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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의 거목 박경리, 土地로 돌아가다

한국 예술가의 대모 5일 82세의 일기로 영면 들어

서지홍 고문 | 기사입력 2008/05/06 [01:35]

문학계의 거목 박경리, 土地로 돌아가다

한국 예술가의 대모 5일 82세의 일기로 영면 들어

서지홍 고문 | 입력 : 2008/05/06 [01:35]
 

소설가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는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현대문학의 여류소설가인 박경리, 그가 한국인의 가슴에 흙 냄새를 안겨주고 불굴의 정신으로 병마와 싸우다 지난 5일 82세의 한 많은 아픔의 이 땅에서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생애를 마쳤다. 그는 소설 토지의 주인공 서희만큼이나 굴곡이 많았고 당찬 여인으로 수많은 거작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는 1926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부모와도 평탄치 못한 갈등을 빚었고,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남편을 잃는 설음을 겪었다. 그의 82년 간의 삶에 숱한 시련을 딛고 한국의 토속적이고 삶의 애증이 담긴 토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등단을 했으며 추천작품은 계산이며 단편소설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62년에는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으며, 65년에는 장편으로 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969년부터 대하소설 토지를 문예지에 연재하였으며 1995년 8월 마지막 장을 쓸 때까지 무려 25년 간을 토지에 매달려 팬을 놓지 않았다.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 토지는 1897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 최서희 일가의 한 맺힌 생존투쟁과 우리 민족의 삶의 부침을 생생하게 표현한 대하소설의 거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작품세계보다는 현실의 삶이 더욱 고달파 유방암 수술도 받았으나 강한 정신력으로 병마에 굴복하지 않고 퇴원즉시 작품에 돌입하여 집필을 하는 끈기도 보여줬다. 그는 문학보다 삶이 우선이라는 평소 신념으로 직접 밭에 나가 노동으로 심기일전을 하기도 했으며 병마를 극복하는 당찬 정신력도 보여줬다. 그런 토지는 일본을 비롯하여 프랑스, 영국 등에서 번역출간 되어 세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그런 숱한 시련이 오히려 그를 단련시켜 강인한 정신력과 고귀한 예술 혼을 발휘했는지 모른다. 누구 앞에서도 떳떳했던 그는 후배 문인들에게 "자신에게는 무자비해야 하며 상업주의에 빠지지 날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민중의 한과 삶의 흔적을 5부 25편 362장의 대하소설을 남기고 지난해 7월 폐암 진단을 받고,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 5일 82세의 일기로 그의 고향 토지에 안식하게 되었다. 한국 예술가의 대모이기도 한 그는 원주에 토지문학관을 지어 뭇 예술가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여류소설가 박경리, 그의 영전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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