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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장교복 즐겨입은 정신적으로 완전한 일본인 박정희

독도가 ’한국 땅임과 동시에 일본 땅이기도 하다’ 한일협정 맺어...

김현철 칼럼 | 기사입력 2016/08/15 [11:08]

일본군 장교복 즐겨입은 정신적으로 완전한 일본인 박정희

독도가 ’한국 땅임과 동시에 일본 땅이기도 하다’ 한일협정 맺어...

김현철 칼럼 | 입력 : 2016/08/15 [11:08]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는 출발 전 일본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취임식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진짜 친일파’임을 대변해 주는 말이다.

박정희 정권과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한일협정)을 성사시킨다. 이를 통해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겨우 3억 달러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더구나 이 3억 달러에는 ‘독도’(일본은 ’다케시마‘라 부른다)가 ’한국 땅임과 동시에 일본 땅이기도 하다’는 일본측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니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 개발이 급선무였던 박 정권으로서는 이 ‘만고의 역적’이나 할 수 있는 한일협정을 경솔하게 맺음으로써 오늘 날 일본은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 것이다. 

일본이 이를 미끼로 국제재판소에 제소할 경우 과연 독도를 우리가 보존할 수 있을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액수도 ‘장면 정권’의 8억 달러나 ‘이승만 정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 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 후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년 간을 시위해도 일본은 한 푼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이게 모두 친일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품인 것이다. 

일본패망으로 패잔병의 낭패감을 맛보며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였던 ‘오카모토 미노루’(박정희) 중위는 곧바로 자신의 장기인 변신을 시도한다. 

1945년 9월 일본군복을 벗어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제8단과 함께 미윤(密雲)으로 이동한 후 이곳에서 8단을 탈영해 신현준-이주일 등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주(駐)핑진(平津) 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는다.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의 ‘오카모토’ 중위는 이와 같이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지 않은가. 

1946년 4월 평진대가 해산한 후 5월 초 톈진(天津)에서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한다. 당시 남한은 이승만을 앞세운 미군정이 통치하던 시절로 친일파들이 중용되던 때였다. 

일본육사 출신으로 실전경험이 있는 박정희 전 일본군 중위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를 2기로 졸업하고 당시의 관례(일본군 계급 인정)대로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임관한다. 

이밖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평생 뼈 속까지 일본인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을 보면 기절초풍할 지경이다.

 
1991년 12월 14일자 중앙일보


“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이오.(71.10.17 계엄이 선포되었다)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일본군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을 타고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청와대에서도 일본군 장교복을 즐겨 입던 ‘정신적으로 완전한 일본인‘이 18년간이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니 김구선생 등 순국선열들이 통곡할 노릇이다. 

그는 18년 통치 기간 중 자신의 생명을 살려 준 정일권, 백선엽 등 만주신경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해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은 것이다.

대한민국 육사 중대장이 된 박정희 대위는 당시 70%의 남한 국민이 좌익에 동조함을 알고 남한의 공산당인 ’남로당‘에 입당한다. 

당시의 ’미군정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그 후 일계급 승진한 박정희 소령은 육사 내부에 남로당 세포를 침투시켜 무력혁명 획책 활동을 벌였고 정보 장교로 육군본부에 근무할 때 친형 박상희(전 구미 동아일보 지국장, 고위 남로당 간부로서 대구 폭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총살당함) 등의 추천으로 ’남로당 국군 총책‘이라는 요직을 맡은 후 1948년 10월에 여순(여수 순천) 반란(국군 14연대 일부 병력의 반란) 사건이 터지자 군 특무대(대장 김창룡)에 의해 ’여순반란사건 주모자‘로 체포돼 무기징역형 언도를 받는다.

그러나 일본군 선배 중 정일권, 백선엽, 원용덕, 이응준, 김용문 등 고급장교들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여순반란사건 담당 재판장이었던 최석장군 증언)으로
애당초 사형을 받아 마땅함에도 무기형을 받았던 박정희는 또 다시 15년으로 감형, 얼마 후 형집행정지를 거쳐 육군 장교로 복귀하게 된다. 

‘내 목숨 하나 살기 위해’ 당시 국군 내 남로당 조직을 샅샅이 뒤지던 특무대에 국군 내 남로당 조직 체계와 2천8백여 명의 남로당원 명단을 넘겨 줘 당 조직 및 동지들을 배신-궤멸시킨 공로도 크게 작용한 탓이다. 

당시 군 수사 기관에 체포된 국군 남로당원 등 좌익분자는 무려 4천 7백여 명, 그 중 수백 명이 총살형을 당했으나 막상 ‘국군 남로당 총책’이요, 여순반란사건 주모자였던 박정희 소령은 일본군 선배들의 각별한 배려와 동지들을 배신한 댓가로 다시 군에 복귀하게 되었으니 이 이상 운 좋은 사나이가 있겠는가.

 

김현철 칼럼 니스트

(김영랑,항일저항시인3남)
MBC 서울본사 기자
미주한겨레저널 창간 발행인 

 

 


원본 기사 보기:서울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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