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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권력변화와 동·서방의 패권변화

신라 시조로 삼는 박혁거세는 북부여 고무서 '단군의 외손자'

윤복현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09/06/22 [00:30]

'단군조선'의 권력변화와 동·서방의 패권변화

신라 시조로 삼는 박혁거세는 북부여 고무서 '단군의 외손자'

윤복현 역사칼럼 | 입력 : 2009/06/22 [00:30]
단절과 한계가 있을 수 없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는 유.무형의 산물이다.아래 역사칼럼자료가 국가주의를 초월하여 역사라는 큰 틀에서 아시아 평화와 한민족 통합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한단고기]를 중심으로 고구려.백제(일본).신라 개국 시조들의 뿌리와 혈통을 추적한다

▲ 단군 3조선의 영역
우리는 흔히 부르는 단군조선은 22대 색불루 대단군때 단군3한국(마한.번한.진한)를 변경한 국호다. 국호를 한국에서 조선으로 변경했다는 건 권력지배층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모수의 북부여를 접수한 고두막이 골본부여로 변경했고, 고두막의 골본부여를 접수한 고추모가 고고리로 변경한 배경이다. 따라서 통치권자와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군왕검보다는 단군한검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고, 단군한국은 1대부터 21대 소태 대단군까지의 국호이며,단군조선은 22대 색불루 대단군부터 구물 대단군이전까지의 국호이며, 구물 대단군때부터는 부여라고 변경한다. 따라서 해모수와 고두막과 고추모의 북부여.골본부여.고구려는 단군조선의 연장선에 있는 나라들이였다.
 
단군부여.고구려(대진국=발해,백제=일본)의 지배층인 고씨족은 3한에서 3조선으로 변경한 단군조선 22대 대단군 색불루부터 단군조선의 권력을 장악한다. 색불루는 고구려가 시조로 삼는 고등(은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우현왕에 오름)의 손자로 21대 소태 대단군를 보좌하는 우현왕이다. 소태 대단군이 수유족(서우여=수유=선우) 출신의 좌현왕 기우여(기자)을 당시 국정총괄하는 5가의 만장일치 추대방식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22대 대단군 후계자로 찜하자, 색불루가 시정을 요구했고 소태 대단군이 듣지를 않자,쿠테타를 일으켜서 3한국을 3조선으로 변경하며 대단군에 올랐다. 이 때가 BC1200년 경이다. 이에 기우여(기자)가 마한(한반도)세력과 연합하여 색불루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패배하고 번조선 단군에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 번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부르게 되고 기우여(기후=기자)가 기자조선의 1대 단군이 되는 것이다. 기자조선은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망하자 번조선 지역으로 망명 온 은나라 신하 기자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1대 소태 대단군의 좌현왕이였던 기자(기우여)의 번조선을 의미한다.

▲초원지대와 황금족 스키타이족(흉노)

한나라를 굴복시키고 중국을 지배한 흉노족도 단군조선처럼 대단군과 같은 선우를 보좌하는 좌현왕과 우현왕 제도를 두었다. 이것은 고씨족 색불루에게 단군조선의 권력을 빼앗기자 반기를 든 수유족(선우족)이 단군조선의 통치권을 이탈하여 초원지역으로 나가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유(선우)족 출신인 기후(기자)가 색불루에게 굴복하고 단군조선의 통치권에 머물렀다면 반기를 들고 초원지역으로 나가 성장한 후에 BC800년 경에 알타이산의 금으로 금장식을 하고 유럽에 나타난 아시아 유목민족 스키타이족(흉노)이 바로 수유족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이후 훈족.돌궐.거란 등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하는 유목민족으로 성장한다.
▲ 왼쪽지도는 중국 한나라를 굴복시키고 지배했던 흉노(수유족) / 오른쪽 지도는 한나라의 흉노토벌과정에서 투항한 흉노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 세력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15년간 중국을 지배하다가 다시 한나라의 광무제 세력에게 멸망당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의 번.진한지역으로 들어와 번.진한의 권력을 장악하고 신라와 가야로 성장하다 가야는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에게 결국 접수되었고, 고구려를 이용하여 한강지역을 접수한 신라의 나제동맹파기에 분노한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에 국운자체가 위기에 몰린 신라는 결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지역은 당나라와의 합의에 따라 당나라에게 이양했으나, 대조영을 중심으로 일어난 고구려부흥군이 대진국을 개국하고 고구려 지역을 회복함으로써 결국 남북조 시대를 이루었다. 대진국은 신라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고, 백제멸망 후 수 많은 백제황족들과 유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개국한 일본과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22대 색불루 대단군부터 47대 고열가 대단군에 이르기까지 단군조선과 부여.고구려(대진국.백제=일본)의 지배권을 행사하며 동방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고씨족과 서방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던 흉노족의 일부가 한반도 진한 지역으로 들어와서 성장한 흉노(선우족) 김씨족의 신라가 고구려.백제(일본)과 서로 이질성을 느끼면서 대립.갈등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 될 것이다.
 
신라가 시조로 삼는 박혁거세는 북부여(골본부여) 고무서 단군의 외손자다
 
진한에서 신라로 성장하기까지 신라는 크게 진조선 유민세력과 부여의 박혁거세 세력과 김씨 흉노족 등의 3세력으로 형성되어 성장했다. 진조선 유민들로 형성된 진한6부락(촌)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북부여를 떠나 동옥저에서 배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진한의 왕이 되었던 박혁거세가 [삼국사기]에는 신화적 표현으로 신라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으나, 반면 박혁거세를 개국시조로 부정하는 흉노 김씨족의 후손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은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까지 집어 삼키려던 당나라를 고구려.백제유민들과 손잡고 몰아낸 다음(사실은 당시 토번이 당나라의 수도까지 위협한 위기상황에서 당나라를 보존하고자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킨 것이다) 한반도 이남지역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문무왕비문에 '투후'(중국 한나라때 투항하여 한무제에 충성하고 김씨족이 집단거주하는 금<김>성지역의 제후였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와 문무왕의 15대 조 성한왕(신라의 첫 김씨 왕이 된 미추왕)을 기록하여 자신들의 뿌리가 흉노족임을 밝히면서 신라를 개국한 태조로 성한왕을 내세우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라 문무왕비문. 중국 한나라 한무제때 투항한 김일제를 의미하는 투후가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개국의 태조를 박혁거세가 아닌 15대 성한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15대 성한왕이라면 김씨족에서 처음 신라왕에 오른 미추왕으로 볼 수 있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 전7엽’이라는 암호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투후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라는 뜻. 그리고 ‘7엽’은 일곱 개의 잎사귀, 즉 7대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15대조 성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여 신라의 성한왕으로 이어졌다는 의미가 된다.

[후한서][동이열전][삼국사기][한단고기]내용을 종합해 보면 한반도 동부지역에 진한을 개국한 진한인들은 진시황의 노역을 피하여 진조선 유민들이 한국(한반도)으로 유입되었다. 아마도 산동지역에서 서해바다를 건너 경기도 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은 위만에게 기자조선을 빼앗긴 후에 바다를 건너 단군3조선 중 마한땅이였던 한반도 북부 평안도 지역에 정착한 기자세력이 결국 마한토착세력에게 밀려나게 되자,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하여 마한을 개국하였고, 기자조선의 기준왕의 왕통도 끊어지자 기준세력의 상장군 탁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기준세력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개국한 마한이 진시황의 노역을 피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피신해 온 진.번조선 유민들에게 경상도 지역에 거주할 땅을 주어 만주를 중심지역으로 삼았던 단군3한의 모형을 따라서 진한과 번한을 개국하게 하고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 왕노릇을 했던 것이다.
 
박혁거세 세력이 진한으로 들어 오기 전에 진한은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지금의 읍단위의 54개국을 거느린 마한에게 마한의 동쪽(경상도 지역)지역을 분양받아 진한6촌을 형성하고 마한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살았다. 이후 부여의 박혁거세 세력이 참여하면서 진한세력이 점점 성장하여 서라벌(경주)을 도읍으로 삼아 진한을 개국하였다. 이 때 사로6촌장들의 만장일치(화백제도)로 왕으로 추대된 박혁거세은 누구인가?  혁거세의 출생의 비밀은 [삼국사기]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형식으로 감추고 있으나, [한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 高句麗國本紀]에서는 정확히 밝혀 주고 있다. 그 내용을 보도록 보자.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抵辰韓奈乙村 時有蘇伐都利者 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十三 岐祥然夙成有聖德 於是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斯盧 (사로)의 始王(시왕)은 仙桃山(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夫餘帝室(부여 제실)의 딸 婆蘇(파소)가 있었는데,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嫩水(눈수)로부터 도망쳐 東沃沮(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辰韓(진한)의 奈乙村(나을촌)에 와 닿았다. 이때 蘇伐都利(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데려다 집에서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이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居世干(거세간)으로 삼고, 도읍 徐羅伐(서라벌)을 세우고 나라를 辰韓(진한)이라 칭하고, 또한 斯盧(사로)라고도 하였다.
 
[한단고기]기사내용을 보면 기독교의 마리아처럼 성모(聖母)로 표현처럼 부여의 제실녀(황제자식의 딸) 파소가 혼인전에 아이(혁거세)를 임신하여 부여사람들의 수군대고 의심하면서 부여황실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니 부여황실에서 쫓겨나 동옥저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경상도 지역의 진한에 도착하여 소벌도리라는 사람에게 길러져 13세에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내용이다. 혼인 전에 임신한 파소의 아들 박혁거세를 [삼국사기]에서는 밝은 알에서 태어난 인물로 신화한 배경에는 혁거세 출생의 부끄러운 비밀을 감추기위한 문학적 치장인 것이다. 성령에 의해 마리아에게서 처녀잉태했다는 예수신화도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태어난 아이의 출생비밀을 감추기위한 위장술인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미혼모의 아들들인 셈이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를 선도산 성모라고 기록했다. 이는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부여수련집단에서 활동했음을 의미한다. 신라 화랑제도에서 처음에는 여성인 원화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 박혁거세의 어머니처럼 여성 수련집단이 존재했던 것이 된다. 박혁거세의 성씨인 '박'은 "밝(박)다"에서 따 온 성씨로 우리 민족의 태양(광명)신앙에서 온 것이다.박혁거세의 아버지는 미상인데, 서기전108년부터 서기전70년까지 북부여와 한나라와의 국제정세로 보면 아마도 한나라 군사와 전쟁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거서간(居西干)이라는 말은 서쪽에 머무는 간(干)이라는 뜻이므로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서쪽을 지키던 간(干)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간은 단지 방어장이며 군사권을 가진 왕과는 차별이 있는데, 나중에 신라도 병권을 부리는 왕의 제도가 이루어진다.
 
그럼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누구의 딸인가? 피소가 부여를 떠나 온 때는 바로 고두막의 골본부여시대다. 고두막한은 서기전108년 위씨조선(기자조선)이 망하자 동명(동방의 빛)을 자칭하면서 5천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도적들을 물리치고 해모수의 부여를 접수하고, 서기전86년 북부여 단군 해부루를 가섭원으로 내 보내고 제후(동부여왕)로 봉하였다.동명성왕이 바로 해모수의 북부여을 접수한 고두막한인 것이다. 고두막한은 자신의 고향인 골본을 도읍으로 삼고 골본부여를 열었다.고두막에게는 고무서라는 아들이 있었고, 고무서에게는 딸이 3명 있었다. 아마도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고무서의 첫째 딸로 추정된다.파소가 북부여를 떠날 때 "북부여 제실녀"라고 하여 제녀, 황제녀, 황녀, 왕녀 등으로 적은 것이 아니라 제실녀라고 적고 있으므로 파소는 동명 고두막한의 딸이 아니라 손녀가 되는 것이다. 즉 파소는 고두막한의 아들인 고무서의 딸이 되는 것이다. 고무서는 딸이 셋 있었는데, 첫째딸이 바로 파소로 추정되고, 둘째딸은 소서노로서 고주몽의 둘째 부인이며, 셋째딸은 아직 미상이다.
 
고구려 개국시조 고추모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이모부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부여의 제실녀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시기적으로 해모수의 북부여를 접수하고 골본부여를 개국한 동명성왕 고두막(한=칸=안=간) 단군의 손녀이자, 고두막 단군의 아들인 고무서 단군의 딸이다. 고무서 단군에게는 딸이 3명 있었다. 두번째 딸은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고추모에게 시집을 갔다. 고추모와 결혼한 두번째 딸이 소서노다.
 
▲ 아시아 바다와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백제의 본국의 수도 충남 부여의 정림사지5층 석탑비문은 4면 모두에 새겨져 있으며, 당나라 소정방을 총사령관을 삼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성(사비성)을 멸망시킨 후에 중국 낙주 하남의 권희소가 쓰고 당 헌종 5년8월15일에 완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내용은 백제31대 의자왕,왕자 융,효등은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이하 700여명을 중국이 압송하였고 당나라는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고 당시에 백제 영토에는 24만호에 인구620만이엿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기록내용에 보면 백제 멸망 당시에 백제 영토에는 24만호에 인구620만이엿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를 한반도로만 규정했다면 이 인구가 들어설 수 없다.


백제는 백가제해의 축약어다. 즉, 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나라라는 의미다. 백가제해의 주역은 고고리(고구려)에서 나온 온조백제(한반도 남부지역의 3한 중 마한54국에 속한 백제국)가 아니고, 부여세력이지만, 동부여에서 망명하여 골본부여를 접수한 고추모를 반대하는 부여세력이라 할 수  있는 구태세력이다.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만주지역부터 고구려와 치열하게 싸워 온 구태세력이 후연과 연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를 후미에서 치기위해 평안도지역에서 나라를 개국하게 되고, 이후 서남해 해상을 장악하여 나주를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하고 있던 서남해 마한인들(왜)을 복속하여 고구려공격에 지원세력으로 삼는다.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된 <왜>의 실체다.

일본왕들의 대형무덤양식이며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은 한반도 서남해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서울한강지역(강동구)에도 10여기의 세계최대규모의 전방후원분 무덤들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해상세력(왜)과 연합하여 고구려와 한반도지역의 패권을 다투던 구태백제 황제들의 무덤들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만지역의 비류세력(어하라)을 흡수한 온조세력의 권력을 백제 고이(고리)왕때부터 접수하고 근초고황때부터 본격적으로 서해 해상로를 따라서 구태세력의 본거지인 중국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요서지역을 회복하고 중국 동남부지역과 동남아,일본지역에 22개의 제후국(담로)를 둔 아시아 해상제국를 건설했다고 할 수 있다.
소서노는 동부여의 개국시조이자 해모수의 직계손자인 해부루의 서손(손자)이였던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라는 아들을 두었고, 고추모 사이에서 온조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비류백제(어하라)를 떠나 마한지역으로 들어와 십제를 개국한 온조가 동명성왕을 시조신으로 사당에 모셨기 때문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
 
당시 동명성왕은 원조 고두막의 골본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의 고추모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온조가 우태의 아들이였다면 사당에 시조신으로 우태를 모셔야 맞다. 그러나, 고추모를 시조신으로 삼았다는 것은 자신이 고추모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동명왕묘가 고주몽을 모신 곳이 아니라면, 고두막한을 모신 것이 되는데, 온조는 우태의 아들이라면, 우태는 고두막한의 후손이 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태는 해부루의 서손이라 하므로 동명왕묘는 고주몽을 모신 것이 되어 온조는 고주몽의 아들이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태의 아들이였다면 어하라를 떠날 이유가 없다. 친형인 비류를 도와서 어하라를 번성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헤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후한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려던 부여세력(반 고구려세력)이였던 구태세력이 평안도지역에 나라를 개국하고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왜)을 접수하고 온조세력까지 통합하여 마한54개국에 속해 있던 십제(온조백제)에서 백제(구태세력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에서 100가족이 서해를 건너 한반도지역에 나라를 개국했다는 배경에서 기원한다)로 전환되면서 백제시조로 동명성왕에서 구태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백제권력세력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반도 서남해 지역(웅진=곰나루)을 중심으로 아시아 바다와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아시아 최대 강국이 된 백가제해(대백제)의 주역이 이들 구태세력이다. 구태백제와 관련한 중국문헌의 기록들을 보자.
 
[북사]와[수서]를 인용하면, “동명(북부여 고두막한)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주서』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수서』 : 동명(東明=고두막의 골본부여)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

『한원』 : 백제는 구태에게 제사하면서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파소가 박혁거세를 임신한 해는 서기전57년으로부터 13년전인 서기전70년경이 된다. 이때는 동명왕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차지하여 북부여 단군이 이미 된 후 약16년이 지난 때이며, 고두막한의 나라를 [한단고기]에서는 박혁거세가 떠나온 신라(진한)의 옛 땅이라 하므로 박혁거세는 바로 북부여 출신임이 증명된다. 파소는 박혁거세보다 약20세가 많다고 보면 서기전 약90년경 출생이며, 소서노는 고추모보다 약9세가량 많다고 기록되고 있는데 고주몽은 서기전 79년출생이므로 소서노는 서기전 약88년경 출생이 된다. 이와 같이 파소와 소서노는 자매간으로 거의 확실하게 추정된다.
 
서기전58년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북부여 고무서 단군의 둘째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은 때와 비교하면, 파소는 박혁거세를 임신한 채로 북부여를 떠나 진한으로 갔다고 보면, 고추모가 골본의 북부여에 도착하기 전인 이미 서기전 70년경에 떠난 것이며, 만약 박혁거세가 태어나고 어릴때 떠난 것이라 하더라도 박혁거세는 서기전57년에 진한의 왕이 되므로 고추모가 골본에 도착한 서기전58년경 이전에 이미 떠난 것이 되겠다.
 
소서노가 연타발의 딸이라는 기록이나 주장은 틀렸다. 그 이유는 고추모는 서기전79년생이며, 연타발은 서기전74년생으로 거의 동년배이다.연타발은 고추모보다 연하이므로, 아무리 빨리 낳아도 연타발의 딸은 고추모의 첫째부인 예씨의 아들 유리나,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 온조와 동년배 정도가 된다. 그런데, 소서노는 고추모보다 나이가 9살이나 많았다. 고주몽 시대 연타발과 동명이인으로서 서기전193년경 북부여의 상장(上將) 연타발(延타勃)이 있다.
 
결론적으로 골본부여 단군 고무서의 딸로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첫째 딸 파소, 둘째 딸 소서노, 그리고 이름이 불명인 세째딸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고추모와 박혁거세와의 관계는 고추모가 박혁거세의 이모부가 되고, 박혁거세는 고추모의 이종조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추모와 박혁거세가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와는 외가쪽(고두막)으로 해서 혈통적으로 먼 친척뻘되는 해모수는 고추모의 직계 선조다.

▲ 해모수의 직계손자 고추모는 동부여에서 북부여(골본부여)로 망명하여 북부여 단군이 되었다

북부여 7대 단군이며,고구려의 개국시조 고추모의 출생비밀
 
[한단고기]는 고추모의 출생의 비밀과 성장과정에 대해서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서기전80년 북부여의 옥저제후 불리지는 서압록 강변(요하상류=내몽골 치평 시 지역=고리국의 도읍지가 있던 지역=거란족이 개국한 요나라 수도 임황지역)에서 하백녀 유화를 만나 고추모을 임신하게 하였다. 서기전 79년 5월 5일에 유화부인이 고추모을 낳았다. 파소처럼 유와는 미혼모가 되고 고추모는 박혁거세와 마찬가지로 미혼모의 아들이 되었던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추모가 왕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웃음과 고난과 시련을 당했겠는가!

고추모의 아버지 불리지(弗離支)가 죽으니 유화부인은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熊心山. 舒蘭)으로 돌아왔다. 불리지는 옥저후(沃沮侯)로서 고리군왕(藁離郡王) 고진(高辰)의 손자이고, 고추모의 아버지가 되는 불리지의 아버지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 되고, 고추모는 해모수의 현손자가 된다.


▲ 고구려 선조들의 나라는 단군조선 제후국인 고리국-지금의 내몽골 지역으로 지도에는 '구려'. 여기를 클릭하면 자세히 볼 수 있다.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 위치한 고리국은 본래 해모수.고두막.고추모 등 고씨선조의 나라다. 내몽골지역이기 때문에 몽골과도 혈통이 같은 것이다. 고리군왕은 곧 고구려후(高句麗侯)이다. 고진은 서압록 즉,지금의 요하지역을 맡았다. 웅심산은 해모수가 고열가 대단군이 진조선의 문을 닫고 산속으로 들어가자 군사를 일으켜 부여개국을 선언한 곳이고, 북부여의 수도인 난빈(蘭濱)이 있는 곳이다. 백악산아사달 근처이며, 지금의 상춘 부근이다. 유화.고추모 모자는
사방을 떠돌아 다니다가 해모수 직계손자 해부루를 따라서 동부여(가섭원) 궁궐에서 말지기(궁궐의 말들을 관리하는 직책)로 살게 되었다. 이때 이미 고추모는 활쏘는 솜씨가 백발백중이 되었다. 고추모가 능력이 뛰어나니 해부루가 양자로 삼아 왕이 된 고추모의 동갑내기 정도의 동부여 금와왕이 혈통적으로 왕통이 아니다 보니 해모수의 직계 손자인 고추모에게 위기의식을 느낄 수 밖에 없고 죽이려 하니 고추모세력은 결국 송화강 지역의 동부여를 탈출하여 동방의 빛(동명)이라는 압록강지역의 골본부여로 망명하여 고무서의 둘째 사위가 되어 골본부여 단군에 올라 할아버지 고진이 제후로 있던 서압록지역의 고리국의 명칭을 따서 고고리(고씨족의 고리국)로 개국하니 우리가 부르는 당당한 900년의 천자국 고구려다.
사대매국DNA 09/06/24 [19:22] 수정 삭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는 김유신과 김춘추의 사대주의 행각을 한 번 읽어 보자. 625년 당태종이 즉위할 무렵 신라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모든 실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을 때이다.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으로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김춘추는 나이 60이 되었는데도 중국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와 고구려를 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모양이 측은하기 그지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임금을 당나라 황실 친척으로 바꾸라는 요구까지 수용하면서 당의 군대 파병을 간청한다. 이 사대주의의 DNA가 1,5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수시로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당은 두 가지 조건을 내 건다. 고구려를 칠 경우는 요동지방을 당에 내 주고 백제를 칠 경우에는 신라의 임금을 당 나라 황제의 친척으로 바꾸고 동시에 당나라 군대의 신라 파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647년 김춘추는 직접 당태종을 찾아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까지 치도록 애걸한다. 이에 둘 사이에 비밀 협정이 이루어져 평양 이남 백제 땅은 신라가 그 나머지 모든 땅은 당이 차지한다는 밀약이 이루어졌다.

나라를 분단해서라도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오늘날 보수우익들의 유전자가 이렇게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반도 분할 통치의 역사는 사실상 이때부터 거론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 이후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과 명이 한반도를 분단시켜 나누어 가지려 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기로 한다. 8027인가 하는 작전은 일본이 원산을 점령하고 북에서 중국이 밀려 내려오면 그 중간 지점에서 선을 긋자는 작계라는 끔직한 소리가 부디 낭설이기만을 바란다.

옷을 바꿔 입고 스스로 사대를 청해

참으로 되돌아 볼 때에 이 모든 하나하나의 사건이 모두 오늘 우리 후손들이 짊어지고 있는 수난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당태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고종이 황제가 되자 사대주의 외교는 더 극성을 부린다. 법흥왕 이후 115년간 사용돼 오던 연호를 당의 것으로 바꾸고 옷도 당의 것을 착복하기 시작한다. 복종, 복속, 항복 등 모두가 옷에 관계 되는 말이고 보면 옷을 바꾼다는 것은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춘추는 당나라를 찬양하는 사대주의의 극치인 오행시 ‘태평송’을 지어 바친다. 태평송의 내용은 당나라 황제의 위업을 훼손하는 고구려를 ‘오랑캐’라 지칭하며 단 칼에 쳐 물리쳐 달라는 내용이다. 651년 김춘추는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지명도 순 우리말에서 한자로 바꾸는 동시에 유교를 적극 도입하여 국학이란 교육기관을 세운다. 성균관의 전신과 같은 것이다. 유생들이여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가?

드디어 당 고종은 소정방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660년 백제를 향한 대 공격을 단행한다. 김유신은 신바람 났으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내가 지금 죽기를 서슴치 않고 험난한 판에 달려 온 것은 큰 나라(당)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삼국사기 42권 김유신열전)라고 의기를 토하고 있다.

진평왕은 원광법사에게 출사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없애 버리는 것은 승려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왕의 나라에 살면서 어찌 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지식인의 고뇌를 토로한다. 원효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주장하며 신라만이 아니라 세 나라가 같이 살아 평화 공존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 유명한 원효의 ‘불난 집의 비유’는 집에 불이 났는데도 방안에서 어린 아이 셋이 철모르게 놀고 있다면 수레를 사준다고 소리쳐 다 밖으로 나와 위기를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원효의 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만을 방에 남겨 두고 뛰쳐나왔고 그래서 나머지 두 친구는 불에 타 죽게 하고 말았다는 비유이다. 그렇다. 유명환-이명박은 들어라. 파산당하는 배 안에서 축배의 잔을 드는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민족 앞에 대오각성하라.

이러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두고 현대 한국의 학자들은 천추에 남을 명 외교관 그리고 충신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에 찬양을 하고 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660년 소정방의 10만 대군은 백마강을 타고 올라와 무방비 상태에 있던 백제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고구려도 668년 9월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당은 백제에 웅진 도독부, 고구려에 안동 도독부 그리고 심지어는 신라에까지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려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사대주의의 결과가 빚어낸 뼈저린 교훈을 그제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막상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선봉장이 된 사람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었다. 대당 10년 항전 끝에 고작 찾은 땅이란 대동강 이남의 것이었다. 그조차도 신라의 영토 영유권이 인정된 것은 60년 후인 736년이었다. 이제 이 한 조각 남은 한반도 한 부분이나마 중국이나 소련이 차지하면 우리 후손들은 다시 1,000년이 지나도 차지하지 못한다.

사대주의는 민족의 존립을 위협

이 얼마나 생각하고 싶지 않고 한 줄의 글로 남기고 싶지도 않은 우리 역사의 처참한 시기인가. 어찌 이 시기를 ‘통일신라 시대’ 운운하면서 칭송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우리 피 속에 만들어진 사대주의 DNA는 지금 온 몸에 퍼져 있다. 전직 국방장관들이 지금 늘어놓고 있는 장광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가 물려준 한국 사대주의 세력의 잔재가 1,50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어도 조금도 수치와 모멸을 느끼지도 않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기염을 토하고 있다.

신라 사대주의는 두 이웃 친구를 불사른 데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는 신라에게 목구멍의 가시와 같았다. 계모에게 전처의 자식은 자기의 정통성을 비웃는 존재일 것이다. 해동성국 발해는 신라로부터 721년 그리고 733년 공격을 당하였으나 의젓하게 물리쳤다. 지금 발해 유적지에 가보면 중국 정부가 1981년부터 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한 정부로 격하시킨 안내판이 버젓이 세워져 있다. 드디어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시작하여 고구려의 역사마저 자기들 것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이 모든 원죄가 어디서부터 비롯하는가? 다름 아닌 신라의 잘못된 통일 때문이다.

결국 사대주의는 우리 한민족을 종자까지 말리고 마는 독소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가 과연 1,500년 전과 무엇이 다른가? 사대주의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자주권은 한 나라의 생명줄과 같은데 이를 되찾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사대주의 가운데 극치이다. 물론 작전권을 갑자기 되돌려주겠다는 미국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지혜롭게 간파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명박 정부 1년 반이 지나가는 즈음 그의 국정 시책의 지표였던 ‘실용주의’가 그 정체를 거의 드러내고 있다. 즉, 그가 말하고 있는 실용주의란 사대주의의 다른 표현임이 분명해 졌다. 잃어버린 10년을 실용주의로 되찾겠다던 그의 약속은 미국에 ‘퍼 날리기 외교’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그가 적용한 실용주의는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 있는 남북 경협을 파산 내지 파탄 지경으로 내 몰고는, 걸핏하면 미국에 전화하고 일본에 전화하고, 전화 하다 안 되면 안달박달 달려가고, 실로 이것이 그의 실용주의 외교 방식이라면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백남주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원의 ‘이명박 정부의 대결정책이 부른 한국경제 손실’에 의하면 남북경협이 완전 차단되면 한국 경제가 입을 손실이 무려 7조 4천억 원에 달하고 8천 800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했다. 개성공단 사업이 중단되면 총 손실이 1조 3600억 원이라고 한다. 금강산 관광중단으로 작년 7월부터 손실이 1000억 달러이다. 여기서 협력 업체의 손실은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손실이고 간접적인 손실 역시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외 신인도 추락은 말할 것 없고, 미국이 강요하는 군수 물자를 사들이자면 국방비를 증액해야 하는 데 만약에 남북 화해 협력을 하면 총 181.6억 원을 줄일 수 있다. 중소기업이 입을 손실은 여기서 계산도 안 한 것이다. 여기에 남북 철도를 연결했을 때에 가져올 이익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계산에 누구보다 밝을 이명박 대통령은 왜 이 엄청난 효과를 내는 남북 교류에 그의 실용주의를 적용하지 않는 것인가? 삼척동자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유는 있었다. 그의 실용주의의 적용대상이 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명박 정부는 자꾸 자꾸 정권을 재창출하고 다시는 좌파 빨갱이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보수 우익 지지 층을 차돌 같이 단단하게 묶어 놓아야 하고, 그 방법은 북에 강경 대응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사대주의 외교를 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명박의 실용주의는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의 실용주의는 서민 경제를 위하자는 것도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것도 남북화해를 하자는 것도 아닌 철저한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임이 그 용도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바로 이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실천 과제는 무엇인가. 강희남 목사님의 유언 말씀 “이명박을 내치자”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외교는 어떤 면에서 간단하면 간단하다. 그것은 일본이 하자는 그 반대로만 하면 되고, 민초들이 퍼뜨린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일어난다”이다. 이 한 구절만 머릿속에 명심하고 실천에 옮기면 그것이 우리 외교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사사건건 그 반대로만 하고 있다. 도대체 그 지독한 사대주의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유명환-이명박 조’와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조가 있었으니 바로 ‘김유신-김춘추 조’다.

유명환-이명박 조는 김유신-김춘추 조와 닮았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참가를 해 낸 것이 무슨 큰 공로나 세운 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한 수 더 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성사시킨 것도 자기 실력 때문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이명박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모두 수훈과 전공 감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유명환-이명박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 데도 말이다. 지금 이명박과 유명환이 한 조가 되어 노는 꼴은 마치 김부식이 써 놓은 삼국사기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한 조가 되어 노는 꼴과 너무 흡사하다.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역사의 진실규명 09/06/24 [22:28] 수정 삭제  
  방송사들은 사극에 대한 시청율이 저조하다고 해서 작품성에 치중하여 완성도 높은 사극을 제작하려는 의지보다 상업주의에 매몰되는 모습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는 다큐던지 사극이던지 흥미.기교를 가미하되, 최대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명확한 교훈과 메세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성에 치중한 흥미.기교를 최우선하여 역사적 진실까지 왜곡 부정해 버리려는 사극이라면 처음부터 제작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왜곡조작하는 행위는 선조들에 대한 모독이요, 중국과 일본을 이롭게 하는 행위다. 역사전쟁은 영토전쟁과 직결되는 문제다. 얼빠진 사극제작진들이 상업성에 치중하여 중국과 일본에게 유리한 사극을 제작한다면 그들은 중국과 일본에게는 이로운 자들일 뿐입니다. 사극제작시 반드시 역사적 고증부터 확실히 하고 제작하기를 바랍니다. 역사는 진실을 추적하고 규명하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윤복현 09/10/01 [04:09] 수정 삭제  
  내용 중 추가교정:"반면 박혁거세를 개국시조로 부정하는 흉노계 선비족 김씨족(실제 성씨가 선비 모용씨인데 모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법흥왕때부터 김일제 후손의 성씨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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