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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복어계획',만주국을 유태인국가로 만들려 했었다

"만주는 단군조선의 혼이 서린 땅으로 한시라도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

리복재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09/09/30 [15:19]

일제 '복어계획',만주국을 유태인국가로 만들려 했었다

"만주는 단군조선의 혼이 서린 땅으로 한시라도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

리복재 역사칼럼 | 입력 : 2009/09/30 [15:19]
▲ 1954년 일본 ‘길천 홍문관’에서 발행한 ‘정본 세계사 지도’ 속의 ‘만주국’ 지도     ©플러스코리아




10월 3일은 단기 4342년(신시개천 5906년) 개천절이다. 올해로 광복 64주년이 되었으니 이제 일제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역사가 바로잡혀야 되지 않을까? 
 
1954년 일본 길천 홍문관에서 발행한 ‘정본 세계사 지도’ 속에 들어있는 지도 한 장을 되새겨 보면서 다시는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겠다.

이 지도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부의)’를 내세워 1932년 3월 1일에 만든 괴뢰국가인 ‘만주국 지도’이다. 한반도와 만주를 영원히 통치하기 위한 일본의 중요한 계략 중 하나였다. 
 

▲ 당시 중외일보에 보도된 기사내용     ©플러스코리아

일본은 시간이 지날수록 만주통치 전략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자, 1938년 12월 5일 동경에서 비밀리에 내각회의를 개최하여 새로운 비밀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 비밀계획 이름이 ‘복어계획’이었다.

얼마전에 ‘복어계획’ 내용이 언론에 공개가 되어 관심을 끌기도 하였는데, 이 계획의 핵심은 ‘중국내에 있는 유태인들에게 만주국을 내어주어 유태국가를 건설하게 하고, 그 댓가로 미국계 유대인들로부터 전쟁자금을 지원받는 것이었다' 고 한다.

[각주]‘복어계획’은 복어가 맛은 뛰어나지만 독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를 빗 댄 것으로 그 계획의 양면성을 경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복어 계획(일본어: 河豚計画 ふぐけいかく)이란 1930년대일본에서 추진된 유대인난민만주국으로 이주시키려던 계획이다.1934년아유카와 요시스케가 처음 제안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1938년5부장관 회의에서 정부의 방침으로 정해졌다. 육군대좌 야스에 노리히로, 해군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등이 실무를 주도하였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이탈한 유대인들을 만주국에 정착시켜 자치구를 건설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유대인 적대정책을 추진해가던 나치독일과의 우호관계 손상을 우려하여, 계획이 점차 흐지부지되었으며, 삼국군사동맹의 체결과 독일과 일본이 함께 연합국과의 전쟁을 개시하면서 실현가능성이 사라져 결국 계획은 무산되었다.[위키백과]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美 진주만 공격으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하얼빈을 중심으로 활동한 2만 여명의 유대인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1948년 현재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만주땅은 단군조선 역사가 살아있는 우리역사의 주 강역 무대였었다. 많은 민족사학자들이 민족사서를 근거로 하얼빈 일대에 단군조선의 최초 수도가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 땅을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역사를 침탈하고 있는 중국과, 일제강점 70년의 아픔을 가져다준 일본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공방을 벌였다는 서글픈 역사의 한 단면이다.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의 흔적은 오간데 없고...

최근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초기 본사가 있던 요령성 대련을 중심으로 일본기업 진출이 집중되고 있다고 한다. 독도가 일본땅이라 망언을 서슴치 않는 일본인들의 가슴에 혹시 만주국에 대한 그리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단기 4342년(신시개천 5906년) 개천절을 맞이하여 한시라도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직 이땅은 일제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일본인들에 의해 교육받은 식민사학자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위험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건설하고자 했던 ‘만주국’ 그곳은 단군조선으로부터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4,300여년의 우리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주요한 땅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으면 안될 것이다. 
 


결실의 계절에 쭉쟁이 아닌 알곡을 걷어 주신 여러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풍요가 넉넉한 한가위 중추절을 가족과 함께 행복하소서... 소외된 가정을 기억 하소서... 독자제위여러분의 댁내 평강을 기원 합니다... 이제 플러스코리아의 진실을 밝히는 뉴스를 접하실 것입니다. 플러스코리아기자단拜上  

 


 

 

 

 






만주는 한국땅 09/10/01 [03:16] 수정 삭제  
  [간도는 대한민국 영토]윤동주의 고향은 북간도

별 헤는 밤 / 윤동주계절이 지나 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 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 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마지막 시구에서 윤동주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다..
"윤동주는 우선 입대해 일본군이 약해질 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했다"며 "결국 동료 배신으로 인해 밀고를 당했고 생체 실험을 당하다 죽음에 이르렀다"(방송에 출연한 문익환 목사의 아들 영화배우 문성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문익환 평전』의 저자인 김형수는 문익환 목사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의 순정은 폭력이었다. 그랬다. 그의 순정은 불가형력의 성격을 띠고 한국현대사가 가장 참담했던 시기에 그 곳에 쏟아졌다. 폭력은 상대방의 능동적 방어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그 능동적 방어를 무너뜨리고 불행한 이웃들을 안간힘으로 사랑해버린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모색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물러가고 미국이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이승만 정부가 위로부터 민주주의를 주장했으나 오히려 독재 권력을 구축하여 학생, 지식인들이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세우려는 저항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4.19에서 5.18을 거쳐 대통령직선제가 쟁취되는 6월 항쟁까지를 한 시기로 합니다.
그 결과 1987년 12월에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 민주화세력이 분열로 인해 패하자 민주화세력의 세대교체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로 인해 당시 재야의 지도부였던 문익환 목사도 2선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부영, 김근태 등 후배 세대들이 재야를 맡게 되었으니 문익환 목사는 어른으로서 이제 보다 근원적인 과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로서, 숱한 사회적 희생의 발화점인 분단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행보를 고민하게 됩니다. 때마침 전쟁 때 유엔사령부에서 통역 일을 함께 했던 정경모와 의기투합하여 분단극복이라는 민족의 숙원에 대해 북한정권은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고자 평양에 들어갑니다.
시절도 하수상하여, 소련에서는 페레이스트로이카 바람이 불고, 동독과 서독이 요동을 치며, 세계적 냉전체제가 해체되는 분위기에서 북한도 어떤 식으로든 통일의 길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이 직접 문익환 목사를 영접하고 남북의 통일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상의합니다.
분단 반세기의 역사에서 최초로 행해진 남쪽 민간 대표와 북쪽 정권 대표간의 이 만남은 전 세계의 이목을 주목시키면서 양쪽 민중의 상상력을 일거에 뒤엎습니다.
저는 2003년 8월에 문익환 평전을 쓰기 위해 평양에 취재방문을 가서 당시의 여파를 북의 주민들에게 직접 확인한 적이 있는데, 북의 인민들은 남쪽 민중이 받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 동안 양쪽에서 가르쳤던 상대방에 대한 터무니없는 왜곡들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도록 무너져버리는 대사건이었습니다.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의 우정 문익환 목사님과 윤동주 시인의 관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초등학교 동창생 간의 우정을 상기하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최소한 그 할아버지 대까지는 거슬러 가야 되는데, 문 씨 일가가 두만강을 넘어서 북간도에 정착하는 것은 1899년입니다.
함경북도의 네 가문이 합세하여, 요즘 말로 하면 ‘대안 마을’을 개척한 셈인데, 윤 씨 가문은 그보다 한 해 먼저 도강했지요. 어떤 분은 윤 씨 집안이 선발대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하여튼 그 다섯 집안이 뭉쳐서 훗날 ‘명동촌’이라 부르는 ‘민족주의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그들이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창설된 명동학교를 문익환, 윤동주, 송몽규 등이 함께 다녔습니다. 동급생이 열세 명에 불과했으니, 친하지 않다 해도 지근거리를 벗어날 수 없었을 텐데, 두 사람은 특히 서로를 좋아해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도 만나며, 나중에 시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지만, 큰 눈으로 보면 같은 곳에서 출발하여 같은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간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 개인 생각인데, 윤동주는 요절함으로써 문익환의 미래를 안내했고, 문익환은 윤동주를 끝없이 그리워해줌으로써 그가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구원했습니다. 윤동주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 문익환 집안이니 말입니다.  http://www.wnewskorea.com/bbs/print.php?bo_table=people&wr_id=63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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