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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 오월은 내게 ‘늙지 말라’ 하네요"

‘갈라진 조국에서 분단과 싸우지 않고 너는 무엇 하느냐?’

김형근 교사 | 기사입력 2007/05/18 [01:51]

"光州 오월은 내게 ‘늙지 말라’ 하네요"

‘갈라진 조국에서 분단과 싸우지 않고 너는 무엇 하느냐?’

김형근 교사 | 입력 : 2007/05/18 [01:51]

 

▲ 80년 5월 22일 광주 진압군을 물리치고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모인 시민들의 대책 토론 모습.자료사진     © 플러스코리아

원제: 80년 5월 항쟁은 이 땅에서 통일의 물결로 계승되어

                                                          - 광주 망월동 묘역에 다녀왔습니다. 


언제나처럼 망월동에 혼자 다녀왔습니다. 그간 번잡한 5.18주간을 피해 그 앞 주 일요일에 다녀오곤 했었습니다. 진입도로 양편에 좁쌀처럼 피어난 이팝나무 꽃이 5월의 비극을 더 살리는 듯 했습니다.
 
정성스레 준비한 국화송이 다발을 친구였던 이세종 열사와 박왈수의 무덤 앞에 드리고 나서 두 손 가지런히 모은 채 먼저가신 고인들의 넋을 기렸고, 젊은 날들 못다 이룬 꿈조차 함께 빌었습니다.  또 내년에는 여럿이 같이 올 수 있도록 힘과 지혜, 평안도 함께 기원하였습니다. 
 
국립묘지로 승격된 신 묘역 뒤편에는 원래 광주의 전사들이 묻혀있던 구 묘역이 있습니다. 신 묘역처럼 관리가 되지 않아 세월에 흐름 따라 비바람에 허술해진 틈이 많이 보였습니다. 아직 신원을 못 찾은 무명전사들 옆에 조성만 열사의 묘비는 약간 기울기까지 했었습니다.
 
그곳에는 투신했거나 자기 몸을 불살랐던 많은 열사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또 시위도중 맞아 죽거나 수배 중에 쫒기다 죽은 많은 애국 열사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독재 정권과 그 배후인 미국에 맞서 온몸으로 항거한 농민, 노동자들, 청년학생들...
 
김남주 시인의 묘지도 있었습니다. 시인에게는, 잘 가꾸어진 묘역보다, 생전의 모습처럼 아직 해결되지 않은 피맺힌 절규들이 떠도는 이곳 구 묘역열사들의 틈이 더 어울릴 듯싶었습니다.
 
‘갈라진 조국에서 분단과 싸우지 않고 너는 무엇 하느냐?’며, 호통을 치는 김남주 시인의 목소리가 쩡쩡 들리는 듯도 하였습니다. 
 
해가 다 저물 즈음 국도 따라 전주로 돌아 오는 길, 가다 쉬다 하면서 볼깃을 따사롭게 스치는 봄바람으로 길옆 대섶 서걱거리는 소리, 로타리친 논베미들의 개구리 소리 쟁쟁 들으면서 지난 격정의 세월들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또 이뤄야할 꿈 속에서 5.18 항쟁이 오늘 나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 오월 광주! 영화의 한 장면.     © 플러스코리아


먼저 오월은 내게 ‘늙지 말라’ 하네요. 그곳에 누워계신 님들은 파란 하늘 아래 티 없는 심장으로 오월을 살다 꽃잎처럼 가신 젊은 영령들 이었기에...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주름진 얼굴 주름진 생각을 반성했습니다.
 
세상이 열 백번 변해도 조국사랑 하나만은 가장 맑은 순수로 가슴과 가슴을 이어 내라고요.
 
오월은 우리에게 통일로 계승하라 합니다.
 
1986년 4월 28일 ‘양키 고홈’을 외치며 불꽃으로 산화해 간 김세진 이재호 열사, 1991년 4월 29일 ‘미국 놈들 물러나라’ 여학생 신분으로 몸을 태워 말을 한 박승희 열사!... 

 그렇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미국 입니다.
 
광주항쟁을 진압했던 살인마들의 흉악한 얼굴 뒤에도 미국이 있었고, 허리 잘린 한반도 상처에도 미국이 틀어 앉아 분단의 상처를 덧내고 있고, 한 나라의 군사 정치적 주권 침탈은 물론, FTA협상, 비정규직 양산 등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요하는 그 뒤에도 미국이 있습니다. 
 
미국은 한반도를 통치하면서 속임수를 쓰지요. 마치 한국에게 주권이라도 있는 양, 사대 매국세력들을 앞세워 정치판도 벌리고, 국보법과 같은 법률적 기재를 작동시켜 최소한의 자유조차 억압해 버리고 맙니다.

오늘 통신은 이세종 열사의 비문과 박왈수의 비문, 목포대 경제학과 박태영 열사의 마지막 유언 글들을 전하며 마치겠습니다.
 
“어머니
 그날!
 새날이 올 때까지
 두 손에 횃불을 들고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복판에서
 우리 불꽃으로
 활활 타오릅니다.“                          - 이세종열사 비문에서
 
“그대 비록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자유와 민주를 향한 그대의 열정은
 광주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리라.”   - 박왈수의 비문에서
 
“이 땅의 민족지성인에겐 행동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갈라짐도 분노도 저항도,
 시행착오도 피흘림도 여기서 끝냅시다.
 民主人本 ”                                        - 박태영열사 유언에서 
 
 

▲신혼 초 교사인 남편을 기다리다 게엄군의 무참한 구타로 숨진 故 최미애 열사     ©플러스코리아

☞ ♥
제목: 17일은 (1신)
보낸 날짜: sun, 23 apr 2000
보낸 이: “김형근” <ohestar@hanmail.net> 받는 이: 000
 
님!
같이 앉았던 시간이 참으로 편안했답니다.
저의 이야기 좀 할께요. 지루하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세요. 메일 한30일 분량은 될텐데요.
 
80년 4월부터 전국의 학생들이 들끓기 시작했답니다.
앞전해인79년10월 26일 그 지긋지긋한 박정희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가 잡히리라던 기대와 꿈이 전두환에게서 짓밟히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랍니다.
박정희는 4.19를 총칼로 짓밟고 들어선 그 시각부터,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본군 헌병출신의 면모를 드러내 보였지요.
제가 사회의식에 눈을 뜬 때에는 그놈의 유신헌법 통치 하에 있었고 긴급조치들이 연이어 선포된 시절이었지요.
 
유신헌법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을 따서 만든 가부장적 봉건적 충효 이데올로기였답니다. 여기에다 반공과 산업화(근대화)논리를 곁들여 막바지 통치기간 내내 채찍으로 휘두르면서 박의 잔명을 유지했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허구라는 것은 종신 대통령의 야욕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부터가 충분히 입증하고 남음이 있지요. 외자의 도입으로 이루어진 경제는 토대부터가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민중에게 아주 곤고한 삶으로 직접 다가 왔고요. 그래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던 사북탄광의 노동자들의 시위나 YH여공들의 신민당(당시 야당)당사 점거 농성 등은 목숨을 건 투쟁들이었습니다. 사북에서도 수십명이 죽었고, 신민당 당사에서도 여공 1명이 죽었으니까요.
 
9호까지 발동되었던 긴급조치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인간적 자유와 권리마저도 벽장 속에 유보시켜야 했던 무법적 권력조치들이었습니다. 민주 애국적 인사들은 예방차원으로 잡아가 두고 고문하면서 사회전체를 하나의 통제된 감옥으로 만들었지요.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등 독재정권의 촉수들은 사회뿐 아니라 학원에도 공공연한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학생 대표들의 예비 검속 설득과 회유, 불법체포와 모진 고문, 매질 등으로 저항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부산마산 항쟁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통치계급내부의 권력다툼과 총질로 박은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지요.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시내버스 속에서 친구랑 같이 들었는데요. 같이 껴안고 엉엉 울었답니다. 그동안 숨죽이며 다니던 시절을(1:1밀착 감시 속에서)떠올리며, 철옹성 같았던 팟쑈 통치자가 죽었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 땅에 민주주의가 이제나 꽃피우나 싶어 기대로 가득찬 울음이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12.12 구테타가 일어났고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했지요. 다시 군부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소박했던 우리 몇몇은 다시 거사준비를 하였고요.
그러나 경찰의 사전탐지로 주동자들만 몇몇 잡혀가고 불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 또한 기말고사 시험 중에 시험장안으로 들어온 한 떼의 경찰들에 의해 수갑에 차인 채 끌려가 고문실에 내동댕이 쳐져야 했고요. 새벽 3시까지 지독한 고문과 매질을 당하고 수사관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그곳을 탈출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생략할께요. 광주의 김현장兄(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사형선고 받고 몇 년 전에 풀려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예요.
 
방학기간 내내 수배생활이 지속되다 80년 봄학기에 학교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지요. 서서히 강화되어 가는 군부정권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고 이를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학생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이 과정도 생략할께요. 길어지니까요)그 결과 80년 4월 30일 전북대는 제일 먼저 가두고 진출하기 시작했고 경찰들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저는 학생측 야전사령관이었답니다. 낮에는 밖에 나가 시위를 하고 밤이면 철야농성을 하면서 다음날 전투계획을 세웠습니다. 전투의 목표는 ‘전두환이 물러날 때까지’였지요. 저는 4월말부터 5월 17일까지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밤에 농성주도 낮에는 전투사령으로 직접 참가했지요.(이 과정도 생략합니다. 좀 쉬었다 다시 쓸께요)


▲광주 5.18 구묘역     ©플러스코리아



☞ ♥♥

제목: 17일은(2신)
보낸 날짜: sun, 23, apr 2000
보낸 이: “김형근” <ohestar@hanmail.net>
받는 이: 000

5월 17일 저녁 10시 30분 경이었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학생 회관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구요. 연이어 계속되는 시위와 농성으로 학생들이 피곤한 탓에 그 날은 장기 자랑 및 노래 부르기 대회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죽었던 동기가 부른 노래는 ‘산장의 여인’으로 기억됩니다. 시민들로부터 익산에서 공수부대가 학교를 향하고 있다는 제보가 연이어 들어왔습니다. 학생 회관 2층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저는 서둘러서 대책 마련를 위해 지도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 도망간 게지요. 원래 명망가들은 그래요. 학교에 남아 있었던 지도부 중에 저하고 김00 둘이서 향후 진로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먼저 연락 관계에 있던 고려대 학생회에 전화를 했는데 교환아가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다 잡혀갔으니 어서 피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저는 남자고 했습니다. 우리 둘이 의견이 대립되어 막바로 농성장에 남아 있는 학생 40여명의 전체 의견에 부쳤습니다. 남아 싸울 것인가? 피할 것인가? 이것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당시 우리들은 조직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흩어지면 다시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농성장에서 짧은 시간에 여기저기 한숨과 함께 군인들의 동태와 상황 설명이 이어졌고, 학생들의 의사 표시가 있었습니다. 의사 표시 전에 저는 이미 지금 나가도 잡히고(통행금지가 10시였음) 저놈들 군화발 아래 학교를 내주게 되면 다시 우리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학교를 지키다 죽자는 요지의 주장을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전부 만장일치로 찬성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을 준비했지요. 여기서 싸우자. 여기서 싸우다 죽자. 무기를 모으자. 화염병. 식칼. 소화기. 봉 대 등 학내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순식간에 모아졌습니다. 그 다음 로비에 책걸상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보초를 정문과 옥상에 2명씩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죽기를 결의하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습니다. 시간을 보니, 12시가 넘어갔습니다. 사투를 기다리는 긴 침묵의 시간...
 
학생 중의 한 명이 술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술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술이 없었습니다. 누가 학교 앞에 술 가게에 다녀올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미 공수 부대가 포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죠. 저와 제일교회 대학부 회장이었던 후배(이름이 기억 안남.) 한 명이 어쩔 수없이 같이 술을 사러 나갔습니다. 혹시 몰라서 우리도 잠행을 했지만 아직 교문 밖에 공수 부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술 가게 할머니를 깨워서 대됫병 소주 2개씩을 사들고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휘엉청 달 밝은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 벌써 20년이 흘렀네요. 사랑과 미움이 하나될 정도로 긴 세월이... 여기 삶에 정을 못 붙이고 욕처럼 삶이 이어졌죠. 그래서 저의 삶은 좌충우돌이었답니다. 이따위 글 몇 마디로 어찌 님에게 지난 삶을 다 전하리까마는 그래도 붉디 붉은 이야기 조금만 더 이어 볼께요.

학교 밖으로 뽕나무 밭이 이어졌지요. 그래서 교문 밖에 나설 때 뽕나무 그림자가 선명했는데, 그것이 공수부대원인 줄 알고 둘이서 한 번 엎드렸다가 살피고 나갔었습니다. 뽕나무 밭을 자나면 교문인데 갑자기 바로 옆에서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탱크와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쓰리쿼터가 학교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탱크가 3,4대 군인들이 300여명이나 됐을까? 저하고 후배(제일감리교회회장 농대2년)는 순간 뽕나무 밭에 엎드렸습니다. 곧이어 학생 회관 농성장에서는 아비규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옥에서 나는 소리라고 할까요? 대검으로 머리를 빗겨 찔리운 여학생(살았음). 허리 부러진 학생, 보초 나갔다 맞아죽은 학생 등등 후에 자세한 진상을 알았지만 그때는 다 죽이는 줄 알았습니다. 저의 눈앞에는 정문에 8명의 군인이 배치되어 여기저기 총을 겨누며 총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총에 꽂아놓은 칼이 달빛에 반사되어 잔혹함을 드러낼 때 악마들처험 보였습니다. 옆에서 같이 땅에 붙어있는 후배에게 저 보초 군인들을 죽이고 총을 뺐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부터가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가 싸워야 되는데 땅에 엎드린 채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소리 없는 분노의 눈물만 펑펑... 아, 하나님! 당신이 계시기나 한가요?

그리고 먼동이 틀 무렵, 학교 주위에서 자취하고 있던 김학산 선배(사대부고 영어) 집에 찾아 들어 목을 놓고 울었답니다. 선배와 같이 자던 백학윤 선배(남원여고 체육)가 이불을 층층이 덮어 소리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답니다. 얼마 전 들은 이야기인데 ‘저 놈들이 다 죽이다’며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더는 못 쓰겠습니다. 목이 메어서... 무심한 태양은 5월 18일에도 떠올랐겠지요.



▲     ©플러스코리아



☞ ♥♥♥

제목: 17일은(3신)

보낸 날짜:  sun, 23 apr 2000

보낸 이: “김형근” <ohestar@hanmail.net>

받는 이: 000


그 날 이후(여러 차례 시위 기도와 광주 잠입 과정은 나중에 마음이 허락하면 들려 드릴께요.) 저의 삶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땀 한 방울까지라도 싸움으로 보냈습니다. 학살자의 손에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미국 놈들은 전두환을 지원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소위 원로라는 사람들은 전두환 정권을 위해 조찬 기도회를 열고 방송으로 질서를 떠벌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허접 쓰레기 같은, 아침이 되면 사라질 이슬처럼 한 줌도 안되는 자들에 의해 역사가 피투성이로 들어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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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말에 체포되어(이 부분도 이야기하기 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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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감하고 막바로 강제 징집되어 끌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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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간첩 교육이라는 녹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녹화 교육은 빨간색을 파랗게 만든다는 것이죠. 말이 교육이지 고문에다가 회유에다가 피투성이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보안대 지하실에서 보낸 긴 세월도 이야기하기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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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과정에서 80년 5월에 대한 치열한 분석과 자기 반성이 있었고 결국은 미국놈 몰아내는 일과 민주주의 질서를 세우는 일, 우리 시대 모든 악의 원천인 분단 구조를 통일 구조로 전변시키는 일에 청춘을 다 바치는 것으로 살아남은 자의 속죄를 대신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직이라는 것도 꾸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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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 체포, 투옥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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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학생 조직이라는 것이 남한의 2중 3중의 폭압망 속에서 아주 허실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지금은 어느 조직도 없습니다. 아니 있네요. 전교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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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삶도 꾸려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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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마지막 징역생활 출감을 할 때 더는 징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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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삶에서 평안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모진 탄압도 받았겠지만요.)진즉 죽었어야 하는 건데 ‘덤으로 사는 삶’인 까닭이지요. 저의 삶이 휴식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일에 맞춰진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세워놓은 질서(가정이라든가 학교라든가)가 모두 저에게는 헛 것이구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에요. 님과 같이 있으면 편안해지니...

너무 긴가요? 이만 줄이지요. 5월 17일 이야기 마무리 할께요. 해마다 5월 17일이 되면 미쳐 버렸습니다. 독한 술로 하루를 보내고 故 이세종(죽은 동기) 묘비 앞에서 혼자 펑펑 울고... 근 20년간! (보상이 다 되었지 않느냐고요? 저는 거절했습니다. 이 부분도 나중에 마음이 허락하면 들려 드릴께요.)그래 이제는 더 이상 짐을 벗자며 억지로 이번 5월 17일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17일은 님의 생일이라고 우기네요. 다른 날 잡아요. 가슴이 미어지는 날이거든요.

Auf widersehen! deiner 曉 凉 
 
[김형근 교사는 전북 군산 동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남북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있는 선생입니다. 전북 임실군 관촌중 재직시절에는 남북 통일열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북녘 학생들에게 편지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여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주목을 받았던 선생이었습니다. 2005년 5월 28일경 지리산에서 개최된 시민재야단체가 주최한 '통일열사 추모 전야제'에 학생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1년 6개월 후  '일심회' 간첩단 사건이 터지자, 조선일보는 2006년 12월 7일경, '빨치산 추모제에 학생들을 인솔한 전교조 교사'라는 터무니 없는 왜곡 기사로 인해, 공안당국은 국보법 위반 여부가 있는지를 가리기 위해 집과 학교에서 김교사가 소지한 물품은 물론 가족들의 물품을 압수하고 현재도 조사를 받고 있는 몸입니다. 
 
김형근 교사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상을  신청하라는 정부와 단체의 권유에 대해서, "5·18 및 민주화 보상과 관련해 전혀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받고자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민주화 과정의 고통스런 세월을 돈과도 바꿀 수 없다는 믿음과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그 이유 입니다"라고 자신의 굳은 신념을 밝혔던 선생입니다.]

오월의 노래 -권 연수- 黎 明™ http://writer.b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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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량 07/05/19 [00:14] 수정 삭제  
  플러스코리아 관계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월 광주는 이렇게 산자들 마음 속에 늘 되살아 나고 있습니다. 아프지만... 희망으로...
해상이 07/05/19 [08:29] 수정 삭제  
  죽어도 죽지 않는 혼으로 광주는 한반도에 살아 있습니다.
정관장 07/05/19 [11:49] 수정 삭제  
  산자들의 몫을 위해 노력하시는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 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리 ...

광주는 이제 세계사에서도 훌륭한 성지가 되도록 국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나도한마디 07/05/19 [19:30] 수정 삭제  
  5.18은 년년이 행사하면서 얼마남지도 않은 6.25참전유공자들 월 70.000원식 주는 것 정당한 보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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