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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천황 구심점으로 민족은 통합되야

항일투쟁의 중심 '대종교' 단군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國祖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10/06/30 [23:09]

단군천황 구심점으로 민족은 통합되야

항일투쟁의 중심 '대종교' 단군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國祖

윤복현 저널리스트 | 입력 : 2010/06/30 [23:09]
인류보편적 가치관으로써 한국의 민족주의는  세계주의다.
 
한국인들이 자주 사용하고 많이 사용하는 '한(환=간=칸=안)'은 태양계의 중심으로 밝고 환한 해를 의미한다. 한국은 해(태양)의 나라를 의미한다. 온누리를 환하게 비추는 태양은 광명의 상징이자,'본심본 태양'으로 인류의 양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백옥과 황금을 상징으로 하여 빛나고 밝은 것을 숭상한 것이다. 해님과 달님 모두 환님이다. 환하게 비추는 남자가 해님이고  환하게 비추는 여자가 달님이다. 태양이 밝지 않다는 건 양심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며,얼굴이 어둡다는 것도 생명의 빛인 광명이 약하다는 의미다.
 
해로 상징되는 광명은 평화요,양심이며 이성이요 정의다.어둠은 제국주의로 대변되는 침략과 수탈이요, 학살과 탄압이다. 그래서 '해'를 노래하는 우리 한민족의 세계관이 어둠을 밝게 비추자는 것이다. 그래서 어둠속의 인류를 광명의 세상으로 인도하고 구원할 사명을 우리 민족에게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 단군천황과 단국3연방(마.번.진한=마.번.진조선) / 국호는 고구려의 시조 고등의 손자인 22대 색불루 단군천황때 '한'에서 '조선(숙신)'으로 바뀌었고 구물 단군천황 때 '대부여'로 변경되었다. 현재 북한이 초대 단군천황릉이라며 자랑하는 대동강변의 단군천황릉은 초대 단군천황릉이 아니라 5대 구을 단군천황릉이다. [한단고기]에 "남쪽지역을 순찰하더 중 병으로 사망하여 대박산에 묻혔다."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북한의 주장이 모순되는 배경에는 단군한국초기 고고학적 사료인 비파청동검은 초대 단군천황이 나라를 열고 도읍했을 아사달 지역으로 추정되는 조양지역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며, 청천강이남지역으로는 비파청동검을 변형시킨 세형동검지역이라는 사실이다. 고로 북한의 평양지역은 단군천황을 보좌하는 부단군이 통치하는 마조선의 왕검성이지 단군천황이 거주했던 진(신)조선의 황검성은 아니다.

한(한반도)은 간(지나국)이며 칸(몽골)이며 안(중동 슈메르)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문명도 동방에서 일어나서 서방으로 퍼져 나가는 법이다. 현인류문명의 꽃을 피운 해(환)문명의 중심지는 동북아시아이고 핵은 한반도다.한반도지역에서도 한민족 시왕모 마고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고인돌이 세계최다로 분포된 서남해지역이다.
 
한국인들의 세계관은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다. 홍익인간이념은 그래서 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니라 인류보편주의 가치관으로써 세계주의다. 빛과 열을 생명에게 값없이 주고 비추어 주는 해님 달님이 홍익인간이다. 한인.한웅.한검들은 이러한 평화주의를 한민족에게 가르쳐 주고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다.그래서 나라를 상실한 일제치하에서 우리 선열들이 피 흘리면서 찾고자 했던 것이 다시 광명을 회복한다는 '광복'이였다. 단군을 국조로 삼아 숭배하고 단군사상을 민족정신으로 숭상하면서 항일광복운동에 대거 참여한 거물급 인물들이 계연수.신채호.홍범도.김좌진 등 이름만 제시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대종교인들이였다고 할 수 있다.
 
대종교가 수 많은 항일운동가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고 목숨을 걸고 민족광복을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대중성을 뛸 수 밖에 없는 배경에는 일제치하라는 현실의 구조악에 적극 저항하면서 행동하는 양심으로 민족정신을 구현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어떠한 형태와 양식이든 종교라는 것이 민족과 민중이 처한 현실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민족종교를 자처한다 하더라도 대종교처럼 민족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무장투쟁을 할 정도로 항일투쟁을 벌인 점이 결국 대중성을 확보할 수 밖에 없었던 힘이다. 고로 단군을 내세우는 작금의 민족종교집단들은 단군을 팔아서 교세만 확장하고 장사만 할 것이 아니라, 연대을 통한 교육운동과 저항운동 등으로 민족과 민중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단군정신을  구현하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단군천황을 국조로 삼은 대종교인들이 항일투쟁의 중심에 섰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먼저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1918년 음력 11월 만주와 해삼위를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이다. ‘대한독립선언서’로도 불리고 대종교 인사들이 다수 참여한 까닭에 ‘대종교독립선언서’로도 불리는 독립선언서다.

여기에는 항일광복운동에 있어서 거물급 인사들로 구성되는 김동삼ㆍ김교헌ㆍ박찬익ㆍ김학만ㆍ김좌진ㆍ박은식ㆍ신채호ㆍ윤세복ㆍ정재관ㆍ이범윤ㆍ신규식ㆍ이시영ㆍ이상룡ㆍ이학만ㆍ유동열ㆍ이광ㆍ안정근ㆍ이대위ㆍ최병학ㆍ이동휘ㆍ박용만ㆍ이동녕ㆍ조소앙ㆍ여준ㆍ손일민 등이 서명했는데 상당수가 대종교 계열의 인사들이다.

대종교선언서는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의 감정으로 보좌하는 것이 아님을 선언하였다. 선언서는 일본의 강제병합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촉구했다. 또 2천만 동포들에게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했다는 조소앙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이 대종교독립선언서의 특징은 한일 강제병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촉구하였다는 점이다. 대종교독립선언서를 필두로 2ㆍ8독립선언서, 3ㆍ1독립선언서 등 독립선언서가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항일투쟁의 절정을 이루었다. 대종교도들은 동포교육과 민족혼의 계승운동에만 만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장독립단체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대종교 지도자중 서일ㆍ김좌진ㆍ윤세복ㆍ김혁ㆍ리상용 등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북로군정서ㆍ대진단ㆍ대한독립단ㆍ흥업단 등을 조직하고 다른 무장단체와 연합하여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일제강점기에 최대의 전승인 청산리대첩은 대종교도들을 주축으로 이루어낸 쾌거이다. 대종교가 무장투쟁의 전개과정에서 보여준 살신성인ㆍ선공후사ㆍ진충보국ㆍ일기당천의 정신속에는 단군을 국조로 하는 민족정통의 종교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대종교에는 독립운동계의 거물들이 참여했다. 신규식ㆍ박은식ㆍ윤세복ㆍ신채호ㆍ김두봉ㆍ정인보ㆍ장지연ㆍ유근ㆍ김교헌ㆍ서일 등 당대의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와 직 간접적으로 연계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8.15이후 한반도지역에 전국적인 건준위를 구성하여 치안유지와 민족통합정부구성에 힘쓴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의 정치적 스승으로, 신규식은 나라가 망한 원인을 “첫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 버렸고, 둘째는 선민(先民)들의 공열(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 버렸고, 셋째는 제 나라의 국사를 잊어버렸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 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잊어 버리길 잘하고 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라고 통분하면서 ‘한국혼’을 지었다. 대종교의 ‘역사지키기’ 정신의 일환이었다.

 
▲ [ 대종교 총본사 소장「천부경」-개천4446(1989)년 이홍재 作, 가로×세로 1.5m ]  
대종교 탄생의 배경


1900년대를 전후하여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처럼 위기에 빠지고 있었다. 조선황실은 갈리어 권력투쟁의 장(場)이 되고 지도층은 청국에 기댄 위정척사파와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사대주의 세력이 양분된 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국정은 세도정치로 부패타락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천주교가 들어와 반상의 신분질서를 바꾸고자 하였지만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채 지하에 숨어들었다.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청.일 외세가 들고 온 신식 무기에 녹두꽃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백성들은 육체적으로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럴즈음 이땅에서는 각종 민족종교가 창도되고 부활하여 신생(新生)의 횃불이 되거나 혹세무민에 나섰다.

천도교ㆍ시천교ㆍ청림교ㆍ상제교(上帝敎)ㆍ수운교ㆍ경천교ㆍ천도명리교(天道明理敎)ㆍ제우교(濟遇敎)ㆍ백백교ㆍ태을교(太乙敎)ㆍ보천교ㆍ단군교ㆍ대종교ㆍ원종교(元宗敎)ㆍ원불교ㆍ증산교 등이 치병에서 영혼구제ㆍ국난극복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사명을 제시하면서 창도되었다. 민족종교 중에는 본래의 목표대로 정진하는 교단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수는 변질되어 친일 매국의 앞잡이가 되거나 국난기에 편승하여 혹세무민을 일삼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종교 중에서 대종교는 가장 격렬하고 줄기차게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의 전통과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군교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명칭을 달리하면서 연면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부여에서는 대천교, 예맥에서는 무천, 마한에서는 천군,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천신교라 불리면서 단군한국의 개국주(開國主)인 단군천황을 받들었다.

단군숭배사상을 기초로 한 단군교는 옛날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단군(교)의 존재가 새롭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ㆍ민족적일체감이 형성되면서부터 이다. 안으로는 무인정권의 폭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내적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이 단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단군천황을 국조로 하는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적인 위기를 국조를 중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 대종교 창시자 홍암(弘巖) 나철(羅喆) 선생
대종교를 만든 나철

 
전남 보성출신으로 본명은 인영(寅永)이고 호는 홍암(弘巖)이다.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徵稅署長)의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후 민족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중창한 대종교에는 다른 민족종교와는 달리 식자층들이 많이 끼어 있었고, 또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국조를 신앙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04년 오기호(吳基鎬:1865~1916)·이기(李沂:1814~1909) 등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그후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扶助)하자"는 내용을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3일간 금식농성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를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한편 그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伯佺)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후에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 三一誥〉와 〈신사기 事紀〉를 전해 받은 바 있었고, 1908년 도쿄[東京]의 한 여관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을 만나 대종교의 중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단군교포명서(檀君敎布明書)를 받았다. 그해 12월 도쿄의 어느 여관에서 이기호·정훈모 등과 함께 두일백으로부터 영계(靈戒)를 받았다. 정치적 구국운동에 대한 좌절로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돌린 나철은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重光節)이라고 한다.
 
당시 그와 함께 활약하던 인물들은 유신회 인물들이거나 호남 출신의 식자층 우국지사들이었다. 그래서 서민층 중심인 동학이나 증산교에 비하여 대종교를 양반종교라고도 한다.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추대된 그는 밀계와 오대종지를 발표하여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교세확장에 주력하던 중, 당시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를 맡고 있던 정훈모의 친일행위로 교단 내 내분과 예상되는 일제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1910년 8월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그뒤 일제의 종교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교포로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 〈신리대전 理大全〉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교단본부를 백두산 북쪽에 있는 청파호 부근으로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30만 교인을 확보했으나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교단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구월산의 삼성단에서 일제에 대한 항의표시로 49세의 나이로 순교조천(殉敎朝天)했다.
111 10/07/02 [16:34] 수정 삭제  
  현재 역사는 제대로 알리고 가리쳐야 합니다..............

반민족이 세운 한국

일본과 조선독립을 외치던 독립군이 세웠나요

아니죠 .......

미국놈이 의해 분단되니 미군에 충성하고

살아남은 친일들이 미군정에

통일은 없다면서 세ㅤㅇㅝㅅ죠...

이게 한국 대한민국이지

전쟁도 일으킨 친일 ...

그래서 3년간 조선반도 전쟁으로 일본이 재건할수 있게 도왔죠

일본ㅇ 충성하겟다고 혈서를 쓴 박정희부터 시작하여

민족의 반민족자들자들 ..


한민족공동체 10/07/02 [19:14] 수정 삭제  
  마고=>한국=>배달국=>단국=>부여=>고구려=>대진국(발해)=>고려=>조선=>대한민국

* 한(환)=해(태양)/영어:하니(한)=해같은 사람, 일어:하이(한)=해님
111 10/07/03 [00:33] 수정 삭제  
  소련을 앞세워 사회주의 정부세운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소좌)이나 미국이 한반도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하여 추방당하여 미국앞세워 자본주의 정부세운 이승만이나 셈셈이다. 한국전쟁직전에 김일성하고 이승만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760여차례나 국지전을 벌인 넘들이며, 결국 미군이 철수하고 한반도를 제외시킨 에치스라인을 선언하자 스탈린의 승인을 받고 모택동에게 군대(조선의용군 3개 사단)지원을 받아 쳐 내려오니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으로 무고한 남북한 인민대중이 희생당하고 이산가족으로 흩어지고 금수강산 한반도에서 외세군인들이 개입되어 전쟁터가 되게 했다. 한국전쟁주범은 일본.미국.소련이고 공범은 김일성.이승만.박헌영이다. 민족이 살 길은 남북한이 기득권포기하고 남북한이 합의한 6.15/10.4합의를 이행하는 길 외에는 없다.어느 한쪽의 흡수통일은 불가하며 될 수도 없다. 개념가지고 정신차리자. 민족을 살리는 에너지는 남북한 인민대중속에 내재된 홍익인간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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