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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황금보검'의 실체와 주인은 누구?

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왜 한반도남부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나

윤복현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0/02/07 [19:46]

신라 '황금보검'의 실체와 주인은 누구?

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왜 한반도남부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나

윤복현 역사칼럼 | 입력 : 2010/02/07 [19:46]
경주 대릉원 인근 계림로 14호 고분에서 출토된 눈부신 ‘황금보검’은 이국적이고 화려함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왜 한반도남부 경주지역에서 발견된 것일까?
 
황금보검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그 원형을 보유하고 있는 검이라 할 수 있다. 다채로운 색감과 수정과 금으로 장식한 섬세한 조형미는 과히 예술적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런데,이러한 황금보검이 출토된 지역은 켈트족이 활동했던 불가리아 트로키히지역으로 유럽과 로마제국을 공포로 도가니로 몰아 넣으면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엄청난 금액의 조공을 받았던  4세기 훈족의 본거지이기도 했다.그러나, 신라의 황금보검의 원형은 켈트족이 주인공들이였으나,켈트족이 사라진 후에 로마인들이 제작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문제는 황금보검이 신라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아니면 주문제작한 것인지의 문제인데,정밀한 고고학적 검사를 통해서 황금보검은 동로마 금장식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리잔들 또한 당시 로마인들이 제작한 로마유리잔들이였다.당시 신라인들은 로마에서 인도로 이어지고 인도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국제 해상무역로를 통하여 활발한 국제교역을 했음을 할 수 있다. 경주는 계획된 국제도시였고, 서역인들로 넘쳐 났으며, 서역인들은 신라인들로 살다가 신라땅에 묻히기도 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신라인들
 
국경이 없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었던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언제나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되고 융합되는 공간이였다. 그리고 그 문화교류의 주인공들은 '몽골리안'으로 대변되는 아시아 초원세력이였다. 기원전 800년 스키타이로 시작되는 초원문화의 특징은 '황금문화'였다. '알타이산'은 '황금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시아 초원세력은 황금으로  샤먼문화를 표현하며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했다.즉, 자신들의 얼굴은 황금처럼 누런 색이며 황금처럼 빛나는 민족이였다는 사실을 후손들과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목축을 위해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초원의 주인은 정세변화와 기후변화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지금은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하며 동서문명을 하나로 이어 주었던 징기즈칸의 후예들인 몽골인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스키타이.흉노.선비.거란.몽골로 불리운 북방의 한민족이 초원길을 통하여 유럽에 한국의 문명을 전파하였고, 한국문명의 젖을 먹은 유럽은 다시 발전시켜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통하여 아시아를 침력하는 서양 제국주의 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이들 초원세력 중에 경주.김해.일본열도지역에서 출토되는 기마유물들의 주인공은 바로 4-5세기 선비족이다.
 
흉노족은 이미 한나라에 공격을 당하여 초원지역에서 사라지거나 선비족에 흡수된 시기가 2-3세기다. 한나라에 투항한 김일제세력도 물론 흉노세력이지만, 기원전 10세기에 한나라에 투항한 세력이기 때문에 기마문화를 상실하고 남흉노족처럼 한족화된 흉노계이기 때문에 김일제세력이 개국을 도운 신나라가 후한 광무제엑 망하고 산동지역에서 해로를 따라 한반도남부지역으로 들어온 시기가 서기1-2세기이기 때문에 경주지역의 4-5세기 적석목곽분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고구려 유리태왕때부터 전쟁을 시작한 고구려와 선비족은 관계는 악연관계라고 할 수 있다.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을 평정하고 고구려 선조들의 나라 고리국이 존재하는 요서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 태조왕 시기부터 초원세력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선비족은 요하지역을 경계로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중원지역을 노리는 선비족의 무용부족국가 '전연'은 먼저 고구려를 굴복시킨 후에 중원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고국원왕 때 드디어 전연은 황제 모용황이 5만군대로 고구려가 예상못한 험한 남부공격루트를 따라 쳐 들어와 환도성을 점령하고 5만의 고구려인들과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미천왕의 시체를 가지고 갔다.
 

 
반면 고구려북부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한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로 하여금 5만의 군대로 방어하게 하였으나, 모용황의 동생이 지휘하는 고작 수천의 선비군대로 공격했기 때문에 고구려 북부전선은 고구려군대가 선비군대를 막았고,고구려군에 패한 선비군대는 사분오열되어 일부가 동해안 루트를 따라 경주지역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이 고구려를 공격한 당시 조양지역에 묻힌 선비족 나라 전연의 고분에서 경주.김해지역 적석목곽분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청동솥(동복)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고고학적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할 수 있다.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주인은 2세기이후 흉노족을 흡수하고 초원의 주인이 된 선비족

유럽지역을 지배한 소수의 훈족과 몽골기마군대의 위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선비의 수천 기마군대가 사로국을 무너뜨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고 볼 수 있다. 선비모용씨는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개국했고,일부세력은 김해 등 가야지역으로 들어가 가야의 지배세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선비족의 구리솥-동복(좌),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흉노계 선비 기마상(우)



신라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좌) 경남 창녕의 가야의 적석목곽분(우)
 
신라 법흥왕이전까지 신라왕족은 모두 모씨였다고 할 수 있다.신라가 김씨왕조라는 인식은 진흥왕시대부터이다. 법흥왕은 자신의 이름을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개명했다고 [삼국사기][양서-신라전][만주원류고]에서는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경북 울진군에서 발견된 법흥왕봉토비문에도 수 많은 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신라 법흥왕은 법령을 공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신라개혁에 앞장 선 왕이다. 순장의 인원도 사람에서 모형으로 대체하도록 국법으로 명시한 것은 아마도 초원문화를 포기하고 농경문화를 선택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신라왕조를 연 선비족은 모씨에서 김씨로 개명을 한 것일까? 그것은 당시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는 고구려가 원수지간인 선비 모용씨가 신라왕조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게 된다면 신라의 국운은 그야말로 태풍앞에 촛불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고, 신라권력집단에서 소외된 김알지세력과 동일한 초원세력으로써 연대함으로써 숫적으로도 열세한 선비족이 신라권력을 유지하는데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예 김일제후손으로 자처하는 성씨 개명을 단행했다고 할 수 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흔들거리는 신라금관

 
신라개국신화는 선비족 모용부족의 신화가 유사하며, 선비모용부족장들은 흔들거리는 왕관을 쓰고 다녔다는 점에서 흔들거리는 금장식의 신라왕관의 주인은 선비족의 모용부족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선비족 모용부족의 나라 '전연'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고분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일본열도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출토 유물-로마에서 수입한 유리잔
당시 신라가 해로를 통하여 로마와 교역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바른역사 10/02/08 [12:41] 수정 삭제  
  무덤양식이나 무덤속의 유물들은 무덤주인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입니다.경주.김해지역의 고분들은 북방 초원세력의 무덤이 분명합니다.북방 기마족의 유물들이 명백한 고고학적 사료입니다.

기원전10세기에 이미 한나라에 투항한 산동지역에 오래 거주하면서 한족화된 흉노족(김알지세력)은 주인이 될 수 없고,이미 2세기 이후 흉노족을 흡수하고 몽골초원의 주인이 되어 고구려를 공격한 선비족이 주인이라 할 수 있으며,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김알지 성씨로 개명(법흥왕부터)하고 김알지후손행세를 한 것이라 봐야 짝이 맞습니다.문무왕비문에 자신들을 성한왕(한나라제후) 투후(김일제)후손이라고 기록한 김인문 또한 모용선비족 출신이라고 봐야 합니다.

동북아시아지역의 샤먼(무교)문화를 표현한 황금문화는 아시아 유목민들의 상징입니다.황금문화가 유럽으로 이주한 북방 한민족에 의해서 더욱 세련되게 장식되었다고 봐야 합니다.황금은 누런색입니다. 북방 한민족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누런인종이고 빛나는 한국.배달.단군조선의 후예들임을 내세운 한민족 광명신앙의 상징이라 할 것입니다.그냥 쉽게 표현하면 황인종역사가 한민족사이고, 문명의 중심은 만주와 한반도로 대변되는 동북아시아지역이고, 장자상속적 개념과 황위계승차원에서 고구려-대진국-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계승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숙신(말갈=여진)계 초원세력인 스키타이.흉노(훈).선비.거란.몽골 등은 모두 북방 한민족으로 형제들이라 보면 됩니다.

오리지날 황금족은 동북아시아 한국인들이고, 오리지날 한국인들이 초원을 따라 서쪽으로 이주하여 백인들과 혼혈족(투르크=돌궐=터키=위그르족)을 이룬 북방 한민족은 갈래라고 보면 정확합니다.그런데 신라사관론자들은 거꾸로 한민족이 서쪽에서 이주해 온 것인양 착각들을 하는데, 그건 빛(문명)은 동방에서!라고 서양인들 스스로가 인정하는 역사관과도 위배되기 때문에 한민족비하논리에 불과합니다.동북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지역으로 고대 한국인들이 이주해 가서 문명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111 10/02/08 [19:28] 수정 삭제  
  훈족은

불가리아에서도 몽골반점을 볼수 있다.

몽골은 고구려와 연결이 되어 있다....


고대사가 힘에의해서 많이 왜곡이 되어 있어서

찾기가 힘들어.....


훈족은 고구려에서 찢어서 나간 여러민족중 한무리 라고도 하지..

몽골도 여러민족중 하나...
얀스 10/02/11 [04:19] 수정 삭제  
  고구려 고연수가 당나라에 투항해 이씨 성 받아 이연수가 되어 쓴 책이 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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