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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일제 만행 알리겠다”

세계최초 테마인권박물관 ...역사 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

박물관뉴스 | 기사입력 2008/02/18 [07:52]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일제 만행 알리겠다”

세계최초 테마인권박물관 ...역사 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

박물관뉴스 | 입력 : 2008/02/18 [07:52]
▲ 10주년을 맞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겠다고 밝히는 승연 부관장.     ©박물관뉴스
“세계 최초의 인권 테마 박물관으로 자리잡은 만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보존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현재 나눔의 집을 성역화 하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부관장을 맡아 일본 제국주주의의 만행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고 있는 승연 수님.

스님은 힘주어 말한다. “정부에 등록한 240명의 위안부 할머니중 이제 1백5명의 할머니들만이 생존해 있다”면서“이분들이 살아 계실때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가 이뤄져야 한일간에 진정한 교류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갖고 있다. 지난 1992년부터 시작된 수요집회가 지난 13일 벌써 800회를 맞았다. 세계에서 이처럼 단일 사안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집회를 하는 곳은 없다. 이는 아직도 한일간에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8년 문을 연 ‘일본 위안부 역사관’. 세계 최초의 인권 테마박물관으로 불린다. 승연 스님으로부터 위안부 역사관의 숨은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할머니들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며 고개를 떨구는 승연 부관장.     ©박물관뉴스
- 역사관이 만들어지게 된 동기는.

처음부터 역사관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최초 일본 위안부 증언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로 출발했다는 점이 다른 박물관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처음 할머니들을 만날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위안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결혼을 거의 못했고 비닐하우스촌 등에서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등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같은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하자는 취지로 지난 1992년 불교인권위원회에서 처음 할머니들의 위한 쉼터를 만든 것이 출발의 동기가 됐다. 그후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이 운영되면서 일제의 종군 위안부 실상을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역사관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지난 1998년 8월 14일 ‘일본 위안부 역사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일본 위안부 역사관은 세계 최초의 인권 박물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역사관에 모형으로 복원된 위안소를 보면 누구나 위안부 문제에 이견을 달지 못한다.
 
건립 과정에서 어려웟던 점은.

건립 당시에는 사회적 편견이 심했다. 정신대라는 말이 건립 인근 주민들에게는 정신병원이 들어오는 것으로 오해해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주변에서는 혐오시설로 인식해 보이지 않는 편견이 심했다. 뿐만 아니라 건립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는 데도 어려웠다.
 
그러나 토지와 건축비 등은 뜻있는 분들의 성금으로 역사관이 건립됐다. 건립 당시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도움도 컸다.일본 위안부 전문가인 하야시 교수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또한 건립 지역이 상수도보호지역이라 인허가 당시 어려웠다. 그러나 당시 광주군수 등이 도움을 줘 어렵게 쉼터가 마련됐다.
 
-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는데 행사 계획은.

그동안 할머니들의 위주로 행사로 진행해 왔다. 이번에는 작가들이나 기록을 남겼던 분들을 초대해 행사를 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역사관에 보면 자료를 준 분들중 일본 사람이 많은데 이들도 초청해 1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 역사관을 건립하는데 숨은 사연이 있다면.

현재 나눔의 집에는 8명의 할머니들이 거주하고 있다. 나눔의 집은 일본 위안부 복지시설이다. 나눔의 집 정원은 10명인 세계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노인복지시설이다.세계에서 가장 작은 시설이 정원 30명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눔의 집은 1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어르신들이 거주하는 복지시설이다. 이수성 국무총리가 총리로 재직할 때 할머니들의 어려운 점을 안타까워 해 정원 10명의 나눔의 집 허가를 내줘 오늘에 이르게 됐다. 당시 이수성 전 총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 지난 13일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가진 수요집회가 800회를 넘었다. 수요집회가 갖는 의미는.

당초 수요집회는 일본 총리의 방한에 맞춰 항의 집회로 계획됐던 것이 항의 집회 후 일본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자 이후 할머니들이 자발적으로 집회를 추진해 오고 있다. 수요집회는 세계에서 한 사안에 대해 이처럼 장기적으로 할머니들이 집회를 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말 그대로 기네스북에 올라갈 기록이다. 이 집회는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상징적성을 가진 집회다. 이 집회가 그치는 순간이 종권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는 그 순간이 될 것이다.
▲ 할머니들에 대한 사회의 보다 많은 관심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승연 부관장.     ©박물관뉴스
-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보수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데 이같은 정치정세가 일본위안부 문제해결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지난 2005년 한일정상 회담 당시 일본 위안부 문제가 쟁점이 됐었다. 당시에도 종군 위안부에 대한 사안이 빠져 있었던 점은 아쉽다. 한일간 정상회담시 의제로 상정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가 아쉽다. 특히 이명박 당선인이 최근 한일간의 미묘한 문제에 대해 일본에 맡기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에 대해 할머니들은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다.

미국 의회를 비롯해 캐나다,네덜란드 의회에서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결의안이 잇따라 통과되고 있지만 구속력이 없어 실효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해결의 주체인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조치가 없는 점도 문제다. 정치권의 결단이 요구된다.
 
- 역사관의 성과는.

당초 나눔의 집은 쉼터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수요집회,공개강좌,그림전시 그리고 2003년부터 시작된 한일대학생들이 참가하는 워크샵 등을 통해 일본의 과거 침략사를 상징하는 중심이 되고 있다. 이같은 성과에 힘입어 한일 관계에 관심있는 일본 지식인들은 광화문은 모르지만 나눔의 집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일본 사회에 강력한 문제를 제기해 왔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역사가 같이 병존하는 살아있는 역사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에 이러한 역사관은 어디에도 없다.
 
역사관과 연을 맺게 된 것은.

나눔의 집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복지 지원업무를 위해 연을 맺게 됐다. 그러나 이후 할머니들의 삶을 알게 되면서 위안부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고있다.
할머니들의 한이 서려있는 유물들을 어떻게 역사적 유물로 보존할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다. 
 
역사관을 방문할 때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장소가 있다면.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지하에 만든 위안소가 있는데 방문자들이 이 위안소를 보는 순간 위안부들의 실상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당시 참혹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느끼는 공감의 장소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관에 있는 자료들이 우리 역사의 아픔을 되돌아 보고 다시는 이같은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결의를 다지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특히 역사관 입구 벽면에 만들어진 작가 임옥상씨의 ‘누가 이들에게...’는 다시 태어난다면 좋은 사람 만나 아들딸 낳아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표현을 담은 작품도 할머니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세계 최초의 인권 테마 박물관으로 자리잡은 만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보존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현재 나눔의 집을 성역화 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인근에 추모공간,추모비 등을 조성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달래줄 계획이다. 그러나 민간에서 성역화를 하는 것은 어렵다. 국가나 지자체가 보다 전향적인 자세가 요구된다고 본다.
 
-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본의 위안부 실상을 알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조만간 돌아 가시면 위안부 실상을 알고 있는 증언자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를 위해 비디오와 동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같은 방대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록으로 남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겠다. 일본 위안부 역사를 부끄러운 역사로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었으면 한다.
 
- 당시 위안부 숫자는.

한국을 포함해 20만명이 위안부로 끌려 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일뿐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일부의 추정치에 따르면 8만에서 20만명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처럼 수치가 맞지 않는 것은 한일간에 공동조사 등이 이뤄지지 않앗다. 현재 정부에 등록한 위안부가 240명에 불과하고 현재 생존자가 105명이 생존해 있다. 정부의 보다 전향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의 아픔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역사관을 찾아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러한 장소를 찾지 않는다. 특히 학생들이 이 곳에와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역설적이게도 일본 학생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오는데 우리나라 학교 학생들은 오지 않는다.이것만 보아도 좋은 대조가 된다.
▲ 사회의 편견과 무관심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승연 부관장.     ©박물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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