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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교때부터 항일운동 5.16정권엔 사형수

뼛속까지 ‘항일·통일’,'박정희 좌익군인'의 쿠데타에 긴장한 케네디 정부

오주르디 칼럼 | 기사입력 2013/03/21 [12:00]

초교때부터 항일운동 5.16정권엔 사형수

뼛속까지 ‘항일·통일’,'박정희 좌익군인'의 쿠데타에 긴장한 케네디 정부

오주르디 칼럼 | 입력 : 2013/03/21 [12:00]

[칼럼 플러스코리아]오주르디 시사칼럼= 국민주권주의와 입헌민주주의를 쓰레기통 오물처럼 취급하던 정권이 있었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소급입법을 만들어 혁신인사와 진보인사를 무참하게 척결했다. 한 해 동안 무려 23건에 이르는 사건이 조작 돼 수많은 지식인과 언론인, 통일운동가들이 죽거나 옥고를 치렀다.

1961년 12월 21일 오후 4시 서대문형무소. 5.16군부는 5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다. 4.19혁명 당시 학생과 시민에게 발포를 명령한 이승만 정권의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이승만의 총애를 믿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 그리고 정치깡패 임화수 등은 그렇다고 치자. 나머지 2명은 억울한 죽음이었다.

일제 때는 항일운동을 하다가 해방이 돼서는 통일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최백근 선생과, 민의가 왜곡되는 현실을 바로잡고자 진보정론지를 창간했던 젊은 언론인 조용수 선생이 바로 그들이다. 최백근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중앙상무위원과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 진보인사들을 끌어다 죽이는 게 5.16군부도 부담이 됐는지 사형집행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 형집행 사실을 보도한 신문 (동아일보 1961.12.22).자료사진     © 편집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언론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형이 집행된 지 30분 후 박창암 혁검부장은 태연스럽게 기자회견을 열어 “오늘 중으로는 사형집행이 안 된다”며 기자들에게는 “오늘 밤 7시 을지로에서 대포나 한잔 하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장면이 당시 <경향신문>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박 부장(박창암)은 ‘오늘 중 사형집행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박 부장을 만나러 대폿집으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오 8시 가까이 돼서 나타난 박 부장은 능청맞게도 막걸리 술상을 앞에 놓고 ‘이미 사형이 집행됐다. 서울교도소에서...’하는 것이 아닌가....” (‘혁재(革裁) 200일 낙수(落穗)’/경향신문/1962.2.15)

항일운동가 최백근 선생, 정말 죽을 죄를 진 걸까

최백근 선생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그는 누굴까. 무엇 때문에 5.16군부의 눈에 ‘죽어 마땅한 자’로 찍혔을까. 정말 죽을 죄를 진 걸까.

선생은 1914년 전남 광양군 골약면 태인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정의감이 남달랐던 그는 하동보통학교(현 초등학교) 재학 당시부터 일제에 맞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하동 보통학교 6학년(16세) 때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된 동맹휴학 사건으로 구속된다. 시위를 주도하고 유인물을 돌렸다는 이유에서다.

▲ 하동보통학교 6년 최백근 구속 소식을 보도한 당시 언론(1930)     © 편집부

일제는 잔혹했다. 매질로 고막이 터지고 피멍이 들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나무에 구멍을 뚫은 끌로 두개골을 뚫는 고문을 했다. 그로 인해 최 선생은 평생 귀 뒤에 난 구멍을 솜으로 틀어막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다녀야 했다. 광주고보와 와세다 대학 전문부(야간부)를 다녔다.

해방된 조국에서 통일 외친 대가...죽음이라니

해방 후에는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에 가담한다.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등과 관련해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 크게 대립하자 이대로는 끝내 남북 분단이 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인사들이 결성한 것이 ‘좌우합작위원회’다.

이승만 정부 수립과 6.25동란 등을 전후해 수차례 38선을 넘는다. 남북 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메시지와 김구·김규식의 연합을 촉구하는 남측의 연명서한을 가지고 남북을 오갔다. 양쪽을 잇는 메신저였던 셈이다. 이승만 정권은 그를 밀파 간첩으로 몰아세워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남북경제교류 등을 주장하던 최 선생은 1961년 5월 5만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주도했다. 이게 그의 마지막 활동이 된다. 5.16군부는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하고 그해 9월 14일 사형을 선고한다. 일제에 의해 고문 당하며 고초를 겪은 그에게 해방된 조국이 돌려준 건 주검이었다.

▲ 5.16 정권 사법부로부터 재판 받는 고 최백근(왼쪽 6번째/1961.8)선생. 자료사진     © 편집부

5.16군부는 최 선생의 항일운동을 ‘반역질’로 매도하기도 했다. 광주학생운동 동맹휴업을 주도한 게 ‘반역적 기질’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당시 군 검찰과 경찰에 일본군과 일제 고등계 출신들이 많아 친일적 시각이 적지 않았다. 하기야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 일본육사 출신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남로당의 박정희’, 그리고 항일운동가 최백근과 조용수

왜 그를 죽여야만 했을까. 그 해답은 같은 날 같은 죄목으로 함께 처형당한 민족일보 고 조용수 사장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인의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희생제물’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미국 케네디 정부는 남로당 군사총책 경력 보유자인 박정희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박정희는 정권을 잡기위해 뭔가 돌파구가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여순 사건 당시 남로당 조직원 300명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고 목숨을 보전했던 박정희가 그 때의 솜씨를 발휘한 것 아닌가 싶다. 용공분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제거함으로써 남로당 전력을 호도하고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 조용수 선생은 용공·친북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일본 체류 시절 민단에서 활동했으며 북한정권을 ‘북괴’로, 김일성을 ‘흐루시초프의 꼭두각시’라고 불렀다. 5.16에 대해서도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보적 언론인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거듭 내치 외교에 획기적인 일신이 있고 민주적인 조명이 있기를 강조함으로써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이 있기를 바라는 바다.” (민족일보 사설/1961.5.17)

최백근 선생을 용공·친북으로 단정 짓는 건 단지 5.16군부의 극우적 시각일 뿐이다. 47년 전생애 동안 선생이 매진했던 일은 ‘항일’과 ‘통일’이었다. 일제에 맞서 투쟁한 민족주의자이자 남북 분단을 막으려 했던 통일운동가였다. 고 조용수 선생은 2008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회복이 됐지만, 최 선생의 죽음은 아직 신원되지 않은 상태다.

▲ 쿠데타 성공 후 박정희의 미국 방문(1961.11).자료사진     © 편집부

'좌익' 군인의 쿠데타에 긴장한 케네디 정부

5.16이 터지자 미국 정부는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 때문에 크게 긴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남한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미국정부는 주중 대사에게 박정희를 잘 알고 있는 백선엽을 만나도록 지시한다. 드럼라이트 주중 미국대사는 백선엽의 말을 인용한 보고서를 만들어 본국에 보낸다. 골자는 이랬다.

-박정희는 여순 사건 때 공산주의 간첩단에 가담했다.

-박정희가 어떻게 육군에 복직했는지 자세히 모른다.

-박정희는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의 온상인 대구출신이다.

-박정희가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과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으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미국이 염두에 둬야 한다.

(미국무부 비밀전문 1961.5.24/출처: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

1961년 11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케네디 대통령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언론들이 ‘미국정부가 박정희 혁명정부를 지지한다’라고 대서특필했던 것과는 달리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민정 이양 약속을 지켜야한다고 강하게 압박했던 모양이다. 이 부분은 방미 취재단으로 박정희를 수행했던 고 리영희 선생의 ‘특종기사’에 잘 나타난다.

▲ '미 정부, 혁명정부 지지' 등 박정희 미국 방문을 대서특필한 당시 언론(동아일보/1961.11.26).     © 편집부

뼛속까지 ‘항일·통일’, 그러나 5.16의 눈에는 죄 지은 ‘사형수’

고 리영희 선생은 박정희 측의 ‘공식발표’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의 도움으로 미 국무부의 정상회담 실무자와의 인터뷰에 성공한다. 거기서 케네디가 한 발언이 무엇인지 듣게 된다.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조속한 시일 내 민정 이양 ▲군의 정치관여 금지와 원대복귀를 요구하고, ▲군사원조 잠정적 동결 ▲공업화계획과 관련한 23억 달러 백지화 등을 통보했다. ‘미 정부의 박정희 지지’라는 보도는 거짓이었던 것이다.

이후 작성된 미 의회의 ‘프레이져 보고서’에도 미국이 ‘남로당 박정희’에 대해 의혹을 품었다는 사실이 재확인된다. 이 보고서에는 박정희가 친일파 장교이었으며 해방 후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당시 미국정부는 박정희가 미국에 협조하고 의지할 것인지에 대한 ‘희망적인 보고서’가 계속 나와야 한국의 경제개발과 근대화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고 적시하고 있다.

고 최백근 선생은 최선을 다해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염원했다. 그의 민족사랑과 통일운동이 사형에 처해질 만큼 크게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5.16군부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의 명예는 반드시 회복돼야 한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 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에밀 졸라)

 <위 칼럼은 본지 기사화에 동의하여 게재함을 밝힙니다. 출처/사람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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