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고인돌,공간을 뛰어 넘는 동이족한반도(韓半島)의 많은 고인돌과 돌검은 세계 고인돌과 검들의 원형단군(檀君)
단군(檀君), 한민족(韓民族)에게 매우 친숙한 이 명칭은 그저 단순하게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단군(檀君)은 고조선(古朝鮮) 당시에 군왕(君王)에 대한 존칭으로서, 나라의 제사(祭祀)를 드리는 제사장(祭司長)이라는 의미에서 '단(亶, 檀, 壇)'이라고 붙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단(Dan)'이라는 존칭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의 저쪽 끝인 아일랜드(Ireland) 신화(神話)에서도 가장 평화스러운 신성(神聖)한 종족(種族)으로 알려진 '단안(Danann)'이라는 여신(女神)이자 여왕(女王)의 부하들이 등장하는데, 이 '단안'이 바로 단(亶)의 왕비(王妃)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Canann) 지역에서는 '단(Dan)'이라는 히브리인(Hebrew)이 나라를 다스린 곳을 단(Dan)이라고 이름붙이고, 그리이스에서도 초기의 왕들은 모두 '단(Dan)'을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이 모두 성경(聖經)이 나오기 이전의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유럽에서 단(Dan), 돈(Don)은 이 '단(亶, 檀, Dan)'에서 비롯되었으며, '담(Damm, Madam)'은 '단안(Danann)'에 비하여 낮은 여귀족(女貴族)에 대한 존칭으로서, 여성을 뜻하는 우리말의 '암'과 같은 어원(語原)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같은 어휘(語彙)는 고인돌을 비롯한 거석문화권(巨石文化圈)에서는 모두 비슷한 존칭(尊稱)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단(亶, 檀, 壇, 땅)이 지상(地上)을 다스리는 지엄한 존재를 부르는 말이었고, 하늘을 다스리는 신(神)은 환(桓, 하늘)이었는데, 나중에는 같은 음의 한(韓, 漢, 汗)으로 바뀌어 군왕(君王)의 종족 또는 군왕(君王)이 다스리는 나라 이름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가나안 지역과 그리이스를 빼놓고는 모두 신(神)과 같은 존재를 '단(Dan)'이라고 불렀습니다.한마디로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단군(檀君)들이 유라시아 전역을 통치하였는데, 동쪽의 아시아에는 남자인 단(Dan)이, 그리고 서쪽의 유럽에는 여자인 단안(Danann)이 통치하게끔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말미암아 거석문화는 막을 내리고 거석문화를 바탕으로 동양에서는 진(秦), 서양에서는 그리이스, 로마에서 새로운 시대가 등장한 것이지요.
동이족(東夷族)의 고인돌(Dolmens of DongEes) 우리나라에는 고인돌이 참으로 많고 많습니다. 남북한 할것없이 나즈막한 언덕과 평지에는 크고작은 고인돌이 수없이 산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인돌이 바로 역사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북한의 한반도와 현재 중국 땅에 속해있는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의 동북삼성(東北三省)은 원래 한반도와 같은 종족인 동이족(東夷族)들의 근거지이었으며, 고인돌이 바로 동이족들이 만들었던 돌무덤입니다.
원래 동이족 출신인 진시황(秦始皇)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우선 동이족(夫餘族, 현재 길림성 지역)의 한자(漢字)를 차용하여 나라의 글로 삼았으며, 책력(冊曆) 또한 동이족에게서 차용하여 수없이 교정하면서, 그들의 책력으로 바꾸었지요. 그리고는 동이족들의 모든 역사와 증거물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과거의 책들을 보지못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산동반도(山東半島) 또한 동이족 지역이었는데, 진시황에게 가장 처참하게 당한 곳이 이 산동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산동지역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요. (0) 나머지 요동반도를 비롯하여 길림성 지역에는 아직도 수많은 고인돌들이 남아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중국대륙에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이지요. 이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주로 만리장성(萬里長城) 동쪽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서부터 점차 새로운 청동기(靑銅器)가 들여오면서 고인돌을 만들던 동이족들도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지요. 그 전까지는 거꾸로 모든 것이 동이족에서 비롯하였지만, 천지개벽 이후에는 오히려 야만족으로 강등되고 뿔뿔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유랑생활을 시작하였지요. 사실 동이족은 원래 해양족(海洋族) 출신이었거든요.
그런데 바로 이 지중해 연안의 유럽인(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동부)들의 원조들은 이 동이족의 고인돌에서부터 영향을 받아 점차 더욱 커다란 고인돌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곧이어 대규모의 거석건축물들을 만들기 시작하였지요.
결국 이러한 봉토분조차 고인돌과 돌무지무덤과 함께 지중해를 거쳐 서쪽으로 서쪽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프랑스 브르따뉴(Bretagne) 지방입니다. 비록 나중에는 브리튼 섬에서 쫓겨간 브리튼족들이 더욱 거석문화를 확대시키고 성장시켰지만, 원래에는 프랑스 동남부의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세계의 고인돌과 거석문화가 몽땅 한반도와 요동반도에서 비롯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곳이 있었지요. 이 한반도와 요동반도의 고인돌로서는 전 세계의 모든 거석문화가 일목요연하게 해명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얼어붙은 북극(北極) 근처의 카라해(Kara) 어디쯤에 있는 빙판(氷板) 속에 그 열쇠를 풀어줄 흔적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연대가 나오게 된 동기는 사실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 산재한 고인돌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언제 이러한 고인돌을 만들었는지 매우 궁금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집트에 있는 거대한 초대형 피라미드가 유럽 학계에 알려지면서 영국과 프랑스 학자들은 우선 이집트 고대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당연히 고인돌의 연대는 그 이전으로 여겼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지중해를 비롯한 유럽의 고대와 선사시대의 연대가 성립되었으며, 이 이집트 왕조의 연대에 맞추어 다른 지역의 연대들이 차츰차츰 정해지기 시작하였지요. 물론 이 연대를 성립하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은 당연히 조상 대대로 고인돌을 숭배하였던 영국의 학자들이었지요. 그래서 현재 알려져 있는 고인돌의 연대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주장되었으며, 그 연대를 대략 기원전 2000년에서 3000년 정도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스페인의 어느 거석 묘지에서 기원전 4000년경이라는 엄청난 측정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데, 물론 이 연대를 가장 반겼던 이들은 영국 학자들이었지요. 그 이후에는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시기를 기원전 2000년에서 4000년경으로 확립시키고 이를 보급시켰지요. 그런데 이렇게 억지로 때려 맞추다 보니 프랑스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프랑스 서해안의 브르따뉴(Bretagne) 지방에 널려진 고인돌을 비롯한 초대형 거석유적들이 전설에서는 그저 기원 전후의 골(Gauls)족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영국과 보조를 맞추어 이제는 골족이 아닌 그 한참 이전인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고대 선사시대 역사에서 무려 2000년이라는 가공할 시간적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또한 여기에 맞추다 보니 유럽의 고인돌이 외계인(外界人)이 만든 유적이라고 까지 말하게 되었는데, 더욱 가관인 것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엉터리 작가들이 여기에 상상으로 완벽하게 포장하여 그러한 거석 유적들이 1만년전 또는 2만년전에 만들어졌다는 등, 아예 선사의 역사를 상상과 허구로 멋지게 꾸며 놓았지요. 그나마 양심있는 유럽 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인돌이 흑해(黑海) 연안의 코카사스(Caucasus, Kavkaz) 지방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즉 유럽의 백인종(白人種)의 근본(根本)과 유럽 역사의 출발을 카프카즈(코카사스) 지방에서 찾고있는 것이지요.(1) 그런데 이렇게 줄기차게 코카사스 지방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유럽 왕족의 전통 속에는 항상 동쪽과 동방(東方), 동양(東洋)이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자신들의 조상과 그 뿌리 또한 동양이었다는 오래된 전설과 믿음 때문입니다. 제3제국을 꿈꾸었던 히틀러와 그의 측근 히물러가 추구하였던 새로운 원동력은 우스꽝스럽게도 선사시대부터 전해지는 신비스러운 절대 왕권유지의 비결과 도구이었으며, 그 혈통을 아리안족(Arians, Aras)으로 보았고, 그 흔적을 찾느라고 인도의 곳곳을 헤집고 다녔지요. 나찌(Nazis)의 상징인 네 개의 갈고리(Swastica)는 십자가(Cross)의 원형(原型)이며, 절대 왕권의 상징이었는데, 한국과 일본, 중국, 인도 등지의 동양에서는 이를 주로 '卍'자로 표현하였지요. 이 '卍'자는 사실 태극(太極)의 또 다른 상징적 무늬입니다. 즉 사방(四方)으로 굽이쳐 뻗어가는 사태극(四太極)(1)이라고나 할까요. 히틀러를 비롯하여 유럽의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성궤(聖櫃) 또한 돌로 짜여진 빛나는 석관(石棺)을 말합니다. 아마도 빛나는 벽옥(碧玉)으로 만든 석관(石棺)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러한 벽옥제(碧玉製) 석관(石棺)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지만, 한(漢)나라 시대에는 석관 대신에 주검을 감싸는 옥의(玉衣)를 만들었는데, 이 옥의는 주검을 감싸는 형태만 남아있고 그 안의 시신은 건드리는 즉시 먼지로 변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옥의를 두고 서양인들이 성궤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돌로 만든 관을 사용하였던 종족은 오로지 동이족(東夷族)으로서, 요동(遼東)과 길림(吉林), 산동(山東), 남북한의 한반도(韓半島), 쿠슈(九州), 오끼나와(沖繩)에서만 발견되는데, 그 중심되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입니다.(2)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최고의 전설인 아서(Arthur) 왕과 마법사 멀린(Merlin) 이야기는 스토운헨지(Stonehenge)와 고인돌(Dolmen)에 관련된 전설이며, 영국에서의 절대적인 왕권 유지의 도구는 단순한 돌덩어리와 검(劍)이었습니다. 영국의 국회의사당과 유명한 교회 안에는 이와 비슷한 돌이나 직검(直劍)에 관한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직검의 원형(原型)인 돌단검(石短劍, 磨製石劍)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또한 진시황(秦始皇)의 무덤에서 출토된 보검(寶劍)도 직인검(直刃劍)이 아닌 곡인검(曲刃劍)으로서, 한반도와 요동지역에서만 출토되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또한 이 비파형동검도 요동(遼東)지역이 아닌 남한에서 출토되는 돌단검에서 변형된 것으로, 돌단검의 검날(劍身)과 검자루(劍把)가 함께 이어지고 여기에 다시 또 다른 검자루가 덧붙여지면서 만들어진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요동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단검은 바로 남한의 남해안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에 요동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카사스와 그리이스에서 출토된 청동검들은 남해안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단검의 변형으로, 입사귀와 비슷한 엽인검(葉刃劍)이며, 영국과 유럽에서 출토되는 직인검은 남한에서 만들어진 돌단검과 형태가 비슷합니다. 이를 보고 일제시대에 일본의 어느 유명한 고고학자(考古學者)는 유럽의 검을 모방해서 우리나라의 돌단검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였는데, 남한의 고인돌에서 돌단검들이 엄청나게 출토되면서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고인돌과 그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하여 보면 유럽의 고인돌과 그 유물들은 우리의 한반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 학자들, 그 가운데 특히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이 거창하게 세워놓은 절대연대(絶對年代)와 그 연대기(年代記)를 나열하면서 오히려 거꾸로 유럽에서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즉 자신들이 만든 연대에서는 분명 20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 차이가 있거든요. 그들의 말 대로라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는 과거에 갑자기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이동(時間移動)이 생겨서 그 모두들 타임머신(TimeMachine)을 타고 왔다갔다 했다는 말이지요. 이러자 북한에서는 근간에 이같은 유럽식 절대연대 측정 붐이 조성되어 영국이 만든 절대연대와 비슷하게 맞추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북한과 남한에서는 고인돌 제작연대가 서로 20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2000년의 차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분명 어딘가에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은 분명합니다. 근 200년간 계속 이렇게 단추를 잘못 끼우다가 지금와서는 그걸 도저히 어찌 고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영국인들이 자랑삼아왔던 전 세계의 역사(歷史) 연대기(年代記) 편년(編年)이 몽땅 잘못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과 잘못이 드러난 이상 한시빨리 시정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오류를 안다 하더라도 영국인들 스스로 그 오류를 자인(自認)해야 되는데, 지금까지 쌓아놓은 공든 탑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마당에 그저 앉아서 자신들의 치욕을 반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역사에는 엄청난 오류(誤謬)가 있으며, 그 속에는 고의적으로 꾸며놓는 엄청난 음모(陰謀)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즉 문장(文章) 마지막에 동사(動詞)가 따르는 우리 한글의 문법(文法)이 이들 웨일즈와 아일랜드 고어(古語)에 남아있으며, 또한 수많은 고인돌(Dolmens)과 거석유적(Megaliths)들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이주한 비이커족(Beaker People)들이 만들었지요. 스토운헨지(Stonehenge)와 애브버리 둘레돌(Avebury Circle) 등 수많은 영국과 아일랜드 유적들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이주한 비이커족이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비이커(beaker)라는 것은 바로 신의주(新義州)에서 평양(平壤) 사이에서 많이 출토되는 '미송리형 단지'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한반도(韓半島)의 많은 고인돌들은 이스라엘(Israel)과 요르단(Jordan), 러시아(Russia) 코카사스(Caucasas) 지방에서 발견된 고인돌들의 원형(元型)이며, 지중해(地中海)의 코르시카(Corsica, Corse) 섬에서는 돌널무덤(Cists)과 함께 우리나라의 개석식(蓋石式) 고인돌과 탁자식(卓子式) 고인돌이 발견됩니다. 또한 이같은 고인돌들은 피레네(Pyrenees) 산맥에서도 발견되면서, 프랑스와 그리고 브리티쉬 제도로 연결되지요. 그런데 유럽의 모든 대형 거석유적들은 모두 우리 한반도의 고인돌에서 파생(派生)된 것들입니다. 인도(India)의 고인돌은 한참 늦은 시기에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브리티쉬 제도의 둘레돌(環狀列石, Stone Circle)은 원래 스페인(Spain)과 포르투갈(Portugal)에서 건너간 한반도 고인돌 종족의 후손(後孫)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말로 '뫼'라고 부르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에서 비롯된 구조입니다. 그러니 영국에서의 둘레돌이 얼마나 늦게 만들어졌는지 알만 하지요. 이 '뫼'라는 말은 영국에서 무어(Moor)라는 말로 남아있으며, 이 무어인(Moors)들이 바로 웨일즈 지방과 잉글랜드 서남쪽의 콘월(Cornwall) 지방, 그리고 아일랜드에 살던 아시아인들의 후손(後孫)입니다.(4) [출처]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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