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족 기원과 신라의 김알지 왕족[한단고기]기록이 증명하는대로 흉노는 단군조선(번조선)의 제후국단군조선.고구려의 제후국 흉노(스키타이)의 기원, 단군조선의 장자국 고구려에 대한 제후국 흉노족의 반란 중국인들이 지들 나름대로 지역적으로 구분하기위해 사용하여 문헌에 기록한 예맥이니 동호니 흉노니 말갈이니 하는 용어는 별 의미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유목생활을 한 북방 동이족, 그리고 농경생활을 한 남방동이족, 그리고 동이족과 백인들이 피가 섞인 투르크족(터키)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이들 종족은 모계사회인 마고성의 여성 지도자 마고할머니 시대를 계승한 한인의 한국-한웅 배달국-단군 조선의 계보를 잇는 부여와 고구려-대진국-고려-조선-대한민국을 장자국으로 삼는 범동이족으로 볼 수 있다. 고리(부여.고구려)족의 후예 징기즈칸이 유라시아 전역을 통일하여 단군민족의 통합을 이루어냈듯이 21세기 한국연방의 부활이 우리 민족의 사명이라 할 것이다.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중국이 '소란한 오랑캐'로 비하한 흉노는 단군3조선 중 번한에 속한 제후국으로 내몽골 초원지역에서 발원한 북방동이족으로 중국과 유럽을 위협하고 지배한 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제후국이다. 또한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을 지배한 투르크족의 선우였다. 흉노족의 조상은 아시아 최초 유목민으로 기록된 스키타이족으로 내몽골 초원지역에서 일어나 서진하여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하고 알타이산의 황금으로 세련된 샤머니즘을 반영한 황금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백인들과 피를 섞여 투르크족을 형성한 것 같다. 그래서 흉노족이였던 신라 김씨왕족들이 중앙 아시아 투르크족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중앙 아시아인들(투르크인들)이 경주에 많이 거주한 배경이기도 하겠다. 중국을 통일하고 300만에 달하는 인해전술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900년의 천자국 고구려에 대적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선비족이다. 그런데, 선비족도 북방유목민들로 반이상이 흉노족이다. 그런데, 신라 김씨왕족의 혈통이 흉노족아닌가? 고구려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당나라를 공략하여 중국을 통일한 후에 고구려.백제.신라가 분할통치하자는 제안을 거부한 배경(한단고기 기록)이며, 결국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킬 수 밖에 없는 혈통적인 배경과 친연성이 있는 것이다. 같은 동이계라고 하더라도 고구려.백제의 구성종족상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민들로 구성된 나라로 정통적으로 고대 중국인들이 기록한[산해경]이 증거하듯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은 정통적으로 백민(태양을 숭상하는 하늘의 백성)들이 사는 지역이며 천자국이며 대인국이며 군자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 큰'대'은 갑골문자의 모양으로 보아도 한반도.만주(대방)의 동이족을, 중원지역(인방)에 사는 한족들을 그냥 사람'인'으로 표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대인'의 주인공은 한국인들이고, 그냥 사람'인'은 한족을 의미한 것인데, 뒤바뀐 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부모국으로 삼았던 흉노족(선비족)인 신라 김씨왕족과 수.당나라가 협공하여 고구려를 공멸시킨 역사적 사건은 단군민족사에서 심판하자면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장자국에 반역을 저지른 패륜적 사건이라 하겠다! 즉, 자식이 천륜을 저버리고 부모를 살해한 패륜적 사건과 동일하다 하겠다. 그 업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천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의 범죄와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화해협력나눔으로 통합하려고 한다면 후손들이 복을 받을 것이요, 그 잘못과 범죄를 반성사죄하지 않고 시정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은폐하고 기만하며 오만한 자세로 나간다면 후손들 또한 징벌과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주법칙이나 순리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윤복현] [자료]문헌과 비문기록이 증명하는 가야.신라 김씨왕족들의 실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金)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서는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大輔)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처음이었다." 라고 하였다. 청(淸)나라 유연정(劉燕庭)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경주 김씨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해동비고(海東碑攷)에 있는 문무욍비문(文武王碑文)에 문무왕의 15대 조(祖)가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이라 하였고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비문(金仁問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김인문의)15대 祖라 하였으며 문무왕의 9대 손(孫)인 흥덕왕 릉비문(興德王 陵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흥덕왕의) 24대 祖라 하였다. 또한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인 金仁問의 비문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金氏로 姓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 라고 했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남가야 시조 수로(南伽倻 始祖 首露)는 신라(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김알지.김수로.김유신 세력은 소호금(김)천씨의 후손, 그리고 신라 [한단고기]기록이 증명하는대로 흉노는 단군조선(번조선)의 제후국입니다. 김알지.김수로.김유신 등 신라.가야의 김씨왕족들은 자신들이 소호금천씨 후손들이라고 묘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흉노족도 결국 소호금천씨의 후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소호금천씨는 중국의 동해밖에 살던(중국 산해경) 백민(한국인=한반도 사람들)인데, 고대에 산동반도로 이동하여 중국문명을 일으킨 지도자들이였습니다. 그 일부가 중국 서북부로 이동하여 흉노족을 형성하여 아시아-유럽의 초원을 지배한 북방유목민족이 된 것입니다. [한단고기]에는 그 흉노의 시조를 단군의 신하였다가 단군에게 반항하여 약수로 유배갔다가 풀려난 색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즉,흉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으며,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가 흉노의 선우라고 삼국지로 유명한 오나라의 손권이 고구려에 보낸 편지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단군민족)을 네트워크로 묶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즉, 북방유목민족의 패자는 단군조선-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였습니다. 경상도지역에 위치한 신라는 한반도3한이 존재할 당시에 기록한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보면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에 붙잡혀 노역에 시달린 진한 사람들이 노역를 피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피하여 한반도의 토착세력인 마한의 진왕에게 살 땅을 요구하니 마한의 동쪽지역(경상도지역)을 분양해 주었습니다. 즉, 1차로 본래 마한사람들이 살던 지금의 경상도지역으로 이동해와 정착한 경상도 토착세력은 단군3조선 중 만주지역인 진한지역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육로가 아니라, 산동지역으로 도피하여 당시 해양루트를 통하여 이동해 왔다고 봐야 합니다. 3차로 경상도지역에 정착한 신라 김알지 세력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해양루트를 통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동해 왔다고 봐야 맞습니다. 그들의 해양루트에서 신나라를 개국한 왕망이 주조한 화폐들이 소량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왕망의 쿠테타에 동참했던 흉노족 김알지세력의 동참을 의미하고, 쿠테타에 실패하여 멸족을 피하여 도망온 흔적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2차는 [한단고기]에 '파소'라는 이름으로 '성모'로 기록된 부여공주의 아들이였던 박혁거세 세력이 옥저를 떠나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경상도 지역에 정착한 것입니다. 부여를 떠난 배경에는 [한단고기]에 남편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고로 황제가 떠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혼인하지 않는 처녀가 아비를 모르는 아이를 임신하여 미혼모가 되어서 황실의 수치임으로 황제가 떠나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라의 기원이며, 신라세력의 융합과정이다. 마한지역에 진한 사람들과 부여 사람들과 북방의 유목민들이 노역과 쿠테타의 실패와 황실의 권고로 뿌리로 올라가면 조상들의 땅인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떠나 올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단군3조선 중 마한의 진왕을 실질적인 통치권자로 인정하고 초기에는 조공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했다가 세력이 커지면서 마한의 통치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이상 한국고대사 연구진들의 수고로운 연구자료에 힘입어 정리한 내용입니다.[윤복현] [보충자료]김알지 신화(金閼智 神話) 와 흉노족 신라 김씨왕족의 기원 김알지 신화는 고려 인종23년(1145)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와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으며 고려후기 충렬왕 7년(1281)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紀異) <김알지탈해왕대 (金閼智脫解王代) 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다. 위 두 고서(古書)에서는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에 대해 부분적으로 조금 다르게 기술(記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金)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서는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大輔)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처음이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淸)나라 유연정(劉燕庭)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해동비고(海東碑攷)에 있는 문무욍비문(文武王碑文)에 문무왕의 15대 조(祖)가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이라 하였고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비문(金仁問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김인문의)15대 祖라 하였으며 문무왕의 9대 손(孫)인 흥덕왕 릉비문(興德王 陵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흥덕왕의) 24대 祖라 하였다. 또한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인 金仁問의 비문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金氏로 姓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 라고 했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남가야 시조 수로(南伽倻 始祖 首露)는 신라(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또 김부식은 "김유신은 왕경인(王京人)이다. 12代祖인 수로(首露)는 하허인(何許人)인지 알 수 없다. 후한 건무(後漢 建武) 18년 壬寅(AD 42)에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가락9촌(駕洛九村)을 바라보고 그 땅에 개국(開國)하여 국호를 가야(伽耶)라 했다" 고 하였다. 점필제 김종직은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혹은 스스로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고 했으며 "신라고지(新羅古誌)에 이르기를 김알지도 금관국 수로왕의 후요 소호금천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고 하였다. 문정창(文定昌)씨는 그의 저서 <伽倻史>에서 "동방의 김씨는 모두 소호금천씨의 후손이요 金日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김유신은 김수로왕 후손인데 그 묘비문에 "소호지윤 칙남가야시조 수로여신라 동성야(少昊之胤 則南伽倻始祖 首露與新羅 同姓也)"라 하였으며 김수로왕의 외손인 문무왕의 능비문에 "지재생 - - - 후 제천지윤 전7엽(枝載生 - - - 侯 祭天之胤 傳七葉)"이라 했으니 후(侯)자 앞에는 투자가 있었을 것이니 곧 투후 김일제의 후손은 7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다는 뜻이다. 김알지는 김수로 보다 24년 뒤에 낳았으니 그 일족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김법민(金法敏), 즉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 파편이 있는데 이 비문 중에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하였으며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侯 祭天之胤傳七葉」에서 (투)侯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郭去病)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金日제를 가리킨다. 金日제와 그 후손들의 생애는 전한서(前漢書)와 열전(列傳)에 있고 중국 서안(中國 西安)에 김일제(金日제)의 무덤이 있는바 실체가 분명한 김일제(金日제)를 문무왕의 비문에 『우리 조상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은 제천금인(祭天金人) 즉 金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손 김일제 일족이 漢나라에서 영달하더니 김왕망(金王莽)이 쿠테타로 한(漢)을 멸하고 신국(新國)을 세웠다가 17년 뒤 유수(劉秀)에게 패망하였다.(서기 25년) 이에 그 일족의 일부가 김해지방으로 왔고 김해에 정착한 김수로왕의 부친은 김해군 장유면 태정리 부근에 살면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형제 아들을 낳았다고 추찰된다.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출생) 태정리 부근 태봉(胎峰)에는 태대(胎臺)가 있는데 이것은 김수로왕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한다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발견된 중국 왕망시대의 화천(貨泉)은 김수로왕의 선친 또는 김수로왕 자신이 왕망의 신제국(新帝國) 출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방증(傍證)이 될 수 있다. 또 김해부근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과 중국화페인 오수전(五銖錢)등도 그 방증이 된다. 김수로왕의 이름이 청예(靑裔)인 것은 소호의 후손임을 암시한다. 소호금천씨의 호가 청양(靑陽)이기 때문이다. 또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존호(尊號)가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인 점은 중국의 보주(普州)와 어떤 연관(聯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경(漢鏡), 용봉환두대도(龍鳳環頭大刀)등이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점, 그리고 은(殷)나라 사람들 처럼 좌지왕때 복사(卜師)가 점을 쳐서 괘사(卦辭)를 얻은 점 등은 연관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는 동이족(東夷族) 소호금천씨의 本고장은 남만주 봉천 요동지방이었는데 그는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 겨려다. 소호금천씨는 일찌기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중국역사의 始源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산해경( 山海經)이라는 중국사서에 "소호(少昊)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는 나라" 라고 하였다. 중국의 사학자 당란(唐蘭)은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산동성 곡부(曲阜)에 도읍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근년에 발굴된 ‘대문구문명 당시에 이미 소호(少昊) 나라가 있었으며 소호국은 산동성 곡부지방에 있었다’ 고 하였다. 여불위(呂不韋)가 지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그 날은 경신일(庚申日)이고 그 임금은 소호(少昊)다. 경신(庚申)은 금(金)의 날로 소호는 금덕(金德)으로 천하에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金天이라 하였다." 소호국의 국조 지(國祖 摯)가 등극한 날인 경신일(庚申日)은 우리의 민속에 이어오고 있으니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庚申年 庚申月 庚申日)이라고 기록하는 습관은 "이 방아도 소호씨가 왕위에 오른 날에 탄생했다."는 뜻이다. 소호의 나라는 고신씨(高辛氏)의 제(帝) 곡이 이어 받았는데 제곡은 은나라의 조상이다.소호금천씨의 후손이 그 후 중국의 서북부 내몽고에 위치한 농서지방에서 흉노 모돈씨(匈奴 冒頓氏)의 한 후국(一候國)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120년 한나라의 포기장군 곽거병(郭去病)이 농서지방에 쳐들어갔을 때 휴도왕(休屠王)의 太子인 14세의 김일제가 그의 아우 윤(倫)과 함께 모친 알씨(閼氏)를 모시고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다. 휴도왕의 나라는 중국서북부에 위치한 지금의 무위군(武威郡)이다. 포로가 된 김일제는 부마도위 광록대부가 되었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가 두 아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으므로 일제의 모친이 사망하매 무제가 알씨의 화상을 감천궁(甘泉宮)에 그려놓고 친필로 "흉노왕비 알씨(匈奴王妃 閼氏)"라 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김일제를 후(候)로 봉(封)하고 일제가 사망하매시호( 諡)號를 경후(敬候)라 하였고 아들 상(常)을 투후로 삼았다. 이리하여 김일제를 비롯하여 國, 安, 常, 欽, 當, 遵, 등 후손이 투후의 벼슬을 하였다. 김일제에게 常과 建 두 아들이 있었는데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하므로 3인이 친하게 지냈으며 상이 소제의 봉거(奉車)가 되고 건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소제가 제위 13년만에 下世하고 선제(宣帝)가 등극하자 상이 광록훈(光錄勳)이 되었으며 상이 죽고 國이 투후벼슬을 이어 받았고 국이 아들없이 죽으니 일제의 둘째 아들 건의 손자 當에게 투후를 제수하였으며 그 후 當의 아들 성(星)이 투후를 계승하였다. 전한서 기록에 의하면 투후 當의 모친 南은 곧 왕망의 生母였다. 전한서(前漢書)의 왕망 전(王莽 傳)에 의하면 효원황후의 生父와 그 兄弟가 모두 원제(元帝)와 성제(成帝)때에 후(候)가 되고 보국(輔國)의 位에 올랐으며 또한 김씨가(金氏家)에서 봉(封)을 받은 侯의 수가 9명에 달한다 하였다. 김일제의 아우인 윤(倫)의 아들 안상(安上)은 선제(宣帝)때 궐내(闕內)의 후(候)가 되어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궁중과 부중의 실권을 장악했다. 안상에게 常, 岑, 敞, 明 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중낭장(中郞將), 광록대부(光祿大夫),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원제(元帝)가 8세에 태자(太子)가 되자 김창(金敞)이 중서자(中庶子 즉 太子師)가 되어 은총을 받았으며 원제(元帝)가 즉위할 때 김당(金當)의 딸을 왕비로 맞아드렸다. 김일제전에는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모친인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아들이라 했으며 효원왕후전에는 효원왕후를 김당의 딸이라 하였다. 원제가 즉위한 후부터 김씨일문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김창(金敞)은 涉, 參, 饒,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제(成帝)때 모두 시중기도위(侍中騎都尉), 영삼보(領三輔), 호도위(胡越騎)가 되었다.섭(涉)에게 탕(湯), 융(融)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다 제조장대부(諸曹將大夫)가 되었으며 또 섭(涉)의 종부(從父) 흠(欽)의 아우 천(遷)이 상서령(尙書令)이 되니 이제 한(漢)나라 왕실(王室)은 金氏의 권력하(權力下)에 있게 되었다. 전한서(前漢書)에 왕망(王莽)의 군형제(群兄弟 즉 六寸)는 모두 장군(將軍) 겸 후(侯)가 되었는데 오직 망(莽)의 부친 만(蔓)은 일찍 사망하였다. 왕망의 백부(伯父) 대장군 봉(鳳)이 병으로 누우매 망(莽)이 극진히 시탕(侍湯)하니 봉鳳이 천거하여 망(莽)을 황문랑교위(荒門郞敎尉)로 삼았다. 왕망이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일하니 크게 발탁되어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38세의 망이 보정(輔政)을 맡았는데 얼마 후 원제(元帝)가 사망하고 성제(成帝)가 즉위하니 제(帝)의 생모 김씨(生母 金氏)를 황태후(皇太后)로 삼았다. 태후의 영향으로 자신의 친정형제 5人을 모두 후(候)로 봉(封)하였다. 평제(平帝)가 나이 9세에 등극하니 김태황후가 섭정하였다. 김태황후는 망(莽)에게 서정(庶政)을 맡겼으며 서기 3년에 망(莽)은 11세의 평제(平帝)에게 자기 딸을 주어 황후(皇后)로 삼았으나 4년만에 평제(平帝)가 사망하였다. 왕망은 선제의 현손중 가장 나이 어린 2세의 유영(劉영)을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섭 황제(攝 皇帝)가 되었으며 서기 9년에 쿠테타를 일으켜 신(新)나라를 건국(建國)하였다. 왕망(王莽)은 영특하여 대혁신정책을 단행하였다. 侯제도를 페지하고 토지를 국유화 하였으며 노예매매를 금하였고 평형물가제도를 실시하여 상인의 농간과 중간착취를 방지하였으며 화페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동북방민족의 소요와 흉년이 계속되어 이로 인한 도적떼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중에 유수(劉秀)의 군대가 낙양(洛陽)을 공격하니 왕망의 시종 공손취(侍從 空孫就)가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쳤다. 그 뒤 20여년간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들어 왔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 성봉. 출처 : http://www.kwangsankim.or.kr/bbs/zboard.php?id=a001&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04 동이족(스키타이.흉노:유목/부여.고구려:수렵.농업)
한반도와 만주의 동이족=천자국.대인국.군자국의 정통성을 갖는다!
만주 초원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서진하여 유라시아 지역으로 갈수록 동이전통과 혈통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서양인들이 스키타이라고 부르는 북방동이족의 고향도 본래는 북만주 초원지대다. 북방 동이족들이 점점 서진하여 백인들과 피를 섞여 투르크족을 형성하기도 한 것이다. 투르크족(터키=위그르)의 선조들은 동이족일 수 밖에 없다.
사진자료처럼 터키로 대변되는 투르크인들은 대부분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나, 흰얼굴색과 얼굴모양은 백인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즉 황인종과 백인종의 혼혈족이다. 고로 투르크족의 선조들도 동이족일 수 밖에 없으며, 민족통일과 만주를 회복하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가야 하는 역사적 사명이라 하겠다. 이들 투르크족들을 지배한 종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흉노족이다. [자료]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에 종속된 투르크족 투르크인들은 현재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서아시아, 유럽 일부에 살며 터키어를 주요 언어로 하는 민족이다. 기원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사서에는, 바이칼호 남쪽에 있으며 흉노에 종속된 집단으로서 ‘정령’으로 기술되어있다. 그후 ‘철륵’, ‘칙륵’ 등의 한자음을 단 집단의 존재가 나타난다. 6세기 경에는 돌궐족이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된 후 몽고고원의 셀렌가강 부근에서 터키계 위구르족이 대두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는다. 9세기에는 위구르족도 북방에서 남하한 키르기스족에 의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오아시스지대에서 정주생활을 한다. 위구르의 서방 이동에 따라 그 때까지도 서서히 진행되어오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가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아시아는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중앙아시아에는 상인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해져 많은 터키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도 진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된 동투르키스탄의 주요 주민들은 후후 카라 키타이, 몽골의 지배를 거친 위구르인이다. 중앙아시아의 벨라사군을 중심으로한 지역에는 투르크족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카라한왕조(840~1212)가 성립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터키화와 이슬람화는 더욱 결정적인 것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투르크인이 대규모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동한 것은 이슬람세계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중앙아시아는 ‘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투르크인은 그 활동의 장을 더더욱 서쪽으로 넓혀나갔다. 서방에 이주한 투르크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은 셀주크라는 수장에 의해 인솔되었던 일족이었다. 1055년 셀주크의 손자 투그릴이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에 쳐들어와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지배했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땅과 주민을 지배하기 위해서 칼리프의 권위를 빌어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아 이슬람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술탄이란 ‘권위를 지닌 자’라는 뜻으로 이후 투르크의 군주는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란,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아시아일대에 셀주크투르크제국이 성립되었다. 압바스왕조 칼리프는 술탄의 보호 아래 바그다드와 그 주변의 얼마 안되는 지역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에는 1071년 만지케르트전투에서 비잔틴군이 패배한 결과 중앙아시아로부터 많은 투르크계민족이 이주를 개시했다. 또 비잔틴군의 용병으로 참가한, 북쪽에서 흑해를 돌아온 것으로 추측되는 투르크인도 정주생활에 들어감으로써 피폐했던 아나톨리아는 급속히 투르크화되었다. 몽고의 서방원정으로 셀주크왕조가 쇠퇴하자 투르크인들의 지방세력은 자립하여 각지에 군주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비잔틴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오스만왕조가 기독교국가인 비잔틴제국으로의 영토확장 가능성을 이용하여 발칸반도로 영토를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이 힘을 배경으로 아나톨리아의 투르크 군주국을 병합한 오스만투르크는 한때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단절되기도 했지만 다시 부흥하였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1453) 이어 오스만투르크는 마물루크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칼리프의 지위까지 손에 넣고(술탄-칼리프제의 성립)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완성하였다. 그후 이슬람세계는 16세기에 들어 이란 지방의 시아파 사파비조(1501~1732)와,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가 인도에 건국한 무굴제국(1526~1856), 이스탄불의 오스만제국(1281~1924)으로 크게 3분되었다. 슐레이만 1세(재위 1520~66) 치하에 극성기에 달한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3대륙에 걸친 영토를 확보했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빈까지 육박하였다. (1529) 또한 국내에서는 군사적 봉건제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법류. 학예. 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minhamsa/8683/138 [고고학 자료]흉노족 김씨왕족의 무덤 황남대총(98호 고분)
대릉원 고분군에서 표주박처럼 보이는 능이 황남대총이다. 신라시대 고분가운데에서 규모가 제일 크다. 동서길이 80m 남북길이 120m 남분의 높이 23m (아파트 8층높이) 북분의 높이 22m이다.
1973년~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이 발굴 및 조사한 후 ‘황남대총’으로 명명하였으며 현재는 외형이 복원되어있다. 남분이 먼저 축조되었고 얼마 후 북분을 남분에 연결시켜 축조하여 표형분의 형태가 된 것이며 총 24900여점이 출토되었다. ㅇ.남분 남분에서는 60세전후로 판단되는 남자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금동관, 금허리띠, 금으로 된 장식과 칼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금동제의 말안장에는 앞뒤로 새김을 하고 비단벌레의 날개를 붙였는데 보랏빛이 어우러져 호화로운 느낌을 준다. ㅇ.남분의 출토유물
유리제 병 및 배(국보 제 193호 , 98호 남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병 1점과 잔 3점의 유리제품이다.
병은 높이 25㎝, 배지름 9.5㎝이고, 잔① 높이 12.5㎝, 아가리 지름 10㎝ 잔② 높이 8㎝, 아가리 지름 10.5㎝ 잔③ 높이 10.5㎝, 아가리 지름 9.5㎝의 크기를 하고 있다. 병은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타원형의 계란 모양이다. 물을 따르기 편하게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좁게 오므렸다.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용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청색 줄이 있고, 아가리에는 약간 굵은 선을 돌렸고, 손잡이에는 굵은 청색 유리를 ㄱ자로 붙였다. 손잡이에는 금실이 감겨져 있었는데 이는 무덤에 넣기 전에 이미 손상되어 수리를 한 듯 보인다. 잔①은 병과 같이 연녹색 유리를 사용했고, 위는 넓고 밑은 좁아진 컵 모양을 하고 있다. 아가리 주위는 속이 빈 관(管)모양으로 돌리고, 그 위에 청색 유리띠를 한 줄 둘렀다. 몸체의 윗쪽에는 청색 유리로 물결무늬를 두르고, 밑쪽에는 격자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잔②는 색은 연녹색이고 아가리가 넓다. 아가리 주위는 약간 도톰하게 돌기가 있으며, 밑면 가운데 부분이 약간 들어가 있다. 잔③ 역시 연녹색이고 아가리가 넓은 원통형이다. 아가리 주위는 관(管) 모양이고 위와 아래에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다. 모두 파손이 심한 상태로 발굴되었으나 다행히 원형을 알아 볼 수 있게 복원되었다. 병과 잔①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출토되어 아마 세트를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리의 질과 그릇의 형태 색깔로 미루어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며, 그 당시 서역과의 문화 교류를 알게 해 주는 자료가 된다. 금제경식(국보제 194호) 98호 남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길이 33.2㎝의 금 목걸이이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2개의 봉분이 표주박 형태로 붙어 있는데, 남쪽 무덤에서 사람의 목에 걸린 채로 널(관) 안에서 발견되었다.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 사슬 4줄과 속이 빈 금 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굽은 옥을 달았다. 경주지역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굽은 옥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다. 은제경갑(보물제632호) 98호남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정강이 가리개(경갑)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정강이 가리개는 남쪽 무덤 널(관) 밖 머리쪽의 껴묻거리 구덩이(부장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길이 35㎝의 무릎과 정강이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의 일부이다.
무릎에 닿는 부분은 넓고 둥근 판 형태로, 중간쯤부터 좁아져 아래로 내려오며, 중앙에 시계추(錘)같은 돌출된 선이 있다. 전체적으로 안으로 휘어지게 만들었다. 하단부는 안으로 휘어진 은판을 경첩으로 연결하여 닫으면, 정강이를 보호하게 되고 끝에 3개의 고리가 있어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다.
천마총 출토 금동제 정강이 가리개가 출토된 적은 있으나, 은제 정강이 가리개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중요한 유물이다. 은관(보물제631호) 98호남분 머리띠 위의 장식은 3개의 가지가 있는 형식으로 신라시대 관모(冠帽)에서는 보지 못하던 특이한 양식이다. 중앙가지는 위에 돌기가 있고, 활 모양으로 휘어지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마름모 형태의 은판을 붙였다. 좌우에는 반달형 은판을 붙이고, 바깥쪽을 일정한 폭으로 오려낸 다음 하나하나 꼬아서 새털 모양을 만들었다. 새털 모양의 가지는 신라 금관 형식에는 없었던 것으로, 의성 탑리 무덤에서 이와 유사한 관모가 발견되나 경주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된다.
전면에 작은 원형 장식을 달았으나 가운데 금판 밑의 관(冠)에 꽂게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다. 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점을 찍어 처리하였다. 가운데 금판은 세로 중심선에서 안으로 약간 접은 상태여서, 밑의 뾰족한 부분을 무엇인가에 꽂았으리라 생각되지만, 평소에 썼던 관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허리띠의 좌우 끝에는 서로 연결할 수 있는 띠고리(교구)가 달려 있다.
이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출토될 당시 상태가 아주 좋아서, 착용법과 띠드리개의 배치순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팔찌는 지름 7.5㎝ 내외로, 북쪽 무덤 덧널(목곽) 안에서 몸에 착용한 채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가 발견되었다. 좌·우 5개는 금막대기를 구부려서 만들어 장식이 없는 간단한 모양이다. 왼쪽 팔에 있던 1개는 길다란 금판을 동그랗게 말고, 그 위에 금판을 덧 대어 세공하여 남색과 청색의 옥으로 화사하게 꾸몄다.
반지의 지름 1.8㎝로 모두 19개가 널(관)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는 손에 낀 채로 발견되었다. 두 가지 문양이 보이는데 하나는 가운데가 마름모꼴로 된 것이고, 다른것은 중앙에 격자문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당시의 장식품의 문양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닥 안 쪽 중앙에도 꽃무늬 안에 봉황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무늬의 표현 형식과 동물의 형상은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장식용 신발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무늬 자체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구리 거울과 연관이 있으나, 그 분명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높이 10㎝, 주둥이 지름 10㎝, 무게 169g의 금제 굽다리 접시는 북쪽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토기 굽다리 접시의 형식을 따라 반구형 몸통 밑에 나팔형 굽다리를 붙인 전형적인 양식이지만, 장식이 가해지고, 금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실용품이라기 보다는 껴묻거리(부장품)로 제작된 듯하다.
아가리 부분은 밖으로 말아 붙였고, 나뭇잎 모양 장식 7개를 2개의 구멍을 통하여 금실로 꿰어 달았다. 굽다리는 작은 편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사각형 모양의 창을 어긋나게 뚫어서 장식하는 신라 굽다리 접시의 형식을 하고 있다.
찌그러진 부분이 많으나 발견된 경우가 드문 금제 굽다리 접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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