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터키,중앙아시아 돌궐과 고구려당나라에 대한 전방위적인 포위.압박으로 자주권 보호한 고구려 외교고구려와 돌궐, 한국과 터키의 우호적 관계의 역사적 배경
[한단고기]에서는 수유족(21대 소태 단군천황이 일방적으로 소유족 출신의 서우여를 단군에 즉위시키려 하자, 고구려가 시조로 삼는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백악산 아사달에서 군사쿠테타를 일으켜 22대 단군천황에 오르자, 단군천황즉위에 실패한 수유족은 단군조선의 직접 통치에서 벗어나 초원지역에서 단군조선의 통치구조를 모방하여 거대한 유목세력을 형성하여 서방에서는 스키타이, 동방에서는 흉노라 불리우는 유목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선비.돌궐.거란.몽골제국으로 계승된다. 우리와 피를 나눈 단군의 후예들로서 이들이 분포하며 살고 있는 유라시아와 협력교류해야 하는 외교적 배경이기도 하다)으로 기록된 흉노의 후예 돌궐(투르크)은 6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유라시아 초원을 장악해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던 단군민족의 후예들로 지금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지역인 터키지역에 정착해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투르크를 한자로 음차한 ‘돌궐’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돌궐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와는 서로 사신을 보내고 춤사위가 전해질 정도로 정치,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활발히 교류하였다. 근대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지금의 터키는 자신들의 기원을 돌궐에서 찾는다. 지나지역의 남북조 시대에 유목국가인 유연이 북조를 위협하였다. 6세기 중반 유연에 속했던 유목부족의 하나였던 투르크 계통의 돌궐이 흥기, 유연을 격파하고(552)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한자 표기인 돌궐의 정식 명칭은 돌궐 비문에 따르면 '쾩-튀르크(Kok Turk)' 로 하늘(Kok) 에 속한 신성한 투르크란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투르크가 정식 종족명으로, 또한 국명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투르크 계 종족이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투르크라는 말은 세계 조상어가 한반도어인 만큼 '기운'을 의미하는 한반도어 팃기(남한).티기(북한)에서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돌궐제국의 창건자는 부민으로 그가 지나사서에 등장하는 시기는 535년이다. 545년 지나지역의 <서위>와 동맹 관계를 맺은 그는 <유연>에 대해 유연의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했다. 이는 유연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의사였다. 유연이 거절하자 부민은 서위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552년초 서위와 연합하여 유연을 멸망시켰다. 이때 부민은 일 카간(Il- Qagan, 伊利可汗) 이란 호칭을 쓰면서 초원의 지배자임을 공언하였다. 유연을 멸망시킨 터키(돌궐)는 유연의 잔존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고구려에 참패당했다. " … 왕년에 이계찰(利稽察)이 고구려·말갈에 크게 격파되고 … 라고 기록한 지나 역사서[隋書, 突厥傳]에서 단편적으로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이계찰(利稽察)에서의 '察'은 돌궐의 관직명 '샤드(Shad)'를 뜻하며 設, 殺, 煞로도 표기된다.고구려가 돌궐의 이계찰을 격파한 것은 돌궐의 동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돌궐의 고구려 침공은 처음에는 돌궐이 유연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듯 하다. 6세기 말~7세기 초 활동하였던 동로마 역사가 시모카테스(Simokattes)는 돌궐에게 멸망한 <유연>의 잔존세력이 지나지역(북제)으로 도주했고 그 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기어 동쪽의 Moukri(고구려)로 갔다고 기록했다. 이후 지나지역을 통일한 수.당나라에 맞서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당나라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흉노의 후예나라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 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유럽을 지배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되니 오늘 날 '터키' 국가이다.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을 도와 싸우기도 했던 터키는 한국을 형제국가라고 생각하며, 터키 역사교과서에는 고구려와의 관계까지 언급하며 한국을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에 대해 관심이 부재한 한국의 경우는 달랐다. 1988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 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다시 굳건해졌다. 마치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처럼 말이다. 661년 제 2차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 중 돌궐이 당나라 본토를 공격했다. 이에 당나라의 일부 군대가 급히 본토로 돌아가고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돌궐의 당나라 공격으로 인하여 고구려는 당나라를 격퇴시킨 것이다. 마치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키고 신라까지 토사구팽시켜 집어 삼키려 했던 당나라가 티벳지역의 <토번>의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킨 것과 동일하다. 이 처럼 지나을 둘러싸고 있던 유목국가들은 지나를 위협하고 지배했던 세력이였다. 일제 반도사관에 세뇌된 우리는 흔히 한반도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구도로 당시의 국제정세를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세계사적 관점으로 지평을 넓힌다면 고구려와 당, 그리고 돌궐을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 유목국가들이 가장 중요한 주체들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제외교관계는 북방유목국가들과의 연계를 통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당나라를 넘어선 원대한 세계질서 구현에 있어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국제 외교를 수행했던 것이다. 돌궐과 당나라가 대결하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요충지이자 동양과 서양의 관문,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이 지역에 고구려의 흔적이 있다. 바로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 2명의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벽화는 640년에서 660년 사이 즉 고구려와 당나라의 대립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벽화는 단순히 고구려와 돌궐의 교류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다원적 질서를 추구하는 고구려가 유목국가간의 유대를 강화하며 당나라 중심의 일원적 세계질서를 원하는 당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당의 대립은 단순히 두 나라의 싸움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패권을 다투었던 것이다. 당나라에 대한 전방위적인 포위.압박으로 자주권 보호한 고구려 외교
1300년 전 중앙 아시아지역의 사마르칸트까지 간 고구려 사신들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아마도 돌궐을 비롯한 북방유목국가들에게 당나라를 공격해 달라는 요구때문이였을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근거는 661년 제 2차 고당전쟁 중 돌궐이 당나라 본토를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당나라의 일부 군대가 급히 본토로 돌아가고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바로 이러한 돌궐의 움직임 뒤에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의 사신들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공격을 무기력하게 만들 목적으로 북방 유목민족들과의 접촉을 위해 밀사 형태로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단군조선(부여)를 국통을 계승한 정통 천자국 고구려는 신시배달국 천황 치우에게 71번 싸워 모두 패배한 황제헌원처럼 중원지역의 지배하며 천자국을 내세우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에 불과한 선비족의 나라 당나라을 위협하는 북방 유목민족들(단군조선의 후예들)과의 우호협력관계를 통하여 당나라 주변국들로 하여금 당나라를 공격하거나 위협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구려가 오만한 당나라를 포위하여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셈이다. 마치 미국의 대북압박에 대응하여 중국을 경제지원국으로 삼고, 미국주변국들이나 반미국가들과 우호협력관계를 가지며 미국을 압박하는 동족 북한의 국제외교전과 매치된다.그리고 남한의 경우는 마치 사대주의외교노선으로 당나라에 협조한 신라처럼 미국의 군사지휘권에 놓인 나라로서 미국의 전략전술에 협조하며 그대로 따라 가고 있는 셈이다. 평등한 한미협정개정을 통하여 조속히 자주주권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사대매국적인 권력집단에게는 수단에 불과한 국민과 국익은 안중에도 없는 법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자주주권적인 국제외교노선은 고부가 가치로서의 특허 등 우리의 국익사수을 최우선하는 것을 전제로 미국의 경우 대중국 견제차원으로 정치.군사적 차원에서 자주적으로 활용해야 하고, 중국과 일본과는 100년 전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에 입각하여 정치.경제.문화적인 협력교류로 아시아연합이라는 협력공동체를 구성하고, 북한과는 민족자주.민족대단결.화해협력교류.연방제통일추진이라는 6.15/10.4남북합의정신에 따라 화해협력교류을 통하여 민족통일로 나가야 하며, 흑룡강 지역까지 우리 말과 풍습을 그대로 잇고 있는 우리의 동포들인 조선족이 살고 있는 만주지역까지 회복하고 유라시아지역과 폭넓게 교류하기 위해서는 100년 전 대한민국 영토였던 간도지역에 대한 정부의 반환소송이 필요하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인 협조를 이끌어 내야 한다.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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