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북한 '점제현신사비'는 가짜다!

미래사적으로 일제의 만행에서 벗어남에도 학계는 왜이러나?

플러스코리아 | 기사입력 2009/11/12 [11:18]

[단독]북한 '점제현신사비'는 가짜다!

미래사적으로 일제의 만행에서 벗어남에도 학계는 왜이러나?

플러스코리아 | 입력 : 2009/11/12 [11:18]
본지는 북한 국보급 문화재인 ‘점제현신사비(黏蟬縣神祠碑)’가 가짜라는 주장들이 인터넷 상에서 회자되어 그 진위여부를 추적해 보았다.

(* 점제현신사비(黏蟬縣神祠碑)는 평안남도 온천군(溫泉郡) 성현리(城峴里)에 있는 낙랑시대 고비(古碑)로 1913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의 금서룡(今西龍)에 의해 조사된 것으로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16호로 알려짐. 한사군 재 한반도설의 가장 중심되는 유물.)

이같은 주장은 1990년 1월 17일 손보기 박사가 (사)한배달과의 대담에서 ‘현재 북한의 국보급 유물인 점제현신사비는 일본인 금서룡(今西龍)이 1913년에 중국에서 가져와 날조한 날조품’이라고 증언한 것이 9월호 한배달 잡지에 실리면서 처음 알려졌다.

(* 손보기 : 연세대 석좌교수, 연세대 박물관장, 단국대 박물관장)


▲ 한배달 잡지에 소개된 1990년 대담내용 기사     ©플러스코리아


손보기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일본인 금서룡(今西龍)이 중국 하북성 갈석산에 있었던 비석을 파내어 한반도 평남 온천군으로 배로 실어 가져와 한반도내 한사군설을 조작하는데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동경로를 보면 아래와 같다. 

▲ 하북성 갈석산에서 평남온천으로 비문을 이동한 경로     ©플러스코리아


손보기 교수는 ‘갈석산에 보면 신사비 크기의 바위를 쪼아낸 자국이 있으며 신사비의 돌을 조금 떼어내고, 갈석산의 돌을 떼어서 맞추어 보면 딱 맞아요. 일본인들이 배로 실어다가 10리 밖에 못와서 그곳에 뉘어놓고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배경으로 비의 사진을 찍어서 그곳이 낙랑의 점제현이다'라고 날조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래 사진이 1913년 당시 찍은 사진이다. 

▲ 평남 온천 앞바다에 10리를 이동해 해안가에서 찍은 사진     ©자료사진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지가 이미 소개한바있는 '사기조선열전'에 나오는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내에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이 한반도내로 조작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될 수 있다.

* 본지 2009. 10. 22자 <'한사군' 한반도 아닌 중국대륙에 있었다!> 기사 참조 :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3138&section=section78&section2=상고사/고대사

그런데 이미 중앙일보 1995년 5월 8일자 북한뉴스 기사를 보면 북한역사학자들은 그동안 ‘낙랑군 평양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제시돼 온 ‘점제현신사비’가 일제의 날조품이었다는게 밝혀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 중앙일보 보도내용     ©플러스코리아


도서출판 중심에서 2001년 4월 3일 발간된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라는 책을 보면 ‘북한 사회과학원 논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북한 사회과학원 논문     ©플러스코리아

“해방전 일제 어용사가들은 강점기간 동안 평양인근 100여기의 무덤을 파헤쳐 한의 낙랑유물로 변조하여 ‘한나라 낙랑군 재 평양설’을 날조 하였지만, 북한은 이후 30배가 많은 3천여기의 무덤을 발굴 정리한 결과 평양일대 유적은 고조선을 이어 받은 ‘최씨의 낙랑국 유적’으로 밝혀졌으며 중국의 유물과는 현저히 다른 아니 오히려 앞선 유물로 판명되었다.“

즉 “한나라 낙랑군 재평양설은 일본놈들과 반동사가들, 일부 대국주의사가들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수많은 날조의 증거들이 있지만 ‘점제현 신사비’를 증빙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성년대에서는 흑운모를 시료로 하여 ‘핵분렬 흔적법’으로 측정한데 의하면 점제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2천 9백만 년±1천 3백만 년이고, 온천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4백만 년±1천 2백만 년, 오석산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백만 년±1천 2백만 년, 마영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7백만 년±1천 2백만 년이다. 

이처럼 점제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온천과 룡강일대의 화강암 생성년대보다 2천 8백만 년~2천 2백만 년이다 더 오래다. 이것은 점제비 화강암이 그 근방의 화강암과는 돌 나이에서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지방의 화강암이라는 것을 말해준다.(중략)

이상의 사실은 점제비는 온천과 그 근방의 화강암이 아닌 다른 지방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도 온천과 그 근방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으며 평양일대에서는 그것을 많이 리용하고 있다. 그러면 왜 자기 지방의 석재로 만들지 않은 점제비가 온천 땅에서 나타났는가? 그것은 다른 지방에서 만든 것을 온천지방에 옮겨놓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상기내용을 종합해보면 중국 하북성에 있었던 비석을 일본인 금서룡(今西龍)이 한반도로 가져와 ‘한낙랑군 재평양설’을 날조하는데 이용하였으며, 북한학자들은 이미 그것이 날조품이라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는데 우리나라 학자들만 아직도 이 비문을 근거로 ‘한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35동안 이땅에 ‘단군신화론’과 ‘반도사관’을 날조하는데 노력을 하였는데, 바로 금서룡(今西龍)이 조선사편수회에서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상기 내용들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우리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고치지 못하는가? 참으로 궁금하다. 아래 한반도내 한사군 지도가 64년째 교육되고 있는데 사기조선열전의 내용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지 않다. 이제 진실을 교육할때가 되지 않았는가?


▲ 사기조선열전에 나오는 제후의 위치와 학계 통설 비교     ©플러스코리아

역사의 진실 09/11/12 [14:51] 수정 삭제  
  1.소위,한(전한)4군:한4군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조작된 기록이라 해야 할 것이다.위만조선이 내부분열로 망하자 한나라에 투항한 위만조선 지배층들(조선인들)에게 산동지역을 영역으로 하는 위만조선의 땅을 배분해 준 내용이 한4군으로 조작된 것이다.한4군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한나라 제후로 봉직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5군이라 해야 맞다.북부여영역인 요서지역은 고두막군대와 위만조선지역의 조선유민들의 연합으로 인하여 한나라가 공략하지 못했다.소위,한4군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마천의 사기기록이며 한4군으로 착각하는 조선5군은 산동지역에 존재했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2.최씨 낙랑국:번조선에 해당하는 요서지역의 낙랑국 최숭이 47대 고열가대단군이후 단군3조선이 붕괴되자, 무리를 이끌고 마조선의 왕검성인 평양지역에 개국한 나라다.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로 유명한 나라다.공주는 국왕의 딸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4군의 하나인 낙랑군 태수 딸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자들이 많다. 골빈 자들이다.

3.후한 낙랑군:북한 평양지역에서 후한시대 인구조사목간이 출토되었고, 무덤들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후한 광무제때 고구려(초기수도는 국내성) 후미를 공격하기 위해 북한 평양인근에 설치한 낙랑군이다.[삼국사기]에도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후한(後漢) 광무제는 A.D 44년에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하여 바다건너 A.D 32년에 고구려에 항복한 낙랑(樂浪)의 우거수(右渠帥) 소마시(蘇馬諟)를 꾀어 살수(薩水:청천강) 이남 지방을 점령하여 그 곳에 낙랑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을 설치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살수이남을 상실하였다"라고 기록된 내용이다.

3번 내용이 이해되려면 고구려 수도문제가 언급되야 한다.

[한단고기][삼국사기],지나국[사서]기록에 따르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고두막의 골본부여에 망명한 해(고)주몽은 고두막의 아들 고무서에게 아들이 없어 고무서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하고 왕위에 올랐다.그러나,부여인들의 반대하자(반 고구려세력이 바로 고두막의 후예라 자처하는 구태세력으로 요서지역에서 한반도 평안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한강지역의 온조-십제를 통합하고 백제를 개국한 주역이다), 골본에서 이주하여 골본천(심양방면)에 이르니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험고(險固)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혼강) 위(골본성=오녀산성)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해씨를 성으로 삼았다.후에 해씨는 태조대제때 고씨로 바뀌었다.

[구당서]에도 "고구려국의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장안성)은 漢나라의 옛 땅인 낙랑군(樂浪郡)이다..거리는 경사(京師:서안)로부터 5천리이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이때 한나라는 전한이 아니라 신나라를 무너뜨린 광무제의 후한을 의미한다. 서안으로부터 5천라고 했으니 북한 평양까지 거의 5천리가 나온다.장수대제 14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북한평양이 아니라 요양(평양)이다. 장수대제는 광개토대제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지키기 위하여 요양으로 천도하기 2년 전인 A.D 425년에 북위(北魏)와 동맹을 맺었고, 북위와 전쟁 가능성이 없어지자 수도를 요양으로 옮겼다. 이 평양성은 문자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때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기 15년조]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15년(A.D 427년)에 수도를 평양 동황성에서 평양성(요양 방면)으로 옮겼다.

기록내용은「장수왕(長壽王) 15년(A.D 427년)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十五年移都平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곳은 요의 동경(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遼史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고구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한다...진나라 의희(A.D 405~418년) 후 장수왕은 (요양의)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 동남 1000여리에 있는 평양성(북한 평양성)은 전에 (장수왕이 기거하던 요양의) 평양성이 아니다.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晉 義熙 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元史地里志 東寧路]

현재 북한 평양성의 정확한 명칭은 장안성이다.장안성으로의 천도는 25대 평원왕때 이루어졌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평원왕기 28년조]에는 "「평원왕(平原王) 28년(A.D 586년)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二十八年 移都長安城」"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는 평원왕 28년(A.D 586년)에 수도를 평양성(요양 방면)에서 장안성(長安城:평양성)으로 옮겼다. 이는 수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평양성은 고구려·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개·수축되었으며 성내 여러 곳에서 고구려시대 기와와 주춧돌이 출토되었고 만수대(萬壽臺) 부근에서 고구려시대로 추정되는 건축유지(遺址)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이 때 평양을 창려라고 착각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구려 후기 수도는 북한 평양이다.물론 요서지역까지 고구려 영향권에 두었다.

북한 평양지역은 낙랑문제로 인해 논쟁이 많은 지역이다. 문헌.고고학적으로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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