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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고운 시만 쓰고 살까?"

강인선 | 기사입력 2008/03/29 [15:49]

이해인 수녀.."고운 시만 쓰고 살까?"

강인선 | 입력 : 2008/03/29 [15:49]
6년 만에 시집 '작은 기쁨'을 낸 이해인 수녀(63)를 인터뷰하기로 해놓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세상과 격리된 수녀원에서 곱고 예쁜 시만 30년 넘게 써온 수녀에게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이해인 수녀와 첫 통화를 한 후엔 빨리 만나고 싶은 기대가 생겼다. 수녀원 찾아가는 길을 설명해주는 그의 목소리에선 활력이 넘쳤다. 수녀원이 아니라 자갈치 시장으로 전화를 건 듯한 기분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이 사람이 정말 시 쓰는 이해인 수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 이해인 수녀가 수녀원 부설 분도 유치원 어린이들과 수녀원 마당에서 달리기를 했다. 평소 바닷가 산책으로 체력을 다진 이해인 수녀에겐 늘 활력이 넘친다.
 
그의 산문집 곳곳에서 '3월은 수녀원에 인사이동이 있는 시기'라고 쓴 부분을 본 후엔 더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겪는 인사이동과는 다르겠지만 수녀원도 일종의 조직생활이다. 이해인 수녀의 실제 모습은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나왔을 때 보여줬던 종교적 경건함으로 가득 찬 이미지와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일 오후 부산 광안동에 있는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본원에 도착했을 때 언덕길에서 동글동글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이해인 수녀가 걸어 내려왔다.

이해인 수녀가 물었다.

"혹시 내가 인터뷰 요청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지 않던가요?"

그렇다고 하자 그는 깔깔 웃었다.

"사실은 강 기자가 이라크전쟁 종군취재를 갔을 때 왜 저렇게 위험한 델 갔나 싶어서 무사히 돌아오라고 열심히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 기자가 만나자고 하니까 얼른 응했지. 내가 평소엔 전화와 이메일 인터뷰를 주로 해요. 직접 만나는 건 얼마나 뜸을 들이는데."

5년 전 무사생환을 기도해준 수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그의 사무실이자 집필실인 '해인글방'에서 마주 앉았다.

―솔직히 수녀님 목소리 듣고 실망했어요.

"실망하는 사람 많아요. 차분하게 말하는 연습이라도 해야겠어요. 사람들은 제가 눈을 내리깔고 조용하게 앉아서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제가 명랑한 걸 보면 다들 낯설어한다니까요."

해인글방은 흰색 벽에 조명이 밝았다. 사방이 앙증맞은 편지와 카드, 꽃, 사진, 책으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채워져 있는데, 60이 넘은 수녀의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유치원이나 소아과 병원 분위기였다. 이해인 수녀는 얼마나 말을 길게 하는지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나질 않아 중간중간 말을 끊어야 했다.

―첫 시집을 출판했을 무렵과는 인상이 달라지셨네요.

"예전에는 제가 잘 삐치고 한번 삐치면 쉽게 풀어지지도 않는 성격이었어요. 별명이 석고상이었어요. 인생 고민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침울했지요. 그런데 수녀는 공동생활을 해야 하잖아요. 성격이 그렇게 새침하면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어서 수도생활이 힘들지요. 그래서 달라지려고 노력했지요. 요즘은 성격이 좋아졌다는 말도 좀 들어요."

그래도 원래 성격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마주 앉은 지 10여 분이 지나도록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야기는 열심히 하는데 시선은 엉뚱한 데 두고서 탁자 위의 컵 깔개며 책, 물컵을 계속 불안하게 만지작거렸다.

―꼼꼼한 성격이신가 봅니다.

"아뇨. 덜렁대요. 다림질 안 한 옷도 막 입고 올이 풀어진 스타킹도 그냥 신고 다녀요. 늘 이것저것 흘리고 다니고 그래요."

―새 시집이 나올 때마다 늘 화제가 되는데, 시인으로서의 유명세가 수도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나요?

"(유명해진 데 대한) 책임을 지려니 고달프지요. 저에게 이메일이나 편지를 보내서 수도자가 언론에 이름과 얼굴이 나면 안된다고 야단치시는 분들도 있어요. 예전엔 그런 말을 들으면 속상했어요. 마음도 많이 흔들리고요. 요즘은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답장을 써요."

―유명한 시인 수녀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지요?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제가 시간이 없다고 하면, '아니, 시에선 그렇게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더니 만나주지도 않느냐'고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재소자들 중에도 '시에선 착한 척하더니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도 안 하고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서운해합니다. 그럼 제가 미안하다고 그래요. 저는 매일 그렇게 빌고 살아요."

▲  자갈치 시장에 간 이해인 수녀가 상인들에게 요즘 장사가 잘되는지 묻고 있다. 이해인 수녀는 뒷골목과 시장에 자주 다니며 수도원 밖의 삶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 한다
 
―수녀원에서 곱게 보호 받으며 사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죠? 내가 고운 시만 쓰고 사는 거 같지요? 내가 얼마나 터프한데요. 언젠가는 본 적도 없는 중년 남자가 전화를 해서 자신도 시를 쓴다고 해요. 그러더니 자기 부인을 칼로 찔러 죽일 거래요. 그럼 제가 조용히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를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뭐요? 아저씨가 시를 쓴다고요? 그 시에서 피 냄새가 나겠군요!' 그러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야단을 치죠. 또 어떤 사람은 '아아, 순결하게 살아오신 수녀님에게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이라고 해놓곤 자기가 저지른 불륜을 막 고백하는 거예요.…."

이해인 수녀에게 전화를 걸거나 찾아와 막무가내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장미꽃을 들고 와 결혼해달라고 억지를 쓰는 청년 때문에 경찰이 달려와야 했고,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면 성공해서 갚겠다고 조르는 사람도 있었다.

"제가 '꽃의 연가'라는 시에 이 답답한 심정을 썼어요. '너무 쉽게 나를/ 곱다고만 말하지 말아주세요/ 한번의 피어남을 위해/ 이토록 안팎으로/ 몸살 앓는 나를'이라고."

어찌 하다 보니 내가 수녀님의 '세상 사는 괴로움'을 들어주고 있었다. 이해인 수녀는 "아휴, 사랑하기도 힘들지만 사랑받기도 정말 힘들어요"라고 했다.

―어느 정도까지 도와주세요?

"마더 테레사가 말씀하신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노력합니다. 제 힘으로 안 되면 다른 수녀님께 연결해드리고요."

―수녀님을 속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럼요. 기가 막힌 이야기를 지어가지고 와서 울고불고 하소연을 하면 제가 진짠 줄 알고 여기저기 연결해서 도와준 적도 있어요. 그런데 희한한 건 그런 거짓말은 나중에 다 들통이 나더라는 거지요."

―잠옷 입고 침대에 엎드려서 연필로 시를 쓰신다면

서요?

"침대에 누워있을 때 생각이 잘 나요. 예전엔 우울할 때 시가 더 잘 써졌어요. 그러니까 삶이 설레고 감사해서 그 기쁨으로 지어낸 시는 아니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기뻐서 시를 써요. 야, 살다 보니까 이럴 때도 있구나 싶어요."  

―평론가들이 수녀님의 시를 '10대 소녀 취향'이라고 해서 한동안 출판을 하지 않으신 적도 있었지요?

"제 시가 잘 팔리는 감성시집이다 뭐 그런 식으로 얘기했어요. 그럼 제 시를 읽는 사람들은 다 소녀 취향이란 뜻인가요? 독자들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때 수필가 피천득 선생께서 '고운 시를 쓰는 데 열등감을 갖지 말라'고 위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70~80년대는 현실참여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던 시절이니까요. 이젠 그런 시대가 지나가서 좋아요. 물론 저도 나름대로 현실참여를 하지요. 군인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시도 쓰고, 어떤 사고에 희생된 분들을 위로하는 시도 쓰고요."

―수녀님이 열등감을 느낄 때도 있으세요?

"앞에 나서는 데 대한 열등감이 있었어요. 수녀원은 뒷바라지하는 걸 미덕으로 아는 분위기거든요. 수녀원에 손님이라도 오면 다들 뒤로 숨어요. 그래서 제가 뒷바라지와 설거지만 미덕이 아니다. '앞바라지'의 미덕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서서 인사하고 안내도 해야지 왜 다 숨기만 하냐고 그러지요."

―수도자이면서 본래 임무보다는 다른 일로 유명해진다는 게 부담이 되지요?

"처음에 언론에 이름이 알려졌을 땐 너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어느 신문사에서 '이해인 수녀 인터뷰 해오기'를 수습기자들에게 과제로 내줬어요. 기자들이 수녀원 담을 넘어 들어오고 난리가 났어요. 그때 제가 30대 초반이었는데 얼마나 시달렸는지 기미가 생겨서 얼굴이 시꺼매졌었어요."

―수녀원처럼 보수적인 조직에서 수녀님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인이 얼마나 튀는 존재였겠어요.

"그래도 이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게 감사해요. 명예와 인기를 가져보니까 자기 도취에 빠지기 쉽겠더라고요. 하지만 공동체가 저를 보호해주기 때문에 제가 저명인사라고 겉돌지 않고 많은 수녀들 중 한 명으로 균형을 잡고 살 수 있는 거지요."

이해인 수녀는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자신의 시를 암송하는 버릇이 있다.

―지금까지 쓰신 시를 다 외우십니까?

"아뇨. 10편도 못 외울걸요. 남이 쓴 시를 더 많이 외워요."

―지금까지 시집, 산문집, 번역서에 시 낭송 CD도 내셨는데 얼마나 팔렸습니까?

"정확하게 계산은 안 해봤는데 다 합하면 최소 500만 부는 될 거라고 해요."

―거기서 나온 인세는 어디에 쓰시나요?

"인세는 모두 수녀원으로 갑니다. 인세를 받고 세금도 내야 하니까 제 본명인 '이명숙'으로 된 통장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나 수녀원 경리담당자가 관리하기 때문에 제가 직접 본 적은 없어요. 수녀가 되면서 사유재산을 가질 권리를 포기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수녀원에서 제공해주니까요. 저는 신용카드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사람들이 카드로 결제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이해인 수녀의 본명은 이명숙이다. 수녀로 서원하기 전 가톨릭 잡지에 시를 투고하면서 '해인(海仁)'이란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바다가 좋고 '논어(論語)'에 나오는 인(仁) 자가 좋아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수도생활이 40년 넘으면 어떤 깨달음이 오나요?

"수도자의 길이 긴장미와 절제미, 여유를 다 갖춘예술작품처럼 느껴져요. 수도생활을 못 견뎌서 10년 만에 포기하고 나갔으면 몰랐을 기쁨과 느낌을 요즘 알게 됐어요.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은 덕이란 것도 깨닫게 됐지요. 제가 하느님이라도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라지 스스로를 달달 볶으며 괴롭히는 걸 바라겠어요? 이 단순한 걸 깨닫기 위해 난 왜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혹시 이 길을 택하신 걸 후회하신 적은 없으세요?

"사람들이 꼭 그 질문을 하더라고요. 수도자가 아니면 내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요. 그러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제 선택을 후회한 일은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수녀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가 많지요?

"제가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수녀란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써보라고 했더니, '고독, 순결, 봉사, 희생, 절제, 극기'라는 단어들이 나왔어요. 행복이나 기쁨이 떠오른다는 학생은 없더군요. 하긴 택시 운전사가 저보고 얼굴이 그만하면 그냥 결혼해서 잘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수녀가 됐냐고 한 적도 있으니까요."

―힘들고 외로워 보여서 그렇겠지요.

"저희도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지내요. 무슨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서 수도생활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세상살기가 어려워서 다들 진짜 열심히 살잖아요. 오히려 저에게 수도생활을 하면 밥 굶을 걱정 없고 정리해고 당할 일도 없으니 좋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말 들으면 참 민망하지요."

사진도 찍고 바람도 쐴 겸 해서 이해인 수녀와 자갈치 시장에 갔다. 차가 달리는 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이해인 수녀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밖에 나오면 간판이 재미있어서 열심히 봐요. 저거 보세요. 속눈썹을 연장해준다는 광고판! 주근깨와 기미, 주름을 없애준다는 간판이 저렇게 많네요. 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없어도 사람은 죽어요. 주름은 없지만 정신은 망가질 수도 있고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세요?

"6·25 때 서울이 불타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은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하고요. 저라고 왜 허영심이 없었겠어요? 저라고 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꿈꿔보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언니가 수녀원에 들어가는 걸 보고, 결혼도 아름답지만 수도자의 길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쓰신 시는 너무나 절절해요.

"수도자들이 인간적인 슬픔에 연연하면 안 되지만 어머니가 많이 그립습니다. 95세에 돌아가셨는데 오래 사셔서 함께한 시간이 기니 더 그리운 것 같아요. 어머니는 산처럼 과묵하고 강인한 분이셨어요. 어쩌면 수도생활이 더 맞는 분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세상과의 인연은 어느 정도 유지합니까?

"저희들은 부모님도 찾아뵙고 가족들의 경조사에도 가요. 휴가도 있으니까. 사랑을 전하기는 하되 매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수도생활을 40년쯤 하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조절이 돼요. 가족에 대해서도 관조할 수 있고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도 가족처럼 느낄 수 있어요. 사람들과 적절히 연대하며 또 적당히 멀리하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과도 사귀어야 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시간을 따로 떼어놔야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일기를 쓰거나 텅 빈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자기 점검을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과 친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남도 사랑할 수 있어요. 메모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자기가 자기를 안내해주고 돌봐야 합니다."

수녀원의 저녁 기도 시간이 다가와서 우리는 근처 칼국수집에 가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해인 수녀는 오르막에서도 발걸음이 가볍고 빨랐다. 광안리 바닷가를 부지런히 산책한 덕분인 모양이었다.

하룻밤 자고 가라는 청을 뿌리치고 수녀원을 나섰는데,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다음에 꼭 재충전하러 오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이해인 수녀 눈에는 내가 고달파 보였던 모양이다. 내 눈엔 수녀님의 삶도 만만치 않게 힘들어 보였다. 수도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우리 사는 일이 다 도 닦는 일 아니었던가.

→이해인 수녀는?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녀이자 시인이다. 1964년 수녀원에 들어가서 1968년에 첫 서원(誓願)을, 1976년에 종신서원을 했다. 1976년 '기도는 나의 음악/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으로 시작하는 '민들레의 영토'란 시로 주목받은 후 '작은 기쁨' '작은 위로' 등 시집 9권, '두레박' '꽃삽' 등 수필집 7권, 번역서 8권을 냈다. 최근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 가족 최고의 식사'란 동화책을 번역했다.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고 1965년부터 부산 광안동 수녀원에서 지내고 있다. 필리핀 세인트 루이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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