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현충사에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금송 심었다"문화제청 "사무라이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도 역사적 가치있다" 이식 거부충남 아산 현충사. 가장 안쪽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본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본전 왼쪽에 서 있는 키 30미터가량의 커다란 나무. 전나무와 비슷한 이 나무는 고야마키 금송으로, 사무라이 정신을 담고 있다는 일본 특산종 이다.
더구나 이 나무는 친일군인 박정희가 기념식수 한 나무로 알려저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상징하는 고야마키 금송을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에 심은 의도가 무엇인지 그 저의를 의심케 하고 있다. 문화재청도 박정희가 심은 나무라서 그런지 "일본의 왕실을 상징하는 나무에도 역사적 가치와 시대적 의미가 있다"며 이식을 반대하고 있다. 고야마키 금송 논란은 박정희정권 당시 완성된 현충사 성역화 사업과정에서 비롯됐다. 박정희는 현장에서 “이순신 장군 혹은 우리 민족과 밀접한 수종을 심으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러나 정작 박정희가 심은 것은 일본 특산종이자 일왕의 상징인 고야마키 금송이었다. 고야마키 금송은 조선총독부 관료가 총독관저(현 청와대)에 식재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1990년대 이후 현충사의 일본식 조경이 문제가 되자 "왜색조경을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과 "박정희의 기념식수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왔다. 이후 혜문스님이 문화재청에 "현충사의 일본식 조경을 바로 잡아달라."는 진정을 내면서 논란이 재점화됐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고야마키 금송의 이전 혹은 제거를 논의했으나 문화재위원이 전원 찬성하면서 존치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이에 불복,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혜문스님에 따르면, 이번 재판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났다.1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현충사의 일본식 조경을 바로 잡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대규모의 일본식 조경을 정정하기 위한 계획안이 수립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수립된 7개항이 담긴 계획안 중 현충사 본전의 금송은 밖으로 이전하라는 사항이 있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이 고야마키 금송을 사적지에 부적합한 수목으로 분류한 사실도 드러났다. 문화재청은 1997년 작성한 현충사 조경 정비계획서에 사적지에 부적합한 수종을 기재했다. 고야마키 금송 역시 사적지에 부적합한 수종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혜문스님은 "문화재청이 대통령의 이전지시를 불복하고 시행하지 않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며 "나아가 문화재위원회가 전직 대통령의 지시사항으로 수립된 계획안을 파기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현충사 고야마키 금송 이전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현 문화재청장은 매국노 이완용의 질손자로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면서 일본인 이마니시 류의 주구(개)가 되어 우리 역사를 도살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친손자이다.
그래서 그런지 문화재청은 일본산 금송이 제자리에 있기를 고수하며 “나무에도 역사적 가치와 시대적 의미가 있다는 괴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까짓 금송에 ‘역사적 가치’가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이며, 또 그 역사적 가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시대적 의미’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문화재청장은 자신의 조부에게 부와 명예를 남겨준 종주국 일본의 은혜에 이런 것으로라도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인식과 민족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는 나라였다면 저런 악질 친일파 후손에게 고위 공직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나라의 역사를 다시금 이병도의 손자에게 맡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반민특위는 부활되어야 한다. 원본 기사 보기:서울의소리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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