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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박정희 안중근 이등박문 공통점

[네티즌칼럼]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다간 네 사람의 공통점 '10.26'

wldpc | 기사입력 2008/10/26 [05:33]

김재규 박정희 안중근 이등박문 공통점

[네티즌칼럼]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다간 네 사람의 공통점 '10.26'

wldpc | 입력 : 2008/10/26 [05:33]
역사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에 올린 글도 있었는데 2차대전의 분기점 중 하나인 미드웨이 해전과 노르망디 상륙 역시 거의 같은 날이었죠. 찾아보면 수 없이 많은 우연들이 나올겁니다.

1년이 365일이니 결국 2 사건이 겹칠 확률은 1/365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쌓여가는 세월의 중복 가능성 때문에 상당한 겹침이 생기는 모양입니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김재규-박정희 안중근-이등박문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이 10.26 이기 때문입니다.
 
▶ 1905.11.29 京城驛 - 일본정부 칙사로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 편집부 ◀

이등박문과 박정희 그리고 10월 26일

이등박문, 일본에선 영웅! 대한민국에선 처단해야할 민족의 원흉!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역시 그렇게 상반된 상태입니다.

개인적으로 공도 인정하지만, 식민지배 시절 일본군 사관학교를 선택했다는 그 자체는 결코 용서할 수 없군요. 개인의 능력에 대해선 인정하지만, 결코 대통령이 되어선 안될 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합니다.

백범일지에 보면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3.1운동 직후 1919년  망명할 당시 백범은 이미 당시 조선의 평균수명을 넘을 정도인 40대였죠.

40대 중년의 나이로, 일본에 먹힌지 겨우 10년 된 상태에서 나라를 되찾겠다며,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겠다고 상해로 떠난 백범과 비교한다면, 1930-40년대 열혈청년으로서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단정짓고.
 
일제 통치라는 주어진 현실에 굴복해 조선인들이 조선 지배에 적극 동참해서 더 나은 현실을 만들어보겠다는 지극한 현실주의-실용주의를 가진 청년 박정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그 당시 청년이었다면 어떠했을지 솔직히 나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나는 먼 훗날 태어나 박정희에게 이렇게 비판을 할 수 있지만 꺼림찍은 합니다.

아마도 백범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겁자지만, 역시 박정희와 같은 당돌한 담량도 없었을 가능성이 크기에 저는 평범하게 살면서 지배세력인 일본에게 가끔씩 속으로 욕이나 하면서 삶을 마쳤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꺼림칙하다고 해도, 청년 박정희의 선택은 그리 당당하지 못하다고 확신합니다. 박정희와 거의 동년배였던 윤동주는 박정희와 전혀 다른 선택을 했고 해방되는 해 옥사했습니다.

윤동주는 대한민국 역사에 현실에선 그 어떤 기여도 못했습니다. 기회 자체가 없었죠. 하늘은 박정희 같은 이에겐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늘이 박정희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죠. 임시정부의 문지기 김구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이승만-김일성은 기어코 붙잡았고.

현실 정치에서 기회를 낚아챈 박정희-이승만-김일성, 그 행운은 부럽지만 그들 솔직히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운 보다는, 현실에서 조국의 독립 조차도 보지 못하고 바로 그 해에 옥사한 불행이 더 가슴 뭉클하군요. 백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암살되어 미래 통일한국의 진정한 국부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민족의 더 큰 행운일지도. 서독의 빌리브란트와 같은 지도자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나치즘에 저항해 망명하고, 2차대전 이후 스스로는 전혀 무릎 꿇은 이유도 없지만, 모든 이를 대신해 용기있게 폴란드의 게토를 찾아 무릎꿇고 라인강의 기적에도 일조하고...동서독 통일의 시발점인 동방정책도 펼치고...그런 지도자에게 현실에서 기회도 주어지고...



안중근 안명근 그리고 백범의 얽히고 섥힌 사연은

백범일지에 보면 안중근 과의 만남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옵니다. 백범이 동학혁명 당시 황해도의 접주로서 쫒길 때입니다. 안중근의 부친이 동학군 토벌대를 이끌었는데, 백범의 기개를 높이 사서 도피시켜줍니다.

그 과정에서 안중근과의 만남이 소개되는데, 국왕에게 반역한 무리들을 어리지만 자신도 나서서 응징하겠다는 소년으로 기억합니다. 안중근 부친은 애기 접주 백범의 기개를 높이 사고, 백범은 아직 철부지지만 소년 안중근의 그런 점을 또 밉지 않게 보고...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있은직후 일경은 그를 체포 합니다. 백범은 일경의 신문에 "나는 한때 그의 부친과는 사귄적이 있으나 이번 하얼빈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하며 자신의 관련 없음을 항변했었습니다.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과는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검거되어 일경이 조사가 들어갔을때 관계가 드러나 백범은 보안법 위반으로 2년 강도죄로 15년 모두 17년형의 징역형을 받기도 했었다.
 
안명근이 거사직전 백범이 재직하고 있던 안악 양산학교로 찾아와 독립투쟁자금을 모으기 위해 해주 부자들을 위협하겠다고 상의했던 사실이 드러났었기 때문입니다. 백범과 안중근 의사 가족과의 관계 입니다.
  
박정희는 백범과 너무 대비되는 삶을 헤쳐나간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박정희는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명을 달리했고 이등박문 또한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명을 달리했습니다.

일제시대엔 일제에 충성하고, 해방 정국에서 공산주의가 유행할 때는 그 유행에, 여순사태로 체포되자 전향해서 나중엔 철저한 반공의 기수가 되었죠. 백범 정도의 치열함은 아니더라도, 브란트 정도의 일관성을 가진이에게 민주화와 민족통일과 경제성장의 과업에 동시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대한민국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안중근 장군을 기리는 뜻 깊은 행사가 잠실에서 25일 열려

25일 오후 2시 600여명 참가한 가운데 서울 한강시민공원 잠원 트랙경기장에서 ‘제1회 안중근 평화마라톤’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행사를 주최한 안중근청년아카데미와 인터넷신문 네이션코리아는 이날 행사는 "테러리스트로 오인받을 수 있는 ‘의사’가 아닌 당시의 신분인 ‘장군’으로 그 위상을 바로 잡기 위한 행사"였다고 그 의미를 말했습니다.
 
대회장을 맡은 임두성 의원은 “99년전 동양평화를 위협한 일본을 향한 안중근의 총성은 민족의 혼이며 청년정신의 표상이었다.”며 “30살의 청년 안중근이 일본침략제국의 심장을 향해 쏘아 올린 총성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잠자는 중국 대륙을 일깨웠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처 신호탄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명예대회장인 박준영 전라남도 도지사는 “99년전 안중근 장군의 의거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닌 5천년 배달민족의 자랑스런 역사를 단절시키려는 가중스러운 일본침략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었다.”며 “(안중근 장군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하고 나아가 세계 만인의 행복할 권리 옹호를 위한 위대한 평화정신의 실천이었다.”고 안중근을 평가 했습니다.
 
어쨓든 10월 26일 박정희와 이등박문 그리고 김재규와 안중근 이들 네 사람의 이름이 머리속에 교차되며 묘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신문고(원본 기사 보기)
평화통일신문 09/03/09 [14:27] 수정 삭제  
  독립군을 잡던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
조국을 침략했던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
지금 김재규를 재판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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