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민족의 원형 단군조선과 민족의 미래

역사인식의 의미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

윤내현 교수 | 기사입력 2008/03/25 [12:01]

한민족의 원형 단군조선과 민족의 미래

역사인식의 의미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

윤내현 교수 | 입력 : 2008/03/25 [12:01]
▲  단군조선의 상징 - 청동검(대륙/비파형.한반도/세형)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재를 바로 인식하고 미래를 올바로 설계하며 전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해야 하고 둘째는 지리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이 어떠한지를 확인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능력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비슷하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 문화에 외래적인 요소가 강하다. 예컨대 열국시대에 이르면 불교가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근세조선에 이르면 유학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근대화 이후에는 서구문화가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근대나 현대의 사회와 문화 속에는 이들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근대사나 현대사의 연구만으로는 어느 것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 요소인지를 밝혀내기 어렵다 그리고 외래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와 혼합되었는지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외래문화 요소가 혼합된 이후의 문화수준으로는 진정한 우리 민족의 능력을 평가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문제들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전의 우리 민족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하고 그것이 후대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고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연구를 고대사부터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전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었던 시대는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세운 첫번째 국가로서 이 시기에 우리 민족도 형성되었는데 아직 불교나 유교 또는 기독교 같은 외래 문화가 들어오지 않은 시기였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출현한 이후 세계의 모든 지역의 문화는 주변의 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하였으므로 고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민족 문화도 완전히 독자적이고 고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이 시대까지는 아직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지 못하였고 고조선에 크게 영향을 줄만한 문화가 주변 지역에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조선은 독자적인 문화 요소를 비교적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문화를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시대의 익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민족 본래의 모습과 능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은 서기 전 2333년에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일찍 건국되었는데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영토가 서쪽으로는 뻬이징(北京) 근처에 있는 지금의 루안허강( 河)에 이르렀고 북쪽은 어르구나허강(額雨古納河), 동북쪽은 헤이롱강(黑龍狂). 남쪽은 한반도의 남부 해안선에 이르러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조선의 문화수준은 매우 높았는데 전기와 중기는 청동기시대였고 후기는 철기시대였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을 건국하기 전인 서기 전 2600∼2500년 경부터 청동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후앙허강(黃河) 유역에서는 서기 전 2200년 경부터,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서기 전 1700년 경부터 청동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은 후앙허강 유역보다는 300∼400년, 시베리아 지역보다는 800∼900년 정도 앞서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이 문화적으로 매우 선진한 민족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고조선은 과학기술 수준도 매우 높았다. 그 예로 청동기 제조기술을 들 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청동의 용도에 따라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달리하여 그 강도를 조절하였다. 청동무기를 만들 경우에는 주석의 비율을 낮게 하여 강도는 떨어지지만 질긴 청동을 만들었고 청동거울을 만들 경우에는 주석의 비율을 높혀 강도가 높은 청동을 만들어 광택이 잘 나도록 하였다. 청동의 가공기술도 매우 발달하여 고조선의 유적에서는 0.2 밀리미터의 가는 청동실로 만든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청동으로 이렇게 가는 실을 뽑는 것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쉽지 않은 것이다.

고조선에는 방직기술도 매우 발달해 있었다. 고조선의 한 유적에서는 모직물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그것을 분석해 본 결과 양털실과 개털실을 섞어 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질이 오늘날 생산되는 모직물 가운데 다소 거칠은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시대에 이 정도로 질이 좋은 모직물을 생산했다는 것은 당시 방직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고조선은 경제기반도 튼튼하였는데 농업과 목축업 및 수공업이 매우 발달해 있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는 표범 말곰 등의 진귀한 동물 가죽과 고급 모피의류 모직의류 및 활 화살 화살촉 등의 무기를 중국에 수출하여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고조선의 유적에서는 당시 중국 옌(燕)나라 화폐였던 명도전(明刀錢)이 많이 출토된다. 5,000여 점이 출토된 유적이 있으며 3,000∼4,000여 점 출토된 유적은 여러 곳이다. 이렇게 많은 수량의 중국 화폐가 고조선 지역에서 출토된다고 하는 것은 고조선이 중국과의 교역으로 매우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고조선에서는 더불어 이익되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이념이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지배층은 궁궐이나 종묘 등을 크게 짓지 않았고 왕능도 크게 만들지 않았으며 관직도 꼭 필요한 것만 설치하였다. 대신들 사이에는 폐백을 주고받지도 않는 등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낭비를 막았다. 그러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수확의 20분의 1이라는 아주 적은 세금을 받았다. 그리고 사회신분에 따른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홍익인간 이념이 정치와 사회생활에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고조선은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였기 때문에 국민들은 나라에 충성하였고 그 결과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고조선은 중국 연(燕)나라의 침략을 받은 적이 있는데 예기치 않은 침략을 받은 고조선은 일시 후퇴했지만 바로 이를 격퇴하고 옌나라의 동부를 빼앗아 침략을 응징하였다. 당시 연나라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수백 년간 중국 내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을 많이 쌓은 나라였는데 이를 격퇴하고 그 땅을 빼앗았다는 것은 고조선이 군사적으로도 강국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건국된 나라였고 문화적으로 선진한 나라였으며 경제적 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였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였다 우리 민족은 중국보다 약 130여 년 앞서 나라를 세웠는데 왜열도(倭列島)는 이 시기에 신석기문화 수준에 머물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은 원래 다른 민족보다 아주 유능한 민족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능력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에도 부분적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고토였던 지금의 랴오시(遼西)지역을 완전히 수복하였고 백제는 지금의 뻬이징(北京)과 천진(天津)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산똥성(山東省) 지양쑤성(江蘇省) 저지양성(浙江省)에 이르는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서기 246년 경부터 쒜이(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까지 340년 이상 지배하였다. 그 뒤 고구려의 유민 이정기(李正己) 일가는 산등성의 쯔칭번진(淄靑藩鎭)을 독립왕국으로 발전시켜 국명을 치(齋)라 부르며 55년간이나 탕(唐)나라에 대항하였고 그 뒤를 이어 장보고(張保皐) 대사가 중국 동부 해안지역과 왜열도의 남부를 지배아래 넣어 해상왕국 무역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왜열도에 진출하여 서기전 3세기 경에는 청동기와 철기의 혼합문화인 야요이문화(彌生文化)를 출현시켰고 서기 4세기 경부터는 고분문화(古墳文化)를 출현시켰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가지고 간 수준 높은 문화와 정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왜열도에 소국들을 출현시켰고 이것들이 통합되어 서기 670년에 이르러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건국되도록 하였다.

우리 민족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였고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구려를 침략한 513만 여명의 쒜이(隋)나라 군사를 무찔러 그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을지문덕 장군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세계 해전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을 배출하였다. 요즈음에는 세계적인 예술인과 운동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 민족의 능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우리 민족의 국가는 여러 개로 분열되었고 국력의 신장이나 문화의 발전이 중국에 비하여 매우 더딘 형상이 일어났으며 근세조선에 이르면 중국의 정치권과 문화권에 편입되기도 했고 그 후에는 일제에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원래 유능했던 우리 민족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지리적인 반고립성(半孤立性)이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여서 외부와의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였고 만주의 북쪽이나 동북쪽은 자연환경이 열악하여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을 곳은 오직 중국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중국은 광활한 대륙에 연접해 있고 자연환경이 아주 다른 여러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거주민이 다양한 민족과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지에 여러 다른 문화 전통들이 존재했다. 따라서 후앙허강(黃河) 중류유역에서 건립된 고대국가가 계속 확대 성장하면서 이들과 접촉을 통해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었다.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 진한(秦漢)제국과 쒜이(隋) 탕(唐)제국 등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민족은 중국에 비하여 지리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둘째는 홍익인간 이념이 가져다 준 평등관념이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근대화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통치자의 권한이 강화되어 전제화되어 갔고 사회의 계급 또는 신분이 더욱 확대되어 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회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면 농민봉기가 일어나 왕조가 바뀌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계급간 또는 신분간의 갈등과 투쟁을 통한 자극과 영향은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창출해 냈다. 근대화 이전의 사회에서는 계급간 또는 신분간의 갈등이 역사 발전의 동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더불어 이익되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홍익인간 이념을 그 핵심 사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분간의 갈등이나 투쟁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와 같은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동학농민전쟁마저도 왕조를 뒤집어엎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주도록 왕에게 건의하자는 것이 그 목표였다.

이상과 같은 요소들은 우리 민족의 왕조가 중국의 왕조들에 비하여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하였다. 중국의 왕조들은 상왕조(商王朝)가 600여 년인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300년을 넘지 않았는데 대개 농민봉기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왕조 고조선은 2,300여 년, 신라는 거의 1,000년이었고 다른 왕조들도 대개 500년이 넘었다 이와같이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나지 않고 왕조가 오래 유지되었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사회의 변화가 적어 발전속도가 늦었다는 것은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셋째는 고유문화와 외래문화가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이념은 평등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고대사회가 발전하면서 신분의 차이는 확대되어 갔다. 따라서 현실의 신분 차이를 인정하는 논리가 지배층에게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국시대 말기에 불교가 들어왔다. 우리 민족에게 전달된 불교는 대승불교였다.

대승불교에는 윤회(輸廻)와 업보(業報) 사상이 들어있다. 인생은 윤회하는 것이며 현실 세계에서의 신분은 전생의 업보로 얻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이나 귀족들의 현실 신분을 인정하는 논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초기 불교는 왕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대승불교의 교리는 지배이념이 되었고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은 그 아래에 있게 되었다.

그후 근세조선에 이르면 사회신분을 한층 더 구체화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 유교가 정치와 학문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되었다. 따라서 이전의 지도이념이었던 불교는 유교 아래 있게 되었고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은 불교 아래 있게 되었다.

근대화 이후에는 기독교 문화가 중심이 된 서구의 문화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문화를 일찍 수용한 사람들이 개화한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군림함에 따라 기독교 문화(서구 문화)가 사회를 선도(先導)하게 되었다. 근대화는 민주사회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상하가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기독교 문화가 지도 이념처럼 되었고 그 아래 유교문화가, 유교문화 아래는 불교문화가, 불교문화 아래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가 있는 상하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열국시대 말기부터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배층의 필요에 따라 외래문화를 지도이념으로 채택하였다. 따라서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는 밑바닥에 깔리는 현상을 가져와 그것을 천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지난날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인 무속이나 국악을 천시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구조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와 외래문화가 대등한 관계에서 자극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의 창출이 부족하였다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를 핵심으로 하고 거기에 외래문화를 접목시키는 지혜가 부족했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을 보자.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쎌러드 그릇에 비유하고 있다. 맛있는 쎌러드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재료들이 싱싱하게 각각 제맛을 지니고 있어야 하듯이 미국이 이상적인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이 자신들의 문화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야만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창조가 일어나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미국인들의 생각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본은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으므로 서구 문화와 접촉하기 전에는 한국이나 중국에 비하여 낙후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그들의 고유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이로움도 있었다. 그러한 일본은 서구 문화와 접촉하면서 그들의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그것을 핵심으로 하여 서구 문화를 받아들였다. 일본의 것을 혼(塊)으로 삼고 서양의 것은 기술로 이용한다는 이른바 <화혼양재(和魂洋才)> 정신을 실천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전통문화는 서구문화와 접촉과정에서 큰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동력이었던 것이다. 

▲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와 한민족의 고대 문자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위에서 말한 우리 민족의 여건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지리적인 반고립성, 홍익인간 이념,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불균형 등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지리적인 고립성은 어떠한가? 과거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워야 문화 교류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교통시설의 발달은 비행기로 하루면 세계 어느 곳에나 갈 수 있게 되었고 통신기술의 발달은 한 순간에 세계 어느 지역과도 통화나 정보교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개방정책을 취하여 국가나 민족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따라서 지리적인 고립은 이제 의미가 없게 되었다.

홍익인간 이념은 어떠한가? 근대 이전의 역사는 신분간의 차등이 확대되고 통치자의 권력이 강화되어가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그와 반대로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홍익인간 이념은 역사 전개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는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더불어 행복을 느끼는 그러한 사회를 추구하고 있다.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표현은 다르지만 바로 홍익인간 이념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추구해 온 이념은 이제 전 인류가 추구하는 이념이 되고 있다.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불균형은 어떠한가? 근대화 이전의 사회는 사회신분이 차등화된 사회였기 때문에 문화도 그 문화를 향유한 사람들에 따라 차등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민족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사회를 추구하고 있다. 아직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문화는 상하의 수직관계를 벗어나 수평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근래에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가 부분적으로나마 대우를 받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러한 상황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상황은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장래는 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의 변화를 우리 민족만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이나 나라도 똑같이 맞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결코 우리 민족에게만 유리하게 전개될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이나 나라가 갖지 못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  윤내현 교수
첫째는 우리 민족의 능력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전 우리 민족은 매우 우수한 문화를 지니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했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은 원래 능력있는 민족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제 여건이 우리 민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므로 그 우수한 능력이 발휘될 것이다.

둘째로 남북의 분단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는 민족의 비극이었지만 평화적으로 통일만 된다면 엄청난 창조를 해내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남북한 주민은 서로 다른 이념과 사회 조직 속에 살면서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이 서로 만나 자극과 영향을 주게 되면 우리 민족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종교의 분포이다. 우리 민족의 사회에는 민족종교 ·불교 ·유교 · 천주교 · 개신교 등이 거의 비슷한 신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들이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낼 것이다.

넷째는 홍익인간 이념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그 표현은 다르지만 이것은 오늘날 인류가 추구하는 이념이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수천년 동안 그러한 이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그것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어느 민족보다도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회가 왔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는 우리를 외면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우리 사회를 다양성을 지닌 사회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를 지키고 발전시켜 그것이 외래문화와 수평관계를 유지하도록 해야 찰 뿐만 아니라 그 핵심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가 본질을 이루고 외래문화는 기능적인 것으로 이용되도록 해야 하며 그것을 교육하고 일상생활에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1999 년 11월 27일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열린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강좌내용이였습니다. 

윤내현 교수/약력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단군학회 회장,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등 역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 연구회 회장



왕우 09/10/25 [09:51] 수정 삭제  
  청동 거울을 만들때 중국의 청동거울과 우리의 청동거울이(다뉴세문경) 다른점은 중국의 거울은 주석을 많이 넣어 만들었지만 우리의 청동거울은 주석을 조금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뉴세문경을 분석해본결과 우리의 거울에서는 주석이 발건되지않았으며 이는 주석을 넣지 않고도 섬세한 문양과 선을 표션했다는데서 우리의 청동기술이 세계 적이있다는 사실이다.
다뉴세문경에서 보여주는 가는 선들은 머리카락 보다 더 가는 선이지만 이러한 선을 주석을 1프로도 넣지않고 주조했다는 것은 지금의 과학으로도 실현하기 힘든 기술인 것이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