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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한일밀약' 박정희가 포기했는가?

한일밀약"독도는 한.일 모두 자국 영토라 주장하고 반론제기않는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12/25 [02:06]

'독도-한일밀약' 박정희가 포기했는가?

한일밀약"독도는 한.일 모두 자국 영토라 주장하고 반론제기않는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 입력 : 2009/12/25 [02:06]
 
'한국 인터넷언론사협회' 회장단 취임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동북공정.식민사관으로 인하여 잘못 알고 있는 수 많은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사를 바로  알려 주시고, 부정부패비리 고발로 보다 청렴하고 바른 나라 바른 국민이 될 수 있도록 힘써 주시고, 대안과 정책제시을 통하여 국민과 지역, 그리고 한민족공동체가 골고루 차별없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한-민족주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리복재 회장님 이하 모든 협회언론사들이 협심단결하여 인터넷언론을 선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억울한 국민의 사연들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도 진실보도를 통하여 누명을 벗겨 주는 정론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며, 협회산하 인터넷 언론사들의 무궁발전을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1.자주주권적이지 못한 국가권력하에서 국권상실과 식민지는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64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겨우 1천300원을 지급했다니. 분하고 분해서 받고 싶지도 않다." 일본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99엔(1천300원)을 지급받은 근로정신대 출신 양금덕(78) 할머니(아래 사진)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이같이 토로했다. 64년 동안 한 푼의 보상과 사과도 없었던 일본 정부지만 연금 가입을 확인해줄 증빙 자료까지 제출했기 때문에 전향적인 입장 변화를 기대했다는 양 할머니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 일본 사회보험청으로부터 겨우 푼돈 1300원을 배상금으로 지금받은 양할어머니

양 할머니를 포함, 10대 때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던 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 8명은 1998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후생연금 탈퇴수당 지급 청구를 했고 일본 사회보험청은 최근 후생연금 가입이 인정된다며 1인당 99엔을 지급했다. 1300원은 당시 화폐기준으로 일본정부가 배상한 금액이라고 한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일본 사회보험청 앞에서 분노하며 돈을 던지는 것으로 시위를 마치고, 다시 사회보험청을 상대로 싸움에 들어 갔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 할머니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철저히 배상하고 위로를 했던가? 그냥 형식적으로 논평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왜 이렇게 한국정부는 배상문제에 대해 강하게 나가지 못하고 방관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박정희군사정권당시 장면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기위해 필요한 개발비용을 일본정부에게 차용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맺은 한일밀약에서 이미 박정희가 독도영유권포기와 함께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들에 대한 피해배상을 면죄해 줘서가 아닐까?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해 오는 배경이 아닐까? 국가간의 합의서는 내용이 국익을 양보하거나 팔아 먹는 내용이라면 그 후 정권이라도 큰 소리를 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월간중앙은 2007.06 19일 발매된 창간 39주년 기념 4월호에서 "한.일 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독도밀약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독도밀약은 한.일 협정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맺어 졌다.월간중앙이 한국과 일본의 생존자 증언과 자료를 근거로 추적한 독도밀약은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됐다. 
 
부속조항은

독도는 앞으로 한.일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등의 4개 항이다.

월간중앙은 "그 독도밀약은 합의 다음날 (왜병출신 쿠테타괴수) 박정희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노 의원은 그간 비밀 유지를 위해 이용하던 용산 미군기지에서 일본의 고노 이치로 건설장관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으며, 고노는 이를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사토 총리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 김종락 당시 한일은행 전무였다. 당시 김 전 총리는 한.일 협정 굴욕협상 반대시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난 상태였다. 

김씨는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독도 문제를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일단 해결로 간주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다"며 "박정희 군사정부는 독도밀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언명과 함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 서울 특파원으로 독도밀약을 위한 정일권-고노 연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시마모토 겐로(80)는 "우노 소스케 의원이 박건석 회장의 자택에서 정일권 총리에게 독도밀약 문건을 건네는 자리에 나와 김종락.문덕주(당시 외무부 차관) 등 세 사람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월간중앙은 "한.일 두 나라는 김영삼 정부 때 독도에 새 접안시설을 건설함으로써 약속을 깬 것 외에는 거의 밀약을 준수해 왔다"고 밝혔다.

▲ 일제하 강제징용된 조선노동자들의 모습  
일제가 조선을 무단침탈하여 식민지화버린 근본적인 요인은 자주성과 개방성을 통하여 일찍히 조선을 근대화시키지 못한 무기력하고 부패한 소중화사대주의 조선권력층때문이다. 결과의 근본적 원인은 항상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다. 100년전의 모습이 바로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이라면 언제든지 일제치하는 재현되고 마는 것이 역사의 순환론적 이치다.
 
사대주의자들이 정치를 판치고 민족자주주권세력이 탄압을 받고 민족민주세력이 단결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가고 부정부패비리가 판을 치고 역사를 망각하고 공동체성이 파괴된다면 콩가루 나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일본 등 외세는 언제나 집어 삼킬 수 있는 조건이 되고 만다. 또한 친일군사독재세력을 지속적으로 밀어 주는 국민들이 존재하는 한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굴욕과 일제하 조선인들의 고통은 재현될 수 밖에 없다.

고로 민족의 철천지 원수는 그래서 사대주의와 국민통합과 민족통합을 가로 막는 우리가남이가 정치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대주의와 우리가남이가정치세력에게 결단코 권력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못 하겠다는 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 할 수도 없는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이방인들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판과 사회자체를 망가뜨리는 암세포들이라 할 수 있다.

아직도 대한민국내부에는 정신대가 강제성이 아니고 자발적 지원이였다고 주장하는 서울대 명예교수 안병직같은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뉴라이트 친일단체들이 득세하고 있는 나라이며, 이 뉴라이트에 이명박.박근혜.이회창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이 핵을 가진 북한만 아니면 다시 언제든지 조선을 먹기에 딱 좋은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미국과 함께 북한핵폐기에 동참하고 군국주의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 조선총독은 말했다. "조선인들은 지금 우리가 폐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를 상실한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되찾기위해서는 100년이 걸릴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다시 온다"고. 조선말기 상황을 보라!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무단침탈하는데는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돌아선 이완용 등 일본이 보호해준다는 명분의 굴욕적인 을사조약에 서명한 조선조정의 사대매국주의 간신배들이 있었다. 항상 적은 내부에 있는 법이다. 그 내부의 적들이야말로 바로 외세를 끌어 들이고 국권을 넘겨 주는 첨병들인 것이다.이런 사대매국 간신배들의 특성을 보자면 강자들이나 권력에 아부하기 좋아하고 떠 받들어 주기를 좋아하고 약자들을 이용하기 좋아하고 무시하기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런 자들은 결단코 정치권력에 끌어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충심으로 쓴소리로 조언하고 충고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인물들을 늘 친구로 삼고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체제와 이념을 떠나서 민족공동체적으로 보면 북핵은 민족방어수단이기도 하다.남북한 대립갈등을 조장하여 무기를 팔아 먹고 기술과 시장을 독점해야 하는 미국과 일본은 자신들의 목적을 방해하는 북한핵이 제거되야만 한다. 6자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깨 버린 나라가 그래서 미국이며,남북합의를 위반해 버린 자가 이명박이 아니던가? 그것은 북한과 한반도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선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쟁나면 모조리 죽고 한반도가 폐허가 되는 일이다. 외세야 좋겠지만 우리 민족은 결코 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북한이 북한핵을 수단으로 미국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한반도평화협정체결과 한반도비핵화다. 현재 한반도가 전쟁을 잠시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몇이나 될까? 현재 한반도는 잠시 전쟁을 쉬고 있을 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직전상황인 것이다.

2.독도는 당연히 한국땅! 간도반환을 위한 국제소송과 민족사나 바로 세울 일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발표할 고등학교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라는 표현이 빠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해설서에는 북방영토 등 일본이 당면한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중학교에서의 학습을 토대로 일본이 학생들에게 주장하고 있는 입장에 기초해서 적확하게 다루고 영토 문제에 대해서 이해를 심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표현이 담겼다.

이는 지난해 7월 일본 중학교 교과서 해설서에서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독도를 둘러싼 주장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북방영토와 함께 일본의 영토 영역에 대해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구를 넣었던 것에 비교하면 상당 부분 진전된 것으로 평가된다. 외교소식통은 하토야마 정권이 한일관계를 고려해 독도라는 표현을 넣지 않고 애매한 표현을 담게 됐다고 밝혔다.


▲ 단군3한국(마.번.진조선)영역
초딩.중딩 [사회과 부도]를 보았다. 여전히 단군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으로 새겨져 있었고 고구려.백제 땅은 여전히 만주.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한 영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현재 [사회과 부도]에 표기된 고조선 왕검성 평양은 실은 한반도에 존재하지도 않은 소위,한4군과 기자조선이 북한지역이라는 것을 강조하기위한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북한의 왕검성(평양)은 단군3조선 중 마조선의 왕검성일 뿐이다. 단군조선을 대표하는 중앙통치국(군대통제권.마.번조선 단군임명권) 진조선의 왕검성은 조양(아사달:초기 단군한국의 상징인 비파형 청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된 지역).심양.장춘 등 만주전역이다. 고로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는 아사달이 되는 '조양'으로 표기되야 하고, 한나라 한무제 당시 사가인 사마천의 [사기]에도 그 지명이 기록되지 않는 한4군은 존재하지 않은 역사왜곡이고, 단군조선 25대 솔나 단군천황 당시 주나라에게 멸망한 은나라 왕족 기자의 망명지는 서화(번조선의 제후국이였던 고죽국이 위치한 북경 부근지역:유명한 현자 묵자는 바로 고죽국 사람이다)이고, 기자 후손 기후가 323년에 군사를 일으켜 번조선 단군에 오르니 바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한반도 마한으로 들어와 마한권력을 차지한 기자조선이다.
고로 기자가 한반도로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개국했네하는 소중화사대주의자들이나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의 역사논리는 어불성설이라 할 것이다.
 
독도는 당연히 한국땅이니만큼 독도경비에 만전을 기하고 간도반환을 위한 국제소송과 민족사나 바로 세울 일이다! 일본정부는 앞으로 유라시아로 연결되는 한반도철로를 돈 내고 사용하기 위해서도 독도영유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일제 식민지치하에서 강제 징용된 정신대 할머니들과 노동자들의 임금과 연금을 현재 화폐기준으로 계산해서 배상해 주고 머리숙여 한국과 한국민들에게 사죄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한일역사논쟁을 통하여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인지하고 정치경제적 협력과 문화교류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이 또한 100년 전 동양평화를 파괴했다는 명분으로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에 부합한 일이며, 현재 일본의 권력을 장악한 민주당의 노선이라 보며 확실히 생각을 바꾸기를 바란다.

 
[자료]'한단고기'가 기록한 단군 한국조선사 요약

가. 아사달시대 : 초대 단군 왕검 ∼ 21세 단군 소태 (B.C.2333∼1286 : 1048년간)

1대 왕검 단군(王儉, 93, B.C.2333) : 무진 원년, 신시의 옛 규칙을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로 정하여 나라를 세움. 나라를 3한으로 나누어 다스리니, 진한은 직접 다스리고 마한과 번한에는 각기 소(小) 단군으로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었으며, 하백녀를 아내로 맞아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B.C.2284 년에 큰 홍수가 나니 오행치수로서 물을 다스리고 우수주에 비석을 세웠다.

B.C.2283 년에 혈구(강화)에 삼랑성을 쌓고, 하늘에 제를 올리는 단(참성단)을 마리산에 쌓았으며,

B.C.2267 년에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에서 우사공에게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해주고, 회대지방을 평정하여 우순에게 감독케 하였다.

2대 부루 단군(扶婁, 58, B.C.2240, 태자) : 칠회력(달력)을 만듬, 일식 기록(B.C.2183) -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슈퍼컴퓨터로 확인

3대 가륵 단군(嘉勒, 45, B.C.2182, 태자) : 삼랑 을보륵에 명하여 정음 38 자 가림토를 만듬, <배달유기> 편찬

4대 오사구 단군(烏斯丘, 38, B.C.2137, 태자) : 조개 모양의 화폐 제작함. 하나라의 상왕이 덕을 잃어 신하들 중에 왕위를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있어 하나라의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자,

B.C.2119 년 단제께서 식달에게 명을내려 남, 진, 번 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니 모두 항복하여 나라의 위엄이 더욱 빛났다.

5대 구을 단군(丘乙, 16, B.C.2099, 羊加) :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 제작

6대 달문 단군(達門, 36, B.C.2083, 牛加) : 신지 발리가 서효사를 지음

7대 한속 단군(翰栗, 54, B.C.2047, 羊加) : 하(夏)병이 간이(干夷)를 공격하니 상장을 보내어 물리침. 아사달에 저수지를 파고, 두레박, 배수기, 급수기 등의 사용법을 보급함.

8대 우서한 단군(于西翰, 8, B.C.1993, ? ) : 이십 분의 일 세금내는 법을 정함, 하(夏)나라의 정세를 살핌

9대 아술 단군(阿述, 35, B.C.1985, 태자) : 청해의 욕살 우착의 난을 제압

10대 노을 단군(魯乙, 59, B.C.1950, 牛加) : 천하(天河)에서 윷판 같은 그림을 진 거북이(神龜-신구)가 나타남

11대 도해 단군(道奚, 57, B.C.1891, 태자) : 국선의 소도에 웅상을 설치하고, 대시전을 세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의,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가르침을 전하여 위세를 떨침.

12대 아한 단군(阿漢, 52, B.C.1834, 牛加) : 요하(지금의 난하?)의 남쪽에 역대제왕의 이름을 새긴 순수관경의 비를 세움.

B.C.1797 년 하나라 걸왕이 자만하여 하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많이 귀순해오자 단제께서 이를 불쌍히 여겨 받아주었다.

B.C.1783 년 은(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 해에 하나라의 신하인 한작이 단제께 군사를 요청하였다.

13대 흘달 단군(屹達, 61, B.C.1782, 牛加) : 하나라 걸왕의 요청으로 은나라 탕왕을 징벌하였으나, 후에 하의 걸왕이 포악 무도해지고 약속을 어기자 은을 도와 하나라를 정벌하고 관중의 빈, 기의 땅에 관청을 설치하였다. 국자랑을 모집.
B.C.1733년 오성(五星-수,금,화,목,토성)이 모이는 현상을 기록 - 슈퍼컴퓨터로 확인됨

14대 고불 단군(古弗, 60, B.C.1721, 牛加) : 호구조사를 실시, 총 1억 8천만 명

15대 대음 단군(代音, 51, B.C.1661, ? ) : 은나라 왕 소갑이 화친을 구함.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함. 양운국과 수밀이국이 특산물을 바침.
약수(弱水)에서 금과 쇠를 채취함.

16대 위나 단군(尉那, 58, B.C.1610, 牛加) : 영고탑에 모여 삼신(하나님)께 제를 올리고 천부경을 암송함

17대 여을 단군(余乙, 68, B.C.1552, 태자) : 오가와 함께 나라를 순회중 개사성 근처에서 선인들의 칭송을 들음

18대 동엄 단군(冬奄, 49, B.C.1484, 태자) : 지백특 사람들이 특산물을 바침

19대 구모소 단군( 牟蘇, 55, B.C.1435, 태자) : 주천력(별들의 궤도를 관측하고 기록한 책)과 팔괘상중론(팔괘가 중첩하여 변하는 이치를 해설한 책 - 주역의 원전)을 지음

20대 고홀 단군(固忽, 43, B.C.1380, 牛加) : 영고탑을 개축. 공홀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함

21대 소태 단군(蘇台, 52, B.C.1337, 태자) : 은나라 왕 소을이 공물을 바침, 은나라 왕 무정이 조공을 바침 - 갑골문자의 기록으로 입증됨.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크게 세력을 떨쳐 우현왕으로 임명되고, 후에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됨.

* <세종실록> <동사강목> <동국통감> <응제시주> 등 많은 역사서에 단군의 수명, 혹은 고조선의 역년의 수라고 공통적으로 표현된 千四十八(1048)년 이라는 존속기간은 바로 이 아사달 시대까지만을 말하는 것이다.

우현왕 색불루가 혁명을 일으켜 단군에 즉위하고 도읍을 옮겼으며,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꿈으로 인하여, 단군조선의 정통성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한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 때까지만을 단군 조선의 역년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나. 백악산 아사달시대 : 22세 단군 색불루 ∼ 43세 단군 물리 (B.C.1285∼426 : 860년간)

22대 색불루 단군(索弗婁, 48, B.C.1285, 우현왕) - 혁명을 일으켜 단군에 즉위하고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으며 삼한(진한,번한, 마한)을 삼조선(진조선,번조선,막조선)으로 바꿈.
장당경에 고등왕의 사당을 세우고 제를 올림.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여 위세를 떨침.

23대 아홀 단군(阿忽, 76, B.C.1237, 태자) : 은나라가 스스로 혼란에 빠지자 이를 쳐부수고 회대의 땅을 평정함

24대 연나 단군(延那, 11, B.C.1161, 태자) : 소도를 증설하고 하늘에 제를 지내어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음

25대 솔나 단군(率那, 88, B.C.1150, 태자) : 기자가 서화로 옮김. 단제께서 상소도에 계시며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연함

26대 추로 단군(鄒魯, 65, B.C.1062, 태자) : 의학원을 세워 의술을 보급함. 위문국이 정치론 28권을 지어 바침.

27대 두밀 단군(豆密, 26, B.C.997, 태자) :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짐.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특산물을 바침

28대 해모 단군(奚牟, 28, B.C.971, ? ) : 빙해(氷海)의 여러 왕들이 공물을 바침

29대 마휴 단군(摩休, 34, B.C.943, ? ) : 주나라에서 공물을 바침. B.C.935년 남해의 조수(潮水)가 크게 벌어지다. - 이 시기에 조석력이 가장 크게 보였음을, 역시 서울대 박창범 교수팀이 슈퍼컴퓨터로 확인함.

30대 내휴 단군(奈休, 35, B.C.909, 태자) :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고 돌에 치우천황의 공덕을 새겨 하늘에 제를 올림. 주나라와 수교를 맺고, 흉노로부터 공물을 받음.

31대 등올 단군(登 , 25, B.C.874, 태자) : 기자조의 요왕이 삼성전을 백악산에 세우고 한인, 한웅, 한검(단군 왕검)의 신위를 모심.

32대 추밀 단군(鄒密, 30, B.C.849, 아들) :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침. 초나라의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함. B.C.837년 일식이 있었음

33대 감물 단군(甘物, 24, B.C.819, 태자) : 주나라에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침.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워 제를 올리고 글( ~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합쳐 하나로 돌아오니 ~ 영원히 법으로 삼으라)을 올림

34대 오루문 단군(奧婁門, 23, B.C.795, 태자) : 태평하니 도리가( ~ 큰 나라 배달나라 ~ 끝없이 태평하라)를 지어 부름

35대 사벌 단군(沙伐, 68, B.C.772, 태자) :
언파불합 장군을 보내 바다의 웅습(일본의 규우슈 지방)을 평정함.

조을 장군을 보내 연나라 수도를 격파하고 제나라와 임치 남쪽에서 싸워 승리함.

36대 매륵 단군(買勒, 58, B.C.704, 태자) : 천하(天河)에서 별무늬를 지닌 용마(龍馬)가 나타남.

협야후 배반명으로 하여금 삼도(三島-일본)를 평정토록 하고, 수유족의 군대(기자조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자, 제나라가 고죽으로 쳐들어 왔으나 패하고 돌아감.

37대 마물 단군(麻勿, 56, B.C.646, 태자) : 화폐 공방전을 만들었으며, 주(周)나라 양왕의 공주 희정을 왕비로 삼았다. 남쪽을 순행 중에 기수에서 돌아가심(B.C.591)

38대 다물 단군(多勿, 45, B.C.590, 태자) : 기자조선의 사절을 맞아들이고, 강동의 석토를 물에 혼합하여(오늘날의 석회석) 벽돌을 만들었다.

39대 두홀 단군(豆忽, 36, B.C.545, 태자) : 연, 초, 위, 제, 조, ,송, 기자조선 등의 사절들을 맞아들임. 노나라의 공자와 주나라의 노자가 만남.

40대 달음 단군(達音, 18, B.C.509, 태자) : 윤복지가 도덕경을 저술하여 바침, 진개가 치국요람을 저술하여 바침.

41대 음차 단군(音次, 20, B.C.491, 태자) : 주나라 유생이 와서 8조교를 배워감

42대 을우지 단군(乙于支, 10, B.C.471, 태자) : 이일선이 천리경을 저술하여 바침.

43대 물리 단군(勿理, 36, B.C.461, 태자) :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수만 명의 군사를 모아 서북 36 군을 함락시키고 도성을 공격하자 단제는 피난 중에 해두(海頭)에서 돌아가시고,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어명을 받들어 먼저 장당경을 점령함.

* (아사달시대 1048년 + 백악산 아사달시대 860년 = 1908년) : <삼국유사>에서 신화적으로 표현한 단군시대, 즉 壽一千九百八歲(수일천구백팔세-1908년간)이란 기록은,

우화충의 반란으로 인하여 43대 단군 물리가 사망하고 도읍을 옮겼으며,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고치자, 고조선이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생각하여 잘못 표현된 것이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지 1908년이 지난 뒤가 바로 백악산 아사달시대까지다. 그러나 단군의 권한이 축소돼었을 뿐, 단군조선의 정통성은 인정되어 단군의 국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다. 장당경 시대 : 44세 단군 구물 ∼ 47세 단군 고열가 (B.C.425∼B.C.238 : 188년간)

44대 구물단군(丘勿, 20, B.C.425, 욕살) : 우화충의 난을 진압한 후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하늘에 제를 올리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고침.

이후 삼조선은 전쟁의 권한 등을 각자 수행하게 됨으로써 단군의 권한이 크게 약화된다.

45대 여루단군(余婁, 55, B.C.396, 태자) : 연나라가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으로 침범하자 번조선의 대장군 우문언이 이를 막는 사이에, 진조선, 막조선이 군대를 보내어 연나라와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 요서의 여러 성을 되찾음

46대 보을 단군(普乙, 46, B.C.341, 태자) :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시해 당한 후,

B.C.323 년 읍차 기후(箕詡)가 자칭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윤허를 구하니 이를 허락하고 연나라를 대비토록 함.
B.C.296 년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침범하니 대장군 고열가는 의병을 일으켜 이들을 몰아냄.

47대 고열가 단군(高列加, 58, B.C.295, 대장군) : 단군 왕검의 사당을 백악산에 세우고 정통성을 천명함. 그러나 계속 분열되는 상태를 수습할 수 없게 되자,

B.C.238 년 고열가 단제께서 왕위를 버리고 입산하니, 단군조선은 이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됨.

* (아사달 1048년 + 백악산 860년 + 장당경 188년 = 2096년) 단군의 고조선은 2096년간 지속되었다는 <한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의 기록은 이 장당경 시대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 계해 58년(B.C.238) 이후 정통성을 인정 받는 단군의 등극없이, 6년간 오가(五加)들이 함께 다스린다.(그러나 이미 분열된 열국시대로 접어든 상태임)

* B.C.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후 기비(箕丕)를 번조선 왕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북부여를 일으킴.

후에 해모수와 그 후계자들도 모두들 스스로 단군이라고 칭하였으나 기자의 후손과 손을 잡고 나라를 일으켰으므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아, 단군조선은 47 대로 마감하였다.

해모수의 북부여 =>고두막의 골본부여 =>해모수의 손자 고추모의 고구려 =>대진국(밝해)=>고려(대진국 황족 고려귀화)=>조선=>대한민국(남.북한)
111 09/12/28 [03:20] 수정 삭제  
  -- 일본이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려면

북한과 한번 군사력 전쟁을 벌어져 겟지요

저번에 과거에 북한영토인 간도와 만주를 중국에 넘겨버린 땅문제로
조금 시끌러울텐데

또한 과거에 연해주를 강제편입시킨 러시아도 좀 시끄러울거야 ㅋㅋ
대한민국 09/12/29 [20:00] 수정 삭제  
  북한 좋으면 북한가서 살지..가서 살 용기도 없는 자들이여 헛소리는 하지 말자.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다. 물론 북한과 통합하지 못한 불완전한 대한민국이지만. 북한도 훗날에 알겠지만 하늘이 한민족을 외세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수단이 될 뿐이다. 통일한국의 알맹이는 남한의 홍익인간 이념에 있다는 것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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