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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4군'왜 날조된 허구인가 밝히는 이유

위만조선.북부여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한나라에게 한4군은 없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08/27 [21:09]

'한4군'왜 날조된 허구인가 밝히는 이유

위만조선.북부여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한나라에게 한4군은 없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 입력 : 2009/08/27 [21:09]
▲ 대한민국 국화-무궁화(한화.훈화초)-일편단성.영원성을 상징한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일제 반도사관의 목적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일본제국주의 조선총독 직할기관<조선사 편수회>의 목적은 단군3조선의 붕괴로 인하여 북방의 진.번조선 유민들의 대거 이주와 한반도지역의 패권쟁탈전으로 인하여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한 고대 한반도인들을 조상으로 삼아야 하는 일본인들의 역사적 갈등을 감추고 조선인들에 민족적 열등감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조선민족은 열등한 민족으로 세뇌시켜 일본의 통치를 합리화하는데 있었다. 그리고,8·15해방 직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활동한 이병도는 8.15이후 경성제국대의 후신인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국 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수 많은 이병도 제자들에 의해 조선인들의 역사는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반도사관을 그 특징으로 삼는 일제 식민사관이 한국사학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도사관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민족사학자들의 논리로 무장된 재야 사학자들이 '민족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반박논리로 저항하였고, 중국의 갑골문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단국대 윤내현 교수같은 제도권 교수들이  이병자 제자들의 박해와 음해를 받으면서도 단군조선은 한반도를 포함한 만주지역까지 포괄한다는 내용의 논리적인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일제 식민사관도 점점 힘을 잃게 되었다.
 
현재 중국과 일본과 한국은 역사전쟁 중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요서지역의 고대 한국문명인 요하문명을 중국화하여 중국과 한반도문화가 모두  중국문명에서 나왔기 때문에 단군조선뿐만 아니라, 한반도북부까지 지배한 고구려도 중국역사에 속하고 결국 한반도북부(북한)도 중국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영토지배논리를 펴기 위함이다. 그래서 여신전.옥.뱀.빗살무뇌토기.곰토템.원형제단.적석총(피라미드) 등 요하문명의 뿌리가 백두산문화에서 나왔고, 백두산문화는 결국 고고학적으로도 1만년을 전후로 현인류문명의 근원이 되는 마고문명의 중심지(서해)에서 가까운 한반도문화에서 나왔다는 역사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세계적인 유물.유적의 시원지(고인돌.토기.볍씨.선박.옥.곰토템 등 세계최초 최대 유적유물)가 되는 한반도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대한민국차원의 서북공정의 역사논리를 전개시켜야 중국의 동북공정이 고꾸라지게 되어 있다. 중국문명의 뿌리가 결국 한반도문명에서 출발한다는 사실만 증명해 주면 마고문명을 계승한 한반도 문명의 가지들에 불과한 중국문명은 결국 한반도문명에 고개를 숙여야 하기 때문이다.
▲ 백제 대향로 위의 봉황 -봉황는 고대 한반도인들의 신조(천상의 새). [산해경]"동방의 봉황이 사해를 날면 평화가 실현되었다"

역사연구와 인식론
 
사람들은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인류의 뿌리, 그리고 자신들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심리적인 배경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역사학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결국 자기울타리에 머문 국수주의적인 차원에서 전쟁과 대립을 부추켜 인류평화를 깨트리고 학살과 전쟁의 악순환을 지속시키는데 있지 않다. 객관적인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세계가 갈라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지평융합의 세계임을 인식하고 현인류조상과 현인류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공존공영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데 있다고 본다. 한국의 예언자 함석헌 선생이 "인류가 어서 빨리 역사의 줄기를 통하여 하나의 신과 하나의 조상을 찾아서 오손도손 살아야 한다"라고 호소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럼 역사학의 방법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쪼개진 퍼즐을 맞추어 모양을 만드는 진실탐구에 있다. 따라서 종합적인 분석을 전제로 하는 인식론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려진 편향된 인식론으로 역사의 진실이 밝힐 수 없으며 역사학을 할 자격이 없다. 예컨대, 한 사건에 대한 여러 문헌들의 기록들을 비교분석해서 공통적 내용에 해당하는 교집합을 찾을 줄 알아야 하고, 땅 속에서 출토된 유물유적을 통하여 문헌들의 공통적 기록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각 문헌들의 공통적 기록내용은 고고학적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대한 역사적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공통적인 내용이란 사건의 사실을 사가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문헌들의 경우 후대로 내려 갈수록 고대 한국인들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감추고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높이고 확대하는'춘추필법'으로 기록하였다. 예컨대, 태호복희는 백두산지역의 신시배달국 태우의 한웅의 막내 아드님인데, 중국에서는 추상적인 신화로 기록하여 중국의 인문학의 시조로 추앙하고 있다. 태호복희는 산동에 묻혔는데, 중국문헌들은 출생지와 장지가 불분명하고 여러 군데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중국문헌들은 황제헌원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진시황과 유방은 전쟁에 출전할 때 전쟁신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제헌원이 승리했다면 진시황과 유방은 치우가 아니라 황제헌원에게 제사를 지내야 상식적으로 맞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지배한 고대에서 영어구조와 동일한 남방계 언어를 사용하며 중동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이주하여 황하강 중상류에 거부하여 동이족들을 복속해 나간 화하족들은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춘추필법으로 중국지역의 '동이사'를 감추고 왜곡하고 있다.
 
반면에 중국 동북공정론자들과 식민사관론자들에 의해 위서로 취급하고 있는 [한단고기:고대 한민족 역사를 기록한 고대 사서들을 묶은 책]는 신화적 기법을 배제하고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기록으로 우리 민족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 객관성을 지니고 있는 사서로 증명되고 있다. 예컨대, 단군조선의 영역자체가 고인돌.비파청동검과 세형청동검 출토지역을 기준으로  [한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3조선의 영역으로 산동.요서.만주.몽골.연해주.한반도.일본열도임이 증명되었다. [조선왕조실록]를 보더라도 세조3년에 전국 8도 관찰사들에게 고서들을 수집해서 중앙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있는데, 그 고서들 중에[한단고기]에 포함된 <삼성기>라는 고서도 보이기 때문에 계연수 선생이 근대적인 용어로 해석을 했다 치더라도 그 원내용은 그대로 기록한 책이 [한단고기]이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기록내용을 담고 있는 [한단고기]는 기자.위만.한4군 문제 등 중국문헌이 왜곡하고 있는 고대사의 논쟁거리에 대한 혼란을 말끔히 해소해 주고 있다.
 
▲현도군.임둔군.진번군.낙랑군은 기자조선(번조선)의 제후국들이다. 기자조선을 빼앗은 위만조선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위만조선의 내분(기자조선세력과 위만세력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위만의 손자 우거왕이 암살되자 한무제(유철)이 위만조선을 공격해 들어 왔으나, 북부여 고두막군대와 위만조선유민들이 연합하여 격퇴시켰기 때문에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한4군은 허상에 불과한 날조다.  소위,한4군의 지명도 한무제때의 사가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명나라때의 역사문헌에 등장한다.  무참히 번조선유민들과 북부여 군대의 연합군에게 무참히 참패를 당했던 한무제는 사마천의 [사기]를 통하여 4군을 설치했다라고 왜곡했다고 볼 수 있다.

위만조선과 왜곡된 한4군의 실체는 무엇인가?
 
북한 평양을 단군조선의 중앙 왕검성으로 착각한 조선의 유학자들이나 일제 반도사관론자들은 단군조선의 시기에 대해 크게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구분하며 지역도 한반도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한단고기]에는 단군조선은 엄연히 3한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는데, 간접적 통치를 가했던 중국지역을 제외하고라도 직접 통치영역은 산서.하북.요서에서 양자강까지(번한),만주.연해주.몽골.시베리아(진한),한반도.일본열도(마한)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 중국을 지향하는 소중화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 유학자들과 일제 식민사관론들의 주장은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역사관임을 알 수 있다.
 
한나라 한무제 시기의 역사를 기술했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위만에서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흉노를 경계했던 한나라 제후국 연나라 왕 노관(노관은 전한 고조 유방과 같은 마을에서 자라 후에 유방을 도와 장안후長安侯에 봉해졌다 후에 연왕燕王)이 되었다. 진희의 반란때 진희의 음해로 반역죄로 몰려 흉노에 투항해 동호東湖의 노왕盧王으로 살다 그 곳에서 죽었다)이 한나라의 내분으로 흉노로 망명하자,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이 상투를 하고 만이('만이'는 고대 화하족이 중국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한국인들을 얕잡아 이르던 말)의 복장을 하고 패수을 건너 조선에 투항하자, 조선왕이 장군으로 삼고 국경을 수비하게 했다. 그러자, 위만은 주변의 진번세력과 투항해 온 위만세력을 모아 반란을 도모하여 왕검성(하북성 창려=험독)을 점거하고 왕에 올랐으나, 덕과 인이 부족하여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망했다." (*난하:고대에는 요하=윤내현 교수)
 
위만이 준왕을 한반도로 몰아 내고 왕검성을 점령한 배경을 [위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병(漢兵)이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여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을 쳐서 나라를 빼앗고,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고 하였다." 이 때를 《사기(史記)》에는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 기원전 194년~ 기원전 180년)라고 하였다. 

 
한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세력은 바다를 건너 마한(한반도) 땅으로 들어와 '한왕'이라고 칭했다. 중국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우리 문헌[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나온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위만이 조선을 치니 준왕이 바다를 건너 한(韓=한반도) 땅에 이르러 나라를 창건하고 마한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도사관론자들의 논리처럼 기자조선이 대동강 부근에 있었다면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갈 이유가 없다. 기자조선이 난하 부근에 있었기에 준왕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일부 재야사학자들도 한반도가 아니라 위만조선의 남부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개국했다고 착오를 하고 있다. 마한이라고 했을 때는 단군3조선 중 한반도 땅을 의미하지 중국지역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평양지역의 기자가묘의 배경이 설명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한단고기]는 연나라 사람 위만을 기자조선을 강탈한 도적넘으로 보고 있다. 위만의 복장을 보았을 때 위만은 조선인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상투는 조선인들만 하는 풍습이고, 영어구조의 티벳계 언어를 사용하며 백인문화를 가지고 중국의 서쪽에서 동진하여 황하강 중.상류지역에 거주하며 동방 배달족의 문화의 영향으로 황하문화를 형성하여 나라를 열었던 화하족이 얕잡아 부른 만이도 산동.요서지역에 사는 한국인들로 위만은 노관의 부하로써 한나라 영역에서 망명해 온 조선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만이 화하족이라면 국호를 조선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며, 제도와 관직명도 기자조선을 계승하지 않고 한나라 제도와 관직으로 변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만은 기자조선의 제도와 관직명을 그대로 이었다. 문제는 기자조선세력과 위만세력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인한 내분이였다. 위만조선은 한나라가 1년간을 수군과 육군으로 공격했어도 망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전쟁에서 패한 장군 6명을 참수하고 1명만을 서민으로 강등시켰다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위만조선이 망한 건 내부분열에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반란자들이 위만의 손자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한 조선인들때문에 한나라가 어부지리하여 4군 지명도 없이 한4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위만조선이 내부분열로 붕괴된 후에 한무제(유방)가 설치했다는 중국 요서지역의 4군이 바로 위만조선의 영역인 셈이다. 그런데, 반도사관론자들은 소위, 한4군을 지금의 북한지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북한 사학계에서는 요동지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 혼인하여 낙랑국의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가 한4군의 낙랑군의 딸인양 착각하고 있다. 공주라고 했을 때는 태수의 딸이 아니라, 엄연히 국왕의 딸을 의미한다.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는 북한평양지역의 최리 낙랑국이다. 번조선(기자조선)의 제후국 요서지역의 낙랑국에서 발해만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온 최숭의 후손 최리의 나라가 낙랑국인 것이다. 최숭은 47대 고열가 단군천황이 황위에서 물러나 산속으로 들어가자, 요서지역에서 마한의 왕검성인 북한의 평양지역으로 들어와서 정착하게 되고 후손인 최리가 낙랑국을 개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최리 낙랑국을 한4군의 낙랑군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불성설이며 궤변인 것이다. 평양지역에서 후한시대의 인구조사통계를 적은 목간이 발견되었다고해서 한4군의 위치가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건 궤변이다. 엄연히 한4군은 후한시대가 아니라 전한시대이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후한시대의 목간은 고구려 대무신왕 당시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의 후미를 공격하기 위해 서해바다를 건너서 최라 낙랑국 영역의 일부를 점유하여 설치한 낙랑군을 의미한다. 후한 광무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위해 바다를 건너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반도사관론자들은 후한 광무제의 낙랑군이나 최리 낙랑국을 한4군으로 조장하거나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배경은 위만조선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진국(辰國)과 한나라의 교역로를 가로 막게 되었고, 이를 두려워 한 한무제가 기원전 109년 사신 섭하(涉何)가 위만조선군에 살해된 것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위만조선과 1년간의 전쟁에서 처참히 참패한 한무제(유철)© 윤복현 저널리스트
과연 한나라는 한4군을 설치했던 것일까? 아니면 조작인가? 결론은 조작이라 할 수 있다.
한무제 당시 사마천은 [사기]에서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살해되자, 4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단고기-북부여기 상]에서는 전혀 반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은 이렇다. "한나라 한무제(유철)가 평나(위만조선 왕검성=창려)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 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이에 그 지방(위만조선 지역)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한무제 유철이 내분으로 우거왕이 암살되어 위만조선이 붕괴되자, 위만조선을 점령하기위해 군대를 모아 몰려 왔는데, 이 때 북부여의 동명성왕 고두막(북부여 5대 단군)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와 전쟁을 하여 연전연승하니 위만조선유민들이 합세하여 한나라 군대를 몰아 내었다는 내용이 된다.  따라서 한나라의 4군 설치는 무산되었다는 내용이다. 명나라 때의 문헌에 나타난 한4군의 지명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가 한4군을 외쳐대고 있으니 정신나간 민족이 아니겠는가! 위만조선과 전쟁을 벌이다 무참하게 패한 한무제 당시 사마천도 4군의 지명을 [사기]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가 유령의 4군을 역사적 사실인양 외쳐대야 한다는 것인가?

▲ 한나라는 육군과 수군으로 1년간에 걸쳐 위만조선을 공격했으나 무참히 참패했다.  당시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으며, 치우족의 후예로 구성된 번조선의 군사력이 전통적으로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단군한검천황은 단군한국을 3개 지역으로 분할할 때에 하북.산서.요서에서 양자강유역까지 영역으로 삼는 번조선을 중국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는 책임을 부여하면서 번한(번조선 단군)을 치우천황의 후예인 치두남으로 삼았다. © 윤복현 저널리스트

당시 한나라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위만조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년간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한나라는 참패했다. 그리고 한나라나 위만조선이나 초기 국가재건기간이고 한나라 북쪽에는 번조선의 제후국가였던 수유족(흉노)이 강력한 유목국가로 성장하여 한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여서 한나라의 군사력이 위만조선을 쉽게 점령할 상황이 아니였다. 위만조선이 붕괴한 건 한나라의 공격이 아니라 내분에 의한 붕괴가 확실하다. 한무제의 병략가 회남자도 자신의 저서에 한나라가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기록이 없다.그런데, 왜 우리가 한4군을 외쳐대야 한다는 말인가? 위만의 손자 우거는 위만조선의 왕으로서 내분외분에 맞서 항전했으나 결국 내분으로 암살당했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어 버렸고 이 기회를 노려 한나라가 군대를 몰아 다시 쳐 들어오자, 북부여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위만조선 유민들과 합세하여 몰아 내었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한단고기-북부여기 상]에는 위만의 망명과 위만조선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해모수때 노관의 부하장수 위만이 처음에 북부여에 망명요청을 했으나 병 중에 있던 해모수가 고민하던 차에 기자조선의 기준왕이 위만을 받아 들여 땅을 주고 박사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후 위만이 기자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위만의 손자 우거왕때는 북부여를 공격하여 이북 영토(해성)를 빼앗자,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 단군이 5천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해성을 격파하고 땅을 회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를 위협할 정도로 위만조선이 성장하고 팽창한 배경에는 위만이 흉노로 망명한 노관의 부하였던 만큼 북방 초원지역의 흉노제국과의 긴밀한 공조관계가 있어다고 봐야 한다.
 
북부여에게 있어 북부여의 제후국가인 기자조선(번조선)을 강탈한 위만세력은 야비하고 교활한 떠돌이 도적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만조선은 북부여와 한나라와 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위만조선내부에서는 위만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권력쟁탈이 치열했던 것이다. 그 결정판이 우거왕와 우거왕의 최측근 성기를 조선인들이 반란을 통하여 암살한 사건이고,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참패했던 한나라가 내분의 기회를 이용하여 다시 침략해 들어 오자, 번조선 유민들이 북부여 고두막군대와 연합하여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따라서 다시는 한4군이라는 유령4군을 역사적 진실인양 떠들어 대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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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 09/08/30 [02:51] 수정 삭제  
  객관적 증거가 필요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논리와 증거가 필요합니다. 수고 많습니다.
윤복현 09/08/30 [11:29] 수정 삭제  
 
0.한반도 서남해지역은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땅이다!
 

중국인들은 오랑캐들이 사는 만리장성 이북은 문명자체가 없다고 생각하고 화하족의 발원지 황하강의 황하문명만이 중국문명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1963년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의 뿌리가 되는 요하문명이 발견되어 중국사학계가 발깍 뒤집혀 졌습니다.
 

서양문명의 시원이 되는 중동지역의 슈메르문화(뿌리=요하문명)와 같은 여신전.여신.곰토템.빗살무늬토기.비파청동검 등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문명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뱀 돌무더기도 발견되어 중국인들이 숭배한 용토템문화도 역시 한국인들의 문화였음이 밝혀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중국사학계는 중국문명의 시원지는 다양하다.요하문명의 주역은 황제헌원이라는 궤변논리를 늘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된 동이족 출신 황제헌원세력은 만리장성 이북에서 활동한 적이 없는 황하강지역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요하문명의 주역은 한마디로 모계사회국가였던 곰족,즉 한반도에서 북상한 마고족의 문명이였던 것입니다. 뱀이라는 것도 마고문명의 중심지 서해가 바다가 되기 전에 황하.압록강.한강.영산강 등이 합류하여 흐르는 거대한 아리수의 모양을 잊지 않기 위해서 삼은 마고족의 기억의 산물이라 할 것입니다.
 

요하문명을 중국문명으로 착각하고 있을 수 많은 국민들의 골을 때린 방송이였다고 생각합니다.역사를 상실하면 얼빠진 민족과 국민이 됩니다.토요일 방송(KBS역사스폐셜)에서 힌트를 주었습니다. 즉, 요하문명은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예컨대, 요하문명의 특징인 <옥>의 산출지도 바로 고대 중국인들이 삼족오신화와 관련한 천제<준>이 산다는 대황으로 기록된 압록강지역이고, 빗살무늬토기도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암각화도 그렇고. 이집트보다 1천년 앞선 요하지역의 대형 피라미드...그리고 집안지역의 태왕릉(중국정부는 광개토태왕능리라고 속이고 있음..사실 요하지역의 피라미드보다 더 오래된 피라미드로 추정)과 집안지역의 1만5천기의 작은 피라미드...바로 요하지역의 적석총문화의 발원지입니다. 또한 세계 검들의 원형도 한반도 서남부지역입니다. 등하불명입니다. 한반도에 현인류문명의 흔적이 다 있습니다.사학자들은 사고전환을 해야 합니다. 요하문명의 우리 민족의 시원문명이 아니라, 서해문명을 계승한 한반도 문명이 바로 요하문명의 시원문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기후변화로 북상한 한반도인들에 의해서 건설된 문명입니다. 서해(마고)=>한반도=>백두산지역(압록강)=>요서.송화강=>유라시아.아메리카요하문명은 단군한검을 탄생시킨 한웅족과 곰족의 결합을 함축한 [단군신화]의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증언해 주는 고고학적 장소입니다. 그리고 단군한검은 외할아버지 나라가 있던 단허국지역의 조양(아사달=평양/박지원 열하일기)을 도읍으로 삼고 <단군한국>을 일으켜 천황에 추대되었습니다. 단군조선이라는 국호는 22대 색불루 단군천황때 바꾼 것이니 단군한검천황이 나라를 열 때 국호를 조선이라 하면 안 됩니다. 단군한국입니다. 그리고 숙신=조선=쥬신입니다.[윤복현]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 1부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
▣방송 : 2009. 8. 29(토) 20:00~21:00 (KBS 1TV)▣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연출 : 최필곤 PD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1부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8월 29일 토 20:00~21:00 KBS 1TV)2부 금 태조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9월 5일 토 20:00~21:00 KBS 1TV) 





BC 6000년, 만주 요하 지역에서 찬란한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황하문명보다 천년이나 앞선 고대문명.특히, BC 3500년경 꽃 핀 홍산문화에서는 대규모 적석총, 제단,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이미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한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을 무대로 문명의 새벽을 연 이들은 누구일까? 발굴 결과, 요하문명은 중국 중원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오히려 우리 민족의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장장 4000㎞의 만주 탐사 대장정 만주 땅에 아로새겨진 민족의 기원을 찾아간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문명은 인류의 4대 문명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요하문명으로 인해 세계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한다. 요하문명은 이들 4대문명보다 시기적으로 1000년 이상 빠르다. BC 6000년, 요하문명의 새벽을 열었던 사해·흥륭와 문화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옥귀걸이와 꼭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도 출토되었다. 대륙을 건너온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을 밝혀줄 단서가 아닐까.
 





요하문명의 꽃, 홍산(紅山)문화




요하문명은 홍산에서 그 꽃을 피운다. 홍산인들의 성도(聖都)인 우하량에서 여신묘가 발견되었다. 그곳에서는 두 눈을 푸른 옥으로 장식한 여신상도 함께 발굴되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신체의 조각들로 봐서 사람크기와 2배, 3배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신묘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 눈동자에 푸른옥이 박혀있다

또한 우하량 각지에서는 수많은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한 변이 60m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형이다. 제단, 신전, 무덤이라는 정신문명의 삼위일체의 유적들과 매우 정교한 옥기의 대량 생산 등은 홍산인들이 이미 ‘초기국가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중국으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우하량 적석총
 





흔들리는 중화사상, 중국의 새로운 국가 전략




중국은 예로부터 황하문명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삼고, 만리장성 이남을 중원이라 믿었다. 그러나 오랑캐의 땅이라 여겨왔던 만리장성 이북의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천 년 이상 빠르고 이미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 요하문명이 속속 발굴되자, 수 천년간 지속되어온 중화사상은 크게 흔들린다. 중국은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웠다.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중화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의 역사공정에 착수했고, 그 핵심이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요하문명이 중국 문명의 시원일까?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은 누구인가?





BC 2000년 경, 홍산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어진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되는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 동검 등이 발견되는데 이는 중원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중화민족과는 다른 집단이라는 것이다. 치를 갖춘 석성은 고구려 성의 특징을 보여주며, 비파형 동검도 그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요하유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완전한 국가단계라고 평가되는데, 기원전 2,000년 경 요하유역에 있을 수 있는 국가는 무엇일까? 모든 사서를 뒤져봐도 그것은 고조선 외에는 없다.흥미로운 것은 홍산문화 우하량의 여신묘에서 곰의 턱뼈와 진흙으로 만든 곰의 발도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제사장으로 보이는 인골은 곰의 얼굴을 형상화한 옥룡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이는 홍산인들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족이었다는 증거다. 우리 민족의 기원 신화인 단군 신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여신묘에서 발견된 진흙으로 만든 곰발 소조상


그러나 주류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신화로서만 인정할 뿐, 단군 조선이라는 역사적 실체는 부정해 왔다. 이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단군조선의 실체에 대해 적극적인 검토를 해야 할 때이다.
 
[자료]요하문명의 특징-암각화
 

- 바위에 돌이나 금속으로 쪼거나 갈아새기거나 그어새김 등의 방법으로 새긴 그림을 말한다. 암각화는 물과 관련된 입지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암각화 유적이 있는 곳은 주위에 물이 있는 곳이다. 이것은 농경과 관련된 풍요를 기원하는 목적일 수 있다. 그리고 유적 입지가 생활 공간 가운데서도 매우 은밀한 곳에 있거나 일반인들이 평상시 접근할 수 없는 신성지역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음과 동시에 제의를 여는 장소였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의 '소도'라고 불리는 곳과의 연관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을 보면 암각화는 고대사회와 의식구조 파악에 용이하다고 할 수 있다.
 
▷ 암각화의 입지 - 강가 바위 절벽(대부분의 유적 입지), 편평한 바위 위, 해가 잘 비치는 동향과 남향 바위(반구대 유적은 제외된다.)
 
▷ 암각화 내용 - 사람과 동물의 구체적 형상, 기하학적 무늬(동심원, 직선), 신상.
 
▷ 암각화를 새긴 목적
- 신앙적 의미 : 다산과 풍요.
- 유감주술적 행위 : 비슷한 행위를 함으로서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길 기원함.
- 선사제의 장소로서의 의미.
 
▷ 암각화 생성 시기 - 신석기시대 제작설, 청동기시대 제작설.
(동물, 인물 암각화, 천전리 기하학문 암각화, 신상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제작으로 추정. 천전리 선각 암각화는 철기시대로 인정.)
 
▷ 암각화의 원류
- 한국 암각화 분포의 편중성 : 경상도에 집중. 한반도 남쪽에 집중.
- 암각화의 분포(주로 강가나 바다가에 분포) : 서해(마고)=>한반도=>요서.송화강=>바이칼호- 흑룡강-시베리아=>유럽.아메리카
 
▷ 암각화 조사와 기록
- 탁본 : 전통적인 방법으로 비교적 정확하고 넓은 면적의 그림을 표현하기 쉽다. 그러나 유적을 훼손하게 되고, 암각화의 인공적인 선과 자연적인 균열을 자세히 구분하기 힘들다.
- 투명용지를 이용한 트레이싱 : 시간이 많이 소요되나 비교적 정확하다. 그러나 안료가 있는 그림의 경우 훼손될 수 있고, 기록자의 판단에 따라 기록이 달라질 수 있다.
- 컴퓨터를 이용한 기록 : 원본을 훼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비접촉 실측이라는 점에서 권장할 만하다.
 

⊙ 새김방법
▶ 쪼아새김 (면새김, 선새김)
- 면쪼아새김 : 새기려는 형상의 내부 전면을 쪼아낸 것.
- 선쪼아새김 : 윤곽선만 새긴 것과 내부를 표현한 것이 있는데 대부분 내부를 표현한 것이다.
▶ 갈아새김 (면갈아새김, 선갈아새김, 덧갈아새김)
- 밑그림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뚜렷하지 않으나 대부분 밑그림을 쪼아새긴 다음 그 위에 갈아새긴 것으로 보인다.
▶ 그어새김 (선그어새김)
- 칼이나 끌, 송곳 같은 날카로운 철기의 끝 부분으로 그어 새긴 가늘고 얕은 선새김 그림이다.

⊙ 새김의 선후관계 (면과 선)
▶ 쪼아새김 - 구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시기에 따라 사용도구를 달리해가며 지속되어 온 기본 새김이다.
그러나 주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사실적 기법 그림에 많이 나타난다.
▶ 갈아새김 -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초기철기시대에 성행하였다
▶ 그어새김 - 역사시대 초기 이후의 그림에 많이 나타난다.
※ 우리 나라는 면쪼아새김이 선쪼아새김보다 앞선다. 면갈아새김과 선갈아새김의 선후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1.동방과 서방패권을 장악했던 단군의 후예들
 

1960년대에 북한을 방문했던 중국의 지성인이면서 중국혁명의 지도자 주은래가 말했습니다."동북방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가 중국의 영토를 크게 넓혀 준 점에 대해 감사한다."
 

100년전까지 중국대륙은 백두산지역에서 일어난 청나라가 지배한 나라였습니다. 청나라는 금(김씨 나라)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몽골에 멸망당한 금나라 시조는 아골타입니다. 아골타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의 아들 김행의 6대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즉, 金나라 시조 아골타는 마의태자의 6대손 즉 마의태자로부터 7대째가 되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금나라를 계승한 청나라 황실의 성씨가 애신각라라는 배경은 신라를 잊지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22대 소태 단군천황은 수유족(흉노) 출신이면서 단군천황을 보좌하는 좌현왕 서우여(선우.수유)에게 단군천황자리를 승계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황직은 5가 만장일치 추대방식이 전제가 되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시조 고등의 손자이면서 단군천황을 보좌하는 우현왕 색불루가 취소하라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소태 단군천황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분노한 색불루가 백악산 아사달(장춘)에서 쿠테타를 일으켜 단군천황에 오르고 서우여를 번조선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때 난하강 서북쪽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번조선 제후국 수유족들이 단군조선의 직접 통치에서 벗어나 서쪽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키운 후에 일부는 유럽으로 진출하여 일부는 중국을 위협하니 바로 스키타이 흉노입니다.
 
색불루 단군천황을 기점으로 동방패권은 고씨족이 장악했고, 유라시아 서방패권은 스키타이 흉노(유목세력)가 장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소수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15년간 중국을 지배하다 다시 한족에게 멸망당하고 한반도남부지역으로 망명해 온 흉노 휴도왕 아들 김일제 후예인 가야와 신라입니다. 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는 유목족이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제훅국 선비족(당나라)와 혈통적으로 가까울 수 밖에 없습니다.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동방의 패자였던 고씨족(고구려.백제)를 무너뜨린 배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올라가다 보면 결국 모두 단군의 후예들이였습니다. 이제 하나로 힘을 합쳐 한반도에 갇혀 살지 말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가야 합니다. 역사교훈은 합의와 원칙을 위반한 행위가 얼마나 큰 분열과 상처를 주고 결과적으로 대립과 전쟁을 낳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남북한 통일문제도 그래서 결국 합의존중과 합의이행밖에 없습니다.
 
[자료]애신각라(愛新覺羅) _ 청나라의 황제 계보
 

1 대 - 태 조(누르하치)
2 대 - 태 종(홍타시, 황태극)
3 대 - 세 조(순치제)
4 대 - 강희제(현 엽)
5 대 - 옹정제(윤 진)
6 대 - 건륭제(홍 력)
7 대 - 가경제(옹 염)
8 대 - 도광제(민 녕)
9 대 - 함풍제(혁 저)
10 대 - 동치제(재 순)
11 대 - 광서제(재 첨)
12 대 - 선통제(부의, 푸의)
 


가장 강성했던 왕은 4대 황제인 강희대제를 꼽겠습니다. 중원대륙을 통일하고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았으며, 조선과 경계비를 세워 경계하고 최대의 세력확장으로
청나라는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은래가 고마와 한 동북방 만주족 청 나 라 영 토


2.고대 중국지역에서 옥황상제는 동북방 단군천제
 

서이.북이.동이는 화하족이 지들이 살던 황하강지역을 중심으로 설정한 기준입니다. 화하족의 거주지였던 중원이라는 황하강지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동이.서이.북이.남이지역이 어디인지 나올 겁니다.빨간공간이 화하족의 중원지역(동이=산동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북이=북방 한국인들)지들이 사는 좁다란 황하강지역을 배경으로 중국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대 한국인들을 가르는 용어입니다. 중국인들이 만들어 놓은 용어자체를 우리가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늣입니다. 예컨대, 중국인들이 구분해서 지칭한 흉노.몽골.거란.돌궐이 서로 다른 민족인양 착각할 수 있는데, 사실 혈통적으로 같은 유목한국인들입니다. 우리 [한단고기]에는 흉노가 번조선 제후국인 수유족(선우)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황하 앙소문화 유적지의 삼족오고대 화하족은 모두 신시배달과 단군조선의 작은 제후국에 불과했습니다. 어린아이같아서 태호복희.염제신농.황제헌원 등 한국인들이 젖을 주면서 길렀습니다. 애들이 커서 지를 키워준 부모를 업신여기고 살해하는 역사왜곡을 해 왔으니 배은망덕한 민족인 것입니다.은나라.주나라 등 고대 중국왕들이 산동지역 태산에서 제사지내는 행위는 단군한국의 천제(천황)을 옥황상제로 생각하고 드리는 지상의 제사였습니다. 당시 단군한국의 땅은 천상지역입니다. 즉 하늘나라입니다. 중국지역은 천하지역입니다.

산해관 만리장성 입구에'천하제일문'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산해관 만리장성입구의 문이름이 천하제일문입니다. 즉 중국지역은 지상이요, 인류문명의 꽃을 피운 단군한국의 지역은 천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단군천제를 옥황상제로 생각했다면 단군천제들이 얼마나 완전한 성인군자수준의 인물들이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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