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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3)-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고종의 친정과 동아의 대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5/27 [07:57]

대한정통사(3)-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고종의 친정과 동아의 대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5/27 [07:57]
 

2. 고종의 친정

  보위에 오른 지 3년 후인 서기 1866년부터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끝내고 고종의 친정을 인정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친정이 이루어진 것은 그 후 8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 8년 동안에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커다란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즉, 고종을 제쳐놓고 집정한 흥선대원군은 서기 1866년 벽두부터 프랑스인 신부들을 비롯한 천주교도 학살의 피바람을 일으켰고, 그로 인하여 프랑스군이 강화도로 침공해 왔으며,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격침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빈약한 국고의 현실에 맞지 않는 무리한 경복궁 중건공사를 벌여 놓으며, 원납전의 수취와 당백전의 발행 등으로 재정을 충당하려 하여, 화폐가치의 하락과 물가폭등을 야기했다. 이는 제왕인 고종이 뜻하던 바가 아니었으나, 결국은 그러한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명목상 최고주권자로서의 고종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무엇보다도 그러한 과격한 정책들은 심모원려하는 고종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효(孝)를 충(忠)보다도 높이는 조선사회에서 제왕이란 당연히 효의 모범을 보여야만 할 위치에 있기도 했기 때문에,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뜻을 대놓고서 반대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고종으로서는 흥선대원군이 자진해서 대권을 돌려줄 때까지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임금대신 수렴청정 등에 의한 대리집정이 실시된 일은 조선조에서도 고종이전에만 여섯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의 기간도 없이 삼촌인 수양대군의 집권욕에 희생된 단종의 예를 제외하면, 대체로 20세까지는 대리집정을 끝냈다. 고종의 바로 앞 임금이던 철종도 친정을 개시한 나이가 21세로 역대 소년임금들 중 가장 높기는 했으나, 18세에 즉위하여 3년간의 대리집정을 거친 후에 곧 친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연산군과 중종, 현종도 18세에 즉위했으나 곧 친정에 들어갔고, 심지어 숙종은 13세로 즉위했는데도 곧 친정을 실시하기도 했다. 다만 철종과 고종은 세도정치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세자 책봉이 안 된 상태에서 제왕수업을 선대(先代)로부터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뜻밖에 보위에 오른 경우이므로, 보위에 오른 후에나마 제왕수업을 위해서 대리집정이 필요했다고 할 수는 있다. 그것도 전례로 보아 21세면 친정할 수 있는 제왕으로서의 충분한 자질과 명분이 갖춰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무렵에 이웃 청나라에서 서기 1861년에 5세의 나이로 청나라 열번째 황제로 즉위한 동치제(同治帝)의 경우, 섭정을 담당한 두 태후와 청나라의 실권자인 동치제의 숙부 공친왕이 애로우호사건 이후에 양무운동(洋務運動)을 펼치며 적극적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이른바 동치중흥을 이룩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 집정하의 조선에서는 대체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는데, 고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동치제가 17세가 된 서기 1873년 1월부터 친정하면서 고종은 물론 흥선대원군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 또한 고종의 친정을 고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더구나 이미 수년전인 서기 1868년에는 섬나라 일본에서도 17세의 명치왕이 왕정복고로 왕위에 올라 친정에 들어갔으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나이로 보좌에 오른 동아시아의 세 임금 중에서 고종만 20세가 넘도록 친정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그러한 주변 정세의 변화에 대해서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전 해인 서기 1872년 12월부터 임금에 대한 일종의 송덕행사(頌德行事)인 존호(尊號)올리기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고종친정의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고종 자신은 존호를 극구 사양한 끝에 마지못해 그 요청을 받아 들였다. 왕권강화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존호올리기 운동에 대해서는 그동안 왕권강화를 독재의 유일한 명분으로 삼았던 흥선대원군으로서도 반론을 제기할 다른 명분이 있을 수 없었다. 동치제의 친정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소식이 자주 전해지던 서기 1872년 12월 말에, 고종은 북경에 다녀 온 박 규수로부터 청국 백성들이 모두 동치제의 친정을 원하고 있다는 정세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서양인들도 더 이상 제 멋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보고도 들었다. 보고를 들은 젊은 임금 고종은 친정 및 서양열강과의 관계 개선 등에 대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종의 가슴속에서는 친정을 개시할 수 있으면 자신의 뜻대로 시대조류에 맞추어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펼쳐야겠다는 젊은 제왕다운 큰 포부가 자라나고 있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이 별 탈없이 진행되며 청나라의 국제적 입장도 더 확고하게 되어 가는 것을 알고, 조선도 무조건 쇄국양이 정책만을 고집할 일이 아니라는 고종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게 되었다. 

  서기 1873년부터 청나라에서 동치제의 친정이 시작되자 조선에서는 진하사(進賀使)를 청나라에 보냈는데, 약 1개월 뒤인 4월 초순에 돌아 온 사신 일행으로부터 고종은 특히 서양열강의 동태에 대하여 많이 듣고 난 후 대비책들을 논의했다. 그리고 '근본을 튼튼히 하면 특별히 무력증강을 도모하지 않아도 서양열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여러 사신들의 의견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근본을 튼튼히'하는데 최우선적인 정책목표를 설정하고자 한 고종은, 서기 1873년 5월 10일에 부호군(副護軍) 강 진규가 올린 상소를 받아 들여 건청궁의 건축을 검소하게 하도록 조치하고, 그를 예조판서에 임명했다.

  그 후로도 고종은 사신들의 견문을 상세히 분석하고, 대신들과 국제정세 등에 대하여 앞날의 대책을 논의하는 등, 친정을 위한 준비작업은 계속되었다. 문제는 타고난 총명한 자질과 관후(寬厚)한 인품, 부지런한 학문에의 정진, 그리고 자식도 두는 등, 이미 제왕으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춘 성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 권력을 장악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자식인 고종에게 대권을 돌려주지 않고 계속 정치를 주도하려한 데 있다. 그것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명분이 닿지 않는 독재적 행위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명분없는 독재정치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었고, 마침내 사림을 대표하여 사십여세의 장년으로서 의기가 충천하던 강골 선비 최 익현이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8월 26일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시책 중에서 문세수납(門稅收納)에 대하여 노골적인 반대의사를 표하며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였고, 10월 10일에는 일찍이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던 김 시연·심 이택·최 익현 등 세 사람을 각각 임금의 가장 측근에서 일하는 비서인 좌승지·우승지·부승지로 임명하는 인사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름후인 10월 25일에는 마침내 최 익현이 흥선대원군을 겨냥한 시정비판(施政批判) 상소를 다시 올렸고, 이에 대하여 흥선대원군 측 대신들이 최 익현을 격렬하게 규탄했으나 고종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 익현을 옹호했다. 이어서 11월 3일에 최 익현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직접 통박하며 대원군의 퇴진을 촉구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상소를 올렸으며, 고종은 그에 따라서 다음 날인 11월 4일에 여러 중신들 앞에서 마침내 친정을 선포했다.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오랜 집정이 명분이 없는 까닭에 결국은 친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자인하고 조용히 물러가기로 마음을 돌려 자신의 집정장소이자 거처였던 운현궁을 떠났다.

  그런데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지 한달여만인 12월 10일에 민중전의 침전인 경복궁내 자경전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일어나서, 고종과의 사이에 7년여만에 잉태하여 거동이 불편하던 민중전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겨가는 큰 변고가 발생했다. 이는 고종시대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하는 불길한 사건이기는 했으나, 다음 해인 서기 1874년에 민후는 무사히 고종의 대를 이어 갈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나라의 큰 경사가 되었다. 그 옥동자가 바로 훗날 광무황제(고종)의 뒤를 이은 융희황제(순종)이었다. 자식복이 많지 않았던 듯한 민중전은 외아들이자 단 한 명뿐인 정통적 제왕계승자를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게 되었다.

3. 동아의 대세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주권을 통째로 맡기다시피 한 채 9년여간이나 실권없는 임금노릇에 만족해야 했던 고종은 만 21세 되던 해에 비로소 군국의 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의 앞길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난관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의 많은 부분은 흥선대원군의 실책(失策)들과도 무관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국내문제는 여하간에 조선을 둘러 싼 동아시아의 격변은 엄청나기만 했다. 서구열강들로부터 강요된 자본주의적 국제질서를 일단 받아들인 일본은 개국이후 야기된 극심한 경제난을 극복하려는 방편으로, 명치유신을 통해 공고한 국왕중심의 일사불란한 국가체제를 이룩하고 사회체제의 전반적인 개혁을 통해 난관을 해결하려 했으나, 오히려 50여만 명에 달하는 실직무사(失職武士)들의 양산과 식량가격 등 물가의 폭등에 의하여 더욱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명치정부는 서양열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제적 곤경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국가의 사활을 건 군비증강에 골몰하고 있었다. 서양제국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으로 인하여 엄청난 국부가 유출되면서 경제적 공황상태에 빠져든 일본이 그 열악한 국가재정을 군비증강에 쏟아 부은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경제적 모순을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을 식민지를 얻기 전에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태인식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왕정복고 얼마 후 곧 아이누족의 자치지역이나 마찬가지였던 북해도를 경략하여 완전히 장악한 것을 선두로 식민지가 되어줄 만한 곳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열강이 아프리카·인도·동남아시아 등에서 저들의 가공할 무력을 내세워서 대체로 쉽사리 식민지를 획득한 데 비하여, 일본이 식민지를 쉽게 얻을 수 있을만한 곳은 이미 세계 어느 구석에서건 남아 있지 않았다. 거꾸로 세계의 모든 열강이 마지막까지 완전히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지 못하고 있던 동아시아로 한꺼번에 몰려와서, 동아시아의 세나라(청·조선·일본)을 식민지 내지는 반식민지로 만들고자 열띤 경쟁에 여념이 없었다. 구미열강이 이미 장악한 지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결국 명치정부는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만한 곳을 동아시아 주변에서 찾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서구열강보다 약하기는 했어도 청국과 조선 그 어느 나라도 쉽사리 일본에게 굴복할 나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제적 활로를 기어코 식민지 확보에서 찾으려 한 명치유신의 주모자들은, 삼백여년간 세계사상 유례가 드물게 평화로운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해 오던 조선에 눈길을 돌리고, 마치 먹이를 노리는 황야의 이리떼처럼 말 같지도 않은 정한론(征韓論)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치정부로서는 조선도 결코 만만히 볼 수는 없는 상대였다. 일찍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복욕을 선보였던 프랑스와 미국의 막강한 공격을 비록 힘겹게나마 물리친 조선이었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해서는 조선인 모두가 굳은 결전의지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백여년 전 조선을 침략했던 왜군이 조선과 명군의 연합작전으로 패배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가 연합할 때 당해내기 힘들리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청나라가 더욱 약화되고, 조선이 무방비 상태에 있거나 약해 보일 때는 언제라도 침공할 준비를 갖추려 했다. 그럴 경우 서양열강이 방해하지 않도록 열강과는 극히 친밀한 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이권획득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미국과 영국에 대하여 극히 우호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다.

  또한 애로우호 사건이후에 맺어진 천진조약에 의하여 이미 청국으로부터 광대한 연해주를 할양받은 러시아가 멀지 않은 장래에 만 및 조선에 있어서의 이권확보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므로, 같은 야욕을 품은 명치정부로서는 러시아세력의 확장에 대하여 크게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이 러시아와 대립하는 세계정책을 채택하며, 은근히 일본을 키워서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대항시키려는 방침을 추진한 것은 일본에게는 백만 대군의 원조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서기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적 상황은 일본측에는 매우 유리하게, 반대로 조선 측에는 대단히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은 조선에 대한 서구열강의 여론을 극히 악화시킴으로써, 조선으로서는 일대 위기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내외적으로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만 조선의 국정을 직접 맡게 된 고종은 국정의 방향을 빨리 바르게 정하여 망국을 자초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세자를 낳은 후 일단 마음의 안정을 누리게 된 민중전 또한 내외적 정세를 치밀하게 연구하며 고종을 보필하기 위하여 온갖 심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은 우선 내정개혁에 착수하여 흥선대원군 집정기간동안 경제난국의 큰 원인이자 원성의 표적이던 당백전과 청전(淸錢)의 주조 및 유통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서원에 대한 강경책도 중지시킴으로써 십여년간 행해졌던 공포정치의 중압으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켰다. 새로운 정책들을 시행하는 데는 고종 자신의 확고한 정치조직적 기반이 있어야 했는데, 오랜 세도정치와 그 뒤를 이은 흥선대원군의 독재적 집정으로 인하여 제왕을 위하여 존재해야 할 정치적 조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고종은 자신의 주변에서 인재들을 발탁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 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을 스스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으나, 조선의 정치제도상의 특징으로 제왕의 일가 중에서는 권력을 쥘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고종 주변 인물 중에서의 인재선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격변하는 세계정세를 이해하며 새 시대를 함께 열어 갈 인재를 구하는 것은 위정척사적 논리가 우세한 저간의 사정으로 볼 때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위정척사는 서양열강의 경제침략 저의를 꿰뚫어 보고 있는 훌륭한 논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언제까지고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한 고종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달리 예리한 정치감각으로 고종을 보필하는 민중전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흥선대원군이 민중전을 며느리감으로 고르면서 염두에 두었듯이 어떠한 정치적 배경도 없는 고아였던 까닭에, 민중전은 결국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주변 친척들 중에서 우선 제왕을 힘껏 보필하여 일할 만한 사람들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민씨 세도정치의 조직적 바탕이 갖춰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종의 정책은 무엇보다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순응해가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켜내는 데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미 청나라에 서양 열강이 교두보를 확보했고, 북방의 강대국으로 등장한 러시아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상호교역을 종용하고 있었고, 삼백여년간 조용하던 일본마저 정한론을 부르짖으며 침략할 틈만 노리고 있는 위기적 상황에서 자주독립을 지킨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청나라가 예전처럼 강력하기만 해도 두 나라가 공동대응 방안이라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늦게나마 양무운동을 펼치면서 다시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애는 쓰고 있었지만 이미 옛날의 그 막강하던 위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전의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시에도 청국은 조선을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바다 건너에서 이미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무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일본이 조선을 넘볼 때도 청이 얼마나 적절히 대응해 줄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막강한 서양 열강의 침략보다는 덜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만일 일본이 대폭 군사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공해 올 경우에도 청나라가 꼭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조선은 스스로 무장을 강화하여 침략에 대비하면서 국민들의 생활도 향상시켜 가야 했다. 그러나 고종이 물려받은 피폐한 재정상태로는 도저히 두가지를 한꺼번에 추진할 수 있는 가망성이 없었다. 대원군이 강행했던 무리한 경복궁 중건 및 그 재정확보를 위한 여러가지 시책들은 결과적으로 민중경제생활의 핍박은 물론, 국고마저 거덜나다시피하게 만들고야 말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국방강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군사기술의 도입이 필요했다. 두 차례의 양요에서 프랑스군과 미군이 일단 물러가기는 했으나, 전투에서의 인적·물적 피해는 너무도 막심했고, 특히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에 서양 신무기의 위력은 도저히 조선군으로서는 당해낼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청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우수한 서양식 군사기술의 도입은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종은 언젠가는 서양 열강과의 교류를 트는 수밖에 없으며 가능한 한 크게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추진해야만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체로 위정척사의 원칙을 완고하게 고수하는 국내여론의 동향으로 볼 때, 갑자기 그처럼 추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우선 그동안 밀려 있던 일본측의 서계(書契;왕정복고통보서)접수 문제부터 현실적으로 정리하면서 문호개방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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