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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나라와 관련 있는 국호 ‘신라’ (4부)

신나라 왕망과 신라 김씨는 김일제의 후손

편집부 | 기사입력 2014/03/23 [14:21]

신(新)나라와 관련 있는 국호 ‘신라’ (4부)

신나라 왕망과 신라 김씨는 김일제의 후손

편집부 | 입력 : 2014/03/23 [14:21]
김일제의 증손자인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에서 핵심 정치실세였던 김씨들은 서기 23년 유씨의 나라인 후한(後漢)이 세워지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탈출을 감행해 흉노 휴도왕의 활동무대였던 요동 땅으로 숨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김씨들은 DNA가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당시 요동에 있던 서나벌(徐那伐)에 들어가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실세로 등장하게 된다.
 
신라에서도 정치실세가 되는 김씨 집안
 
서나벌의 탈해 이사금 9년(65년)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는 김알지가 태어난다. 도읍인 금성의 서쪽에 있는 시림(始林)의 숲속에서 새벽녘에 큰 닭울음소리가 나자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니, 금색으로 된 작은 함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린 채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기에 그 함을 가져다 열어보니 얼굴이 잘 생긴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임금이 무척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보내준 선물 아니겠는가?”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알지(閼智)라 이름 짓고 금색 함(金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왕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는 국호로 삼게 된다.
 
▲ 조선왕조 인조 때 조속이 그린 금궤도     © 편집부
 

5대 파사이사금(80~112)의 왕비는 김씨로 갈문왕 허루의 딸이며, 6대 지마이사금(112~134)의 왕비 역시 김씨로 갈문왕 마제의 딸이었다. 석탈해의 손자인 9대 벌휴이사금(184~196)의 어머니가 김씨이며, 11대 조분이사금(230~247)의 어머니 역시 김씨로 갈문왕 구도의 딸이다. 이렇듯 김씨는 신라로 들어오자마자 갈문왕이 되고 왕비를 배출하는 등 신라에서 정치권력의 실세로 등장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길 “신라 김씨들은 김일제의 후손이 아니라 모두 김알지의 후손”으로 알고 있으나,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파사이사금이 즉위할 때인 80년은 김알지가 15살 때이기 때문에 김알지 이전에 이미 다른 김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다른 김씨들이 바로 신나라에서 난을 피해 건너온 김일제의 후손들이 아니겠는가?
 
김알지의 계통은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이사금(13대 임금)으로 이어져 김알지 탄생 약 200년 후인 262년에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다. 이후 14/15/16대는 석(昔)씨가 왕을 하다가,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와 부인이 모두 김씨인 17대 내물이사금 이후는 김씨가 계속 신라의 왕이 된다.  
 
▲ 김알지 존영도 (김산호화백 작품)     © 편집부


이에 대해 <삼국사기>를 찬한 사신(史臣)은 “신라의 경우는 같은 성씨를 취할 뿐 아니라 친사촌이나 고종사촌·이종사촌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으니,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중국의 예법으로 따지면 크게 어긋난 것이다. 저 흉노의 풍속에 어미도 간음하고 자식도 간음하는 행동은 또 이보다 더 심한 것이다”라고 혹평하였다.
 
이는 기마민족의 풍습인 형사취수(兄死娶嫂)제를 모르고 한 말일 것이다. 형사취수제란 아버지/형이 죽은 뒤에 아들/동생이 계모/형수를 취해 함께 사는 제도로 흉노와 고구리 등 북방유목민족에게 있는 풍습이다. 이 제도는 아버지/형이 죽으면 재산을 물려받은 계모/형수가 만일의 경우 다른 혈족의 남자와 혼인하게 되면 혈족의 재산이 바깥으로 유출됨을 방지하며, 또한 계모/형수에게 재산이 없을 경우 생활능력이 없으므로 혈족이 부양해 준다는 의미가 있는 제도이다.
 
이를 두고 풍습이 중국과 다르다는 이유로 혹평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는 후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사서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중국의 경우에도 수나라 양제가 부왕인 문제의 후궁인 한국부인을 취한 것이나, 당태종 이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그 부인들을 취했으며, 당 고종이 부왕인 당태종의 후궁인 무씨(측천무후)를 취한 적이 있다. 이는 그들이 북방기마민족인 선비(鮮卑)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당태종/고종 부자와 혼인한 중국 유일의 여황제 무측천     © 편집부


'신나라'와 관계있는 '국호 신라'
 
<삼국사기>에 초기 신라의 국호는 서나벌 -> 계림 -> 신라로 바뀐다는 기록이 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국호를 사로(斯盧) 또는 진한(辰韓)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삼국사기>에 “307년 신라라는 국호로 복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신라라는 국호는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라는 국호는 분명 왕망의 신(新)나라와 뭔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삼국사기> 지증왕 4년(503)의 기록에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 하였는데, ‘신은 덕업을 일신(德業日新)한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四方網羅)한다는 뜻’이 있으니 신라를 국호를 정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생각되옵니다”라고 고한다.
 
또한 “예로부터 국가를 지닌 분은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22대에 이르도록 다만 방언(方言)만을 칭하고 존호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지금 여러 신하의 모든 의견에 의하여 삼가 ‘신라국왕’이란 존호를 올리시옵소서”라는 기록에서 초기 신라는 왕이 다스리던 나라 즉 왕국(王國)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래 그때까지 신라의 통치자를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방언인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칭한 것으로 보아 전기 신라는 고구리의 영향력 아래 있던 속국이거나 조공을 바치던 작은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근거는 호태왕비의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는 문구로 보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태왕 비문에 따르면 399년 왜가 신라에 쳐들어오자 신라에서 광개토태왕에게 사신을 보내 "노객(奴客=신라왕)이 백성을 위해 태왕께 와서 명을 청합니다"라고 하자 태왕이 은혜를 베풀어 그 충성을 칭찬하고 특별히 사신을 함께 보내 (출병을) 알렸고 원병을 보내 왜구를 격파했다는 후속문구가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도 초기 신라는 고구리와 전쟁을 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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