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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선도산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단독]조국을 배신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아무런 고증서도 없이..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4/20 [09:19]

경주의 선도산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단독]조국을 배신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아무런 고증서도 없이..

박병역 위원 | 입력 : 2007/04/20 [09:19]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의 아버지는 북부여 해모수 천제(天帝)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유화)이며, 또한 사소(娑蘇)입니다. [부도지 제 29장 ] : 박혁거세왕은 천성(天性)이 어질고 지혜와 덕성을 겸한 神聖(신성)이시며 현비(賢妃) 알영(閼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박혁거세는 몸에서는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큰 대인(大人)이었다. 신라는 고조선 삼한 중에 진한이며,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즉 혁거세 대인(大人)은 매년 10월 3일은 제천단(祭天壇)에서 흰옷을 입고 백의제(白衣祭)를 행하였다. 이 때 고조선 삼한 중에 진한, 마한이 진시왕정에게 패망하여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의 고조선 유민들이 하나로 뭉쳐 협력하였다. 비록 국경의 경계를 두고 방비는 하였으나, 국호(國號)도 정하지 아니하고, 또한 왕이라고 칭하지도 아니하였다.

혁거세왕은 달구(達丘)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율포(栗浦)에 해시(海市)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항상 나라를 순행(巡行)하시며, 뽕나무를 많이 심어 농상(農桑)을 권장하시어 각 가정마다 베를 짜고 백성들은 비단 옷을 입었다.

인자하신 혁거세 대인(大人)은 항상 백성들에게 도리(道理)를 가르쳐 선행(善行)을 권장하여 백성들 또한 어질고 순박하여 농작물을 들에 쌓아 두어도 도적이 없었다. 이와같이 나라를 부흥시키고 여러 사람들과 고락(苦樂)을 같이 하였다. 비록 나라는 부강했으나 외국에는 방패와 창을 쓰지 않고, 이웃 나라와 더불어 평화를 보존하여 군자(君子) 국이라 칭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국정(國政)은 선세(先世)의 법을 준수하여, 제회(祭會:화백회의)에서 의결되지 아니하면, 일찍이 한가지의 일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수계위법(領首繼位法) 역시 혈통과 씨족 계열에 한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비록 평민이나 제후국 사람이라도 현명한 사람을 선택하여 국가의 영수로 삼았다.(중략)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를 낳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하백의 딸 유화, 사소)는 地仙(지선)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 오래 머물러 계시며 신라국을 진호하시어 신라국은 신령스러운 일이 매우 많이 일어났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仙桃聖母 隨喜佛事(선도성모 수희불사)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는 佛殿(불전:대웅전)을 새로 수리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안흥사 주지 지혜에게 도움을 주시었다. 신라의 진평왕조(서기 579-632년) 때 이름이 지혜라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행실이 많이 어질었다. 安興寺(안흥사) 住持(주지)로 있으면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새로 수리하고자 하였으나, 자금력이 모자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밤 꿈에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간드러지게 예쁜 선녀가 쪽빗 머리에 푸른빛의 비취 구슬로 장식하고 내려와서 위로하며 약속하시기를 나는 선도산의 神母(신모=사소, 유화) 이니라,

너희가 대웅전을 수리하기를 소원하고 있으니 내가 기뻐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협조하고자 하노라, 내가 앉은 좌대 밑에서 금을 취하여 主尊佛(주존불) 三像(삼상)을 모시고 점등하고, 53 六類聖衆(육류성중)과 모든 天神(천신)과 五岳(오악)의 神君(신군) 그림을 그려서 벽 위에 붙이고 매년 봄과 가을 두 계절 10일 날은 선남선녀 들을 광장에 모아서 일체의 모든 含靈(함령)들을 위하여 占察法會(점찰법회)를 개최하는 일을 규정으로 삼아 항상 잊지 않도록 하라. 지혜는 놀라운 생각에 승도를 거느리고 선도산 神祠(신사)로 가서 좌대 밑의 굴에서 황금 160량을 얻었다. 지혜는 지극 정성으로 공을 다하여 神母(신모)가 일러주신 말씀에 의거하여 불상을 갖추고 모셨다. 그 事跡(사적)은 아직 남아 있지만 법회의 일은 폐지되었다.(중략) 또 聖母(성모:하백의 딸 사소)는 하늘의 모든 仙女(선여)들에게 비단을 짜서 붉게 염색된 비단 직물을 가지고 와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주었다. 신라 사람들은 이 신비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비로소 神驗(신험)을 알게 되었다.(중략)

신라의 진평왕조(서기 579-632년) 때 하늘의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천사가 신라의 진평대왕을 배알하고 옥으로 만든 天賜玉帶(천사옥대)를 주시었다. 천사가 말하기를 이 玉帶(옥대)는 옥황상제(하느님)님이 내려 주시는 보물이니 잘 간직하여 대대로 전하도록 하시오, 신라국의 진평왕은 친히 꿇어앉아 길이가 十圍(10위)이고, 62개의 옥으로 새겨서 장식하여 만든 요대(허리띠)를 천사로부터 받았다.(후략)
 
경주의 선도산은 가짜이다
 
▲선도산 정상의 삼존불상(三尊佛像) 사진.     ©플러스코리아
한반도 속의 선도산은 높이 380,2m이며 경주의 진산으로 서악(西岳), 서술(西術), 서연산(西鳶山), 서형산(西兄山)이라고 불린다. 산성내의 정상부에 보물 제65호로 지정된 마애석불입상이 남아 있다.
 
선도산 동면의 남쪽에 태종무열왕릉을 비릇하여 김인문(金仁問)과 김양(金陽)의 무덤이 있고 북쪽 서악서원의 뒤쪽 산허리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있고, 선도산의 서면 애공사지(哀公寺址)의 서쪽에 법흥왕릉이 있다. 라고 돼 있습니다. [국립경주 박물관 참조] 

 
황제헌원과 선도산(仙桃山)
 
신라의 조상 황제헌원은 신라의 仙桃山(선도산)에 살고 있는 神?(신도)와 鬱壘(울루) 형제에게 인간 세상의 귀신을 다스리게 하였다. 선도산에는 꾸불꾸불한 나무 가지가 삼천리를 덮을 수 있는 큰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복숭아나무 꼭대기에 금색의 닭 한 마리가 있었다. 그 금색의 닭(鷄神(계신:신라에서 닭신(소호 금천)을 믿고 임금의 관에 닭의 깃을 꽂았다)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때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 닭은 햇살이 몸을 비추면 찬란한 금빛을 비추었다, 또한 扶桑樹(부상수: 뽕나무)에도 구슬 소리를 내는 닭이 있었다.
 
동쪽의 복숭아나무와 북쪽의 뽕나무 사이에 매일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문이 있었다.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鬼門(귀문) 앞에 신도와 울루 두 형제를 지키게 하여 인간 세상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각양 각색의 크고 작은 귀신들을 붙잡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귀신들은 밤에만 나타날 수 있고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 귀신들 중에서 흉악하고 교활한 귀신과 인간 세상에서 착한 사람을 해친 귀신들이 돌아오면 두 형제는 즉시 그 귀신을 갈대 끈으로 꽁꽁 묶어 큰 호랑이 먹이로 던져주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을 해치는 흉악한 귀신은 점점 줄어들었고 또한 사람을 해치는 일도 줄어들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복숭아 나무에 갈대 끈을 들고 있는 두 신의 모습을 만들어 대문 양쪽에 걸어두고 큰 호랑이 한 마리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혀 두고 사악한 마귀를 막았다. 혹 어떤 사람은 두 형제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문 위에 붙이기도 하고 혹은 두 형제의 이름을 써서 붙혀도 효과는 같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곧 고대부터 전래된 門神(문신)이다.
 
또 다른 문신은 대장군의 모습에 손에 무기를 든 秦叔寶(진숙보)와 胡敬德(호경덕) 두 장수가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唐太宗(당태종) 이세민은 항상 몸이 쇠약하여 날마다 밤에 귀신을 보고 두 장수를 불러 자신의 방문을 지키게 하자 귀신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후세에 두 장수가 門神(문신)이 되었다. [중국 신화] 2천년 전은 현세와 다른 세상을 이해합시다.

신라의 진짜 선도산은 중국 절강성에 있다
 
▲     ©플러스코리아

 선도산(仙桃山)은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부인이며,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를 낳은 유화(柳花=사소(娑蘇) 성모(聖母)님이 오랜 세월로 머물러 계신 대한민족의 성지(聖地)입니다. 경주시의 충효동 서산의 선도산은 이병도가 조작한 가짜이고, 중국 호북성(안휘성)의 선도산이 진짜인지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선덕여왕의 묘가 중국 절강성 낭산(狼山)에 있습니다.  
 
▲경주 선덕여왕의 가짜묘지     ©플러스코리아
 선덕여왕의 진짜 낭산(狼山)경주 선덕여왕의 가짜묘지 현재 경주 보문동 낭산(狼山) 기슭에 선덕여왕 능으로 추정 되는 능이 있다. 능의 둘레는 약 73m에 이르며, 소형의 자연석을 호석으로 이용하여 전체적으로 다른 왕릉에 비해 빈약해 보인다. 현재의 모습은 일제식민지시대의 1900년 이후 후손들이 보수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디지털박물관]에서 발췌. 
 
 
▲ 선덕여왕의 진짜 낭산(狼山) ©플러스코리아
좌편의 지도에서 신라 선덕여왕의 묘지는 강소성의 낭산일까요 경주 보문동일까요? 대답하세요 

넋을 잃은 7천만 한겨레여...!

조국을 배신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아무런 고증서(考證書)도 없이 자신의 임의대로 경주(慶州)를 신라 천년의 왕도로 지정한 이후 중국 절강성의 선도산을 경북 경주의 선도산으로 얽어 맞추었던 유적물입니다. 오직 개인의 영달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이병도는 국사만 왜곡하고 어찌 각 문화재는 조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적(遺跡)물은 옛 시대의 역사를 조명함에 매우 가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으나 한국의 유적물은 전부다 조작된 유물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습니다. 즉 가령 한강 이북에서 발굴되면 고구려 유적, 경북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은 신라의 유물, 충청도 부여와 전라도 지방에서 출토되면 백제의 유물로 명명하고, 김해지방에서 출토되면 가야 문화라고 지정한다. 왜곡된 역사 지식의 고정관념으로 얽어 맞추기 식으로 지정함으로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삼국의 영토를 다시 고착화 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한(韓),중(中),일(日) 3국의 사학자에게 고(告)함

[상기의 본문]에 대하여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왜곡된 국사교육의 거짓 지식이 고질화되어 처음은 믿지 못하고 불신할 것입니다. 만약에 한(韓), 중(中), 일(日) 3국의 사학자는 물론 국내외의 넷 티즌 여러분은 상기의 본문에 대해 도저히 믿을 수 없거나, 납득하지 못하고 의문이 있는 사람은 [이 기사 독자 의견] 란에 의의(疑意)를 제기해 주시면 성심 성의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경주의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가 연재됩니다.
특허수호 07/04/20 [11:14] 수정 삭제  
  제대로된 역사 교육만이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친일,친미,친중의 왜곡역사학자가 모두 사라지는 그날까지.....
더불어 07/04/20 [18:49] 수정 삭제  
  두려울 것이다.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이...
알에 갇힌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그날이...
민초 07/04/20 [20:30] 수정 삭제  
  이런 굴 쓰시기가 쉽지 않으신데, 민족을 위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건강하시고 내내 우리 후손을 위해 애 좀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쪽 학자 보다는 우리나라에 민족이라며 왜곡하는 역사학자들이 문제라고생각합니다.. 어느 세월에 민주화가 되어 저들의 만행을 달 알게 될까요?~
박병역 07/04/22 [14:12] 수정 삭제  
  ♦대한민족은 얼빠진 민족인가?

제정신이 있는 민족인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드는 매우 중요한 국사를 우리국민의 손으로 만든 국사가 아니고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가 대한민족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우리나라를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한 계략으로 만들어 준 식민지시대의 조선사를 해방 62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그대로 교육하고 있다면 얼빠진 민족인가? 제정신이 있는 민족인가? 해방이후 국사편찬위원들 중에서 우리나라를 침탈한 일본인 학자들이 무슨 목적으로 조선사를 만들어 주었는지 탐구하여 발표한 학자가 있습니까?


➤ 침략자가 어찌 정통적 국사를 만들어 주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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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국사는 근현대사를 제외하고, 우리국민의 손으로 만든 국사가 아니고,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시대 일왕의 칙명을 받고,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조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해 온 심혈을 쏟으며 무수한 거짓 가짜 위서(僞書)를 저작한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 이병도” 주도로 만든 망국적 국사입니다.


1905년 국권을 탈취한 일제는 하느님을 숭배한 한국인의 천손사상(天孫思想)과 부모국의 한국 역사를 말살하지 않고, 어찌 식민지로 통치할 수 있겠으며, 전통적 민족문화를 말살하지 않고 어찌 우리나라를 영원히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즉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1910년 “반도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조선사를 가장 공평하게 저작한다는 미명으로 한국의 국내는 물론 중국 각처에 산재했던 우리나라의 환인, 환웅, 단군관계의 증서 적 고대 사료를 전부 다 색출 수거하여 무려 20만권을 불태워 없애고, 거룩한 성군(聖君)의 역사를 짤라 없애고, 한국의 전통적 고유문화를 철저히 말살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하여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해 거짓 가짜로 조선사(현행국사)를 만들었다는 [조선사편수회 회의록과 조선사 편찬지침]이 지금 대한민국 정부문서 보관소에 소장돼 있습니다. 제 정신이 있는 정상적인 한국인은 현행 국사를 거짓 가짜로 만들었다는 지침서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일제의 망령에 민족혼이 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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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고, 세계의 인류문명을 주도한 4대문명의 원천국을 세계에서 문명이 제일 뒤떨어진 미개한 민족으로 비하(卑下)하고, 세계의 인류를 구제한 종교 원천국의 우리역사를 말살한 증서가 정부기록문서 보관소에 소장돼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주체적으로 발전된 나라가 아니라 항상 대국에 조공을 바치며 유지 발전된 나라로 날조하여 한반도 속의 소국 적 사대역사관과 철저한 식민사관의 망국적 치욕과 패배의식의 역사로 구성되어 대한민국의 장래를 망치고 있다면 어찌 일제의 망령에 민족혼이 죽고 있지 않는가? 또한 망국적 국사를 철폐하지 못하도록 온갖 궤변으로 호도하며 국사개편을 방해하며 적극적으로 사수하고 있는 무리들 역시 죽은 일인학자와 이병도의 망령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가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교육에 무려 62년 동안 세뇌되어 뇌리 깊숙이 각인된 거짓 지식으로 분별력을 상실하여 현행 국사가 “근본적으로 뒤틀린 실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고증에 의한 역사적 진실”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습성의 고질적 병폐가 곧 일제망령에 넋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제정신이 있는 사람은 일제만행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일제망령에서 벗어나자!



최학종 07/04/24 [20:19] 수정 삭제  
 




넷티즌 여러분
아래의 글을 탐독하시면 그 얼마나 치밀한 계획으로
한국인들이 의심없이 믿을 수 있도록 신라 천년 고도를 조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36년 고도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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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가 관광도시로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이지만 지금 당시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지난 2004년 불국사 성보박물관 부지를 발굴조사한 경주대학교 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건립된 불국사 철도관광호텔터를 확인하였고 건물의 규모를 밝히고 각종 생활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호텔은 불국사 복원정비사업에 의해서 1973년에 철거되었지만 지난날 경주지역의 관광사업과 관련된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지역을 회고하는 여러 글을 읽다보면 시바타 여관(柴田旅館), 다나카 사진관(田中寫眞館)과 같은 이름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현재의 경주시가지 안에서 그 옛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는 없다. 필자는 작년 우리 연구소를 방문한 사이토 타다시 선생을 안내하였다.

...당시 사이토 선생은 청년기에 근무했던 구 경주박물관 건물(현재 경주문화원)을 둘러보고 자신이 살았던 여관의 흔적을 찾으면서 당시 경주박물관 주변 풍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습을 설명해주었다.

...그 내용을 들으면서 일제강점기 경주시가지 풍경에 대해서 다시금 돌이켜볼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다시보는 경주와 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1993)과 『경주의 옛 사진집』(경주문화원, 1994)이 있지만, 당시 경주읍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리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한일문화유적답사연구소의 故박정호 선생이 소장한 라는 관광지도를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지도는 1936년 12월 1일 경주읍 서부리 124번지에 소재한 다나카 동양헌 사진관에서 발행한 관광지도로 당시 경주시가지의 옛 모습과 관광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장자의 양해를 구한 후 본 지면을 빌려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관광안내도인 는 두터운 표지 안쪽에 양쪽으로 인쇄된 지도를 삽입하여 붙인 형태로 전체크기는 가로 10.8㎝, 세로 23.4㎝이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61.7㎝, 세로 46.0㎝이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앞면에는 주요 관광지를 그림과 설명문으로 나타낸 지도가 칼라로 인쇄되어있고, 뒷면에는 가 단색(갈색)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시내 주요 건물들의 위치와 관광기념인을 날인할 수 있는 담뱃가게와 여러 가게들의 위치가 표시되어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당시 경주읍의 여러 가지 현황들이 게재되어 있는 점이다. 먼저 경주읍의 전체 인구를 살펴보면 한국인(조선인)은 18,846명으로
남자 9,300명, 여자 9,545명에 호구 수는 3,827호이며, 일본인(내지인)은 1,008명으로 남자 513명, 여자 495명에 호구 수는 252호이다.외국인은 국적이 표시되지 않았지만 총 36명으로 남자 28명, 여자 8명에 11호였다. 따라서 당시 경주읍의 인구는 19,748명임을 알 수 있는데, 일본인이 차치하는 비율은 전체 가구 수의 6.58%였다.


...이외에도 여러 기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표시되어 있는데, 관공서는 경주군청, 경주세무서, 경주읍사무소,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 대구전매국 경주판매소, 경상북도 경주사방(砂防)사업소, 경주경찰서, 경주우체국, 경주역(機關區, 保線區), 곡물검사소 부산지소 경주출장소,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등 모두 11곳이 있고, 주요 단체로는 제국재향군인회 경주분회, 국방의회, 경주 소방조, 경주 청년단, 경주(조선인) 부인회, 경주군 체육협회, 경주 번영회, 경주 상공회, 경주고적보존회, 적십자사 경주위원회, 애국부인회 경주분회, 경주 불교부인회 등 12곳과 경주군 농회(農會), 경주학교조합, 경주금융조합, 경주동부금융조합, 경주산업조합, 보문수리조합 등 6개 조합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주주재소, 경상합동은행 경주지점, 경주전기주식회사, 경주양조주식회사, 경주국자(子-누룩)주식회사 등 5개 회사가 표시되어 있었다.

...시내에 소재한 가게들은 업종에 따라 구분되어 있는데, 토산물 가게로는 골동품 가게와 사진관, 과자가게가 등재되어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나카 동양헌(유적 그림엽서, 관광품, 기념사진 등), 구리하라 상점(각종 골동품), 부인상회·신라당(각종 관광 기념품 일체), 후지이 상점(鈞鐘煎餠-종 모양의 과자, 기념품 과자류), 나카무라 상점(기념품, 일본·서양그릇 등)과 같은 상점이 6곳과 여관 7곳(시바타, 아사히, 마쓰야, 慶州, 安東, 京城, 月城여관),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 7곳(木下, 村上, 松嘉, 松瀨, 阪本, 中島, 藤戶상점), 과자가게 2곳(木浦상점, 東光상점), 철물점 3곳(小森, 竹內, 古村상점)과 가와히양조소, 가와히약국, 築城상회, 福助요리집, 미우라양복점, 하시모토정미소, 하시모토약국, 文進堂인쇄소, 博文堂인쇄소, 龍野자동차, 彦陽자동차, 李反물점, 나가노공무소, 우에노재목점, 야마모토재목점 등이 등록되어 있다.

...이러한 현황으로 볼 때 당시 경주읍내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전체 인구의 6.58%에 지나지 않지만, 경주읍 안에 소재한 여러 상점들을 대부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인 면에서 한국인보다 훨씬 좋은 여건 아래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주주재소, 경상합동은행 경주지점과 같은 식민지지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기업들의 존재로 볼 때, 일본인들은 경주읍에 거주하면서 조선총독부와 관련 기관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관광 부분에 있어서 경주박물관 소장품 현황이 소개되어 있는데 석기시대 100점, 신라시대 400점, 고려시대 50점, 조선시대 30점, 석조물 100점 등 모두 680점의 유물이 소장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세한 내용이 들어있는 경주관광 안내도가 만들어진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지도 앞에 적힌 글 내용처럼 경주의 고적을 빠른 시간 안에 둘러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관광유람차의 존재를 홍보할 목적과 함께 시내 여러 곳에 소재한 상점의 이용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주읍내에 소재한 여러 고적들을 자동차로 관람할 수 있는 관광유람차는 적어도 1곳 이상의 업체에서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중앙로에 위치했던 오카모토유람자동차에 대한 내용만을 소개하고 있는데, 고시된 를 살펴보면 이용요금은 구간별 정액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광지도에 게재된 관광구간을 살펴보면 먼저 시내구간과 서악동·동천동구간 그리고 불국사·괘릉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동차의 특성상 기본 탑승인원인 4명을 기준으로 요금이 책정되어 있는데, 인원이 늘어나면 추가분에 대한 요금이 증액되고 있다. 이 경우 별도의 차량이 운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관광지 요금 특기사항

1. 분황사, 석빙고, 포석정, 오릉(황룡사, 첨성대, 안압지, 계림서행)개개 관람시간 약 5분 4명 - 金 2원5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25전이 증액됨. 소요시간
약 1시간 - 임대요금은 滿員의 요금임

- 4인 미만의 경우에는 4인 요금을 받음
2. 무열왕릉 및 사면석불 안내 4명 - 金 1원2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20전이 증액됨 소요시간
30분
3. 경주~불국사간 편도 도로 직통안내 4명 - 金 2원5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50전이 증액됨
상기 코스에 포함된 괘릉순회 안내 4명 - 金 1원2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20전이 증액됨
4. 역에서 맞이하는 경우 1명 2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20전이 증액됨


...고도유람 자동차로 읍내 여러 유적을 모두 둘러본다고 가정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4인 기준으로 7원40전이다. 이 금액을 당시 쌀 가격을 기준으로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살펴보면, 1935년 쌀 80㎏의 가격은 17.8원(1936년 경성상공회의소에서 소비자물가지수를 조사하였을 때 쌀 80㎏의 가격은 17.8원이었다)이므로 2006년도 정부추곡수매가인 118,460원(80㎏)과 비교하면, 당시 1원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6,655원이 된다.

...따라서 경주읍내의 여러 유적들에 대한 관광을 자동차를 빌려서 할 경우 소요되는 전체 비용은 약49,247원이 된다. 그런데 이 당시 물가를 쌀 가격이 아닌 금(金)의 가격으로 비교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된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연방준비은행의 금 매입가격으로 정한 1온스당 35$였던 금의 가격은 지금 현재 672.2$이므로 전체 물가는 19.21배가 올랐다. 그러므로 현재 화폐개혁을 통해서 평가절하된 화폐가치를 반영시킨 비용은 341,760원이 된다. 2007년 현재 경주에서 택시를 하루 임대해서 관광할 경우 소요되는 비용이 19만원(평일)인 점으로 본다면 당시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은 매우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유적관광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에 게재된 시가지 약도를 살펴보면 현재 모습으로 정비된 경주시가지 이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현 대릉원 북쪽을 지나가는 부산-대구 철도선로의 존재와 경주읍성 안쪽에 위치한 여러 관공서 건물의 존재이다. 대부분 지금 시가지 안에 위치한 관공서의 위치와 동일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지만, 재판소는 경찰서 서쪽으로 이전하기 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지금은 없지만 대구로타리에서 동서방향으로 가설된 철도는 앞으로 이루어질 발굴조사를 통해서 그 흔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이 1936년에 제작된 경주관광지도를 살펴본 결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주시가지의 옛 풍경을 조금이나마 되짚어 볼 수 있었고, 당시에 이루어진 관광사업의 일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 경주지역의 관광산업은 위기라고 이야기되고 있고 시민들의 걱정도 많다. 그러나 지난날 경주를 찾았던 사람들이 바라보던 풍경과 오늘의 경관 사이에서 무엇이 바뀌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관광도시 경주의 풍경은 지난 과거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올해 3월 1일 자료제공자였던 한일문화유적답사연구소의 박정호 선생님이 갑자기 타계하였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마친다.


작성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차순철

약..력

현. 경북 경주 소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 위덕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 전임연구원
- 영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과 연구원 등 근무


연락처 054-777-8841.. csc@ocp.go.kr

참고= 신라사학회에서 복사했습니다.
홈=> http://cafe.daum.net/sillasa


박병역 07/04/26 [23:40] 수정 삭제  
  경주 서쪽에 위치한 선도산이 가짜라니 산도 가짜가 있고 진짜가 있나요.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것 같군요 물론 이글도 삭제 하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이런글들이 인터넷이 떠도는지 모르지만
경주에 고향을 두고 있는 한사람으로써 분기를 느낍니다.
박철 19/01/16 [03:17] 수정 삭제  
  산이 진짜와 가짜라는 개념은 없습니다만 우선순위는 있습니다. 박병역님이 알고계신 아달라니사금이 진짜 경주 남산 배리삼릉에 모셔져 있다고 착각하고 계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제가 알고 있는 아달라니사금은 본래 狼山(낭산)에 처음으로 모셔진 왕 입니다. 그곳이 본래 왕이 생전 량대를 설치하여 더위를 피해 휴양을 즐겼던 곳 이라 왕의 각별한 곳 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상대 박씨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단독능묘를 쓰신걸로 알고 있구요 전대 혁거세 차웅 유리 파사 지마 께선 모두 사릉원에 매장되어 계십니다. 분기를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신라계 박씨 김씨들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왕릉을 마음대로 비정한 사실을 조선 영조 시절 학자 유의건이 나릉진안설 을 통해 왕에게 고한 사실을 모르고 계셨나요? 이때에 이르러 폐단이 심화되어 지금까지 고쳐지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신라 왕실의 정통성은 고대 요임금 순임금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그 맥을 잇는 것이 정통 입니다. 따라서 세습제가 아닌 선양제를 위주로 왕위를 이어갔습니다. 누에와 양잠을 권면하여 비단과 같은 생산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었고 신라때에 빛을 보게 되었지만 요임금 순임금 시절때도 누에와 양잠이 성행하였습니다. 이게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보시나요? 상대 박씨 왕들의 기록에 보면 요순임금에 대한 내용이 간간히 등장하는데 이게 무엇 때문일거라 보입니까? 신라는 최고급 비단으로 세계에서 이름 난 곳 인데 조선시절 그 상황이 어땠습니까? 최고급 비단은 중국에서 들여왔지요 왜요? 조선은 비단조차 못 만드는 나라 였습니까?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중국 최고의 비단시장이 중국 항주에 있다는건 잘 알고 계시지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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