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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족 기원과 신라의 김알지 왕족

[한단고기]기록이 증명하는대로 흉노는 단군조선(번조선)의 제후국

민족시대 | 기사입력 2008/12/16 [03:19]

스키타이족 기원과 신라의 김알지 왕족

[한단고기]기록이 증명하는대로 흉노는 단군조선(번조선)의 제후국

민족시대 | 입력 : 2008/12/16 [03:19]
단군조선.고구려의 제후국 흉노(스키타이)의 기원,
단군조선의 장자국 고구려에 대한 제후국 흉노족의 반란
 
중국인들이 지들 나름대로 지역적으로 구분하기위해 사용하여 문헌에 기록한 예맥이니 동호니 흉노니 말갈이니 하는 용어는 별 의미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유목생활을 한 북방 동이족, 그리고 농경생활을 한 남방동이족, 그리고 동이족과 백인들이 피가 섞인 투르크족(터키)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이들 종족은 모계사회인 마고성의 여성 지도자 마고할머니 시대를 계승한 한인의 한국-한웅 배달국-단군 조선의 계보를 잇는 부여와 고구려-대진국-고려-조선-대한민국을 장자국으로 삼는 범동이족으로 볼 수 있다. 고리(부여.고구려)족의 후예 징기즈칸이 유라시아 전역을 통일하여 단군민족의 통합을 이루어냈듯이 21세기 한국연방의 부활이 우리 민족의 사명이라 할 것이다.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중국이 '소란한 오랑캐'로 비하한 흉노는 단군3조선 중 번한에 속한 제후국으로 내몽골 초원지역에서 발원한 북방동이족으로 중국과 유럽을 위협하고 지배한 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제후국이다. 또한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을 지배한 투르크족의 선우였다.
 
흉노족의 조상은 아시아 최초 유목민으로 기록된 스키타이족으로 내몽골 초원지역에서 일어나 서진하여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하고 알타이산의 황금으로 세련된 샤머니즘을 반영한 황금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백인들과 피를 섞여 투르크족을 형성한 것 같다. 그래서 흉노족이였던 신라 김씨왕족들이 중앙 아시아 투르크족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중앙 아시아인들(투르크인들)이 경주에 많이 거주한 배경이기도 하겠다. 

 
중국을 통일하고 300만에 달하는 인해전술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900년의 천자국 고구려에 대적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선비족이다. 그런데, 선비족도 북방유목민들로 반이상이 흉노족이다. 그런데, 신라 김씨왕족의 혈통이 흉노족아닌가? 고구려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당나라를 공략하여 중국을 통일한 후에 고구려.백제.신라가 분할통치하자는 제안을 거부한 배경(한단고기 기록)이며, 결국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킬 수 밖에 없는 혈통적인 배경과 친연성이 있는 것이다. 같은 동이계라고 하더라도 고구려.백제의 구성종족상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민들로 구성된 나라로 정통적으로 고대 중국인들이 기록한[산해경]이 증거하듯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은 정통적으로 백민(태양을 숭상하는 하늘의 백성)들이 사는 지역이며 천자국이며 대인국이며 군자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 큰'대'은 갑골문자의 모양으로 보아도 한반도.만주(대방)의 동이족을, 중원지역(인방)에 사는 한족들을 그냥 사람'인'으로 표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대인'의 주인공은 한국인들이고, 그냥 사람'인'은 한족을 의미한 것인데, 뒤바뀐 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부모국으로 삼았던 흉노족(선비족)인 신라 김씨왕족과 수.당나라가 협공하여 고구려를 공멸시킨 역사적 사건은 단군민족사에서 심판하자면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장자국에 반역을 저지른 패륜적 사건이라 하겠다! 즉, 자식이 천륜을 저버리고 부모를 살해한 패륜적 사건과 동일하다 하겠다. 그 업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천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의 범죄와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화해협력나눔으로 통합하려고 한다면 후손들이 복을 받을 것이요, 그 잘못과 범죄를 반성사죄하지 않고 시정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은폐하고 기만하며 오만한 자세로 나간다면 후손들 또한 징벌과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주법칙이나 순리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윤복현]
 
[자료]문헌과 비문기록이 증명하는 가야.신라 김씨왕족들의 실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金)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서는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大輔)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처음이었다." 라고 하였다.

 
청(淸)나라 유연정(劉燕庭)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경주 김씨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해동비고(海東碑攷)에 있는 문무욍비문(文武王碑文)에 문무왕의 15대 조(祖)가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이라 하였고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비문(金仁問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김인문의)15대 祖라 하였으며 문무왕의 9대 손(孫)인 흥덕왕 릉비문(興德王 陵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흥덕왕의) 24대 祖라 하였다.

또한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인 金仁問의 비문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金氏로 姓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 라고 했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남가야 시조 수로(南伽倻 始祖 首露)는 신라(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김알지.김수로.김유신 세력은 소호금(김)천씨의 후손, 그리고 신라
 
 
 
 
[한단고기]기록이 증명하는대로 흉노는 단군조선(번조선)의 제후국입니다. 김알지.김수로.김유신 등 신라.가야의 김씨왕족들은 자신들이 소호금천씨 후손들이라고 묘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흉노족도 결국 소호금천씨의 후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소호금천씨는 중국의 동해밖에 살던(중국 산해경) 백민(한국인=한반도 사람들)인데, 고대에 산동반도로 이동하여 중국문명을 일으킨 지도자들이였습니다. 그 일부가 중국 서북부로 이동하여 흉노족을 형성하여 아시아-유럽의 초원을 지배한 북방유목민족이 된 것입니다.
 
[한단고기]에는 그 흉노의 시조를 단군의 신하였다가 단군에게 반항하여 약수로 유배갔다가 풀려난 색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즉,흉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으며,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가 흉노의 선우라고 삼국지로 유명한 오나라의 손권이 고구려에 보낸 편지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단군민족)을 네트워크로 묶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즉, 북방유목민족의 패자는 단군조선-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였습니다.
 
경상도지역에 위치한 신라는 한반도3한이 존재할 당시에 기록한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보면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에 붙잡혀 노역에 시달린 진한 사람들이 노역를 피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피하여 한반도의 토착세력인 마한의 진왕에게 살 땅을 요구하니 마한의 동쪽지역(경상도지역)을 분양해 주었습니다. 즉, 1차로 본래 마한사람들이 살던 지금의 경상도지역으로 이동해와 정착한 경상도 토착세력은 단군3조선 중 만주지역인 진한지역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육로가 아니라, 산동지역으로 도피하여 당시 해양루트를 통하여 이동해 왔다고 봐야 합니다. 3차로 경상도지역에 정착한 신라 김알지 세력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해양루트를 통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동해 왔다고 봐야 맞습니다. 그들의 해양루트에서 신나라를 개국한 왕망이 주조한 화폐들이 소량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왕망의 쿠테타에 동참했던 흉노족 김알지세력의 동참을 의미하고, 쿠테타에 실패하여 멸족을 피하여 도망온 흔적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2차는 [한단고기]에 '파소'라는 이름으로 '성모'로 기록된 부여공주의 아들이였던 박혁거세 세력이 옥저를 떠나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경상도 지역에 정착한 것입니다. 부여를 떠난 배경에는 [한단고기]에 남편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고로 황제가 떠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혼인하지 않는 처녀가 아비를 모르는 아이를 임신하여 미혼모가 되어서 황실의 수치임으로 황제가 떠나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라의 기원이며, 신라세력의 융합과정이다. 마한지역에 진한 사람들과 부여 사람들과 북방의 유목민들이 노역과 쿠테타의 실패와 황실의 권고로 뿌리로 올라가면 조상들의 땅인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떠나 올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단군3조선 중 마한의 진왕을 실질적인 통치권자로 인정하고 초기에는 조공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했다가 세력이 커지면서 마한의 통치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이상 한국고대사 연구진들의 수고로운 연구자료에 힘입어 정리한 내용입니다.[윤복현]

[보충자료]김알지 신화(金閼智 神話) 와 흉노족 신라 김씨왕족의 기원

김알지 신화는 고려 인종23년(1145)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와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으며

고려후기 충렬왕 7년(1281)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紀異) <김알지탈해왕대 (金閼智脫解王代) 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다.

위 두 고서(古書)에서는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에 대해 부분적으로 조금 다르게 기술(記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金)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서는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大輔)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처음이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淸)나라 유연정(劉燕庭)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해동비고(海東碑攷)에 있는 문무욍비문(文武王碑文)에 문무왕의 15대 조(祖)가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이라 하였고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비문(金仁問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김인문의)15대 祖라 하였으며 문무왕의 9대 손(孫)인 흥덕왕 릉비문(興德王 陵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흥덕왕의) 24대 祖라 하였다.

또한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인 金仁問의 비문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金氏로 姓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 라고 했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남가야 시조 수로(南伽倻 始祖 首露)는 신라(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또 김부식은 "김유신은 왕경인(王京人)이다. 12代祖인 수로(首露)는 하허인(何許人)인지 알 수 없다. 후한 건무(後漢 建武) 18년 壬寅(AD 42)에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가락9촌(駕洛九村)을 바라보고 그 땅에 개국(開國)하여 국호를 가야(伽耶)라 했다" 고 하였다.

점필제 김종직은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혹은 스스로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고 했으며 "신라고지(新羅古誌)에 이르기를 김알지도 금관국 수로왕의 후요 소호금천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고 하였다.

문정창(文定昌)씨는 그의 저서 <伽倻史>에서 "동방의 김씨는 모두 소호금천씨의 후손이요 金日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김유신은 김수로왕 후손인데 그 묘비문에 "소호지윤 칙남가야시조 수로여신라 동성야(少昊之胤 則南伽倻始祖 首露與新羅 同姓也)"라 하였으며 김수로왕의 외손인 문무왕의 능비문에 "지재생 - - - 후 제천지윤 전7엽(枝載生 - - - 侯 祭天之胤 傳七葉)"이라 했으니 후(侯)자 앞에는 투자가 있었을 것이니 곧 투후 김일제의 후손은 7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다는 뜻이다. 김알지는 김수로 보다 24년 뒤에 낳았으니 그 일족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김법민(金法敏), 즉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 파편이 있는데 이 비문 중에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하였으며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侯 祭天之胤傳七葉」에서 (투)侯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郭去病)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金日제를 가리킨다. 金日제와 그 후손들의 생애는 전한서(前漢書)와 열전(列傳)에 있고 중국 서안(中國 西安)에 김일제(金日제)의 무덤이 있는바 실체가 분명한 김일제(金日제)를 문무왕의 비문에 『우리 조상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은 제천금인(祭天金人) 즉 金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손 김일제 일족이 漢나라에서 영달하더니 김왕망(金王莽)이 쿠테타로 한(漢)을 멸하고 신국(新國)을 세웠다가 17년 뒤 유수(劉秀)에게 패망하였다.(서기 25년)

이에 그 일족의 일부가 김해지방으로 왔고 김해에 정착한 김수로왕의 부친은 김해군 장유면 태정리 부근에 살면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형제 아들을 낳았다고 추찰된다.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출생) 태정리 부근 태봉(胎峰)에는 태대(胎臺)가 있는데 이것은 김수로왕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한다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발견된 중국 왕망시대의 화천(貨泉)은 김수로왕의 선친 또는 김수로왕 자신이 왕망의 신제국(新帝國) 출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방증(傍證)이 될 수 있다. 또 김해부근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과 중국화페인 오수전(五銖錢)등도 그 방증이 된다. 김수로왕의 이름이 청예(靑裔)인 것은 소호의 후손임을 암시한다. 소호금천씨의 호가 청양(靑陽)이기 때문이다.

또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존호(尊號)가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인 점은 중국의 보주(普州)와 어떤 연관(聯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경(漢鏡), 용봉환두대도(龍鳳環頭大刀)등이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점, 그리고 은(殷)나라 사람들 처럼 좌지왕때 복사(卜師)가 점을 쳐서 괘사(卦辭)를 얻은 점 등은 연관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는 동이족(東夷族)

소호금천씨의 本고장은 남만주 봉천 요동지방이었는데 그는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 겨려다. 소호금천씨는 일찌기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중국역사의 始源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산해경( 山海經)이라는 중국사서에 "소호(少昊)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는 나라" 라고 하였다. 중국의 사학자 당란(唐蘭)은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산동성 곡부(曲阜)에 도읍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근년에 발굴된 ‘대문구문명 당시에 이미 소호(少昊) 나라가 있었으며 소호국은 산동성 곡부지방에 있었다’ 고 하였다.

여불위(呂不韋)가 지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그 날은 경신일(庚申日)이고 그 임금은 소호(少昊)다. 경신(庚申)은 금(金)의 날로 소호는 금덕(金德)으로 천하에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金天이라 하였다."

소호국의 국조 지(國祖 摯)가 등극한 날인 경신일(庚申日)은 우리의 민속에 이어오고 있으니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庚申年 庚申月 庚申日)이라고 기록하는 습관은 "이 방아도 소호씨가 왕위에 오른 날에 탄생했다."는 뜻이다.

소호의 나라는 고신씨(高辛氏)의 제(帝) 곡이 이어 받았는데 제곡은 은나라의 조상이다.소호금천씨의 후손이 그 후 중국의 서북부 내몽고에 위치한 농서지방에서 흉노 모돈씨(匈奴 冒頓氏)의 한 후국(一候國)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120년 한나라의 포기장군 곽거병(郭去病)이 농서지방에 쳐들어갔을 때 휴도왕(休屠王)의 太子인 14세의 김일제가 그의 아우 윤(倫)과 함께 모친 알씨(閼氏)를 모시고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다. 휴도왕의 나라는 중국서북부에 위치한 지금의 무위군(武威郡)이다. 포로가 된 김일제는 부마도위 광록대부가 되었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가 두 아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으므로 일제의 모친이 사망하매 무제가 알씨의 화상을 감천궁(甘泉宮)에 그려놓고 친필로 "흉노왕비 알씨(匈奴王妃 閼氏)"라 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김일제를 후(候)로 봉(封)하고 일제가 사망하매시호( 諡)號를 경후(敬候)라 하였고 아들 상(常)을 투후로 삼았다. 이리하여 김일제를 비롯하여 國, 安, 常, 欽, 當, 遵, 등 후손이 투후의 벼슬을 하였다. 김일제에게 常과 建 두 아들이 있었는데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하므로 3인이 친하게 지냈으며 상이 소제의 봉거(奉車)가 되고 건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소제가 제위 13년만에 下世하고 선제(宣帝)가 등극하자 상이 광록훈(光錄勳)이 되었으며 상이 죽고 國이 투후벼슬을 이어 받았고 국이 아들없이 죽으니 일제의 둘째 아들 건의 손자 當에게 투후를 제수하였으며 그 후 當의 아들 성(星)이 투후를 계승하였다. 전한서 기록에 의하면 투후 當의 모친 南은 곧 왕망의 生母였다.

전한서(前漢書)의 왕망 전(王莽 傳)에 의하면 효원황후의 生父와 그 兄弟가 모두 원제(元帝)와 성제(成帝)때에 후(候)가 되고 보국(輔國)의 位에 올랐으며 또한 김씨가(金氏家)에서 봉(封)을 받은 侯의 수가 9명에 달한다 하였다.

김일제의 아우인 윤(倫)의 아들 안상(安上)은 선제(宣帝)때 궐내(闕內)의 후(候)가 되어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궁중과 부중의 실권을 장악했다. 안상에게 常, 岑, 敞, 明 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중낭장(中郞將), 광록대부(光祿大夫),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원제(元帝)가 8세에 태자(太子)가 되자 김창(金敞)이 중서자(中庶子 즉 太子師)가 되어 은총을 받았으며 원제(元帝)가 즉위할 때 김당(金當)의 딸을 왕비로 맞아드렸다.

김일제전에는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모친인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아들이라 했으며 효원왕후전에는 효원왕후를 김당의 딸이라 하였다. 원제가 즉위한 후부터 김씨일문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김창(金敞)은 涉, 參, 饒,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제(成帝)때 모두 시중기도위(侍中騎都尉), 영삼보(領三輔), 호도위(胡越騎)가 되었다.섭(涉)에게 탕(湯), 융(融)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다 제조장대부(諸曹將大夫)가 되었으며 또 섭(涉)의 종부(從父) 흠(欽)의 아우 천(遷)이 상서령(尙書令)이 되니 이제 한(漢)나라 왕실(王室)은 金氏의 권력하(權力下)에 있게 되었다.

전한서(前漢書)에 왕망(王莽)의 군형제(群兄弟 즉 六寸)는 모두 장군(將軍) 겸 후(侯)가 되었는데 오직 망(莽)의 부친 만(蔓)은 일찍 사망하였다. 왕망의 백부(伯父) 대장군 봉(鳳)이 병으로 누우매 망(莽)이 극진히 시탕(侍湯)하니 봉鳳이 천거하여 망(莽)을 황문랑교위(荒門郞敎尉)로 삼았다. 왕망이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일하니 크게 발탁되어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38세의 망이 보정(輔政)을 맡았는데 얼마 후 원제(元帝)가 사망하고 성제(成帝)가 즉위하니 제(帝)의 생모 김씨(生母 金氏)를 황태후(皇太后)로 삼았다. 태후의 영향으로 자신의 친정형제 5人을 모두 후(候)로 봉(封)하였다.

평제(平帝)가 나이 9세에 등극하니 김태황후가 섭정하였다. 김태황후는 망(莽)에게 서정(庶政)을 맡겼으며 서기 3년에 망(莽)은 11세의 평제(平帝)에게 자기 딸을 주어 황후(皇后)로 삼았으나 4년만에 평제(平帝)가 사망하였다. 왕망은 선제의 현손중 가장 나이 어린 2세의 유영(劉영)을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섭 황제(攝 皇帝)가 되었으며 서기 9년에 쿠테타를 일으켜 신(新)나라를 건국(建國)하였다. 왕망(王莽)은 영특하여 대혁신정책을 단행하였다. 侯제도를 페지하고 토지를 국유화 하였으며 노예매매를 금하였고 평형물가제도를 실시하여 상인의 농간과 중간착취를 방지하였으며 화페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동북방민족의 소요와 흉년이 계속되어 이로 인한 도적떼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중에 유수(劉秀)의 군대가 낙양(洛陽)을 공격하니 왕망의 시종 공손취(侍從 空孫就)가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쳤다. 그 뒤 20여년간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들어 왔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 성봉.

출처 : http://www.kwangsankim.or.kr/bbs/zboard.php?id=a001&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04
 
동이족(스키타이.흉노:유목/부여.고구려:수렵.농업)
 
한반도와 만주의 동이족=천자국.대인국.군자국의 정통성을 갖는다!
 
만주 초원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서진하여 유라시아 지역으로 갈수록 동이전통과 혈통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서양인들이 스키타이라고 부르는 북방동이족의 고향도 본래는 북만주 초원지대다. 북방 동이족들이 점점 서진하여 백인들과 피를 섞여 투르크족을 형성하기도 한 것이다. 투르크족(터키=위그르)의 선조들은 동이족일 수 밖에 없다.



 
사진자료처럼 터키로 대변되는 투르크인들은 대부분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나, 흰얼굴색과 얼굴모양은 백인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즉 황인종과 백인종의 혼혈족이다. 고로 투르크족의 선조들도 동이족일 수 밖에 없으며, 민족통일과 만주를 회복하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가야 하는 역사적 사명이라 하겠다. 이들 투르크족들을 지배한 종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흉노족이다.

[자료]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에 종속된 투르크족

투르크인들은 현재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서아시아, 유럽 일부에 살며 터키어를 주요 언어로 하는 민족이다. 기원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사서에는, 바이칼호 남쪽에 있으며 흉노에 종속된 집단으로서 ‘정령’으로 기술되어있다.
그후 ‘철륵’, ‘칙륵’ 등의 한자음을 단 집단의 존재가 나타난다. 6세기 경에는 돌궐족이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된 후 몽고고원의 셀렌가강 부근에서 터키계 위구르족이 대두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는다.

 9세기에는 위구르족도 북방에서 남하한 키르기스족에 의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오아시스지대에서 정주생활을 한다. 위구르의 서방 이동에 따라 그 때까지도 서서히 진행되어오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가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아시아는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중앙아시아에는 상인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해져 많은 터키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도 진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된 동투르키스탄의 주요 주민들은 후후 카라 키타이, 몽골의 지배를 거친 위구르인이다. 
 

 중앙아시아의 벨라사군을 중심으로한 지역에는 투르크족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카라한왕조(840~1212)가 성립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터키화와 이슬람화는 더욱 결정적인 것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투르크인이 대규모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동한 것은 이슬람세계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중앙아시아는 ‘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투르크인은 그 활동의 장을 더더욱 서쪽으로 넓혀나갔다.  

 서방에 이주한 투르크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은 셀주크라는 수장에 의해 인솔되었던 일족이었다. 1055년 셀주크의 손자 투그릴이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에 쳐들어와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지배했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땅과 주민을 지배하기 위해서 칼리프의 권위를 빌어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아 이슬람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술탄이란 ‘권위를 지닌 자’라는 뜻으로 이후 투르크의 군주는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란,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아시아일대에 셀주크투르크제국이 성립되었다. 압바스왕조 칼리프는 술탄의 보호 아래 바그다드와 그 주변의 얼마 안되는 지역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에는 1071년 만지케르트전투에서 비잔틴군이 패배한 결과 중앙아시아로부터 많은 투르크계민족이 이주를 개시했다. 또 비잔틴군의 용병으로 참가한, 북쪽에서 흑해를 돌아온 것으로 추측되는 투르크인도 정주생활에 들어감으로써 피폐했던 아나톨리아는 급속히 투르크화되었다.  

 몽고의 서방원정으로 셀주크왕조가 쇠퇴하자 투르크인들의 지방세력은 자립하여 각지에 군주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비잔틴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오스만왕조가 기독교국가인 비잔틴제국으로의 영토확장 가능성을 이용하여 발칸반도로 영토를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이 힘을 배경으로 아나톨리아의 투르크 군주국을 병합한 오스만투르크는 한때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단절되기도 했지만 다시 부흥하였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1453)  이어 오스만투르크는 마물루크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칼리프의 지위까지 손에 넣고(술탄-칼리프제의 성립)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완성하였다.  

 그후 이슬람세계는 16세기에 들어 이란 지방의 시아파 사파비조(1501~1732)와,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가 인도에 건국한 무굴제국(1526~1856), 이스탄불의 오스만제국(1281~1924)으로 크게 3분되었다.

 슐레이만 1세(재위 1520~66) 치하에 극성기에 달한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3대륙에 걸친 영토를 확보했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빈까지 육박하였다. (1529) 또한 국내에서는 군사적 봉건제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법류. 학예. 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minhamsa/8683/138

  
[고고학 자료]흉노족 김씨왕족의 무덤 황남대총(98호 고분)



  이 積石木廓墳의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의 주인공이었던 흉노의 무덤과 같다. 1973~19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이 적석목곽분의 전형이다.  

  대릉원 고분군에서 표주박처럼 보이는 능이 황남대총이다.  신라시대 고분가운데에서 규모가 제일 크다. 동서길이 80m 남북길이 120m 남분의 높이 23m (아파트 8층높이) 북분의 높이 22m이다.
 

     1973년~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이 발굴 및 조사한 후 ‘황남대총’으로 명명하였으며 현재는 외형이 복원되어있다. 남분이 먼저 축조되었고 얼마 후 북분을 남분에 연결시켜 축조하여 표형분의 형태가 된 것이며 총 24900여점이 출토되었다.




ㅇ.남분   

남분에서는 60세전후로 판단되는 남자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금동관, 금허리띠, 금으로 된 장식과 칼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금동제의 말안장에는 앞뒤로 새김을 하고 비단벌레의 날개를 붙였는데 보랏빛이 어우러져 호화로운 느낌을 준다.

 

 ㅇ.남분의 출토유물 
 
유리제 병 및 배(국보 제 193호 , 98호 남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병 1점과 잔 3점의 유리제품이다.

병은 높이 25㎝, 배지름 9.5㎝이고, 잔① 높이 12.5㎝, 아가리 지름 10㎝ 잔② 높이 8㎝, 아가리 지름 10.5㎝ 잔③ 높이 10.5㎝, 아가리 지름 9.5㎝의 크기를 하고 있다.

병은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타원형의 계란 모양이다. 물을 따르기 편하게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좁게 오므렸다.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용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청색 줄이 있고, 아가리에는 약간 굵은 선을 돌렸고, 손잡이에는 굵은 청색 유리를 ㄱ자로 붙였다. 손잡이에는 금실이 감겨져 있었는데 이는 무덤에 넣기 전에 이미 손상되어 수리를 한 듯 보인다.

잔①은 병과 같이 연녹색 유리를 사용했고, 위는 넓고 밑은 좁아진 컵 모양을 하고 있다. 아가리 주위는 속이 빈 관(管)모양으로 돌리고, 그 위에 청색 유리띠를 한 줄 둘렀다. 몸체의 윗쪽에는 청색 유리로 물결무늬를 두르고, 밑쪽에는 격자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잔②는 색은 연녹색이고 아가리가 넓다. 아가리 주위는 약간 도톰하게 돌기가 있으며, 밑면 가운데 부분이 약간 들어가 있다.    
잔③ 역시 연녹색이고 아가리가 넓은 원통형이다. 아가리 주위는 관(管) 모양이고 위와 아래에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다.  

모두 파손이 심한 상태로 발굴되었으나 다행히 원형을 알아 볼 수 있게 복원되었다. 병과 잔①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출토되어 아마 세트를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리의 질과 그릇의 형태 색깔로 미루어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며, 그 당시 서역과의 문화 교류를 알게 해 주는 자료가 된다.


 금제경식(국보제 194호) 98호 남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길이 33.2㎝의 금 목걸이이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2개의 봉분이 표주박 형태로 붙어 있는데, 남쪽 무덤에서 사람의 목에 걸린 채로 널(관) 안에서 발견되었다.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 사슬 4줄과 속이 빈 금 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굽은 옥을 달았다. 경주지역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굽은 옥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다.
 

은제경갑(보물제632호) 98호남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정강이 가리개(경갑)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정강이 가리개는 남쪽 무덤 널(관) 밖 머리쪽의 껴묻거리 구덩이(부장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길이 35㎝의 무릎과 정강이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의 일부이다.
 
   무릎에 닿는 부분은 넓고 둥근 판 형태로, 중간쯤부터 좁아져 아래로 내려오며, 중앙에 시계추(錘)같은 돌출된 선이 있다. 전체적으로 안으로 휘어지게 만들었다. 하단부는 안으로 휘어진 은판을 경첩으로 연결하여 닫으면, 정강이를 보호하게 되고 끝에 3개의 고리가 있어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다.
 
   천마총 출토 금동제 정강이 가리개가 출토된 적은 있으나, 은제 정강이 가리개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중요한 유물이다.

 은관(보물제631호) 98호남분



이 은관은 남쪽 무덤 널(관) 밖 머리쪽 껴묻거리 구덩이(부장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높이 17.2㎝, 머리띠(대륜) 너비 3.2㎝, 지름 16.6㎝이다.

 

머리띠 위의 장식은 3개의 가지가 있는 형식으로 신라시대 관모(冠帽)에서는 보지 못하던 특이한 양식이다. 중앙가지는 위에 돌기가 있고, 활 모양으로 휘어지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마름모 형태의 은판을 붙였다. 좌우에는 반달형 은판을 붙이고, 바깥쪽을 일정한 폭으로 오려낸 다음 하나하나 꼬아서 새털 모양을 만들었다. 새털 모양의 가지는 신라 금관 형식에는 없었던 것으로, 의성 탑리 무덤에서 이와 유사한 관모가 발견되나 경주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된다.



 금제조익형관식(보물제630호) 98호남분



 이 관식은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높이 45㎝, 날개 끝 너비 59㎝의 크기이다.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금판은 위에 3개의 돌출된 부분이 있어서 전체가 山자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랫부분은 차츰 좁아져서 V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 가운데 금판 좌우에 새 날개 모양의 금판을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다.

 

전면에 작은 원형 장식을 달았으나 가운데 금판 밑의 관(冠)에 꽂게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다. 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점을 찍어 처리하였다. 가운데 금판은 세로 중심선에서 안으로 약간 접은 상태여서, 밑의 뾰족한 부분을 무엇인가에 꽂았으리라 생각되지만, 평소에 썼던 관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금제과대및 요패(보물제 629호) 98호 남분



 허리띠 길이는 99㎝이며, 소형 띠드리개 길이 18∼22㎝, 대형 띠드리개 길이 79.5㎝의 크기이다. 이 허리띠는 문양이 뚫린 사각형의 판과 나뭇잎 장식 34매를 연결하였다. 나뭇잎 장식 아래에는 7줄의 띠드리개가 있는데, 1줄은 길고 6줄은 짧다.

 

이 허리띠의 좌우 끝에는 서로 연결할 수 있는 띠고리(교구)가 달려 있다.



 ㅇ.북분    

북분에서는 금관, 은허리띠, 금구슬, 금팔찌, 금반지, 가락바퀴등이 출토되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서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고 피장자가 칼을 착용하지 않은 대신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락바퀴란 방추자라고도 하며 실을 잦는데 쓰이는 도구이다.  게다가 은허리띠에 부인대라고 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여자의 무덤이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황남대총은 부부의 능으로 추정되도 있으며 남편이 먼저 죽어 남분을 쌓았으며 그 뒤 아내가 죽자 남분과 연결시켜 북분을 쌓아 전체모습이 표주박처럼 생긴 표형분이 되었다.

 

또한  남분주곽내부에는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어 순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ㅇ.북분의 출토유물

금제과대및 요패(국보 제192호)98호북분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서 길이 120㎝, 띠드리개 길이 22.5∼77.5㎝이다. 28장의 판(板)으로 만들어진 이 허리띠는 주위에 있는 작은 구멍들로 미루어 가죽같은 것에 꿰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허리띠 아래에 매달려 있는 13개의 띠드리개는 경첩으로 허리띠와 연결하였다.

 

이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출토될 당시 상태가 아주 좋아서, 착용법과 띠드리개의 배치순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관및 수하식(국보제 191호) 98호 북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금관이다.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높이 27.5㎝,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수식) 길이는 13∼30.3㎝이다.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었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 빛을 내는 굽은 옥을 山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또한 원형의 금장식을 균형있게 배치시켜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장식 끝부분 안쪽에는 머리띠 부분과 같은 푸른색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발견 당시 금관과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것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이고 있다.




 금제천및 지환(보물제623호) 98호북분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그 중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금 팔찌와 반지이다.

 

팔찌는 지름 7.5㎝ 내외로, 북쪽 무덤 덧널(목곽) 안에서 몸에 착용한 채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가 발견되었다. 좌·우 5개는 금막대기를 구부려서 만들어 장식이 없는 간단한 모양이다. 왼쪽 팔에 있던 1개는 길다란 금판을 동그랗게 말고, 그 위에 금판을 덧 대어 세공하여 남색과 청색의 옥으로 화사하게 꾸몄다.
반지의 지름 1.8㎝로 모두 19개가 널(관)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는 손에 낀 채로 발견되었다. 두 가지 문양이 보이는데 하나는 가운데가 마름모꼴로 된 것이고, 다른것은 중앙에 격자문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당시의 장식품의 문양을 짐작할 수 있다.



유리제대부배(보물제624호) 98호북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제 잔(배)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잔은 높이 7㎝, 아가리 지름 10.5㎝로 북쪽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아가리 부분은 수평이 되도록 넓게 바깥쪽으로 벌어졌고, 몸통 부분은 밥 그릇 모양으로 밑이 약간 넓어진다. 아랫부분에는 우뚝한 받침이 있는데, 짧은 목을 거쳐서 나팔형의 굽이 달렸다. 유리는 투명한 양질이고 갈색으로 전체에 걸쳐 나뭇결 무늬가 있다. 받침 바닥에 약간의 손상이 있는 외에는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었다.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여러가지 종류의 유리제 용기가 발견되었지만, 이러한 작품은 처음 보는 독특한 예이다. 잔의 모양이나 무늬로 보아 신라 제품이 아니고 서방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은제잔(보물제627호) 98호 북분



이 은제잔은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신라 잔 모양의 그릇으로 높이 3.5㎝, 아가리 지름 7㎝의 크기이다. 밑이 평평한 잔으로 표면의 장식 무늬가 매우 특이하다. 아가리에 좁은 띠를 두른 뒤, 연꽃을 겹으로 촘촘하게 돌려 무늬를 장식하고, 그 밑으로는 쌍선으로 거북등 무늬를 연속시켰다. 거북등 안에는 각종 상상속의 동물 형상을 새겼다.

 

바닥 안 쪽 중앙에도 꽃무늬 안에 봉황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무늬의 표현 형식과 동물의 형상은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장식용 신발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무늬 자체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구리 거울과 연관이 있으나, 그 분명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금제고배(보물제626호) 98호북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굽다리 접시(고배)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높이 10㎝, 주둥이 지름 10㎝, 무게 169g의 금제 굽다리 접시는 북쪽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토기 굽다리 접시의 형식을 따라 반구형 몸통 밑에 나팔형 굽다리를 붙인 전형적인 양식이지만, 장식이 가해지고, 금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실용품이라기 보다는 껴묻거리(부장품)로 제작된 듯하다.
 
아가리 부분은 밖으로 말아 붙였고, 나뭇잎 모양 장식 7개를 2개의 구멍을 통하여 금실로 꿰어 달았다. 굽다리는 작은 편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사각형 모양의 창을 어긋나게 뚫어서 장식하는 신라 굽다리 접시의 형식을 하고 있다.
 
찌그러진 부분이 많으나 발견된 경우가 드문 금제 굽다리 접시이다.



 은제관식(보물제625호) 98호 북분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신라 김씨왕족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그 문제를 정리한다.
 
  『삼국이 다 북방계의 지배를 받는데, 그 계통은 고구려·백제가 夫餘系, 신라는 흉노계입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습니다. 흉노계는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이고 순수 유목민이며 서방과 접촉이 많고 그쪽 문화를 많이 수입했지요


 

그가 1998년에 쓴 「금관의 비밀」(푸른역사)은 금관을 만든 주인공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는 왜 신라의 金氏 왕족들이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흉노계 출신의 기마민족인가를 논증하고 있다. 金교수는 수많은 발굴 경험, 알타이 지역 답사 경험, 언어학과 신화학을 동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신라 金氏들은 흉노계이다』고 단정짓고 있다.
 
  1. 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에서만 나온다.
 
  2. 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샤머니즘·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 單于(선우: 왕)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린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경주 瑞鳳塚(서봉총)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금제 새날개 모양의 冠 장식물이 발굴되었다.
 
  3. 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鳥生부인이다.
 
  4.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술잔인 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角杯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戰士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 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角杯 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金秉模 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만 각배가 나오고 고구려·백제에선 나오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고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6. 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신라가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서방 유리 그릇은 백제·고구려·가야 고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신라의 金氏 왕족이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과 교류할 수 있었던 민족임을 보여 준다. 부여족 계통의 행동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했다. 몽골-중앙아시아 초원을 무대로 설쳤던 흉노 출신만이 그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7.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金氏의 조상 金閼智 탄생 신화 속에 열쇠가 숨어 있다.
 
  <脫解이사금 條(서기 65년): 봄 3월, 왕이 밤에 金城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그곳으로 瓠公(호공)을 보냈다. 숲 사이에는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始林을 鷄林(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
 
  8. 金秉模 교수는 이 신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신화는 전형적인 알타이-흉노 문화권의 신화이다. 북방민족의 토템인 나무와 새가 등장하고 알타이에서 유래한 「알지」란 말이 나온다. 알지는 「알타이」의 한자식 발음이다. 알타이를 알타이 지방에선 알트, 알튼, 아르치로 발음한다. 알타이란 말은 金이란 뜻이다. 金閼智의 뜻은 그래서 金金이 된다.
 
  9. 昔脫解의 이름은 몽골어로는 「탈한」 또는 「탈하이」(복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양대 金秉模 교수는 탈하이가 「대장장이」라고 해석했다. 쇠를 다루는 석탈해는 각배도 쓴 것으로 보아 흉노계로 보이는데, 김알지를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박혁거세系인 婆娑이사금에게 양보했다. 늦게 경주에 들어온 흉노계 세력이 연합하여 先住 박씨 세력에게 대항하다가 좌절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10. 알타이 산맥, 즉 金山 부근에서 살던 金을 좋아하던 흉노계 金氏 집단이 金城(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걸이,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고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金이야말로 흉노의 브랜드이다. 10세기에 일어난 12세기 대제국을 건설하고 13세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에 망한 金은 여진족의 完顔部(완안부) 부족이 세웠다. 金史에 따르면 이 부족이 크게 된 것은 10세기에 金函普(金나라의 시조라고 한다)라는 신라인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金函普는 경순왕이 고려 王建에게 나라를 바칠 때 반발한 왕족의 한 사람이 만주로 들어온 경우라고 한다(金渭顯·「遼金史 연구」).
 
  고려는 몽골·거란 등 북방 유목제국의 침략을 받았지만 金은 고려를 치지 않았다. 金의 皇室이 고려를 형제국처럼 생각한 때문이다. 
 

17세기 이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세운 淸제국의 皇族들은 性을 愛新覺羅(애신각라)라고 했다. 「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이기도 한데, 만주어로는 그 뜻이 「金」이다. 이들은 淸이 망한 뒤 金으로 性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東아시아에서 金氏는 흉노계통 유목기마민족의 족보를 이어가는 상징이다. 
 
신라 김씨왕족과 선비족 당(수)나라와의 혈통적인 동질성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당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다. 흉노족인 신라 김씨왕족이 선비족인 당나라와 함께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로서 동이족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백제를 공멸시키고, 경주왕릉에 세워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의 석상들이 세워진 친연성을 혈통적으로 알 수 있는 배경에는
신라 김씨왕족이 혈통적으로 고구려.백제인들보다는 흉노족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족에 훨씬 더 친연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선비족은 사실상 반은 흉노족이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를 가르킴, 후한서에서는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이 인구는 당시 선비족의 인구보다 10만정도 많은 인구다. 즉 선비족의 반은 흉노족이었다는 결론이다.

 
김왕망과 함께 전한을 무너뜨리고 개국한 신나라가 10년후 멸망하자 한나라의 멸족이 두려워 산동을 걸쳐 해양루트를 따라 한반도 남부 김해.경주지역으로 들어온 흉노족 김일제 후손들(가야.신라 왕족)은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동이족)로 구성된 고구려.백제인들의 무덤양식(고구려.백제:한반도 남방식 고인돌양식의 적석총/신라 김씨왕족:유라시아 유목민의 적석목곽분)이나 문화자체(신라는 고조선의 옛 부족 중의 하나인 흉노의 갈래이다. 신라 김씨왕족은 초기에는 스키타이 황금문화이고, 같은 혈족인 고구려.백제,일본은 부여계 어족이며 부여계 문화다)가 차이가 난다.  




우리역사 08/12/16 [09:16] 수정 삭제  
  [한단고기]단군세기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 병진 5년(기원전 90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흉노와 몽고족은 북만주에서 기원하여
몽고지역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키운후에
유라시아초원을 지배한 북방유목민족으로
우리 한민족계열의 민족이다(단국대 윤내현 교수)

서양에서 스키타이라고 불리우는 흉노족은
본래 북만주 초원지역에서 살다가 몽고지역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키운후에 유럽까지 가서
유럽전역을 두렵게 만든 우리 한민족이다!!
유럽인들과 피가 섞여 혼혈족(투르크)이 된 민족이다!
돌궐(터키),위그르 등 투르크계 민족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그래서 터키나라가 고구려를 형제국이라고
역사교육에서 가르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몽골 초원지역의 흉노와 근접해 있던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가 흉노를 한족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흉노와 함께 한족(한나라)을
교란시키고 격퇴시킨 역사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역사학자들은 흉노가 몽골과 퉁구스(동호),
기타 북방민족의 혼합체이지만 흉노의 언어 특성을 연구한 결과
그들의 정치적 지배집단은 투르크 계열이라고 추정한다.
시라토리 구라기치를 비롯한 학자들은 흉노가 투르크가 아닌
몽골 계열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흉노가 투르크 계열의 특징을 지녔다는 데는 동조한다.
(투르크와 흉노의 친연성을 나타내며,투르크족의 선조가 동이족임을 알 수 있다)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도
훈족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서양인들의 열등감 반영).

그들(흉노)의 코는 모양이 없고 평평하며, 광대뼈는 튀어나왔다.
두 개의 눈에는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 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꿰뚫어보는 이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고 적었다.
이 설명도 서양인이 아닌 동양인의 얼굴인 셈이다.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섬겼던 흉노는 편두풍습를 가지고 있다.가장 오래된 편두유골들은 북만주 송화강 지역에서 발굴된다.편두풍습은 오래된 동이족의 풍습이라고 [만주원류고]에 기록되어 있다.

편두풍습=슈메르인들.흉노(훈족=가야인들).남미 인디언들.인도.시베리아인들=동이족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피라미드=갓(백인들이 오 마이 갓!하는 갓이다) 모양이나 머리를 길쭉하게 하는 편두풍습이다. 곧 하늘(하느님)에 제사지내는 장자민족(천손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후손들에게 인식시키기위한 풍습으로 이해된다.
인류학 08/12/16 [10:02] 수정 삭제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신라가 진한(辰韓)을 구성한 12국 가운데 작은 나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왕권이 석씨에서 흉노족 김씨세력으로 왕위가 바뀌자, 신라의 외교노선이 마한(한반도남부)를 대리하여 한반도남부의 통치권자를 자처하던 친백제(親百濟 : 친부여)에서 친고구려(親高句麗)로 바뀌어졌다.

영락대제(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있다. 영락대제 광개토태왕비문 가운데 신라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 영락 9년(399) …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여 태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이에 대해 대비를 시켰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수많은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고 이에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 비문내용은 신라와 가야가 한반도 동남부지역을 두고 패권을 다투던 중 가야가 일본에 철을 지원하는 댓가로 일본이 왜군을 지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다급해진 신라가 결국 광개토태왕에게 지원군을 요청했고, 결국 가야.왜 연합군을 종발성에서 격퇴시켰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일본 극우사학자들이 왜가 한반도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허구맹랑한 논리를 펴는 이유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을 제후국으로 삼고 신라는 고구려를 섬기게 된다. 그 유물이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표기된 그릇이며, 고구려 지배층들이 남긴 경상도지역의 고구려 적석총 무덤들이다.


위의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이나 충청도 중원 고구려비문을 보더라도 신라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영락대제 시기에는 사실상의 속국, 또는 고구려의 보호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5세기 초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대외적인 성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통제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그 후 6세기에 들면서 우경(牛耕)이 실시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불교가 공인(527)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이 책에서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日本書紀』卷八 「仲哀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에는 "(삼한의 생활상을 보면) 구슬을 귀하게 여기고 금·은과 비단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三國志』魏書 東夷)."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책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공식적인 복장에서는 금·은으로 장식하고 부여의 경우에도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초기의 신라와 중기 이후의 신라에는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즉 고구려계가 신라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라고 봐야할까? 앞서 본 영락대제의 비문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분명한데 금(gold) 문화에 관한 한, 신라는 고구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정치적으로만 영향을 받은 듯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하던 시기 이전에 이미 세련된 '황금(黃金)의 문화'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 금(金) 문화라는 것은 바로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유목민들의 대표적인 브랜드(상표)가 아닌가?

구체적으로 보면 금관은 마립간 시대(417~514), 즉 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88쪽]. 그러니까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신라의 지배층의 변화가 있었고 그 지배층이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유난스러울 만큼 금을 중시한다는 사실이며, 그 고고학적 근거가 바로 흉노족 신라 김씨왕족들의 무덤속의 유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신라의 금관은 중앙아시아나 알타이 몽골 만주 지역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 금관의 모습은 가야의 금관과도 유사하다. 따라서 초기에는 가야와 신라는 같은 계열로 볼 수 있다.

동이족들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나무와 새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동이족의 문양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나무와 새다. 북방동이족에 속하는 고구려 삼족오나 신라금관의 나무.새들이나,백제의 봉황이나 모두 새토템이다. 성황당과 나무,솟대또한 동이족의 공통적 요소다.

고고학자 존 코벨은 북방 유목민들은 순록 사슴과 우주 수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해했다고 한다. 즉 신화에 따르면, 순록의 황금 뿔 때문에 해[太陽]가 빛나고 순록사슴 그 자체가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금관에 있는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하늘[天]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하는데 존 코벨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 많은 흰 자작나무라고 말한다[존 카터 코벨, 㰡”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㰡• (학고재 : 1999), 150~155쪽.]

그런데 경주나 가야 지역은 흰 자작나무가 자랄만한 곳은 아니다. 그런데 경주 김씨왕족무덤에서 출토된 그 신라금관에는 이 흰 자작나무의 장식이 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이들이 북방에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작나무는 타이가 지대나 그 주변지역에서 신목으로 숭배되는 나무라고 한다(소나무나 상수리나무는 흑룡강 하류 지역과 한반도, 버드나무는 초원지대나 초원과 삼림이 혼재된 지역에서 주로 숭배된다).

존 코벨은 신라의 문화와 시베리아의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으며, 금관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관은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는 것.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낸다는 것이다.

즉,시베리아 지역에서 수렵생활을 하고 살았던 동이족들의 샤머니즘을 금관에 새긴 것이다.

샤머니즘은 원시종교의 한 형태 또는 그 단계로서 엑스터시와 같은 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 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 예언, 치병, 제의, 귀신의 인도 등을 행하는 주술적이며 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을 말한다.

북방동이족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이 가장 고전적·전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역에 따라 여러 샤머니즘의 형태가 있으며, 불교 등 다른 종교 현상과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람들은 샤마니즘이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이고, 모든 나라는 다양한 형태의 독특한 샤마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자들은 샤마니즘이 유교나 불교 혹은 어떤 형태든지 유일신 종교보다는 원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샤마니즘이 시기적으로 앞선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만물은 쇠퇴하는 경향이 있고, 식어져가며,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물리학에 적용되는 법칙이 영적인 영역에서도 적용된다는 것과 모든 인류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흉노 김알지 08/12/16 [10:34] 수정 삭제  
  [김운회 교수가 말하는 흉노 김알지세력과 왕망의 신나라]

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한번 보시죠.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쥬신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쥬신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쥬신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쥬신의 활동영역입니다.

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지요.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숭당주의신라 08/12/17 [11:38] 수정 삭제  
  신라에 의한 고구려, 백제 멸망이후 신라는 심각한 당나라 숭배에 빠집니다.
최치원, 장보고 등 많은 실력자들이 중국에서 배우거나 힘을 키웁니다.
대륙의 당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거나 어느정도 실력을 인정받으면 신라에 돌아와서 엄청난 대접을 받게됩니다.

이는 미국에서 학위를 따야지 국내에 들어와서 취직이나 대학 강사자리 차지하기 쉬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국내 박사보다 미국 석사를 몇배나 더 인정해주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당시의 신라에 더 심각하게 만연했으리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신라 권력자들의 비문을 보면 대륙땅에서 방계로 인식하는 조상들을 모두 신라의 조상들이라고 여깁니다. 대륙땅의 직계는 감히 거론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김춘추 등의 비문을 보면 성한왕 등 흉노, 선비계열 뿐만 아니라
황제헌원, 순임금, 진시황 혈통, 추모왕(동명왕 또는 동명성왕) 등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말합니다.
김춘추 등의 비문에 의하면 황제헌원의 후손이 순임금이고, 순임금의 후손이 진시왕이고, 진시왕의 후손이 소호금씨 일족이고, 소호금씨의 후손중에 주몽이 있고, 주몽의 후손손중에 김알지나 김알제가 있고, 김알지의 후손에 김춘추가 있습니다.
가야의 왕족들도 황제헌원의 후손이고 김알제의 형님이라는 김수로의 후손이고
이미 알다시피 백제와 고구려의 선조는 주몽이니
숭당주의에 빠진 신라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은 모두 황제헌원 -> 순임금 -> 진시왕 -> 흉노왕 -> 소호금천씨 -> 주몽으로 이어지는 황당한 혈통의 후손이 됩니다.

즉, 우리는 환웅-치우천황-단군의 후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며 황제헌영은 동이족출신이기는 하지만 치우천황을 배신하여 한족의 우두머리가 되는 인물입니다.
또한 순임금은 역시 동이족출신으로 추측되지만 단군과는 별개의 인물입니다. 단군으로부터 치수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 존재로 한족을 이끈 존재입니다.

우리의 조상을 환웅-치우천황-단군-주몽으로 봤을때 황제헌원, 순임금은 우리의 방계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한 족보가 나오는 이유는 당시 신라가 너무 심각한 당나라 숭배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가 최고라고 여기고 당나라의 왕을 하늘의 자손이라 섬기기에 어떻게해서든 그들과 조금이라고 혈통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라의 왕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이라 여겼다는 것입니다.
지금 학계에서 미국박사를 최고의 권위로 주장하듯이
지금 정치권에서 미국에 인맥있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라 주장하듯이
친일파놈들이 일제시대 한자리 해먹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듯이 말입니다.

신라왕의 흉노주장은 이명박씨처럼 일본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조갑제씨가 월간조선을 통하여 수차례 주장해온 내용입니다.
숭미, 숭일 사상에 젖어있는 사람이 그들의 친일, 친미행위를 희석시키기 좋은 수단일 수도 있지않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신라의 유물에 대해서는 비슷한 유물이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일단 신라는 백제, 고구려에 비해 금을 채굴하기가 좋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유역에도 금 채굴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험한 산지여서 당시로는 채굴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신라는 다른 곳 보다 금 채굴이 쉬웠기에 금 공예가 더 발달한 것입니다.
또한 신라에서 더 많은 금관이 출토되는 이유는 수도를 옮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신라는 경주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러있었고, 삼국통일이후 수백년간 그 자리에 수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라에서 더 많은 금 채굴이가능했다는 점과 삼국통일 이전의 유물들만 따지자면 고구려, 백제에 비해 더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라의 유물중에는 유리로 된 것들이 있습니다.
로마나 페르시아에서 생산된 것도 있고, 신라 자체에서 생산한 유리도 있습니다.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신라에서 유리 유물이 더 많이 발굴되고 있다하여
신라가 로마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검자 08/12/23 [20:24] 수정 삭제  
  단군조선은 진한,불한,마한의 삼한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그 중 진한이 제사장 역활을 하며, 단군이 직접 다스리는 중심지였다. 단군조선의 자발적 해체 이후 진한은 흉노제국이 되고...흉노는 쥐나족이 비하시키기위해 만든 말이고...서양에서 HUNA로 불리운 것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보면...위대한 태양이라는 뜻의 한나로 불러야 한다. 이러한 한나제국의 제사장 집안이었던 김일제 세력이 신라의 중심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쥐바귀 09/01/16 [08:36] 수정 삭제  
  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 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꼴리는데로 해석하네.
혁신한국 10/10/26 [10:44] 수정 삭제  
  과거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 그리고 서유럽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구축하여, 당시기에 로마제국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구축하였던 유일한 제국이 바로 훈제국이었지요. 진시황이 살아생전에 그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18년에 걸쳐 축조한 것이 그 유명한 만리장성이며, 진을 무너뜨리고 한을 건국한 한무제 역시도 훈족과 40여번에 걸쳐 크고 작은 싸움을 걸쳐 한번은 그들의 포위속에 갇히어 죽기 직전에 이르기도 했었습니다.

이후 광무제에 이르게 되면 곽거병 장군에 의해 이들은 동방에서 힘을 잃고 서방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들이 불러온 것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으며, 게르만대이동으로 인해 멸망하게 된 것이 바로 로마제국이었습니다. 당시 서방으로 이동을 하면서 서로마제국을 짓밟아서 그들의 지역을 점령을 하게되는데, 그 지역이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입니다. 유전적으로 오늘날 헝가리 사람들과 경상도 사람들의 유전자가 비슷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적으로 훈족의 외국명인 스키타이족의 유전자와 경상도 사람들의 유전자가 많이 닮았다고도 하지요. 전라도의 경우에는 일본의 유전자와 많이 닮아 있으며, 혈액형은 Cis-AB형이라는 희귀 혈액형으로 그들의 혈통이 일치함은 이미 검증이 되기도 했습니다.


서쪽으로는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동쪽으로는 중국의 초대 통일 국가였던 진나라 멸망의 실질적인 원인이었고, 한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당시의 경상도 지역으로 유입이 되어, 훗날 김씨 왕조로 최초 일어서게 되는데, 그들이 김이라는 성씨를 사용하게 된 것이 바로, 그들이 금을 추앙하게 되는, 스키타이족들이 추앙하는 금에 대한 애착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왕들은 금귀걸이를 실제적으로 사용을 했었고 고대왕릉에서도 귀걸이가 발견이 되기도 했는데, 서로마제국을 짓밟아 일부 지역에 훈제국을 건설하고 동로마제국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빌미로 그들 지역의 일부 역시도 훈제국에 편입시켰던 아틸라라는 왕 역시도 귀걸이를 착용하고 다녔었다고 그리스의 학자가 남긴 기록에 전하고 있습니다. 즉, 훈족의 지배층들은 귀걸이를 항상 하고 다녔을 개연성이 높다는 이야기인 것이지요.

그리고 신라가 지배했던 영역에서만 발견이 되는 대능원의 경우만 하더라도 북방 기만민족 특유의 전통무덤양식이기도 한데, 이것이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출토가 되어져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화제를 낳았던 문무왕릉비에서도 문무왕이 자신이 훈족의 후손임을 남기는 글을 남기었고, 순임금의 후손임을 이야기 하고 있기도 합니다.

중국 최초의 통치 지배자로 요와 순 임금을 거론하는데 그 순 임금의 후손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순임금 역시도 훈족일 개연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세계사적으로도 훈족은 몽골족다음으로 관심의 대상입니다. 몽골족보다 무려 800년이나 앞서 유럽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놓고 로마제국 멸망의 실제적인 원인으로 작용을 했으며, 중국의 역사에서는 중국의 초대 통일 국가와 후임 국가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었던 이들 훈제국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었겠느냐 하는 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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