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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쏜 자 총에 맞은 자 안중근과 박정희

역사란 이처럼 가증스럽고, 삶이란 이토록 부조리한 것이다

이현복 교수 | 기사입력 2010/01/25 [06:18]

총을 쏜 자 총에 맞은 자 안중근과 박정희

역사란 이처럼 가증스럽고, 삶이란 이토록 부조리한 것이다

이현복 교수 | 입력 : 2010/01/25 [06:18]
 
 

안중근과 박정희


우리 시대에 10월 26일은 1979년에 발발한 10.26사태를 우선 연상시킵니다. 18년간 권좌를 지킨 박정희가 최측근 김재규의 총에 맞아 명을 달리 날입니다.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 사건이었습니다. 올해 30년이 되었고, 박정희의 유가족과 지지자들이 30주년 추모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보다 70년 전, 1909년 10월 26일에도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총성이 있었습니다. 31세의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에서 일제의 대명사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세발의 총을 겨눈 날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나아가 서방 언론에 대서특필된 이 사건이 올해 100년이 되었고, 국내외에서 적지 않은 100주년 기념사업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의 총성과 1909년 10월 26일의 총성의 울림은 그 결이 많이 달라 보입니다.

김재규의 총에 운명을 달리한 박정희는 누가모라해도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입니다. 물론 이때 근대화는 경제의 근대화일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꽃은 단단한 경제적 토대위에서만 만개할 수 있다는 것이 박정희의 신념이었기에 정치적 근대화는 박정희 시대에는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18년 동안 통치한다면 누가해도 그 정도의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파이프를 물고 까만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의 강력한 리더십은 부인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이보다 5년 전,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 또 다른 총성이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문세광의 총에 맞은 아내 육영수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 마저 충복중의 충복인 중정부장 김재규의 총에 버림을 받습니다. 김재규는 자신의 행위를 의거라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총을 쏜 김재규도, 총에 맞아 ‘괜찮아’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박정희도 모두 권력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  안중근 의사 - Poster Edges © 뉴스커뮤니티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은 1909년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만주 하얼빈에 도착합니다. 그의 곁에는 우덕순이 동행합니다. “동풍이 점점 차가우니 장사의 뜻이 뜨겁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안중근은 의거의 결의를 다지는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은 이에 화답하는 ‘거의가’를 부릅니다.

10월 26일 오전 9시 동토의 땅 하얼빈 역에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도착하고 의장대 사열이 끝나자 노정객의 가슴에 3발의 총알이 뜨겁게 박힙니다. 총알의 주인공은 ‘코리아 후라’를 외치고 당당하게 자신을 내어줍니다. 총에 맞은 일본제국의 영웅은 쇠 냄새나는 뜨거운 가슴을 끌어안고 죽음을 당하지만, 총을 쏜 단지동맹의 주인공 안중근은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같도다” 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찾아갑니다.

안중근은 총을 쏘았고, 박정희는 총에 맞았습니다. 안중근의 총 끝은 적국의 영웅을 향해 있었고, 박정희는 충복의 총부리에 희생되었습니다. 안중근은 총을 품은 순간 죽음을 각오했지만, 박정희는 죽는 순간까지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안중근은 새벽녘 이국 땅 하얼빈 역에 있었지만, 박정희는 어두운 밤 안전가옥에 있었습니다. 안중근의 몸엔 장부의 혈기가 스며 있었지만, 박정희의 가슴엔 여인네의 노래와 알코올 기운이 녹아 있었습니다.

시대의 영웅 안중근과 박정희는 총을 쏜 자와 총에 맞은 자라는 점 외에도 항일과 친일이라는 관점에서도 주목을 끕니다. 육영사업에 헌신한 20대의 안중근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연해주지역으로 망명, 의병부대를 창설하여 독립투쟁을 시작합니다. 30살에 접어든 안중근은 300여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입작업을 벌이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그 후 안중근은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를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 독립과 동양평화유지에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합니다. 지금까지 안중근의 상징인 그 유명한 단지동맹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장부가’를 부르면서 이토를 처단하고 죽음 속으로 걸어갑니다.

얼마 전 박정희의 혈서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하면서 서류와 함께 혈서를 써 냈다는 내용이 담긴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기사의 사본이 공개되었습니다. 대구사범을 나와 문경에서 교편을 잡던 중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했고, 1939년 재차 응모하여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와 함께 제출했다는 내용입니다. 또 박정희는 동봉한 편지에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Poster Edges © 뉴스커뮤니티
박정희가 친일파인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해마다 꽃들은 비슷하지만 해마다 사람들은 다르도다”라는 안중근의 유묵에도 있지만 한 인간의 삶에는 참으로 많은 굴곡과 변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인간의 삶 전체에서 한부분만 달랑 떼어 무엇이라 단정 하는 것은 위험한 게 사실입니다. 또한 가치가 아니라 사실(팩트)에 관한 것이라 해도 주관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말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객관적인 사실의 문제에도 여전히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정희가 일제에 충성하는 혈서를 썼다고 해서 바로 친일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도 얼핏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관성입니다. 일관성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나름대로의 태도나 입장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비록 많은 부침을 받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삶이 나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나만의 일관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안중근의 삶이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곤 있지만 그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박정희의 일생에서 일관성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것 역시도 가치가 개입된 사실이라고 반박한다면 그리 할말은 없지만, 이유야 어쨌든 박정희가 혈서를 쓴 것은 조작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또 혈서에 따라 만주국 장교로 활동한 것도 사실이라면, 일제시대의 박정희의 행위를 적어도 항일이라고 말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이에 비해 안중근의 행위는 분명 항일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사는 정말 아이러니한가 봅니다. 혈서를 쓴 박정희는  단지를 끊은 안중근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1979년 9월 2일에 “민족중흥의 전당”이라는 친필이 담긴 비석을 헌정합니다. 안중근과 민족중흥, 조합치고는 왠지 좀 어색합니다. 아마 민족중흥이라는 것이 박정희의 상징어이기 때문에 더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민족중흥이라는 개념 갖고 자신과 안중근을 연결 지으려 했을지 모릅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을 외치며 5.16을 감행했던 박정희, 여순 감옥에서 “국가안위 노심초사”를 휘갈기며 죽음을 기다렸던 안중근, 두 사람 모두 조국과 민족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것을 어찌 부인하겠습니까. 좋은 글이란 글의 내용이나 화려한 문체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글의 수미일관성에 있듯이,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이란 생각들이나 행동들 간의 일관성에 있는 것이라면, 안중근에 비해 다소 미흡한 박정희의 일관성이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또 총에 맞은 박정희의 가족에 비해 총을 쏜 안중근의 가족이 이 땅에서 받는 대우가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더욱 아쉬운 것은 차디찬 이국땅에서 적장을 쏘고 죽은 안중근의 무덤은 지금까지 초라한 가묘로 방치되어 있는 반면, 가무를 즐기다가 충복에게 죽은 박정희는 국립묘역 높고 넓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현실입니다.

역사란 이처럼 가증스럽고, 삶이란 이토록 부조리한가 봅니다.

▲  이현복교수 © 뉴스커뮤니티

ㅇ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ㅇ프랑스 파리 10대학교 "16-18세기 철학연구소" 연구원


독일 괴팅겐대학교 철학과 객원교수

ㅇ現한양대 철학과 교수



원본 기사 보기:뉴스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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