심이 일어나 공사일을 중지하였더니 갑자기 대지가 진동치며  밤중과 같은 어둠 속에서 늙은 老僧(노승) 한사람과 젊은 장사 한사람이 金殿門(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老僧(노승)과 壯士(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백제의 아비지는 공사를 멈춘 것을 후회하고 마음을 고쳐 9층탑을 완성시켰다.
 
[3]. [삼국유사 탑상4, 황룡사9층탑]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643년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서기 645년 신라의 수도, 경주(서라벌) 남쪽에 높이 225척(80.16m)의 거대한 목조 탑이 창건했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에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으나 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불탄 이래 중수되지 못했다. (중략)

또한 삼국사기 및 寺中古記(사중고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553년) 황룡사를 처음 창건한 후에 선덕왕 시대인 貞觀(정관) 19년 을사(645년)에 처음 탑을 이루고 제 32대 孝昭王(효소왕)이 즉위한 7년 聖曆(성역) 무술(698년) 6월에 절에 벼락이 떨어졌다.
 
(寺中古記(사중고기)에서 이르기는 聖德王(성덕왕) 시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시대는 戊戌(무술)년이 없기 때문이다) 제 33대 성덕왕 경신(720년)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 무자(868년)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시대에 세 번째로 절을 다시 세웠다. 고려 光宗(광종) 즉위 5년 계축(953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顯宗(현종) 13년 신유(1021년)에 네 번째로 절을 重修(중수)하였다.
 
또 고려 靖宗(정종) 2년 을해(1035년)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고 또한 文宗(문종) 갑진(1064년)에 다섯 번째 重修(중수)하고 또한 憲(獻)宗(헌종) 말년 을해(1095년)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고 肅宗(숙종) 원년 병자(1096년)에 여섯 번째로 중수하고 또 高宗(고종) 16년 무술(1238년) 겨울에 몽고 병이 침입하여 西山(서산 : 선도산)에 병사 들이 불을 질러 황룡사 탑과 殿閣(전각)과 丈六尊像(장육존상)과 절집이 모두다 재앙을 입었다.
 
➤ 경주의 황룡사는 가짜이다
 
▲  황룡사 9층 목탑의 모형도  ©플러스코리아
刹註記(찰주기)에서 이르기를 황룡사 9층탑의 높이는 225척(80.16m)이고 鐵盤(철반)위의 높이가 42尺(척)이고 철반 밑은 183尺(척)이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화관광부와 문화재청이 경주시와 함께 경주를 역사문화도시로 확정하여 ‘경주 황룡사지’를 복원키로 하고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약 400억 원을 들여 황룡사지내에 회랑과 금당을 복원하고 특수영상을 이용하여 황룡사 9층 목탑을 재현하겠다. 고 발표하였다.
 
 
 
➤ 하곡현은 중국의 산서성인가? 경남 울산군인가?
 
고조선 5천축국 중의 1국이었던 서천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실은 큰 배가 산서성(山西城) 河曲縣(하곡현)의 絲浦(사포)에 들어왔다. 황금이 도착한 이 하곡현은 이병도가 조작한 한반도 속의 경남 울산 지방일까요? 중국 산서성의 하곡현일까요?
 
[삼국유사 탑상 제 4] 溟州(古河西府也)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명주(고하서부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 즉 명주는 (고대 하서부이다) 또한 溟州(명주)는 중국의 5대산에 있다. 五臺山是白頭山大根脈 : 5대산은 백두산의 뿌리가 되는 큰 산맥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 3 지리 1의 良州(양주)]
 
 ➤ 臨關郡(임관군)은 본시 毛火郡(모화군:蚊化(문화)라고도 씀)이다. 聖德王(성덕왕)이 城(성)을 쌓아 일본 적들의 통로를 차단하던 곳이다.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慶州(경주)에 합속하였다. 이 임관군에 縣(현)이 둘이 있다. 1 東津縣(동진현)은 본시 栗浦縣(율포현)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蔚州(울주)에 합속시켰다.
 
2.[河曲(一作河西)縣 婆娑王時 取屈阿火村 置縣 景德王改名 今蔚州]
 
해설= 河曲縣(하곡현)은 河西縣(하서현)이라고도 한다) 婆娑王(파사왕)때에 屈阿火村(굴아화촌)을 쟁취하여 縣(현)을 설치하고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蔚州(울주)라 한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주(註)
河曲縣(하곡현)의 絲浦(사포:지금 蔚州(울주->울산군(蔚山郡) 谷浦(곡포)에 왔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왕에게 충성했던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梁州(양주)를 경남 양산군에 속하고 臨關郡(임관군)을 현재 경북 월성군 외동면 일대를 울산군이라 하고 河曲縣(하곡현)은 현재 경남 울산 지방이라고 임의대로 조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또한 산서성(山西城)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를 포진도(浦津渡)로 지명을 바꾸어버렸다.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의 연혁]
 
울산(蔚山)은 일제식민지시대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울산군의 21개면이 14개면으로 통합되고, 언양군은 폐지되어 언양군의 6개면이 5개면으로 폐합,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울산군의 상부면·내현면이 통합된 부내면이, 1916년에 울산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1년에 울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62년에 울산읍·방어진읍·대현면·하상면 전역과 청량면·범서면·농소면의 일부지역을 병합해 울산시로 승격하고, 이 지역에 울산공업단지를 건설함에 따라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울산광역시 연혁참조]

➤ 울산시 동구 동부동의 가짜 동축사
 
▲ 가짜 동축사 ©플러스코리아
울산시 동구 동부동의 가짜로 만든 동축사는 울산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인정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동축사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동축사가 아닙니다. 동축사는 일제식민지시대의 1931년 창건(중수)하였다. 일제식민치하에서 가짜 동축사로 지정한 인후, 1975년 현대그룹 정주영회장 등이 시주하여 주지 도암(道庵)스님이 중창하였다. 이때 60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새로 지은 범종각에 두었다.

동축사 석탑은 본래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1977년 중창할 때 경내에서 약 40m 서남쪽으로 옮겼다. 기단의 한변 길이가 1.8m, 높이 3.25m이다. [동축사 연혁참조]
 
 
 
➤ 중국의 산서성 하곡현(河曲縣)에 동축사가 있다.
 
▲ 중국의 산서성 하곡현(河曲縣)  ©플러스코리아
중국 山西省(산서성) 河曲縣(하곡현)을 河西縣(하서현)이라고도 하며, 지금도 山西省(산서성)에 河曲縣(하곡현)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14쪽에 의하면, 산서성 동남쪽 70리에 하곡현(河曲縣)이있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황룡사는 산서성 하곡현 東南쪽 70리에 있음을 뚜렷이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의 山西省(산서성), 河曲縣(하곡현) 爽塏(상개) 지역에 지금도 東竺寺(동축사)와 大和寺(대화사)가 남아 있습니다.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현재 중국 산서성의 황룡사 9층탑은 고려 高宗(고종) 16년 몽고 병이 침입하여 불을 질러 1238년 전소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1056년 요 나라 때 응현5층탑(應縣五層塔)을 건립하였다. 고 조작 변조했다. 중국 산서성 하곡현의 5층탑은 황룡사 9층탑보다 13m가 낮은 67m이다. 현존하는 목탑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경주의 황룡사지]는 1976년부터 7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담장내 면적이 동서 288m, 남북 281m, 총면적 2만여 평으로 동양에서 최대의 사찰이며,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이 밝혀졌다. 고 발굴조사단이 보고하였다. 경주의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한(韓),중(中),일(日) 3국의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려 高宗(고종) 16년 무술(1238년)에 몽고 병이 침입하여 불을 질러 황룡사 탑과 殿閣(전각)과 丈六尊像(장육존상)이 소실될 때까지 황룡사는 건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국 山西省(산서성)은 신라의 영토이며, 또한 고려의 영토이었습니다. 꼭 믿으세요
 
➤ 신라를 동천축국(東天竺國)이라 칭했다.

중국 山西省(산서성), 河曲縣(하곡현) 爽塏(상개)지역의 사찰(절) 명칭을  東竺寺(동축사)라고 이름 한 것은 중국(중천축국)에서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5천축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천축국의 5천축국이 있었다. 마가다국의 아육왕(阿育王) 서천축국이고, 신라는 동천축에 해당하므로 동천축이라 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천축국(天竺國)을 인도(印度)로 인식하고 있으나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고조선을 천축국]이라 불렀다. 라고 명확히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중국과 공모(共謀)하여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우리나라의 고조선국 중천축국의 천축을 삭제하고 중국으로 조작한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천축국(天竺國)은 하느님과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세존이 탄강하신 나라입니다. 석가세존은 인류를 구제하신 인류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한 종교를 신앙하는 현세의 모든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겠으나, 고조선의 진한과 신라는 천부도(天符圖:천리,불도(佛道)를 지키며,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장손국으로서 하느님을 숭배하며 불교(佛敎)를 신앙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국왕이 친히 매년 동짓날 하느님(옥황상제)에게 제사하는 제천의례(祭天儀禮)가 일제식민지시대에 끊어졌습니다. 아...동방의 등불 대한민국이여...! 어서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장손국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다음은 [신라의 영토는 실로 광대하였다.] 가 연재됩니다.
 
박 병 역  위원 프로필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선양회 대표

△ 한국 고대사 탐구원 원장

△ 국가원로위원회 자문위원

△ 정통국사편찬회 집현전 대표

△ 국사편찬위원회 주최 초청강연



만정 07/04/26 [21:44] 수정 삭제  
  이진실들이 플러스코리라를통하여 국민들에게 하루빨리 전달되길 기원드립니다
최학종 07/04/27 [07:13] 수정 삭제  
  “상하이는 고대한국의 땅”에 중국 반발


일본언론 부채질, 임균택 교수 "식민사관 역사 다시 써야"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한 고구려사 왜곡 편입을 잇달아 시도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내 상하이(上海)를 포함한 동남부 지역이 고대 한국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는 국내 학자의 저서와 지도가 중국에 소개되면서 중국 학자와 네티즌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인터넷 포탈 등에 지도가 소개된 뒤 중국 내 논쟁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 언론도 이 사실을 소개하며 한-중 역사갈등이 심화되기를 부추키고 나섰다.

임 전 교수 “신라가 상하이 등 중국 동남부 태반 지배했다”

17일 등 중국 언론에 따르면, “상하이가 한국 고대왕조의 영토였다”는 한국학자의 역사책과 고대 동북아 세력판도를 보여주는 형세 지도가 소개된 뒤 각 신문과 등 중국의 유명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이같은 한국 학자의 주장에 대해 ‘비상식’ ‘무책임하다’는 중국 네티즌들의 반론이 쇄도하는 등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에 따르면, 한국 대전대학 부총장을 역임한 임균택(69) 전 대전대 인문학부 철학과 교수는 2002년말 출판한 자신의 저서 에서 “한국의 고대왕조 신라가 당 시대에 중국대륙에 진출해 상하이를 포함한 중국 동부의 태반을 지배했다”는 학설을 제기했다.

임 전교수는 당시 지도도 소개하면서 "삼국시대의 신라는 중국의 화북 일대와 시짱(西藏ㆍ티베트), 상하이(上海), 장쑤(江蘇), 저장(浙江)성 등을 통치했으며, 통일신라는 중국에 안시(安西), 안둥(安東) 도호부를 설치해 사실상 식민지로 운영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당시 당은 스촨성, 운난성 등 중국 서남부의 일부 지역만을 지배했다"고 덧붙였다.

임 전교수는 "통일신라를 이은 고려도 동북아 최강대국으로 러시아 극동 일부와 중국의 윈난(雲南)에 이르는 광대한 세력권을 형성했으며 당시 중국의 송나라는 통치권이 광둥(廣東), 광시(廣西), 푸젠(福建), 후난(湖南)성 일대에 국한된 소국에 불과했다"고 밝히고 있다.

임 전 교수는 다양한 역사서는 물론, 중국 산서성 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 후손의 지석(誌石)과 감숙성 양주에서 나온 흑치상지 유적 등을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삼아, "기존의 한국사가 친일사학의 영향으로 영토를 한반도에 국한하고 있다"고 기존 사학계를 비판했었다.

충남 부여 출신인 임 전교수는 대전대 부총장 등을 역임한 뒤 2001년 정년 퇴임했고 한국동서철학회 회장, 대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중국요령조선족대학 명예총장, 중국요령대학교 명예교수 등을 역임한 중국사 및 철학 분야의 대표학자다.

중국측 "황당무계"

이같은 임 전교수의 주장은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됐다.

또한 상하이의 유력지 의 인터넷판 동팡왕(東方網)도 재야 사학자 오재성씨가 모아 쓴 등 책들에서 발췌한 도표와 함께 “고구려·백제의 활동 범위가 내몽골·신장·산둥·저장·푸젠성 일대까지 다다른다”는 임 전교수의 책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는 단순히 보도에 그치지 않고, “책을 쓴 임 교수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한국에서 주류의 학설은 아니다” “이 책은 교과서로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상하이주재 한국영사관의 해명도 함께 보도했다.

는 또한 상하이 대학 문학원에 있는 한 중국의 역사연구학자의 말을 빌어 “한국의 고대왕조의 영토 범위는 조선반도를 나서지 못했다. 황당무계하다”고 잘라말하기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보도를 접한 중국 네티즌들도 “당나라의 신장 통치조직이었던 안서도호부가 통일신라의 티벳 통치기구로 묘사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지도를 자의적으로 제작하여 실은 것은 역사 왜곡”이라고 임 전교수를 맹비난했다.

일본 '한-중 갈등' 부채질

임 전 교수는 이번 논란과 관련, 최근 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역사학은 여전히 이병도를 위시한 일제 잔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선학(先學)이 주장했다는 이유로 BC 2백77년에 건국된 고구려를 BC 37년에 출발했다고 답습하는 게 대표적인 예”라며 “최근 터키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고구려가 아시아 공동의 조상이라는 논문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성과를 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국·중국·일본은 물론 아시아 역사 전반을 다시 써야 한다”고 반박했다.

한편 일본 등 일본 언론들은 17일 이같은 논란을 뒤늦게 보도하며 “한국이 독도에 대해서는 영유권을 주장하더니 중국에는 상하이 등이 자국의 영토라며 주장했다가 중국측의 비난 일색의 반응을 받고 있다”며 한-중 갈등을 내심 고소해하며 부채질하는 듯한 보도를 하고 있다.

/ 김홍국 기자 (archomme@views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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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07/04/27 [10:07] 수정 삭제  
  기사의 내용대로라면 분명히 우리 역사가 왜곡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이렇게 짚어 내시니 흐믓합니다.
다음은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라쪽도 중요하지만 백제와 고구려 역사 왜곡도 심층적으로 다루었으면 하네요.
건강하세요
뚜껑사랑 07/04/27 [12:35] 수정 삭제  
  역사가 왜곡되었다면 바로잡아야지요 정부가나서 하루빨리 검증해 주셨슴합니다
박병역 07/04/28 [15:02] 수정 삭제  
  국사는 “大韓民國” 국민으로서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 애국심을 낳으며,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하여 뜨거운 열정과 용기를 솟아나게 하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기 때문에 국사를 민족정기(民族精氣)라 합니다.

[민족정신을 형성하는 국사]를 세상에서 자국국민의 손으로 만들지 않고,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우리나라를 강탈한 침략자가 거짓 가짜로 만들어준 국사 사를 철폐하지 않고 그대로 교육시키고 있는 나라가 제 정신이 있는 민족입니까?

[경주의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연재하고 있는 필자는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시대에 대한민족 정신을 말살하고“한국청소년 정신을 일본인화시키는 망국적 국사”를 반드시 개편시키고자 법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945년 8.15 해방 60주년을 맞이한 2004년까지 망국적 치욕의 국사를 철폐하지 않고 7천만 대한국민을 기만(欺瞞)하고 있는 정부당국(대한민국 대통령,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들에게 통한과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근본적으로 뒤틀린 국사 바로 세우기 확인]의 제목으로 2004년 12월 9일 서울 행정법원(2004구합 38102번)에 제소하여 “법적 소송”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반드시 철폐하고,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현행 중, 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에서 잘못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고증서(考證書)로 명확히 밝혀서 행정법법원에 입증서(立證書)를 제출했습니다.

[고증에 의한 입증서]는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우리국사를 어떻게 말살, 왜곡, 변조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누구나 단 한번만 읽어 봐도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를 곧 바로 확인] 할 수 있고,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을 즉시 깨닫고 울분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본 사건은 1945년 8.15일 해방이후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가장 중대한 일대사건(一大事件)이며,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위한 국가적 중대사건이며 오욕의 역사를 깨끗이 씻기 위한 “일제청산의 제 1호 심판”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최고 법정기관의 대법원(2006두 8600번)에서 조차 역사문제는 법적으로 심판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유로 2006년, 9월, 8일 [심리 불 속행 기각] 되었습니다.

왜곡된 국사의 왜독(倭毒)에 중독되어 넋을 잃은 얼빠진 정부당국자를 각성시켜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국사]를 반드시 철폐시키기 위해서는 7천만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정부당국자와 맞서 투쟁 할 수 밖에 다른 방책은 없습니다.

일제의 손으로 만든 망국적 식민지 국사를 해방 62주년을 맞이한 2007년까지 철폐하지 않고 그대로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정부당국자만의 책임이 아니고, 7천만 우리 대한국민 모두가 다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필자는 [필명 민초님]의 말씀과 같이 백제, 고구려, 가야는 물론 고조선 삼한, 인류의 기원역사를 명확히 입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부모국과 인류의 4대문명과 종교원천국의 우리나라 역사를 고증으로 입증하여 연재할 것입니다.




본 연재 이전의 [이 기사 독자 의견]란에 의견을 쓰신 님들과
[만정님, 최학종님, 민초님, 뚜껑사랑님]등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님은 망국적 치욕의 국사를 반드시 철폐시키는 구국의 전사(戰士)와 같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뉴-스
http://pluskorea.net/ 의 여러 회원님들은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국사]를 확인하시고,
망국적 치욕의 식민지국사를 반드시 철폐시키는
구국의 전사(戰士)가 되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뉴-스
http://pluskorea.net/ 에 회원으로 가입하시어
성원과 함께 후원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동진 07/04/29 [01:41] 수정 삭제  
  플코에서 좋은 기사 많이 봅니다.
포탈에서도 플코의 성장세를 주목하고있더구만요.
선생님께서 좀더 상세하게 우리 역사왜곡을 바로잡아 주시고 신라만의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도 중요하다 십네요.
박 자문위원님의 넓은 혜량을 믿습니다.
최학종 07/04/29 [16:22] 수정 삭제  
  경주 서쪽에 위치한 선도산이 가짜라니 산도 가짜가 있고 진짜가 있나요.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것 같군요 물론 이글도 삭제 하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이런글들이 인터넷이 떠도는지 모르지만
경주에 고향을 두고 있는 한사람으로써 분기를 느낍니다.
장총통 07/04/30 [08:46] 수정 삭제  
  상해 임시정부 시절 장개석 총통은
당시 상해 임시 정부 부통령인 이시영 선생님에게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우리 중국 대륙 땅이 본래 당신들의 영토인 사실을 알고나 있소?
독립운동을 하기전에 먼저 당신들 역사 공부부터 제대로 하시오!!

"중국 대륙 땅이 전부 다 당신의 조선 땅이 였소
역사를 잃으면 나라를 잃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소.

조선역사부터 찾고 나서 독립운동 하시게나" 장총통




역사가 없는 민족은 문화가 없는 민족이고, 문화가 없는 민족은 정신과 얼이 없는 민족입니다. 아무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지라도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한얼원 07/04/30 [09:34] 수정 삭제  
  정동진 벗님과 여러 전사(戰士)님...!
경주의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제목의 연재는
신라 천년의 왕도로 굳게 믿고 있는 경상도 사람들이
그 어느 지역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므로

필자는
경주시청, 경주신문, 서라벌신문, 경주인터넷신문, 대구 매일신문, 영남일보,
경북일보, 등의 자유게시판에 [경주의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의 제목으로
글을 올렸으나 아직까지 의의를 제기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허허참

본 연재를 탐독하신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곧 바로 믿지 못하고,
당연히 반신반의하거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어리 둥절 할 것입니다.
한편은 어찌 이럴 수가? 하며 허탈 중에 믿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

진실을 밝히는 http://pluskorea.net/의 본 연재는
왜독에 중독된 한국인의 고질병을 치유하는 해독제와 같습니다.

그러나 무려 62년 동안 왜곡된 국사 교육의 왜독(倭毒)에 중독되어
넋을 잃은 한국인이 어찌 하루아침에 왜독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정동진 벗님과 같이 민족정신이 투철한 사람은 본 넷 5회의 연재 중에서
어느 1회 분의 한 봉지만 복용해도 왜독은 깨끗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국을 배신하고 일왕에게 충성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민족사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추종하는 충견(忠犬)들 소위 강단 사학자들과
망국적 현행 국사를 사수(死守)하고 있는 무리들의 고질병 치료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정동진 벗님 염려하지 마세요
아무리 골수에 깊이 각인된 한국인의 고질적 병자 일지라도
본 연재 12회의 해독제를 한 첩만 복용하면 왜독은 깨끗이 치유될 것입니다.

정동진 벗님의 힘 솟는 격려의 청량제에
쌓였던 피로가 확 사라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얼원/올림
안중근 07/05/02 [18:38] 수정 삭제  
 
감동은 07/07/06 [18:10] 수정 삭제  
  황룡사가 대제국 신라의 사찰이였다는 건 예전 알던 얘기고,한반도에 갇힌 이 숙명도 다 자연적인 이치겠지요
以神事원리에 의하면 일은 사람이 꾸미고 성사는 하늘이 주관한다헀는데 이제는 환골탈태되어 잃어버린 영토와 국권을 찾을 그날을 고대해야지요.
한얼 - 한민족의 성성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千里獨行에 百節不屈하는 정신으로 오늘을 살아갑시다..
천부도가 09/10/13 [13:18] 수정 삭제  
  황룡사는 충북 옥천군 환산(고리산)에 백제와 신라의 경계에 있던 절인데 지금도 터가 남아 있고...지금은 세심원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절이다.

그후 경주로 이주했으나....명맥은 아직까지 충북 옥천 고리산에 있음을 ......세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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