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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2)-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고종의 등극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5/24 [10:04]

대한정통사(2)-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고종의 등극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5/24 [10:04]
 
▲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고종의 어진.   제후국 군주는 왕이란 호칭을 쓰지만 천자의 나라인 황제국은 조와 종을 호칭으로 쓴다. 조선은 바로 황제국이었던 것. © 편집부

제 1 장  제왕의 길
제 1 편  조선최후의 군주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 고종의 등극. 고종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서기 19세기 중엽에, 자손이 없던 철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치열한 신경전이 전개되던 가운데, 철종과 마찬가지로 전혀 뜻하지도 않게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순조시대부터 시작된 외척들 특히 안동 김씨 일가에 의한 세도정치는, 국법에도 개의치 않고, 임금마저 무시한 채, 무려 육십여년에 걸쳐 대대로 세도가문 일가에 의한 독재를 자행하면서, 뇌물수수 및 매관매직 등 온갖 부정부패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전례없는 민중수탈로 인한 삼정문란을 야기하여, 대규모적인 민란이 일어나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특히 철종시대의 종반기에 해당하는 철종 13년(서1862)부터 진주민란을 도화선으로 전국에서 37회에 걸친 민중봉기(소위 '임술민란')가 발생하여 민중의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아편전쟁·태평천국란·애로우호 사건(제2차 아편전쟁)등에 의한 서구 열강의 무자비한 침략정책과, 미국함대에 의한 일본 덕천막부의 급속한 서양식 개화 등으로 내외적인 위기감이 크게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말세적 사회분위기에 편승한 종교적 민중운동도 벌어지게 되었다. 서기 1860년에 경주지방의 몰락한 양반집안 출신의 최 제우가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표방하며 창도한 동학이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당대 사회를 조선왕조의 운명이 다 된 말세로 규정하고, 소위 '개벽'을 통하여 새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교리를 펼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위정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한 결과가 되어, 서기 1864년 3월에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참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처럼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가 조선을 먹구름처럼 덮어 오고 있던 때 고종은 25대 철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올랐는데, 이는 그의 부친인 흥선군(興宣君)과 24대 헌종의 모친이었던 조대비와의 정략적 결탁에 의한 것이었다. 즉, 철종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대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양자로 삼는 형식을 취하여 자신의 남편이자 헌종의 부친인 익종의 대를 잇게 한 후 보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실시하며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했다. 그리고 2년후인 서기 1866년(고종 3년)에는 고종에게 친정(親政)하도록 한다는 명분을 세워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흥선대원군이 집정하게 되었다. 이른바 대원군 섭정이 시작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왕권의 정통성을 이을 세자를 하루빨리 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난 서기 1866년에 자신의 처가이기도 한 여흥 민씨 중에서 조실부모하고 친척집에 얹혀 살고 있던 16세의 민 자영을 간택하여 고종과 혼인토록 했다. 그녀는 비록 고아로 자랐지만 매우 기품이 있으면서도 총명했고, 사교적이면서 미모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독서를 몹시 좋아하여 춘추좌씨전 등 역사서들과 사서오경 등 여러 유교 경전들도 닥치는 대로 섭렵하며 국모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데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3년 전에 보위에 오른 후 제왕으로서 익혀야 할 학문 등을 부지런히 연마하며 장성한 고종도 더 이상 철없던 자식이 아니었으며, 엄연히 훌륭한 제왕으로서의 자질을 구비하여 가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임금인 고종을 충실히 보좌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마땅할 것이었으나, 한 번 권력을 거머쥔 흥선대원군은 일단 자신이 품고 있었던 경륜을 한껏 펼쳐 보고자 했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임에 틀림없었으나, 효심이 지극한 고종으로서는 아버지가 스스로 물러갈 때만 기다리면서 일단 제왕으로서의 자질을 더욱 함양하는 길을 택했다.

  일단 변칙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몇가지 혁신적인 조치들을 단행했다. 수십년에 걸쳐서 민폐를 많이 끼침으로써 원성이 자자하던 서원들을 대폭 정리해서 천여 곳 이상이던 서원들을 47개만 남겨두고 다 없애버렸고, 안동 김씨 일파가 장악하고 있던 중요한 지위에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실시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전횡으로 인하여 조직적 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하던 그로서는, 그와 호흡이 잘 맞는 인재들을 우선적으로 등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민생에도 관심을 가지고 갖가지 명목의 무명 잡세들을 폐지하기도 하는 등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함으로써, 오랜 척족 세도정치에 환멸을 느껴 왔던 민중으로부터의 지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 갖춘 일대 사건이었다. 일부 지방에서 세도가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마치 최고 권력기관처럼 행동하면서, 임의로 지방 민중으로부터 각종 명목의 부역과 공출 등을 자행하는 등 악폐가 있었던 반면, 많은 다른 지방에서는 그 나름대로 사림의 정론(正論)을 배양하는 교육기관과 여론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컸던 것이다. 따라서 서원은 아무런 대안도 없이 일조일석에 폐지시켜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개인적 감정과 편견을 가지고 처리할 일은 결코 아니었고, 정당한 이유와 대안이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서원 일체정리 조치는 각 지방의 뜻있는 사림 대다수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편 그는 임진왜란때 불탄 후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으로 다시 국가경제의 난맥상을 초래하기도 했고, 불법 입국한 프랑스인 신부 3명을 포함하여 천주교도 8,000여명을 학살함으로써 그에 따른 서양 열강의 항의성 침공을 자초하기도 했다. 두 번에 걸친 열강의 침공을 힘겹게나마 물리친 후에는 척화비를 전국 방방곡곡에 세우는 등 더욱 강경일변도로 일관하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친 쇄국정책을 취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만여명에 달하는 천주교도 학살은 임진란 이후 처음 보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로서, 이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피비린내나는 동족학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는 그의 부인 민씨도 천주교도였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하면서 엉뚱한 백성들만 학살했다는 비난을 면키 힘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심복들을 대거 기용하여 일종의 세도적 권력층을 형성했고, 관직을 둘러 싼 뇌물수수도 여전했으므로, 서슬 퍼렇던 초기의 부정부패 척결의지와는 달리 부정부패 철폐에도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한 문젯점들과 함께 무차별적 서원철폐를 비롯한 흥선대원군의 결정적인 실책들은 강골 선비 최 익현 등에 의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서 흥선대원군의 하야까지도 요구하게 되는 단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일 흥선대원군이 정통성있는 제왕으로서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일관성있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그의 다른 면모를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고종을 보필하며 대리집정하는 위치였고, 언제까지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따라서 고종이 친정을 원하고 또한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지면 언제든 제왕적 절대권력을 반환해야 했다. 그것이 임금에게 충성하는 도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인 고종이 만 11세에 보위에 올라, 15세에 결혼하여 이미 두 자식까지 거느리게 된 만 21세의 성년이 되도록, 권력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상례(常禮)에 어긋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성년이 지난 제왕을 보필하는 도리도 아니었다. 아들인 고종과, 자신이 선택한 며느리인 민중전을 임금과 국모가 아닌 어린아이들로만 간주하여, 그 위에 군림하려한 그의 태도로 인하여 권력을 둘러싼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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