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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한검'의 첫 도읍지<아사달>은 어디인가?

북한 대동강변의 대박산 단군릉의 주인은 누구인가?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08/11 [23:29]

'단군한검'의 첫 도읍지<아사달>은 어디인가?

북한 대동강변의 대박산 단군릉의 주인은 누구인가?

윤복현 저널리스트 | 입력 : 2009/08/11 [23:29]
 
 

일연의[삼국유사]기록에 보면 단군한검의 단군한국(3한을 통치하는 단군천제가 거주하는 진조선)의 도읍지는 아사달.평양성.백악산 아사달.장당경.아사달로 차례로 이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처음 도읍지와 마지막 도읍지가 아사달이라는 의미다. 그리고,<단군한국>의 수도이전과 관련한 이러한 [삼국유사]의 내용은 [한단고기]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한단고기]에는 아사달, 백악산아사달, 장당경의 순으로 이동하였다.  아사달(요서지역의 조양), 백악산아사달(녹산=장춘), 장당경(요동지역의 심양=개원)이다.


나라의 수도란 본래 적의 경계지역으로 부터 후방 깊숙히 위치하는 법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수도이전은 권력을 바꾼 단군들의 중심지역과 연관된다. 단군한검은 곰족의 나라 단허국이 위치한 지역과 연관되고, 쿠테타를 일으킨 색불루 대단군도 자신의 중심지역인 백악산아사달(장춘)을 도읍으로 삼는다. 서기전426년에 우화충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하고 5가들의 추대로 단군에 올라서 국호를 대부여로 바꾼 백민성 욕살 구물 대단군도 자신의 중심지 장당경(심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승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는 중국인들이 동북방(만주-한반도) 한국인들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열등감을 덮기위한 역사기법으로 사용한 신화같이 서술되고 있는데, 『한단고기』는 중국인들이 사용한 신화적 기술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기술하여 한민족의 찬란했던 고대사를 밝혀주고 있다. 본래 심리적으로도 당당하고 떳떳하면 단순명료하게 사실을 기술하지만, 열등감이 많고 숨길 많으면 괜히 문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포장을 하는 법이다. 예컨대, 중국인들이 시조로 삼는 반고도 거불단 한웅으로부터 제후되기를 간청하여 승인을 받아 중국 삼위산아래에서 나라를 열었는데, 중국에서는 반고를 천지창조신으로 신격화하여 뻥튀기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한단고기』가 당연히 한국사학계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병도 후학들인 식민사관론자들이나 중국의 동북공정론자들에게는 '위서'로 취급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대동강에 시신이 버려 졌다는 계연수 선생이 홍범도.신채호 선생 등의 후원과 도움으로 전해 내려 온 고서들을 정리하여 편집된[한단고기]에는 지금부터 약 9200년 전,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환국이 있었다는 기록과 이를 이화한 7세 한인이 등장하고,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의 경전과 삼륜, 오계, 팔조, 구서 등의 계율과 덕목이 나오며, 한웅천황이 개천하여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했다는 이야기, 태고시대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알고 있는 오행사상, 18세 한웅과 배달국에 대한 기록, 단군왕검과 47세 단군에 대한 역사, 그밖에 상하무등, 남녀평권, 분권관경제니 하는 민본주의적인 표현, 청나라 때 생긴 지명이라는 영고탑 등 도저히 현대적인 상식과 짧은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러나,[한단고기]가 위서가 될 수 없는 사료적 근거는 [조선실록]에 세조가 전국의 관찰사들에게 고서들을 수집해서 중앙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려서 [한단고기]에 실린 <삼성기> 등의 책들이 수집되었다는 기록이다. [한단고기]이전의 우리 민족사를 기록하고 있는 고서로는 신라 박제상의 [부도지]가 있다. 따라서 [부도지][한단고기][규원사화] 등 고서들은 하나의 책으로 묶여서 전 국민에게 우리 역사를 알리는 사료로 사용되야 한다.


[부도지],[한단고기]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대한민국 국통맥은 마고-한인 한국-한웅 배달국-단군조선-해모수 부여-고추모 고고리-대조영 대진국-왕건 고려-이성계 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나라들의 서울이 위치한 중심지역을 정리하면 한반도 서남해(마고)-만주 천산지역(황궁씨.유인씨)-바이칼 호수(한인씨)-흑룡강.백두산지역(한웅씨)-요서 등 만주지역(단군한검씨+색불루.해모수.고두막.고추모를 배출한 고씨족+대진국을 개국한 대씨)-한반도(백제.신라.고려.조선)이다.

그럼 단군한검의 첫 도읍지 <아사달>은 어디일까? 우린 보통 북한<평양>이라고 인식해 왔다. 그러나 그건 '평양'이라는 의미를 몰랐거나, 조선민족은 열등하다라는 역사관을 주입시키려 했던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의 역사교육때문이였다. 그리고, 단군조선도 중국지역에서 망명해 온 기자와 위만에 의해 단군조선의 중앙권력이 장악되고 마치 기자.위만조선이 한반도 평양지역에 나라를 개국했고 한나라의 침략으로 멸망되어 한4군이 설치된 것 처럼 인식해 왔다. 바로 반도사관이였다.

바이칼호수지역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연방국가를 건설했던 한인의 12한국과 송화강과 백두산지역을 중심으로 신시(피라미드) 배달문명을 건설했던 한웅의 신시배달국 문명을 청동기문명으로 계승발전시킨 단군한검의 단군한국은 유라시아지역에 걸친 거대한 9환족의 영역을 통합한 후에 3신1체[석3극 무진본]천부경 사상에 따라 3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진한(진조선)에 해당하는 만주.몽골.시베리아지역은 아사달(요양)을 왕검성으로 삼고 단군한검이 직접 통치하고, 마한(마조선)에 해당하는 한반도.일본은 북한 평양을 왕검성으로 하여 웅백다 부단군으로 단군한검의 명령를 받아 통치하고, 번한(번조선)지역에 해당하는 요서.산동-양자강유역까지는 치우족의 후예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을 부단군으로 삼아 창려를 왕검성을 삼고 통치하게 했다. 통치구조는 단군한검을 모든 제후국들이 3한(조선)의 제사장과 통치자로 삼고, 8조법 이행과 세금납세와 제사의무(한인.한웅.한검 3신에 대한 제사)를 이행하는 것을 전제로 각 제후국들이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지방자치제였다.  한국에서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시기는 고구려 시조 고등의 손자 22대 색불루 단군이다.

1만년이전에 육지였던 한반도 서해지역에서 '마고'라는 여성통치자를 중심으로 마고문명을 건설했던 마고후예 곰족의 모계문화(여신상.신전.옥문화.곰문양 등)와 역시 마고의 후예들로써 마고성을 떠나 북쪽 천산지역(중앙 아시아 천산산맥이 아니라,바이칼 호수와 가까운 만주의 천산지역일 가능성이 높다.12한국은 바이칼 호수 동쪽이 중심지역이라고 '한단고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으로 이동하여 도를 닦은 황궁씨.유인씨.한인씨의 후예인 한웅족의 하늘숭배문화(원형의 제천단 등)가 결합되어 소위,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단군신화]의 역사적 사실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요서지역의 조양(아침의 태양이 뜨는 땅=아사달)은 유라시아 초원으로 나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중국 역사상 한족과 북방 이민족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KBS역사스폐셜 자료]고인돌 분포도(북한 평양지역보다 요동지역이 더 정교하고 연대가 빠르다)


단군조선의 상징하면 보통 고인돌, 청동검, 온돌이다. 고인돌은 한반도 남부 화순지역의 경우 8천년전까지 존재하는 것 보면 단군조선시대이전부터 내려온 무덤양식으로 본다. 세계 고인돌은 주로 해안주변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부터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양을 통하여 동남아시아-인도-유럽까지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남 창녕군에서 발굴된 세계최초 최대규모의 선박이 바로 고대 한반인들의 해양족이였음을 증명한다. 울산의 반구대에 그려진 고래잡이그림도 이를 증명하고, [한단고기]에 단군께서 마조선(한반도.일본열도) 단군에게 선박을 제조하라는 명을 내리고, 일본열도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마조선의 수군500여척으로 진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대부터 한반도인들은 바다를 지배한 해양족이였음을 알 수 있다. 단군조선이전부터 내려온 고인돌 무덤양식은 고인돌속에 비파청동검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단군조선시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하늘숭배신앙을 가지고 산악지역에서 수렵생활을 한 한국인들은 고인돌무덤양식을 피라미드로 변형시켰고, 초원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한 한국인들은 적석목곽분 양식으로 변형시켜서 사용했을 것이다. 
 


[KBS역사스폐셜 자료]단군조선의 상징-북방 비파청동검(몽골에서 북한 청천강이북까지 분포)
 

 

 
[KBS역사스폐셜 자료]단군조선의 상징-청동검 분포지역(요동 조양과 북한 평양에 집중 분포)

청동검은 전쟁때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벌하는데 지원한 왜왕에 대한 감사표시로 하사한 '칠지도'처럼 단군왕검을 천제로 삼는 제후들에게 하사한 통치력의 상징물이였다.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게 하는 온돌 또한 한민족의 독창적인 주거문화다. 그런데, 청동검.온돌은 만주.산동.한반도.일본열도를 제외하고는 중국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즉, 단군조선의 영역표시로 삼아도 되는 표식과도 같다는 의미다.

그런데, 비파청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된 지역이 조양일대다. 조양지역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굴된 곳은 모두 60여 곳이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모은 곳이 12대영자유적이다. 12대영자 유적은 발굴 결과 기원전 8세기경 청동기 유적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다양한 청동장식 유적들과 함께 단군조선 대표유물 비파형 동검이 발굴됐다.

이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으로 전파된 비파형동검은 이어서 길림과 한반도 북부지역(청천강이북까지)으로 확산되고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나중에 여러 가지 문화적인 중간 지역을 거쳐서 한반도북부 청천강이남부터 세형동검 문화로 확대 발전된다.

 

 
 

[KBS역사스폐셜 자료]조양지역 비파 청동검 출토 유물
 
그러니까 단군조선의 상징인 청동검의 발전과정상 세형청동검이 비파청동검을 앞설 수 없음으로 단군조선의 초기 수도는 한반도가 될 수 없고, 중국문명의 시원지가 되는 홍산배달문명이 일어난 요서지역의 요양(아사달)이라 할 수 있다. 중국문헌에도 고구려.부여족은 맥족(수렵.유목족)으로 요서지역에서 청동기문화를 일으켜 요동지역의 예족(어로.수렵족)에게 전파한 직계선조가 단군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자치통감강목]의 진왕 정(政)3년조의 기록에는 요양이 옛 조선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있고, 같은 책 원봉 2년(BC109년) 한무제 때는 요동에 왕검성이 있었고 거기가 바로 조선의 구도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군조선의 왕도도 요동에 있던 왕검성으로부터 다른데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한단고기]에도 거불단 한웅과 신시배달국의 제후국이였던 곰족의 나라 단허국왕의 공주(웅녀)사이에서 출생한 단군왕검은 곰족의 나라 단허국왕의 비왕으로 단허국왕이 된 후 9한족을 통합하여 단군한국을 개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서지역은 곰족의 문화와 바이칼 호수지역에서 남하한 한웅족의 천신숭배문화가 결합된 문명이니 마땅히 곰족의 나라 단허국은 요서지역에 위치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평양이라고 할 때는 북한 평양만을 의미하지 않고 고대에는 큰 평지를 모두 평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말 '평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럼 북한 대동강변의 대박산 단군릉의 주인은 누구인가?





 



[자료]북한 평양 대박산 단군릉
 
그리고, 북한 평양의 단군릉의 주인은 단군조선을 개국한 단군한검이 아니라, 5대 대단군 구을(丘乙)(16년간 재위)이다. 그 배경을 보면

[한단고기]에 "첫해(壬戌 - BC2099)에 명을 내려 태백산(太白山)에 단을 쌓게 하고 사자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2년 5월에 황충(蝗 )이 크게 번져 밭과 들을 덮었다. 4년에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역서(曆書)를 만들었다. 8년에 신독인(身毒人)(0)이 표류하여 동해의 해변에 이르었다. 16년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1)를 많이 심었다. 7월에 임금이 남쪽으로 순시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으니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떴다. 대박산(大博山)에 장사 지내고 우가(牛加)의 달문이 뽑혀서 대통을 이어 들어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중 <신독인(身毒人)>은 인도(印度)사람. 당시 인도에서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해로가 있었다. 고대 한반도인들은 선박술과 항해술이 뛰어난 해양족이였다. 한반도 고인돌이 그 원형인 동남아.인도.유럽.영국 등지의 고인돌문화는 바로 고대 한반인들의 항해를 통하여 전파된 것이다. 그리고 <환화(桓花)>는 무궁화(고대 중국지리서 '산해경'에는 훈화초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 북한 강동군(江東郡)에서 발굴한 대박산(大朴山) 단군릉(檀君陵)에 대한 뒷받침으로서 이보다 정확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강동군의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또한 강동현의 옛군명이 바로 송양군(松壤郡)이었다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풍류강은 대동강의 북지인 비류강으로 보아 무난할 것이다.

북한도 정치차원에서 단군릉을 이용하지 말고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남북 역사학자들이 연구교류를 통하여 9환족이 분포하여 살았던 유라시아를 포괄하는 처원에서 민족사적으로 규명해야 할 것이다. 마고-한인-한웅-한검(단군왕검)이 우리 민족에게 내린 사명이 바로 유라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통하여 한민족공동체를 형성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오로지 역사적 뿌리를 찾기위해 터키까지 역사자료를 구하러 다녔을 만큼 역사찾기에 혼신을 다했던 대진국의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과 같은 역사뿌리 찾기에 있기 때문이다.



민족정통사서 09/08/13 [09:38] 수정 삭제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한단고기 인용 서적들

세조 3년 5월 26일(무자) :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 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쳗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 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 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예종 1년 9월 18일(무술))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 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 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성종 원년 12월 9일(무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
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 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 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하였다.

아무나 볼 수 없었던 조선실록에 나온 책들의 제목이 현재 가 담고 있는 책들 제목과 일치한다. 더 이상 무슨 변증이 필요하며 위서라고 매도할 수 있겠는가?

[자료]한단고기 "위서 아니다"
http://www.khaan.net/gogi/handangogi/parkhyeon.htm



박 현 - 고대 사학과 졸, 동대학원 한국사 전공

한국고대지성사 산책, 백산서당 1995. 5.25 (페이지 66~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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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임의로 조작된 책이나 내용이 사실과 어긋나는 책은 독서의 본래 목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 가운데서 집필 시기나 필자 및 형식 등이 조작된 것을 위서(僞書)라고 한다. 그리고 형식과 상관없이 내용이 불순하거나 기록된 내용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것은 곡서(曲書)라고 부른다. 형식에서 거짓을 보이는 위서는 내용 면에서도 곡서인 경우가 많고, 곡서 또한 위서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물론 이 두 측면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서일 경우 일단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위서를 판별하는 일은 학문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왔다.

일찍이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 ~ 1928)는 "중국역사 연구법(中國 歷史 硏究法)"을 지어 위서를 판별하는 표준적인 사례를 밝혔으며, 버나드 칼그렌(Bernard Karlgren)도 "중국고적 변위법(中國古籍 辨僞法, The Authenticity of Ancient Chinese Texts)에서 위서 판별의 방법을 밝혔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대부분 그 이전의 중국 문헌학에서 이미 전통적으로 다루어오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론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서에 대한 판별은 해당 책자에 따라 방법론이 조금씩이나마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의 상고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몇 종류의 책이 이러한 위서 시비에 휘말려 있다. "환단고기"가 그 대표격이다.

"환단고기"는 과거에 여러 사람들이 지은 것을 모아서 계연수(桂延壽)라는 사람이 다시 편찬한 뒤 1911년에 처음 간행했던 기록인데 그 구성은 대개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단군시대 이전을 다루는 "삼성기(三聖記)이고, 둘째는 단군시대의 연대기인 "단군세기(檀君世記)"이며, 셋째는 단군계의 한 갈래인 북부여의 연대기인 "북부여기(北夫餘記)"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단군시대 이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평론적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태백일사(太白逸史)"이다. 이들 책이 위서 시비에 말려든 것은 우리 상고사가 공백지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기록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담고 있는 내용은 중국의 "사기"나 "상서"에서 보이는 내용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연대기와 함께 중국 한족에 대한 조선족의 우월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민취급하듯)

그 결과 동양사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이 책들은 곧 위서 시비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상당한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위서라는 판결 쪽이 현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문헌을 두루 그리고 깊이 연구하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그런 입장이 정설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필자는 같은 젊은이로서 가끔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상고사를 설명하는 처지인지라 그 진위 문제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아니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이 작업을 진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복잡한 방법을 들추어 시비를 밝히는 것은 이 책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다만 그것을 위서로 규정하는 학자들의 표준적인 견해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참과 거짓을 판별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역사 연구회 고대사 분과에서 지은 "한국 고대사 산책"의 다섯번째 주제는 "환단고기 믿을 수 있나"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서적이 위서임을 주장하는 표준적인 견해들이 두루 나타나고 있다.

첫째,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남생(南生 : 연개소문의 아들)의 묘지명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환단고기"에 나오는데 그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지어진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1923년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주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만약 남생의 묘지명이 1980년도에 발견되었다면 환단고기는 1980년 이후에나 지어진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1949년에 조작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틀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같은 사례가 있다.

대진국(대진국 : 발해는 자기 스스로를 발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항상 대진국이라고 불렀다)의 문제(文帝: 중국측 사서에서는 문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옳다)인 대흠무(大欽武)연호가 대흥(大興)이었는데 이 사실은 정효(貞孝)공주의 묘비가 발견된 1980년 이후에야 알려졌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이미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태백일사"는 1980년 이후에 조작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가 다른 기록들과 달리 독자적으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증명할 따름이다.

실제로 1920년에 간행된 책 가운데도 계연수라는 사람이 편찬 발간한 "환단고기"에 들어 있는 천부경을 인용한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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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정신철학 통편"

1920년 북경 정신철학사에서 전병훈이 펴낸 책으로 원래 제목은 "정신심리도덕정치철학통편"이었다. 이책에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입수한 경위가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동굴 석벽에서 천부경을 보고 1917년 탁본을 뜬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책에서는 그가 약초를 캐내기 위해 영변의 백산(白山)으로 들어갔다가 천부경을 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묘향산과 백산이 같은 곳임은 "영변군지"가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의 차이는 문자의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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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훈이라는 분이 저술한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1920년 간행)인데 명문당에서 근래(1983년)에 영인본으로 간행한 적도 있다.물론 이것은 1949년 조작설을 전면 부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둘째, "문화"라는 말이 Culture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은 근래의 일인데, "환단고기"에서 쓰이는 문화라는 개념이 그와 같기 때문에 위서라고 규정짓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화라는 표현이 과거에도 "문치교화(文治敎化)라는 개념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과거에도 문화라는 말이 실제로 오늘날의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되어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와같이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경우는 골수 성리학자들과 그들이 편찬한 문헌에 지나지 않았다. 또 "전세계" 라든가 "민중"이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말이지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말은 아니다. 심지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 ~ 846)는 자신의 시제목으로 "상인처세계(上人處世界)"라는 말을 썼고,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국어(國語) 월어(越語)"에서도 "민중"이라는 용어가 인민대중의 약자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시조와 관련된 영고탑(寧古塔)이란 지명이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위서 시비의 좋은 빌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선입견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동일한 지명이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낙양(洛陽)이라는 지명만 하더라도 하나가 아니다. 황하의 중류에 있는 중국의 고도 가운데도 낙양이 있으며, 경상도 상주도 그 옛 이름이 낙양이었음을 구태여 예로 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아울러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요사(遼史)"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비판자들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환단고기"의 경우 몇몇 부분은 명백히 편찬자인 계연수가 추가로 서술한 곳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은 독립운동가이며 단재 신채호 등과도 친밀했던 계연수의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단재 신채호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부분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용어를 자신의 시대에 맞추어 개작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 기록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조대기(朝代記)"등의 문헌이 전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희귀한 책들을 찾아 모으라고 명령을 내린 조선 세조 때나 성종 때, 명령에 따라 수집한 희귀본 20여종 가운데 "조대기"라는 책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 그 당시에는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성종 이후 이름을 감추고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리학에 의한 학문 세계의 순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이나 세조가 불교를 숭배한다고 목숨까지 내걸고 반대하던 성리학의 천박한 추종자들이 성리학 이외의 기록과 그 기록의 내용을 배타적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흔히 "도가의 역사서"라고 불리는 이 같은 기록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라지거나 개인 소장가의 장농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이론적 라이벌이었던 윤휴(尹휴, 1617 ~ 1680)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주자와 소중화사상을 배격하고 단군 시대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 기록이야 어찌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고대사 산책"의 해당 주제 필자는 특별히 숨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반문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찌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지하활동을 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숨어서 활동을 하느냐?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 이 비판자의 주장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지나칠 수 없다.

(민족사서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빨갱이 색출보다 훨씬 심했다)

사실상 현재 제기된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주장은 가상의 논리를 가지고 시비를 붙자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적 자료와 고문헌을 엄밀히 검토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송찬식(전 국민대)씨는 대종교의 교리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위서 시비를 걸었고, 박광용(성심여대)씨는 기독교 사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시비를 걸었으며, 이기백(한림대)씨는 청동기 시대 국가이론을 근거로 시비를 걸었다. 아직도 위서를 주장하는 견해에는 이런 개념 싸움에 그치는 유치함이 가시지 않고 있다.

어떤 문헌을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엄청난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지 않다면, 이런 류의 시비는 그만두고, 역사적 자료를 중심으로 깊이 있고 분명한 근거를 내걸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박광용씨의 경우 기마종족 연맹의 과거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이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옹호와 연결된다고 하는 주장["역사비평" 10] 까지 내걸고 있으니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경우, 모든 기마종족을 같은 동포라고 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며, 실제 그 시대의 현실이 그와 같았으므로 외형상 대동아 공영권과 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등의 내용은 평등한 민족(종족)연맹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종족의 패권주의적 식민체제를 가리키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의 지식이 역사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그런 논쟁이라면 어떤 비판에도 이 기록의 진실됨이 손상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과 함께 나름대로 엄밀한 분석을 거쳐 필자는 이 기록을 사용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현실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것을 사실 규명의 주요한 자료로 채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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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문 현상 기록들의 정확성

13번째 단군 흘달 50년(단군 왕검 1년을 BC 2333년으로 했을 때에 BC 1733년)에 오성이 모였다는 기록은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나와있으며 서울대학교 박창범 교수의 시뮬레이션에 의해서 사실임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는 일식현상이 10군데에 나오는데 모두 사실임이 밝혀졌다. 게다가 썰물 현상 기록까지도 정확하게 시뮬레이션과 일치했다고 한다. 이런 썰물 현상을 후대에 임의로 넣어서 우연히 4년 이내에 있을 확률이 0.04%라고 하며 오행결집 현상을 임의로 넣어서 1년이내에 있을 확률은 0.007%라고 한다.


http://www.eurasiad.com/handan_astro.html(자료 전문)


2. 만주, 한반도내의 청동기 시작 연도

기존의 청동기 시작연도는 현행 국정 국사교과서에 보면 서기전 1300~1000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강단 사학계에서도 당연히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고인돌 무덤)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한단고기에 기록된 단군 왕검 1년이 서기전 2333인 것으로 볼 때에 단군 조선 이전 부터 이미 청동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주, 한반도내의 청동기 시작이 서기전 1000여년 정도로 알고 있던 시절에 유물도 없이 임의로 청동기 사용 시기를 2500년경으로 기입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태백일사에 나온 연개소문 조부에 대한 내용 및 대진국 연호 "대흥"

태백일사에 보면 연개소문의 조부 이름이 자유(者遊)라고 나와있다. 그런데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이 자유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천남생 묘지가 발견된 후의 일이며 태백일사 외에 다른 사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1923년은 계연수가 죽었다고 알려진지 3년이 지난 후이며 당연히 태백일사가 엮여지고 난 후의 일이다. 그런데 위서라면 어떻게 그 이름이 자유인 것을 알았다는 말인가?

(내용 추가 부분)
그런데 일부 우매한 자들에 의하면 천남생 묘지가 1923년에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한단고기가 1940년대에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에서 비문 중 연호 "대흥"이 나왔는데 이는 대진국 문황제 흠무의 연호이며 이를 기록한 우리 사서는 오직 태백일사뿐이니 그 사료적 가치가 확실히 나타나는 바이다. 비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4. 한글 창제의 원리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세종실록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창호지 문틀에서 나왔고 세종대왕님께서 창제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례본이 발견되기도 전에 이미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에는 가림다의 원형이 나와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분명 한글은 옛조선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라고 나와있는데 세종실록을 구경도 못했을 사람들이 임의로 가람다를 지어서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에만 넣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5. 비파형 동검 발견 지역과 한단고기에 나온 고조선 영역의 일치

설명이 필요 없다. 한단고기에 나온 고조선의 영역이 현재 비파형 동검 발견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역사관에 빠진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유물까지 한단고기와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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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더 이야기 하고 싶지만 나의 생각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글이 있어 이렇게 올려봅니다. 위의 내용은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존칭을 생략함을 알려드립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하 인용문-



이 세상의 무수한 역사서들이 편찬자의 숨은 의도에 따라 일부는 윤색되고, 일부는 진실로 채워져 있다는 평범한 상식을 자각한다면, 한단고기가 일부 첨삭/윤색되어 위조된 일면이 눈에 띈다 하더라도 책 내용 전부를 가타부타 없이 무조건 위서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만일 이런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소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사로 정평이 나있는 라는 것도 위서라는 평가를 면치못할 것이고, 또한 중국의 21사라는 것 역시 위서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신화적 사건이 상당 부분 나타나고, 중국의 21사에도 역시 그와 유사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논리에 앞서, 민족의 일원이라면 이민족의 사서가 아닌 우리 민족의 사서에 대해서는 일단 먼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해야 하며, 단지 그것의 진위를 밝히려는 고증의 노력이 뒤따르면 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고증해보는 노력은 비켜두고, 그 동안 배워온 얄팍하고도 잘못된 지식에 터잡아 막무가내로 위서라고 매도하는 것은 양식있는 학자의 자세라고 결코 볼 수 없다. 결국 한단고기에 대해 일부 가필/윤색된 부분만 유독히 확대곡해하여, 책 전체를 위서로 몰고 가는 일부 국내학자들은 반민족적 역사가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현재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학계에서도 ‘아시아의 비사(秘史)’라고 놀라고 있 는 사서임을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사적(史的) 고전으로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정도밖에 알지 못했던 일본인들은 이 라는 새로운 고기(古記)를 알게 되면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이 책은 만몽(滿蒙)에서 중국 및 서역(西域)까지 비춰주는 주옥(珠玉)의 지보(至寶)이다."라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호머의 일리야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기사를 읽고, 트로이라는 도시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30년이 넘는 노력 끝에 마침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 냈던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쉴리만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바로 이러한 긍정적, 인내적 자세를 가지고 한단고기를 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굳이 일부학자로부터 위서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한단고기를 홈페이지에 올리게 되었음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http://www.khaan.net/gogi/handangogi/handangogi.html
단군한검천황 09/08/13 [10:00] 수정 삭제  
  1.단군-배달국 사와라 한웅천황 때 곰족의 사람 를 단허국의 제후로 임명하였다. 는 신시배달국의 제후국 단허국을 번성시켰다. [한단고기]에는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단허국의 위치가 아마도 요서지역의 조양지역이라 추정된다. 단허국 왕을 한자로 표기하면 [단군]이다. 순우리말로는 다. 몽골에는 다. 따라서 배달국 시대나 단군조선 시대의 수 많은 제후들은 통치자와 제사장을 역임했다. 그래서 모두 당골래였다.


2.단군한검-단허국의 왕을 이라고 했는데, 배달국 말기에 거불단 한웅천황과 이 단허국 왕의 공주(웅녀)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를 우리는 이라 부른다. 이 단군한검은 14세부터 단허국 부왕으로 통치하다 외할아버지 단허국왕이 죽자, 단허국왕에 오른다. 그래서 단군한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라고 할 때에는 천황에 오르기 전의 직책명이니 구분해서 불러야 할 것이다. 거불단 한웅천황이 단허국왕의 공주를 황비로 맞아서 단군한검을 낳은 것 보면 당시 단허국의 위상자체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단군한검천황-천황은 모든 제사장과 통치자들의 최고 지도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라시아 전역을 통치하는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최고 통치자의 명칭은 인 것이다. 배달국 말기에 거불단 한웅천황의 아드님으로 9한족의 추대를 받아 에 올라 도읍지를 아사달(조양:고고학적으로 한반도 세형청동검보다 앞서는 비파청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지역=중심지역)에 정하고 단군한국을 열어 영역을 마.번.진한으로 나눠 진한지역은 단군한검천황이 직접 통치하고 2지역은 웅백다(마한:한반도+일본열도)와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번한:요서-양자강지역)에게 대리 통치하게 했다.

4.국호의 변경(단군한국.단군조선.대부여)-단군한검천황은 나라를 열면서 국호를 이라 했다. 그래서 마.번.진한이라 부르는 것이다. 소태 천황의 천황위임에 불만을 품고 쿠테타로 천황에 오른 22대 단군 색불루 천황(고고리 시조 고등의 손자)은 국호를 으로 바꾸고 백악산아사달(녹산=장춘)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 8조 법금을 만들어 조선의 백성이 스스로 더 엄격하고 나태하지 않고 부지런한 삶을 살도록 하였으며, 황하상류지역에서 동이족이 거주하는 산동지역으로 세력을 뻐치는 중국의 은나라를 응징하고 양자강까지 단군조선의 통치력을 확고히 했다. 백민성 욕살 출신의 구물 단군천황은 반란을 진압하고 천황에 올라 장당경(심양=개원)으로 수도를 정하고 국호를 대부여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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