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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는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사'다!

"중국을 지배한 세력은 유목세력으로 단군조선의 후예들!"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09/07 [00:52]

'중국사'는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사'다!

"중국을 지배한 세력은 유목세력으로 단군조선의 후예들!"

윤복현 저널리스트 | 입력 : 2009/09/07 [00:52]
물은 흘러야 하고 바람은 불어야 하고 피는 혈관을 타고 흘러야 한다. 한반도와 유라시아는 하나로 통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결코 단절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언어와 국호와 영역은 달라 졌어도 유라시아와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역사와 혈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 보편적 가치로써 민족과 인류를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이념만이 전쟁과 대립없이 아시아와 유라시아에 분포된 한민족이 공존번영하는 길이다. 그 중심에 코리아(고구려)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
 

빛은 동방(한국)에서!!유라시아와 중국을 지배했던 흉노.몽골.선비.돌궐족은 모두 한국어를 사용했던 동방족(한국인들)의 줄기다. 고대 동방지역(한반와 만주) 한국인들의 언어와 문자와 문화는 현인류문명의 모태다.
 
민족분단도 서러운데, 한반도 반쪽에 안주하며 마치 대한민국을 자기들의 나라라고 착각하며 살아 가려는 지역패권주의는 민족통일과 유라시아 한민족의 대통합과 공존번영을 위해서 확실히 청산되야 할 정치와 시대의 과제이다. 우리 민족사를 통하여 진취적이고 대륙적 기상으로 남북의 평화적 통일과 간도반환 등 고토회복에도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이 크게 번영하려면 한반도는 너무 좁다. 최소한 인구 1억 이상은 되야 하고 영토도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포함하여 만주까지는 되야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영토를 규정한 헌법조항도 <대한민국 영토는 고토회복이라는 다물정신에 따라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포함하여 한민족의 역사영역으로 삼는다.>로 개정되야 하는 것이다. 9월 1일 간도상실 100주년을 맞이하여 간도찾기국민운동본부에서는 간도는 100년전 대한민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는 탄원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출하고 국제소송을 위한 국민청원운동에 들어간 것은 행동하는 민족양심의 발로로써 모든 국민이 동참해야 할 것이다.
 
마고문명을 계승한 한국-신시배달국을 계승한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대진국(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와 중국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의 나라 김나라를 개국한 시조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라왕족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고토회복과 함께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신시배달국 시대 녹도문자-현인류세계최초의 문자라 할 수 있다.


▲동방에서 중동지역으로 이주해 온 슈메르인들의 쐐기 문자(왼쪽)와 고대 동방족(한국인들)의 갑골문자(오른쪽)는 유사하다-슈메르어와 현대 한국어는 발음과 의미가 거의 같다(예: 엄마, 밭, 그, 나, 길, 아비, 님 등)









▲ 세계최초 신시배달국 녹도문자는 한자와 한글, 그리고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중국 화하족이 중원지역을 기준으로 동이.서이.남만.북적으로 나눌 것을 알 수 있듯이 당시 중국전역을 동방족이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을 때 소수의 화하족이 백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서쪽에서 동진하여 황하강지역에서 살고 있을 때 동방에서 이주해온 염제신농씨족이 이들 화하족들을 보살펴 농사짓는 법과 약초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황제헌원이 이들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력이 점점 커졌다. 오만방자한 황제헌원이 중국지역을 제후국들로 삼고 있는 신시배달국 천황 치우천황에게 반란을 일으켜 도전하였다. 치우와 황제헌원은 77회의 전쟁을 통하여 결국 치우는 백전백승으로 승리하고 황제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 중국지역을 완전히 신시배달국의 제후지역으로 복속시켜 통치했다.
 
중국지역의 황하문명은 요서지역의 배달문명을 통하여 발전하였고, 중국지역은 완전히 한국인들의 독보적인 역사무대였다.중국의 문자인 한자도 바로 세계최초의 신시배달국 문자 독도문자를 변형시킨 갑골문자(상형문자)다. 슈메르문자와 중국 갑골문자는 문자구조가 같다. 로마문명으로 계승되는 이집트.그리스.히브리문명의 근원이 되는 슈메르문명도 한국문명이라는 반증이다. 화하족들이 발음을 정확히 못해서 문제이지 한자의 발음자체가 한국어다. 슈메르언어도 한국어다. 이 처럼 중국과 유라시아.아메리카 문명은 한반도와 만주의 동방족의 문명에서 흘러 나간 줄기문명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중국문명이야 당연히 한국문명의 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년 이씨조선은 중국지역의 나라들을 상국으로 삼는 소중화에 빠져서 그 동안 많은 국민들이 유라시아 초원을 호령했던 흉노(단군조선의 제후국),중국을 지배했던 선비족(수.당)과 몽골, 그리고 신라의 후예 금.청나라를 마치 우리와 동족이 아니라, 아무런 문화도 없는 야만족에 불과한 오랑캐 취급을 하며 대륙과 한반도를 단절시켜버린 역사관이 바로 조선의 유학자들과 일제 반도사관론자들이였다. 속히 반도사관에 탈피하여 유라시아를 하나의 역사무대로 인식하는 유기체적인 역사관이 필요하다 본다. 그러했을때만이 한국의 줄기로서 흉노.몽골.선비.돌궐이 결코 다른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국가주의를 넘어 유라시아 지역의 모든 한민족이 하나로 공존할 수 있는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지성으로 존경받는 중국혁명의 지도자 주은래 

1960년대에 북한을 방문했던 중국의 지성인이면서 중국혁명의 지도자 주은래는 "동북방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가 중국의 영토를 크게 넓혀 준 점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사과했다.
 
우선 그는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우선 단군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했다.
 
중국영토를 크게 넓힌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
 
주은래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을 사과했다. 주은래는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한 시대의 거목다운 깨끗한 역사인식이자 사과였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 역사침공을 벌이고 있는 현 중국 지도부는 주은래의 표현을 빌면 졸렬한 '쇼비니스트'(개념없는 광신적 애국주의)에 불과하다.
 
당시에는 중국정부가 한족우월주의 사관으로 중국사를 왜곡했다. 치우는 중국시조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만리장성 이북의 동방문명의 우월성이 드러나면서 치우도 비로소 중화시조로 등극했다. 이것은 한족의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방편이자, 중국의 분열을 막자는 차원이였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위그르.티벳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고 만주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서북공정.동북공정을 정부차원에서 진행시킨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서북공정.동북공정의 목적은 중국영토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자료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1960년대와는 완전히 상반된 변화이다. 이것은 결국 중국지역의 문명의 뿌리가 동방족의 위대한 배달 한문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겠다는 의미나 같다.

▲ 성이 김씨인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義-부의 실제사진). 조용한 재판장 안이다.    
100년전까지 중국대륙은 백두산지역에서 일어난 청나라가 지배한 나라였다. 청나라는 금(김씨 나라)를 계승한 나라다. 몽골에 멸망당한 금나라 시조는 아골타다. 아골타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의 아들 김행의 6대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즉, [金]의 개국시조을 기록하고 있는 [금사]에는 금나라 시조 아골타는 신라인으로 마의태자의 6대손 즉 마의태자로부터 7대째가 되는 인물이며 성이 김씨이기 때문에 국호를 김(금)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나라를 계승한 청나라 황실의 성씨가 애신각라인데, 만주어이고 한자로는 김씨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흉노김씨족의 나라 신라를 잊지말자는 의미가 애신각라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중국사가 아니라 한국사다. 굳이 지금의 중화 인민 공화국이라고 해서 중국사라한다면 그건 20세기 초 만주족의 청나라의 300년 지배에서 벗어난 한족들의 지금까지의 약 100여년의 역사고, 그렇지 않다면 중국사가 아니라 당연히 한국사다. 손문 등 중국 신해혁명을 일으킨 자들이 내세운 표어가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였다!!

초원을 누비던 단군조선 제후국들의 역사가 중국사다!(흉노.몽골.선비 등 초원나라들이 모두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였다)
 
진(秦)-> 견융(犬戎)
5호 16국-> 흉노(匈奴), 선비(鮮卑)
북조-> 선비
수(隋)-> 선비
당(唐)-> 선비
후당(後唐)-> 돌궐(沙陀 突厥)
후진(後晉)-> 돌궐
후한(後漢)-> 돌궐
요(遼)-> 거란(契丹)
금(金)-> 여진(女眞)
원(元)-> 몽골(蒙骨)
청(淸)-> 만주(滿州)

한족(漢族) 역사의 올바른 혈통적 정의는 이렇다.
 
.진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견융족 역사고 한족은 견융족에 의해서 지배받다.

.수,당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선비족 역사고 한족은 선비족에 의해서 지배받다.

.요나라는 단군조선의 후예 거란족 역사고 한족은 거란족에 의해서 지배받다.

.금나라는 고구려(대진국) 후예 여진족 역사고 한족은 여진족에 의해서 지배받다.

.원나라는 흉노와 고구려 후예 몽골족 역사고 한족은 몽골족에 의해서 지배받다.

.청나라는 고구려(대진국) 후예 여진족 역사고 한족은 만주족에 의해서 지배받다.

 
화하족의 나라라면 고작 주나라.송나라.명나라 정도라 할 수 있다. 일제 시대는 우리 역사이고 제국주의 일본은 일본 역사인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데, 한족들이 중국지역을 지배한 위의 나라들을 전부 자기들 역사라 우기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정신병자들의 소리나 같다. 그런데 한족자체가 그렇다고 치더라고 한족의 정신병자같은 소리를 따라하는 것들은 도대체 정체가 뭔가? 바로 자신의 국적이 일본이나 중국이다고 인정하는 자들 밖에 안 될 것이다.
 
[자료]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신라의 후예 김(금)나라->후김->청나라

천추태후에게 살해당한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외척으로 마의태자 아들 김행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KBS천추태후는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기본 틀에서는 역사를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서]에 고려에서 나온 마의태자 아들 김행(김함보)은 금나라 시조의 직계 선조로 기록되어 있다.
 
[ 金史 ] " 金의 시조는 함보(函普)이며, 본래 고려에서 나왔고, 그 때 나이 60세였다 "
 
[松漠紀聞 ]" 金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여진족이 部族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
 
[ 滿州源流考 ] " 신라王의 姓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
 
[ 高麗史 ] " 평주의 승려 김행(마의 태자의 아들)의 아들 김극수가 金나라의 조상(祖上)이다 "
 
위의 여러 역사서를 종합(綜合)하여 살펴보면 "금나라"는 신라의 김씨족이 가서 세운 나라이고 " 금(金) " 이라는 국호는 신라왕姓 김(金)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역사서에 따라 金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인 金극수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 金函普의 8代孫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나 신라계 김씨 출신인 것만은 분명하다. 

▲ 금나라을 계승한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

누루하치는 金太祖 아골타의 16代孫입니다.
 
고려 시대 때 윤관이 변경의 여진족을 내쫓고 동북 9성을 쌓는다. 그 때 여진족 사신이 고려의 王에게 이런 말을 한다. " 예전에 우리 태사영가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귀국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
 
금(金)나라는 나중에 후금(後金)이 되고 이 후금(後金)이 중원을 정복하여 세운 왕조가 바로 청나라이다.
 
[ 만주원류考 ]라는 청나라 사서는 삼한(三韓) 즉 마한, 변한, 진한을 한반도 남쪽이 아닌 만주 땅에 배정하고 고대에 신라가 만주땅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물론 과장된 내용이지만 淸나라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중원을 정복하고 淸을 세우면서 성을 " 애신각라(愛新覺羅) " 로 바꾸는데 그 뜻은 " 신라를 사모하고 기억한다 " 입니다.
 
누르하치(奴兒哈赤)는 조선을 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 한수이북은 자신의 선조가 태어난 땅 " 이라 말하였고 삼전도 항복 때는 " 본래 우리는 고려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거늘 어찌하여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 하였으며 우리 나라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누루하치(奴兒哈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조선왕에게 보냈다. "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
 
금나라는 중국의 정복왕조 중 두 번째 정복왕조로, 삽시간에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을 압박하여,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아오고 회수(양쯔강과 황하강 중간에 있는 중국 강) 이북을 차지하였다.
 
또한 금은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였고, 이에 김부식 등 신라 출신 사대 유학자들이 금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자주파였던 묘청, 정지상은 금의 요구를 묵살하고, 도읍을 서경(평양)으로 옮겨 북진정책을 추진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부식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들은 서경에 도읍하여 대위를 세웠으나 결국 고려 조정에서 보낸 진압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렇듯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그런 금나라의 통치자 금나라 황제의 피에 고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믿어지는가? 놀랍게도 금나라 황제의 시조는 고려인이었다고 한다. 금나라 시조가 고려인이고, 금나라 황제들이 고려인의 피를 이었다면 금은 우리의 방계(傍系) 역사가 되는가? 지금부터 금의 시조가 고려에서 왔는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금나라의 시조는 함보라는 인물이다. 금나라를 기록한 역사서를 보면 금의 시조 함보를 고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적고 있다. 먼저 『금사』「세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금의 시조는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시조가 완옌부에 살기 오래였는데 그 부족 사람이 일찍이 다른 부족 사람을 죽였던 바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화해할 수 없었다. (이에) 완옌부 사람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만일 완옌부 사람을 위하여 이 원망을 풀어 두 부족으로 하여금 서로 죽이는 일이 없게 해준다면 완옌부에는 나이 60에 시집을 안간 어진 처녀가 있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완옌부의 사람이 되게 할 것이오'하니 시조는 그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상대부족에게) 나아가 타이르기를 '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인해 싸움이 끝나지 않고 다치는 사람이 더욱 많으니 난의 괴수 하나만 베어 죽이는데 그치면 부족 내에서 물건으로 보상할 것이다. 너희는 싸우지 아니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니 저편에서 이 말을 따랐다 (중략) "뒤에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 우루요, 다음이 워루였다. 또 주세판이라는 딸을 낳아 완옌부의 사람이 되었다."
 
『삼조북맹회편』에는 금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나 아촉호에 이르렀다. 돌아갈데가 없어 완옌부에 의지하여 완옌을 성씨로 삼았는데 나이 60여세에 아직 처가 없었다. 그 때에 이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며 제도와 법도가 없었다. 건푸는 나무를 깎아 약속하는 의미를 세워 사람들에게 빚을 놓아 이자를 생기게 하고 농사를 부지런히 짓게 하였으며 가축을 도둑질 한 자에게는 형벌과 배상의 법을 마련하였다. (중략) 이웃의 추장이 딸이 있었는데 나이 40여에 아직 미혼이었다. 소와 말, 예물을 가지고 건푸에게 시집을 갔다. 뒤에 여진의 여러 추장이 동맹을 맺고 그를 추대하여 수령으로 삼았다."
 
『고려사』 세가 예종 10년 정월 초의 기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예전의 우리의 평주 승려 금준이 달아나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를 금의 조상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구얼 태사를 낳고 구얼이 훠러 태사를 낳았다. 훠러는 아들이 많았는데 큰 아들은 해리버요, 막내는 잉거였다. 잉거가 가장 웅걸하여 민심을 얻었더니 잉거가 죽으니 해리버의 장자 우야소가 뒤를 이었으며 우야소가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
 
금의 태조인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가 있는데 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다소 건방진 국서이지만, 국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금 태조 아골타는 자신의 가문의 기원이 고려에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 금나라의 강역(노란색)을 표시한 중국역사 지도집 © 윤복현 저널리스트

또한 금나라가 거란정권인 요나라를 공격할 때 많은 발해 유민들이 거란과 맞서자 발해 유민들을 회유하기도 했다. 발해 유민을 회유할 때 아골타는 이렇게 말하며, 발해인들을 회유하였다.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 (女眞 渤海 同本一家)"
 
송나라 역사책인 『송막기문』에는 "여진 추장은 신라인으로 성은 완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금 태조가 자신들의 국명을 금(金)이라고 정한 이유를 『만주원류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 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못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같은 책(만주원류고)에는 금나라 시조의 출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금의 시조 합부(哈富)는 처음 고려에서 완안부로 거주하니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안출호(安出虎)에 거주하였으니 금을 안출호라고 한다."
 
『박은식 전서』 「몽배금태조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몽배금태조란 꿈에 금나라 태조를 보고 절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금 태조를 보고 절했을까? 이에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대금국(大金國)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인(平州人) 김준(金俊)씨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이요, 그 민족의 역사를 말하자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변칭자(變稱者:고쳐서 달리 부르는 것)요, 발해족은 마한족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 일개 소부락으로 굴기하여 일거에 요(거란이 세운 국가)나라를 멸하고 재거(再擧)에 북송을 취하여 지나(支那:중국) 천지에 주권을 장악했노니 같은 땅에서 나온 우리민족의 사람으로 특별히 천제(天帝)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어 무등(無等)한 복록(福祿)을 받고 무상(無上)한 광영(光榮)을 발표함은 실로 단군 대황조(大皇祖)의 음덕과 백두산의 영우로 인함이라"
 
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여진 즉 금(金)의 시조는 고려인(또는 신라인) 임을 알 수 있다.

위 기록은 금이 우리의 역사임을 알리는 소중한 기록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위 기록만이 아니다. 금의 건국 과정에서 많은 발해인들이 활약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호, 장호, 고표, 곽약사 등으로 이들 발해 유민들은 금의 건국 일등공신이자, 금이 내치를 다스리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

▲ 금나라 태조 김아구다.조우(鳥羽)로 된 모자 깃이 고구려와 신라의 후예임을 말해 주고 있다. 
 
놀라운 것은 여진 정권, 즉 금의 황제들이 대진국(발해) 사람들이였다는 사실이다. 금의 3대 황제 희종이 폭정으로 전횡하자, 해릉왕이 희종을 살해하고 금 4대 황제로 등극하였다. 해릉왕은 금 태조의 서장자(庶長子)였던 요왕 종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대씨성을 가진 발해 여인이었다. 희종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해릉왕은 발해 출신 인물을 대대적으로 기용하여, 자신의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고자 남송을 향한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였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태조 아골타의 아들인 예종과 이씨성을 가진 발해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세종에 의해 시해당한다.
 
*해릉왕 시대 활약한 발해관료: 대회충(점검-도단태후 살해), 고정(태자태보, 어사대부-해릉왕의 신변경호), 이유충(왕안형 살해, 모반사건), 고희정(영사-희종 시해 계획)
금나라 치세 성군이라 불린 세종 또한 자신의 외가가 대진국(발해계)라 해릉왕과 마찬가지로 많은 대진국(발해) 사람을 기용한다. 이들 대진국(발해인)들은 금 황제의 보호 아래 조정에 많은 활약을 하였고, 금이 징기즈칸의 몽골에게 멸망할 때 까지 금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금나라 세종시대 활약한 대진국(발해)관료: 대영(비서승- 해릉왕에 의해 제명당했으나 세종 때 다시 발탁), 이석(정책공-세종의 외척), 장호(원로 대신), 장현소(절도사), 장여필, 고간, 고덕기,고희정
 
세종 이후 금나라 황제는 세종의 핏줄을 이었다. 금나라 황제의 피에는 발해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와 같이 금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그 역사가 중국 한족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금나라 역사는 우리민족 방계의 역사이다.
 
 

 
▲  고대 중국과 유라시아를 지배한 북방 유목 한국인들










▲ 12한국의 영역-유라시아 © 윤복현 저널리스트
 










▲ 한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

▲동방4국-고구려.백제.신라.가야-동방은 유라시아 초원세력의 선조의 땅© 윤복현 저널리스트










▲  광개토태왕과 유라시아 강국 고구려 최대영역 © 윤복현 저널리스트










▲ 발해인(메르키트=말갈) 아버지와  고구려(코리아)인 어머니의 아들 징기즈칸은 고구려의 후예였다. © 윤복현 저널리스트

▲ 유라시아 를 지배한 몽골-동.서양 문명이 개방,교류되었다. 몽골(4대 오사구 단군천황의 동생 오사달이 왕으로 임명된 단군조선의 제후국)© 윤복현 저널리스트

▲  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단군조선의 신하 색정이 고비사막으로 유배가서 흉노시조가 되다) 북부여 시대인 기원전 200∼140)약 60년간 한나라에게 조공을 받던 강대한 나라 흉노 © 윤복현 저널리스트

▲  훈(흉노)족의 유럽지배-지금의 헝(훈)가리가 훈족의 나라 © 윤복현 저널리스트

▲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신라왕족 김행의 후손 아골타는 금나라를 개국한 후에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했다(정강의변). 거란에게 멸망당한 대진국(발해)세력과 연합하여 거란(요)을 무너뜨린 금나라는 만리장성을 넘어 단숨에 송나라 수도를 점령하고 중원을 차지한 후에 대진국(발해)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 윤복현 저널리스트

▲ 신라후예 금나라를 계승한 청나라의 영토(지금의 중국영토가 되었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결코 단절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언어와 국호와 영역은 달라 졌어도 유라시아와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역사와 혈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 보편적 가치로써 민족과 인류를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이념만이 전쟁과 대립없이 아시아와 유라시아에 분포된 한민족이 공존번영하는 길이다. 그 중심에 코리아(고구려)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







간도는 한국땅 09/09/07 [11:50] 수정 삭제  
  이명박정부가 할 일을 민간단체가 했네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왜나라당이나 권력욕에 눈먼 정치꾼들보다 백천배 낫군요. 권력이란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도적질의 수단이 아니라, 국민과 민족과 인류공동체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데 있습니다. 결단코 국수주의가 아닌 세계주의로써 세계보편적 가치인 홍익인간이념을 추구하는 한국민족주의 세력이 빨리 권력을 장악하여 국익을 사수하고 민족의 미래와 후손들를 위해 할 일을 해야 겠습니다. 아무튼 소송을 제기했다는 자체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정부차원에서 남북한이 공조하여 적극 대응해야 나가야 겠습니다.

[보도자료]민족회의통일준비정부(Korean National Council the United Preparatory Government 이하 통일준비정부)는 2일(현지시간)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통일준비정부 대표단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소재한 국제사법재판소에 1일 소장을 제출, 정식 접수됐다”고 밝혔다.

통일준비정부의 김영기 대표와 김영수 사무국장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지난달 29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 현지에서 법무 양식을 갖춘 후 1일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장을 제출, 접수 확인증을 받았다.

김영기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간도협약 소송가능시한을 불과 사흘 앞두고 극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간도는 100년이라는 시한에 관계없이 우리 민족이 찾을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고 감격해 했다.

1909년 9월4일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간도협약은 명백히 불법조약이지만 국제법상 특정국이 100년 간 실효적으로 점유하는 동안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영구히 귀속될 수 있다는 관례에 따라 올해로 꼭 100년을 맞는 간도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돼 왔다.

이를 위해 뉴욕의 재야사학자 폴 김 박사 등 뜻있는 인사들이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나 유엔 기구가 아니면 소송 접수가 불가능하다는 규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 소송을 제기하도록 수 차례 청원해 왔다.

우리의 땅 간도를 찾아야 한다는 국민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일절 반응이 없어 9월4일이 경과할 경우 영원히 간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절망감이 증폭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 차원에서 최근 구성된 통일준비정부가 민족 주권의 차원에서 정식 소장을 준비해 접수되는 개가를 올리게 됐다.

김영기 대표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처음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우리는 한국 정부와는 별개의 채널로 온 통일준비정부 대표이고 유엔 회원국인 남북한의 통일정부를 지향하는 우리 역시 유엔의 멤버”라면서 “간도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도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민족 주권의 차원에서 소송을 제기한다는 설명을 그들이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본래 국제사법재판소는 등기우편으로 수령하고 사람이 직접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소송서류가 너무도 중요해 인편으로 전달하고 근거를 남기기 위해 해당 직원의 사인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앞서 김 대표 등은 네덜란드 현지의 동포 전문가들과 함께 서류를 검토했으며 현지 양식에 맞게 법무사무실에서 일체의 오류가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특히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의 이기항 원장과 송창주 관장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통일준비정부 대표단은 이준 열사기념관 앞에서 ‘간도협약 원천무효’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사진 촬영을 한 후 동포들 앞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반드시 소장을 접수시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고 전했다.

김영기 대표 등은 “1907년 7월14일 이준 열사와 이상설 이위종 열사 등이 을사강제늑약의 부당성을 만국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곳에서 선열의 고귀한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민족의 땅 간도를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간도 문제를 국민적 관심사로 불지피는데 일조한 뉴욕의 재야 사학자 폴 김 박사는 “김영기 대표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이번 거사가 성공하기만을 기원해 왔다. 무사히 접수됐다니 너무나 기쁘다”며 “그간 뉴시스를 통해 간도 문제가 전 세계 한인 동포들에게 알려지면서 간도의 고지도를 소장한 호주 동포 배철상 선생과 남아공의 최경자 선생 등 많은 사해 동포들이 힘을 합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고 밝혔다.

통일준비정부는 간도소송 서류 사본을 이미 중국과 일본 정부에도 송부했으며 지난달 24일과 29일 두 차례 서울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바 있다. 대표단은 9월4일 귀국하며 이날 오후 4시 중국대사관 앞에서 3차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조재범 09/11/10 [13:49] 수정 삭제  
  주나라도 엄밀히 말해 한족 역사가 아닙니다. 주나라 역시 서융족의 역사입니다. 한족 역사는 한나라(이것도 자칭 한족이란 설이 있음), 송나라, 명나라 밖에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bp6565 11/08/17 [13:48] 수정 삭제  
  아니 이건 무슨 정신병자도 아니고, 이곳 저곳에서 부실하거나 신빙성없는
자료들 짜집기해서 무슨 결과를 보자고...

이딴 자료로 중국 동북공정 반박했다간 도리어 있는 땅도 빼앗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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