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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0)-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강화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6/19 [15:05]

대한정통사(10)-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강화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6/19 [15:05]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5. 불평등조약 개정교섭

  강화늑약에 의하여 조선이 반강제적으로 개항한 후 왜인들에 의하여 일방수탈적인 무역이 전개되면서 국부의 유출이 심각해지자, 조선국민들은 크게 경각심을 가지게 되는 한 편으로 반일적 성향이 퍼져 갔다. 이에 고종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이른바 개명관료(開明官僚)들에 의하여 개정교섭이 추진되었다. 개정교섭은 침투해 들어 오는 외세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국제관계의 모순과 빈틈을 이용해서 민족적 자립과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기본 의도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즉,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 현실을 타개하려는 방책으로서, 당시의 민족주의의 일반적인 특징과도 궤도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적 자본주의에 최후적으로 편입된 조선이 주변의 국제정세를 잘 이용하여 일방적 수탈상태를 면하고 민족발전을 도모해 보려는 신중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강화늑약 초기에 일본과의 수교및 통상을 대체로 예전부터 시행해 오던 왜관무역의 복구 및 확대 정도로 이해하고 있던 조선의 위정자들은, 개항후 왜인들의 특권적 상행위에 의하여 방대한 양의 조선쌀과 콩 등 주요 식량자원들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나가면서 쌀값을 위시한 생필품의 가격이 폭등하여 민중생활이 질곡에 빠져 들자, 냉혹한 국제무역의 현실을 타개해야 할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왜인들은 어떠한 관세도 물지 않은 채 쌀 등 식량자원을 엄청나게 반출해 가는 한 편, 영국제 옷감(양포;洋布) 등 공장제품을 조선 국내에 반입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린 반면, 조선민중은 물가고와 국내산업의 파탄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무한정한 쌀의 해외반출을 막고 관세를 설정함으로써, 국민의 기본적 생활여건을 보호하고 국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개정교섭을 추진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정부는 대리공사 화방의질에게 4개조의 조선 측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이는 쌀의 반출을 막고, 관세권을 확보하며, 조선국민의 법적권리를 신장하고, 외국인의 밀입국을 막기 위한 조항들이었다. 이로써 일본정부측의 원산 및 인천 개항요구와 조선정부측의 방곡 및 관세권 설정요구가 팽팽하게 맞섰으나, 조선정부측에 조금도 양보할 의사가 없었던 화방의질은 '일단 일본정부에 알린 후에야 의논하여 정할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며 공식적인 협의를 회피하였다. 그에 따라서 조선정부는 화방의질과의 교섭을 포기하고 직접 일본에 수신사를 보내어 현안들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서1880년 3월 23일(음력)에 조선정부는 개명관료의 대표격인 예조참의 김 홍집을 수신사로 임명했고, 같은 해  5월 28일(양력 7월 5일)에 수신사 일행은 일본으로 향했다. (양력)8월 11일에 횡빈(橫濱;요꼬하마)에 도착한 수신사 일행은 동경으로 직행하여, 이틀후인 8월 13일에는 일본외무성을 방문하여 조선측의 요구조건들을 수록한 예조판서의 서계(書契)를 외무대보(=외무차관)인 상야경범(上野景範)에게 전달했다. 서계의 별록(別錄)에서 조선 측의 세관설정 요구건을 접한 상야경범은 '징세 문제는 언제라도 협의해서 의정하도록 하자는 것이 일본측의 입장'이라고 하며 교섭에 응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에 수신사일행의 숙소로 찾아 온 상야는 태도를 표변하여 '수신사에게 전권위임이 안되어 있다'는 트집을 잡아 정식교섭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김 홍집은 이틀 후(8월15일)에 일본외무경의 집을 방문해서 차후 계속해서 징세문제를 교섭하기로 하자고 제의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김 홍집은 일본외무성 관리들과 접촉하는 이외에도 8월 20일 경부터는 주일 청국사절들과도 긴밀히 접촉하며 대책을 의논했다. 특히 징세문제에 대해서는 청국공사인 하여장(何如璋) 등 청국사절들이 많은 조언을 해 줬으며, 국제 무역관행 등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 주기도 했다. 여기에서 김 홍집은 일본 자신도 구미제국과 맺었던 불평등조약들을 개정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알게 되는 등 중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김 홍집은 하여장에게 일본의 조약개정안 인쇄 사본을 얻어 줄 것을 요청했고, 하여장은 비밀을 지킬 것을 전제로 그 요구에 응하는 등, 두 나라 사절들의 관계는 매우 긴밀해져 갔다. 김 홍집은 당시 조선이 가장 늦게 개항한 후 청일 양국이 대립하는 틈을 이용해서 청국사절들로부터 국제법적인 지식을 얻어내어 일본측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려 한 것으로서, 당시의 동아시아적 상황하에서 매우 당연하고도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김 홍집은 하여장과의 대화를 통해서 '세칙(稅則)은 물론이고 출입구(出入口;즉, 내외국인이 출입하는 개항장)도 각 나라가 스스로 정한다'는 사실과, '세권(稅權)이 각 나라의 자주에서 유래되고, 이익은 각 나라에 귀속되며, 타국을 위해서 편의를 제공하는 게 아니다'라는 것과, '만약 세(稅)만 논(論)하고 수출입품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이는 세칙을 자기 스스로 정할 수 없어서 상대방 통상국이 (세칙을 멋대로) 장악하는 결과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백해무익'하다는 것도 알 게 되었다. 김 홍집은 7월 26일(양력 8월 31일) 일본외무경 정상형과 '비공식 본 회담'을 가졌으나, 정상형 역시 전권위임이 없다는 핑계로 무성의로 일관했으므로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다.

  일본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진 김 홍집 일행은 8월 2일(양력 9월 6일)에 하여장 및 황준헌과 만나서 차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황준헌은 자신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 책자를 김 홍집에게 주면서 남하하는 러시아의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소위 '친중국·결일본·연미국(親中國,結日本,聯美國)' 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그리고 황준헌의 조선책략 논리는 그대로 차후 김 홍집의 노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으며, 귀국 후 고종에게 그 책자를 바침으로써 국내에 큰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8월 28일(양력 10월 2일) 귀국하여 고종을 알현한 김 홍집은 고종이, "자강(自强)이란 부강을 말함인가?"라고 질문하자 "비단 부강만을 뜻하는 게 아니고, 자강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치와 교화를 고치고, 우리의 백성과 나라를 보존하며, 외국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살아가는 것이 실로 자강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라고 답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강조했다.
 
다시 고종이, "청국인들이 비록 우리와 동심합력(同心合力)하고자 할지라도 이를 어찌 깊이 믿을 수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는 우리대로 부강지술(富强之術)을 행할 따름이다."라고 논한 데 대하여, "저 청나라의 성의도 깊이 믿을 것이 못 되오며, 오직 우리 나라가 외무(外務=대외정책)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게 고민꺼리입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정책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즉, 국제외교에 임하는 주체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임금과 신하의 뜻이 일치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서 음력 12월에 외국과의 통상 및 대외관계 전반을 관장하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군제(軍制)를 개편했으며, 청나라와 일본에 유학생과 시찰단 등을 파견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즉, 개화자강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관세책정 등에 관한 국제적 지식을 얻게 된 고종은 김 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동경에서 데려온 소위 '개화승'인 이동인 등을 정부의 정책수행에 이용하기로 하고, 10월에 그를 극비리에 원산을 경유해서 일본에 밀파했다. 고종은 이동인등에게 대미수교문제와 관련된 밀서를 하여장에게 전달토록 하는 한 편, 김 홍집에게도 하여장에게 서한을 보내어 일본근해에 있을 미국의 특사 슈펠트가 빠른 시일 내로 조선으로 와서 수교를 추진하도록 촉구하라고 명했다. 그런 동향 속에서 조선이 미국과 수교할 의사가 있음을 확인한 하여장은 이홍장에게도 그 사실을 전보로 알렸고, 그와 함께 이동인이 가져 온 밀서도 보냈다.

  그러한 조처의 이면에는 청나라가 구미열강과 맺었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니, 즉 청나라가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하면서 두 나라가 대등한 조약을 맺도록 유도함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청나라 자신도 구미열강과의 조약을 개정하는 근거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청나라의 움직임은 조선정부의 의도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면이 있었으므로, 청나라 측에서는 조선과 미국의 교섭을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조선으로서도 미국과 국제적으로 대등한 관계의 조약을 맺을 수만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교섭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한편, 당시 일본측이 추구하고 있던 것은 조선에 대한 침투를 촉진하기 위한 일본공사의 서울 상주 문제와 인천개항 문제였다. 조선정부측에서도 일본과의 외교수립 문제로 논의를 거듭한 끝에, 그 해가 다 가던 11월 26일(서12월 27일)에 고종이 중희당(重熙堂)에서 화방의질을 접견하고 신임장 격인 일본의 국서(國書)를 친히 접수함으로써 일본공사의 서울 주재를 인정했다. 이에 양국간 현안들을 놓고 보다 활발한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담판은 다음 해인 서1881년 1월 4일(양력)부터 2월 28일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그 중 2월 18일(양력)에 열린 6차 회담에서 김 홍집은 인천개항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인천개항은 조선정부 내에서도 아직 이론(異論)들이 많으므로 급속한 개항은 곤란하다. 만일 인천을 개항하면 먼저 개항한 부산보다 적어도 삼사할이나 저렴한 미곡의 마구잡이식 반출을 저지할 수 없게 되고, 그럴 경우 수도 서울의 곡물값이 폭등해서 수만명의 인민이 난을 일으킬까 두렵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측에 다음과 같은 미끼와 요구를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약 방곡을 수락한다면 개항기일을 앞당기는 논의가 매우 용이하게 될 것이며, 미곡수출 금지는 인천뿐 아니라 부산도 함께 시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김 홍집으로서는 조선정부의 의견을 대표해서 어차피 피하기 힘든 인천개항 문제를 미끼삼아서 방곡과 세관설치라는 실리를 얻는, 말하자면 상호간 절충적인 요구조건 맞바꾸기식 제안을 한 것이다. 김 홍집의 논리를 반박하기 어렵게 된 화방의질도 결국 인천항의 방곡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회담 날짜인 양력 2월 28일로부터 20개월 후인 서1882년 9월에 인천을 개항하기로 한 조선정부의 뜻을 통고하는 자리에서 김 홍집은, "이는 우리 정부가 이웃나라와의 사귐을 소중하게 여기는 특별한 후의(厚意)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한마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인천항에서의 방곡령 시행권 확보는 그 후 미국과의 협상및 서1883년의 통상장정에 있어서의 전면적이고도 전국적인 방곡령 설정에 유리한 여건이 될 수 있었다.

  관세설정(정세,定稅)에 임하기 전에 김 홍집은 일본에서 입수한 바 있는 일본과 구미각국간의 조약개정안, 청일간의 수호통상조약(중동조약,中東條約), 서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 등을 참작해서, 새로운 세칙(稅則)및 31개 조의 통상신약초고(通商新約草藁)를 작성하여 정부의 재가를 얻음으로써 일단 준비를 마쳤다. 일본에 수신사로 갔다가 귀국할 때 일본외무경 정상형으로부터 '세칙에 관한 상의는 머잖아 조선에 가는 화방의질 공사에게 위임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바 있는 김 홍집은 화방의질의 위임여부를 확인한 후,

 "‥이미 위임이 되었다고 하니 스스로 결정권도 갖고 있을 터이니 반드시 이 곳에서 즉시 결정짓자."

고 제의하며, 대단히 자주적인 입장에서 작성한 '통상신약'및 세칙초안을 제시했다. 이에 당황한 화방의질은 갖가지 변명을 늘어 놓으며 논의를 지연시키려 했으나 명분이 닿지 않자 결국은 세칙초안을 인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는 상의(商議)하는 위임은 받고 있지만 결정하는 위임은 받고 있지 않다'고 꼬리를 빼며, '문서초안을 먼저 동경에 보내어 외무경의 지휘를 받고 나서 회답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 측이 제시한 조건들이 너무 무리한 것들이다'라고 우겼다. 일본측의 지연작전을 눈치 챈 조선정부에서는 직접 일본정부에 해당 안건들을 통보하기로 하고 예조판서 홍 우창의 명의로 공한(公翰)을 일본 외무경에게 보내는 한 편, 다시 수신사를 직접 동경에 보내어 담판 짓기로 했다. 그리하여 서1881년 8월 31일(양력)에 호군(護軍)직책의 조 병호를 수신사로, 이 조연을 종사관에 임명하여 파견했다.

  일전에 전권위임이 없다는 이유로 일본정부측으로부터 불평등조약 개정협상을 거부당한 조선정부는 이번에는 수신사에게 완전히 전권을 위임시켜서 보내기로 했다. 9월 29일(양력)에 서울을 출발한 수신사 일행은 약 한달 만인 10월 28일에 횡빈에 도착하는 즉시 동경으로 직행했다. 조 병호는 11월 1일에 일본외무경 정상형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예조판서 이 인명의 서계를 전달하고, 11월 19일에는 왜왕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조약개정 교섭은 11월 17일부터 개최되었는데, 정상형은 '합의결정의 행위에 실효(實效)를 함유하지 않았다'는 말도 되지 않는 생트집을 잡으며 회담을 결렬시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병호 수신사는 사뭇 의연하게 조선 측의 정당한 요구사항들을 자주적인 입장에서 천명하며 목적을 달성코자 노력했다. 특히 전혀 관세를 물지 않았던 일본측에 '10% 관세'를 일관되게 주장하자, 당황한 일본측에서는 '일단 5%로 정한 다음에 물품에 따라서 5%내지 10%까지 약간의 차등을 두도록 하자'고 타협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미각국에서는 수입세가 30%에서 70%까지도 책정되어 있으니 추호도 변통할 수는 없다."

고 서양의 예를 들어가면서까지 끝까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동상이몽의 간격을 좁힐 수 없었던 두 나라 대표간의 회담은 일본측의 무성의한 지연술책과 거부반응으로 인하여 결국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2월 16일에는 차후 서울에서 일본공사와 개정교섭을 계속할 것을 기약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불평등조약 개정에 대하여 왜인들이 무성의한 지연책으로 일관한 것은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로 보아 이미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즉,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아시아에 밀어 닥치면서 청나라와 함께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된 일본은 서양열강과의 무역에서 전혀 이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자본주의 국가로서 성공하려면 자본주의 선배국들이 그러했듯이 원시적 자본축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순순히 일본의 원시적 자본축적에 응해 줄 나라는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지막지한 범세계적 약탈무역을 자행해 온 서양의 전철을 밟아 가는 일본의 변신에 대하여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오랜 선린외교 관행을 깨뜨리고 만만한 주변 약소 민족들을 침탈하는 악랄한 전략을 채택했다.

  기본적인 의식구조상 서양 제국주의자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일본의 이용가치를 알게 된 영국의 후원까지 얻어서 침략대상물을 탐욕스럽게 물색하기 시작한 왜인들은 그 첫 희생물로써 대만을 공략한 데 이어서, 왜열도와 대만 사이에 위치하여 비교적 평화롭게 선린관계를 유지해 오던 유구왕국까지 탈취함으로써, 일단 주변 약소 민족들을 착취하는 단서를 열었다. 그러나 비록 서양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하여 국력이 크게 피폐해지기는 했어도 아직 아시아의 강국으로 알려져 있던 청나라는 물론이고, 조선도 만만히 당하고만 있을 나라는 아니었으므로, 어떤 정상적 궤도를 벗어난 방법을 쓰지 않는 한 동아시아에서 더 이상 '원시적 자본축적'을 달성하기란 어려웠다. 심지어는 정한론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서향융성의 세력을 저들 스스로 격파함으로써 저들의 속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자 애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조선인들이 국제적 무역관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어거지로 맺은 강화늑약은, 대만이나 유구열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방대한 '원시적 자본축적'의 기회를 왜인들에게 누리게 해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저들이 그런 기회를 쉽사리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며, 될 수 있는 한 늑약의 조건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수차례에 걸친 일본에의 사절파견을 통하여 그러한 국제적 동향을 다 알게 된 조선정부로서는, 일본측과의 교섭에만 의지하다가는 조약개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따라서 어차피 개항할 수밖에 없는 세계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한, 다른 열강과의 '비교적 대등한 통상조약'을 시도하기로 했고, 그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써 미국과의 수호통상이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고종의 특명을 받은 밀사들이 부지런히 미국 측과의 교섭을 시도한 결과, 서1882년 5월 22일에는 마침내 청나라의 중재로 제물포에서 미국전권 슈펠트와 조선전권 신 헌 및 김 홍집과의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게 되었다. 청나라가 조미조약 중재에 힘쓴 것은 만일 조선과 미국 사이에 이전과는 달리 보다 대등한 조약이 성립된다면 청나라 자신이 구미열강과 맺은 바 있는 불평등조약에 대한 개정교섭을 하는데도 크게 유리할 것으로 판단한 속사정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미국 측은 조약교섭 과정에서 상당히 융통성있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조선 측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즉, 그동안 조선정부가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일본측에 주장해 왔던 방곡 및 세관문제가 일본측의 무성의와는 달리 조선 측의 입장을 대폭 반영하는 선에서 논의되었던 것이다. 즉, 방곡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선에 기근이 들 경우를 제외하고는 융통성있게 수출하는 것으로, 세관의 징세는 기본적으로 10%의 관세를 거두는 것으로 타결지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고종을 중심으로 한 개명관료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일단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불평등조약 개정교섭 문제는 얼마 후 벌어진 임오군란과 그 수습과정을 통해서 또 한 차례의 큰 격변을 거쳐갔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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