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칼럼]민족의시원 백두산 천지에가다

[국외연수기 특별상作] 홍콩을거쳐 다시 백두산을 오르고 오사카로

김윤호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09/09/07 [07:56]

[칼럼]민족의시원 백두산 천지에가다

[국외연수기 특별상作] 홍콩을거쳐 다시 백두산을 오르고 오사카로

김윤호 논설위원 | 입력 : 2009/09/07 [07:56]
▲ 흑풍구에서 본 장백폭포. 10여년 동안 해마다, 철마다 백두산을 찾아 백두산의 사계를 카메라로 기록하고 있는 사진작가 이정수씨의 작품입니다.   © 이정수 사진작가


<민족시인 해원 김윤호 선생의 글은 1990년 8월 4일 부터 15일 까지 교육부 산하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주관한 대학원생 국외연수에 참가하여 쓴 연수기로서,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한 전국대학원생 국외연수 소감문 발표회에서 특별상(1등)을 받은 글입니다. 특별상의 부상(국비)으로 1991년 1월, 영국 동독 서독 폴란드 소련  등을 다녀왔습니다..>

1. 떠나면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사람마다 여러 가지 동기와 목적이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번 중국 연수여행은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첫째, 국내는 제주도, 울릉도, 홍도까지 거의 모든 명소를 가보았지만, 해외여행은 처음인데다, 둘째,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었으며, 셋째, 그나마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 두기로 했으며, 넷째, 이제까지의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고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히 자기성찰하고 재구성하여 어떤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하나의 ‘고뇌와 결단의 시간’으로 이번 백두산 등정의 길을 선택하고, 내 나름대로 의미와 동기를 부여하고 참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부터 몇 차례의 출발 연기, 직장 다니면서 단행한 10일간의 금식기도(단식), 연세대 행정대학원 총원우회 신문(제14호 원우신문)의 편집과 발간, 제42대 총원우회장 후보등록과 선거운동, 직장 사직, 특히 단식과 학교신문 발간 ․ 선거운동을 거의 동시에 해야 했던 어려움 등등이 1990년 8월 4일(토) 오전 9시 김포공항에서 홍콩발 대한항공을 탔을 때는 아스라이 작아지는 저 밑의 지상의 물체들처럼 여겨졌다. 미지의 이번 중국 여행길은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는 비장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2. 중국의 자랑 - 만리장성 

  북경으로 가기 위해서 다섯 시간을 체류하면서 시내에 나가 점심을 먹고 둘러본 홍콩은 이국적인 풍취가 물씬 풍기는 중국의 관문이었다. 항구도시로서 제주도의 3분의 2 밖에 안 되는 좁은 땅에 상주 인구 6백만, 유동인구 1천만명이 살고 있는 홍콩은 2층 버스가 다니고, 건물도 위로만 솟고, 운동장이 없는 대학도 있었다. 7년 후 중국에 귀속될 예정이어서 퇴색하고 오래된 건물이 많았다.

  홍콩에서 중국민항(CAAC)를 타고 네 시간 가까이 걸려서 밤 9시경 도착한 북경국제공항에는 ‘아운여유 우의화평’亞運旅游 友誼和平이라는 플래카드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오는 9월 22일부터 북경에서 개최되는 제11회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는 선수 및 관광객을 따뜻이 환영한다는 현수막인데, 이런 내용의 현수막이나 입간판은 호텔이나 식당, 관광지, 거리 등 중국 전역에 걸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연변대학을 나온 조선족 2세 청년의 우리말 안내를 받으며, 북경공항에서 50㎞ 쯤 떨어져 약 1시간 소요되는 북경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두세 줄의 가로수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속에 나있는 시원한 도로였다. 웃통을 벗은 채,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길가에 서너명 씩 모여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강열반점康悅飯店이라는 아담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북경에서의 첫 아침에 나는 다른 일행들 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호텔 주위의 주택가를 산책했다. 그런데 주택가 공동변소인 칙소廁所에 갔다가 놀랜 일이 있다. 대변 보는 장소가 앞과 좌우에 아무런 벽이 없어서, 호기심에 여자 변소도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서 잠깐 살펴보다가, 칙소 안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50대 중국 여자로부터 알 수 없는 중국말로 항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여자도 무척 당황했으리라.

 북경과 그 밖의 중국의 도시에서는 자전거(중국에서는 자행차自行車라고 부름)가 주요 교통수단이고, 자동차(중국에서는 기차汽車라고 부름)는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을 먹고 만리장성으로 가면서 살펴본 북경시는 자전거 행렬이 썩 볼만 했다. 특히 웃통을 벗은 채, 앞에는 웃통 벗은 아이를 태우고 뒤에는 수박, 오이, 가지 등을 담은 큰 소쿠리를 싣고 가는 청년, 뒤에는 아가씨를 태우고 달리는 젊은이 등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상점 간판 글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왠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붉은 색으로 모두 되어 있으며, 시내버스는 홍콩과는 달리 2개의 차량을 연결한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땅이 좁은 홍콩은 2층 버스, 땅이 넓은 중국은 옆으로 2층 버스인 셈이다.

 북경 시내에서 70㎞ 쯤 떨어진 만리장성은 자동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렸으며, 많은 관문 중의 하나인 팔달령八達嶺을 통해서 만리장성에 올랐다. 마침 일요일 오전이어서 쉬러 나온 북경 시민들과 중국 전역에서 온 중국인들, 그리고 우리 처럼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날씨는 안개가 끼어 햇볕은 잘 안 보이나 서늘하여 관광이나 등산에 알맞은 날씨였다. 가족끼리 놀러 나온 북경시민, 미국 중학생, 특히 중국 인민해방군의 앳띠고 예쁜 여자군인과 잠시나마 서로가 인간애를 느끼며 다정히 웃으며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인류 최대의 문화유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물, 인류 최대의 불가사의 등의 이름이 붙어있는 만리장성은 듣던 대로 과연 장관이었다. 달에서 보이는 지구상의 유일한 건조물이라고도 한다.

▲ 흔희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 일컫는 산해관 노용두    
  동쪽으로는 발해만 상해관山海關에서 서쪽으로는 고비사막에 이르는 수천㎞의 장성! 이것은 광대한 국토와 엄청난 인구, 그리고 막강한 절대왕권에서 나타난 중국의 국력과 저력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리장성을 축조하느라고 수천 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중국 인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했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만리장성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명나라 3대 영락제부터 최후 승정제까지 13명의 황제들의 능묘가 있는 북경의 북부 교외로 나가서, 특히 정능定陵의 거대한 석조건축인 자하궁전을 보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중국 역사의 장대함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저녁에는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출신들이 다니는 대학인 중앙민족학교를 가서 캠퍼스를 산책하고 있는 조선족 2세, 3세들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말을 상당히 잘 했으며, 엊그제 북경 노동자운동장에서 있었던 제1회 다이너스티컵 축구 결승전에서 중국과 승부를 겨룬 우리 한국팀을 운동장에 입장해서 열띤 응원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아야 했다. 피가 무엇이고, 민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좌니 우니 이념은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지, 뭉클한 가슴으로 다시 한번 그들의 순진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해 보았다.

 중앙민족학교에서는 약 3천명의 학생들이 있는데, 조선족이 250여명 된다고 하며, 조선족 남녀 학생 네 명이 우리 숙소까지 같이 와서 우리 대학생들과 정담을 나누다가 밤늦게 돌아갔다. 

 3. 서태후의 욕심 - 이화원 

 북경에서의 이틀째를 맞은 우리들은 오전에는 중국 각지의 엘리트가 모여들어서 중국의 국가경영과 미래를 담당할 인재들을 베출하는 북경대학北京大學으로 갔다.

  북경대학은 학생 7천명과 교직원 1만 3천명이 함께 살고 있는 조그마한 도시라고 한다. 경제학과 이덕빈李德彬교수로부터 1898년에 창설되고 1919년 5 ․ 4운동의 진원지라는 등의 학교 연혁을 듣고, 현재 중국이 처한 정치 ․ 경제 ․ 사회 등에 관한 특별 강의를 들었다.

▲ 이화원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낙후 원인을 물은 나의 질문에 백발의 노교수는 다음과 같이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첫째, 관리와 생산의 분리이다. 농민(노동자)들은 아침에 배당(지시)를 기다렸다가 일하러 가기 때문에 생산이나 관리에 소극적이 되었다. 둘째, 생산수량과 무관하게 배당(지급)되기 때문에 「잘하나 못하나 똑같다」는 나태한 마음이 생겨서 무관심과 의욕상실을 가져왔다. 셋째, 생산이 시장성을 결여했다. 수요를 모르고 수요에 관계없이 공급(생산)이 되니, 시장에서 생활 필수품과 농산품이 품귀현상을 빚었다. 10년 전만 해도 북경 시내에 수박 ․ 복숭아 같은 과일 판매가 없었다.

  이 교수의 우호적이고 진솔한 강의를 듣고 북경대학 안내 책자와 뺏지를 받은 후, 도서관과 조선사연구소 등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청나라 황실의 여름별장(이궁離宮)이라는 이화원頤和園을 보고 느낀 소감은 만리장성, 자금성紫禁城과 함께 그 웅대한 스케일에 우선 압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화원은 어림잡아 여의도 크기는 됨직 했다(총면적 267㏊). 이 안의 곤명호昆明湖라는 인공호수 전체의 4/3을 차지하고 높이 1백m쯤 되는 인공산 만수간萬壽山, 서태후西太后가 살던 낙수당樂壽堂 등 수많은 전각들, 728m의 긴 복도(장랑長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화원의 주인되는 서태후는 불과 90년 전의 여걸로서, 청조 9대 황제 함풍제咸豊帝의 첩으로 들어가 황제가 죽자 3살 난 황태자를 동치제同治帝, 10년 뒤에는 다시 조카를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키고 국정을 수렴 청정하여 좌지우지 했는데, 당대의 영웅 서태후의 권세가 어떠했다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후에는 왕부정상가王府井商街라는 북경 시내 중심가를 거쳐서 2 ․ 7 극장에서 노래와 마술과 쇼를 관람했다. 예술이란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4. 중국의 상징 - 천안문 광장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앞마당에서 체조를 한 후 샤워를 했더니, 피곤이 풀리는 듯 했다.

  명 ․ 청대의 궁정인 자금성紫禁城, 이른바 황궁皇宮인 셈인데, 현재 세계 최대 박물관으로서 고궁故宮이라고도 불린다. 동서 750m, 남북 1.000m의 장방형으로 면적은 약 72만㎡이고, 사방은 높이 약 10m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밖으로는 폭 50m의 도랑이 파져 있다.

  명 ․ 청조의 역대 황제들이 정무를 보며 의식을 행하던 외조外朝와 일상생활을 하던 내정內廷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곳곳에서 황제들이 쓰던 유물들이 잘 정돈되어 전시되어 있다. 그 규모와 건축 기술 등에 있어서 중국이 아니고는 찾아보기 힘든 장대하고 뛰어난 것들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지난해 6 ․ 4 천안문사태를 통해서 전 세계에 유명해진 천안문광장에 들어섰다. 중앙에 현대 중국 인민의 영웅인 모택동毛澤東 주석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양편에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歲와 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團結萬歲라고 쓰여진 천안문은 안개 낀 흐린 날씨에도 의연히 서 있었다.

  약 40만㎡의 넓이로 100만명이 모일 수 있는 세계 최대의 광장인 천안문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 38m의 석조 오벨리스크인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岔碑가 솟아 있는데, 정면의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氷垂不朽라는 글은 모택동이, 뒷면의 글자는 주은래周恩來가 썼다고 한다.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에 화국봉華國峰 수상이 2억원의 국비를 들여 지은 모주석毛主席기념관이 있고, 이 기념관 중앙의 방에 중국 국기 오성홍기五星紅旗에 싸여 있는 모택동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광장 동쪽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사박물관이 있고, 광장 서쪽에는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이 있다.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국회 의사당에 해당되는데, 우리는 시간 부족으로 내부를 모두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점심을 몽고인 음식으로 먹은 후, 나는 가지고 온 운동화가 적어서 내일 백두산으로 가기 전에 발에 맞는 운동화를 사기 위해서 5원元 2각角을 주고 택시를 타고, 어제 갔던 왕부정상가로 갔다. 53원(우리 돈 약 8,500원)을 주고 운동화을 사서 신고, 일행이 있는 식당으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타려는 순간 나는 아찔했다. 점심 먹었던 식당 이름도 위치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어쩔 수 없어서 나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북경시내 구경이나 차분히 하기로 마음 먹었다.

  왕부정상가의 신화서점新華書店에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10권을 47원에 살 수 있는 기쁨을 맛보았다. 대학시절 은사이기도한 이영무李英茂 교수가 번역한 「사기」(6권, 신태양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번 우리 연수단장인 서울대 최몽룡崔夢龍 교수(고고미술사학과)가 어제 이 책을 사 가지고 와서 자랑한 적이 있었다. 최 교수와 나는 서울에서 홍콩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부터 나란히 앉아서 기내식을 먹었는데, 이번 연수여행을 통해서 둘이는 기름기가 많아서 느끼하다는 각종 중국 음식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왕성한 식욕에서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5. 가기 어려운 백두산 
 
▲ 소천지 위 늪지     © 이정수 사진작가

 
 
 
 
 
 
 
 
 
 
 
 
 
 
 
 
 


  8월 7일, 백두산을 가기 위해서 연길延吉로 가는 오후 7시 출발 예정인 비행기를 타고자, 북경 시내에서 혼자서 택시를 타고 다섯시 반경에 북경공항에 도착해 보니(택시요금 39원 6각) 일행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공항청사 2층 식당(화원華園)에 가서 저녁을 사먹고 있으니 우리 일행이 도착했다. 우리 일행들은 현지가 미수교국인 사회주의 국가여서 여러 가지로 걱정을 많이 했고, 나의 직업이 정치인이어서 그랬는지, 심지어 혹시 망명이라도 해버렸는가 하고 모두들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 나는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백두산을 구경한 후,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리는 민족 대교류에 참가하고 판문점을 통해서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나름대로 나는 애국적이고 민주적이며 민족주의자라고 자부하고 있는 터이다.

  8시가 넘게 기다렸으나, 연길에서 와서 다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데, 그 비행기가 연길에서 고장이 나서 수리 중이기 때문에 오늘은 출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다리다가 지친 우리들이 물어서야 알아내야 했다.

  북경 시내 쪽으로 30분 쯤 들어오다가 연상반점燕翔飯店이라는 고급 호텔에 투숙했는데, 이 곳에서 서울대생 연수팀을 만났다. 그들은 백두산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튿날 오전 9시 40분에 출발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고 북경 공항에 갔으나, 이번에는 어떻게 된 셈인지, 좌석 번호가 잘못되어 비행기표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돈(뇌물)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혹시 팁(섭외비) 많이 준 사람들에게 우리 좌석을 넘겨주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밤 9시에 출발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들은 한대 얻어맞은 멍청한 기분으로 공항에서 천안문 광장으로 가는데, 이번에는 버스 타이어가 빵구가 나서 타이어를 교체하느라고 50분간을 공항 가도에서 정차해야만 했다. 왕복 4차선 길 양편 화단에 칸나, 장미가 드문드문 서 있고, 클로버가 잔디 대신 심어져 있어서 행운의 네잎 클로버 두개를 찾아내서 책갈피에 꽂아 넣었다. 명색이 고급 관광버스인 모양인데, 수리 후 덜커덩거리며 5분쯤 가다가 또 다시 고장이 나서 운전 기사가 다시 수리하고서야 갈 수 있었다. 
  천안문 왼쪽에 있는 중산공원中山公園 안 동령지헌東令之헌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나는 다시 한번 일행과 떨어져서 중국의 국부國父 손문孫文선생의 기념관인 중산관中山舘을 찾아가서 둘러 보았다. 천안문 광장으로 가서 일행과 합류한 뒤, 북경수도 국제공항으로 갔는데, 예정시간보다 20분 늦게 밤 9시 20분에야 프로펠러 45인승 조그만 전용기를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어둡고 좁은 기내 옆 좌석에서 누군가가 ‘우리 살아서 만납시다’고 가만히 말하고 있었다. 마음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불안감을 누군가가 본능적,직감적으로 표현한 적중하는 말이었다.

▲ 소천지     © 이정수 사진작가


 
 
 
 
 
 
 
 
 
 
 
 
 
 
 
 
 
 
 
 

 
 
 
6. 가다가 되돌아 온 백두산 길 

  비행기도 작고 야간 비행이라 그런지, 우리들은 약간의 불안과 긴장, 흥분을 간직한 채, 두 시간의 비행 끝에 11시 20분에 심양(옛 봉천奉天) 비행장에 도착했다. 급유를 위해서 40분 정도 쉬어 갈테니 대합실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나왔는데, 연길延吉 기후가 안 좋아서 오늘 저녁엔 못 가고 내일 아침에야 갈 수 있다는 뜻밖의 통고였다. 우리 학생들이 항의했으나 허사였다.

  그 이튿날 아침 8시 20분 출발 예정인 어제 그 비행기가 9시 40분에야 심양공항을 이륙해서 10시 20분에 연길에 내렸다. 연길은 조선족 80만명 이상이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중심 도시로서 조선족이 다니는 유명한 연변대학延邊大學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좋은 일에는 장애물이 많다는 호사다마好事多魔인가. 우리 인생 도처에 문제와 갈등과 투쟁이 있듯이, ‘백두산 등정’이라는 목표 앞에 또 다시 커다란 장애물이 연길공항에서 진즉부터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앞에 직면한 문제는 심각하고도 어려운 성격의 것이었다. 즉, 북경에서 연길 오는 비행기가 하루 이상 지연되어서 돌아갈 비행기 좌석이 자동적으로 취소되어서 북경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예약하지 않은 상태에서 백두산에 올라갔다가는 제 시간에 북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당연히 일본 오사카로 출국도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점심을 먹고 북경으로 돌아갈 비행기 좌석을 예약하러 안내인 등이 돌아다니는 동안, 연길시내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모든 가능성이 막혀서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백두산 등정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길이 되는 저녁 7시 심양행 특급열차를 타야만 했다. 백두산 보러 백두산 코밑에 까지 왔다가 백두산 그림자도 못 보고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 실로 기막힌 일이었다. 막바지에 내가 중국 내의 우리 여행안내 책임을 맡고 있는 북경청년여행사에 장거리 전화를 해보았지만 잘 안 되어 열차에 올랐다.

  나는 침대칸 앞자리에 있던 조선족 2세 청년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백두산 등정의 방법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의과대학을 나와서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 물가국에 근무하는 30대 엘리트 관리인데 나는 책과 옷을 주고 그는 나에게 길림吉林의 명주名酒 삼중삼參中參을 주면서 서로 사귀게 되었다. 부인은 간호원인데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다고 한다.

▲ 소천지와 늪지     © 이정수 사진작가


  여덟 시간의 밤 열차를 탄 후, 새벽 5시에 길림성의 성도省都 장춘長春에 도착했다. 장춘역 앞 ‘장춘 여명시장黎明市場’에서 가격이 매우 저렴한 바나나를 사먹고, 중국 최초의 영화촬영소이며, 현재에도 대표적인 제작소인 장춘전영제편창長春電影制片廠을 보고, 오후에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부의溥儀)가 살았던 위화궁僞皇宮을 둘러 보았다.

  나는 현 상황에서 이곳에 떠나올 때와 같은 무언가 중대한 결단이 필요함을 느꼈다. 우리의 삶은 순간마다 선택과 결단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더구나 생의 갈림길이나 구비 마다에서는 더구나 지혜로운 결단이 필요하리라.

  점심 무렵, 나는 여기서 이번 중국연수단을 책임지며 동행하고 있는 분에게 백두산에 가기 위해서 나 혼자라도 이곳 장춘이나 북경에서 백두산으로 돌아가겠다고 정식으로 선언했다. 나의 이런 결심의 통고는 그 분들에게 하나의 자극과 계기가 되어, 비상대책을 세워서 일행 모두가 백두산에 다시 가는 것으로 일정을 재조정하게 되었다. 그 분은 우리들을 식당에서 기다리게 해 놓고 서울과 북경 등으로 비상연락을 한 끝에 장춘에서 백두산으로 되돌아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돌출변수가 많은 광막한 인생길에서는 때로는 비상한 돌파력도 필요한 법이다.

  우리는 귀국하던 발걸음을 돌려서 다시 백두산으로 향했다. 장춘의 장백산반점長白山飯店에서 출발하여 두 시간의 버스 여행 끝에 밤늦게 길림시 강성江城반점에 도착했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 내려서 천리를 흘러간다는 유명한 송화강松花江이 바로 호텔 앞을 흐르고 있어서 혼자서 수양버들 늘어선 강변을 산책했다. 말로만 듣던 송화강 강변을 혼자서 거닐어 보니, 고구려 용사들의 모습과 잃어버린 우리 역사와 강토가 생각나서 마음은 그렇게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7. 마침내 오른 백두산 천지! 

  우리는 오늘 마침내 백두산에 오른다는 흥분과 설레임으로 일찍 일어나 새벽 다섯 시에 길림을 출발했다. 비포장도로를 마구 달리다가 차에서 내려서 길 가운데 웅덩이를 삽으로 흙을 퍼서 메우고 지나가는 것은 그래도 낭만적인 멋이 있었다. 그러나 산속에서 중국에서도 유명한 백두산의 우람한 목재를 싣고 오던 큰 화물차가 좁은 길, 한 가운데에서 고장이 나서 우리의 통행을 막고 버티고 서있는 것은 우리들의 백두산 길의 마지막 장애물이기를 바랬다. 고장 난 차 뒤로 목재를 실은 큰 화물차 두 대도 우리의 진로 방해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수리공이 인근 도시에서 와서 고쳐야 비껴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도시는 이곳에서 얼마나 멀고, 또한 그 수리공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달리 돌아서 갈 수 있는 길도 없다고 하니, 하루 종일 산 속 길 위에서 기다려야 될 지도 몰랐다.

▲ 민족의 영산 '백두산' 장백폭포(흑풍구에서 바라본)의 아름다운 가을 정경     © 이정수 사진작가


  ‘참으로 백두산 가기 힘들다’고 우리들은 모두 탄식을 토해 냈다. 반 시간 정도 궁리한 끝에 한국학술진흥재단 나상균羅祥均 장학관의 기지와 진두지휘로 그 곤경을 용케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우리들은 기분이 좋아서 길가에서 우리 돈 3천원쯤(중국돈 20원)주고 사서 나누어 먹던 참외 한 광주리(42㎏)에서 그 화물차의 중국인 운전기사와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열 몇개 나누어 주었다. 모처럼 기분들이 좋은 것 같고 해서, 내가 사회를 보며 돌아가며 자기의 ‘18번’ 노래를 두 곡씩 부르니, 어느덧 길림성에서 약 420㎞ 거리의 백두산 입구에 11시간 만에 도착했다.

  장백산長白山이라는 큰 현판의 좌측에 ‘천수天水’, 우측에 ‘운봉雲峰’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 형식의 높다란 문이 우뚝 서 있었다.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르고 있다. 다시 차를 타고 19㎞ 떨어진 장백폭포 입구에 내려서 폭포 가까이 걸어서 가 보았다. 백두산 천지에서 68m의 높이로 떨어지는 장백폭포는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해발 2,744m의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池에서 사시사철 저토록 큰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입구의 현판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天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저토록 높은 산정에서 많은 물이 사시사철 계속 흘러내린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폭포 바로 아래 백두산 온천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고 있었으나 시간이 촉박해서 목욕할 겨를은 없었다. 다만, 폭포 물에 손 씻고, 얼굴 씻고, 그리고 상당한 양의 물을 먹어 보았다. 맑고 시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들은 백두산 정기를 몸 안 가득히 들이 마시는 기분이었다.

  장백폭포 옆길에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 길을 통해서 백두산 천지와 상봉에 오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우리는 시간에 쫓기며 강행군하는 처지라서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50원을 주고 백두산 임업관리국 소속 지프차로 바꾸어 타고 백두산 천지를 올라갔다. 입구에서부터 상봉 가까이까지 도로 확장 및 포장공사를 한참 하고 있는 중이어서 위험한 길을 곡예 하듯이 올라갔다.
 
▲     © 이정수 사진작가



  백두산 천지 가까이까지 포장도로를 낸다는 것은 우리 처럼 시간에 쫓기며 찾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나, 민족의 성산聖山인 점, 그리고 생태계를 보존해야 하는 자연보호의 측면에서는 극력 반대하고 저지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천우신조로 날씨가 좋아서 우리는 백두산 천지를 바라볼 수 있었다. 8월 11일(토) 오후 7시 10분이었다. 여름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늦은 시간인데도, 우리들이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요, 신의 도우심이라고 생각되어서 눈물이 났다.

  사진으로만 보며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상상봉의 천지天地! 진정 백두산은 영산靈山이요 성산聖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푸른 물 잔잔히 일렁이고, 바람에 실린 안개가 살포시 떠돌고 있었다. 해질 무렵, 안개는 삽시간에 천지와 백두산을 완전히 가렸다가 걷히기를 서너 차례나 했다.

  원래 일정대로 진행되었다면 엊그제 이곳에 왔을 텐데, 만약 엊그제 같은 흐린 날씨에서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도저히 천지를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산이라서 그런지, 일년 중 흐린 날씨가 많아서 올라왔다가 천지를 못보고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朴景利여사가 쓴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를 가지고 오면서 읽었는데, 그 일행들도 폭우 속에 올라가서 구름과 안개만 보고 천지는 못보고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백두산 상봉은 너무 위험했다. 철책이나 방책이 하나도 없어서 아차 하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안내인에게 물으니, 3일 전에도 북경시민 2명이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매년 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는다고 한다.

  백두산 정상 한 가운데에 수심 317.7m의 천지. 우리 민족의 성지 백두산을 남의 땅을 통해서 올라가야 하고, 백두산과 천지 한복판에 선을 그어서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으로 하거 있는 아픔과 슬픔을 진하게 느끼며 천지를 바라 보았다. 우리는 천지를 바라보며, 가지고 올라간 술(參中參)과 참외를 차려 놓고 뜻깊은 ‘조국통일 기원제’를 올렸다.

  최몽룡 교수의 고사에 이어, 나는 길림에서 오는 버스 속에서 지은 시 ‘백두산 천지에 올라’를 낭송했다.
 
백두산 천지에 올라


하늘의 연못

하늘과 만나는 영봉에 올라

조국통일 기원제를 올리

생명의 기원

살아 숨쉬는 검푸른 물위에

살포시 떠도는 안개




눈보라치는 광활한 만주벌판

말 달리던 용맹한 선인들의 함성과

말발굽소리 실어오는 저 바람이여

아직도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조선족의 언어와 피와 숨결을

간직해 온 강인한 민족이여




모든 강과 산의 뿌리, 천지

장백폭포로 떨어져

두만강, 압록강으로 흐르고

장백산맥, 태백산맥으로 뻗어 내려

오천년 백의민족의

골격과 젖줄로 생동하고 있구나.




눈물겹구나

하늘이 점지한 배달겨레,

상처받고 분열된 우리 마음

구름 걷히듯 사라지고 어깨동무 덩실 춤

마침내 찾아 올

남북통일 대동평화

참 자유와 해방의 새 세상이여!




그대여, 어서 오라

우리 민족의 영원한 어머니

천지에 잔잔히 이는

바람과 안개, 그 영기를 머금고

진취적 큰 발걸음, 웅혼한 기상으로

생기있게 찾아 오시라 



  함께 간 일행들도 감격에 겨워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누구의 제안도 없이 저절로 합창했다. 모두들 술을 부어 놓고 절하고 음복飮福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가 조국통일 기원제를 진행하는 도중에 50대 한국의 중년 남자가 자기도 조국통일 기원제에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동아일보 최시중崔時仲 논설위원이었다. 그 분은 그 자리에서 낭송했던 나의 시를 복사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와서 귀국 후에 보내 드렸다.

  곧 바로 안개가 끼고 어두워지는 백두산 천지를 뒤로 하고, 7시 50분에 하산을 시작해서 백두산 임업관리국 초대소招待所(여관)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서 백두산의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체조를 한 시간 가량하고, 천지에서 흘러내린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잠시 운기조식運氣調息의 내공內攻과 단전호흡으로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고르고 가지런히 했더니, 심신이 아주 쾌적했다. 백두산 산자락 울창한 숲속의 새벽 공기는 참으로 신선했고,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은 참으로 신비로왔다. 이곳에서 더도 말고 더도 말고 일년 만 살면 신비한 백두산 정기를 듬뿍 받아서 정말 신선이라도 될성 불렀다.

  바쁜 귀국 일정 때문에 새벽 4시 50분에 아쉬운 발걸음으로 백두산을 떠나야했다.


8. 상해의 홍구공원과 임시정부청사 

  백두산을 가면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던 길림성 돈화시敦化市 대포자하진大浦紫河鎭이라는 작은 마을의 우의반점友誼飯店이라는 식당에서 밥과 된장 ․ 고추 ․ 옥수수 등으로 아침을 다시 맛있게 먹고, 오던 길을 따라 길림으로 되돌아갔다.

  백두산 초대소에서 전세버스로 11시간을 달려 길림으로, 길림에서 북경 행 특급 밤 열차를 9시 30분 동안 타고 새벽 5시 40분에 심양에 내리고, 심양에서 중국민항으로 두 시간 걸려 상해홍교국제기장上海虹橋國際機場에 다음날 점심 때 안착했다.

  상해 백옥란반점百玉蘭飯店에 여장을 풀고 북경 강열반점에서 보내온 각자의 짐을 확인한 후, 번화가에 있는 제일백화점 부근을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혼자서 밤 11시 경에 두개의 차량을 연결한 55번 시내버스를 타고 나가서 상해의 밤 풍경을 살펴보았다. 버스 번호 등의 교통정보는 호텔 종업원들에게 영어와 필담筆談으로 알아냈다. 남자들은 모두 웃통을 벗은 채, 중심가를 비롯해서 모든 길 양편에 긴 의자를 내어 놓고 누워 있거나 앉아 서 한 여름밤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광복절 하루 전인 8월 14일 오전, 우리들은 윤봉길尹俸吉 열사가 일제의 벡천白川대장 등에게 폭탄세례를 안겨 주었던 홍구虹口공원을 찾았다. 지금은 공식 이름을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노신魯迅의 이름을 따서 노신공원이라고 하지만, 상해 시민들은 지금도 홍구공원으로 부른다고 한다. 공원 곳곳에서 상해시민들이 모여서 태극권을 연마하는 모습은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장소는 공원 안의 노신동상 앞 30~40m 거리에 있었는데, 미수교국이어서 그런지, 기념비나 안내 팻말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어서, 변천하고 덧없는 국가와 역사와 인간을 다시 하번 생각하게 되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갔는데, 청사 바로 앞에 김구 주석이 살았던 집이 있어서 방문했다. 두 곳 모두 상해 시민(중국인)이 살고 있는데,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그 집 주인의 아들이 나에게 건네주는 명함을 보니, ‘상해시마당로 보경리 306롱 4호 주선기上海市 馬當路 普慶里 306弄 4號 朱善基’라고 적혀 있었다. 그 학생은 김구 주석의 친필이 있는 책상 위에 태극기와 대한민국이라는 명패를 꺼내 놓았다.

  상해공항에서 중국민항을 타고 일본 오사카(大阪)로 향했다.


9. 오사카성과 사천왕사 


   입명관立命館대학에 다니는 여자 유학생의 안내를 받으며 오사카 성城을 찾아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침략자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섬기는 풍국신사豊國神社를 거쳐 오사카성 8층 전망대까지 올라 갔다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풍신수길의 유품 등을 보았다. 아담하고 정교한 건축이었다.

  저녁에는 혼자서 전철을 타고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시내를 다녀 보았다. 완전 자동화된 매표 및 집표 시설이 좋았고, 밤에도 부지런한 일본 국민들을 볼 수 있었다.

  광복절이면서 귀국일인 8월 15일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찾아 갔다. 고대에 우리 민족이 문화 후진국 섬나라 일본에 문화를 전수할 때에 그런 근거지의 하나가 이런 절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은 불교가 국교이기 때문인지, 불전에서 염불과 기도를 하며 불공을 드리는 시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10. 돌아오며 

  무릇 모든 존재들을 변화시키고 변혁시키는 ‘시간’이라는 우주의 섭리가 너무나 무섭고 위대하다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만리장성을 쌓고 자금성을 축조하며 이화원을 만들어 냈던 황제들, 천년만년 갈 것 같은 절대 왕권이 소리 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역사의 생생한 현장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인생론적 질문, 철학적 문제를 제기시켰다.

  남한의 96배가 되어 세계 육지면적의 5분의 1인 960만㎢의 광대한 국토, 또한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되는 11억이 넘는 엄청난 인구, 인류문명에 큰 족적을 남긴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 등을 간직하면서 잠자는 호랑이처럼 현대사의 뒤안길에 있는 중회인민공화국! 현재는 비록 우리보다 물질적 생산수단과 생산기술, 생산력에서 뒤지고 생활여건 등 문화 전반이 열악하지만, 중국인이 갖고 있는 거대한 잠재력과 엄청난 에너지가 깨어나고 개척되고 집약된다면, 인류 역사발전과 문명진보에 선구적인 견인차가 되리라는 예견과 신뢰를 이번 연수과정을 통하여 얻었다.

  더구나 우리에게 따뜻한 친절을 베풀어준 조선족 동포들과 중국인들에게 감사드리고, 전체 중국인들에게도 눈부신 발전과 건강한 행복이 있기를 기원한다.

  또한 부족한 저를 추천해 주신 대학 때 부터의 은사 연세대 행정대학원 김홍규 교수님, 이번 연수여행을 가능하게 해준 그랜드백화점 김만진 사장님, 그리고 함께 다니며 여러 가지로 자상하게 배려해 주신 서울대 최몽룡 교수님, 특히 나의 돌출 행동 때문에 살이 5㎏이나 빠졌다고 실토하시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나상균 장학관님,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쏟아 주신 동화관광의 백종석 부장님과 민경재씨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또한 희비를 함께 맛본 성실한 연수단원 대학원생들에게도 우정 어린 고마움을 전한다.

  모든 사람들은 제약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저 마다 어떤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풀어야 할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힘들고 고단한 강물에 발 적시지 않고 삶의 강물을 건너가고 있는 자, 어디 있겠는가.

  우리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요, 고난의 연속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단하고 힘 들어도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리지 말 일이며, 사랑의 불꽃을 꺼 버리지 말 일이다. 그래도 우리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슬프지만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음과 양, 강과 약, 기奇와 정正이 돌고 돌아 끝없이 순환하는 위태로운 그 사이에서도 진취적인 노력과 편안함을 취해야 하리라.  일회적이고 유한하고 유일무이한 소중한 생명의 소유자인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하늘의 선한 축복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